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신인양성일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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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신인양성일위


제 2004 학년도
석사학위(M.Div.) 청구논문







신인 양성 일위의 역사적 - 신학적 고찰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 학 과
신학전공
최 영 길

예수님의 신인 양성 일위의 역사적 고찰








이 論文을 碩士學位 論文으로 提出함

2004년 11월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신 학 과
신학전공
최 영 길


웨스트민스터神學大學院大學校

논문개요
사람의 구원은 창세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삼위 하나님의 각 위간의 목적하심에
기초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을 만드시어 하나님과 함께하며, 영원토
록 영광을 베푸심과 영광 받으심을 영원 전에 목적하셨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목적 예택(預擇), 목적예정, 목적창조를 이루셨다. 헌데 목적 예택 예정은 창세 전
그리스도안에서라는 언약적 예택 예정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이는 실제적인
택정의 시작이고, 그 구체적 결과는 창조이후 천지를 창조한 이후 현상적으로 구체
화되기에, 목적 예택 예정의 결과 태초가 있게 되었고 구체적인 창조역사가 있음으
로 시간이 시작되었다.
예정은 하나님의 기쁨에서 나오신 것이요, 영원 전 삼위 내에서 목적(엡1장12절)
하시니, 복 주사 하나님께 영광돌림 곧, 찬송이 되게 하시려고 하셨다. 그리스도 밖
에서는 영생 자체가 불능하기에 이중예정 용어가 사실상 용납될 수 없다. 곧 논리
적으로는 이중예정이 될 것이나 실제적으로는 단일예정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하심과 창조사이에는 시간이 있기 전과 시간이 시작된 후라는 차원
이 있음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창조 전에 하나님은 하나님의 종 천사를 영원이후에 지으셨으니 이는 주 하나
님 각위가 스스로 계시고, 영원 전에 나시고, 영원히 나오신 이후의 일이다.
천지가 혼돈(토우)과 공허(보우)하던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명하심은 진리와 성령
이 하나 되어서 있으라 하심의 원동력이 되니, 그 권위와 권능으로 빛과 어두움이
나누이고 구체적 창조가 이루어졌다. 그 순서는 후에 피조 될 것의 또 다른 토대가
되었다.
모든 창조가 완성되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고, 하나님은 기뻐하심 가운데 이
레 안식일에 쉼을 가졌다. 창조주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바라신 것은 피조물이 순종
함으로 영원히 지복을 누리기를 원하신 것이기에, 피조물의 가장 중심 거처 에덴에
사람을 놓으시고 동산 지기로 삼으시어, 하나님을 대리하여 피조물의 분복을 누리
도록 하셨으나, 사람은 하나님을 믿음으로 겸손히 순복하기보다는 자신의 자유의지
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렸고, 그 죄악의 결과 거짓 없으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
람은 죽음을 피할 수없게 되었다. 그 결과 남은 금생이 원치 않게 사망과 음부의
권세 하에 놓이게 되었다.
영원이후 피조된 영, 타락한 천사, 교만한 사단은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
음 바 된 사람을 거짓말로 속였다. 거짓은 곧 반 진실이자 영원히 멸망함의 단초이
다. 그러나 하나님은 실상 이 같은 사단의 획책에 대한 안배를 해 놓으셨으니 하나
님의 비밀이(엡1-3장) 그것이다.
그 구체적인 것은 그리스도안에서의 사람의 구원완성, 곧 몸의 부활과 영광이다.
애초부터 구원은 하나님의 위(位)사이의 목적과 그 신실함을 근원으로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사람이 겸손히 순종하며 의지함은 필연 적이어야 했다. 이는
생명나무로 표상되었다.
수천 년이 지난 후 메시아 예수님께서 오셔서 사활대속을 영 단번에 이루셨다.
이는 창세전에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긍휼하심으로 하나님과 같이 영원한 존재
를 지어 영원토록 영광 받으시고자 목적하심에 기초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영생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복음의 진정성을 확정케 했다. 이후 천국복음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 급속히 전파 되었다.
전파된 천국복음에 있어서, 난제 가운데 하나는 예수님의 신인 양성일위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구원하는 계시와 그의 영원한
존재와 본성사이의 본질적인 관계를 통하여 결정적으로 복음의 핵심과 내용이 계
시되었다.
동일본질론(Homoousion)과 신인 양성일위, 동일 본질 내에서의 상호 각 위격간
의 페리코레시스(상호내주, 상호통재), 대속에 있어서 보인 아버지의 내어주심과 아
들 자신의 자발적 주심,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간의 속성교류를 인성론에 이르는 인
격관계성 속에서 보인 구원 속죄적용의 속성교류 적 성격 등을 이제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일위이심을 고찰함 속에 칼케돈 회의에서 확정된 교리를 한 번 되짚어보
며, 더 나아가 기독교의 모든 영역에 피할 수없이 신인 양성일위와 관계된 바의 일
부를 고찰함으로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을 밝히 드러내고자 한다.



ABSTRACT
{{{{ A Study on One Person of Theoanthropos

}}
}}
{{{{ Choi, YeongGil
Department of Theology
Westminster Graduate
School of Theology

}}
}}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make every effort to live in peace with all
Men and to be Holy into Christ.(Heb 12:14)
One Person of the Theoanthropos( the God-Man) is important subject.
because Messiah Jesus is true God and True Man.
If Messiah Jesus is Our Savior, He must become to the God-man.

Our life demand ours to live in peace and to be holy.
But, To be Holy and to live in peace are possible only into Christ.
On account of this We study on dyophysic one person of the God-man.

The irreducible essentials of the Orthodox view are that Jesus Christ is one
Person, that He had a fully divine nature and a fully human nature, the natures
not mixed or confused, not divied or separated. The four great Chalcedonian
adverbs are essential to orthodoxy.


Thy doctrine of the two natures, particularly as expressed in the declaration
of the third council of Constantinople, 680 A.D. declaring that Jesus Christ had
two "wills," expressed in ancient vocabulary, is perhaps the most disturbing to
our modern consciousness.

Those in which the predicate belongs to the whole person. Those passages
"in which the person is the subject, but the predicate is true only of the divine
nature, or of the Logos." "Passages in which the person is the subject, but the
predicate is true only of the human nature." Passages which "have the
peculiarity that the denomination is derived from the divine nature, when the
predicate is not true of the divine nature itself, but only of the Theoanthropos"

It is of the greatest importance, absolutely essential to the orthodox doctrine
of the Person and the natures of Christ, that we hold that He possessed the
divine nature and human nature "without mixture, asynchutos," "without
change, atreptos," "without division, adiairetos," "without separation, achoristos."

He "continue to be God and man in two distinct natures and one person
forever." Our Lord Jesus Christ has, from eternity, and has never ceased to
have, all the attributes of Deity. Since His incarnation He has, and will never
cease to have, all the essential attributes of Humanity.

"But what about you?" he asked. "Who do you say I am?" (Matt 16:15)
"You are the Christ, the Son of the living God." (Matt16:16)



2004년 11월
최 영 길




목 차
논문개요 iv
Abstract vi
헌사(Dedication) vii
감사의 글(Acknowledgement) viii
제 1 장 서론 1
제 1 절 연구의 동기와 목적 1
제 2 절 연구 방법 2
제 2 장 기독론 논쟁의 역사적 배경 3
제 1 절 칼케돈 이전과 칼케돈의 결의 3
1. 니케아 회의 3
2. 네스토리우스 논쟁-- 양성 일위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6
가) 테오도레 6
나) 네스토리우스 7
다) 아타나시우스 9
라) 시릴 12
마) 레오 13
3. 칼케돈의 확정 15
4. 칼케돈의 회의 결과 17
제 2 절 칼케돈 이후 18
1. 단의론 19
2. 단성론 19
3. 다메섹의 요한 21
4. 종교개혁기 22
가) 일치신조 23
나) 헬베틱 제2 신앙고백 25
제 3 장 신인 양성 일위 28
제 1 절 신성 위격 고찰 28
1. 삼위일체와 신론으로 본 그리스도의 신성 28
가) 동방의 갑바도기아 삼인과 서방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의 특징 29
나) 상호내주 상호침투 적 관계성과 전유 30
2. 인격으로서의 동일본질 34
가) 하나님의 인격 35
나) 인격적 연합 38
제 2 절 구원과 성령 40
1. 신인 양성일위의 사활대속 40
가) 죽으심 대속 41
나) 승귀 높아지심 45
2. 신인 양성일위 의 화친 연합 47
가) 성육신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48
나) 믿음을 통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48
제 4 장 결론 50
참고문헌 52



제 1 장 서론


제 1 절 연구의 동기와 목적
메시아 예수 주님의 신인 양성일위는 그저 옛 신조의 선포로 마감된 교리가 아니
라, 여전히 우리에게 이어져 살펴보게 하는 진술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
히브리서 기자가 언급한 화평함과 거룩함을 모든 사람과 더불어 이루라는 것 역시,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룰 수 있는 삶이다.
곧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성육신에서 진정 지극히 높은 곳 곧 초월하신 곳
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 곧 내재 속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평화가
임함을 밝히 성경은 증거 한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살아가는 가운데 화평함과 거룩함이 요구되는데 이는 참 하나
님인 예수님이 참 사람으로 사신 바에 그 이치의 근간이 있다 여겨도 무리가 없을
듯하여 이제 '예수의 신인 양성 일위 고찰'이라는 논제로 상고해 보고자 한다.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일위이심을 고찰하고자 칼케돈 회의에서 확정된 교리를 한
번 되짚어보며, 더 나아가 교의신학의 주요 영역에 비추인 신인 양성일위와 관계된
바를 고찰함으로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초월과 내재를 아우르는 복음의 빛을 밝히
드러내고자 한다.







제 2 절 연구의 방법
본 연구의 제 2장 본론에서는 기독론 논쟁의 역사적 배경을 교리적 관점으로 살
피게 된다. 역사적 사건을 참 하나님께서 참 사람 되어 오신 바에 근거하여, 교리
사적 관점을 되짚어보되 신인 양성일위와 상관된 부분만을 살핌으로 한정한다.
교의학적 관점에서 신인 양성일위에 관해 교리 형성이면의 역사, 그것도 칼케돈 신
조와 신인 양성일위 이해에 기초를 가져다 준 칼케돈 전후를 역사적으로 고찰할
것이다. 이는 칼케돈에서 신인 양성일위에 대한 보다 구체적이며 명확한 울타리가
쳐졌기 때문이다.
다양한 견해들을 살피되 주제를 다룬 주요인물에 한정했는데, 동방의 경우는 안
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그리고 서방 학파의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 특
히 안디옥 학파의 경우는 교리역사상 문제가 되었던 네스토리우스 사건을 되짚어
봄으로, 그들이 잘못 인지했던 바를 다시 취함 없이 칼케돈 신조와 성경의 가르침
으로 복음을 밝힘을 의도한다.
또한 칼케돈 이후의 이의론이 정통으로 받아들여짐에서 신적 의지와 인적 의지
가 연합에 의한 하나됨이라 정리되었고, 그 이후 다메섹의 요한에 의하여 보다 구
체화된 교리가 형성 된 것을 살필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일위가 확정된 칼
케돈 이후의 이의론을 보다 명확히 하며, 특성 전달의 견해차에 의하여 이후 종교
개혁기의 양대 흐름은 루터 계열과 칼빈 계열의 특성전달에 대한 찬반의 이견을
살펴보았는데, 루터계열의 일치신조와 칼빈 계열의 헬베틱 제2 신앙고백 속에서 특
성 전달 교리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의미를 소개하였다.
제 3장의 신인 양성일위는 그리스도를 삼위일체의 제이위라는 관점에서 페리코
레시스에 초점을 두어 살피되, 신적 위격을 살펴보고자 한다. 구원과 성령에 의한
적용에서 역시 인격적인 화친 연합을 살피고자했고, 대속에 있어서의 신인양성 일
위와의 관계성을 간과치 않는다. 또한 신성과 인성이 한 인격 속에서 완전한 바를
고찰하고, 성령강림 후 내주하심에 보이는 성령과 인성의 거듭난 영과의 관계성을
화친 연합의 관점에서 살핌으로 전체적인 윤곽을 제시하고자 한다.




제 2 장 기독론 논쟁의 역사적
배경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사람 모두는 자기 자신의
개인적 신앙고백으로 응답해야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
이시니이다'(마16장16절, 막8장29절, 눅9장20절)라고 베드로가 고백한 이후 다양한
고백이 있었다. 역사상 이단을 대항하여 교회는 주후325년에 니케아 회의를, 381년
에는 콘스탄티노플 회의, 431년 에베소 회의, 451년 칼케돈 회의 등 중요한 회집을
통해 그리스도의 참되고 정당한 신성, 그리스도의 참되고 정당한 인성, 그리스도의
한 위 안에 있어서의 신성과 인성과의 결합, 그리스도의 본성이 신성, 인성이라는
사실을 변증하며 믿는바 도리를 표명하게 되었다.


제 1 절 칼케돈 이전과 칼케돈 결의
니케아 회의에서는 하나님과 '동일본질'이라는 '호모우시오스'(homousios)라는 핵
심적 용어로, 교부들은 자신들이 이해한 바를 명확하고 모호하지 않게 표현해주기
에 그 용어를 사용해야한다고 보았다.{{ Klaas Runia. 현대 기독론 연구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1986) 10.
}}

1. 니케아 회의

니케아회의에서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한다. 니케아 신조는 서방, 동
방교회 모두 높임을 받았던 것이다. 서방교회는 성령에 관한 조항속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포함할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동방교회에서 거부되어 지금 전해지는 것은
주후 325년 의 니케아 종교 회의나 콘스탄티노플 종교 회의(주후381년)를 따른 것
은 아니나 정확하고 장엄한 모습을 담고 있다.

