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선, 대한신학교, 대신 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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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치선, 대한신학교, 대신 교단

강윤석, <한국교회 교단 분열 과정과 대신 교단의 정체성>

https://www.youtube.com/watch?v=4SDj9e6K8l0
21.7.4 (1부)
21.7.14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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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g John ・ 2021. 8. 2.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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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 합동과 통합, 고신 교단의 형성 배경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들을 구할 수 있는데, 예장 대신 교단의 역사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되어 있는 자료가 희귀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 강의는 대신 교단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하다. 본 강의는 2021년 7월, 경기도 의왕시에 소재한 사랑가득교회(예장 대신)에서 2주에 걸쳐 오후예배 시간에 설교된 말씀이다.




위 강의에서는 대신교단이 시작된 배경을 설립자 김치선 목사님(이하 "김치선")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다. 김치선은 1898년(고종 35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서당 교육을 받았으나, 캐나다 장로교회 출신의 선교사 도널드 영(한국명 : 영재형)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출소 후에는 연희전문학교(오늘날의 연세대)에 입학했고,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에도 관여했다.(이후 김구와의 친분이 시작되었는데,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후 이러한 김구와의 관계 때문에 이승만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외국인인 영재형 선교사가 고등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분개한 지역 주민들이 학교에 불을 질렀는데, 이때 김치선이 영재형 선교사를 방화 속에서 구출했다고 한다. 이에 영재형은 김치선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겨 양자로 삼았고, 일본의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보낸다.(참고로 고베신학교는 "개혁파" 신학교인데, 일본은 기독교인의 비율이 매우 낮지만, 그 얼마 안되는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개혁주의 신앙인들이라고 한다.) 김치선은 그곳에서 개혁파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이후 김치선은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달라스신학교에서 구약신학을 전공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박사가 된다. 이때 쓴 박사학위 논문이 "모세의 오경저작설"로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모세오경 후대 편집설을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김치선은 일본 고베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해방 후 한국의 신학교는 자유주의(신정통주의) 신학 중심의 "조선신학교"와 정통 보수신학 중심의 "고려신학교"가 있었는데, 조선신학교는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에 찬성했었고,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에 저항했던 차이가 있다.(그런데 오늘날 조선신학교의 후신인 한신대 출신들이 반일을 부르짖고 있는 모습 보면 디게 웃긴다.) 이무렵 고려신학교의 성경신학 교수가 박윤선, 조직신학 교수가 김치선이었는데, 모세의 오경저작설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치선이야말로 당시 그 누구보다 자유주의 신학을 잘 대적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박형룡에 의해 세워진 또 하나의 보수적인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장신대)에서 김치선을 스카우트하였다.(1948년) "구약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성경해석의 자유화를 추구하는 물결"이 장신대에까지 흘러들어왔기 때문에 김치선으로 하여금 이 물결을 막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에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대한신학교"라는 야간신학교가 설립되었는데(1948년), 오늘날의 안양대학교이다. 그런데 설립 당시에는 장신대와 같은 건물을 썼다고 한다. 같은 건물에 낮에는 장신대 수업이, 밤에는 대한신학교 수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1년 후 김치선은 김구가 출석하고 있던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가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무렵 김구는 암살을 당하고 만다.(1949년) 당시 김치선은 남대문교회에서 설교하는 도중 조국의 현실에 눈물을 짓는 모습을 많이 보여 "한국의 예레미야"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이단 중의 괴수인 박태선 장로와의 인연에 대한 설명을 비롯하여 300만 구령운동, 새벽기도 특공대 등에 관한 설명이 이어진다.



1959년에 접어들면서 WCC 가입 문제를 둘러싸고 장로교단이 합동 측의 총신대(가입 반대)와 통합 측의 장신대(가입 찬성)로 분리되자, 대한신학교 졸업생들이 갈 곳이 없어지게 된다. 합동과 통합 어디에서도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김치선은 대한신학교 졸업생들에게 어디에서도 우리들을 받아주지 않으니 각자 스스로 개척할 것을 호소했고, 이것이 오늘날 "대신 교단"의 시작이다.(1961년) 이때 대신 교단의 이름으로 3개 교회가 개척되었고, 오늘날(2021년 현재) 전국 54개 노회, 1200개 교회의 규모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어지는 강의에서는 대신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본 강의에 따르면, 대신교단 초기의 신학은 "개혁주의"가 아닌 "근본주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자유주의의 물결을 막기 위해, 대신교단의 설립자인 김치선이 근본주의 신학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근본주의 신학이란, "5개 핵심교리"(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믿으면 다른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신학을 말한다. 따라서 김치선은 엄밀한 개혁주의 신앙을 추구하기보다는 근본주의 5개 핵심교리에 입각하여 "초교파적" 신앙을 추구하였고, 진리의 엄밀한 수호보다는 교회간의 "연합"에 초점을 맞춰 사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박태선이나 김기동 같은 이단 괴수를 분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대신교단은 김치선의 사위인 최순직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교회선언문을 통해 "대신교단은 개혁파 신학을 추구하는 교단"이라고 천명을 한 것인데(1972년), 이는 대한민국 기독교 교단 중 최초의 사례였다고 한다.(합동은 1976년, 합신은 1980년, 고신은 1982년) 이후 조석만에 의해서 대신교단의 개혁주의 신학이 "문서화"되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1972년에 발표된 대신교단 교회선언문의 내용에 대한 주해가 설명된다.
[출처] 강윤석, <한국교회 교단 분열 과정과 대신 교단의 정체성>|작성자 Jung Jo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