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김경례 - 56년 고신의 출판 중단. 언론인, 기독교운동 대표,...[6]
■ 기 / 획 / 특 / 집 - 역사의 현장 속으로 원로와의 대화 (15) / 김경래 장로와의 대화
원로와의 대화 ⑮ / 김경래 장로와의 대화
2012.12.06 16:41 입력
김경래 장로는 한국교회와 사회에 큰 영향을 준 고신의 어른이시다. 1928년 경남 통영에서 김상기와 하은혜의 1남 5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그는 1949년 차재선 전도사의 장녀 차은희와 혼인했다. 차재선 전도사는 일찍 하나님의 품으로 갔지만 손양원 목사와 이인재 목사는 김경래 장로와 차은희 권사의 가정을 돌보았다. 그는 중앙일보를 거쳐 경향신문의 편집장으로 있으면서 공정한 언론인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감당하였다. 언론계를 떠난 후에도 고신교회와 한국교회를 위해 많은 일을 감당했는데, 기독교보 주필,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협의회와 기드온협회에서의 활동이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애국가와 안익태’, ‘미국르포’, ‘사회악과 사교운동’ 등이 있다. 또 고(故) 차재선 전도사의 설교와 글을 모아 ‘하늘이냐 땅이냐’를 발간해 고신 정신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현재 김경래 장로는 한국교회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사무총장으로 봉사하고 있다.
■ 김흥식 연구원 / 고신역사연구소
■ 약력
?1928. 4. 3. 경남 통영 출생
?1946 진주사범학교(진주교대) 심상과
?1984 서울대 행정대학원 국가정책과정 수료
?2009 횃불트리니티신학대학원 명예박사
?1953 -1960 중앙일보, 세계일보 기자
?1960-1971 경향신문 정치부장, 외신부장, 편집부국장, 구미특파원
?1971-1975 경향신문 편집국장, 이사
?1972-현재 국제드온협회 서울캠프 회장, 전국회장, 국제이사, 대형교회 위원장
?1973-현 재 한국기독실업인회 상임부회장, 자문위원
?1974-1980 문화방송, 경향신문 기획, 연수실장, 이사
?1976-1980 한국매스컴선교회 창립 회장
?1978-1980 한국정경연구소 사무총장, 연구소장
?1978-1980 세계언론인협회 한국대표
?1983-2007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 사무총장
?1984-현재 유산남기지않기운동 발기인 대표
?1988-1989 대한예수교장로회(고신) 부총회장
?1989-현재 국민일보 논설고문, 운영이사
?1989-1994 한국기독교총연합회 사무총장
?1990-현재 연변·평양 과학기술대학 이사, 대학 발전위원장
?1990-현재 사랑의쌀나누기운동 발기·운영 부위원장
?1995-현재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재정위원장, 고문
?1997-2003 한국기독언론사연합 창립 총재
?1998-2000 2000년세계선교대회 평신도 위원장
?2003-현재 북한구원운동 공동회장, 상임고문
?2007-현재 한국기독교100주년기념재단 상임이사
김흥식 연구원 : 요즘 세대는 장로님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 장로님의 삶의 여정을 소개해 주시지요.
김경래 장로 : 저는 경남 통영출신입니다. 특히 외가가 통영에 있었는데, 한국교회 초기 통영지역 교회 설립에 도움을 주었습니다. 1901년 통영지역에는 호주 선교사 손안로 목사가 선교를 하였습니다. 당시 하강진 외조부님은 선교사와 다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선교사님의 온유한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아 예수를 믿게 되었다고 합니다. 선교사가 외조부님께 “형님, 형님”하면서 지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외조부는 세례를 받고 집 마당에 교회를 세웠는데, 바로 통영미수교회입니다. 그때가 1907년이니 백년이 넘었지요. 소래교회가 1884년부터 시작했으니, 미수교회도 한국 초대 장로교회입니다.
