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손봉호 - 고신(76년 연보궤 국내 최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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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손봉호 - 고신(76년 연보궤 국내 최초)


■ 기 / 획 / 특 / 집 - 역사의 현장 속으로 원로와의 대화 (20) / 손봉호 장로와의 대화
“성경대로 따르는 순수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2013.05.01 10:43 입력

▲손봉호 박사
?1938년 경북 포항 출생



?1961년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문학사)

?1965년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졸업(신학사)

?1972년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철학부 졸업(철학박사)

?1973-1983 한국 외국어대학교 교수

?1983-2003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사회교육과 교수

?2003-2004 한성학원 이사장

?2003-현재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2004-2008 동덕여자대학교 총장

?2008-현재 고신대학교 석좌교수



?1991-2002 기독교윤리실천운동 공동대표

?1994-1997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동대표

?1997-2001 시민운동협의회 공동대표



?1994- 현재 샘물 호스피스 이사장

?2000- 현재 국제학생회 이사장

?2005- 현재 대검 감찰위원회 위원장

?2011- 현재 나눔국민운동본부 이사장



학문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영어학에 관심을 가지고 서울대학교에서 영어영문학을 전공했지만 학문과 사회, 신앙과 실천에 대해 깊이 고민하면서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기독교교육,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기독교철학을 전공했다.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한국에 돌아와 대학에서 가르치게 된 그는 교회 설립을 돕고, 기독교 사회 운동을 조직했다.



김경래 장로와 함께 서울영동교회 설립을 도운 그는 성경적 진리에 따라 교회를 운영하기 위해 노력했다. 목회자가 청빙될 때까지 설교를 감당한 손 장로는 특히 교회의 직분과 헌금에 대해 재고하기도 했다. 그는 서울영동교회의 대형화를 반대하고 분립개척의 방법으로 한영교회(현, 빛소금교회), 일원동교회, 샘물교회, 다니엘교회 설립을 주도했다.



손봉호 장로는 기독교 사회운동에도 일찍부터 관심을 가지고 선도했는데, 1987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시작으로 직간접적으로 그가 설립한 사회 운동으로는 경제정의실천연합, 기독교사모임, 기독변호사모임, 낙태반대운동 등이 있으며, 교회 개혁을 위해 교회개혁실천연대와 성서한국을 조직하기도 했다.



■ 김흥식 목사 / 고신역사연구소 연구원



김흥식 연구원 : 손봉호 장로님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장로님의 삶을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지요.

손봉호 장로 : 저는 보수적인 유교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부친은 한학자이셨지요. 마을 청년들에게 한문을 가르치셨고, 제문을 도맡아 쓰셨습니다. 당시 한문을 읽고 쓰는 사람이 드문 시절이었기에 글을 아셨던 모친도 동네 사람들을 위해 대독, 대필을 많이 하셨지요. 사람들은 사돈지를 부탁하기 위해서 많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중학교 시절에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신성도라는 친구가 교회에 다니자고 해서 윤봉기 목사님이 시무하시던 경주교회에 나가게 된 것이지요. 당시에는 진지하게 교회를 다닌 것이 아니라, 습관적으로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러다가 고등학교 때 신앙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신앙의 위기를 맞은 겁니다. 철학과 과학으로 대변되는 이성, 지식의 한계에 벗어나서 믿음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느냐는 고민을 하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친구가 권한 우찌무라 간조의 ‘구안록’(求安錄)이란 책을 읽고 의심을 걷어낼 수 있었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간조는 함석헌, 장기려와 같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던 무교회주의자였습니다.



저는 경주교회에서 SFC 활동을 시작해서 경주지역 SFC와 전국위원장을 거치면서 봉사했습니다. 그리고 서울로 진학하면서 서울중앙교회에 출석하였습니다. 당시 교회를 담임하셨던 윤봉기 목사님은 교단의 지도자셨습니다. 불교의 영향이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엄격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셨지요. 당시 교단 산하의 교회는 모두 가난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윤 목사님은 저에게 신학을 공부하되, 교회로부터 사례 받을 생각은 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대학시절, 영문학보다는 영어학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대학원에서 영어학을 듣기도 했지요. 그러다가 인천여자중고등학교에서 임시교사로 몇 개월 가르치다 입대하였습니다. 저는 경비중대에 배치되었지요. 주로 배경이 없는 친구들이 배치되는 곳으로 주둔지가 없이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군수물자를 지키는 경계근무를 서는 부대였습니다. 그런데 군수물자를 지켜야 하는 부대가 도둑질을 가장 잘했습니다.



