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7. 장례에 관하여
신자가 세상 떠났을 때 장례하는 방법 : 운명하고 24시간 지난 뒤에 시신을 놓고 예배드리고 나서는 김목사가 손수 시신에 수의를 입혔다. 수의는 돈을 드려 새로 할 것 없이 세상 떠난이가 평소 즐겨 입던 옷 중에서나, 혹은 수의나, 옷을 갈아 입히지 않고 그대로도 무방했다.
비싼 관을 쓸 것 없이 송판만(칠성판) 하나 깔고 김목사가 손수 묶었고, 처음엔 교인집 어린애가 죽으면 시신을 김목사가 친히 지고 가서 염리동 산에 묻었다.
후에는 리어카를 크게 개조해서 거기다 손수 실어 김목사 자기가 친히 상여 리어카를 끌고 장지로 갔다.
아현동에서 서대문 지나 화장터까지 15리나 되는 길을 끌고 갔다. 남들이 도저히 본받기 어려운 분이었다. 후에는 김현봉 목사가 바빠서 김조사나 다른 이들이 리어카 끄는 일을 대신하기도 했다.
젊은 교역자들에게 가르치기를, 교회가 커져서 장례가 자주 있고 교역자가 바쁠 때는 그런 일에 교역자가 너무 시간 빼앗기지 말고, 자기는 한 번 가서 예배를 드리고, 그 다음엔 다른 사람을 보내서 장례식 하게 해도 좋으나, 그 유가족들이 그렇게 하면 시험받을 염려있는 사람들이면, 목사는 시간 뺐긴다는 생각만 말고 가서 친히 예배 인도해주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김현봉 목사는 매장보다 화장이 좋다고 대개 화장을 시켰다. 임종할 때 곁에서 찬송가를 많이 부르게 하고 입관할 때는 김목사가 직접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처음엔 김목사가 직접 하든지, 그렇지 않으면 처음엔 김목사가 시작하고 "마지막으로 자손들이 하라." 시키고 목사는 곁에서 감독했다.
출상할 때와 매장할 때는 예배를 드렸으나, 화장할 때는 대체로 기도만 했다.
주로 화장을 많이 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비난을 받아 교회에 안 나오는 집사도 있었다. 화장을 반대하는 친척들은 그 유가족과 단교하는 일까지 있었다.
시신에 대한 위생처리는 철저하고 면밀하게 하여 시신의 입, 코 등 구멍을 솜으로 막고, 시신의 팔 다리를 주물러 팔도 앞으로 모아 맞잡게 하고, 비닐을 깔고 시신을 똑바로 편안히 누이고, 향은 두 대 이상은 피우지 못하게 하고, 조문객들이 와서 시신에 절하지 못하게 옆에 써 붙이고는 곁에 사람을 세워 "교회식으로 합니다."고 문상오는 사람에게마다 말하게 했다.
망인의 사진을 놓지 못하게 했다. 세상 떠난 사람을 위하여 비용을 많이 드리는 일은 남에게 칭찬 듣고자 하는 산 사람들의 허영심으로 보았다.
장의사는 쓰지 못하게 하고, 그 비용을 교회에 연보하게 하고, 상가집의 밤새는 것은 남전도회에서 두 차례로 나눠 초저녁과 새벽을 담당케 했다. 상가집의 봉사는 여전도회에서 맡아 하게 했다.
김현봉 목사 자신이 세상 떠났을 때는, 장례식 방법에 대하여 제자들 중에 의견 대립이 생겼다. 김목사의 시신을 관을 사다 입관하게 되니 일부 제자들 주장은 관에 넣는 것은 김현봉 목사 평소의 정신에 위반되는 일이라고 불평했다.
그만치 그를 따르는 교인들은 김현봉 목사 말이라면 철칙으로 여겼다. 김목사 시신도 리어카에 모시고 위에 포장을 쳐서 화장터로 끌고 가서 화장하고 말았다. 1200명의 대 교회의 목사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