"나는 하늘과 땅을 지으시고, 보이는 것이나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을 지으신 전
능하신 아버지이신 한 하나님을 믿는다. 나는 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그는 하나님의 독생자이며, 모든 세상이 있기 전에 하나님에게서 나셨으며 하
나님의 하나님이시며, 빛의 빛이며,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이시다. 그는 하나
님에게서 나셨으나 지으심을 받지 않으셨으며, 모든 것을 지으신 아버지와 한
본체를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우리 인류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하늘에서 내
려 오셨고 성령에 의하여 동정녀 마리아로부터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시어
서 우리를 위하여 본디오 빌라도에 의하여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는 고난을 당
하시고 장사되셨다가 사흘 만에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셨다. 그는 하늘에 오르
사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계시며,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산자와 죽은 자를 심
판 하실 것이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님이 되시며 생명
의 공급자 되시는 성령을 믿는다. 그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셨고, 아버지
와 아들과 함께 경배 와 영광을 받으시며, 그는 선지자들에 의해서 말씀 하셨
다. 나는 죄를 용서해 주는 한 세례 만 인정하며, 죽은 자의 부활과 내세의 삶
을 바라본다. 아멘."{{ 김의환. 개혁주의 신앙고백집 (서울: 생명 의 말씀사, 1984) 10, 11.
}}

우시아( , 본질, 존재), 피지스( , 본성), 프로소폰( , prosopon,
인격, 위), 하이포스타시스( , hupostasis, 본질)등과 같은 용어들은 그 시
대의 헬라적 어휘이지만, 복음의 토양에서 이루어진 헬라 정신의 작업으로{{ Ibid., 159, 160.
}} 단어
만 헬라적 일뿐, 내용은 이미 사용되고 있는 기독교적 강화와 주어진 새로운 의미
로 채용해 사용된 것{{ Ibid., 160.
}}이었다.
교회사가 필립샤프가 지적했듯, 동질(coessential), 동등(coequal), 창조이전의 발
생, 참 하나님의 참 하나님, 발생되고 피조되지 않으심 등과 같은 용어들은 동방교
회가 잘못된 가르침을 배격하고 이긴 승리의 산물이다.
이 같은 산물인 동 서방교회의 신조는 서로 독립적이며 평행을 이루되, 믿음의
응전으로 동방은 형이상학적, 논쟁적이며, 완만한 표현을 가졌고, 서방은 로마교회
가 우위를 확보하기 전까지 교회들의 일정한 범위 안에서 추가나 개정되다가 회의
결정 없이 은연중에 서방 교회에 채택된 성격을 드러낸다.{{ Philip Schaff. 신조학. 박일민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 25.
}}
'호모우시오스'는 군주론에 대항하여 성부 성자의 수적 '구별'을 전제한 '동등성'
을 뜻하여 채용 당시에는 성부와 성자가 동일한 신적 본성을 공유한다는 의미이나,
니케아 회의 전후 상당기간 동안 성부와 성자의 구별을 고려하지 않았고 본질의
수적 동일성으로 오해되었으며, 나아가 본성과 단일성과 위격의 구별성의 관계 또
한 고려되지 않아 양태론 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유해무.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의미." 목회와 신학 (서울: 두란노, 2000) 27.
}}
초기에 성부와 성자와 단일성은 고려하지 않고 말씀(로고스)의 신성만 강조했지
만, 후기에는 신성의 단일성을 강조하다보니 위격들 간의 구별이 모호해지게 되었
는데, '호모우시오스'라는 용어를 채용함으로 교회는 아리우스이단을 대항하여 그리
스도의 신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Ibid., 27.
}}
아리안을 종식시키고자 한 1차(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동방교회 감독들 318명은
회집하여 니케아 신조를 만들었다. 이후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150명의 동방교회
의 감독들의 회집이 있었다.
이는 데오도시우스(Theodosius)가 성령의 신성을 부인하는 성령 기계론자들을
막고자 회집시킨 것으로, 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발표하여 동방교회의 형식으
로 된 니케아 회의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반영하고 그리스도의 신성이나 성령에
관한 언급을 사도신경보다 더 명확하고 자세하게 밝혀 놓았다.
교회사속에서 예수의 인격은 니케아 공의회(325)에서 아리우스의 잘못된 주장에
대한 반증으로 그리스도께서 진정 완전하신 하나님이신 것을 강조하였다.
이후에 콘스탄틴 공의회(381)에서는, '영이 죄를 범하기에 영대신 말씀(로고스)
으로 오셔서 무죄할 수 있었다며 그리스도의 무죄를 인정키 위하여 그리스도의 참
인성을 부인'하던 아폴리나리스의 주장이 잘못되었음을 지적함을 통하여 그리스도
는 진정, 완전하고 무죄이신 사람이심을 확인하면서 일단락 지었다.
그럼에도 니케아 신경은 우리를 위해 우리의 구원을 위해 강탄하신 하나님의 아
들 곧, '참 하나님 참 사람'을 고백하였지만 한 인격이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 둘
다 될 수 있는가라는 새로운 질문을 낳았다.




2. 네스토리우스 논쟁 - 양성 일위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
안디옥 학파는 또 다른 극단적 일면을 보여주는 다소의 디오도레(Diodore of
Tarsus, 394년 별세)에서 시작하여 데오돌 테오도레(Theodore)에게 사상이 전파되
어, 형이상학적 생각과 신비적, 알레고릭한 성경 해석을 반대하고 그리스도의 역사
성, 완전성, 사람으로서의 경험에 강조를 두어, 인간적 실재로부터 출발했다.
사모사타의 바울과 안디옥의 유스타티우스 이후 그리스도의 위격적 신성까지도
주장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갖게 되었다.{{ Justo L. Gonzalez. 기독교 사상사. 이형기 차종순역 (서울: 대한 예수교 장로회출판국,
1990) 444.
}} 이들은 신인양성의 혼돈을 피하려고 두
본질의 구별을 강조하다보니, 실재적인 연합 속에서의 연계를 약화시키게 된 것이
다.{{ Alister E. McGrath. 역사 속의 신학. 김홍기 이형기 임승만 이양호 (서울: 대한 기독교서
회, 2004) 444.
}} 안디옥 학파는 네스토리우스 정죄이후 속성교류를 부인하는 것이 성육신과
사활대속사역까지 부인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 신인양성의 연합은 참
된 속성의 교류가 일어날 정도라 보았으나, 양성의 고유특성이 상실된다면 받아들
일 수 없다 보았다.

가) 테오도레

네스토리우스의 스승이자, 몹쉐스티아 사람 테오도레(Theodore of Mopsuestia,
428년 별세)는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과 사람적 경험의 완전한 실제성에 그 출발
점을 두었다. 그리스도안에 이중인격이 있다고 설명하다보니 부부에게 남편, 아내
의지가 있듯 신적 인적 의지가 존재하며, 완전한 예수님은 자유의지 결정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 되어졌고, 그리스도안의 예수님은 단지 도덕적으로만 내재되었다는
것이었다.
사람(인성)이 성자 하나님(신성)과 맺은 명확한 연결 때문에 신성이 인성 속에
내포되기에, 모든 피조물이 그리스도를 예배한다고{{ Ibid., 442.
}} 강조하였고, 상호영향을 미치
거나 서로 간에 섞임 없이 서로 구별되며, 실제의 결합은 하나님의 뜻에 근거한다
고 보았다.{{ Ibid., 443.
}}
그리스도안의 말씀(로고스)의 본질적 내재를 부정하고 자유의지 결정 여하에 따
라, 단순히 도덕적으로만 내주(indwelling)하여 실제적으로 정욕과 싸우시고 유혹의
갈등을 겪으셨지만 마지막에는 승리하셨기에 각각의 본성이 독자적일 수 있다는
의미를 함축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두개의 구별되는 차원 간의 연합은 존재론적
연합이 아니라 오직 의지적 연합이라고 인식될 수 있으니, 만일 신성과 인성이 오
직 의지를 통해서 결합된 것이라면, 진정한 성육신을 주장함이라 할 수 없다.

나) 네스토리우스

콘스탄티노플 감독(주후 428년경)이었으며, 안디옥 학파의 테오도레의 후계자였
던 네스토리우스(Nestorius,, -451)는 말씀(로고스)이 함께하는 사람을 출생했다는
단순한 이유만으로 마리아가 신모(神母, Theotokos)라고 불릴 수 있다는 사실에 경
악하였다. 이유인즉 당시에 신모(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의 전달자)라는 칭호는 일반
대중신앙과 학문적인 신학 속에서 공히 받아들여졌고, 그 호칭을 사용함은 그리스
도의 인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McGrath. 445.
}}
이 같은 이유로 해서 네스토리우스가 보다 선호한 용어는 그리스도를 낳은 분(
), 하나님을 받은 분( )이었다.{{ J.N.D Kelly. 고대 기독교 교리사. 361.
}} 또 성육신 하나님은 죽지 않으셨
으나, 그 분이 속에 들어가 성육신하게 되었던 그 사람을 일으키셨다고 주장하면
서, 말씀이 고난당하셨다고 말함의 적절성을 용인하였다.{{ Ibid., 361.
}} 철두철미한 안디옥 학
파 네스토리우스는 '나는 본성들을 따로 떼어 생각하나 경배를 연합시킨다'는 것이
그의 표어였다. 그는 니케아 정통신앙을 저버려 그리스도의 인성을 강조하는 극단
을 피하고자 했다.
또 그리스도의 신성만 강조하여 인성의 중요성을 약화시킴을 피하고자{{ 박용규. 초대 교회사.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4) 374.
}} '하나
님의 불가고통성'이 보존되고 또한 각 사람은 자기 행동과 자율성과 자유를 견지하
여야 한다는 것을 중요시하였기에 '연합( , union)'에 대하여 '결합'이라는 표
현을 선호했다.{{ Kelly. 359.
}}
따라서 구속(Redemption)이 효력 있으려면 그리스도께서 참된 사람적 생애를 사
셨어야만 한다는 것을 아주 중요시 한 것이다. 그러면서 두 본성들은 신인(神人)속
에 하나의( 또는 ) 품격 안에서 연합 되었으되 그 연합은 '품격의 연합'
이 아니라 '두 본성의 연합'이라는 성격을 밝혔다. 또한 신성도 인적 본성으로 변하
지 않았고 인성도 신격화 되지 않았으나 각기 다른 성을 취하게 되셨기에 성육신
하신 주님은 품격에 있어서는 불가분할적인 한 분이나 본성에 있어서는 이중적으
로 남아계시다고 네스토리우스는 보았다.{{ Ibid., 360.
}}
신-인으로서 동일한 한 분이 피조된 본성과 피조되지 않은 본성으로 보여지신다
보았으며,{{ Ibid., 358-359.
}} 본성들을 혼동, 혼합함이 아닌, 구별된 본성들을 결합(conjunction)시킴
이라는 표현을 선호했다. 그리고 의지(意志)적인 내주의 방식에 따라 단일한 의지
와 지성을 지니고 불가분리적, 불가분할적 단일한 존재된 그리스도로 신뢰했다.
헌데 은혜로운 겸양과 사랑과 순종으로 하나되는 신성의지와 인성의지가 일치한
결과에 의해, 수용된 육신에 권위를 부여한 가치와 형평성에 의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Heinrich Heppe. 개혁파 정통 교의학1. 이정석역 (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620.
}} 그러나 결국 이러한 네스토리우스의 논지는 에베소 회의에서 정죄되었
다. 그 이유는 의지로 하나됨이 아니라 인격으로 하나됨을 바로 증거하지 못한 결
과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속성교류(communicatio idiomatum)에 있어서, 본성은 분리되고,
연합의 품격과 동일하지도 않음으로 그리스도에게 귀속되는 인적 속성들, 행동들,
경험들은 인적 본성에 대해 술어가 되어야 하고 신적인 속성들과 행동들, 경험들은
신성에 대하여 술어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J.N.D Kelly. 고대 기독교 교리사. 360, 361.
}} 또한 신성 인성 모두가 경세
(經世)의 품격 즉 그분의 단일한 품격 속에서 양자를 연합시키는 신인에 대하여 하
나님이라, 또는 사람이라 묘사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그리스도의 인성이 하나의
위체(位體)나 품격이었다' 라는 것은 주님의 인성적 경험들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함에서 언급된 것이었다.
동시에 말씀( )의 불가고통성이나 인적본성의 실재성이 위험스럽게 되는 것
을 두려워해서 말씀을 주체로 인정하기를 꺼려 공통된 품격이라는 외면적인 개념
만 내세웠다.{{ Ibid., 362.
}} 그 결과, 후대에서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이단적으로 평가를 하
게하는 근거로, 로고스의 인격 외부에 독자적인 인격이 창조되어 동정녀의 태에서
잉태되었으며 로고스와 제휴되었고 연결되었다는 점이라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됐다.{{ Heppe. 개혁파 정통교의학2. 600.
}}
네스토리우스는 신-인(Divine-human)양(兩)성 교리를 인정하면서도, 그리스도의
인성을 온전히 정당화하다보니 중보자의 위격의 진정한 통일을 형성하여 단일한
인격을 구성하는 진술이 희미했다. 또한 "통일본성(nature)과 상관적으로 독립된
실존으로서의 인격"{{ Kelly. 362.
}}과의 차이 또한 무시됐으니, 양성을 과도하게 구별해서 표현
한 반면, 그 만큼 강한 용어로 두 본성의 연합을 말할 수 없었기에 정죄된 것이다.
진정성을 단언하기 어렵지만, 그의 저서로 알려지는 '헤라클레이데스의 책'에 의
하면 다음과 같이 언급되고 있다: 칼케돈(주후 451년) 회의가 개최된 후, 자신은 칼
케돈에서 신경(信經)화된 로마 감독 레오의 기독론에 만족한다고 공공연히 고백하
며, 동시에 칼케돈 회의에서 모인 교부들이 자신의 주장이 옳았음을 인정해 주었다
고 보았다. 여기에 나타나듯이 그는 위의 사실들을 자랑스러워한 것으로 알려지기
도 하나, 그 년도상의 문제로 인하여 분명하게 주장하기에는 근거가 희박하다.{{ 네스토리우스가 '헤라클레이데스의 책'을 기술하였다는 사실의 진정성에 관한 문제와 함
께 네스토리우스의 죽은 시기와 칼케돈 회의의 개최시기가 적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

다) 아타나시우스

아타나시우스(Athanasius, 296-373)는 '하나님 아버지의 화육한 아들 예수 그리
스도가 존재와 본성에 있어서 완전하게 영원히 하나인지, 아니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시 공간의 세상에서 참으로 사람이 되고 우리와 하나가 되었는지' 라는
문제에 관하여 근본적인 대안을 제시하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설명에 있어서 아타
나시우스가 주장하는 구원론의 지배적인 특징은 화육설인데, 그 내용은 예수 그리
스도의 대속이 자유를 위해 필요하고, 또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를 위해 친히 희생
제사를 드리셨다는 것이다.
첫째, 타락의 결과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부패 속에서 쇠약해졌기
에 화육의 제일의 목적은 사람의 회복에 관한 것이다. 그 대안에 있어서 성부의 형
상이자 생명 자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인데, 즉 그
누구라도 사람을 재창조 할 수 없고, 가사적 존재를 불사적 존재로 만들 수 없다는
것이다.{{ J.N.D, Kelly. 고대 기독교 교리사. 434.
}} 둘째, 그리스도와의 사귐이 하나님과의 사귐이기에, 사람은 신적인 본성
의 동참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셋째, 말씀이 생명의 이치가 되심으로, 그 동안 죽음의 지배하에 있던 인간들에
게 타락때 상실되었던 불후성이라는 값진 선물이 회복되었으며, 이러한 생명의 이
치 곧 구원은 창조의 본래적 창시자이신 말씀이 이루어 놓으시는 재창조라 묘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말씀 자신이 육신이 된 덕분에 그 분과 한 몸이 되어 인간이
구원받으니 이것은 창조주의 은혜요 사랑하시는 호의이다.
또한 그 분의 몸과 우리의 몸이 유사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또한 모든 사람들
사이에 있는 공동실체성(con-substantiality)과{{ Ibid., 435.
}} 말씀을 통한 신성화( ,
divinization)는 성령과 친밀히 연합됨으로 가능한데, 여기서 성령은 사람을 아들을
통하여 아버지 하나님에게 연합시키는 존재이기에, 본성상 참 아들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았다면 본성상 피조물이 결코 아들이 되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Ibid., 435.
}}
아타나시우스는 '대치'한다는 의미이기보다, 만인의 죽음이 주님의 몸 안에서 성
취되었다는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위해 성부께 드리는 희생제사로 인정
하며, 따라서 그리스도는 '사람의 죄를 위한 속상(속량)금'이라 보았다. '그분과 우
리의 육신사이의 연합 때문에 그 분의 죽음과 승리는 결과적으로 우리의 것이며,
그분의 것을 물려받아 우리는 죽음을 정복하고 생명 또한 물려받는다고'보았다.{{ Ibid., 436.
}}
더불어 그리스도가 사람 안에 머무는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으로서 오신 하나님이
시라면, 화육한 아들의 인적인 삶과 활동은 처음부터 끝까지 심원하게 대리적인 방
식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T.F.Torrance. 칼바르트. 최영옮김 (서울: 한들, 1997) 196.
}}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와 죄의식의 저주를 자신에게 덮어씌우기 위해,
우리 위해서(for our sake) 우리의 인간성으로부터 인성을 전유하심을 강조함은, 독
생자 예수의 신성이 구체화된 모습 즉 우리의 실제상의 본성을 취하고 우리와 하
나되시는 하나님의 현실성과 치유를 위해 취해지는 화육한 아들과 아버지의 공동
실체적 관계성이{{ Ibid., 196, 197.
}} 중보자안에서 하나임을 보인 것이다.
더불어 상호내주에 따른 동일본질과 특성전달에 따른 인격적 공동 실체성을 간
파한 아타나시우스는 유세비우스파와 아리우스파와의 투쟁에 있어 중요한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즉 둘 사이에 있어서 성경의 해석과 신학적 공식화의 차이점 뒤에
는 하나님 안에 있는 중심에서 생각하는 객관적인 방식과 사람 안에 있는 중심에
서 생각하는 주관적인 방식사이의 충돌이 있다는 것이다.{{ Ibid., 199.
}}

