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룡과 고신의 분리
"revolution"이라는 단어를 “대개혁”이라고 번역했다. 한편 송상석이 목사가 되기 전의 행적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설들이 있다. 혹은 일제 하에서 순사 생활을 한 자로서 신사참배 반대로 옥고를 치룬 바가 없으나 해방 후 고려측에 적극 가담했다 하고 (정규오, 상 104), 혹은 1934년 평양신학교를 졸업 (29회)하고 이북에서 목회를 하다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목회를 중지하고 과수원을 경영했으며 “임기응변에 능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김요나, 《총신 90년사》, 316.
(15)1947년 10월 31일, 한부선이 미정통장로교회 해외 선교위원회로 보낸 편지, Harvie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Korean Presbyterian Church,"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1967), 146.
(16)김요나, 《총신 90년사》, 316.
(17)김요나, 《총신 90년사》, 316-17
(18)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1946-96》48.
(19) 1947년 10월 2일. 한부선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허순길은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48쪽, 각주 58에서, 한상동의 과격한 표현을 완화하기 위해서인지, 한부선의 이 편지 속에 있는 "revolution"이라는 단어를 “대개혁”이라고 번역했다. 한편 한상동과 자신을 지칭하여 “우리”라는 대명사를 쓰고 있는 이 편지는 한부선 선교사 측과 한상동 목사측의 유대가 얼마나 강했으며 그들이 얼마나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비교할 때 박형룡 박사의 존재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20)Ibid.
(21)그러한 태도는 삼사 년 후 기존 대한 예장에서 축출되어 별도의 교단을 형성하게 될 때 발회식 취지문에서 밝힌 바, 기존 예장에 대한 고신측의 그 간의 태도가 그것을 “장중 보옥”처럼 여겼다는 말과는 별로 조화되지 않는다.
(22정규오, 《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장로교회사》 (I), 73.
(23)김양선, 227. 김요나, 90년사, 317.
(24)남영환, 313.
(25)김요나, 90년사,316.
(26)박윤선, “고신 초창기와 나,” <월간고신> 1986년 9월: 19.
(27)남영환, 313.
(28)김양선, 153. 남영환, 313. 장동민은 박형룡이 고신측으로부터 이러한 동의를 얻어 낸 것은 부산에 내려가기 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346). 그러나 아마도 부산에 도착한 직후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김양선의 진술이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29)남영환, 309-310, 314; 허순길, 50년사, 52-55.
(30)만일 이 때 그러한 조건들에 한상동 목사가 합의한 것이 사실이라면 얼마 후 한상동 목사가 그러한 조건들의 이행을 거부한 것은 약속 위반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31)Hunt's Letter to Marsden, Oct. 31, 1947. 이들 51인의 조선신학교 학생들은 송상석 목사 편에 박형룡 박사의 귀국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32)1947년 11월 17일, 한부선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This morning I went to see Han and Dr. Park. Presbytery is to meet next month. 김길창 and his crowd are talking of disciplining the Seminary faction, . . .He says for himself, he thinks that if the other side would discipline the Seminary group it would be a good thing, for then we'd form a new Presbytery and he thinks the common people would flock to the banner. I'm not sure it's that easy. . . .
(33)허순길, 50년사, 62.
(34)이 사실을 보면 경남노회 안에 신사참배가 큰 죄였다는 인식을 가진 지도자들이 상당수, 때로는 다수파로 존재했으며 따라서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주장을 한 김길창 등의 입지가 그리 넓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에 굴복은 했었으나 그것을 회개하고 자숙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는 온건파들이 경남노회의 다수를 이루었던 것 같다.
(35)경남 제49회 정기노회록. 남영환, 323.
(36)김양선, 154.
(37)Ibid., 153-54. 여기서 교회 재건 방안이란 물론, 출옥 성도들이 만든 교회 재건 기본 원칙들 속에 명시된 바, 신사참배한 목사들이 자숙안을 철저히 준행한다는 조건 하에 목사직에 복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8)Ibid., 153.
(39)Ibid, 한상동 목사가 노회 탈퇴를 취소하자 최덕지를 중심한 과격파들은 그를 타협주의자로 몰아세우면서 “재건파”라는 분리주의 교회의 설립을 완성했다. 재건파는 당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하나님께 범죄한 구예배당에는 하나님이 떠나시고 안 계시니 예배당을 불태워 없애야 한다 (그들은 실제로 몇몇 교회 예배당을 불태웠다). 2. 현실 교인들은 동참죄를 범하고 있으니 인사를 하지 말라. 부부 간은 갈라서야 한다. 부모 형제라도 절연하라. 3.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만일 인사를 했거나 말을 했으면 입을 씻어 내어야 하고 상당 기간 자숙해야 한다. 남영환, 308-9.
(40)박윤선, “고신 초창기와 나,” <월간 고신> 1986년 9월, 19.
(41)김양선, 154. 김양선은 이 부분에 대한 진술에서 메첸파 선교사들에 대해 “독선적”이라거나 “비협동적”이라는 묘사를 사용하면서 그들에 대해 강한 부정적 인식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42)Ibid., 그러나 간하배는 한부선이 미 주류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협조적이었다는 증거들을 제시한다.
(43)이 부분은 박응규, 『한부선 평전』에 많이 의존한다.
(44)이것은 얼마 후 정통장로교회 (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명칭을 바꾸었다.
(45)새 교단에 대한 그의 그러한 충성이 인정을 받은 결과 후일 그가 1957년에 다시 미국으로 가서 안식년을 보낼 때 그는 미 정통장로교회의 총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46)주남선, 한상동, “대한예수교 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 <고신교회 역사 자료집> vol. 6. 고려신학대학원 도서관 편, 3-4. 한부선은 만주에서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던 한인 70여명과 함께 투옥되었고 그 중 네 명은 결국 순교했다.
(47)Bruce Hunt, "Korean Martyrs: Part II," Reformed Bulletin of Missions (Dec. 1968): 11. 박응규, 한부선 평전, 286에서 재인용.
(48)“A Presbyterian Covenant," Translated by Bruce Hunt. Presbyterian Guardian (Jan. 1943) 19-25; (Feb. 1943), 37-40. 최덕성, 《장로교인 언약과 바르멘 선언》 (본문과 현장 사이, 2000), 81.
(49)“장로교인 언약,” 최덕성, 《장로교인 언약과 바르멘 선언》 (본문과 현장 사이, 2000), 77-78.
(50)Letter to Marsden, Oct. 5, 1945.
(51)Letter to Hunt, Sep. 20, 1946.
(52)Letter to Marsden, Nov. 7, 1946.
(53)서영일, 박윤선의 개혁 신학 연구, 219.
(54)1946년 11월 18일, 한부선이 말스덴에게 보낸 편지. 한부선이 그 해 11월 7일에 말스덴에게 보낸 편지도 참조하라.
