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한국 장로교 약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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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한국 장로교 약사


자료실 | 한국 장로교 약사 2008.01.26 운영자 180



출처

http://hompy.onmam.com/Hompi/index.aspx?hpno=2998&Title=인천동부교회홈&targetURL=http://hompy.onmam.com/Hompi/HomBbsView.aspx?hompi_num=2998&module_seq=12&seq=24&findtype=0&findtext=&pageNo=1








1. 서 론



선교사가 이 땅에 들어와 선교 한지도 언 100년을 넘기고 있지만 우리의 신앙은 초대 교회 당시와는 너무 동떨어진 것을 느낀다. 이를 안타깝게 여겨 한국 교회의 자취를 고찰해 봄으로서 교회에 대한 이해를 한층 고조시켜 현실을 보다 더 잘 이해하고 발전시키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미력하나마 하나님의 은혜로 이 글을 내놓게 됐다.특히 유의할 점은 두 가지 관점으로 글을 서술했다.첫째는 장로교 중심의 교회사인 점과, 둘째는 말씀에 입각한 한국 기독교의 정통성과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계신측)의 형성성과 발전에 대한 서술인 점이다. 또한 기독교의 발전 과정에 따라서 크게 여명기, 정초기, 발전과 확대기, 수난기, 재건과 분열기, 안정기로 나누었다.




2. 여명기

한국인이 프로테스탄트와 최초로 접촉하기는 1627년 네델란드 사람인 벨테브레(JAN. JANSE WELTEVREE) 일행 세 사람이 한국 동해안에 상륙함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26년 후인 1653년에 제주도에 포착한 하멜 일행 역시 프로테스탄트였다. 최초로 우리 나라에 성경이 전해진 것은 1816년 영국인 함장 멕스웰과 바시훌 두 해군 대령에 의해서이다. 그들이 비인만 마량진 갈 곳에 들렸을 때에 문정을 위한 임무를 띠고서 접촉한 첨사 조 대복에게 성경을 전달하였다. 한국을 최초로 방문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는 칼 꾸즐라프 목사이었다. 그는 선교여행을 좋아했는데 1831년 중국 동해안 전역을 항해하면서 복음의 씨를 뿌렸고, 1832년에는 그 방향을 한국 서해안으로 돌려 7월 17일 백령도에 도달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또 남하하여 21일에는 군산만에 도달하였다. 그는 처음 만나는 한국인에 게 의약품을 나누어주고 병을 고쳐 줌으로써 전도에 착수하였고 홍주 목사의 서생으로 있던 양씨의 도움을 얻어 주기도문을 우리말로 번역하는데 성공하였다.이는 한국 성서 번역사상 특필할 만한 가치가 있다. 꾸즐라프 목사가 최후의 기도를 남기고 떠나간지 33년이 지나 다른 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한국 땅에 와서 순교의 피를 흘림으로서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새로운 기초를 설정하였다.그는 1866년 평양을 방문하였다가 대동강 상에서 자기의 목을 칼로 치는 한국인 병사에게 성경책을 주면서 목숨을 바친 최초의 프로테스탄트의 순교자 토마스 목사이다. 이때에 칼을 들어 토마스 목사의 목을 친 박춘권은 후일 회개하 여 1899년 세례를 받음으로 평양에서의 초대 교인이 되었다. 평양은 그 뒤에 한국의 예루살렘이 되었고 전국 교회의 중심이 되었다.

