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손문준 - 손양원, 손의원 집안
나의 큰아버지 손양원 목사님 [손동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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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증 & 영성의 글
2011.06.25 23:26
순례자(hlsai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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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큰아버지 손양원 목사님
손동아 목사(인왕교회 원로목사), 세이레평화금식기도회 기고문
저의 할아버지(손종일 장로)는 장남 손양원(호적이름 연준) 목사(애양원교회), 장녀 손봉년 장로(미국이름:남편 성 따라 김봉년. 미국 하와이 호노룰루 릴리하 한인교회 : 이승만 초대대통령이 독립운동 때 세운), 차남 손문준 목사(경남 하동읍교회. 경북 의성교회), 3남 손의원 목사(부산 영주교회. 부산 거성교회), 등 3남 1녀를 두셨습니다.
저는 손양원 목사 바로 아래동생 손문준 목사의 장남(서울.종로.인왕교회 원로목사)입니다. 큰아버지는 할아버지 내외와 사셨고 저희는 바로 옆집에 살았습니다.
저의 큰아버지는 1939년 7월 애양원(한센병원)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시던 중 1940년 9월 25일 신사참배 거부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광주형무소에 수감되셨습니다.
그 때 저희 집과 작은 집(모두 목사 되기 전)은 신사참배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습니다. 당시는 일본이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폭격한 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여 태평양전쟁이 벌어진 때였습니다.
2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44년 큰집 맏아들(동인.19세)에게 군대영장이 나왔습니다. 민간인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감옥에 가지만 전시에 군인이 신사참배를 거부하면 총살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큰집 온 가족이 흩어지기로 했습니다.
동인형은 남해에 숨고, 큰어머니는 막내 딸(동림)을 데리고 고향 함안군 칠원 장 부자집 식모로 들어가고, 동신(차남)형은 경남 하동군 옥종면 북방리 산속움막(애양원 음성한센병 환자들이 일본원장의 신사참배 강요를 피해 모여 사는)으로 숨고,
동희(장녀)누나와 동장(삼남)형은 큰아버지 친구이신 한정교 목사님이 원장으로 계시는 구포 애린원(고아원)에 들어가고 할아버지(할머니 돌아가심)는 중국 하얼빈 저희 집으로 오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매일 가정예배를 드릴 때마다 ‘우리 양원이 추운 겨울 얼어 죽지 않게 하시고, 굶어 죽지 않게 하시고, 병나지 않게 해 주옵소서!’ 하시며 울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편지가 올 때쯤 되면 몇 날 며칠을 밖에 나가 기다리시다가 우체부가 전해 준 큰아버지 편지를 받아 쥐고 부들부들 떠시며 ‘양원아! 양원아!’ 하시며 우셨습니다.
그 때 큰아버지께서 옥중에서 저희 집(중국 하얼삔)에 계신 할아버지께 보낸 편지 중 몇 구절을 소개하면,
‘아버님! 불효자 양원을 위하여 조금도 염려하지 마옵소서 한 덩어리 주먹밥, 한 잔의 소금국, 그 진미는 그야말로 천사의 떡 맛이옵니다.
아버님은 엄동설한 추위를 염려하시나 들에 백합화를 곱게 키우시고 공중의 새를 먹이시는 우리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이요 일하는 일꾼, 밥 안 먹이시겠습니까!
소자는 본래 양이 적은 사람이오니 이 적은 밥도 만족하옵고 또 키가 작은 사람이라 이 작은 이불이 내 발등을 덮었으니 이만하면 만족이외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겨울이 지나면 따뜻한 봄이 오는 것이오니 광명한 낮을 맞이하기 위하여 어두운 밤을 겪지 않을 수 없고 양춘가절을 위하여 엄동설한의 고생을 참고 견디지 않을 수 없겠지요.
고난은 참으로 복입니다. 꿀같이 달게 받으사이다. 참고 견디기만 하면 이보다 더 큰 복은 없는 복입니다.
불평이 많은 자는 천하를 얻어도 불평할 것이요 자족을 느끼는 자는 한 줌의 밥과 한 잔의 물에도 자족의 기쁨이 있으니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고 범사에 기뻐하며 항상 즐거워하사이다.’
그 후 저희는 8.15 광복 다음해인 1946년 중국 하얼빈에서 다렌항을 거쳐 한국으로 돌아와 마산에서 살았습니다.