(55)Bruce F. Hunt, "Report from Korea," The Messenger (미정통장로교회의 선교사 정기간행물), 1947년 2월, p. 2-3. Conn, "Studie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143에서 재인용.
(56)특기할 사실은, 당시 미국에 있는 정통 장로교회도 기존 한국 장로교회에 대해 한부선과 동일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미정통장로교 선교 본부는 한부선 등 자기들의 재한 선교사들에게 기존 한국 장로교회로부터 분리하라고 지시했다.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한 미정통장로교 해외 선교부는 “소속 선교사들이 한국 장로교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그들이 예전에 활동했던 선교지의 조직이나 단체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도록 권고했다.” Hunt's personal annual report on Aug. 1939, 2.
(57)1942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해체되었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1회를 계승한 것이었다. 남북 통일의 희망은 점점 묘연해지고 북한의 교역자와 신자들이 다수 월남했기 때문에 남한에서만이라도 총회를 재건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의 결과였다.
(58)주남선, 한상동, “대한예수교 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 <고신교회 역사 자료집> vol. 6. 고려신학대학원 도서관 편, 4.
(59)여기에 대해 자신이 스스로 노회에 제명을 요청했기 때문에 노회가 그것을 받아들여 그를 제명해 주었다는 견해도 있다. 한부선은 신사참배에 굴복한 노회에 소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 있다.
(60)Conn, "Studie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153-54. 각주 49.
(61)김양선, 163.
(62)The Christian Beacon, 1959. 4. 16. 장동민, 384에서 재인용.
(63)정통장로교가 수립된 미장로교 분열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술하고 있다.
(64)이상규, “함일돈의 생애와 선교 사역,” 고신대학교 부설 기독교 사상 연구소, 기독교 사상 연구, 도서출판 영문, 1996, 105-113.
(65)간하배의 표현에 의하면, 한상동과 한부선 사이에는 “기질적”으로 그리고 “신학적 확신”에 있어 큰 유사성이 있었다. Conn, "Studies," 154.
(66)Conn, 154.
(67)출옥 성도들이 “신학 교육”에 대해 메첸파 선교사들의 “보수적 견해”를 박형룡의 “개방적” 견해보다 선호했다는 김양선의 표현은 다소 애매하지만 “개방적”이라거나 “보수적”이라는 표현이 신학 사상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외국 선교부와의 협력에 관한 것이라면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바로 앞, 즉 해방 후 십년사 153쪽에서 김양선은 박형룡이 “메첸파의 신학 사상을 가장 건전한 것으로 인정”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형룡도 메첸파 못지 않게 신학 사상 면에서는 보수적이었다는 말이다.
(68)김양선, 154.
(69)김양선, 154-55. 김양선은 박형룡의 “신앙 노선”을 “현 총회 및 4선교회지지론”이라 요약하고 고신파의 신앙 노선은 “현총회를 떠나 성자들만의 신총회를 설립하자는 것”으로 그것은 “메첸파 선교사들의 독선적 신앙 태도와 일맥 상통하는 것”이었다고 정의한다. 만일 김양선의 진단이 정확한 것이라면 한국 장로교에 미친 미국 교회의 존재의 영향이 그처럼 지대했다는 말이 된다.
(70)정규오, 106.
(71)김요나, 총신 90년사, 322.
(72)허순길, 신대원 50년사, 62-63. 그렇다면 과연 고신에 그러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는 진술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질문은 제기될 수 있다. 공식적 토론을 통한 결정 과정은 없었지만 고신 구성원들이 모두 묵시적 동의 하에 교단 신설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73)한부선이 1948년 6월 6일 정통장로교 선교위원회에 보낸 편지, Harvie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Korean Presbyterian Church,"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1967), 152,
(74)Conn, 149.
(75)김양선, 228. 김요나는 서울의 보수파 목사들이 “고려파 운동 소식을 듣고 크게 우려”하여 박형룡에게 “하루라도 속히 상경해서 서울에 신학교를 세워야 함을 간청했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고려파가 총회로부터 이탈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려한 것 같다. 322.
(76)남영환, 310.
(77)김양선, 154. 박형룡이 정확히 언제 고신을 사임했는가 하는 시기 문제가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그의 사임이 고신에 대한 제34회 장로교 총회의 거부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의 사임이 총회 전에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총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많고 그 후에 있었다면 적어도 총회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점에 관한 사가들의 진술이 엇갈린다. 김양선은 1948년 총회 무렵에는 “박형룡이 이미 고려신학교를 떠난 때”였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총회 역시 고려신학교의 “독선적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양선, 156). 한부선 선교사는 자기 아내에게 보낸 4월 25일자 편지에서 박박사의 사면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 말은 그 전에 이미 박형룡이 고신에 사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5월 25일자로 선교 본부에 보낸 편지에서는 “박박사가 결국 지난 주에 사표를 제출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임을 두 번했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공식적 사표 수락이 총회 후에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가 학교에 실질적으로 사표를 제출한 것은 아마 늦어도 4월 초순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표를 제출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책임있는 교장이 4월 한 달 내내 거의 학교에서 근무하지 않고 서울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4월 한 달간 고신 이사회는 박형룡의 사표를 즉시 수락하지 않고 그에게 재고를 요청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볼 때 4월 이전에 이미 박형룡이 고신을 떠날 결심을 굳혔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는 4월 초부터 서울에 올라가 서울의 보수주의 지도자들과 함께 새로운 보수 신학교 설립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던 것 같다. 그는 4월 20일부터 열린 제34차 총회에 참석하여 총회가 고신을 부정하는 것을 목격한 후 부산으로 내려가 자신의 사임을 재확인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고신 사임 소식은 이미 4월 초부터 서울 교계에 알려졌을 것이고 그러한 소식이 총회의 고신 거부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78)이것은 허순길 50년사, 50-64, 남영환, 309-317에 나타나 있다.
(79)심군식, 《세상 끝 날까지》, 소망사, 1977, 303-305
(80)김영재, 한국교회사,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2, 251.
(81)그 때에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졸업생들이 과연 미장로교에서 안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염려가 없지 않았으나 메이첸은 그 길을 고수했다. 결국 개교 6 년 후인 1935년 메이쳔이 정통장로교회라는 독립된 교단을 창설함으로써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졸업생들이 미장로교에서 안수받을 필요 자체가 없어졌다.
(82)박윤선이 메이첸에게 보낸 편지, 1936. 7. 14. 미국 유학의 첫 경험은 학생들에게 대개 깊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 그 학교가 유명한 학교이고 가르치는 교수들이 대가로 알려진 사람들이면 더욱 그러하다. 박윤선도 순진한 학생으로서 선생들을 무조건 존경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그는 메이첸을 절대적으로 존경했고 거의 맹목적으로 숭배했다. 어느 다과회 석상에서 한 노교수는 “박윤선씨는 예수님과 또 메이첸을 믿는 듯합니다.”고 말했는데 박윤선은 그 교수가 자기 심정을 “잘 이해했다”고 말했다. 또 1936년 9월 3일 메이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메이첸의 가르침을 정확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고린도후서 주석을 쓰면서 메이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나는 해석 방법에서 유일한 참된 방법이라 믿는 바 당신이 가르쳐 주신 방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의 성경 해석 강의 시간에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이 내 영혼 속에 살아 있습니다”고 말했다.
