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김 진홍, 박 윤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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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김 진홍, 박 윤선


국민일보 등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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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명신홍. 박형룡. 박윤선. 이상근
1973년 방지일. 박윤선. 김진홍





성경주석을 집필하는 박윤선 목사님?

1967년도 명신홍. 박형룡.박윤선.이상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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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3월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신학을 더 연구하기 위해 미국유학을 추진하였다. 모친은 아들의 유학을 반대하였는데, 부친의 제사를 반대해 왔으므로 유학으로 인해 그의 신앙이 더 견고해질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모친께서 엄지발톱이 살 속으로 파고들어 몹시 고통을 당하자 평양 기독병원에서 수술을 받도록 했는데 당시까지 어머니는 이름이 없었고 “김씨”라고만 불리어졌는데 윤선은 어머니께서 참으로 믿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이름을 金眞信으로 지어주고 입원시켰다(후일에 모친도 회갑을 맞이할 때부터 교회에 다니게 되고 한글을 배워 신구약성경을 일독하였다. 어머니는 붓글씨로 요한복음 3:16말씀을 써서 미국에 유학하고 있던 아들에게 보낸 것을 박목사는 귀중하게 보관했다). 마침내 그는 Westminster 신학교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다.




1934년 8월 중순경에 미국으로 유학올 때 왕길지 선교사가 모자라는 여비를 빌려주었다. 후에 미국에서 공부하는 동안 다 갚았다. 일본 고베에서 배를 타고 상항에 17일 간 오면서 요한계시록을 18장까지 암송하고, 상항에서 필라델피아까지 그레이하운드로 일주일간 오면서 계시록의 나머지 부분을 암송하였다. 필라델피아에 있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약으로 석사과정을 공부하면서 구약학자 윌슨(Robert D. Wilson)과 신약학자며 학장인 메이천(Gresham Machen, 평생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다, 1929년 프린스톤신학교가 자유주의로 나갈 때 떨어져 나와 웨스트민스터를 세웠다)으로부터 칼빈주의(혹 개혁주의) 신앙과 성경의 권위성, 주경신학, 성경해석을 배웠다. 오직 성경만이 정확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인 줄 확신하고 성경을 바로 알고 그대로 전하는 것을 사명으로 살았다.




재학 중 화란어, 독일어도 틈틈이 공부하여 칼빈주의 신학자인 카이퍼와 바빙크의 저서들을 읽을 정도였다. 1936년 5월에 졸업을 하고 신학석사(Master of Theology) 학위를 수여받았다. 그해 8월에 귀국하여 고향에 계시는 모친을 문안한 후 가족과 함께 평양에 거주하면서 평양 장로회신학교에서 성경 원어를 강의했으며 총회 표준 성경주석 편집부에서 근무하였다(1936. 8~1938. 7). 이때 편집부장은 박형룡박사였고, 사무실은 신학교 하층에 있었다. 당시 평양의 유일한 여자 성경학교였던 고등성경학교에 강사로 나가 성경을 가르쳤다.




1938년 8월에 다시 도미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1년간 머물면서 밴틸(C. Van Til)교수의 지도로 변증학 및 성경 원어를 더 연구하였다(1938. 9~1939. 11). 밴틸교수의 변증학은 특징이 있었는데 ‘하나님을 아는 길은 성경뿐이다. 자연계를 보고도 하나님을 알 수 있지만, 불신자는 자연계를 보고도 깨닫지 못한다. 불신자도 오직 성경으로만 하나님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2차대전이 시작된 소식을 듣게 되었고 공부를 마치고 1939년 10월 동경와 와서 표준 성경주석부의 일을 계속하면서 데살로니가전?후서, 골로새서를 주석하다가 1940년 3월에 귀국하였다.




귀국하자 얼마 후 바로 만주 봉천(현 瀋陽)에 있는 우지황교회에서 청빙이 있어 가족과 함께 만주로 가서 목회하였다(1940. 4~1941. 3). 그 다음해에 봉천 북능(北凌)지역에서 개교한 만주신학교(교장:정상인 목사)에서 교수생활을 하였다 (1941. 4~1943. 7). 성경원어(히브리어, 헬라어), 신약학을 가르쳤다. 일본으로부터 오신 박형룡박사도 함께 가르쳤다. 신사참배 문제로 교계가 어려울 때 그는 계속 주석서를 저술했다. 그도 한번 신사참배를 한 적이 있어 이를 회개하는 심령으로 저술에 집념하였다. 해방 후 귀국하여 가족과 함께 6개월 고향에 거주하였다. 북이 공산화 되어가기에 월남할 뜻을 정하고 1946년 2월에 가족과 함께 월남(越南)하여 3월 1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의 소원은 신학교육과 주석 집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었다. 이태원에서 두어 달 지내고 5월에 한상동 목사의 초청으로 신학교 설립을 위해 부산을 경유하여 진해로 내려갔다. 경화동 교회에서 설교를 몇 달 하였다.




