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기독교보 2012년 올해의 인물 - 신원하 '자살해도 천국'
“신자들이 살 희망이 없는 상황에도 하나님은 그 곳에 함께 계십니다”
올해의 인물 - 고려신학대학원 신원하 교수(기독교윤리학)
2012.12.30 22:50 입력
본보에서는 그 동안 ‘자살’ 문제에 대해 대안을 제시해 온 고려신학대학원(신대원) 신원하 교수(기독교윤리학)를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습니다. 신 교수는 학술대회와 신대원 신학포럼 등에서 ‘자살’과 관련, “자살은 심각한 죄이다”, “자살하면 지옥 간다는 통설은 설득력이 없다”고 지적해왔습니다. 이에 신 교수로부터 자살을 어떻게 바라보며 예방할 수 있을지 그 방안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신원하 교수(고려신학대학원)
△ 우리나라 자살의 현실은 어떤가요?
=2012년 현재 우리 국민 10명 중 1명은 자살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지난 12월 20일 통계청이 발표한 ‘2012년 사회조사 결과’가 언론에 공개한 사실입니다. 2년 전 통계에 따르면 2010년에 약 1만5566명이 자살로 스스로의 목숨을 끊었습니다. 하루 평균 42.6명이 자살한 셈입니다. 10~30대 사망 원인의 1위가 자살이며, 4,50대가 2위입니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경제개발협력기구) 국가 가운데서 1위이며, 미국의 3배입니다. 자살의 이유로는 ‘경제적 어려움’, ‘가정불화’, ‘질병’, ‘외로움’이 주된 요인입니다. 청소년의 경우에는 ‘학교성적과 진학 문제’가 선두로 꼽힙니다.
△ 자살에 대해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으며 그 특징은 무엇인지요?
=성경에 나오는 자살자는 아비멜렉(삿 9:52~54), 삼손(삿 16:23~28), 사울(삼상 31:1~6; 대상 10:13~4), 아히도벨 (삼하 17:23), 시므리(왕상 16:18), 그리고 신약의 가룟 유다(마 27:3~10; 행 1:16~18)입니다. 여섯 명의 자살 기록들을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으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성경은 자살한 이들에 대해 어느 곳에서도 동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삼손을 제외한 자살들은 거의 부정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아비멜렉, 사울의 죽음은 그들의 범죄에 대해 하나님이 치신 결과로 말하고 있고, 아히도벨과 시므리는 다 “제 주인을 반역한”(왕하 9:31) 인물로 취급되었으며, 가룟 유다는 차라리 “나지 않았으면 좋은 사람”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살을 서술한 기사들은 그들의 자살 행위 자체 즉 죽음의 방식에 대해서는 판단하거나 평가해 놓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신학자들은 이것을 “흥미로운 침묵”이라고 표현하곤 하는데요, 이 본문들을 살펴보면 실제로 어떠한 가치 판단을 명시적으로 내려놓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사울의 경우, 그의 죽음이 죄 때문에 하나님이 치신 결과라고 다른 부분에서 주석을 붙여 놓기는 했지만, 그것조차도 자살이라는 죽음의 형태와 어떤 인과 관계가 있다고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사무엘하 1장의 본문은 사울이 이런 죽음에도 불구하고, 다윗이 사울에 대한 깊은 애도를 한 내용과 조사를 길게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아히도벨의 경우도 그가 아비의 묘에 묻혔다는 기록을 남김으로써, 당시 사람들이 자살로 생을 마감한 그를 저주했거나 그 죽음을 수치스럽게 처리하지 않았다는 해석을 가능하게 해 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 거의 모든 자살이 인생의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을 때 행해졌던 극단적인 반응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울과 시므리는 적의 손에 죽게 된 경우에, 아비멜렉은 여인에게 부상당해 죽게 될 위기에서, 아히도벨은 자신이 거부당했다는 섭섭함과 위기감의 상태에서 나온 극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자살에 대한 오해도 있는데 그 내용의 핵심은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면 결코 자살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꼭 그렇지는 않습니다. 사람들은 환경적으로, 정서적으로 견디기 힘든 위기의 상황에 맞닥뜨려졌을 때 그 위기를 헤쳐 나갈 힘이 없고 삶의 의욕을 잃게 되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때로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일부는 실행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성경이 보여준 바 있고, 또 많은 정신의학자들이 사례 분석을 통해 이런 연구결과를 제시해 놓고 있습니다.
△교회에 엄연히 자살자들이 있고 또 그 유가족들이 다니고 있는데요. 교회는 어떻게 이 유가족들에 대해 배려하고 목회해 가야 할까요?