(83)박윤선, “신학 연구에 바친 생애,” 39.
(84)그러나 특기할만한 사실은, 다른 많은 한국 장로교회들과 미국 선교사들의 관계와는 달리, 고려파의 경우 OPC로부터 받은 원조는 무시할만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Bong Rin Ro "Division and Reunion in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1959-68," Concordia Theological Seminary, 미출판 Ph.D. 논문, p. 167. 사실 지극히 작은 교단인 미국 OPC는 줄래야 줄 돈이 없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말해서 지갑에 돈이 없습니다.” Letter to Marsden, Nov. 18, 1946. 게다가 한부선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재정으로 돕는 것을 반대했다. “신학교가 [외국] 보조금에 맛을 들인다면. . .지도자들은 자연히 기대는 습관이 생길 것입니다.” Letter to Marsden, Jun. 28, 1947.
(85)그러나 정통 장로교회와 한부선이 고려신학교 설립이나 운영 자체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혹자는 정통 장로교 선교사들 “몇 사람이 한국 교회와 그 지도자들과 함세하여 [고려] 성경 학원과 [고려] 신학교를 설립했다.”고 쓰고 있다. 민경배도 《한국기독교회사》 1982, p. 456에서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고려신학교가 개교한 것은 1946년 9월이었고 한부선이 한국에 도착한 것은 10월 말이었다.
(86)공교롭게도 남한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지도자들이 대부분 경남 출신이었다. 주남선은 거창, 주기철은 웅천, 한상동은 부산, 이인재는 밀양, 조수옥은 하동, 최덕지는 통영이 고향이었다.
(87)박윤선, “고 주남선 목사 옥고기,” <파숫군> 15호, 22-23.
(88)허순길, 50년사, 52.
(89)박형룡, “사도적 신학 소론” 박형룡 전집13: 216-231.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78.
(90)사실 한상동은 박형룡이 고신에 와서 그러한 제안을 하기 전부터 신학교가 부산에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한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1947년 8월 12일, 보수 신학교가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서울의 지도급 보수주의 목사들의 견해를 대변하여 김치선 박사가 부산에 내려왔다. 그는 박윤선과 함께 한상동을 찾아가 밤 1시까지 고려신학교를 서울로 옮기자고 설득했으나 한상동은 끝내 그 제안을 거부했다. 이것은 신학교의 부산 소재에 대한 한상동의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보여 준다. 한부선이 1947년 8월 13일에 부인에게 쓴 편지, 허순길 50년사, 47쪽 각주 57에서 재인용.
(91)남영환, <한국 교회와 교단>, 310. 허순길, 50년사, 55.
(92)허순길, 50년사, 56.
(93)남영환, 322.
(94)허순길, 50년사, 56.
(95)고신 사가들은 박형룡의 고신 이탈을 심하게 비판한다. “한국 교회의 개혁과 재건을 위해 싸우는 진리 운동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것이다. 혹은 그가 권력욕이나 개인적 야심 때문에 고신을 떠났다고 폄하한다. 허순길, 신대원 50년사, 62.
(96)한부선에 의하면, 신학교를 서울로 이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박형룡이 한상동과 한부선보다 더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한부선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47년 9월 30일과 1948년 5월 1일자.
(97)정규오, 74.
(98)허순길, 50년사, 56-57.
(99)당시 주한 미남북 장로교 선교사들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에 대해서는 허순길과 장동민의 견해가 완전 상충된다. 허순길은 박형룡 박사가 그 때 해방 후 한국에 처음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해방 전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도 일제에 의해 추방된 후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 에큐메니칼 정신에 젖어 돌아왔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50년사, 59). 그러나 그렇게 단정하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장동민이 지적하듯, “내한한 젊은 선교사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해방 직후 박형룡이 서울에 올라갈 당시 선교사들이 자유주의자들이었다고 생각할만한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장동민은 박형룡의 포괄주의에 이해할만한 요소들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 본국의 북장로교 선교부와 상관 없이 해방 후 다시 내한한 주한 남북 장로교 선교사들은 해방 전부터 한국에서 사역하던 자들로 보수적인 신학 사상의 소유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자신들이 일하던 학교들의 폐쇄와 한국으로부터의 강제 추방까지 감수했던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51년 총회 신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교수로 부임한 선교사들을 보면, 교장 감부열 (Archibald Campbell, 1890-1977)은 북장로교 선교사로 신사참배 거부로 강제 출국당했다가 1947년에 내한했는데 박형룡과 절친한 관계였고, 인돈 (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은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그가 교장으로 있던 전주 신흥학교가 폐쇄되었으며 조하파 (Joseph Hopper, 1892-1971)은 보수적 남장로교 선교사로 평양신학교 교수였으며, 권세열 (Francis Kinsler, 1904-?)도 해방 전부터 평양에서 일하던 선교사로 해방 후 내한했다. 장동민은 박형룡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 에큐메니칼 논쟁 때부터였다고 한다. 352-54.
(100)한상동, “현하 대한 교회에,” <파수군> 2호, 1949. 4월, 20쪽
(101)한상동, “현하 대한 교회에,” <파수군> 2호, 1949. 4월 18쪽.
(102)남영환, 310.
(103)“한상동 목사 옥중기,” <파숫군> 29호 (1953년 6월), 22.
(104)한상동, “현하 대한 교회에,” <파수군> 2호, 1949. 4월 18쪽.
(105)Ibid., 17.
(106)“한상동 목사 옥중기,” <파숫군> 29호 (1953년 6월), 22.
(107)한상동, “소위 고려파가 생기기까지,” <고신학보> 창간호 1972년 3월, 37쪽.
(108)김요나, 총신 90년사, 319.
(109)김요나, 총신 90년사, 319-20
(110)당시 고신의 진로에 대한 학생들 사이의 의견 대립이 심각했다는 것은 선교사들의 보고서에도 나타난다. 한부선은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들”은 “교회 안의 문제에 대해 입장이 그리 선명치 못한 것 같습니다”고 쓰고 있다. “그들은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대하지만 일제 하에서 교회를 인도하여 신사참배를 하게 했으며 지금도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자들의 교권주의ecclesiasticism에 대해서는 그처럼 강하게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자들의 죄를 인정하고 있지만, 거의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교회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그들의 커다란 바램이 여기 기존 학생들의 태도와는 다소 다릅니다.” 1947년 10월 31일 한부선이 정통장로교 선교위원회에 보낸 편지.
(111)서영일, 229.
(112)남영환, 316.
