[교계] 오늘은 '사도'가 없다(고신) -> '사랑의 사도 손양원' 발언을 처벌할 수 있나?
성령에 대해, 사도에 대해, 방언에 대해 고신의 기독교보에서 이단 비판을 합니다.
70년대 고신 언론은 순복음식 초대교회 은사를 이단적이라고 비판했으나 지금 80년대 이후 고신은 아무 소리하지 않고 모두 그렇게 따라 하거나 봐 주고 있습니다. "사도"라는 표현은 오늘에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합니다. 그런데 고신은 자기들끼리 말할 때는 손양원 목사님을 사랑의 "사도"라는 표현을 남발합니다. 고신 신학자 3명을 동방박사라고 합니다. 성경의 억해요 이단입니다. 고신 신학자 3명이 한상동 목사님을 찾아 왔으니 한상동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인가? 자기들 말은 "말하자면" 이렇게 말하고, 타 교단이나 비판하고 싶은 이들의 말은 짜깁기에 거두절미하고 이단으로 오해하게 말을 재단하는 일이 많습니다. 다음 자료를 살펴 보셨으면. - 행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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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야드와 신사도운동
2013.08.21 10:27 입력
▲최병규 박사
최근 전국 교회들은 ‘바른신앙지키기 주일’을 지켰다.
연구소는 총회임원회의 요청에 의해 두 권의 팸플릿을 집필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다른 복음은 없다!’이다. 그런데 어느 성도가 그 팸플릿을 읽고 상담을 요청해 왔다. 물론 그는 자신의 이름이며 교회 이름, 심지어는 목회자의 이름까지도 밝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차분하게 얘기를 이어갔다. 담임목사의 신사도운동적인 성향과 사모의 다소 신비주의적인 모습 때문에 고민하던 내용을 토로했다.
어떤 이들은 손기철 장로에 대해 문의해 온다. 그가 치유집회 시에 성령님께 명령하듯이 “성령님~ 좀 더! 좀 더!”라고 주문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이냐는 것이다. 또 우리 주변에는 모두가 방언할 줄 알아야 한다고 외치는 이도 있고, 심지어는 방언을 따라하도록 연습시키는 이도 있다.
그런가하면 기도해 준다고 하면서 쓰러뜨리기를 일삼는 이들이 있고, 넘어지지 않고 있으면 억지로 밀어뜨리려는 이들까지도 있다.
어떤 성도는 어느 사역자(목사)로부터 예언기도를 받았는데, 그 예언들이 과거에는 맞는 것 같았는데 근래에 들어서는 맞지 않아 혼란에 빠졌노라고 하소연한다. 이처럼 현대교회에는 이런 영적 혼란이 점증하고 있다.
사실 영적인 삶이 풍요롭고 깊이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바람직한가! 기도 많이 하고 하나님의 뜻을 잘 헤아리려고 하는 이들은 얼마나 귀한가! 우리 자신이 더 많이 기도하지 못하는 것, 성령의 은혜와 충만하심을 받지 못하는 것이 부끄러운 일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 한국교회 안에는 우리가 받아들여서는 안 될 영적인 풍조들이 있다. 그렇게 불건전하고도 다양한 현상들을 다 포괄하는 용어를 발견하기는 힘들겠지만, 편의상 그것을 ‘빈야드적이며 신사도운동적인 현상들’이라고 해보자.
주지하다시피 빈야드운동은 존 윔버나 존 아노트같은 이들에 의해 주창됐다. 그들이 현대적 예언이 있을 수 있다는 사상을 받아들였고 신비로운 체험(금가루, 금치아, 쓰러짐, 거룩한 웃음 등)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했다.
그러한 빈야드사상을 공유하면서도 피터 왜그너(전, 풀러신학교 교수)는 현대에도 사도가 있고, 직통계시가 주어지며 특정지역에 특정 귀신이 존재한다고 하는 신사도개혁운동을 전하고 있다.
인간은 연약한 존재이다. 자신에게 질병이 찾아오거나 생활의 형편이 어려워져서 불투명해지게 될 때 그야말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한다. 미래를 알고 싶어 예언기도를 받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목회자들과 사역자들은 그들을 진정으로 세우고 도와주는 것은 하나님과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바른 지식을 제공해줘야 한다.
그런데 어떠한가? 실제로 많은 사역자들이 자신이 받았다고 하는 어떤 인상이나 느낌을 ‘하나님의 음성 혹은 말씀’이라고 강조해 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기도 응답에 대해 하나님께서 다양한 방법으로 느끼게 하실 수 있을 것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에게 개인적으로 주시는 응답이므로, 그것을 객관화시켜서 타인에게 제시하는 일이 없도록 조심해야 하겠다.
그것은 계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이라고 하는 차원이기도 하지만, 개인이 받았다고 하는 느낌 자체는 절대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을 객관화시켜서 상대방에게 제시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렇게 말씀해 드리라고 느낌을 주십니다’라는 식의 표현을 사용하지 말자. 차라리 겸손하게 ‘주님께서 저에게 이런 느낌을 주시는 것 같습니다’라고 표현하자.
우리는 성경 계시 외에 피터 왜그너와 같이 ‘메모지에 받아 적고 있을 때에 나는 마치 계시를 적고 있는 느낌이었다’라는 식의 말을 하지 말자. 기도해 주면서 성도들을 쓰러뜨리려고 하지 말자.
물론 오늘날에는 ‘사도’는 없다. 자신이 사도라고 말하지 말자. 사도는 사람이 세우는 것이 아니다. 바울 사도까지가 사도였다. 그가 디모데를 사도로 장립했다는 기록이 없다.
특히 선교단체들이 예사롭게 시행해왔던 지역귀신론에 근거한 영적 도해를 이제는 하지 말자. 지역귀신론은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와 상반된다.
전에는 분별력이 없어서 그러한 일들을 실습했다고 할지라도, 이제 한국교회는 빈야드적이며 신사도운동에 대한 충분한 식견이 있는 때이므로 그러한 일련의 시행을 자제하고 중단하자.
신앙을 가지고 살기 힘든 세상 속에서 평신도들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 개인과 가정의 역경, 고통 속에서 그들은 성경 중심으로 살려고 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목회자들과 모든 사역자들이 보다 건전한 신앙 지식 위에 서서 성경중심적이고도 건전한 신학적 기초 위에서 주의 양떼들을 잘 지도하고 안내해야 하겠다.
최병규 목사
? 총회유사기독교 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