1946년 9월 20일부터 개교한 부산 고려신학교(설립자: 주남선목사, 한상동목사)에 교장서리에 취임하였다. 본래는 박형룡박사가 초대교장으로 내정되었는데 귀국이 늦어짐에 따라 서리로 취임한 것이다(박 박사는 10월 14일부터 교장으로 근무했다). 학교의 신학 노선은 칼빈주의였다. 주경신학, 조직신학, 성경신학, 성경 원어를 가르쳤다. 한부선(韓富善, B. F. Hunt)선교사, 마두원(馬斗元, D.R. Malsbary)선교사, 최의손(崔義遜, W. H. Chisholm)선교사, 함일돈(咸日頓, F.F. Hamilton)선교사가 신사참배문제로 본국으로 추방되었다가 모두 돌아와서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신학교가 처음에는 부산진에 있는 금성중학교 교실 하나에서 시작했다가 둘째 학기부터 초량교회 부속건물에서 수업하다가, 광복동에 있는 큰 건물을 구입하여 1956년까지 교사로 사용하다가 암남동에 교사를 신축하여 옮겼다. 서울 조선신학교 학생들 일부가 자유주의 신학을 반대하여 학교를 자퇴했는데 이들 34명이 박형룡박사와 함께 부산에 내려와 고신에 편입하기도 했다.




그 다음헤 봄 학기에 박 박사는 서울에 신학교를 설립할 뜻을 두고 고신을 사임하고 상경하여 남산에 장로회신학교를 세웠다. 그와 함께 내려온 34명의 학생들 전원이 박 박사와 함께 서울로 떠나갔다. 고신은 그 설립목적을 위해 계속 부산에서 기반을 닦았다.




1947년 10월에는 교수로 취임했고, 1948년 5월에는 교장으로 취임하여 봉사하였다. 6?25가 터지기 전에 고신에 큰 회개운동이 일어났는데 박윤선목사가 경건회 시간에 요한복음 21:15~17을 읽고 주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을 근거로 하여 설교한 후에 학생들 중에서 누구든지 한 사람 일어나 기도하라고 했는데, 어떤 학생이 일어나 통회 자복기도를 하는데 눈물겹고 진실한 내용이었다. 기도가 끝나자 곧이어 다른 학생이 일어나서 회개 기도하는데 계속 되니 학교에서 강의를 전폐하고, 기도회는 한 주간 계속 되었다. 이 운동이 고려고등성경학교에서도 일어났고 점점 퍼져 고신측 교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쳤다. 6?25 때 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에 모일 때 회개 집회가 연일 계속되었다. 특히 초량교회 한상동 목사의 주관으로 전국 피난교역자 부흥회(강사:박형룡, 김치선, 박윤선, 한부선)가 개최되어 민족과 교계의 죄를 통회, 자복하는 기도운동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한부선 선교사의 신사참배 반대를 적극한 일에 대한 간증으로 많은 교역자들이 은혜를 받고 일부 신사참배에 참여한 죄를 철저히 회개하기도 했다. 이런 와중에서도 칼빈주의에 입각한 성경 주석 서술은 계속 되었다.





신학을 더 연구할 목적으로 1953년 10월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대학에 가서 6개월간 신약학을 연구하던 중 54년 3월에 뜻밖의 비보를 받고 즉시 귀국했다. 아내가 교통사고로 별세한 것이었다. 이때 박윤선목사는 49세였고 아내는 46세였다. 미성년 5자매를 두고 먼저 간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슬픔을 주님의 위로로 견디며 6개월을 지내다가 그해 10월 이화주(李和主)와 재혼을 하였다. 이런 가운데서 항상 마음은 성경에 머물렀고 신구약 주석 집필을 쉬지 않았다. 1954년 9월에 미국 필라델피아 Faith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명예박사(D.D.)를 받았다. 1960년에 성수주일에 대한 의견차이로 말미암아 고려신학교를 사임하였다.