저의 모친은 하강진 외조부님의 셋째 딸 하은혜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태신앙으로 자랐지요.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통영에서 생활하다가 1940년대 진주사범학교에 들어가면서 통영을 떠났습니다. 대학을 마치고 교직에 3년간 일하던 중, 22세의 젊은 나이로 혼인하였지요. 그리고 6·25사변이 나서 학교를 그만두고 군에 갔습니다. 부산 피난시절, 부산일보를 시작으로 1959년에는 경향신문으로 옮겼지요. 당시 미국 통신원으로 파견 근무를 했습니다. 그리고 1960년 4.19혁명이 있기 전에 귀국하였습니다. 그 즈음에 보수주의 신학자이고, 메이첸의 제자인 칼 메킨타이어가 한국에 와서 순회 집회를 하였는데, 저는 반공 강연을 위해 전국을 돌아 다녔습니다. 1980년도 전두환 대통령 시절, 경향신문은 언론통폐합의 대상이었습니다. 정권이 자신들에게 불편한 글을 쓰는 사람들을 정리한 것이지요. 1970년부터 경향신문의 편집국장을 맡아왔던 저도 이때 해직되었습니다. 경향신문은 1975년도에 문화방송과 합쳐지면서 저는 정경연구소 소장으로 일해 왔는데, 신군부 세력에 잘 보이지 못한 것입니다.
언론에서 물러난 후, 돈을 벌어보려고 했습니다. 미국서 알게 된 찰스 콜슨. 이분은 닉슨의 보좌관으로 워터게이트 사건에 연루되어 교도소를 다녀온 후, 결심한 바 있어 교도소선교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습니다. 이분이 집회차 한국에 왔을 때, 저에게 미국 공화당을 후원하는 큰 기업의 한국지점을 맡아보겠냐고 제안했습니다. 그가 소개해 준 단열재 사업과 던킨 도너츠를 운영하기로 하고 공장을 크게 지었습니다. 편집국장 출신이라 정계 인물들도 도와주었지요.
공장 건립이 끝나갈 즈음, 한경직 목사님이 찾아오셨습니다. 1982년 12월이었습니다. 한국교회가 100년이 되어 기념사업을 하려고 하니 사무국장이 되어 달라는 겁니다. 단열재와 빵으로 돈을 좀 벌려고 했는데 말입니다. 당시 기독교 사업의 임기가 대략 1-2년 정도인 것을 감안하여, 한경직 목사님이 계실 동안만 일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한 목사님이 16년을 일하셨던 것입니다. 저는 한 목사님과 약속 때문에 사업을 정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는 통영에서 출마하라는 공천장을 받았습니다. 한 목사님께 보여주니 “이 사람아, 나와 함께 일하기로 약속하지 않았는가”하십니다. 그래서 “알겠습니다”하고 공천장도 반납했어야 했지요. 100주년기념사업을 시작할 때에 7명의 사무국장이 있었고, 저는 섭외, 기획, 홍보 담당 국장이었습니다. 그렇게 사업을 꾸려가다 30년이 된 지금, 저 홀로 남아서 일하고 있습니다. 현재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의 일은 시설물의 사후관리입니다. 인천의 100주년기념탑, 선교기념관, 순교자기념관, 100주년기념관 등이 있지요.
김 연구원 : 장로님께서 경향신문에 계실 때, 한상동 목사님을 인터뷰 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아직도 제목이 기억에 남습니다. ‘청춘은 아름다워라’라고 쓴 기사입니다.