초대 교부들은 그리스도안에 이(二)성이 있음을 부인하고 단일성을 가정하여 '성
육신되어 존경 받을만한 말씀'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점에서 마리아는 때때로 신모
(Theotokos)라 불리어졌다. 특히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강조하
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1:14)라는 구절을 들어 신성을 성
육신하신 말씀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었다.{{ Alister E. McGrath. 역사 속의 신학. 41.
}}
이후 오리겐의 기독론적 입장을 버리고 말씀-육신(Logos-flesh) 유형의 기독론을
제시하면서 신성과 인성을 부르짖은 이러한 이론은 아폴리나리스(Appolinaris,
310-390)에게서 자연적인 결론에 도달했고, 아폴리나리스와 비슷한 방법으로 기독
론의 문제를 해결 하려했다.{{ Justo L. Gonzalez. 기독교 사상사. 444.
}} 또 시릴의 주장을 지지하여 그리스도의 인간성이란
신성안에 삼켜졌고, 성육신 후에는 한 본질만 있다는 인상을 줌으로 참 사람성에
부적합한 주장을 했으니,{{ Klaas Runia. 현대 기독론 연구. 158.
}} 그리스도는 두 본성이되, 성육신이전에는 두 본성이었
으나, 연합이후에는 한 본성이라는 신앙형식을 발전시켰다.{{ Gonzalez. 444.
}}


라)시릴

알렉산드리아 총 주교 시릴(Cyrilus, -386)은 네스토리우스의 적대자로서, 콘스탄
티노플의 거만스러운 교좌에 대한 시기 때문에 독필을 휘둘렀기는 했으나, 순전히
신학적 성격의 동기에 따른 통찰을 가지고, 신성과 인성을 구별할 각오를 가졌다.
'이 참된 연합에로 결합된 본성들은 상이하지만, 두 본성으로부터 한 분 그리스도,
한 분 성자가 계실뿐이고 본성들의 차이는 연합의 결과로 파괴되지 않았다'{{ J.N.D Kelly. 고대 기독교 교리사. 358.
}}는 시
릴은 본성적, 위체적 연합에 따라 말씀과 육신이 연합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말씀 -육신' 도식의 대변자로서 로고스는 본시 있던 그대로 남아있고, 로고스가
하나님의 형체로 영원히 존재하면서 강탄하여 종의 형체를 취함으로 하나님의 형
체에 덧붙였다고 본 것이다. 동일한 품격과 본질적 신격성은 변화가 없고 유일한
차이는 육신 밖에서 존재했었으나, 이제 몸 안에 있게 되었다 본 것이다.
안디옥 학파가 '본성들' 이라고 부른 내용을 '본성적 특성'이나 '존재의 양식'과
같은 완곡한 표현들로 사용하기를 더 좋아하였던{{ Ibid., 363.
}} 시릴의 교리를 가장 분명하고
간결하게 요약했던 기반은 아폴리나리우스의 '신적인 말씀의 성육신하신 본성'이라
는 것이다. 사고 기반이 그러했기에 성육신하신 분속의 어떠한 분할도 시인할 수
없었고, 시릴에게 있어서 연합은 실재하는 것이었기에, '말씀의 구체적 존재가 인적
본성에 연합되어 아무런 변화나 혼동 없는 한분의 그리스도로 이해되었고 또 그러
하다'{{ Ibid., 364.
}}고 설명하였다.
시릴은 무염시태 중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말씀에 속한 그 육체는 말씀의 몸이요,
하나의 구체적 존재를 구성함이지 양품격적( )이 아니며, 오히려 두 본성
들은 각기 '본성적 성질'속에 계속 존립한 것으로 보았다. 또한 속성교류에 있어서,
연합이 밀접하고 실제적인고로 두 본성들이 각기 다른 본성의 특성에 참여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말씀자신의 본성에 있어서는 고난당하지 않았고, 말씀이 성육신
하신 인간적 본성의 면에서 고난당하셨다{{ Ibid., 366.
}}고 보았다.
시릴은 말씀-육신 도식과 '하나의 본성'이라는 공식을 채용했기에, 아폴리나리우
스와 결속될 수밖에 없었고 본성들을 따로 떼어 놓아야 한다는 안디옥의 공리와
자신의 '위체적 연합'의 교리 사이에 넓은 틈이 벌어져있었으나 자신의 스승 아타
나시우스처럼 주님의 시련과 고난을 주님의 육신에 귀속시켰다.
시릴은 구속자속의 이성적 영혼을 고난당한 고난의 원리로 보고, 이 영혼이야말
로 순종과 자기 봉헌이라는 행위 속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였기에, 구원론 적으로
연합 후의 인적 본성의 실재를 중요시했고 말씀의 본성이 있었다면 그 본성은 화
육 되었다고 하였다.{{ Ibid., 367.
}} 시릴이 두 본성들이라는 것을 거절한 것은 두 본성 자체를
부인한 것이기보다는 두 본성을 받아들인다면 논리적으로 '분리'에 이르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서방 신학자들은 터툴리안(Tertullian, 160경-220)이 정립하였던 고대 신앙형식과
암부로스, 제롬, 어거스틴이 다듬어 놓은 바를 좇아 사람이 하나님께 속량한다는
개념으로, 속량을 감당할 수 있는 적절성과 사역 수행을 위한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주장했으나, 신성이 인성에 흡수되어 버렸음을 주장하지는 않았
다.{{ Justo L. Gonzalez. 기독교 사상사. 445.
}} 그 한 예로 레오의 견해를 살펴본다.

마) 레오
서방 교회의 신조는 성자가 성부와 동등함에 관심을 두고 있었기에, 발출을 넓은
의미로 해석하였다.{{ Philip Schaff. 신조학. 박일민 옮김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4) 27.
}} 또 칼케돈 신조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신조를 따르고 있
다. 헌데 교황 레오가 소위 강도회의{{ Gonzalez. 446.
}}로 불리던 에베소 회의에서 449년의 이성론
의 정통 교리를 지키다 순교자가 되었던 콘스탄티노플의 대 주교 {{ Schaff. 30.
}} 플레비언에게
보낸 문서에 따르면, 에베소 회의(431년)에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신학적으로, 그
리고 정치적으로 안디옥 학파를 누르고 최종적 승리를 차지한 듯 보였다. 하지만
교황 레오는 이를 강도들의 집회로 여겼기에 회의 결정 사항과 칙령을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에베소 회의의 부당성을 공격하는 운동을 전개 하였다.
레오(Leo, 440-461)는 그리스도안에 사람의 저급함과 하나님의 위엄이 서로 완벽
하게 침투되어 두 성품이 단 하나의 인격을 구성하고 그리스도의 인격은 인성과
신성이 연합을 이룬 것이기에 자(自)의식(意識)은 결코 구별되지 않으나, 자의식의
기초이면서 인성에 침투되어 활력을 넣어주는 요소는 신성이라고 보았다.
두 본성에 있어서 시릴은 성육신 이전에 가능하고, 그리스도가 두 본성이라(of
two natures) 했으나, 두 본성으로 되어있다.(in two nature)라 하지는 않았다.
반면, 레오는 교서(tome)에서, '그리스도 안에는 연합이후에도 두 본성이 있어서 그
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을 구별할 수 있고, 성육신의 참된 의미인 속성의 교류는 없
어지지 않는다고' 했던{{ Gonzalez. 449.
}} 터툴리안의 주장을 다시 반복하여 '한 위격 안에 두 개의
본성'이 존재한다고 보았다.{{ Justo L. Gonzalez. 중세 교회사. 서영일 역 (서울: 은성, 1995) 56.
}} 레오의 교서와 시릴의 교리적 서신을 재가하여 인증
하는 과정에서 칼케돈에 모인 감독들은 칼케돈의 신앙 결정사항을 니케아 신앙의
해석으로 여겼고, 이후의 논쟁에서는 칼케돈의 신앙을 표준으로 삼아 대처해 나갔
다.{{ Gonzalez. 기독교 사상사. 451.
}}
그러나 레오의 견해에 있어서 '사람의 저급함과 하나님의 위엄이 서로 완벽히 침
투되어 있다'는 표현보다는 '사람의 저급함과 하나님의 위엄이 특성 전달교류의 결
과 인격적 공동실체성을 가지게 되었다'함이 보다 개혁파 입장에 적합한 듯하다.
사실 상호침투는 동격 간에 사용함이 합당하고 신성과 인성은 동격이라 할 수없고,
사실상 성 삼위간의 위격간의 동일본질을 말할 경우에 보다 적합하기에 이다.

소결
사실상 네스토리우스 논쟁은 신학적인 견해의 불일치이기보다, 기독론 적 논쟁으
로, 논쟁의 근본 적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과 인격에 있었다. 기독론에 대한
고찰이 시작된 정황에 있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경우는 구속론 적인 고찰에 따
른 동기로,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한 이해의 부족은 구원의 잘못된 개념으로 이어진
다는 점을 간파하고, 인성의 전적구원과 일치하는 모습을 확보하고자 헬라 철학에
서 파생된 개념들을 사용한 반면, 안디옥 학파들의 관심은 순전히 구속론 적이기
보다 도덕적 인데 있었기에, 헬라철학 개념들에 그다지 의존하지 않았다.{{ Alister E. McGrath. 역사 속의 신학. 442.
}}
또한 예수의 신성과 인성에 있어서, 알렉산드리아 학파는 한 인격속에서 이 둘이
통일되어 있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했고, 안디옥 학파는 이 두 본성
은 완전히 구별되기(distinct)에 둘 사이의 본성상의 통일은 불가능 하다고 주장하
였으니, 이는 속성 교류를 어찌 보는가에 따라 다른 견해를 가졌던 것이다.
네스토리우스는 완전한 사람과 결합된 말씀, 선의의 작용으로 발전, 유지되는 {{ Stanley J. Grenz. 조직신학. 437.
}}
신성과 인성의 의지적 연합을 주장한 반면, 시릴은 신모를 부정할 때 단순한 사람
존재가 말씀과 친교를 가졌다는 가정에 빠짐을 지적하였다. 주후 431년에 에베소의
제3차 공의회는 시릴의 주장을 받아들여 네스토리우스의 주장을 단죄하고 예수는
두 인격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이라고 선언하였다.
이후 유티케스(Eutyches)는 네스토리우스가 예수를 두 본성으로 나누고 있다고
비난하며, 예수가 '한 인격' 이라는 교회의 신앙고백을 주님은 오직 '한 본성'( 단성
론)을 소유하고 있다는 개념으로 해석하고, 예수를 신성과 인성이 융합되어 새로운
본성을 형성하고 있는 분으로 인식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성육신 된 본성을 '성
육신된 하나님의 하나의 본성인 말씀'이라는 용어로 표현하였으나, 이는 예수를 두
인격으로 나누는 네스토리우스주의의 위험성을 피하기 위해 정 반대의 오류에 빠
지게 된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성육신된 삶을 신적이지도 않고 인적이지도 않으면
서 신성이 인성을 덮고 있는 제 3의 본성으로 인식하는 잘못이었다.

3. 칼케돈의 확정

주후 451년 칼케돈에서 열린 4차 공의회에서, 형성된 것이 칼케돈 신조의 선언에
는 4대 이단의 각각을 명시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목표로 한 절묘하게 고안된 몇
몇 구절들이 있다. 소위 알파 프리타(alpha privantia)라고 부르는 두 줄의 표지로
서,{{ Klaas Runia. 현대 기독론 연구. 158.
}} 두 본성은 혼동(confusion)이 없고, 변화(change)도 없으며, 구분(division)도
없고 분리(seperation)도 없다는 표현으로 예수 안에서의 신성과 인성의 신비를 표
현했으니, 이는 전통 기독론의 경계를 이룬다고 확신하였다.{{ Grenz. 439.
}}
한 인격이 어떻게 하나님과 사람 둘 다 될 수 있는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칼케
돈 회의(451)는 한 신적인격에 두 본성, 즉 한 신성과 한 인성이라고 답하였다. 그
후 계속해서 교회는 니케아, 콘스탄티노플, 칼케돈고백들을 고수해 왔고, 심지어
1054년에 동서교회로 불리 될 때조차도 이 고백은 변치 않았다. 또한 서방교회의
대분열인 종교개혁에서까지도 이러한 상황은 변치 않고 남아 있었고, 대 다수의 개
혁파 교회들은 그 고대 신경을 받아들였으니, 그 교리는 정통과 자유주의를 구별하
는 시금석으로 남아있다.{{ Runia. 12.
}}
칼케돈에서는 신성과 인성의 연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가를 엄밀하게 정의함 보
다 어떠한 경계를 넘어서면 오류가 발생할 수 있는지를 보이고 그 범위를 제한 하
고자 하였다.{{ Justo L. Gonzalez. 중세 교회사. 서영일 역 (서울: 은성, 1995) 57.
}} 칼케돈 신조는 그리스도의 본체론적 구성과 구속사역 관계를 구분
하기보다 우리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의 일반적 확증을 제한하고 있었다.{{ Runia. 164.
}}
여기서 '혼동됨 없고, 변화됨 없고, 구분됨 없고, 분리됨이 없다'는 이 네 가지 부
정구문에 따른 표지는 신성과 인성사이를 구분해서 항해할 수 있는 선이자, 좌우양
자에 임박한 위험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Ibid., 158.
}} 강조된 바는 말씀은 사람 적인 위격을
가진 것이 아니라 사람 적인 성(nature)을 가지시고 우리와 똑같은 성을 나누어 가
진 사람들을 구속(救贖)하셨기에, {{ Philip Schaff. 230.
}}그리스도의 인성은 성육신 행위가 있기 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었고 인격체일 수도 비 인격체 일수도 없다는 그리스도의 인성
의 비인격성(엔 휘포스타시아)이다.
그리고 성령 감동에 의한 초자연적 성육신의 결과로 비롯된 위(位)의 통일성
(unio hypostatica or unio personalis)은 참되고 영원한 상태로, 신-인 양성은 단지
한 인격체만을 구성하고 여전히 구분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Ibid., 234.
}} 더불어 인성과 신성
이 하나인 그리스도의 자(自)의식(意識)에 있어서 인성에 교류되어 활력을 넣어줌
은 신성이며, 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과 무관하게 독자적인 인격을 가질 수 있고,
신성이 그의 인격의 기초와 근거가 되며, 이 두 성품은 계속해서 하나의 동일한 생
활을 한다는 것이 또한 강조된다.