그곳에서 저는 영어만 공부해서는 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없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군에서 사회에 대한 의식이 생겼지요. 그리고 기독교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군에 있을 동안 미국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진학하라는 권유를 받고 학교에 편지를 썼습니다. ‘목회를 하지 않을 것인데, 기독교교육을 배울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지요. 학교에서는 좋다고 해서 한국에 있던 간하배(Harvie Conn) 선교사로 하여금 저의 입학시험을 치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시행되고 있던 유학생자격시험에 합격해서 입대 후, 1년 만에 전역하고 유학길에 오른 것입니다. 이 제도의 마지막 수혜자였지요.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공부하면서 교리적인 의구심이 자꾸 들었습니다. 주로 신론에 대한 의문이었지요. 그래서 철학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웨스트민스터신학교의 변증학 교수 반틸과 험증학을 가르치던 교수의 영향으로 화란자유대학교에 가게 되었지요. 2년간 미국의 기독교장학재단으로부터 학비를 지원받았습니다. 저는 철학뿐 아니라 현상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반 퍼슨을 지도교수로 하여 박사논문을 썼습니다. 반 퍼슨은 신학적으로는 진보적이고, 기독교철학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지도교수의 관점이 아닌 저의 관점을 가지고 논문을 썼지요.



네덜란드에서 전임강사를 하다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화란어과가 신설되면서 교수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철학을 부전공으로 강의했습니다. 그러다가 서울대학교로 옮겨 사회철학을 가르쳤습니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밀알복지재단,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를 조직하여 활동하게 되었지요. 서울대에 재직할 때에는 한성대 이사를 겸하기도 했습니다. 동덕여대에서 강경하게 추대하는 바람에 총장직을 맡기도 했지요. 저는 현재 보건복지부가 기금을 조성해서 설립했고, 지금은 법인기관인 나눔국민운동의 대표로 있습니다.



1973년 귀국한 이후, 서울중앙교회에 출석했습니다. 이만열 장로와 함께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을 위해서 야간학교를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이 장로님과 교장, 교감직을 번갈아가면서 맡았지요. 그러던 중에 김경래 장로님이 지식인층을 전도해야 한다고 하시며 신학을 공부한 저에게 교회개척을 제안했습니다.



그래서 1976년, 서울영동교회를 시작했지요. 개척 후, 6개월이 지나도 마땅한 후임자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에 사람들이 모이게 되자 예배당을 건축해야 했어요. 300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규모로 건축하자고 한 것이 지금 영동교회 건물입니다. 교인이 5-600명으로 되자, 교회가 너무 커졌다고 생각해 분립개척을 제안했습니다.



1980년 한영교회를 분립개척해, 잠실대로를 기준으로 건너편 교인들 모두 한영교회(현, 빛소금교회)로 가자고 한 것이지요. 한영교회는 우리나라 최초로 건물이 없는 교회, 학교강당을 예배당으로 빌려 쓰는 교회로 설립되었습니다. 저도 한영교회로 가서 개척을 도왔습니다. 한영교회는 다니엘교회도 분립개척하였는데, 장애인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교회로 시작했지요. 또 서울영동교회는 1993년 일원동교회, 1998년 샘물교회를 분립개척하였습니다.



김 연구원 : 분명한 비전을 갖고 교회 설립을 도우신 것이군요.

손 장로 : 제가 교회를 설립해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습니다. 교단에서는 반포가 개발되기 시작할 때, 교단 교회를 세워야겠다고 결의하고 저에게 총무직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목사님들께 편지를 썼지요. 그러던 중에 김경래 장로님이 저에게 교회 설립을 제안한 겁니다. 교회 설립을 도우시면서 제가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던 교회의 폐습들을 고치려고 했습니다. 장로 임직식의 축하금을 폐지하고, 임직하는 장로도 교회에 헌금하는 것도 막았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임직 받는 장로를 축하하게 한 것이죠. 그리고 당시 헌금바구니나 잠자리채처럼 생긴 헌금통을 돌렸는데, 그것도 입구에 두는 헌금함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최초로 시행했을 것입니다. 결혼식에서도 화환을 못하게 했습니다. 교회에서 나오는 식사도 간소화하였지요.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검소 절제 운동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영동교회는 우리나라 교회 개혁에 많은 공헌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김 연구원 : 장로님께서 교회 개척과 사회 운동에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주위에서는 많이 도와주셨는지요?

