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둥에서는 실패한 네비우스 정책
네비우스 선교정책이 산둥에서는 왜 실패 했을까??? - 한국인들이 아닌 외국선교사들을 위한 선교정책(지식이 주어지면 조선인들의 믿음이 약해진다 주장했던 일제당시 조선천주교구장 뷔텔 신부와 같은 논리였을뿐
(abcy2k)
[2005-05-20]
[발췌분]
이 땅의 기독교역사 1백여년. 한국도 이제 복음을 전해주는 선교국이 되었다. 찬송가 구절 처럼 "저 북방 얼음산과 또 대양 산호섬"까지 선교사들이 진출, 활약하고 있다.
그러나 열풍처럼 밀어닥친 선교바람으로 내실화를 위한 시간적 여유를 미처 마련하지 못한 탓에 교계 일각에선 선교공명주의, 경쟁적 업적주의를 우려하는 비판의 소리도 들려온다. 이 들은 현장성을 반영한 선교정책의 부재, 현지 협력체제의 미비 등을 우선 문제점으로 꼽고 있다.
그렇다면 1백여년전 피선교지 한국의 상황을 미뤄봄으로써 온고지신의 지혜를 얻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선교초기에 있어서는 어느 지역이든 마찬가지겠지만 과거 한국의 경우도 개별교단 파송 선 교사들의 각개약진식 행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본격 선교가 시작된 지 1~2년도 채 못되어 선교사들간에는 선교방법을 둘러싸고 일부 알력 과 불협화음을 연출하였다. 이런 알력은 선교사업이 어떤 형태로든 조선왕실 및 정부권력과 관련을 맺을 수 밖에 없던 당시 상황과 맞물려 선교사 개개인들의 정치적 입장의 차이로까 지 표출되기도 했다. 같은 북장로회 소속인 앨런과 언더우드도 선교전략 상의 근본적인 문 제로 의견충돌을 일으켜 언더우드가 한때 선교사직을 사임한 것은 그의 입국 이듬해의 일이 다.
이런 갈등은 초기 선교사들 대부분이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현장 경험없이 열정만 갖고 파송된 젊은이들이라는 점, 또 격동하는 한말사회에 대응하는 선교사 개개인의 신앙 및 정 치적 입장이 달랐다는 점 등에도 기인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런 교단별 개인별 차별성을 조정 할 선교방법론 내지 정책의 부재에 그 원인을 찾아 볼 수 있다.
내한선교사가 점점 늘어나고 사업이 활성화될수록 마찰의 소지는 그만큼 많아졌다. 단순한 갈등의 문제 뿐만 아니라 선교활동의 중첩으로 인한 인적 물적 자원의 낭비를 막고 일의 효 율성을 높이기 위해서라도 선교의 순수 열정을 유효적절하게 조절할 제도적 장치와 이념적 지침 등이 꼭 마련되어야 했다.
이런 일은 특히 교파유입이 많았고 사업도 활발히 벌인 장로교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1889년 주한 북장로회와 호주 장로회는 연합선교공의회를 결성, 서로 협력의 길을 모색한다.
이듬해 호주장로회 데이비스 목사의 죽음으로 뚜렷한 일을 못했지만 이 공의회는 우리나라 최초의 교회연합기관이었다.
한편 1890년 북장로회 선교사들은 중국에서 30년 넘게 전도사업을 벌여온 노련한 선교사 네비우스를 초청, 그의 경험과 연륜을 한국에 적용시키는 문제를 검토하기 시작한다. 네비우 스는 약 2주간 서울에 머무르며 나름대로 체득한 중국선교전략을 토대로 한국선교의 기본원 칙을 대략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한사람을 전도하면 끝까지 붙들어 그가 개인전도 일꾼이 될 때까지 인도한다. 둘째 교회의 운영과 기구조직은 그 교회가 능히 감당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기획, 실천한다. 셋 째 교회에서 전도사업을 감당할만한 인물이 나오거나 재정을 공급할만한 사람이 생기면 그 들을 선임하여 지도일꾼으로 육성한다. 넷째 교회당 건축은 가급적 교인들 자신의 힘으로 하게 하되 건축구조나 모양은 한국고유의 양식으로 짓도록 한다.
한마디로 "독립하고 자립하며 진취적인 토착교회"를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보통 자 력전도 자치제도 자급운영으로 요약된다.
1892년 남장로회 선교사들의 내한을 계기로 장로교는 이듬해 1월 다시 장로교 치리 선교부 공의회를 조직하고 네비우스 원칙을 바탕으로 정식 선교정책 10개항을 결정한다(이 10개항 을 "네비우스 정책"이라 일컫기도 한다).
이 정책에는 선교의 주대상을 근로자와 부녀자로 하자는 것과 의료 교육강화 등이 포함되 어 있다. 특히 성서번역과 한글전용은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한글이 민족문자로 정착 하는데 공헌하였다.
교회사가 민경배교수(연세대)는 이런 네비우스원칙의 뿌리를 영국의 유명한 선교사였던 헨 리 벤에게서 찾고 있다. 벤은 1860년대에 광범위한 연구와 자료분석을 통해 이 자급 자립 자립선교의 원칙을 세계선교방법으로 채택할 것을 주창한 사람이다.
"19세기 서양선교사들의 행적을 분석한 벤은 선교는 결과적으로 피선교지에 근대적 시민계 급을 형성하는 부르주아 계급운동이 된다고 갈파하고, 다라서 시민적인 책임과 도덕 자기의 식을 형성하는 과정을 거치게 될 선교의 정책은 자급 자립 자립선교로 묶을 수 있다고 주장 하였다"
네비우스 정책의 핵심도 여기에 있다.
이렇듯 네비우스 정책은 하나님의 말씀을 터로 하여 자급자치의 원칙 하에 희생과 봉사를 내용으로 하는 고도의 기독교윤리를 실천하는 데서 오늘의 큰 성과를 얻은 면도 있고 교회 와 학교 그리고 병원을 통한 입체적 선교형태로 한국교회사에 큰 기여를 하였지만 한편으론 구체적 실천과정에서 한국교회의 장기적 발전에 방해가 되는 측면도 없지 않았다.
대표적인 것이 한국인 교역자 양성정책이다. 의식있는 한국인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던 "레이놀즈 원칙"을 보면 "적어도 선교사업 초기에는 한국인 교역자를 미국에 유학시키지 말 라"는 대목이 있다.
교역자의 지적 수준이 평신도 보다 높아지면 양자의 괴리감을 유발시켜 오히려 선교에 방 해가 된다는 것이다. 한국인의 전반적인 의식수준을 너무 폄하한 결과, 교역자의 자질 향상 을 제도적으로 규제하고만 셈이다.
네비우스 정책에 대한 비판은 선교사 가운데서도 있었다. 스코트 선교사는 이 정책의 공을 인정하면서도 이 정책의 절대화가 야기한 부작용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교회조직과 예배를 지나치게 강조한 결과 교회가 별개의 공동체가 되어 사회적 문제에 무 관심한 쪽으로 흘렀다. 자급운영을 강조한 탓에 교회재정은 자체운영비로만 인식되어 사회 복지 등에는 거의 돌려지지 못했다"
교회조직과 운영면에서 네비우스 정책은 괄목할만한 결과를 가져왔으나, 70~80년 전의 이 미 지적된 교역자의 자질문제 및 교회의 대사회적 무관심이 아직까지 한국교회가 안고 있는 맹점의 하나라고 지적될 수 있다면 네비우스 정책의 역기능 도한 재인식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