(113)박윤선, “고신 초창기와 나,” <월간 고신> 1986년 9월호. 20.
(114)서영일, 232. 김양선의 주장에 의하면, 출옥성도들은 메첸파 선교사들과 박박사 양편을 다 붙들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결국 선교사들 쪽을 선택했다. 결국 고신측은 박형룡과 메첸파 선교사들 사이의 양자택일을 해야 할 상황에서 박형룡을 버리는 대신 메첸파 선교사들을 택했다는 말이다.
(115)간하배도 “신사참배 죄 회개에 대한 고신의 강조가 너무 지나치다고 많은 이들이 염려하는 것 같았다”고 지적한다. “회개에 대한 그들의 바램이, 비록 건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온건함을 요하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권징보다는 가르침과 인내가 더 요청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Conn, WTJ., vol. 30, 155.
(116)한부선이 미정통장로교 선교부 총무 말스덴에게 보낸 편지, 1948. 5. 25.
(117)허순길, 신대원50년사, 62쪽 각주 82.
(118)남영환, 316.
(119)김양선, 154-55.
(120)박형룡의 신학교 설립을 지원한 목사들은 이정로, 권연호, 이인식, 김선주, 김광수, 계일승, 이운형, 이재형, 전인선, 김현정 등이었는데 이 중에는 일제 때 총회장을 지낸 사람이 세 명 포함되어 있다. 허순길, 65.
(121)그러나 김요나는 박형룡을 도와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는 데 앞장선 많은 보수주의 목사들은 친일 전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주기철 목사가 옥고를 겪고 있을 때 주목사를 산정현 교회에서 파면한 노회가 임시 당회장으로 세워 주목사의 가족들을 사택에서 내어 쫒는 일을 하게 했던 이인식 목사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김요나, 《일사각오》, 서울: 한국교회 뿌리 찾기 선교회, 1992, 473. 이 때문에 장동민은 장로회 신학교 설립이 신사참배 전력을 가진 교권주의 목사들이 자신들의 과거 행적에 면죄부를 얻기 위해 채용한 수단이며 박형룡은 그들의 그러한 시도에 이용된 것이라 냉소하기도 한다. 351.
(122)그것은 아직 합동과 통합이 나누어지기 전이었으므로 고신측을 제외한 한국 장로교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망라한 신학교였다. 현재의 총회 신학교와 장로회 신학교는 1959년 합동과 통합이 교단 분열을 일으킨 후 각각 세운 학교이므로 1951년 당시의 장로회 신학교나 총회 신학교와는 직접적인 계승 관계가 있는 기관들은 아니다.
(123)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 18:199,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124)Ibid.
(
125)Ibid.
(126)Ibid. 199-200
(127)Ibid. “떠날 생각”을 했다는 표현에서도 여전히 박형룡은 고려파가 능동적으로 총회를 이탈하려 했다는 투로 말하고 있다.
(128)Ibid., 200
(129)Ibid.,
(130)Ibid.,
(131)김양선, 159.
(132)김양선, 164-65.
(133)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김양선 자신이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일제에 의해 박해받은 경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1938년의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을 때 평양 신학교 학생 장홍련이 격분하여 평양 신학교 교정에 있던 평북 노회장 김일선의 기념 식수를 도끼로 찍어 버렸다. 이 때 일경은 장홍련 뿐 아니라 박형룡 교수, 그리고 김양선, 안광국 등 다수의 학생들을 불구속 입건했었다. 김양선, “신사참배 강요와 박해,” 한국 기독교사 연구, 서울: 기독교문사, 1971, 33.
(134)정규오, 106.
(135)김요나, 321-22.
(136)남영환, 312.
(137)1977년 9월 13일 대구 서문로 교회당에서 열린 고신측 제27차 총회는 이 때를 고신 교단의 출발점으로 간주한다고 결의했다. “진주 노회장 최연석 목사가 문의한 교단 창립 30주년 기산은 한상동 목사가 경남노회를 탈퇴 선언하고 67개 교회가 호응한 때가 창립 정신의 기준이 되므로 1946년 12월 3일을 교단 창립 기산일로 하도록 가결한다.” 제27회 (고신) 총회록, 26. 이에 앞서 1977년 3월 4일 “수난 성도 기념 사업회”는 제 1차 사업 계획으로 “대성회”를 개최하기로 했으며, 그 해 7월 5일 총회 교육부는 “대성회”의 명칭을 한상동 목사 탈퇴 선언을 기점으로 하여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 대성회’로 정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육부, 교단창립 30주년 기념 대성회: 순교정신 계승하자(1977), 92.
(138)<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 평양지방 법원, 1945. 5. 18). “제10피고 서원상동 (한상동),” “제16피고 국본주원 (이인재),”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270-72에서 재인용
(
139)김양선, 312.
(140)남영환, 305. 한편 박형룡의 경력 자체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자신있게 강조하기에는 꺼림칙한 면이 있었다. 그는 1938년 평양 신학교의 폐교 후 1940년대 초부터 1947년 고려신학교에 부임하기까지 봉천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런데 그 학교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에 참여하고 있었다. 물론 학교측의 배려로 박윤선과 그 자신은 거기서 열외가 될 수 있었지만 다른 모든 교수들과 신학생들은 모두 그것에 참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박형룡이 몸담고 있던 학교는 전체적으로 그리고 공공연히 신사참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만일 그가 정말 철저히 신사참배를 죄로 여겼다면 학교를 향해서 우상숭배의 죄를 중지하라고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학교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는 그처럼 범죄하는 학교에 남아 계속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 학교를 떠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쪽도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현실의 부패와 타협했다 할 수 있다. 그러한 경력의 소유자로서는 해방 후 신사참배자들에 대해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거나 권징을 주장하기 곤란할 수 밖에 없었다.
(15)1947년 10월 31일, 한부선이 미정통장로교회 해외 선교위원회로 보낸 편지, Harvie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Korean Presbyterian Church,"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1967), 146.
(16)김요나, 《총신 90년사》, 316.
(17)김요나, 《총신 90년사》, 316-17
(18)허순길,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1946-96》48.
(19) 1947년 10월 2일. 한부선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허순길은 《고려신학대학원 50년사》 48쪽, 각주 58에서, 한상동의 과격한 표현을 완화하기 위해서인지, 한부선의 이 편지 속에 있는 "revolution"이라는 단어를 “대개혁”이라고 번역했다. 한편 한상동과 자신을 지칭하여 “우리”라는 대명사를 쓰고 있는 이 편지는 한부선 선교사 측과 한상동 목사측의 유대가 얼마나 강했으며 그들이 얼마나 정서적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던가를 보여준다. 그 둘 사이의 관계에 비교할 때 박형룡 박사의 존재는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그만인 “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20)Ibid.