중국 만주의 우장과 봉천 등지는 한국 교회 수립을 위한 전초 기지가 되었다.우장은 한국교회 최초의 신자를 낳은 곳이고 최초의 한글 성경을 번역한 곳이며 최초의 한국인 전도자를 선택하여 파송한 곳이다. 이곳에서 스코틀렌드 일치 자유 교회의 존 로스 목사와 맥킨타 타이어 목사가 주재하며 선교 사업에 종사했는데 로스 목사는 만주 일대를 순회하는 전도 여행을 하면서 한국 선교의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는 고려문 의주로부터 120리 떨어진 중국 국 경 표시에서 한국인 청년 몇 사람을 대할 기회가 생겼다. 청년들은 평안북도 의주 사람으로 장사 핑계로 하여 선진 과학을 배우려고 청운의 뜻을 품고 이역을 헤매고 있었다. 이들에게 로스 목사는 열심히 설득하였고 한국말과 한국 역사를 가르쳐 주면 그 대가로 청년들에게 후한 월급을 주고 또 서양의 과학을 가르쳐 주겠다고 제의했다. 그러자 한국인 네 청년은 로스 목사를 따라 우장으로 갔고 로스 목사와 매킨타이어 목사는 한국인을 동행한 기쁨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그러나 이 두 목사는 서두르지 않고 반드시 생명의 말씀이 뿌리 박힐 날이 이를 것을 기대 하면서 꾸준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마음의 밭을 가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로스 목사를 따라 우장으로 간 한국 청년들은 백홍준, 이응찬, 이성하, 김진기 네 사람이었다. 갖은 고초 끝에 백홍준을 비롯한 네 청년은 우장으로 들어간지 3년째인 1876년에 마침내 세례를 받았다. 이들이야말로 한국 최초의 프로테스탄트가 된 것이다. 그후 이들은 로스 목사를 도와 한글 성서 번역사업에 착수하였다. 이러한 시기에 다른 청년 서 상륜이 우장으로 찾아와 번역사업에 가담하였으며 그는 출판을 위한 목활자를 파는 일에 힘을 더 기울였다. 1882년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간행되었고 1884년에도 마가복음 과 마태복음이 1887년에 가서는 완전한 신약의 전부가 “예수 성교 젼서” 란 이름으로 출판되어 그 기쁨이야말로 하늘에 닿을 듯 하였다. 최초 한글 성경 누가. 요한복음이 간행된 후 로스 목사는 이들 한국인들에게 성경책을 주어 국내에 들어가 선교케 했다. 이 중 백홍준과 서상륜의 전도 활동은 실로 놀랄만한 것이었다. 백홍준은 의주를 중심으로 위원과 강계 등지를 다니면서 전도했고 그 결과 반년도 못되어 10여명의 신자가 생겼고 서상륜 역시 고향 의주에세 열심히 전도하여 10여명의 친지들이 신자가 되었으며 그 후 황해도 솔내로 비밀리 몸을 피해 있으면서 기도와 전도를 쉬지 않고 열심히 하여 얼마 안가서는 이 솔내 마을 58세대 가운데 50 세대를 믿게 할 정도로 전도는 크게 성공하였다. 더불어 한국 최초의 교회라 할 수 있는 솔내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1884년)




3. 정초기




1884년 중국에서 일하던 미국 북 장로교회의 선교부 소속 의료 선교사 알렌의사가 그의 선교 지역을 변경하여 9월 20일 우리나 라에 와서 의료 선교 사업을 실시하였다. 여기서 그는 많은 한국인의 신임을 얻게 되었으며 이듬해 2월 25일에는 광혜원의 개설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인 1885년 4월 5일에 알렌이 개척한 그길을 밟고 미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 목사와 미국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라 목사가 인천에 상륙하였다. 언더우드 목사는 처음 얼마동안 목사라는 신분을 밝히지 않고 알렌이 세운 광혜원 강사로 일하였다.그는 한국어를 배워서 말을 좀 할 수 있게되자 길가에 나가 노방 전도에 열을 올렸다. 바로 이러한 때에 서상륜이 서울로 언더우드 목사를 찾아와 솔내교회로 인도했고 언더우드 목사는 1887년 가을에 솔내에서 7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언더우드와 아펜젤라 두 목사는 한국에 처음 들어와 기독교 복음을 직접 전하면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열심하며 한편 학교를 세워 교육 사업을 하는데도 남다른 정열을 기울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그 후에도 1889년 10월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회에서 한국 선 교사로 파송받은 헨리 데비스 목사와 그 누이 데비스양이 부산지방 을 중심 하여 선교사업을 실시했고 1892년에는 미국 남 장로회에서 파송한 레이놀드 목사를 비롯한 6명의 선교사가 함께 입국하여 주로 전라도 지방에서 선교하였다.1907년에는 성결교회 계통인 동양선교회에 길보른과 카우만이 한 국을 찾아왔고 그 이듬해엔 영국 구세군의 국내외에서 여러 가지 선교사업이 계속 되었다.이처럼 한국 교회 초창기에 각 교회의 여러 선교사들 들어왔으나 모두 함께 고생하면서 각자가 맡은 선교 구역에서 최선을 다해 전 도한 결과 오늘의 이 땅에 수많은 교회를 이룩하는데 성공하였다.