김 장로 : 한상동 목사님은 일제의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옥고를 치룬 출옥성도입니다. 평범한 목사가 아닙니다. 부산의 초량교회와 삼일교회에서 사역하신 한상동 목사님은 신앙의 정통성과 보수성을 지키신 분이시지요. 신앙을 지키신, 목사 중에 목사이십니다. 한국교회에는 한 목사님과 같은 분이 많이 나와야겠다는 점을 부각시켰습니다. 한경직 목사님은 한상동 목사님을 초청해서 영락교회에서 설교하게 하였는데, 이 점은 한상동 목사님은 고신의 목사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어른이라는 점을 잘 나타냅니다. 만약 한상동 목사님이 서울에 계셨다면, 결코 한경직 목사님에 뒤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기억하기로 한상동 목사님은 겉모습은 부드럽고, 어린아이 같지만 그 속에는 강철 같은 신념, 소신, 신앙이 박혀 있어서 절대 흔들리지 않는 신앙인입니다. 저는 이 어른을 모시고 고신과 같은 신앙을 가진 교인들을 찾아 전라도 지방으로 2주일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한 목사님은 새벽마다 일찍 일어나셔서 기도하고 말씀을 보았습니다. 참으로 철저한 분이셨지요. 그분은 누구와도 담을 쌓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농담도 참 잘하셨고요. 마음에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김 연구원 : 지금 세대들에게 차재선 전도사님을 소개해 주시지요.
김 장로 : 차재선 전도사님은 저의 장인어른이신데 이인재, 손양원, 차재선 세 사람이 신앙의 동지들이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신사불참배운동을 하셨지요. 이인재 목사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날은 이 세분이 모여서 약속을 하셨답니다. 누군가 한 명이 붙잡혀 가면 남은 사람이 그의 가족을 돌봐주기로 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뜨겁게 사셨던 차재선 전도사님은 1902년 부산 동래에서 태어나셔서 울산에서 교편생활을 하시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전도사로 헌신하면서 평양신학교에 갈 준비를 하던 중 1933년 10월 33살의 젊은 나이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지요. 그 후에 손양원, 이인재 목사님은 저희 가정에 오셔서 아버지가 되어 주셨습니다. 가족을 돌보시고 기도해주셨지요. 약속을 지킨 것이지요. 그 분들이 돌아가실 때까지, 몇 십 년을 한결같이 하신 것입니다.
후에 저는 차재선 전도사님의 글이 성결교의 기관지인 ‘활천’에 많이 실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활천에 그의 설교와 글이 많이 있었습니다. 모두 복사해서 현대어로 고쳐 낸 것이 1985년도 출간된 ‘하늘이냐 땅이냐’입니다. 사람들은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이 분을 몰랐습니다. 80년이 되어가는 지금 읽어보아도 은혜가 넘칩니다.
김 연구원 : 장로님이 쓰셨던 ‘사회악과 이교운동’이라는 책은 한국교회 최초의 이단연구이지요.
김 장로 : 박태선 교주가 자신이 손 씻은 물을 성수(聖水)라며 나누어 주었습니다. 병을 고친다고 하니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지요. 이런 샤머니즘적이고 비본질적인 운동을 하는 박태선과 문선명을 추적해보기로 했습니다. 문선명은 혼음파였습니다. 이런 점은 매스컴에서도 다루었습니다. 이단, 사이비 행위를 사회정의 차원에서 노출시켜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래서 기사를 쓰기 시작했지요. 주간신문에 이단에 대해서 연재했던 것을 근거로 ‘사회악과 사교운동’을 발간했습니다. 이 책은 우리나라 최초의 이단연구서이지요. 이 책을 열심히 팔아준 분이 미국에 계신 박재영 목사님입니다. 교회에서, 학교에서 심지어 기차역에서도 팔아주었지요. 이 책은 국립도서관과 고신대학교에 있습니다. 이 책이 나올 당시 목사, 신학생이 많이 읽었습니다. 이 책을 접한 사람들은 벌써 7-80세 정도 되었을 겁니다.
김 연구원 : 기독교보 주필도 맡으셨던 것으로 압니다. 1956년, 기독교보가 경제 사정으로 중단된 이야기를 해주시지요?
김 장로 : 기독교보 34호를 발간하고 총회에서 후원이 안 되었습니다. 이것이 주된 이유입니다. 그리고 당시 교회들의 지지가 약했어요. 언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입니다. 또한 당시 고신에는 소위 한상동파와 송상석파가 있었습니다. 이 두 산맥이 갈라져서 대립했습니다. 그러다가 기독교보의 논설 문제로 시비가 있었습니다. 결국 기독교보가 피해를 본 것입니다. 이런 복합적인 이유로 기독교보 발간이 중단되게 됩니다.