유가족은 어떤 의미에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족들은 극심한 죄책감, 상실감, 그리고 수치감을 갖게 됩니다. 이 일을 당하면 우선 이 현실을 부정하거나 또 회피하려고 합니다. 그 다음엔 겨우 이것을 대면하며 슬퍼하고, 때론 분노하거나, 몹시 우울해하고, 절망하는 단계로 나갑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이런 과정을 겪고 난 뒤 조금씩 현실을 인정하고 일상생활과 생업으로 복귀하는 단계입니다. 이런 힘든 후유증을 앓게 되는 유가족에 대해 목회자들과 교회는 좀 더 세심하게 배려하고 돌보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첫째로 유족들에게 어떤 교리적 가르침이나 권면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마음을 함께하고 물리적으로 시간을 함께 나누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는 자와 함께 울라”(롬 14:15)는 바울의 권고대로 자살 건에 대해 정죄하지 말고 슬픔과 고통에 힘들어하는 남겨진 이들과 함께 아파하고 울어주어야 합니다. 죽은 사람은 이미 갔지만 남은 자들은 계속 고통을 받게 됩니다. ‘왜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느냐?’ ‘하나님은 이런 일이 일어날 때 그 곳에 계셨는가?’라는 식의 울분에 사로잡힙니다. 이 마음을 헤아리고 함께 아파해 주어야 합니다. 지속적으로 아픔을 같이 나누어 줌으로 유족들이 위로를 받고 그래서 목회자와 교인에게 정서적으로 가까워지고 결국 교회에 감사하게 되도록 만들어 가야할 것입니다.
△자살자의 장례 문제에 대해서 교회는 어떠해야 하는지요?
천주교회는 1500여 년 동안 자살을 대죄(mortal sin)로 보고 자살한 자의 장례를 교회가 치러주지 않다가, 20세기 하반기에 이르러 장례식을 거행했을 때 교회적이거나 사회적인 스캔들이 될 수 있을 그런 자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살자들의 장례를 허용하도록 교회법을 개정했습니다.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난 것이지요. 개신교회는 교단이 총회적인 차원에서 이에 대한 결의를 한 적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개 교회는 장례를 치러주는 것을 꺼려해 온 것이 주류였는데, 최근에는 이에 대해 교회가 전향적인 태도를 취해오고 있습니다.
일찍이 어거스틴은 장례식이란 기본적으로 유족들을 위한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장례식의 형식, 내용, 크기에 대해 크게 비중을 두지 않았고요. 그는 매장이든 아니든 그 장례 방식은 중요한 것은 아니나 장례식 자체를 존중했고, 이것은 유족들을 위해 행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교회가 유족들을 위해서 목회자가 장례를 치러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유족들이 쉬쉬하지 말고 장례 절차를 밟아나가도록 목회자는 그들을 독려하고 도와주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적지 않은 경우 유족들은 수치심 등으로 장례식을 치르지 않거나 약식화 하여 감추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상적 장례 절차에 따라 장례식을 하는 것이 유가족들에게 치유와 위로의 기능을 합니다. 장례 과정을 통해 유족들은 고인의 죽음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될 뿐만 아니라, 유족들이 마음이 하나가 되어 역경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서로에게 북돋아 줄 수 있게 되고, 그리고 형제, 친척들 상호 간에 있을 수 있는 섭섭함과 비난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살을 예방하기 위한 방안은 어떤 것이 있는지요?
생명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이고 동시에 위임하신 책임이기도 합니다. 우리 스스로 생명을 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간 피조물이 취하여 행사하는 크나큰 죄악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신자들은 정말 살 희망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상황에 처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 곳에 계시고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고 피할 길을 내어 주실 것이라는 믿음의 끈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동시에 신자들은 “자살하고 싶다”라는 말을 입 밖에 꺼내는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이것은 이미 심각한 중증 상태라고 판단하고 모든 것을 젖혀놓고 그들에게 달려가 돌보아야 합니다.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과 돌봄을 인식시키고, 따뜻한 손과 눈길로 그들의 손을 잡고 체온을 전하도록 더 애써야합니다. 언젠가는 이 고난이 끝날 것이라는 소망을 갖게 하고 또 주위에 관심을 갖고 있는 이웃과 성도가 있음을 인식하고 보도록 하고, 혼자 지내는 자리를 박차고 나아와 믿음의 공동체에서 함께 주님을 바라보고 살도록 부단히 권하고 돌보아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책임적인 존재임을 인식하고 생명이 있을 동안 자그마한 일에서조차 주의 영광을 위해 살고, 사랑하며 격려하며 더불어 살아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