(21)그러한 태도는 삼사 년 후 기존 대한 예장에서 축출되어 별도의 교단을 형성하게 될 때 발회식 취지문에서 밝힌 바, 기존 예장에 대한 고신측의 그 간의 태도가 그것을 “장중 보옥”처럼 여겼다는 말과는 별로 조화되지 않는다.
(22정규오, 《신학적 입장에서 본 한국장로교회사》 (I), 73.
(23)김양선, 227. 김요나, 90년사, 317.
(24)남영환, 313.
(25)김요나, 90년사,316.
(26)박윤선, “고신 초창기와 나,” <월간고신> 1986년 9월: 19.
(27)남영환, 313.
(28)김양선, 153. 남영환, 313. 장동민은 박형룡이 고신측으로부터 이러한 동의를 얻어 낸 것은 부산에 내려가기 전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346). 그러나 아마도 부산에 도착한 직후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김양선의 진술이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 같다.
(29)남영환, 309-310, 314; 허순길, 50년사, 52-55.
(30)만일 이 때 그러한 조건들에 한상동 목사가 합의한 것이 사실이라면 얼마 후 한상동 목사가 그러한 조건들의 이행을 거부한 것은 약속 위반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31)Hunt's Letter to Marsden, Oct. 31, 1947. 이들 51인의 조선신학교 학생들은 송상석 목사 편에 박형룡 박사의 귀국을 간청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었다.
(32)1947년 11월 17일, 한부선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의 해당 부분은 다음과 같다. “This morning I went to see Han and Dr. Park. Presbytery is to meet next month. 김길창 and his crowd are talking of disciplining the Seminary faction, . . .He says for himself, he thinks that if the other side would discipline the Seminary group it would be a good thing, for then we'd form a new Presbytery and he thinks the common people would flock to the banner. I'm not sure it's that easy. . . .
(33)허순길, 50년사, 62.
(34)이 사실을 보면 경남노회 안에 신사참배가 큰 죄였다는 인식을 가진 지도자들이 상당수, 때로는 다수파로 존재했으며 따라서 신사참배가 죄가 아니라는 주장을 한 김길창 등의 입지가 그리 넓지는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어쩔 수 없이 신사참배에 굴복은 했었으나 그것을 회개하고 자숙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견해에 동의하는 온건파들이 경남노회의 다수를 이루었던 것 같다.
(35)경남 제49회 정기노회록. 남영환, 323.
(36)김양선, 154.
(37)Ibid., 153-54. 여기서 교회 재건 방안이란 물론, 출옥 성도들이 만든 교회 재건 기본 원칙들 속에 명시된 바, 신사참배한 목사들이 자숙안을 철저히 준행한다는 조건 하에 목사직에 복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38)Ibid., 153.
(39)Ibid, 한상동 목사가 노회 탈퇴를 취소하자 최덕지를 중심한 과격파들은 그를 타협주의자로 몰아세우면서 “재건파”라는 분리주의 교회의 설립을 완성했다. 재건파는 당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1. 하나님께 범죄한 구예배당에는 하나님이 떠나시고 안 계시니 예배당을 불태워 없애야 한다 (그들은 실제로 몇몇 교회 예배당을 불태웠다). 2. 현실 교인들은 동참죄를 범하고 있으니 인사를 하지 말라. 부부 간은 갈라서야 한다. 부모 형제라도 절연하라. 3. 알고 했든 모르고 했든 만일 인사를 했거나 말을 했으면 입을 씻어 내어야 하고 상당 기간 자숙해야 한다. 남영환, 308-9.
(40)박윤선, “고신 초창기와 나,” <월간 고신> 1986년 9월, 19.
(41)김양선, 154. 김양선은 이 부분에 대한 진술에서 메첸파 선교사들에 대해 “독선적”이라거나 “비협동적”이라는 묘사를 사용하면서 그들에 대해 강한 부정적 인식을 자주 드러내고 있다.
(42)Ibid., 그러나 간하배는 한부선이 미 주류 장로교 선교사들에게 협조적이었다는 증거들을 제시한다.
(43)이 부분은 박응규, 『한부선 평전』에 많이 의존한다.
(44)이것은 얼마 후 정통장로교회 (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 명칭을 바꾸었다.
(45)새 교단에 대한 그의 그러한 충성이 인정을 받은 결과 후일 그가 1957년에 다시 미국으로 가서 안식년을 보낼 때 그는 미 정통장로교회의 총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46)주남선, 한상동, “대한예수교 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 <고신교회 역사 자료집> vol. 6. 고려신학대학원 도서관 편, 3-4. 한부선은 만주에서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하던 한인 70여명과 함께 투옥되었고 그 중 네 명은 결국 순교했다.
(47)Bruce Hunt, "Korean Martyrs: Part II," Reformed Bulletin of Missions (Dec. 1968): 11. 박응규, 한부선 평전, 286에서 재인용.
(48)“A Presbyterian Covenant," Translated by Bruce Hunt. Presbyterian Guardian (Jan. 1943) 19-25; (Feb. 1943), 37-40. 최덕성, 《장로교인 언약과 바르멘 선언》 (본문과 현장 사이, 2000), 81.
(49)“장로교인 언약,” 최덕성, 《장로교인 언약과 바르멘 선언》 (본문과 현장 사이, 2000), 77-78.
(50)Letter to Marsden, Oct. 5, 1945.
(51)Letter to Hunt, Sep. 20, 1946.
(52)Letter to Marsden, Nov. 7, 1946.
(53)서영일, 박윤선의 개혁 신학 연구, 219.
(54)1946년 11월 18일, 한부선이 말스덴에게 보낸 편지. 한부선이 그 해 11월 7일에 말스덴에게 보낸 편지도 참조하라.
(55)Bruce F. Hunt, "Report from Korea," The Messenger (미정통장로교회의 선교사 정기간행물), 1947년 2월, p. 2-3. Conn, "Studie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143에서 재인용.
(56)특기할 사실은, 당시 미국에 있는 정통 장로교회도 기존 한국 장로교회에 대해 한부선과 동일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미정통장로교 선교 본부는 한부선 등 자기들의 재한 선교사들에게 기존 한국 장로교회로부터 분리하라고 지시했다. 신사참배 문제에 대해 심사숙고한 미정통장로교 해외 선교부는 “소속 선교사들이 한국 장로교회와의 관계를 청산하고 그들이 예전에 활동했던 선교지의 조직이나 단체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도록 권고했다.” Hunt's personal annual report on Aug. 1939, 2.
(57)1942년 일제의 강요에 의해 해체되었던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 제31회를 계승한 것이었다. 남북 통일의 희망은 점점 묘연해지고 북한의 교역자와 신자들이 다수 월남했기 때문에 남한에서만이라도 총회를 재건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의 결과였다.
(58)주남선, 한상동, “대한예수교 장로회 성도들 앞에 드림,” <고신교회 역사 자료집> vol. 6. 고려신학대학원 도서관 편, 4.
