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비우스 선교정책
네비우스 선교정책 [Nevius Mission Plan] - 독립, 자치, 진취??? (저항적민족주의적인 사고??? 피식민지에 대한 식민지 자본 국가의 수탈일 뿐 )
(abcy2k)
[2005-05-20]
[백과사전 발췌]
19세기 말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들을 위해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가 네비우스 선교사의 제안에 따라 채택한 선교정책이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부는 1890년까지 H.N.앨런, H.G.언더우드 등 10여 명의 선교사를 한국에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갓 신학교를 졸업한 2,30대의 청년들이었다. 해외 선교 경험이 없던 이들은 한국에 와서 선교부와의 관계, 한국인과의 관계, 선교사들 간의 원활한 관계 등을 정립하지 못하고 많은 시행 착오와 갈등을 겪었다.
이에 선교사들은 본국 선교부에 도움을 청하였고, 선교부는 당시 중국 체푸에서 활동 중이던 네비우스(John L. Nevius)를 서울로 보냈다. 그는 이미 1855년에 중국에서 활동한 경험을 바탕으로 논문집 〈선교 방법론(Methods of Mission Work)〉을 발표하여 선교부로부터 큰 평가를 받은 바 있었다. 그는 내한하여 서울에 2주간 머물면서 선교사들과 회합을 갖고 강연을 하였는데, 그의 논문과 강연은 당시 선교정책을 확립하지 못하고 있던 선교사들에게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네비우스는 선교사업의 궁극 목적을 ‘독립적이고 자립적이며 진취적인 토착교회 형성’에 두고, 선교정책의 기본 이념으로 자진 전도, 자력 운영, 자주 치리(治理)의 세 가지를 내세웠다. 이들 이념은 이미 각국 선교회에서 제기되었던 것으로 19세기 후발 자본주의 국가들이 식민지 개척과 함께 추진했던 토착교회 육성 방안이었다. 그는 특히 토착교회의 자립 능력을 강조하여, 토착인 전도사도 선교부의 재정적 도움을 받지 않고 토착교인들의 헌금으로 활동하게 하였고, 학교나 병원 등 시설비가 많이 드는 기관을 제외한 교회 건축비는 토착교인들이 부담하도록 유도하였다.
장로회 선교사들은 각기 네비우스의 선교 원칙을 한국 상황에 적응시키려고 노력하여 여러 가지 방법론을 마련하였으며, 이런 방법론은 1891년 〈북장로회 선교회 규칙〉에 정리되었고, 1893년에는 한국 장로교 선교부 공의회에서 10개의 구체적인 정책으로 확정되었다. 10개 정책은 네비우스의 선교 정책인 ‘3자(三自)’ 이념을 그대로 반영한 외에, 선교 대상을 근로자와 부녀자 중심, 청소년 중심으로 잡고, 성서를 번역, 보급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정책들은 이후 미국 남장로회, 캐나다 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 선교부 소속 선교사들에게 그대로 채택됨으로써 한국 장로교회의 보편적 선교정책이 되었으며, 감리교 ·성결교 ·성공회 ·침례교 등의 타 교파 선교부도 이 정책의 실질적인 영향을 받음으로써 한국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대표적인 선교정책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