4. 칼케돈 회의 결과
칼케돈 신조는 초기의 종교 회의와 별반 다름이 없이 공통된 신앙의 표현을 구
성하는데 기여하였다.{{ Runia. 158.
}} 칼케돈 회의는 그 당시에 존재 하였던 여러 학파들을 가능
하면 더 정당한 것으로 수납하려고 노력했기에, 칼케돈 고백은 교회역사에 있어서
가장 참된 교회 일치 회의 중의 하나로 지칭된다.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하는 질문에, 교회는 다음의 여러 점을 정당할 수 있
는 그리스도의 개념을 찾았다. 우선 주후 325년 니케아 회의에서 아리우스의 잘못
된 주장의 반증으로 그리스도의 참되고 정당한 신성이 강조되었다. 다음에는 주후
381년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죄는 영이 범하기에 영 대신 로고스로 오셔서 무죄할
수 있었다며, 그리스도 의 무죄를 인정키 위하여 그리스도의 참 인성을 부인한 아
폴리나리스의 잘못됨을 지적하고, 그리스도의 참되고 정당한 완전, 무죄의 인성을
확인하였다.
이후 주후 431년 에베소 회의에서 네스토리우스의 신인양성일위에 있어서 각 성
의 구분을 명확히 하다보니(distinction) 일체성에 대한 강조가 희미하여 양성의 일
치를 바로보지 못하고 양성분리(separate)를 주장한다는 오해로 여겨졌기에, 그리스
도의 참 하나님 성, 참 사람 성이 한 인격체 안에서 결합 통일된 하나임이 천명되
었다.

"우리는 성(聖) 교부들의 뒤를 따라 아무 이의 없이 사람들을 가르쳐 다음과
같이 신앙고백케 한다. 독생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과 인성에 있어서
완전 하시며, 참 신이시고 참 하나님이시며, 참 영혼 과 참 육체를 소유하셨으
며, 신성 에 있어서는 성부와 동질이시고, 인성에 있어서는 우리와 같으시다.
만사에 있어서 우리와 같으시되 오히려 그에게는 죄가 없으시며, 신성에 따라
만세 전에 성부에게서 나셨고, 후일에 우리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인성을 따
라, 신모 동정녀 마리아 에게서 나셨으며, 유일하신 그리스도, 성자, 주, 독생자
로서 이성을 소유하셨으니, 이를 혼합되지 않게(asuggutos), 불변적으로
(ateptos), 분할할 수없이(adiairetos), 또는 분리할 수 없게(achoristos) 소유 하
셨다. 연합으로 인하여 양성의 구별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각 성의 특
성이 그대로 보존되었으며, 한 위 안에 동시에 있어서 두 인격으로 나눠지거나
분리되지 않았다. 선지자들이 처음부터 그에 관하여 예언한대로, 주 예수 그리
스도께서 그 자신이 우리에게 가르치신대로, 또는 성 교부들이 우리에게 전하
여 주는바 대로, 그는 유일하신 성자요, 독생자이시며, 말씀이신 하나님이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Louis Berkhof. 기독교 교리사. 신복윤 역 (서울: 성광문화사, 1983) 122.
}}


결국 주후 451년 칼케돈 회의에서, 신인양성의 통일은 인정했으나, 또한 통일의
결과 제 3성으로 변했다며, 한 인격체이신 그리스도는 하나님도 사람도 아닌 존재
로 보았던 유티케스에 반대하여, 그리스도께서 일위 이면서 신성, 인성의 요소를
명확히 가지고 계심을 천명함으로 그리스도는 신인 양성 일위의 신성과 인성이 계
심을 명확히 하였다. 칼케돈 고백은 큰 혼돈이 일어난 영역에서 하나의 표준적 교
리를 세운 이룸이었고,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순수한 인생이라는
용어로 되었다는 교회의 근본적 확신을 정당화시켰다.{{ Klaas Runia. 현대 기독론 연구. 163.
}}


제 2 절 칼케돈 이후
칼케돈 신조는 '하나님이 육신 안에 나타났다.'는 신비를 설명함 보다, 기독론
의 본질적인 요소를 밝혀 기독론 적 이단과의 경계선을 그어주나 부분적으로만 알
고 거울을 보는 것처럼 희미하게 볼 뿐, 이 세상에서는 우리 주님의 신-인으로서
의 생활에 대한 위대한 신비를 결코 완벽하게 헤아려 알 수는 없다.{{ Philip Schaff. 신조학. 235.
}}
칼케돈 회의는 극단적인 입장과 칼케돈 회의 보다 앞서서 존재했던 이단들을 정
죄함으로 대부분의 감독들이 용납하는 신앙 결정 사항을 산출해 내었지만, 회의에
서 채택한 신앙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강력한 소수 집단이 출현하여 12세기
에 이르기 까지 분리된 집단으로 따로 존속하게 되었다.{{ Justo L. Gonzalez. 기독교 사상사. 이형기 차종순역 (서울: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출판
국, 1990) 451.
}}

1. 단의론(Monothelitism)
교부 시대의 교회는 우리에게 예수는 참 하나님 동시에 참 사람, 예수는 두 본
성이 완전히 분리될 수도, 혼합되지도 않은 한 인격이라고 주장하는 유산을 물려주
었고,{{ Stanley J. Grenz. 조직신학. 442.
}} 칼케돈이후, 이(二)성 일 인격(신인 양성일위)교리가 확정되었다. 그러나 해
결되지 않은 것은 그리스도의 의지가 하나이냐 둘이냐, 또 그 의지는 인성이나 신
성 위(位)가운데 어디에 속하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인격의 통일성을 출발점
으로 예수는 하나의 인격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한 의지 만 존재한다는, 즉 로
고스의 의지만을 지니고 있다는 단의론(monothelite)자 일의(一意)설 파와, 그리스
도의 이(二)성에 기초하여 신적 의지와 인적 의지가 존재한다고 주장한 이의(二意)
설 자가 있었다.
주후 680년에 제6차 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는 두개의 의지를 소유하고 있다는
명제를 정통적인 것으로 선언하였으니, 이의(二意)설을 정통으로, 인적의지는 신적
의지에 항상 예속되는 것으로 결정했다(마26장39절). 그러나 인적의지가 신적의지
와 연합함으로 본래적 인성보다 열등하여지는 것이 아니라 고상하여지고 완전하여
져서 양자는 언제나 조화를 이룬다는 것이다.{{ 박해경. 기독교 교리 신학사. (서울: 이레서원, 2000) 112.
}} 즉 신인양성 이의일위 론이 정립된
것이다.

2. 단성론(Mono-physitism)
칼케돈이후(주후451년)시기에 이(二)성을 부정하여 정죄된 유티티안 파는 북애굽
의 곱트교회와 근동의 알미니안교회에 남아서, 단성론자들로 불리었으나 자체 내에
서도 일치되지 못했고, 단성론자들은 알렉산드리아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자신들
의 세력을 확산시켜 나갔다.{{ 박용규. 초대 교회사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4) 398.
}} 그 가운데 예루살렘 교구는 알렉산드리아와 안디옥
학파가 논쟁할 때 알렉산드리아 측에 합류하여 안디옥을 적대하여 왔다. 예루살렘
교회는 칼케돈 이후 칼케돈 정통주의자가 물러나고 단성론 자가 감독으로 앉았는
데, 알렉산드리아에서도 감독이 살해되고 단성론자가 감독으로 임명되었고, 심지어
안디옥에서도 461년에는 단성론자가 감독이 되었다.{{ Ibid., 399.
}}
이 같은 상황에서 동방 제노 황제는 단성론자에의해 2년간 추방당하였다가 돌아
온 후, 단성론자들과 칼케돈 주의자들의 분열을 피하고자 통합령 '헤르티콘'을 482
년에 발표하였다. 이것은 니케아 신앙을 재천명함이며, 제국의 절대적인 신앙으로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모인 150명의 교부들이 확립한 신앙을 강하게 주장하였
다.{{ Clyde L. Man Schreck. 세계 교회사. 최은수 역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1) 156.
}} 제노 황제는 이후 단성론을 옹호하는 선왕의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다가 칼케
돈에서 정통으로 인정한 ,데오도레, 사이러스 데오도렛, 에바스의 이바스의 작품들
을, 소위 3장으로 요약한 것을 제노 황제가 3장을 정죄하는 칙령을 반포함으로 사
실상 칼케돈 회의를 정면 거부한 결과를 빚었다.
그러나 제5차 에큐메니컬 회의가 553년 콘스탄티노플에서 열려 칼케돈 회의를
그대로 인정함으로 단성론자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다.{{ 박용규. 초대 교회사. 400.
}} 또한 단성론의 논쟁은 단
의론의 등장으로 새로운 단계에 접어들게 되었다. 하나님이 고난 받으셨다는 자
(Theopaschitists)들과 그리스도의 인성이 우리와 같아서 우리가 부패할 수 있는
것에 예배드리고 있다는 주장자들(Phthartolatrists ){{ 박해경. 기독교 교리 신학사. 111.
}}과 이와 정반대의 그리스도의
인성은 우리와 동질일 수 없으니, 신적 속성이 주어져서 무죄하고 불멸하며 부패할
수 없음을 주장한 자들( Aphthsrtodocetists )도 등장했다.



3. 다멕섹의 요한
기독론은 화체설을 체계화 시킨 다메섹의 요한에 이르러 최고의 발전에 이르렀
다. 다메섹의 요한은 요10:38, 14:9, 11, 17:21을 근거로 삼위일체론에 공재 개념을
도입하여 위격들의 대면 적 공재와 상호침투를 표현하였다.
이 공재는 본질의 단일성에 기초하니, 위격들은 동등한 본질이며, 상존하며, 상호
관계하며, 상호 개방적이고 상호 자기수여 적임을 보인다.{{ 유해무. "삼위일체론의 형성과 의미". 27.
}}
또한 그는 사람 예수가 말씀( )을 입은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인성을 입으셨
다고 하였다.{{ 박해경. 112.
}}
이(二)성을 통일하는데 말씀, 로고스가 지배적인 주체가 된다는 것으로, 로고스가
마리아의 복(腹)중에서 '사람 개체'나 '보통 인성을 취하신 것'이 아니라, 한 인격으
로 발전되지 못한 가능한 사람(a potential human individual)과 연합함으로 그리스
도의 인성이 로고스를 통해 한 개체(個體)적, 인격적 실존을 갖게{{ Ibid., 112.
}} 되었다는 것이
다.
그 결과 그리스도안에서 신적속성들이 인성에 전달됨으로 인성이 신화(神化) 되
었고, '하나님이 육신으로서 고난을 받으셨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인성이 이렇게 영향을 받았으므로 순수하게 감수(感受)적이요 피동적 이며, '완전한
인성을 지니신 신자(神子)는 교회 예배의 대상이 되신다.'는 주장에 이르게 된 것이
다.
그러나 다메섹의 요한은 이(二)성의 협력과 한 인격이 각(各)성에서 행동하고 의
지한다는 것을 인정하였고, 의지는 성(nature)에 속하는 것으로 간주하면서도 그리
스도안에서 사람 의지는 성육신한 하나님의 의지가 되었다고 주장하였다.






4. 종교 개혁기
신인양성일위에 관한 문제는 교부시대의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이에서
이미 일어났으며, 종교개혁기에는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의 논쟁 속에서도 다시금
발생하였는데 그 관점의 근본적인 차이는 완전히 해결되지 못한 상태였다.
종교개혁시기에 있어서 종교개혁자들 가운데서도 속성간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신성과 인성의 속성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한 인격 안에서 교류 된다는
것)라는 교부들의 가르침에 관한 이해를 두고 서로 나뉘어졌다.{{ Stanley J. Grenz. 조직신학. 440.
}}
신의 영광과 위엄(majesty)에 인성들이 참여하는가라는 문제점에 대하여, 먼저
루터파의 추종자들은 예수의 인성은 상실되지도 않고 사람의 속성들이 예수의 신
성으로 전이(transfer)되는 것은 아니라 예수의 인격 안에서의 두 본성의 결합은 신
적인 속성들이 예수의 인성 속으로 진정으로 전달되는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본질적으로 루터파 기독론은 네스토리우스적 전제 위에 근거한 것으로
인식된다. 왜냐하면 로고스의 성육신이 선행적 존재 안에서 이루어지는 신인 양성
의 결합의 결과로 인성에 신적 속성을 투입함으로 일어나는 인성의 신성화라고 생
각하였기 때문이다.{{ Heinrich Heppe. 개혁파 정통교의학 2. 이정석 역(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4) 600.
}}
따라서 루터파의 가르침의 함의는 부활하신 주님의 실재와 관련에 있어서, 부활
하신 예수의 인성은 예수의 신성의 편재(omnipresence)에 참여하고, 이에 따라 그
리스도의 몸과 피는 성찬에 실재로 현존한다는 주장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이에 반해 개혁주의 사상가들은 '유한은 무한을 포괄할 수 없다'(finitum non est
capax infiniti)는{{ 김영재. 기독교 교회사. (서울: 이레서원, 2000) 433.
}} 이해를 가졌고, 두 본성이 예수의 인격의 통일성안에서 서로 분
리되어 존재한다고 생각하였다.
또한 속성간의 교류는 단순히 문자적인 표현에 불과하며,{{ Grenz. 441.
}} 칼빈주의자들은 속성
간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를 인정하되, 한 인격이 두 본성의 속성들을
지니고 있다고 루터파의 입장 곧 실재론적 견해는 거부하였다.