(59)여기에 대해 자신이 스스로 노회에 제명을 요청했기 때문에 노회가 그것을 받아들여 그를 제명해 주었다는 견해도 있다. 한부선은 신사참배에 굴복한 노회에 소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을 수 있다.
(60)Conn, "Studies,"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153-54. 각주 49.
(61)김양선, 163.
(62)The Christian Beacon, 1959. 4. 16. 장동민, 384에서 재인용.
(63)정통장로교가 수립된 미장로교 분열의 역사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상술하고 있다.
(64)이상규, “함일돈의 생애와 선교 사역,” 고신대학교 부설 기독교 사상 연구소, 기독교 사상 연구, 도서출판 영문, 1996, 105-113.
(65)간하배의 표현에 의하면, 한상동과 한부선 사이에는 “기질적”으로 그리고 “신학적 확신”에 있어 큰 유사성이 있었다. Conn, "Studies," 154.
(66)Conn, 154.
(67)출옥 성도들이 “신학 교육”에 대해 메첸파 선교사들의 “보수적 견해”를 박형룡의 “개방적” 견해보다 선호했다는 김양선의 표현은 다소 애매하지만 “개방적”이라거나 “보수적”이라는 표현이 신학 사상에 관한 언급이 아니라 외국 선교부와의 협력에 관한 것이라면 이해가 된다. 왜냐하면 바로 앞, 즉 해방 후 십년사 153쪽에서 김양선은 박형룡이 “메첸파의 신학 사상을 가장 건전한 것으로 인정”했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박형룡도 메첸파 못지 않게 신학 사상 면에서는 보수적이었다는 말이다.
(68)김양선, 154.
(69)김양선, 154-55. 김양선은 박형룡의 “신앙 노선”을 “현 총회 및 4선교회지지론”이라 요약하고 고신파의 신앙 노선은 “현총회를 떠나 성자들만의 신총회를 설립하자는 것”으로 그것은 “메첸파 선교사들의 독선적 신앙 태도와 일맥 상통하는 것”이었다고 정의한다. 만일 김양선의 진단이 정확한 것이라면 한국 장로교에 미친 미국 교회의 존재의 영향이 그처럼 지대했다는 말이 된다.
(70)정규오, 106.
(71)김요나, 총신 90년사, 322.
(72)허순길, 신대원 50년사, 62-63. 그렇다면 과연 고신에 그러한 “논의가 전혀 없었다”는 진술이 무슨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질문은 제기될 수 있다. 공식적 토론을 통한 결정 과정은 없었지만 고신 구성원들이 모두 묵시적 동의 하에 교단 신설을 추진하고 있었다는 의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73)한부선이 1948년 6월 6일 정통장로교 선교위원회에 보낸 편지, Harvie Conn, "Studies in the Theology of Korean Presbyterian Church," Westminster Theological Journal, vol. 30, (1967), 152,
(74)Conn, 149.
(75)김양선, 228. 김요나는 서울의 보수파 목사들이 “고려파 운동 소식을 듣고 크게 우려”하여 박형룡에게 “하루라도 속히 상경해서 서울에 신학교를 세워야 함을 간청했다”고 적고 있다. 아마도 고려파가 총회로부터 이탈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려한 것 같다. 322.
(76)남영환, 310.
(77)김양선, 154. 박형룡이 정확히 언제 고신을 사임했는가 하는 시기 문제가 중요하다. 그 이유는 그의 사임이 고신에 대한 제34회 장로교 총회의 거부 결정에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문제와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만일 그의 사임이 총회 전에 이루어졌다면 그것이 총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많고 그 후에 있었다면 적어도 총회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그런데 이 점에 관한 사가들의 진술이 엇갈린다. 김양선은 1948년 총회 무렵에는 “박형룡이 이미 고려신학교를 떠난 때”였다고 적고 있다. 그래서 총회 역시 고려신학교의 “독선적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김양선, 156). 한부선 선교사는 자기 아내에게 보낸 4월 25일자 편지에서 박박사의 사면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고 쓰고 있다. 그 말은 그 전에 이미 박형룡이 고신에 사의를 표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5월 25일자로 선교 본부에 보낸 편지에서는 “박박사가 결국 지난 주에 사표를 제출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임을 두 번했다는 말인가? 물론 그것은 아니다. 공식적 사표 수락이 총회 후에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그가 학교에 실질적으로 사표를 제출한 것은 아마 늦어도 4월 초순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사표를 제출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책임있는 교장이 4월 한 달 내내 거의 학교에서 근무하지 않고 서울에 머물러 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4월 한 달간 고신 이사회는 박형룡의 사표를 즉시 수락하지 않고 그에게 재고를 요청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볼 때 4월 이전에 이미 박형룡이 고신을 떠날 결심을 굳혔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그리고는 4월 초부터 서울에 올라가 서울의 보수주의 지도자들과 함께 새로운 보수 신학교 설립을 준비하느라 분주했던 것 같다. 그는 4월 20일부터 열린 제34차 총회에 참석하여 총회가 고신을 부정하는 것을 목격한 후 부산으로 내려가 자신의 사임을 재확인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고신 사임 소식은 이미 4월 초부터 서울 교계에 알려졌을 것이고 그러한 소식이 총회의 고신 거부 결정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
(78)이것은 허순길 50년사, 50-64, 남영환, 309-317에 나타나 있다.
(79)심군식, 《세상 끝 날까지》, 소망사, 1977, 303-305
(80)김영재, 한국교회사, 개혁주의 신행협회, 1992, 251.
(81)그 때에 물론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졸업생들이 과연 미장로교에서 안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염려가 없지 않았으나 메이첸은 그 길을 고수했다. 결국 개교 6 년 후인 1935년 메이쳔이 정통장로교회라는 독립된 교단을 창설함으로써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졸업생들이 미장로교에서 안수받을 필요 자체가 없어졌다.
(82)박윤선이 메이첸에게 보낸 편지, 1936. 7. 14. 미국 유학의 첫 경험은 학생들에게 대개 깊은 인상을 남긴다. 특히 그 학교가 유명한 학교이고 가르치는 교수들이 대가로 알려진 사람들이면 더욱 그러하다. 박윤선도 순진한 학생으로서 선생들을 무조건 존경하는 경향이 있었다. 특히 그는 메이첸을 절대적으로 존경했고 거의 맹목적으로 숭배했다. 어느 다과회 석상에서 한 노교수는 “박윤선씨는 예수님과 또 메이첸을 믿는 듯합니다.”고 말했는데 박윤선은 그 교수가 자기 심정을 “잘 이해했다”고 말했다. 또 1936년 9월 3일 메이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메이첸의 가르침을 정확무오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고린도후서 주석을 쓰면서 메이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나는 해석 방법에서 유일한 참된 방법이라 믿는 바 당신이 가르쳐 주신 방법을 따르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의 성경 해석 강의 시간에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이 내 영혼 속에 살아 있습니다”고 말했다.
