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동독의 서독 공작사 - 정치, 역사, 세상의 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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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동독의 서독 공작사 - 정치, 역사, 세상의 한 모습


다음 글도 그 자체가 조작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일 수도 있습니다. 여기 소개하는 것은 하나님 없는 세상은 어디까지가 진실이며 무엇이 사실인지 뒤죽박죽이어서 잘 알기 어려우므로 믿는 사람은 신앙에나 전념해야 한다는 면을 말하고 싶습니다. 어떤 사실은 작은 사실 하나를 가지고 큰 거짓말이 만들어 지고 또 어떤 거짓말은 작은 거짓말이 큰 사실을 만들기도 하니, 하나님 없는 세상은 좌우를 막론하고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믿는 사람이 관심을 두고 소망을 두어서는 안 되며, 우리는 오직 저 나라만 바라 봐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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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학생 사살한 경찰, 간첩으로 드러나

1967년 6월 2일 오후 8시30분 구(舊) 서독의 영토였던 서베를린의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대학생 수천명이 이란의 독재정치와 인권탄압을 규탄하는 시위를 벌였다. 이때 서독을 방문 중이던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Pahlevi·1919~1980) 이란 국왕은 이곳에서 서독 정치인들과 모차르트의 오페라 "마술피리"를 관람하고 있었다.

시위가 경찰들과 학생들 간의 난투극으로 격화됐을 때, "탕!" 소리와 함께 시위대 한 명이 쓰러졌다. 베를린자유대학 학생 베노 오네조르크(Ohnesorg·당시 26세)였다. 그는 서독 경찰 칼 하인츠 쿠라스(Kurras·81)가 쏜 총탄을 뒤통수에 맞고 숨졌다.

이 한 발의 총성은 독일의 역사 흐름을 바꾼 서곡(序曲)으로 평가됐다. 보수적 성향이 강했던 서독은 이 사건을 계기로 좌파적 성향이 짙어지기 시작했다. 좌파 진영은 이 사건을 정부 권력의 부도덕성과 폭력성을 상징하는 선전 자료로 이용했다. 1968년 서독에서 조직된 적군파(RAF·좌파 테러단체)는 서독 유명인사 등 30여명을 살해하면서 이 사건을 들어 반정부 테러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 1967년 6월 2일 서베를린의 오페라하우스 앞에서 사람들이 경찰 칼 하인츠 쿠라스의 총탄을 맞고 쓰러진 대학생 베노 오네조르크를 옮기고 있다. 최근 쿠라스가 동독 비밀경찰조직의 첩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독일에서는 이 사건의 재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다./AP슈피겔 분노의 불길은 이웃나라 프랑스로 옮아 붙어 대학생과 청년노동자 400만명이 대규모 과격시위를 벌였던 "68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 1960년대 후반 전 세계를 휩쓸었던 좌파 운동의 도화선과 같았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요즘 독일의 학계와 언론계에서는 이 사건에 대한 평가가 다시 이뤄져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다고 로이터통신이 26일 보도했다. 오네조르크에게 총을 쐈던 쿠라스의 정체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는 구 동독의 비밀경찰조직이었던 슈타지(Stasi)의 스파이였다.

독일 시사주간지 슈피겔(22일자)에 따르면 최근 발견된 슈타지 문서에 쿠라스가 등장한다. 그가 1955년부터 슈타지를 위해 일했고 1964년에 동독 공산당 당원이 됐다는 기록이다.

쿠라스는 구 동독 영토인 동베를린으로 넘어가 일하고 싶어했지만, 슈타지는 그에게 서베를린의 경찰로 남아 동독을 위해 첩보활동을 펼치도록 지시했다.

슈타지는 서독 경찰 내에서 동독 스파이를 색출하는 부서에서도 일했던 쿠라스에게 만족했었다. 문서에는 쿠라스에 대해 "어려운 임무를 완수할 준비가 돼 있고, 용기와 대담함도 갖췄다"고 적혀 있다.

관심이 집중되는 부분은 쿠라스가 오네조르크를 살해한 행위가 슈타지의 지시에 따른 것인지 여부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1967년 이후 독일 역사는 다시 쓰여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안이라고 독일 일간지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은 평가했다.

이에 관한 사실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그 가능성을 암시하는 정황은 있다. 오네조르크의 죽음 직후 슈타지는 쿠라스에게 "모든 기록을 폐기하고 활동을 중지하라"는 지령을 내렸고, 쿠라스는 슈타지측에 "변호사를 선임할 자금을 달라"고 요청했다. 이후 정당방위를 주장한 쿠라스는 4년 동안 정직됐고, 1971년 경찰로 복직해 1987년 은퇴했다.

쿠라스는 독일 일간지 빌트(Bild)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동독 공산당의 일원이었음을 시인했다. 하지만 슈타지를 위해 일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내가 그들(슈타지)을 위해 일했다면 어쩌겠는가? 아무것도 달라질 것은 없다"고 말하곤 입을 다물었다.

이번 보도를 계기로 슈타지의 활동을 새롭게 연구하려는 흐름도 나타나고 있다고 일간지 베를리너 차이퉁은 27일 보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