고신에서 14년간 재직하면서 탈고한 성경주석은 25권이었다.2) 잠시 부산에 더 머물면서 사도행전을 탈고하고 서울로 와서 동산교회(서대문)에서 목회를 하였다(1961. 2~1964. 4). 이 기간 중 1963년 3월 10일 서울 총회신학교(사당동, 현 총신대 신대원) 교수에 취임하였으며, 이듬해 7대 교장(윤번제)으로 취임하였다.




동산교회에서 목회하면서 탈고한 성경주석은 15권이었다.3) 또 총신 부산분교에서 교수 생활 및 부산 성산교회(좌천동)에서 목회를 하였다(1965. 3~1967. 2). 이때 시편 주석 증보(增補)작업을 마쳤다. 67년 3월에 다시 서울로 와서 서울 총신대학 신학원에서 교수생활을 하다(1967. 3~1974. 11).4) 이 기간 중 서울 한성교회(노량진)를 개척하여 목회를 하였다(1968. 6~1973). 1974년 11월에 서울 총신대학 신학원 교수를 사임하였다(70세 은퇴). 총신 교수 11년 동안 탈고한 성경주석은 13권이었다.5)



미국 로스엔젤레스에 건너가서 4년 동안 있으면서 약해진 건강을 돌보며 성경주석 저술에 전념하였다. 담석 치료를 받아 완치되는 기쁨도 누렸다. 여기서 탈고한 주석은 12권이었다.6) 에스더서를 마지막으로 성경 66권을 완필하기까지 인생 여정 74년을 붙잡아 주신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렸다(1974. 12~1979. 1). 1977년 여름에 일시 귀국하여 총신대 신대원에서 한 학기 교수하고, 다시 로스엔젤레스에서 머물다가 1979년 3월에 서울 총신대학 대학원장으로 취임하였으며 같은 해 9월 3일 성경주석 완간 감사예배를 총신대학 대강당에서 가졌다. 그의 성경주석의 기본은 항상 칼빈주의와 성경의 정확 무오설이었다.




1980년 11월에 서울 총신대학 대학원장을 사임하고, 수원 합동신학원 초대 원장(1980. 11~1985. 2), 수원합동신학교 명예 교장(1985. 3~1988. 6)으로 있던 중 1987년 4월 27일 박윤선 목사의 ‘성역 50년’을 기념하여 남서울 예배당에서 감사예배를 드렸는데, 예배 후에 기념 논총인 <敬虔과 學問>을 받으면서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 내가 무엇을 이룬 것이 있다면 그것은 모두 주님이 하신 것입니다’고 진솔한 두어 마디로 답사를 대신하였다. 그는 종종 말하기를 ‘내가 죽었다 깨어나 다시 한세상을 산다 해도, 나는 목사가 되어 성경을 증거 하겠다’고 했다. 이 말처럼 그는 성경을 사랑하고, 확신하고, 묵상하고, 주석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하였다. 또한 그의 기도생활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성경 연구에서 난관에 부닥칠 때마다 기도로 영감을 얻었고, 쉬지말고 기도하라는 말씀을 실천에 옮겼다.

1988년 6월 30일에 83세의 일기로 별세하셨다. 합동신학교장으로 장례예배를 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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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방지일 (12) 나·박윤선·김진홍 ‘삼총사’ “美 유학 떠나자” 의기투합



[2008.11.07 17:52]





"유학을 떠나자."

장대현교회 전도사로, 신학생으로, 전도와 기도 모임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던 1935년쯤이었다. 기도 모임의 "트리오"나 마찬기지였던 박윤선, 김진홍과 함께 한 가지 목표를 갖게 됐다.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신학교로의 유학이었다. 평양신학교 은사들도 우리에게 유학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미국 비자를 받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 숭실대의 한 선배는 영어도 잘 하고 모든 조건이 양호했지만 6번이나 비자 발급이 거부되기도 했다.

당시 비자를 얻으려면 일본 돈 300엔(미화 150달러)을 정기적으로 송금할 수 있는 보증인 3명을 세워야 했다. 주위에 아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 친구 윤선으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내가 그의 보증인 세우는 일을 돕기로 했다. 아버지가 목사였고, 할아버지도 지역에서 웬만큼 알아주는 분이셨기에 여기저기 다니면서 돈 있는 장로님들에게 할아버지 이름을 대가며 보증인을 세웠다.