(83)박윤선, “신학 연구에 바친 생애,” 39.
(84)그러나 특기할만한 사실은, 다른 많은 한국 장로교회들과 미국 선교사들의 관계와는 달리, 고려파의 경우 OPC로부터 받은 원조는 무시할만한 것이었다는 점이다. Bong Rin Ro "Division and Reunion in the Presbyterian Church in Korea: 1959-68," Concordia Theological Seminary, 미출판 Ph.D. 논문, p. 167. 사실 지극히 작은 교단인 미국 OPC는 줄래야 줄 돈이 없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말해서 지갑에 돈이 없습니다.” Letter to Marsden, Nov. 18, 1946. 게다가 한부선은 한국 교회 지도자들을 재정으로 돕는 것을 반대했다. “신학교가 [외국] 보조금에 맛을 들인다면. . .지도자들은 자연히 기대는 습관이 생길 것입니다.” Letter to Marsden, Jun. 28, 1947.
(85)그러나 정통 장로교회와 한부선이 고려신학교 설립이나 운영 자체에 관여하지는 않았다. 혹자는 정통 장로교 선교사들 “몇 사람이 한국 교회와 그 지도자들과 함세하여 [고려] 성경 학원과 [고려] 신학교를 설립했다.”고 쓰고 있다. 민경배도 《한국기독교회사》 1982, p. 456에서 그렇게 주장한다. 그러나 고려신학교가 개교한 것은 1946년 9월이었고 한부선이 한국에 도착한 것은 10월 말이었다.
(86)공교롭게도 남한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한 지도자들이 대부분 경남 출신이었다. 주남선은 거창, 주기철은 웅천, 한상동은 부산, 이인재는 밀양, 조수옥은 하동, 최덕지는 통영이 고향이었다.
(87)박윤선, “고 주남선 목사 옥고기,” <파숫군> 15호, 22-23.
(88)허순길, 50년사, 52.
(89)박형룡, “사도적 신학 소론” 박형룡 전집13: 216-231.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78.
(90)사실 한상동은 박형룡이 고신에 와서 그러한 제안을 하기 전부터 신학교가 부산에 있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강한 고집을 가지고 있었다. 1947년 8월 12일, 보수 신학교가 서울에 있어야 한다는 서울의 지도급 보수주의 목사들의 견해를 대변하여 김치선 박사가 부산에 내려왔다. 그는 박윤선과 함께 한상동을 찾아가 밤 1시까지 고려신학교를 서울로 옮기자고 설득했으나 한상동은 끝내 그 제안을 거부했다. 이것은 신학교의 부산 소재에 대한 한상동의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가를 보여 준다. 한부선이 1947년 8월 13일에 부인에게 쓴 편지, 허순길 50년사, 47쪽 각주 57에서 재인용.
(91)남영환, <한국 교회와 교단>, 310. 허순길, 50년사, 55.
(92)허순길, 50년사, 56.
(93)남영환, 322.
(94)허순길, 50년사, 56.
(95)고신 사가들은 박형룡의 고신 이탈을 심하게 비판한다. “한국 교회의 개혁과 재건을 위해 싸우는 진리 운동으로부터의 이탈”이라는 것이다. 혹은 그가 권력욕이나 개인적 야심 때문에 고신을 떠났다고 폄하한다. 허순길, 신대원 50년사, 62.
(96)한부선에 의하면, 신학교를 서울로 이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박형룡이 한상동과 한부선보다 더 찬성하는 입장이었다. 한부선이 부인에게 보낸 편지. 1947년 9월 30일과 1948년 5월 1일자.
(97)정규오, 74.
(98)허순길, 50년사, 56-57.
(99)당시 주한 미남북 장로교 선교사들을 비롯한 선교사들의 신학적 성향에 대해서는 허순길과 장동민의 견해가 완전 상충된다. 허순길은 박형룡 박사가 그 때 해방 후 한국에 처음 파송된 미국 선교사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해방 전 한국에서 사역하던 선교사들도 일제에 의해 추방된 후 미국에 머무는 동안에 에큐메니칼 정신에 젖어 돌아왔다는 사실에 대해 전혀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고 비난한다 (50년사, 59). 그러나 그렇게 단정하는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장동민이 지적하듯, “내한한 젊은 선교사들이 에큐메니칼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고 하지만 해방 직후 박형룡이 서울에 올라갈 당시 선교사들이 자유주의자들이었다고 생각할만한 아무런 단서가 없었다.” 장동민은 박형룡의 포괄주의에 이해할만한 요소들이 있다고 지적하면서 미국 본국의 북장로교 선교부와 상관 없이 해방 후 다시 내한한 주한 남북 장로교 선교사들은 해방 전부터 한국에서 사역하던 자들로 보수적인 신학 사상의 소유자들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한결같이 신사참배에 반대하여 자신들이 일하던 학교들의 폐쇄와 한국으로부터의 강제 추방까지 감수했던 이들이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1951년 총회 신학교가 설립되었을 때 교수로 부임한 선교사들을 보면, 교장 감부열 (Archibald Campbell, 1890-1977)은 북장로교 선교사로 신사참배 거부로 강제 출국당했다가 1947년에 내한했는데 박형룡과 절친한 관계였고, 인돈 (William Alderman Linton, 1891-1960)은 남장로교 선교사로서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그가 교장으로 있던 전주 신흥학교가 폐쇄되었으며 조하파 (Joseph Hopper, 1892-1971)은 보수적 남장로교 선교사로 평양신학교 교수였으며, 권세열 (Francis Kinsler, 1904-?)도 해방 전부터 평양에서 일하던 선교사로 해방 후 내한했다. 장동민은 박형룡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반대 입장을 취하기 시작한 것은 1958년 에큐메니칼 논쟁 때부터였다고 한다. 352-54.
(100)한상동, “현하 대한 교회에,” <파수군> 2호, 1949. 4월, 20쪽
(101)한상동, “현하 대한 교회에,” <파수군> 2호, 1949. 4월 18쪽.
(102)남영환, 310.
(103)“한상동 목사 옥중기,” <파숫군> 29호 (1953년 6월), 22.
(104)한상동, “현하 대한 교회에,” <파수군> 2호, 1949. 4월 18쪽.
(105)Ibid., 17.
(106)“한상동 목사 옥중기,” <파숫군> 29호 (1953년 6월), 22.
(107)한상동, “소위 고려파가 생기기까지,” <고신학보> 창간호 1972년 3월, 37쪽.
(108)김요나, 총신 90년사, 319.