손 장로 : 초기에는 목사님들과 관계가 좋지 않았습니다. 안수 받지 않고 설교했기 때문이지요. 노회에서는 저의 설교 금지를 결의했습니다. 당시 집사였던 저는 노회원이 아니었기에 당회의 지도를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 후 박은조 목사님이 시무하게 되면서 저는 자연스럽게 물러나게 되었습니다.



고신대학교 김성수 총장님은 저에게 외국인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래서 고신대 석좌교수로 2년간 가르쳤습니다. 자주 갈 수 있는 거리는 아니었기 때문에 이틀을 유하면서 세 시간 연속강의를 했습니다. 지금도 석좌교수를 유지하고 있고, 부르시면 가서 특강하고 있습니다.



김 연구원 : 교수님께서는 기윤실과 같은 사회운동에도 앞장서서 활동하셨는데요. 그 동기는 무엇이신지요?

손 장로 : 제가 서울대에서 교수로 재직하고 있을 때, 학생들은 민주화운동을 많이 했습니다. 5공말 민주화 운동이 절정에 달했고 헌법 개정 문제로 나라가 시끄러웠습니다. 교회에서는 청년들에게 운동에 참가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학교에서는 운동에 가담하는 것이 대세였기 때문에 이들로 하여금 쉽게 그만두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스도인 대학생들은 그 사이에서 많이 고민하였지요. 그런 배경에서 학생들에게 퇴로를 제공해 주고자 몇몇 그리스도인 교수들이 1987년 봄에 구상하여 설립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 우리 사회에 대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은 크게 세 가지였습니다. 민주화 투쟁에 앞장서고 적극적으로 사회 평등을 위해 구조 개혁을 시도하는 신앙인들, 그와는 정반대의 입장에서 이원론적 성향을 가졌던 신앙인들, 그리고 그 가운데 있었던 다수 신앙인들입니다.



상당수의 청년 그리스도인들도 급진적인 투쟁에 나섰습니다만, 더욱 많은 온건적 그리스도인 청년들은 과격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신앙적으로 꺼려했습니다. 당시 운동에 가담하지 않는 것은 불의에 동참하는 것으로 인식되었지요. 이것은 비단 대학생들의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 교수들도 이 문제를 인식하는 중에 기윤실이 조직된 것입니다. 저뿐 아니라, 장기려, 이명수, 이만열, 최창근, 이세중, 김인수, 원호택 등 38명의 기독교인들이 발기인이 되어 1987년 12월에 설립하였지요.



김 연구원 : 그렇게 시작된 기윤실이 현재까지 활발하게 활동하게 되었군요. 발기한 때부터 현재까지 강조되는 이념과 덕목은 무엇인가요?

손 장로 : 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강조한 것은 ‘정직’과 ‘절제’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에서는 더욱 절제해야 합니다. 절제를 통해 물질이 사람을 지배할 수 없게 해야 하지요. 절제해야지 정직할 수 있습니다. 부정직한 이유도 절제하지 않은 것에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근래에 환경오염이 심각한데, 그것도 과소비로 인한 것입니다. 그리고 기윤실은 개혁주의 정신을 보여주었지요. 한국 기독교는 이원론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신앙과 삶을 따로 본 것이지요. 하지만 신앙과 삶을 분리할 수 없지요. 기윤실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고백하는 개혁주의 정신을 강조하여, 삶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기윤실이 태동했던 시기의 복잡한 사회문제에 대해 접근한 겁니다. 소위 정통신학이라고 자처하던 교단들은 사회문제에 대해 무심했습니다. 정통신학이 그런 것이 아니지요. 저는 화란 자유대학교에서 배운 개혁주의 정신을 기윤실을 통해 표현한 것입니다.



김 연구원 : ‘하나님의 절대주권’사상에 기초하여 기독교철학적인 이념을 강조한 ‘기독교 사회운동’이군요. 그렇다면 기윤실이 한국사회와 교회에서 갖는 중요성과 의의는 무엇일까요?