가) 일치신조
본 신조는 루터파를 로마교회로부터 갈라서게 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던 스몰칼
드신조 이후{{ Philip Schaff. 96.
}} 오랫동안 쓰라린 논쟁을 겪은 루터신조들에 있어서 교리적인 연합
과 평화를 이루기 위한 목적으로 1577년에 작성되고 1580년에 출판되었다. 그 결과
다양한 논쟁의 속에 있었던 루터파 교리체계의 정착과 완성을 가져왔다.
일치신조(Konkordienformel)에 나타나는 신인양성일위에 관한 언급을 살펴보면,
제7항 성찬에 대하여 항목에서 '분명히 다른 두 성이 성찬시에 불가분리의 실체로
공존한다'고 실재론적 교리를 진술하고 있다.
이어서 제8항 '그리스도의 품위'라는 항목에서는 '그리스도의 이성의 인격적인 연
합의 결과로 이성 간에 교통이 이루어졌고, 또 이성의 교통의 결과로 그 속성들 간
의 교통이 이루어졌으며, 속성들 간의 교통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편재를 가능케 한
다'고 정리하고 있다.{{ Ibid., 108.
}} 이것은 속성 교리의 성격과 범위, 인성의 편재성에 대해 분
명히 개혁파의 입장과 다른 것임을 표명하는 것이다.
그 내용은 성의 교통(genus idiomaticum)에 의하여 이성이 교통하고 한 인격을
형성하였고, 그리스도의 대속수행, 곧 성과의 전달(genus apotelesmaticum)이라는
전 인격의 구속 사역이 이(二)성과의 교통을 가지니, 그리스도는 항상 이(二)성 안
에서, 이(二)성을 통해서 역사하시는 신-인 중보자임을 강조한다.{{ Ibid., 109.
}}
그러나 일치신조가 정의하는 특성전달(genus majestaticum)에 있어서, 강탄으로
비하 시에는 그리스도 인성의 우월, 위엄, 권세 능력 등의 특성이 감추어지고 제한
되었다가, 승귀된 그리스도의 인성 안에서, 인성과 더불어, 인성을 통하여 자발적으
로 신성만이 지니고 있는 신적인 전능, 권능 엄위 등, 그 자신을 드러내 구체화 시
킨다는 것이니, 전능, 전지, 편재 등을 활동적 속성으로, 영원, 무한과 같은 비(非)
활동적 속성으로 구분하고, 그리스도는 이 모두를 가지고 계셨지만 실제로는 활동
적 속성만 사용하셨다{{ Ibid., 109, 110.
}}고 보았기에 칼빈 노선과 이해를 달리하고 있다.
즉 "인성이 신적특성들을 전달 받는다면 신성도 인적특성을 전달 받아야한다"는
논지를 루터는 의식하고 노골적으로 단성론에 가까운 '하나님께서 고난 당하셨다'
'하나님께서 죽으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또한 이(二)성의 본질적, 인격적 연합과 속성 교통의 결과로 어느 한 성은 기필
코 다른 성의 특성을 가지게 되고 최소한 인성은 인성의 고유한 특성을 억제하고
독특한 즉, 영광, 엄위, 권능, 전지, 편재와 같은 신적 속성들 부여 받을 수 있고 또
그렇게 하셨다고 가르쳤다.
이처럼 루터파와 개혁파 사이의 논점은 위엄의 전달(genus majestaticum)에 있
었는데 하지만 일치신조는 그리스도의 편재에 대해 모순을 보이며, 신분 전 후의
속성들을 신비롭게 소유한다고 보아, 이(二)성 연합을 불가지한 것으로 만든 결과
를 가져왔다.{{ Ibid., 112, 113.
}}
일치신조의 특성 전달 교리의 지나친 과장으로 그리스도의 신인양성의 연합을
논함에 오히려 위험을 초래하는데, 성경(눅2장52절, 막13장32절, 히5장8-9절)은 그
리스도의 비하 신분을 언급함 가운데, 그리스도가 전지하셨다고 말하고 있기에 일
치신조와 차이가 있으며, 일치신조의 기독론은 공생애를 진정한 인격적이고 역사적
인 그리스도를 은밀한 범신론적 그리스도로 대치시킨다{{ Ibid., 114.
}}는 지적을 받고 있다.
이에 대응하여 개혁파의 기독론의 경우, 말씀을 허기(케노시스)의 주체나, 그리스
도의 인성의 주체로 보지 않고, 그리스도가 스스로 낮아지셨음을 어떤 방식으로든
부인하지 않고 성육신자체를 바로 비하의 시작으로 본다.{{ Ibid., 117.
}}
즉, 일치신조 제8항은 '그리스도의 이성의 인격적인 연합의 결과로 이성 간에 교
통이 이루어졌고, 또 이성의 교통의 결과로 그 속성들 간의 교통이 이루어졌으며,
속성들 간의 교통은 그리스도의 인성에 편재를 가능케 한다'라고 규명되어있다.
여기서 전반부 곧 인격적 연합에 의해 신인 양성간의 교류를 말함과 신인 양성
의 교통의 결과로 속성간의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것에는 동의하나, 그 결과로 그리
스도의 인성에 편재를 가능케 한다는 주장은 적절치 못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신인양성의 교통은 인격적 공동실체성을 의미함이지, 지난날 오해하였던
바와 같이(유티케스) 교류에 의한 융합됨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특성 전달 교류에 의한 인격적 공동실체성을 상고할 때, 인성론적으로 그리스도
의 인성은 그리스도의 신성과 하나됨, 즉 이의일위(二意一位) 인격에 따라 구원적
용의 실재에 의한 위엄의 전달이 인격적으로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연합으로 인한 그리스도 인성의 인격적 편재를 생각할 수 있을지라도, 이
것 역시 편재의 개념이 아니라 영적기념이라는 칼빈 개혁파 입장을 지지할 뿐이다.
인성의 편재설은 비성경적 일뿐 아니라 반성경적이니, 우리는 승귀하신 그리스도
의 몸의 비하 상태에 예속된다거나 특별한 장소에만 거하신다고 제한을 말하지 않
으나, 루터파의 성찬론은 성령의 편재를 간과하고,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로 그것
을 대신해 보이는 잘못을 낳았다.
루터가 생각한 '영혼의 영적 특성이 육체에 전달' 되거나, '육체의 고유한 물질적
특성과 기능이 영혼에 전달' 되기보다, '육체와 영혼은 불가분리하고, 가장 밀접하
게 연합되었다' 보는 칼빈 개혁파 이론을 성경이 더 지지해 준다. 이 둘은 본질적
으로 구별되어있다.

나) 헬버틱 제2 신앙고백

본 신앙고백은 쯔빙글리의 제자요 친구이며 동시에 후계자관계에 있던 헨리 불
링거(1504-1575) 자신이 사용하려 작성한 것이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오랫동안 연
구하고 토론하며 논쟁하여 정죄나 추방 또는 신학적 해결들의 격렬한 신학논쟁 끝
에 정립된 정통적 교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그 특징이다.
그는 칼빈과 동조하여 30년에 걸쳐 완성을 본 것으로, 이 고백서에서는 신학적
문제를 길게 논하고 있고, 동시에 성경적이며, 제 이 헬버틱(스위스)신조는 개혁 교
회신조들 가운데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제외하고는 가장 널리 인정을 받아 큰
권위를 부여받았다.{{ Ibid., 126 -130.
}}
제2 헬베틱 신앙고백 가운데 제11장은 '참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시며 세상의 유일
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목으로 되어있으며, 거기서 신인 양성 일위에 대
한 결론을 대신할 만한 진술을 보게 된다.
"성자는 명목상으로나 양자로서의 하나님이 아니시며, 또 신성을 추가적으로 부
여받은 것도 아니고, 본질적으로, 본래부터 하나님이심(요일5.20, 빌2.6, 히1.2,3, 요
5.18, 17.5){{ Ibid., 138.
}}... 이(二)성은 합병, 혼란 없이 한 인격 안에서 연합하여 통일을 이루
었음....둘이 아닌 한분 주 그리스도를 섬김. 참 하나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는
신성으로는 하나님과 동등(동일본질,consubstantialis), 인성으로는 우리와 동등이심,
그러나 죄는 없으심(히4.15).인격의 통일성을 부인하는 네스토리안 주의와 고유한
신성을 파괴하는 유티키안 주의, 단의론, 단성론 등을 배격함, 그리스도의 신성이
고난을 당하셨다거나, 그리스도의 인성이 모든 곳에 편재해 있다고 가르치지 않음,
그리스도의 진정한 육체는 그 특성을 벗어버리고 신적 실체에 합병되어 신성화 되
지 않음, 특성전달 교리를 믿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육체로 진정한 고난을 당하셨으
며(벧전3.18, 4.1) 영광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셨다는 것을 믿음
등"이 그 요지이다.
즉 이제까지의 본 교리에 관한 논쟁에 대한 역사적인 정리라 하겠다. 이어서 등
장하는 고백을 살펴보면 이 진술은 더 나아간다.
삼위일체론에 있어서는 아타나시우스신조와 같은 견해를, 기독론에 있어서도 니
케아-콘스탄티노플-칼케돈 회의의 신조를 따르고, 동시에 단신론이나 단의론을 거
부하고 이신론(二身論)과 이의론(二意論)을 고려하며,{{ 이종성. 삼위일체론 (서울: 대한 기독교 출판사, 1991) 123.
}} 초대교회의 니케아, 콘스탄
티노플, 에베소, 칼케돈 회의가 결정한 신조에 포함된 것들을 모두 다 신실하게 믿
으며 고백한다고{{ Schaff. 138 -140.
}} 밝혀 개혁파 신조의 노선을 신학적으로 보다 분명히 한 것을
보게 된다.
이와 달리 루터 교회가 주장한 특성전달 교류에 있어서는 예수 안에 있는 신성
과 인성이 십자가 부활 사건에서 때로는 신성이 인성 안으로 들어오고, 때로는 인
성이 신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이나 개혁 교회 신학자들은 만약 특성교류를 그렇게 이해한다
면 참다운 의미에서 예수 안에서 두 본성 (natures)이 공재한다고 할 수 없다고 느
꼈다.
비록 제 이 헬베틱 신조에서는 불링거가 '특성 전달 교리를 믿고 경배하는 마음
으로 받아들임'을 언급하고 있지만 루터의 일치신조가 의미하는 바와는 분명히 다
르다고 말할 수 있다.
즉 헬베틱 신조는 성경에서 말하는 바를 수납하고자 한 바이며, 고유성의 교류에
있어서 한 본성의 고유성이 위격 전체에 교류되는 것은 믿지만, 한 본성의 고유성
이 다른 한 본성으로 교류된다는 사실을 부인할 뿐이다. 이처럼 분명한 표명이 있
기에 개혁 교회가 특성전달의 교류를 가르치지 않는다고 비판함 역시 잘못된 것이
다.{{ 이종성. 118 -122.
}}
교리 역사상 신인 양성일위 내에서의 특성 전달교류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하
신 예수님의 질문이 있은 이후부터 사실 난제가 되었다. 다만 여기서 분명히 언급
할 수 있는 것은 '주는 그리스도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우리
의 고백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여기서 잊지 않아야 할 것은 루터가 이를 오해하여 잘못 적용한 상호내주라는
페리코레시스는 동일본질의 확보를 위해 오직 신성 즉 삼위에게만 적용함이 가하
며 영혼과 육체의 관계성에 관하여 페리코레시스를 적용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
는 결론에 도달한다. 따라서 상호내주에 따른 동일본질은 그리스도의 신성에만 한
정된다.
또한 특성 전달교류에 따른 신인양성의 공동실체성에 의하여 그리스도의 신적
의지가 인적 의지에 역사하여 인격적으로 하나된 결과 신인 양성일위가 된다. 그러
나 이 또한 각 성의 한계를 가지고 있기에 신성과 인성은 동가의 동등비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제 3 장 신인 양성 일위
신인 양성일위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하나의 인격임을 의미한다. 역사상
이를 바로 알지 못한 결과 수 없이 만은 사람들이 원치 않게 잘못된 바를 옳은 것
으로 여기며 안타까운 결과를 빚어내었다. 이 같은 이유로 우리는 신성의 위격을
고찰하되 삼위일체의 한 위이신 그리스도의 신성의 측면을 인격으로서의 동일본질
과 동일본질인 삼위 사이의 상호내주와 전유라는 측면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제 1 절 신성 위격 고찰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요 참 사람이시기에 우리는 참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
의 위격을 살피게 된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유일한 구속
주라 할 수 없고 우리의 구원의 확실성 또한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런 연유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신성과 참 하나님으로서의 삼위 간에 관계성에 관심을 가지며
그 관계성이 인격적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1. 삼위일체와 신론으로 본 그리스도의 신성
삼위일체와 삼위 내의 관계성을 살핌으로 그리스도의 신성의 명확성을 확보하며
선재하신 그리스도께서 말씀 하나님이심을 진술하고자 하는데 있어서, 삼위일체에
대하여, '그런 용어들이 성경에서 발견되지 않는다는 이유 때문에, 그것들이 자고하
고 성급한 마음으로 경멸하거나 비난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칼빈은 지적한
바 있다.


가) 동방의 갑바도기아 삼인과 서방 어거스틴의 삼위일체론의 특징

서방 어거스틴과 동방 갑바도기아의 삼인의 삼위일체론의 특징은 동 서방 공히
신학적 전제는 사실상 동일하다. 그러나 갑바도기안들은 하나님을 하나의 우시아
(ousia)안에 있는 세 휘포스타시스(hupostasis)로 진술해 간다.{{ Hendrikus Berkhof. 기독교와 성령의 역사 (서울: 기독교 문화 협회, 1986) 165.
}} 바실리스에게 있
어서 '우시아(ousia)와 휘포스타시스(hupostasis)사이의 차이는 공통과 단일의
차이로써 마치 살아있는 존재와 구체적인 사람 사이의 차이와 같다'고 보았다.
나지안의 그레고리우스는 의도적으로 휘포스타시스란 말과 프로소폰(prosopon)
이란 말을 같이 사용하면서, 그 말들이 동일 개념을 가리키는 한, 명칭에 대해서
는 다루지 않게 될 것이라 했다.{{ Ibid., 166.
}}
결과적으로 '존재(being)와 위(person)'라는 개념은 오늘날까지 삼위일체 교리
의 골격을 형성하고 있는데 한 가지 이상의 해석을 할 여지를 남겼다. 특히 서
방교회에서 위-개념(personconcept)을 둘러싼 혼란은 증가되었는데, 어거스틴
또한 삼위일체 개념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모든 실재적 구별을 상실하고
한 신적 존재 내에서 서로 연결되게 되었다는 사실에 당황하였다.
그러나 페르손(person)이란 용어는 하나님내의 세 관계보다는 삼위일체의 하나
님에 더 잘 들어맞았기에,{{ Ibid., 167.
}} 서브스탄티아(substiantia)라는 말보다 페르소나
(persona)라는 말을 선호한 것이다.
이와 달리 동방의 가이사라 대 바실은 삼위일체의 단일성과 삼위성을 동시에 표
현함에서, '확정된 용어의 결여'라는 약점을 가졌던 아다나시우스의 삼위일체론 대
신, 세 격위 안의 한 실체를 공식화 하였고, 나지안의 그레고리는 아버지의 특성을
비 출생, 아들의 특성을 출생, 성령의 특성을 출래로 표기하여, 위격 상호간의 관계
설정에서 획기적으로 성령을 아들과 동일 실체(본질)임을 분명히 하였다.
다만 상호통재(페리코레시스)때문에 아다나시우스 삼위일체론의 중요 특징이던
분할불가한 동일 실체개념이 더 약하게 강조되긴 하였어도 실체, 능력의 동일성에
근거한 일체성을 논증한다.
곧 동방의 갑바도기아 삼인의 경우는 분할불가한 동일 실체를 강조한 서방의 어
거스틴과는 달리 공동실체성과 공동본성을 강조하여 실체적 유적단일성의 확보를
위해 필연적으로 '상호통재'를 말하게 된 것이다.