김 연구원 : 기독교보 초기 재정은 어떻게 충당했습니까?
김 장로 : 개교회가 신문을 사고 광고도 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기독교보를 보고, 사업가인 교인은 신문 광고에 관심을 가졌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당시 신문이 중요하다는 인식이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몇 명의 개인의 도움으로 꾸려갔습니다. 그 중에 한 분이 서울중앙교회의 현호택 장로님이십니다. 이분은 산업은행 이사로 있었는데 직접 후원하시기도 하고, 기업체의 인사를 많이 소개해 주어 광고 수입을 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김 연구원 : 장로님은 한경직 목사님과 오랫동안 일하셨는데, 100주년기념사업회에서 가장 크게 한 일이라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김 장로 : 제일 큰 행사는 1984년 8월 15-19일,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던 100주년선교대회입니다. 대회기간 중 국내와 해외에서 350-400만 명이 참가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될 수 있었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등 2-30명의 강사 목사님들의 말씀과 다양한 식순으로 진행된 선교회대회의 참석자들은 바닥에 앉아서 말씀을 듣고 찬송하였습니다. 강사 목사님들은 한국교회가 지난 백년간 복음을 받아왔는데, 앞으로 백년은 주는 교회가 되자고 하였습니다. 특히 마지막 날인 19일, 빌리 그래함 목사님을 모시고 100만 명이 모였는데 하늘에는 무지개가 떴습니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말입니다. 사람들은 선교대회를 통해 한국이 선교대국이 될 것이라는 비전을 확인하게 되었지요. 그 해, 170명의 선교사를 파송한 것을 시작으로 100주년 선교대회는 한국교회가 현재, 근 200여국에 2만 5천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는데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김 연구원 : 용인의 순교자기념관은 어떻게 건립하게 되셨습니까?
김 장로 : 순교자기념관은 영락교회의 정이숙 권사님이 경기도 용인에 약 11만평의 땅을 주셔서 건립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기념관이 착공되기까지 많은 진통이 있었습니다. 100주년기념사업협의회에서 땅을 받은 후, 순교자기념관을 짓자는 의견과 문화관을 짓자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실행위의 의견이 양분된 것입니다. 순교자라는 말만 나와도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신사참배 경력이 있는 통합, 감리교, 기장 교단 인사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반대한 보수 계통의 고신, 합동의 인사는 순교자기념관을 짓자고 하였지요. 순교자의 피가 한국교회의 씨가 되었다는 논리였습니다. 그래서 결국 투표에 붙이기로 하였는데, 동표가 나왔지요. 하지만 사회를 맡았던 한경직 목사님이 순교자기념관에 한 표를 더하면서 결론이 나게 되었습니다. 역사적인 사건이지요.
김 연구원 : 당시 실행위에는 어떤 분들이 계셨나요?
김 장로 : 통합, 감리교, 기장 계통의 인사였던 강원용, 임인식, 김형태, 박치순, 오경린 등은 문화관을 짓자고 했습니다. 공개되지 않았던 이야기이지요. 순교자기념관은 유가족들과 협력하면서 건축되었습니다. 여러 사료들을 전시하였지요. 얼마나 큰 은혜가 되고 감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순교했구나!’ 조선말, 일제강점기, 한국전쟁에서 순교한 분들입니다. 앞으로 통일이 되면 북한의 순교자들도 많이 드러날 것입니다.
김 연구원 : 안익태 선생에 대한 책도 쓰셨지요?