손 장로 : ‘기독교 사회운동’이라고 할 때,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개념은 ‘사회’입니다.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사회가 갖는 비중은 과거에 비해 급격하게 커졌습니다. 과거에는 자연환경에서 살았기 때문에 자연적인 조건이 삶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인이었습니다. 자연이 우리의 삶을 결정지었지요. 경제활동도 자연에서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현재, 자연환경보다는 사회환경이 우리의 삶을 결정하게 되었습니다. 의식주를 비롯해 우리의 신앙생활도 모두 사회 환경에 밀접하게 관련하여 있습니다. 사회는 인간들의 문제로 가득 차 있습니다. 자연과 비교할 수 없이 복잡하지요. 그 가운데 자리잡고 있는 것이 바로 ‘인간의 죄’입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현대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살기 위해서는 사회운동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세시대처럼 산속으로 들어가 담을 쌓고 수도원 생활을 하는 것도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사회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회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더 영향을 받습니다. 비판적인 시각이 없다면 사회의 분위기에 금세 젖어버리겠지요. 종교개혁이나 영국의 청교도운동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신앙운동은 사회변혁을 동반했지요. 사회를 바꾸어 나가는 것을 통해 우리도 바뀝니다. 사회는 그대로 두고 우리만 그 가운데서 경건하게 살겠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한국교회가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데, 전혀 영향을 주지 못한다면, 현대사회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린 아이들은 비판적인 시각이 적습니다. 그래서 주위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하지만 어린 아이들도 사춘기가 되면서 자신과 타인을 의식하게 됩니다. 이렇게 판단력과 비판력이 생기면서 주위의 영향을 적게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 장성해서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 영향력을 주게 되지요.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이 성숙하게 되면 자신과 타인을 비판적으로 볼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으로서 영향을 주게 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비판적인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살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식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회가 얼마나 심각한가,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사회로부터 얼마나 심각한 영향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암이 왜 위험합니까? 발병한 것을 모르기 때문에 제때에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사회에 빛과 소금으로서 영향을 끼치며, 사회를 바꾸어가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사회로부터 부정적인 영향을 적게 받습니다. 현대사회의 인간관계는 복잡한 이해 조건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정의를 세우기 위해서는 ‘공정함’이 강조돼야 합니다. 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괴롭히지 못하고, 부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지 못하게 해야 하지요. 그리스도인들이 이 사회를 정의롭게 만들어가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의 중요성은 교회가 이 사회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통로를 제시했다는 점에 있습니다. 기독교인 개인이 사회를 바꾸는 것은 막연하고 힘든 일입니다. 혼자서 바르게 살면 된다는 생각은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혼자서 싸우는 것은 효과적인 방법도 아니지요. 약해질 위험이 많습니다. 불의한 사회에서 혼자만 손해보고 살아가는 것은 힘든 일입니다. 모든 사람이 올바로 살아가야 하는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가는 것이 필요하지요. 그런 일을 감당하기 위해서 자발적인 기독인 조직인 필요합니다.



기윤실을 통해 복음주의 학생들이 사회에 관심을 표현하고 접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기윤실을 시작으로 하여 여러 기독교인 모임들이 생겼습니다. 교회개혁실천연대, 기독교사모임, 기독변호사모임, 낙태반대운동, 성서한국이 그 예입니다. 기윤실은 복음주의 사회운동을 선도하였지만, 모든 일을 감당하는 기관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김 연구원 : 교단과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을 들려주시지요.

손 장로 : 성경을 가감 없이 그대로 따르려고 하는 순수한 열정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에 배치된다면 과감하게 포기하고, 고쳐야 하지요.



현재 교회에는 인간적인 요소가 너무나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서는 세속적인 것을 얼마든지 포기할 수 있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예배당으로 대표되는 교회재산까지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정신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적으로 계산해서 이것저것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비본질적인 이벤트를 만들어내는 것은 성경의 방법과는 동떨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수단, 방법을 무시할 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기독교인들은 돈을 무시할 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돈을 무시하기만 해도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는 자연히 검소해질 것이고 돈 때문에 감정 상할 이유도 없어질 것입니다. 교회가 세속적인 것, 돈, 명예, 권력을 독약처럼 인식하기만하면 한국교회가 잃어버린 위상을 다시 회복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한국교회가 초기에 감당했던 중요한 사회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겠지요.



김 연구원 : 귀한 시간 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손 장로 :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