나) 상호내주적 관계성과 전유

삼위의 일체됨 가운데 페리코레시스는 각 위격의 하나 됨을 설명 가능케 하는 중
요한 수단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일위를 설명하는 부분적이고 제한된 하
나의 방편으로서도 가능한 길을 열어 본다.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위격과 실체의 관계를 설명하면서, 실체의 단일성을 위하여
삼위를 희생시키지 않고 한 실체-세 위격(tres personae et una substantia)을
강조했고, 삼위구별을 위해서 실체의 단일성을 희생시키지 않고, 삼위의 동일체성
(consubstantiality)을 강조하는 과정에서 후대에 페리코레시스(상호내주, 상호통
재)라는 이름으로 체계화된 이론을 체계화했다.{{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서울: 기독교 문서 선교회, 2001) 18.
}}
페리코레시스에 있어서 위격과 실체의 관계를 표현하는 범주는 개체의 인격
범주와 사귐의 범주로 보아, 이들은 삼위를 강조하면서, 삼위일체 논의를 시작
했고, 서방 어거스틴을 비롯한 라틴 교부들은 일체성을 강조하면서 삼위일체의
논의를 하였다.
갑바도기아 교부 나지안누스 그레고리의 경우는 '분할 불가한 한 동일 실체'의
개념이 상대적으로 약하게 강조되며, 실체의 동일성과 능력의 동일성에 근거한 실
체의 단일성, 일체성을 논증하였으니, 곧 각각의 위(persons)는 실체와 능력의 동일
성 때문에 '단일성'을 소유하기에 하나님의 한 실체와 한 본성과 한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Ibid., 22.
}}
물론 신적실체는 단순하며 분리될 수 없는 성질의 존재, 곧 단순하고 혼합되
지 않은 실체라는 것으로, 우시아와 휘포스타시스는 보편과 특수가 다른 것처럼
다른데, 실체의 고유한 존재방식(subsistentia)이라는 위격들 안에 단순하고(simple)
혼합되지 않은 한 실체가 존재함을 말한다. {{ Ibid., 20.
}}
닛사의 그레고리는 활동의 단일성에 근거한 실체의 단일성을 주장하였는데,
아버지로부터 그 기원을 가지며, 아들을 통하여 진행하고(proceeds through
the Son) 성령 안에서 완성되기에 피조물에로 확장되는 모든 활동들에 있어서,
활동으로부터 유래된 이름과 그것을 수행하는 이들의 수와 관련하여 구분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세 위격이면서 동시에 한 실체로 하나님이 계실 수 있음을 증명하는 방법에 있
어서, 어거스틴은 '한 실체'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전유'(專有)라는 이치를 통
해 '세 위격'을 향하여 나아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갑바도기아 교부
들은 '세 위격'을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페리코레시스의 이치를 통하여 '한 실체'에
로 나아가는 방향성을 가지고 있었다.{{ Ibid., 22.
}}
이는 신학적 전제의 차이나 신학적 입장의 차이를 의미함 없이, '한 실체-
세 위격' 온전한 삼위일체로 다시 귀결되었음이다. 그레고리는 '활동의 단일성'
측면에서 삼위를 보아 상호상통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하다.
또한 상호 내주에 따른 '불가분할 한 동일실체'를 강조한 아타나시우스와 대
조적으로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실체의 유적(類的) 단일성'을 확보하고자, 필연
적으로 페리코레시스를 사용하여 '공동실체성' 과 '공동 본성'을 강조 하였다.{{ Ibid., 23.
}}
이는 어거스틴을 포함한 교부들로 하여금 단일성을 강조 하면서, '한 실체- 세
위격(Una-substantia-tres personae)을 말한 {{ Ibid., 295.
}} 이유일 뿐 아니라, 어거스틴에게는
다소 추상적인 '우시아'에 대한 어휘 선택에 있어서, '우연적인 것'의 의미로 오해
할 여지가 있는 Substantia 보다, essentia 용어를 더 선호하게끔 하는 길을 열게
하였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 Ibid., 349.
}}
성부 성자와 성령 간의 관계에 있어서는 어거스틴은 필리오퀘(Filioque, 그리고
아들)를, 닛사의 그레고리의 경우는 물론 '성령의 동일실체성'을 확실히 확보 하면
서 필리움(per Filium, 아들을 통해서)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여,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의 아들에의 종속설 내지는 성령의 피조설을 진술하였기에 정통적 가
르침이라 볼 수는 없다.{{ Ibid., 24.
}} 그러나 닛사의 그레고리 이후 동방 교회는 '성부로부터
성자를 통하여' 성령께서 출래하신다는 것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Ibid., 25.
}}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페리코레시스 이론을 체계화함에 있어, 이들은 각 위격 안
에 한 동일실체, 각 위격 상호간과 또 실체 간에 '공동내재성'(immanence) 또는 '상
호상통성'(co-inherence)이 있고 두 위격이나 세 위격을 합하더라도 다른 한 위격
보다 결코 더 크지 않다 보았다.(요한복음 14장10절){{ Ibid., 29, 30.
}}
상호관통의 의미에서의 페리코레시스에 관한 진술에 있어서 아타나시우스와
서방의 어거스틴의 경우는 다소 정적인 상호내주의 의미에서만 전개하며, 닛사
의 그레고리의 페리코레시스는 문자 그대로 '상호상통'에 초점이 맞추어져, '실
체의 단일성'으로부터 그 논의를 시작한 듯하다.
용어 의미상 페리코레시스는 상호내주(mutual indwelling)의 의미보다 다소
동적인 의미가 들어있는 상호관통(mutual inter-penetration)의 의미를 더 많이
강조하는데, 그 강조점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서 이후 정적인 '아버지와 아들
로부터'라는 서방 신학과, 다소 동적인 아버지와 '아들을 통하여'라는 동방 신학
의 색채로 고착화된 것을 보게 된다.
그 결과 서방은 단일성내의 삼위의 정적인 면이 강조되었고, 동방은 삼위 내
의 일체의 동적인 면이 강조된 것이다.
그러나 '성부 에게는 단일성(unity) 성자에게는 동등성( equality), 성령에게는 단
일성과 동등성의 조화가 존재하니' {{ Ibid., 298.
}}우리가 하나님을 밖에서 바라봄에 있어서,
삼위일체의 외적 사역은 나누이지 않고, 각 위격은 신적 존재 전체와 동일하시고,
이 세 위격은 모두 합하여 각자와 동일하고 삼위일체내의 어느 한 위격도 전체 삼
위일체보다 더 작지 않으시다.{{ Ibid., 300.
}}
아우구스티누스는 즉 '전유'(appropriation){{ 삼위일체의 단일성 과 삼위 성을 논함에 있어 '페리코레시스'와 반대의 축을 이루
고 있는 각 위격의 특수한 속성,
}} 에 있어서, 성령께서 자기를 비
어 종의 형체를 취함으로써 작게 되신 것이 아니며(빌2장7절 참조), 아들의 특
성은 제 이 위격으로 고유하다는 것과, 성부 자신을 성자와 성령이라고 생각
말라 하였으니, 성자에게만 말씀이라는 용어는 사용되고, 은사는 성령에 대해서
만 사용되기에 복수가 허용되는 것이라고 이해하였다.{{ 김석환, 교부들의 삼위일체론. 301.
}}
또 성부 하나님께서는 자신 만으로 하나님이실 수 없고, 마치 성자께서 성부의
지혜와 능력이시며, 또 성부의 말씀과 형상이신 것과 같이, 오직 그가 낳으신 신성
에 의해서, 또 그 신성과 함께 하나님이시기에 성자의 신성이 성부의 신성과 동일
하다고 하였다.{{ Ibid., 302.
}} 물론 삼위 사이에 위격은 실재 방식(modus subsistendi)으로
각기 독특성을 가지나, 단순한 동동성(Aquivalenz)만이 아닌 일정한 순위질서
(Rangordnung)와 위격간의 비 공유적 특성을 가지며, 각 위격들의 실재 방식
과의 관계에서, 위격과 실체사이와 위격들 상호간에 구분되나 분리되지 않고,
'하나하나가 다른 하나하나 안에 계시며, 모든 이 안에 계신다. 또 모든 이가 모든
이 안에 계시며, 모든 이가 한 이 안에 계신다.' 곧 휘포스타시스가 각기 신적 실체
의 완전한 현시이며, 각 위격이 상호 다른 위격 안에 내재하시기에 한 하나님께서
삼위일체이시고, 삼위일체께서 한 하나님이시라고 어거스틴은 진술한다.{{ Ibid., 325.
}}
반면 갑바도기아 교부들은 삼위를 지나치게 강조함으로 인한 삼신론자라는
오해를 피하고자, 위격에 강조를 둔 세 독립적인 실재에 초점을 맞추어, '실체
의 단일성'보다는 각 위격들이 상호관통하고 서로 포용하며 언제든지 함께 세 위
격이 함께 하는 '공동본성'을 페리코레시스를 사용하여 '한 하나님'을 구하였다.{{ Ibid., 344.
}}
물론 각 위격들 간의 독특한 속성들에 의한 구분을 인정하나, 연합되어 있어서 그
실체 내에서 하나인 신적본성은 그 기원을 아버지로부터 가지며, 아들을 통하여 진
행하고 또 성령 안에서 완성되며, 그 어떤 활동도 분리되지 않고, 페리코레시스로
인하여 위격의 활동이 하나로 남고, 세 위격은 유적으로 동일본성을 소유하며 동일
한 공동실체성을 가진다.{{ Ibid., 342 -344.
}}는 것이다.
결국, 동방 갑바도기아 삼인은 세 위격 ->페리코레시스(상호 관통) ->한 실
체 : 아들을 통하여-공동실체 성,(본성)-삼위 성 내의 일체의 동적인 면이 강조
되었고, 서방 어거스틴은 한 실체->전유(상호 내재) ->세 위격 : 그리고 아들,
-불가분할한 동일 실체-단일성내의 삼위의 정적 면이 강조되었다.
뿐만 아니라 특성 전달교류에 의한 공동 실체의 범주는 일위라는 신성의지와 인
성 의지가 하나인 인격 속에서 펼쳐지는 것이지, 인격을 저버린 신성과 인성자체가
교류, 융합됨이 아니다. 삼위의 각위가 상호교통 또는 상호 내주함에 있어서, 각 위
의 독특한 특성은 전달되거나 변화되지 않고, 부 격과 비 발성은 오직 성부에게,
자격은 오직 성자에게, 발출은 오직 성령에게만 적용되는 각위의 고유성은 여전하
다.{{ Philip Schaff. 신조학. 115.
}}
지금 하나님 아버지와 동일본질로 상호 내주 하시는 그리스도는 신령한 몸으로
보좌에 좌정 하셨고, 살리는 영으로서, 성령과 하나 되어 성령의 편재 가운데 만유
의 주로서 만유 가운데 섭리하고 계신다.


2. 인격으로서 동일 본질

교의신학자 볼레비우스에 의하면 '비록 페르소나, 호모우시아스라는 말이 성경
에서 정확한 철자로 발견되지 않지만, 그것들은 성경과 일치하며 교회에서 유용하
게 사용 된다'고 지적하였다.{{ Heinrich Heppe. 개혁파 정통 교의학 1. 167.
}} 케커만 역시, '그가 세 존재의 양식 혹은 인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신이 신일 수없다는 진리를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 우리의 임
무'라 하였고, '신의 탁월한 지식은 신의 본질이 실제적 현실성(actus)으로 나타난
것이며, 실로 활동하는 본질 그 자체이기에, 이 안다는 현실성은 본질자체와 마찬
가지로 무한하고 영원하다'고 언급한다.
즉 완전한 존재는 신밖에 없기에, 신적지식의 대상은 신자신이고, 어떤 형상을
품는 지적작용은, 그 형상을 당연히 신에게 돌림이 마땅하나,{{ Ibid., 168.
}} 알려지는 것과 존
재하는 것이 동일한 실재인 신에게서, 알려지는 것은 실제로 아들의 실존(esse)이
기에, 필연적으로 본질과 존재가 동일하게 구성되며, 신의 지식은 영원부터 활동
적이기에, 신 자신을 영원한 현실성이다 함은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파의 보편적인 견해는, '어떤 철학자도, 아니 모든 철학자가 함께 그
들의 이성을 다 합친 예리함으로도 진정한 인식에 도달하지 못하였다'{{ Ibid., 172.
}}는 리차두
스(Richardus)의 지적과도 같이 '삼위일체가 자연적 이성에 의해 탐구될 수도 없고,
확실하게 입증될 수도 없다'는 것 또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단지 삼위일체는 계시
에 근거하여, '신성이 세계에 단일한 본성으로 나타났으나, 그 존재의 내면에는 세
인격이 있으니, 인격(person)으로서 인격적 방법으로 행하시며 인격적 조우를 구하
시는고로, 하나님은 자신이 아들과 그의 영 가운데서 우리와 만나는 인격이다.'

가) 하나님의 인격

하나님의 인격은 그리스도안에서 신인양성 일위로 사람 인격의 형태로 계시되기
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창조에서는 '하나님의 인격'이 되며 재창조에서는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인격'이 되며, 성령은 우리에 관하여 그 자신이 인격으로서
역사하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와는 다른 별개의 한 인격이라고는 말
할 수 없다.{{ Hendrikus Berkhof. 기독교와 성령의 역사. (서울: 기독교 문화 협회, 1986) 172.
}}
즉 '단일한 본성을 가진 세 존재 양태가 있는 것은 삼위 성으로, 이 양태들은 명
백히 복합 구성을 함축하지 않으니, 삼위일체는 '세 인격이 동일하게 하나의 진정
한 신이다.' '세 인격과 신적 본성의 단일성이 가지는 관계는 인격과 본성의 개념
상호의 관계에서 결과한다.'
인격은 타인의 일부도 아니고, 타자에 기초하지도 않고, 살아 인식하고 비 공유
적으로 존재하는 개체(individuum)로, 영혼 혹 정신은 단일하고 살아 있으며 인식
하고 실재하나 사람의 일부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격이 아니며, 이성적인 영혼과 구
별되는 인격은, 본질자체가 스스로 존재하는 실체로서, 신성의 인격(persona
Deitatis)은 '신의 본질 안에 있는 실재로서, 본성 상 신적본질 전체를 그 자체 안에
가지고 있으나, 그 비 공유 적 속성에 의해 상호 연관된 다른 인격들로부터 구별되
며', 상호 인정에 매우 실제적 완전성을 부여하는 개인적 속성, 사역에 의해 구별되
는 세 인격 각자가 다른 위의 본성 안에 존재하는 신적 인격은 확실한 존재 방식
을 가진 신의 본질로서, 동일한 신의 본성을 지니기에 본질이 동일하고, 동일한 신
적 위엄을 지니고 세 인격 각자가 다른 둘의 본성 안에 동등하게 존재한다.{{ Heppe. 개혁파 정통 교의학1. 176.
}}
다만 이 인격자체는 결코 양태 적이지 않으나, 하나의 본질에서, 하나의 지고한
본성에서 발원하는 위엄과 명예의 동등한 참여가 있는 상호적 내재 가운데, 속성,
사역에 따른 구체적 인격에 속한 상대적 완전성으로,{{ Ibid., 176, 177.
}} 상호 인정에 실제적인 완
전성을 계시함 속에 드러나기에, 우리에게 계시됨에 있어서의 내재됨의 한계와 제
약을 따른 계시적 양태를 보고 역사상 다수의 사람들이 신적 인격자체까지도 존재
양태로 보아 걸려 넘어졌다.
세 인격 각자는 그 본성 상 하나의 살아있고 완전한 신으로, 본질적 완전성을 공
유하며, 전체적 신성은 그 자체의 완전성과 동등하나, '세 인격 안에 단일한 신적
본질의 통일성이 있는 것처럼, 본질의 통일성 안에 실제적이고 분리된 인격들의 구
별이 존재한다. 본성은 인격 안에서 결정되고 실재 한다.' {{ Ibid, 177.
}}
이것은 각위의 인격이 다른 것이지, 본질이 다르지 않기에 수적으로 본질은 하나
일 뿐이니, 하나 됨, 신적 인격들의 공동성(communio personarum divinarum)은 동
질, 동등, 상호통재(페리코레시스)로 이해되어야한다. 신적 인격들의 동일 본질, 공
동 본질(consubstantialitas coessentialitas)은 세 인격이 수적으로 단일 유일한 하
나의 동일 본체, 혹은 본질을 가지며, 별개의 본질을 가지고 있지 않고 본질상 하
나의 실체라는 말이다.
그러나 한 인격은 모든 면에서 항상 그리고 분리할 수없이 다른 인격의 전체를
투과하며 포용하는 방식으로, 인격들은 신성의 본질로부터와 각 인격 서로 간에 구
별되어야 하는데, 존재의 질서 혹은 양태적인 구별에 의해, 신성의 본질로부터 드
러나는 것이니,{{ Ibid., 178, 179.
}} 인격을 본질과 구별하는 인격적 속성은 모든 불완전성이 제거됨
으로, 현저하게, 유비적으로 규정되는 일정한 양태들로 드러나니, 본질이 형태에 의
해 영향을 받는 피조물의 경우와 다르다.{{ Ibid., 179.
}}
삼위일체의 세 인격은 본질적으로나(essentialiter), 논리적으로(rationaliter)가 아니
라, 실제적으로 다른 인격과 구별되는데, '각 인격은 그 자신의 고유한 정의, 또는
고유하고 비공유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본질이 아니라 존재의 방식에 있어서
다른 인격과 구별된다.'{{ Ibid., 179.
}}
인격들의 구별은 각 인격 서로에게 가지는 관계에 의존하여 계시되기에 확실한 개
념으로(certa notione) 구별된다. 아무에게도(a nullo)나오지 않고 자기 스스로(a
seipso) 존재하는, 무출생성, 또는 부성(paternitas)은 제 일 인격의 비공유적 속성
으로, 창조되지도 출산되지도 않았고, 아들을 영원부터(ab aeterno) 낳는다. 일위가
이위로부터 그의 완전하고 전체적인 본질을 받아 그 안에 가지는 속성은 출생성
(generatio)또는 자성(filiatio)이다. 제 삼위가 영원부터 제 일위와 이 위에의해 부여
된 본질의 관점에서, 제 일위 제 이 위로부터 그 동일하고 완전한 본질을 받은 것
은 발출성(processio) 또는 발래이다.{{ Ibid., 180, 181.
}}
그리스도의 인격을 하나님으로부터 사람에 이르는 구원의 중재하는 측면에서 해
석했던 칼빈이{{ Alister E. McGrath. 역사 속의 신학. 454.
}} 지적한 것같이, 한 인격이 다른 인격보다 선재(prius)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과 원인에 있어서 우선(prior)한다. 또한 이 인격 상호간의 관계는 기
원, 질서, 사역에 따른 신적 인격들의 구별을 결과한다. '그러나 행위의 순서와 결
정에 관한한, 그들이 모두 그들의 존재 양태를 스스로(a sese) 소유하지 않았기 때
문에(요5장14절), 그들 모두가 스스로 행위 하지 않는다.'{{ Heppe. 개혁파 정통 교의학1. 182.
}}
앞서 살핀 바와 같이, 신의 외적사역(opera divinitatis ad extra)은 세 인격에게
공통적이기 때문에 비분리적(indivisa)이라고 불리며, 분리되지 않고, 관계성에 따라
인격들의 고유성(proprietas)과 활동의 순서와 구별은 유지되어, 세 인격에 공통적
인 본질 전체의 이치로부터 나오는 한, 부분적으로 본질적이며, 개별적 인격이 구
원사역에 상호적으로 협조, 협동하는 개별적 양태 때문에 개별적 인격에 사역이 돌
려지며 이를 경륜으로 칭한다.
구원의 경륜을 실행하는 자체는 분리되지 않은 방식으로(operationes communes)
삼위일체의, 사역의 원칙이 동일하고 공통적인 신성, 의지, 능력이 세 인격에게 공
통적이다. 고유한 면과 유사성 때문에, 사역의 양태에 있어서는 경건의 신비와 사
람 구원의 경륜 때문에 독특하고 구별된다. 실례로서 성육신이 비록 삼위 전체의
사역이지만 단독적으로 성자에게 언급되는 것이다. 또 제 일 위가 아버지로 불리움
은, 본질로는 피조물과 연관된 호칭이며, 인격으로는 본질의 통일성 안에서 그에
의해 나신, 영원한 제 이 위의 인격과 관련하여 신성의 특정한 인격을 의미한다.