(109)김요나, 총신 90년사, 319-20
(110)당시 고신의 진로에 대한 학생들 사이의 의견 대립이 심각했다는 것은 선교사들의 보고서에도 나타난다. 한부선은 “서울에서 내려온 학생들”은 “교회 안의 문제에 대해 입장이 그리 선명치 못한 것 같습니다”고 쓰고 있다. “그들은 자유주의에 대해서는 강력히 반대하지만 일제 하에서 교회를 인도하여 신사참배를 하게 했으며 지금도 교회를 장악하고 있는 자들의 교권주의ecclesiasticism에 대해서는 그처럼 강하게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자들의 죄를 인정하고 있지만, 거의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교회의 평화를 지켜야 한다는 그들의 커다란 바램이 여기 기존 학생들의 태도와는 다소 다릅니다.” 1947년 10월 31일 한부선이 정통장로교 선교위원회에 보낸 편지.
(111)서영일, 229.
(112)남영환, 316.
(113)박윤선, “고신 초창기와 나,” <월간 고신> 1986년 9월호. 20.
(114)서영일, 232. 김양선의 주장에 의하면, 출옥성도들은 메첸파 선교사들과 박박사 양편을 다 붙들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결국 선교사들 쪽을 선택했다. 결국 고신측은 박형룡과 메첸파 선교사들 사이의 양자택일을 해야 할 상황에서 박형룡을 버리는 대신 메첸파 선교사들을 택했다는 말이다.
(115)간하배도 “신사참배 죄 회개에 대한 고신의 강조가 너무 지나치다고 많은 이들이 염려하는 것 같았다”고 지적한다. “회개에 대한 그들의 바램이, 비록 건전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온건함을 요하는 것”이었다는 말이다. 그들은 “권징보다는 가르침과 인내가 더 요청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Conn, WTJ., vol. 30, 155.
(116)한부선이 미정통장로교 선교부 총무 말스덴에게 보낸 편지, 1948. 5. 25.
(117)허순길, 신대원50년사, 62쪽 각주 82.
(118)남영환, 316.
(119)김양선, 154-55.
(120)박형룡의 신학교 설립을 지원한 목사들은 이정로, 권연호, 이인식, 김선주, 김광수, 계일승, 이운형, 이재형, 전인선, 김현정 등이었는데 이 중에는 일제 때 총회장을 지낸 사람이 세 명 포함되어 있다. 허순길, 65.
(121)그러나 김요나는 박형룡을 도와 장로회 신학교를 설립하는 데 앞장선 많은 보수주의 목사들은 친일 전력을 지닌 인물들이었다고 지적한다. 특히 주기철 목사가 옥고를 겪고 있을 때 주목사를 산정현 교회에서 파면한 노회가 임시 당회장으로 세워 주목사의 가족들을 사택에서 내어 쫒는 일을 하게 했던 이인식 목사가 그들 중 한 사람이었다. 김요나, 《일사각오》, 서울: 한국교회 뿌리 찾기 선교회, 1992, 473. 이 때문에 장동민은 장로회 신학교 설립이 신사참배 전력을 가진 교권주의 목사들이 자신들의 과거 행적에 면죄부를 얻기 위해 채용한 수단이며 박형룡은 그들의 그러한 시도에 이용된 것이라 냉소하기도 한다. 351.
(122)그것은 아직 합동과 통합이 나누어지기 전이었으므로 고신측을 제외한 한국 장로교 보수주의자들의 지지를 망라한 신학교였다. 현재의 총회 신학교와 장로회 신학교는 1959년 합동과 통합이 교단 분열을 일으킨 후 각각 세운 학교이므로 1951년 당시의 장로회 신학교나 총회 신학교와는 직접적인 계승 관계가 있는 기관들은 아니다.
(123)박형룡 박사 저작 전집 18:199, 한국기독교교육연구원, 1983
(124)Ibid.
(
125)Ibid.
(126)Ibid. 199-200
(127)Ibid. “떠날 생각”을 했다는 표현에서도 여전히 박형룡은 고려파가 능동적으로 총회를 이탈하려 했다는 투로 말하고 있다.
(128)Ibid., 200
(129)Ibid.,
(130)Ibid.,
(131)김양선, 159.
(132)김양선, 164-65.
(133)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김양선 자신이 신사참배와 관련하여 일제에 의해 박해받은 경력을 가졌기 때문이다. 1938년의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했을 때 평양 신학교 학생 장홍련이 격분하여 평양 신학교 교정에 있던 평북 노회장 김일선의 기념 식수를 도끼로 찍어 버렸다. 이 때 일경은 장홍련 뿐 아니라 박형룡 교수, 그리고 김양선, 안광국 등 다수의 학생들을 불구속 입건했었다. 김양선, “신사참배 강요와 박해,” 한국 기독교사 연구, 서울: 기독교문사, 1971, 33.
(134)정규오, 106.
(135)김요나, 321-22.
(136)남영환, 312.
(137)1977년 9월 13일 대구 서문로 교회당에서 열린 고신측 제27차 총회는 이 때를 고신 교단의 출발점으로 간주한다고 결의했다. “진주 노회장 최연석 목사가 문의한 교단 창립 30주년 기산은 한상동 목사가 경남노회를 탈퇴 선언하고 67개 교회가 호응한 때가 창립 정신의 기준이 되므로 1946년 12월 3일을 교단 창립 기산일로 하도록 가결한다.” 제27회 (고신) 총회록, 26. 이에 앞서 1977년 3월 4일 “수난 성도 기념 사업회”는 제 1차 사업 계획으로 “대성회”를 개최하기로 했으며, 그 해 7월 5일 총회 교육부는 “대성회”의 명칭을 한상동 목사 탈퇴 선언을 기점으로 하여 ‘교단 창립 30주년 기념 대성회’로 정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교육부, 교단창립 30주년 기념 대성회: 순교정신 계승하자(1977), 92.
(138)<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 평양지방 법원, 1945. 5. 18). “제10피고 서원상동 (한상동),” “제16피고 국본주원 (이인재),” 이덕주, 《사랑의 순교자 주기철 목사 연구》, 270-72에서 재인용
(
139)김양선, 312.
(140)남영환, 305. 한편 박형룡의 경력 자체가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를 자신있게 강조하기에는 꺼림칙한 면이 있었다. 그는 1938년 평양 신학교의 폐교 후 1940년대 초부터 1947년 고려신학교에 부임하기까지 봉천 신학교에서 가르쳤다. 그런데 그 학교는 공식적으로 신사참배에 참여하고 있었다. 물론 학교측의 배려로 박윤선과 그 자신은 거기서 열외가 될 수 있었지만 다른 모든 교수들과 신학생들은 모두 그것에 참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박형룡이 몸담고 있던 학교는 전체적으로 그리고 공공연히 신사참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상황에 대해 만일 그가 정말 철저히 신사참배를 죄로 여겼다면 학교를 향해서 우상숭배의 죄를 중지하라고 말했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학교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는 그처럼 범죄하는 학교에 남아 계속 가르칠 것이 아니라 그 학교를 떠나야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어느 쪽도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현실의 부패와 타협했다 할 수 있다. 그러한 경력의 소유자로서는 해방 후 신사참배자들에 대해 강력한 회개를 촉구하거나 권징을 주장하기 곤란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