윤선이 비자 인터뷰를 하는 전날, 우리 삼총사는 평양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했다. 수중에 돈이 없어 서대문구에 있는 구세군 교회에 들러 철야 기도를 하겠다고 허락을 얻어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 5전짜리 호떡을 사 먹고 미국 대사관으로 함께 향했다.

인터뷰를 맡은 영사가 서류를 죽 훑어본 뒤 윤선에게 물었다.

"당신의 보증인들이 쓴 액수를 매달 미국에 보낼 수 있습니까?" 그걸 보낸다고 하면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안 보낸다고 하면 거짓으로 보증을 선 셈이 되니 이래저래 난감한 상황이었다. 할 수 없이 윤선이 대답했다. "그것은 선생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사는 두말없이 그 자리에서 도장을 찍어주며 비자를 발급해줬다. 우리는 어찌 된 영문인지 몰라 멍했다. 이 사건은 동료와 후배들 사이에서도 훗날까지 두고두고 회자됐다. 이렇게 하여 윤선은 웨스트민스터신학교 1호 유학생이 됐으며 이어 진홍도 2호 유학생이 되어 미국으로 떠났다.

이젠 내 차례였다. 윤선과 진홍이 미국에서 나를 기다린다는 생각에 마음은 더 들뜨고 분주해졌다. 37년 초, 목사 안수를 받은 뒤 차근차근 준비를 거쳐 미국 입국 비자를 무사히 받았다. 이제 출국하는 일만 남았다. 그런데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외지선교부에서 어느 날 연락이 왔다. 그리고 "아버지 대신에 중국 산둥 선교사로 가달라"는 것이었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소식에 곧바로 판단할 수가 없어서 생각할 시간을 달라며 결정을 미뤘다.

"유학이냐 선교사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미국에서 공부하기 위해 열심히 준비를 했고, 현지에는 이미 친구들이 나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는 아버지의 대를 이어 선교사가 되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총회의 요청을 거절하는 것도 옳지 않은 일 같았다. 어차피 목사가 되었으니 미국에 갔다가 와서도 전도를 할 것이고 결국 공부도 전도를 하기 위함이 아니던가. 예수님 오실 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래, 순종하자. 선교사로 떠나자."

정리=박재찬 기자 jeep@kmib.co.kr











[세계선교 지도자 연속 릴레이 좌담 ⑴] 중국선교 산역사 방지일 목사
기사입력 2004-10-03 16:49 |최종수정 2004-10-03 16:49




신(新)선교한국 시대를 열어가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올해는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진지 120년이 되는 해이다. 한국 교회는 선교사 파송 제2위 국가에 오를 만큼 양적 성장을 견인해왔지만 질적 선교에는 등한시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 본보는 세계 선교 지도자들과의 연속 릴레이 좌담을 통해 선교 현장에서 직면하게 되는 분야별 선교동력을 점검하는 한편 새로운 선교시대를 열어갈 수 있는 방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는 기획 시리즈를 마련했다.

공산화된 중국땅에서 최후까지 선교사의 본분을 잃지 않았던 ‘영원한 선교사’ 방지일 목사편을 시작으로 랠프 윈터,버너 우스토프,화융,하워드 슈나이더 등 10여명의 세계적인 신학자와 목회자들이 이번 좌담회에 참여할 예정이다.

한국 교회의 중국 선교역사인 방지일(94) 목사는 아직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겸손함이 물씬 배어있는 ‘영원한 청년’ 방 목사는 아직도 1년의 절반은 미주 유럽 아시아 남미 등 세계 곳곳을 다니며 집회를 인도하거나 후배 선교사와 목회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어떤 계기로 중국 선교사로 파송됐습니까?

△친구인 박윤선 목사가 유학을 떠난 뒤 김진홍 목사와 함께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그때 총회 선교부원 김석항 목사님이 연락을 하셨어요. 중국 선교사를 선택중인데 아버지(방효원 선교사)의 대를 잇는 것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그러셨어요. 소홀히 여길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물었고 가족의 동의을 얻어 약 1주일 뒤 ‘예,가겠습니다’고 했습니다. 외국 유학의 길보다 ‘중국 사람의 생명’에 초점을 맞추기로 한 것이죠.

-중국인들을 어떤 방식으로 양육했는지요.