나) 인격적 연합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으로 취하는 이 인성의 수용에 그리스도 양성의 연합(페리
코레시스)이 기초하고 있다. 인격적 연합은 인성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으
로 들어오는 것이다.{{ Heinrich Heppe. 개혁파 정통교의학.2 614.
}} 교의 신학자 부카누스는, 그리스도의 인격적 연합을 영원
전부터 존재했던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이 그 인격의 통일성 안으로 그 자체의 인
격을 갖지 않은 가장 순수한 인성을 취하여 신인양성의 속성을 보존 하면서 자기
자신의 것으로 만든 것이라 보았다.{{ Ibid., 614.
}}
그 결과, 신인양성 일위가 신성의 측면에서는 영원하고 무한, 전능, 전지한 창조자
이며, 동시에 시간 안에서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사람과 물질적이고, 유한하
고 가시적이고 가멸적이고 제한된 지식과 능력을 가진 피조물이다 하였다.{{ Ibid., 614.
}} 하지
만 육체와 영혼의 연합은 인격적 연합의 한 방식이나,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에, 인격적 연합을 영혼과 육신의 결합이라는 비유로는 설명하고자 함에는
무리가 있다.{{ Ibid., 616.
}} 직접적인 로고스의 인격과 인성이 결합되는 연합과 간접적으로 성
령이 중재하는 신인양성의 간접적 연합은 구별되어야 하며, 신인양성 일위에 화친
연합하는 구원적용 또한 구별됨이 합당하다.{{ Ibid., 617.
}}
물론 이 연합은 인격들이 본질에 의한 동질적 연합(unio coessentialis)도 아니고,
본질적 연합(unio essentialis et)도 아니고, 합의적 연합(consensus)도 아니고, 신비
적 연합 또는 오로지 은혜에 의한 연합(praesentia gratiae tantum)도 아니고, 성례
적 연합도 아니다.{{ Ibid., 617, 618.
}} 자체의 인격을 갖지 않던 인성이 로고스의 인격으로 수용됨
으로써 통일된 인격으로 결합되어 로고스의 인격 내 적 존재가 됨으로 유지되어,
신인 양성이 인격과 하나로 친밀하고 영속적인 결합을 이루는 인격적 연합이기에,
그 자체의 본질적 속성과 구별된 작용을 보존한다는데 아무 의심도 없다.{{ Ibid., 618, 619.
}}
그리스도의 인격적 연합은 장소의 측면에서 분할 할 수 없게 이루어졌기에 '연합
에서 각성이 그것에 고유한 모든 본성적 속성과 함께 안전하고 건전하게 남아있
다.'{{ Ibid., 621.
}} 인격적 연합의 효과는, 인성에게 은혜, 은사가 베풀어지고, 양성이 속성이
인격과 교제하며, 사역들을 교류하는데, '속성간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인성의 격상, 신-인적 사역에서 양성의 협력'에 따른{{ Ibid., 621.
}} 인성의 높은 탁월성이다.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이루어진 양성의 연합은 동시에 인성과 신성이 오로지
한 예배로서 함께 우리에게 예배 받아야 되도록 만들었으니, {{ Ibid., 627.
}} 속성은 다른 성에
전달될 수 없는 특정 본성의 속성이나, 속성간의 교류는 인격적 연합의 효과로서,
양성의 각 성들이 하나의 동일한 인격 안에서 만나 그 인격에 부속하게 된다. 또
양성이 각 실체를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 보유하기 때문에, 각 성의 고유한 속성들
도 자기 본성에 독특하게(distincte) 소유되며 그 인격에 속하되 그 인격에는 구별
되지 않게(indistincte)속한다.
속성의 교제는 교호적 서술로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성이든 인성이든 다른 본
성으로 이름 한 그 인격에 귀속되기에,{{ Ibid., 630.
}}속성의 교통은 인격적 연합 형태를 의미
함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그 인격에 돌려지는 양성의 인격적 연합 때문에 가능한
서술이기에, 속성 간의 교류는 그리스도안에 있는 한 본성에게 고유한 것이 다른
본성의 이름으로 불려지는 인격 자체에 귀속되는 제유(synecdoche)이외에 다른 것
이 아니다.{{ Ibid., 631.
}} 또한 이 속성 간의 교류는 그리스도의 신-인적 인격의 측면에서 사
실이나, 본성의 측면에서는 서술적 교류일 뿐으로, {{ Ibid., 631.
}} 우리는 한 본성의 속성들이
다른 본성의 속성들이 되지 않았으며, 신성은 결코 피해를 당하지 않았고, 인성은
영원하지 않으니, 그리스도의 전인(totus Christus)은 편재하지만, 그리스도의 전체
(totum Christus), 즉 양성은 그렇지 않다.{{ Ibid., 634.
}}
중보하는 구속자가 양성의 대속의 원리인 두 본성의 협력을 통하여 하나의 속죄
를 획득하였지만,{{ Ibid., 638.
}} 무한한 창조적 본질과 유한한 피조물 적 본질사이에는 필연적
으로 영속적인 차별이 유지되어야 하기에, 신성 자체와 구별되어야 한다.{{ Ibid., 639.
}} 결국
그리스도의 인성의 편재성을 주장하는 루터 파 교리는 당연히 거부하나, 불가시적,
무한정, 무지역적인 영의 임재의 편재성은 부인하지 않기에 칼빈의 영적 임재 기념
을 지지하는 것이다.


제 2 절 구원과 성령
구원과 성령의 관계는 사실상 하나라 할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의 사활 대속의
근거에 따른 성실하신 성령의 구원 적용이기에이다. 이때의 구원 적용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곧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 공로에 의한 화친의
연합(친합)으로 가능함 이기에, 친합은 사실상 신인 양성일위 그리스도의 사활대속
에 성실하신 성령의 능력을 입어 믿음으로 이루어짐이다.

1. 신인 양성 일위의 사활 대속

그리스도의 사활대속은 십자가에 죽으심과 부활을 대속이라는 범주에서 하나로
본다. 또한 대속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참 신성과 참 인성이 하나 되어서 이룬 사역
이다. 이 같은 선 이해를 가지고 살펴보고자 한다.

가) 십자가 죽으심 대속

메시아이신 예수는 순종을 통하여 자신의 독립적인 삶을 계시하셨다. 동시에 메
시아 예수는 아버지의 뜻에 온전히 헌신하신 것은, 단순히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아니라 철저하게 자신의 의지에 따라 자발적으로 행동하였기에, 메시아시신
예수는 아버지로부터 독립되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삶을 아버지로부터 가져
오는 영원한 성자임을 보여주었다.
순종의 극치였던 십자가는 사람이 산다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에 대한 귀한 모범
을 보여 예수님의 자기희생에 대한 영광스러운 절정이다. 즉 예수님은 섬김과 고난
과 자기부인을 통해서 대속의 죽음을 죽으신 것이다.(막8장34-38절, 10장35-45절)
주 그리스도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시니, 이러한 그리스도의 고난의
참 의미는 사람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형상 회복'과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성취를
위함이다. 이런 면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은 단지 우리와 똑같은 분 또는 무엇이
되려고 한 사람 일뿐이 아니라, 우리가 되기 원치 않는 것이 되었었던 버림 받고
잃어지고 저주 아래 (사 53장)있은 사람이라'는 몰트만의 말은 음미할 가치가 있
다.{{ Leonhard Goppelt.모형론. 최종태 역 (서울 : 새순 출판사, 1991) 173. 참고
}}
그러면서도 동시에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시편 22편에서 언급하듯이
결정적으로 하나님과의 분리를 보여준다.{{ Ibid., 173.
}} 이것은 예수님께서 자기저주를 통한
영원한 서약의 견고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동시에 창 3장15절에 약속된 언약을 성
취하고자 자신을 죽이는 것이며, 또한 창 15장17-18절, 렘 34장17-20절에 보인 언
약을 체결하는 방식과 같이 하나님과의 분리됨을 격고 지나갔다.{{ O. Palmer Robertson. 계약신학과 그리스도. 김의원 역 (서울: 기독교문서선교회, 1983)
135. 비교
}}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십자가에서 멀리 떨어져있었다는 사실을 들어 누가는
의로운 수난자가 자기의 가장 사랑하는 가까운 친구들과도 분리되심을 겪으셨다고
알려준다.(눅23장49절) 그러면서 동시에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도
버림받았다고 외치신 외침(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을 보면, 인자가 마지막으로
지녀야만 했던 절망의 최저 심연으로부터 터져 나온 외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논의를 더 구체화시키기 위하여 다음의 문제에 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히 5장7절에 나타나는 그의 육체( )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음을 증거한다. 요 12장27
절은 그의 마음( )속에서 뼈저리게 의지적인 느낌을 나타낸다.
또 요 13장21절에서는 '심령이 민망하여'라고 표현 했는데, 이것은 사실 죽음을
앞둔 그리고 죽음을 두려워한 정적인 동요가 아니라, 영적인 동요로 곧 번민의 자
리가 영( )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따라서 인자의 외침이 보여주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의 슬픔을 표현한 가장 강력한 표현 중 하나로서, 몸에서부터 혼과
영 속에 스며드는 배신과 버림받음에서 오는 고뇌뿐 아니라 그의 사랑과 한 사도
와 그의 운명사이에서 발생하는 대조에 의한 고뇌였다고 하였다.{{ H.R. Reynolds. 풀핏주석. 요한복음(하) 이희숙 역 (대구: 보문 출판사, 1980) 221. 301.
R.CH.Lenski. 성경 주석. 요한복음(하) 장병일 역 (서울: 백합출판사, 1974) 157. 211.
}}
특히 시편 22편에 등장하는 '내 하나님'이란 이스라엘의 계약의 하나님이며, 그리
고 여기의 '버림받은 나'는 계약의 한쪽 편으로서, 그 버림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진
실성에 호소하여 불평하는 사람은 의로운 사람인 예수였다. 예수님께서 내 하나님
이라 부르짖음은 하나님 나라의 접근에 대한 예수님의 선교의 전 내용과, 예수님의
인자로서의 전 내용을 보유한 것을 부인할 수없다. 그리고 죽으실 때의 부르짖음에
나타난 땅이 꺼지는 경험은 예수님과 그의 아버지 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매우
역설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님사이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몰트만
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는 것이다.{{ J.Moltmann.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김균진 역 (서울: 한국 신학 연구소, 1993) 47.
}}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신 주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하나님 의
독생자이시나 유일하신 참 아버지에 의해서(요17장3절), '하나님 없이 살고 하나님
께 버림받은' 사람을 위하여 버림받으셨으니, 주권과 순종의 관계로 하나님께 대한
공의와 사람에 대한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하나님 없이 사는 자를 구하고자 하나
님과 동행하사 하나님 없이 사는 상태에 이르신 사랑을 보이셨다.(빌2장1절-8절)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렸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이 십자가에 달렸다'{{ McGrath. 역사속의 신학. 446.
}}라고 망설임 없이 진술했던 루터의 독특한 십자가 신학은
속성들의 교통의 근본적인 적용으로 간주될 수 있고, 루터는 그리스도의 창조주 되
심도 이와 같은 논지로 속성의 교통을 활용하는 것을 보게 된다.{{ Ibid., 446.
}}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자신이 보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버리실 때 또한
자신을 버리셨고, 독생자를 희생하실 때 하나님 자신을 희생 하셨으나, 이것을 성
부수난설(Patripassianism)이라는 성격으로 규정할 수 없다. 또한 독생자 예수 그리
스도 역시 유일하신 참 하나님으로부터 유기(遺棄, dereliction)를 맞보셨으니, 이는
신인 양성일위의 인성이 버림당함에서 경험케 된 것으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은 독
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삼위 내의 상호내주하시는 인격 가운데 사랑의 무한
한 고통을 경험하셨고, 분리를 아파하셨다.
그러나 이 같은 경험을 들어서 성부께서 고난당했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이 유기
적 고난은 성자가 직접 인성으로 당한 것이지 성자 자신 곧 신성과 인성 모두가
이 고난을 당했다는 할 수 없다. 다만 성부 성자 성령의 상호내주적 동일본성의 성
격과 성자의 신성과 인성간의 특성 전달에 의한 인격적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이다.
이 같은 하나님의 고통은 하나님의 사랑과는 달리 하나님의 사랑을 버린 사람들
을 사랑하는 사랑이며, 그 속 표현에 적극적인 방도로서의 하나님의 직접적 사랑을
포함하고 있으니, 십자가의 대속(代贖)은 억지로나 인색함 등 예수님의 자유성이
침해된 가운데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더 분명한 근거로 갈라디아서 2장20절에 나타나는 '나를 버린다( )'라는
표현은 그리스도를 주격으로 계시한다. 즉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성부)께서 예수님을 내어주심일 뿐 아니라, 예수
님(성자) 자신도 자신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것을 말한다. 내어주심 곧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의 '자기 포기'란 인성의 영혼( )에 부여된 '전가된 자유 의지(free
will agency)'로 이루어진 것을 분명히 보여준다( 히 5장 8,9절, 히4장 15절 ). 그렇
기 때문에 이러한 '자발적인 순종'그 근거가 되어 승귀 곧 높여지신 것이라 하겠
다.(빌2장9-11절, 막14장6절)
몰트만에 의하면 "자기 포기라는 표현 양식이 아버지와 아들에 관련된 사실은
겟세마네의 기도에서 드러남 같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
리스도의 서로 깊이 관련된 공동의 목표요, 두 위격이 내적으로 일치된 바는 서로
분리될 시점에서 보이니, 십자가의 형벌은 역사적 포기, 종말론 적 굴복이기에 분
리(分離)에서의 통일과 일치에서의 분리는 십자가의 형벌에서 하나가 되었다.{{ J.Moltmann.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58.
}}
따라서 독생자 그리스도 예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독생자를 포기함으로 분리되고
동시에 독생자 자신의 '자기 포기'로 긴밀하게 일치를 이루었다고 언급한다.{{ Ibid., 58.
}}
그러나 비록 삼위사이는 여전히 페리코레시스(상호내주)적 하나이시나 십자가 대
속의 순간은 앞서 살핀 바대로,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일위격의 명확한 특성전달에
있어서 신성과 인성이 하나인 인격의 관계성에서 명확한 상호분리가 있었음을 부
인할 수 없는 것이고 또한 이 같은 분리를 예수님의 영이 떠났다고 성경은 증거하
고 있다.
또한 그리스도안에서 인격의 관계성에서 명확한 상호분리가 있다고하여서 삼위
사이에 페리코레시스적 하나됨이 깨어졌다 라기보다(깨어졌다고 한다면 비성경적
임) 오히려 페리코레시스적 하나인 인격이 여전하기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
이의 속성전달로 하나이던 것이, 그리스도의 인성을 통해서 영이 떠남에 의한 찰나
적 버려짐으로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 결과 '자기 포기'라는 아픔의 대속 성취를
삼위 모두가 체험 공감하게 되었다 함이 오히려 보다 적절할 것이다.
십자가상에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때문에 죽는다는 것을 '거기서 하나님이 하나님
과 쟁투하신다'라고 몰트만이 설명하는데, 이것은 루터의 진술을 들어 언급한 것으
로, 십자가에서 일어난 일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사이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일어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의 고통은 철저한 파괴에서 겪는 아들의 죽음이요,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버림을 받고 스스로 자신을 하나님의 뜻에 순종으로 내어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자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아버지와 아들의 포기'라는 모습으
로 성령(聖靈)께서 영원히 나오시어 관계적 형태로 계시되어짐 속에서, 창세전에
예택(豫擇)된(엡 1장3, 4, 5절) 그들의 생의 미래를 열어 주신다.
이것이 바로 성부 하나님께 독생하신 성자 하나님이 죽기까지 순종한 결과이며,
연연히 흐르는 '약속'을 좇아 하나님 형상의 회복을 위해 자기 목숨( )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신 것이요(막20장28절), 참 하나님께서 참 사람으로 오셔서 이
루신 속죄 대헌 사역이 곧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나) 부활 승귀- 높아지심