4. 발전과 확대기


우리 땅에서 치른 갑오경장과 청일전쟁 이후 기독교 복음은 새로 운 희망을 한국 민족에게 던져 주었다.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어 신자 수는 급속도로 증가하였다.애국인사들 중에도 기독교인이 속출하였으니 이승만, 홍정우, 윤치호 등이 바로 그런 인물들이었다.1901년에는 1898년 선교사로만 조직했던 선교사 공의회를 한국 교회 대표(장로3인, 조사6인)와 선교사(25)가 합동하여 합동 공의회를 조직하였고 그해 5월 15일에는 평양 신학교가 설립되었다.그후 1907년에 드디어 한국교회 최초의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모인 이 집회는 정월에 들어서면서 절정을 이루었고 낮에는 성경공부 밤에는 전도 강연 집회로 대 성황을 이루었다.1907년 대 부흥의 불길이 전국적으로 퍼진 그해에 한국교회는 또 다른 큰 수확을 얻게 되었는데 그것은 9월 17일 평양 중앙교회에서 선교사 38명 장로 40명이 회집하여 “예수교 장로회 독로회“ 를 조직한 사실을 말한다. 이때 노회는 전국에 하나밖에 없는 고로 독노회라 불리웠고 그 산하에는 7개 대리회를 조직하여 노회일을 처리하게 했다.이 독노회는 가장 중요한 안건으로써 1901년에 설립된 장로회 평양 신학교 졸업생 7인을 안수하여 목사로 세웠으며 그 중 한사람 이기풍 목사를 제주도로 파송하여 선교 사업에 종사하게 하였다. 그후에는 해외 선교에까지 착수하게 되었다. 1912년 9월 1일 평양 여자 성경학교에서 목사 52명 장로 125명 선교사 44명이 회집하여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를 조직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에서 기독교는 중심세력이 되었다. 그로 말미암은 일제의 박해와 탄압은 한국 교회와 신도들에게 집중되어 졌다. 그러나 교회는 여기에 굴하지 않고 일어나 민족을 위한 길잡이가 되었고 또 봉사자가 되었다. 이는 오히려 한국 민족을 교회로 접근시키는데 주효하였으며 민족 기독교로 발전하고 확대케 하는데 3.1운동이 한참 막바지에 이르렀던 즈음에 수원 제암리 교회 강서 사천교회, 정주교회, 강계교회, 위원교회의 방화 및 학살 사건 등을 들 수 있다. 3.1 운동의 진전으로 말미암아 기독교인들의 믿음의 성장과 민족 정신은 더욱 더 확고해 졌다.1919년 장로회 총회에서 진흥위원회 위원장이 된 방위량 목사 는 10여개 종류의 소책자를 만들어 전국 도처를 순회하면서 집회를 인도하였다. 이러한 부흥 운동에서 가장 큰 성과를 올린 것은 길선주 목사와 김익두 목사의 부흥 집회이었다. 그들은 설교와 능력을 통하여 한국교회에 새로운 희망과 광명을 던져 주었고 한국 사회를 향해 새로운 시대정신을 불러 일으켜 다대한 공헌을 남겼다.




5. 수난기




왜정 35년간 일제의 교회 박해는 강압과 회유 매수등 갖은 수단과 방법을 다했다. 신사참배 강요는 민족 전체에게 강요되었던 바 교회만이 피를 흘려 이에 항거하였다. 이로 인해 2백여 처의 교회가 폐문 되었고 2천여 명의 신도가 투옥되었고 50여명의 교역자가 순교 당했다.이러한 대에 안식교 계통의 의명 중학교는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나 1936년 1월 교장 이희명은 신사참배를 하기로 굴복함으로서 안식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일단락을 고하였고, 천주교에서도 처음에는 신사참배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으나

당시 국제 정세 하에서 이탈리아와 일본의 친선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취한 로마 교황청포교성의 “신사 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에 지나지 않음으로 그 참배를 허용한다“ 라는 1936년의 성명으로 신사에 참배하게 되었다.감리교에서도 지도자의 대부분이 신사 참배가 국가의식이라고 하는 일본 당국의 언명을 그대로 받아 들였으므로 감리교 계통의 학교는 폐쇄를 면하여 존속할 수 있었다.천주교나 감리교회 등의 큰 교파들이 자진 형식으로 신사 참배를 허용하였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는 장로교가 지극히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굴욕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1938년 9월 9일에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 27회 총회가 소집되었다.총독 당국은 신사 참배 결의안을 총회 석상에서 통과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손을 뻗쳐 공작하였다.총회 개회전에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이기선, 채정민, 한상동, 김선두 등 여러 목사와 안이숙, 박관준 장로같은 신사 참배 반대자를 구금하였다.각 지방 경찰서는 전국 23개 노회의 총회 총대가 결정되는 대로 호별 방문하여 신사 참배 찬동을 다짐하는 확답을 받았다.조직된 각본대로 신사 참배 안은 가결되었다.한국 교회가 교단적으로 일제의 신사 참배에 항복하게 되자 개별적으로 일어난 교회들이 있었다.일례로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구금된 이들은 7-8년간 감옥에 있다가 해방 후 출옥했다.