김 장로 : 애국가는 작사자 미상입니다. 윤치호와 안창호에 대한 설이 있을 뿐이지요. 그리고 안익태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습니다. 제가 1965년 유럽을 여행하다가 제네바의 호텔에서 투숙하였는데, 안익태 선생을 만났습니다. 안 선생님은 저를 보자마자 방으로 데려가서 아직 언론계에 있는지 물었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답하니 봉투에 들은 자료들을 주면서 한국에 돌아가서 자신을 변호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다른 자료의 소재도 일러주셨지요. 안익태 선생은 세계 여러 곳에서 인정받고 있었으나 정작 한국에서는 그를 잘 알지 못했지요. 저는 미국을 경유하여 한국으로 돌아 온 후, 얼마 안 되어 광화문을 지나고 있는데 고(故)안익태 추모음악회가 열렸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제가 여행하던 도중에 돌아가신 것이지요. 안 선생님이 주신 자료를 모두 모은 후, 그와 관련한 16개국의 외교부에 그와 관련된 자료를 주실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영국과 일본에서 온 자료를 포함하여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 선생님에 대해서 정리하게 된 것이 한권의 책이 되었습니다.
김 연구원 : 장로님은 어떻게 전두환 정권하에서 해직 언론인이 되셨습니까?
김 장로 : 1980년, SFC 경북지방대회의 초청강사로 갔습니다. 강의를 마치고 가는 중에 지프차가 멈춰 서더니 나를 잡아서 서빙고에 있던 보안부로 잡아갔습니다. 당시에 허삼수, 허화평, 허문도가 힘을 쓰던 때였습니다. 보안부에서 5박 6일을 있었지요. 대구 SFC 강연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권력을 잡은 절차에 대해서 비판한 일이 있었어요. 절차가 적법하지 못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거기 보안사 직원들이 있었던 겁니다. 이들은 강의 전체 맥락과 상관없이 비판적인 내용만 강조해서 보고했기에 제가 서빙고로 잡혀간 것이지요. 결국 긴 취조 끝에 사실을 확인하고는 방면되었습니다. 책임자였던 대령이 경례를 붙이며, 여비와 이발비를 주더군요. 그래서 언론계를 떠났는데, 후에 보상금을 받았습니다.
김 연구원 : 한국교회에 대한 바람이 있으시다면 무엇이신지요.
김 장로 : 한국교회는 에베소 교회와 같이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합니다. 처음 복음을 받았을 때, 그 첫사랑을 회복해야 하지요. 목사, 장로, 권사 등 모든 성도들이 반성하고 각성해야 합니다. 21세기의 신앙부흥운동이 일어나야지요. 한국교회는 오염된 수원지를 맑고 깨끗하게 만드는데 힘을 모아야 합니다. 그 수원지가 바로 신학교입니다. 또한 한국교회가 대형교회주의, 개교회주의를 청산하고 극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불안한 아시아 정세도 생각하면서 평화롭게 사는 것에 나서야 합니다. 한국, 중국, 일본의 신자들이 모여서 머리를 맞대고 기도하면서 평화로운 방안을 모색하였으면 좋겠습니다. 근래 사회에는 많은 다문화가정이 있는데, 교회가 어떻게 이들을 품고 살아갈 것이지 고민하는 것도 그 일환이겠지요. 언젠가 남북통일도 이뤄질 것입니다.
교회의 양적 부흥도 중요하지만 이 시대의 선지자적인 역할도 감당해야 합니다. 저는 한국의 많은 교단 인사들과 일했습니다. 그 가운데 신앙의 순수성을 잃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교단이 고신입니다. 우리나라 사회를 위해 열심을 내는 분도 많이 있지요. 기독실업인회 김창성 이사, 기드온협회 이우준 이사, 이만열, 손봉호 장로님 등이 좋은 예입니다. 그리고 총회와 교회가 힘을 모아서 고신의 귀한 신앙의 유산을 잘 간직해야 하지요. 그런 의미에서 고신역사기념관은 귀한 일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고신 교회가 한국교회를 이끄는 선두주자가 되어야 합니다.
김 연구원 : 평소에 좋아하시는 성경 본문은 무엇인가요?
김 장로 :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살전 5:17-18)”입니다.
김 연구원 : 귀한 시간 내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