사도 요한은 대속하신 후에 체질 변경된 몸을 입으신 예수님께 대하여 예수께
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요한복음20장31절) 또 참 하나님이요 영생이심을 알리
고 있다. 대속 이후 부활의 첫 열매되셨고(고전15장20절), 천사보다 더욱 아름다운
이름을 기업으로 얻으신(히1장4절)이는 영광과 존귀로 새 이름을 얻으신 참 하나님
이시며 영생이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낮아진 예수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높아지신 예수님'
으로 지칭했다고 단언할 수는 없어도, 메시아가 예수님이심을 강조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으로, 또 부활 하신 예수님을 다메섹에서 만나 근본적 전환을 가졌던 바울의
경우를 보더라도, 대속사역을 성취하시고 체질 변경된 몸을 입으신 주, '참 하나님
이시자 영생이신 자기 백성의 구원자'를 예수 그리스도로 칭하는바 역시 부인할
수 없다.
부활이 지니는 토대로서의 중요성은 '예수의 자기인식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인
부활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통해서만 예수께서 유일무이한 사람이라는 것을 주장
할 수 있게 된다.

예수의 지위에 대한 우리의 주장도 그를 죽은 자로부터 일으키신 하나님에
의해서 확증된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예수의 주장을 그 토대로 한다.{{ Stanley J. Grenz. 조직신학. 하나님의 공동체를 위한 신학. 신옥수 옮김 (경기: 크리스
챤다이제스트, 2003) 417.
}}

부활은 성부의 영원한 아들이고, 성자로서의 예수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한
교제에 참여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하였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장29절),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14장6절), 진리의 교사라는 예수의 자기 인식은 성부와의 특별한 관계를 누
리고 있다는 예수의 주장과 아울러 하나님으로부터의 응답을 필요로 하는 것
이었다. 하나님의 응답은 부활을 통해서 왔다.{{ Ibid., 418.
}}

예수가 참 사람이라는 주장의 토대는, 부활에 의해서 확증된 예수 자신의 주장
에 있으니, 하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되게 하시고자 하셨던 모습은 예수를 통해서
계시되었다. 예수의 사람 전체, 가르침, 죽음에 대한 하나님의 확증으로서 의 부활
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온전한 인성의 궁극적인 본보기라는 것을 말해 주시기
에,{{ Ibid., 420.
}} 우리로 하여금 예수를 참 사람으로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시었다. 그 삶
은 공동체적 삼위 간의 페리코레시스에 의한 상호적인 사귐뿐 아니라, 곤경에 처한
자들에 대한 연민의 사역, 자연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다른 피조물들과의 교제를
포함하였다.

예수의 영적인 삶은 광야를 품을 수 있었고, 창조 계의 아름다움을 누릴 수
있었고, 바다를 잠잠케 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셨다.{{ Ibid., 421.
}}

예수와 성숙을 위한 타락은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였다. 타락은 순
수(innocency)와 화해(reconciliation) 사이의 필수적인 단계의 일부였다. 그리할 찌
라도 타락한 자들은 자신들의 죄 때문에 이지 원인이 하나님이 될 수 없다.

십자가는 부활과 따로 떼어 놓고 볼 수 있는 계시가 아니다. 십자가는 부활
의 관점에서 볼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부활은 십자가의 어둠을 몰아내고 그
십자가를 새로운 날의 빛으로 가져온다. 부활절 선포의 눈을 통해서, 십자가는
전혀 새롭고 경이로운 의미를 지니게 된다.{{ Ibid., 419.
}}

부활을 통해서 예수님은 우리가 장차 지니게 될 변화된 존재론 적 실체를 계시
하셨다. 이러한 변화된 인성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도였다. 이제 부활하신 예
수를 규정하고 있는 변화된 인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영적이고 육체적인 존
재로서 영원토록 살기를 의도하셨다는 것을 계시해 준다.
또한 부활은 삼위 사이의 페리코레시스가 하나됨 여전한 성자께서 신성과 부활
의 신령한 몸을 가진 신령한 인성으로 체질 변경되어 대속에서의 분리의 아픔이
영원 자존하신 신성에, 영원무궁 영광부활 자유의 인성으로 하나 됨의 기쁨이 성취
된 사실을 증거 함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속한 자에게 신인 양성친합(화친연합)으
로 인하여 이 같은 반열에 들 소망을 가져다 준 것이다.

2. 신인 양성 일위의 화친연합
신인 양성일위의 화친 연합이란 곧 메시아 예수님을 믿음으로 성령과 하나되어
사는 구원 속죄 적용의 삶을 의미한다. 우리의 구원은 사실상 신인 양성일위이신
그리스도 예수와 믿음에 의해 신인 양성 친합됨으로 가능한 것이기에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가) 성육신을 통한 그리스도와의 연합

아담과 그의 후손 사이에 있는 관계의 본질은 사역에서 핵심적 중요성을 가지니,
처음 아담에 의해 일어난 훼손을 복구하러 오신 것이다. 만약 아담이 동산에서 우
리를 대표한 것이라면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우리를 대표한 것이며, 아담이 한 일이
우리를 대표하여 우리 대신 한 일이라면,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실한 그리스도의 전
생애 역시 그러하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와 하나로
만드셨기 때문이다. 늘 그렇듯이 하나님이 먼저 주도하시니,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
의 연합은 메시아의 성육신에서 일어났고, 요1장1-3, 14절과 히브리서에서 그리스
도의 참된 인성이 강조된다(히2장, 4장14-5장10절).
그리스도께서 취하신 인성은 특정하고 구체적인 인성이지 총체적인 인성이 아니
었다(눅1장35절). 마치 하나님의 신이 태초에 물 위를 덮고 있었듯, 예수님의 탄생
은 하나님의 동일한 창조적 에너지에 의한 새로운 창조, 새로운 시작을 표시하는데
사람이 되심으로써 그리스도는 자신을 인류와 연합시켰다. 인류로서 독특한 성령에
의한 수태 때문에 두 번째 아담으로서 자신이 머리가 되는 새로운 인류의 창시자
가 되었고,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요, 육신 되심으로서 자신을 우리
와 연합시키셨고, 두 번째 아담으로서 구속받은 인류의 머리가 되셨다.

나) 믿음을 통해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구원의 모든 복의 기초요, 이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기 시
작하는 시점에서 경험되기 시작한다. 우리의 선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하
나님의 선택이다. 우리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뜻의 비밀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된
것으로(엡1장5절) 우리의 지혜, 의, 거룩과 구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며(고전1
장30-31절),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아서 그 분과 함께 하늘에 앉는 것이다
(엡2장1절 이하). 우리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고(골3
장1-4절) 성령에 의해 구원 적용되는 전 과정이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의미하
는 바의 일부로서 들어맞는다.{{ Robert Letham. 그리스도의 사역, 황영철 옮김 (서울: IVP, 2000) 81, 82.
}} 그 연합은 믿음 안에서 존재 하지만, 한편으로는
세례에 의해 표시되었고 그 둘은 하나로 결합되어 있으며,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구
원의 모든 복의 원천이다. 이는 성령이 믿음에 의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
니, 연합의 본질은 공유로 이는 법적, 집합적 연대이다(롬5장12-21절).
그리스도가 이루신 사역은 성령의 능력으로 내면에서부터 우리를 변화시키고 재
형성하며, 연합은 깊은 인격적 상호교통에 기초하고 있는데, 신자는 그리스도안에
살고 그리스도는 신자 안에 성령을 통하여 우리 안에 와 사신다(골1장27절). 이는
다시 성 삼위 사이의 신성한 교통에 근거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성례에 참석하는 것으로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성령의 사역의 결과로, 우리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행사함에 따라
서 성령은 우리로 성례에 참여함으로 그리스도와의 화친연합으로 성장하게 하여
참여케 된다.{{ Ibid., 84.
}}
구원의 어떤 부분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에서 제외될 수 없고, 하나님의 선택은 우
리 쪽의 책임과 균형에 의한 응답을 요구하며, 우리 응답의 정당성은 우리를 대표
한 그리스도가 먼저보이신 신실함에서 나오게 된다. 이미 여기서와 장차 영원한 하
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될 때까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전체 경험은 그리스도와
의 연합에 내포됨으로 총체적이고 점진적인 실현을 현실의 현재속의 친합으로 구
체적 확정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Ibid., 88.
}}














제 4 장 결론
신인 양성일위는 진정 기독교를 기독교 되게 한 놀라운 성육신, 사활 대속, 부활,
승천과 성령의 보증에 의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안에서 하나 됨을 가능케 한 역사적
은총의 신비이다. 이는 또한 기독교만이 구원이 있는 부인할 수 없는 근거이자, 하
나님의 신실하심에 의한 승리의 구현이다. 신인 양성일위로 인하여, 초월하신 하나
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내재하신 가운데 영원토록 영광 받으심으로, 창세전 그리스
도안에서 목적하신 바를 신실히 이루시고 계시다.
신인 양성일위의 결과, 사람은 그리스도안에서 성령의 구원 속죄적용을 입어 믿
음으로 신인 양성 친합되어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살펴본
바에 따르면, 신인 양성교리의 정리가 칼케돈 회의에서 사실상 골격이 형성 된 것
을 알게 되었다. 이후 신성과 인성의 각 의지가 인격으로 하나 됨을 또한 알았다.
역사상에 있어서 동방의 안디옥과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이의 판단 준거가 다른 가
운데서 어쩔 수 없는 이해의 차에 의한 갈등도 살펴보았다. 종교 개혁기에는 루터
파와 칼빈 추종자간의 이견이 있었고, 이는 지금까지도 여전히 성례의 성 만찬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견해를 달리함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기독론적 관점에서 삼위일체를 바라봄에 있어서, 동 서방 공히 같은 주장을 하였
으나, 논리 전개에 있어서, 하나에서 셋으로 나아가는가, 셋에서 하나로 나아가는
가하는 시발점의 차이에 따라 다른 시각의 비추임이 있었음을 본다. 그 가운데 상
호내주(페리코레시스)를 체용한 동방과 전유개념을 사용한 서방, 필리오케와 필리
움으로 주장할 수밖에 없었던 정황을 간단하게나마 살필 수 있었다.
헌데 우리는 신인 양성 일위를 고찰 하면서, 알게 된 것은 삼위 사이에는 분명
상호 내주, 상호 침투라는 개념으로 설명을 할 수 있을 찌라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 사이의 문제에 있어서는 페리코레시스적 접근이 적절치 않고, 특성 전달의 개
념으로 바라봄이 적절한 것을 알게 되었다. 오직 신인 양성 일위에 따른 초월과 내
재의 하나 됨은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인격으로 믿고 화친 연합하
여 덧입어 기릴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특히 그리스도의 대속에 있어서의 삼위 사
이의 페리코레시스가 변함없기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나누이는, 대속의 내
어줌에서 삼위 일체 하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서의 고난을 함께 맞볼 수 있었음을
알게 된 사실이다.
비록 그 고난을 알게 되었다 해도 삼위 사이의 페리코레시스는 변함없었고, 그러
했기에 오히려 신성과 인성의 나누임을 함께 아파했고, 성부의 내어 주심과 성자의
스스로 순종으로 자신을 버리심을 통한, 인격 관계성에 있어서 동참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성의 죽으심은 단지 인성 문제 뿐 아니라 신성과의 나누이는 죽음을
신성으로 하여금 당하여야 했고, 그 사실이 삼위 사이의 페리코레시스에 의해 인격
의 관계성 속에서 하나로 겪으신 것이기에 우리가 감히 루터가 언급 한 바처럼 하
나님이 죽으셨다고 언급한 의미를 이해하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인 양성일위에 의하여, 그 죽으심이 초월과 내재가 하나 일 수 있
음을, 화평과 거룩을 하나로 가능케 할 수 있음을, 피조물이 영원한 창조자와 영원
히 영광된 자유 속에서 하나 됨을 소망할 수 있게 되었다.

간구 : 모쪼록 죄인 위하여 형용하기 힘든 고난과 고초를 겪으신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 크신 사랑을 베푸시고자 창세전부터 목적하시고, 변개하심
없이 자신에 신실하신 유일 참 하나님의 사랑과, 오늘도 변함없이 창조 시 이루신
바와 그리스도의 구원 속죄적용을 성실히 적용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보혜가, 창세
전에 그리스도안에서 예택된 모든 자들과, 이들에게 주신 세상 속에서 함께하며 영
원히 영광 받으시기를 소망합니다. 아멘.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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