그 때 큰아버지는 전국에 부흥집회를 다니시며 저희 집에 자주 들리셨습니다. 그 때마다 우리들에게 용돈도 주시며, 감옥에서 지내시던 얘기, 아버지는 중국에서 지내시던 얘기를 하시는 것을 많이 들었습니다.
저의 아버님께 들은 말씀 중, 큰아버지께서 출옥하신 직후 부산 어느 큰 교회 목사님 형제분이 큰아버지께 찾아오셔서 제안하시기를‘지금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에 속한 목사, 장로들은 대부분 신사참배 할 것을 총회에서 결의했을 뿐만 아니라,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기철 목사와 손양원 목사를 목사직에서 파면하고 제명하기로 결의했던 변절자들이니 신앙의 지조를 끝까지 지킨 옥중성도들이 힘을 모아 새로운 교단을 만들자’고 제안하셨다고 합니다.
그 때 큰아버지께서 말씀하시기를‘그 때 우리는 감옥에서 육신은 고달팠지만 마음은 얼마나 평안했습니까?
그러나 그분들은 육신은 편안했을지 모르지만 마음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리고 그분들이 모두 우리처럼 감옥에 있었다면 교회는 누가 돌봤겠습니까?’하시며 극구 만류하셨다고 합니다.
그 후 큰아버지는 두 아우 목사(저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에게 당부하시기를 ‘너희들은 절대 거기 가담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하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큰아버지는 그 날 이후부터 일제 때 감옥에서 고생한 얘기를 집안 식구와 형제들 외에는 아무에게도 일절 하시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두 분 형제 목사님들은 그 후 뜻을 같이하는 분들과 함께 부산지역을 중심한 새로운 보수교단을 만들어 오늘에 전국적인 큰 교단이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여순 반란사건이 일어났던 1948년 여름방학 때 동인형이 미국유학을 가게 되었다며 동생 동신 형과 함께 마산 저희 집에 다니러 왔습니다.
그 때 동인형은 일제 때 남해에 숨어 지내던 얘기, 동신 형은 북방리 통 공장에서 지내던 얘기, 우리는 할아버지와 중국에서 지내던 얘기를 하며 모처럼 즐거운 만남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해 10월 21일 여순 발란사건 때 동인형과 동신 형이 함께 순교함으로 그 때의 만남이 마지막 만남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 해 1950년 9월 28일 큰아버지는 용서와 사랑의 복음을 전하시다가 공산당에 의해 순교하셔서 지금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행복을 누리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큰아버지의 삶은 한 마디로 예수님의 사랑과 진실의 바이너리 코드(binary code)의 삶이셨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젊은이들을 보며 ‘나도 저랬었지’하며 저의 과거를 봅니다. 저는 큰아버지를 보며 ‘나도 저처럼 살아야지’하며 저의 미래를 꿈꿉니다.
저는 큰아버지를 통해서 젊은이들에게 미래의 꿈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저는 큰아버지처럼 후배들에게 불타는 저녁노을 같은 꿈이 되고 싶습니다.
오! 나의 큰아버지! 손양원 목사님!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주님! 저도 큰아버지처럼 주님만 사모하며 살게 하소서!.*.
>> " 님이 쓰신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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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의원) - 서부교회 개척 목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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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회 교인은 아니지만 서부교회 초대 목회자여서 자료로 남겨 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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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름: 손의원
: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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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적: 경남 함안군 칠원면 구성리 685번지
: 본적: 부산시 동구 수정동 229-26
: 주소: 부산시 동래구 장전동 6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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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9년 12.14. 원적지에서 손종일 장로 김은수 집 3남1녀 중 3남으로 출생(본관. 밀양다원)
: 1913년 유아세례(호주선교사 맹호은)
: 1919년 4.3. 부친이 만세사건 칠원지방 주모자로 체포. 마산형무소 1년징역, 미결14개월
: 1924년 칠원보통학교 6년 졸업
: 1927년 경기도 수원 삼일학원 중등부 3년 졸업
: 1928년 경기도 수원군 재무계 취직
: 1931년 동 재무계 사퇴
: 1934년 경남 성경학원 입학
: 1934년 성경학원 졸업 후 양산 물금 최회종씨와 안점옥 집사의 장녀 최효순과 10.15.결혼
: 3남2녀
: 1934년 경남노회 전도사로 김해 대사리교회 개척
: 1936년 5.26. 모친 소천
: 1938년 평양 신학교 입학. 능라도 교회 전도사 시무
: 1941년 신학교 졸업후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 평양 남교리교회 위임
: 1945년 4.13. 부친 손 장로님이 망명지 만주 하루빈에서 소천
: 1947년 4월. 38선 넘어 월남
: 1948년 부산 서부교회 개척
: 1950년 9.28. 장형 손양원 목사님께서 여수군 율촌 주재소 근방 미평 과수원 근방에서
: 후퇴하는 공산당에게 총살 순교하심
: 1952년-54년 경동노회 묘량 건천교회 시무
: 1955년 물금 제일교회 개척
: 1956년 거성교회 위임
: 1960년 영주동 영주교회(榮主교회) 위임
: 1968년 부산 노회장 피선
: 1973년 영남신학교 이사
: 19789년 목사 정년 은퇴
: 1981년 설교집(말씀들고 40년)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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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서: "말씀들고 40년"
: 저자: 손의원 목사
: 내용: 설교집
: 발행: 새로출판사(박경택) - 부산시 중구 부평동 2가 24-4, 전화22-6856,25-1880
: 등록: 제카1-10호)
: 인쇄: 1981.4.10.