△전혀 중국어를 모르는 상태에서 떠났지만 하나님 말씀대로 중국인들과 함께 살려고 애썼습니다. 저는 무엇보다 성경을 강조했습니다. 글자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성경을 통해 글을 가르쳤습니다. 각자의 형편에 맞게 ‘도리반’(道理班)이라는 단기성경학교를 개설,성경 66권을 철저하게 익히게 하면서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도록 하는데 집중했습니다. 성경 10권 이상을 마친 이에게 교회학교 교사 또는 도리반,초급반,교사 자격을 줘 봉사하게 했습니다. 신·구약을 다 습득했을 때는 성경학교 졸업과 동등한 자격을 주어서 전도사에 응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성경을 제대로 익힌 교인들은 지역사회의 지도자가 되고 자연스럽게 사회계몽운동에도 앞장설 수 있었습니다. 교회는 생명체이기 때문에 언제나 살아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인재 양성이 가능합니다.

-현재의 중국 교회를 어떻게 봐야 할까요. 정부가 공인했느냐 안 했느냐에 따라 중국 교회 내부에서도 서로 경원시하고 있는데요.

△아직도 많은 분이 중국 공산당의 실체를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방에 따라 예배당이 지어지고 모임이 이뤄지고 있다고 해서 완전한 종교의 자유가 있다고 생각해서는 오산입니다.

과거 많은 목회자가 신앙 때문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공산당이 공인한 삼자교회에서의 설교는 올바른 설교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일제강점기 신사참배 때와 같았죠. 지금은 물론 많이 달라졌지요. 그러나 아직도 많은 곳에서 비밀리에 기독교 모임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또한 이제는 가정교회와 삼자교회간 다리를 놓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가정교회는 삼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그들을 측은히 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세계 곳곳에 나가시면서도 유독 중국에 가지 않으시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요.

△제가 그들과 연락할 경우 그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지 않을까 염려되기 때문입니다. 저는 원래 공산당 치하에서도 3∼4년은 교회를 순회하며 사역했습니다. 새롭게 교회를 헌당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 차례 취조를 받으면서 놀라운 것을 알게 됐죠. 오래전 어디서 어떤 식으로 성경을 강해했는지에 대해 상세한 내용까지 파악하고 있더라고요. 저에 대해 면밀히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를 표현한다면 ‘자유로운 감금생활’이었다고 할 수 있죠.

그래서 당시 누구를 만나면 걱정부터 앞섰어요. 저보다 상대방이 더 걱정됐어요. 문제가 될 수 없는 장소는 교회 묘지뿐이었어요. 저는 묘지를 찾아 고인의 무덤 앞에서 그들의 자녀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했던 중국인의 아들이나 딸들이 성장해 가끔 편지로 내 안부를 묻기도 하고 직접 찾아오기도 합니다.

-오늘날 선교사 및 목회자들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질은 무엇입니까?

△세례 요한과 같이 자기를 부인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신을 메시아로 여기는 사람들에게 내 뒤에 오시는 분은 흥해야 하겠고 자신을 쇠해야 한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광야의 목소리에 불과하다고 강조했습니다.

이처럼 자신에 대해서는 ‘아니오’라고 하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무조건 ‘예’라고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목회자와 선교사들은 자신을 부인하고 겸손해야 합니다. 물론 자기 부인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그러면 설교가 변화됩니다. 우리의 경험담과 인위적인 해석이 설교의 중심을 이룰 때가 많습니다. 육적 감동이 아니라 영적 감동을 줄 수 있는 말씀이 선포돼야 합니다. 설교자가 주체가 돼서는 안됩니다.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구원으로 이를 수 있는 설교만이 필요합니다.

-중국선교 지망생에게 어떤 조언을 하고 싶으신지요.

△중국과 중국인,중국문화와 역사를 전혀 모르는 체 떠나지 않기를 바랍니다. 중국은 한국보다 앞서 복음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중국인의 신앙심이 매우 깊다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이를 가볍게 여겨서는 큰일납니다. 주고받는 ‘균등한’ 선교관이 중요합니다. 주기만 할 때 예속적인 신앙을 강요하게 됩니다. 아울러 배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평생 배우며 알고자 할 때 발전이 있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반드시 스승이 있다’라는 옛말이 있습니다. 지식으로 경험상으로 나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배울 것이 있다는 뜻입니다. 배우려는 자세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갖게 합니다. 또한 마음으로 대화하면 좋겠습니다.

방 목사는 인터뷰 말미에서 현재 한국 교회와 성도들이 각성할 때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믿는 사람은 ‘묵시에서 계시로’ 살아야 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주는 묵시는 일생에 단 한번 받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시는 매순간 우리에게 전해집니다. 예배드릴 때,기도할 때마다 계시를 받아야 합니다.”

함태경기자 zhuanji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