6. 재건과 분열기




신사 참배에 대해 극력 반대했다가 감옥에 구금된 후 해방이 되어 출옥한 분 중 이기선 목사는 “신사 참배자는 근신하고 회개하여야 한다” 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신사 참배에 가담했던 목사들을 중심한 총회에서는 회개하지 않고 여러 가지 분분한 이유를 늘어놓으며 강단을 계속 지켰다. 이에 이기선 목사를 비롯하여 말씀에 바로 서고자 했던 이병규, 최현구, 이인호, 최낙일, 임석윤등 이기선 계통의 여러분들이 6.25후 내려오거나 혹은 해체 순교 당하였다. 한편 1939년 3월 평양 신학교가 자진 폐쇄되고 그 이듬해 소위

어용 총회라 할 수 있는 28회 총회가 신의주에서 있었는데 여기서 서울에 조선 신학원을 설립할 것에 인준하였다.1940년 4월 19일 서울 승동 교회에서 조선 신학원이 개강되었다.이러한 때 해방 후 출옥 성도와 신사 참배자 사이에 갈등이 있게되어 1946년 9월 신사 참배자들이 성경대로 신학을 하자는 목표로 부산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었다(고려 신학교). 그리고 1946년에는 김재준 박사가 기독교 잡지인 새 사람 11월에 “정통신학은 신신학 보다 더 교묘하게 위장한 실제적 인본주의요 전통적 이단이다“ 라고 선언함으로서 큰 파문을 일으키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듬해인 1947년 33회 대구 총회에선 김재준 박사를 1년간 미국으로 유학을 시킴으로서 무마하려고 하였다.

그러다가 박형룡 목사가 1948년 봄에 처음으로 서울 남산에 장 로회 신학교를 세웠는데 그 이유는 서울에 있는 조선 신학교가 신 신학이 난무하니까 보수 신학인 장로회 신학을 세워야 한다는 것이었다.장로회 신학교가 세워짐으로써 모두 3개의 신학교가 설립되었지만 아직은 교파 분열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교파 분열의 소지는 많이 품고 있었다.

1949년 총회에서는 김재준 옹호의 신신학 계통과 신사 참배를 한 목사가 많이 참석했는데 여기서 고신파와 관계치 말고 교려 신학교에 학생도 보내지 말자고 결의했다. 그리고 1950년 4월 대구 총회에서는 고신파의 회원 자격을 박탈하고 뿐만 아니라 고신파를 포함 한 포함한 경남 5노회를 인정치 않았다. 그 결과 1951년 신사 참배로 경남 5노회와 총회측 사이에 알력이 생겨 9월 진주 성남 교회에서 예장 총노회(고려)로 회집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제 1차 분열이다. 한편 1950년 4월 대구 총회에서 성경 오류설을 주장 하는자(김재준씨 자칭)는 엄벌에 처할 것을 결의하고 1952년 4월 역시 대 구 총회에서 성경 오류설을 주장하는 김재준 박사가 속해있는 경기노 회로 하여금 면직시키도록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서 1953년 4월 총회에서는 직접 총회에서 처리하기로 결의 했다.이로 인해 1953년 6월 10일 김재준 씨를 중심으로 하는 조선신학 교계가 총회에서 이탈하여 한신 강당에서 호헌 총회를 열고 기독교 장로회를 창립하게 되었다. 이것이 제 2차 교파 분열이었다. 이 기장(기독교 장로회)은 신신학을 배경으로 분열된 것이고 고신은 신사참배 문제로 분열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총회 안에서 일부 목사가 비밀리에 W.C.C에 가입했는데 1959년 에 일부는 그 W.C.C(세계교회 협의회)에서 탈퇴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한쪽은 조사 연구하여 가입하여야 한다는 서로 색다른 주 장을 내세웠다. 이로 인해 W.C.C를 인정하는 연동 교회파(통합)와 W.C.C를 인정치 않는 승동 교회파(합동)로 나뉘게 되었다. 이것이 제 3차 교파 분열이라 볼 수 있다. 그 결과 교파는 고신, 기장, 연동파, 승동파의 4개로 분열하게 되었다. 이 때 한국교계의 여론은 하나의 교파를 강력하게 요 구하였고 1960년 2월 27일 연동파(통합)와 중립파, 그리고 합 합동측(승동파) 일부를 합하여 통합측을 구성하기에 이르렀고 같은 해 10월 11일 승동파 역시 고신파와 연합하여 합동측을 조직하게 되었다. 이때 고신파가 승동파와 합친 이유는 어느 정도 형식상 고신측의 요구를 승동측이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즉 W.C.C의 탈퇴 문제는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었고 신사 참배 문제에 대해 승동측이 1954년 안동 총회에서 어느 정도 성의 표시를 보였고 미국 북 장로교(신신학)와 단절하여야 한다는 고신측의 주장 을 어느 정도 인정했기 때문이다.그러나 처음에는 고신측에 대해 어느 정도 대우도 좋았고 인정해 주었지만 점차 합동측이 주도하게 되자 고신측이 다시 고려파로 환원하게 되었으며 그 결과 고려파의 많은 교회와 교인이 합동측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그 이후 고려파는 다시 분열하였고 합동측도 현재 사분 오열된 상태에 처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