: 발행: 1981.4.15
: 정가: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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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추천사: 장기려
: 손의원 목사님을 제가 알게 된 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40여 년 전 평양에 계실 때 손목사님께서 담석증으로 수술을 받으시게 되어 제가 그 수술에 관여하게 된 바 있어서 목사님의 신앙에 대하여 가까이 모실 기회가 있었던 때부터이었다. 또 손 목사님은 제가 섬기는 부산 산정현교회에 오셔서 설교하신 일도 있고, 출초한 저를 목사님이 담임하신 교회에 불러 주셔서 성경 말씀을 전하게 하신 일도 있다.
: 목사님은 천성이 온유 겸손하시고 물욕이 전혀 없으신 성격의 소유자라고 저는 가까이에서 우러러보며 존경하여 마지 아니한다. 이 번에 설교집을 발간하시면서 저더러 두어 글자 소감을 적어라 하시므로 저는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되며먼저 축하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 목사님은 대인 관계에 있어서는 극히 온유, 겸손하시지마는 말씀을 들고 강단에 서게 되면 사자가 부르짖는 것같이 죄와 불의를 지적하는 데 몹시 강하시다.
: 그 것은 옛날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실 때 그 모습을 연상케 하신다. 즉 아모스가 말한 것 같이 "사자가 부르짖은즉 누가 두려워하지 않겠느냐,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신즉 누가 예언하지 않겠느냐(암2:8), 또는 예레미야가 동족의 죄를 붙안고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었던 그 때의 심정이 바로 목사님의 심정이다고 믿는다.
: 지금 연노하시지마는 애국, 애족의 마음은 불타고 있다. 내 동표의 불우한 처지를 바라보시면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 설교집을 내 놓는다고 생각된다.
: 친애하는 동포들이여! 이 설교집을 읽으시고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해 들이시기 바란다. 이 말씀을 받아 들여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되면, 우리 나라, 민족은 평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지마는 만일 반역하면 스스로 파멸될 것이다.
: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하여 우시면서 "오늘날이라도 이 도성의 사람들이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았을 터인데 저희들 눈에 숨기워졌다(눅19:42)"고 하시던 말씀이 생각이 나서 두렵다.
: 이 말씀이 성전을 숙청하시던 예수님의 권위를 나타낼 수 있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기왕 예수를 믿는 이들은 이 말씀에서 더욱 지혜와 영력을 얻어 주님을 증거하여 내 동포를 주님에게로 인도하는 데 무기로 사용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 이 책은 손목사님의 평생의 증거 곧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하나님과 성령의 증거를 담은 말씀이므로 이 글을 읽는 자와 전하는 자에게 복이 있을 것으로 믿으면서 본서의 발간을 중심으로 축하해 마지 아니한다.
: 1981.4.8. 부산 선정현교회
: 장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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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머릿말
: 1934년 25세에 전도사로 교역을 시작하여 41년 3월 평양신학을 졸업하고 동년 평양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1975년 부산노회에서 시무 사면하기까지 40여년을 말씀 들고 전한 것 중에서 우선 제1집 36편의 설교를 모았다.
: 제1집에 100편의 설교를 싣게 하려 했지만 시력과 체력에 부쳐 우선 36편을 내고 앞으로 2집 3집을 계속 출판할 예정이다. 원고 교정에 수고해주신 이화대학 임은숙양과 부산대학 김두리양의 노고에 감사한다.
: 더욱 나의 사랑하는 두 사위 김훈 임상영 집사에게 감사하는 바이다.
: 1975년
: 손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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