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천국에 들어갈 자
마 7,21-23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 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서론
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큰 관심을 갖는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우선 천국이 무엇인지를 규명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일은 천국이 미래의 세계를 뜻하든지, 이 세상과는 다른 저 세상을 뜻하든지, 아니면 예수님과 함께 이 세상에 와서 이미 그 모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한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 구원의 나라를 뜻하든지 과연 누가 그 나라에 들어갈 것인가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이런 질문에 관심을 가지는 이유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이 나오면 그 답을 자신에게 적용하여 자신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신을 찾거나 하나님을 찾는 모든 사람들의 최종적 관심이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질문은 종교 혹은 신앙의 궁극적 목표와 관련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한국교회는 간단한 도식을 만들어서 오랫동안 가르쳐 왔습니다. “예수-천당”입니다. 이 구호는 다음과 같이 여러 가지로 설명됩니다. ‘예수 믿으면 천당 갑니다’, ‘예수 믿고 천당 가십시오’, ‘예수 믿고 천당 갑시다’. ‘예수님을 믿음’을 조건으로, ‘천당’을 결과로 가르쳐 온 것입니다. 이 구호를 모르는 사람은 한국 사람 중에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간단하게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본문도 간단한 도식이 아닙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오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주여 주여 하는 것’과 한국교회의 ‘예수 믿음’, 예수님이 말씀하신 ‘천국’과 한국교회의 ‘천당’을 정확하게 같은 것이라고 말하거나 그렇게 서로 비교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아주 비슷해 보여서 누구라도 서로 무관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정확하게 같은 개념들은 아니라 하더라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천당이나 천당의 조건을 말하는 한국교회의 짧은 구호는 적어도 예수님의 말씀에 기초해야 나와야 한다고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문과 한국교회의 구호를 비교해 보면 우리는 깜짝 놀랄 만한 사실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믿음’과 “천국”을 연결하여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 하는 것’을 ‘믿음’ 내지 ‘믿음의 고백’과 연결된 현상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 예수님은 이것을 천국과 연결하지 아니 하시고 오히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는 부정문을 만드셨습니다. 한국교회의 구호 중“천당”과 비교할 수 있는 “천국”에는 ‘믿음’이 아닌 “하나님의 뜻을 행함”이 결합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예수-천당”의 구조로는 바르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알리려고 하신 내용은 무엇일까요? 저는 본문의 말씀이 산상설교의 결론부(7:13-27)의 결론임을 강조하며 설명하겠습니다.
1. 일반적 성격을 가진 말씀
먼저 우리가 알아야 할 사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이 아주 일반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본문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한 사람들을 향한 것이요 그들의 신앙고백의 진위를 따져 진정한 회개와 거듭남이 없는 사람들을 향해 ‘너희는 천국에 못 들어간다’고 하신 것이라고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적지 않은 설교가들이 이렇게 본문을 주석하지만 거짓된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만을 가리킨다고 말할 근거가 본문에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주제가 아니라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 하는 것”을 다루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향해 이렇게 말하는 모든 사람들을 지적하신 것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저는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설교하며 예수님은 치밀한 논리와 독특한 표현법을 사용하셨다는 점을 여러 번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 중 삼인칭 표현법(그, 그들은 ...)과 이인칭 표현법(너, 너희들 ...)은 아주 중요한 표현상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는 것을 5장 3-11절에서 설명하였습니다. 그것을 다시 한 번 요약하겠습니다.
예수님은 팔복(5:3-10)을 삼인칭 표현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이 표현법의 효과는 이렇게 나타납니다. 예수님의 축복은 팔복을 듣거나 읽는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되지 않고 그 사람들 중 팔복의 조건을 충족시키는 사람들 즉 ‘심령이 가난한 자들’, ‘슬피 우는 자들’ 등에게만 적용됩니다. 제자들과 무리들이 섞여 있을 때 이 표현법은 제자인지 아닌지를 불문에 붙이고 조건만을 따지는 효과를 나타냅니다. 제자라도 심령이 가난한 자가 아니면 첫 번째 복의 범위 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첫 번째 복이 그에게 적용되려면 제자든지 무리든지 적어도 “심령이 가난한 자”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홉번째 복(5:11)에서 예수님은 표현법을 이인칭으로 바꾸어서 “너희는 ...”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이인칭 표현법은 7장 20절까지 계속됩니다. 이인칭 표현법이란 설교자가 청중 모두를 직접 지시하는 방법입니다. 설교의 내용은 설교를 듣거나 읽는 사람들 전체에게 곧바로 적용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인칭 표현법과 함께 청중이나 독자를 제한할 수 있는 특별한 조건절을 사용하심으로써 설교의 내용이 청중 모두에게 무조건 적용되도록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이 조건절이 예수님과 사람들의 관계가 포함되어 있는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 한다면 ...”입니다. 그래서 저는 5:11-7:20에 사용된 이인칭 표현법 “너희”, 혹은 “너”를 ‘예수님의 제자들’ 즉 신자들이라고 설명했던 것입니다.
본문 7장 21절에서부터 예수님은 다시 삼인칭 표현법을 사용하셨습니다. 형식적으로 제자들과 무리들은 더 이상 구별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 중에 누구라도 본문의 내용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본문은 그들을 향한 것이 됩니다. 만약 제자들이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 했다면 이 말씀은 그들에게 주신 설교입니다. 무리들 중에 누가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 했다면 이 말씀은 그들에게 주신 설교입니다. 제자들이든지 무리들이든지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 하고 말한 적이 없다면 본문은 그런 사람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사역 초기에 아직 이렇다 할 제자들이 만들어지기 이전에 흔히 사용하신 그런 표현방식입니다.
제자들에게만 주신 말씀을 우리는 보통 특수한 교훈이라고 부릅니다. 신학자들은 제자도라는 이름을 붙이기를 좋아합니다. 이런 말씀은 확실히 믿고 따르는 것을 근거로 하거나 전제로 하는 까닭에 모든 사람들에게 주시는 일반적 성격의 말씀보다 훨씬 깊고 진한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다분히 명령조요 강압적인 어조를 띱니다. 그러나 제자들과 무리를 구별하지 않고 일반적으로 주어지는 말씀은 토의적인 권고와 같은 어조를 가집니다. 그리고 직설법이 더 자주 사용됩니다.
본문을 이런 일반적인 성격의 말씀으로 분석하면 “주여 주여 하는 것”은 형식적인 고백, 위장된 믿음과 같은 부정적인 의미를 지닐 수 없는 표현임이 명백해 집니다.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들은 논외로 밀려났습니다. 허위, 위장, 회개 없음, 중생하지 않음과 같은 극도의 부정적 개념들은 설 자리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귀중한 산상설교에서 그래도 관심을 가지시며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만 한다”고 교훈하실 수 있는 대상은 적어도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2. “주여!”의 의미
누가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입니까? 그들이 사용한 “주여!”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이 문제를 우선 산상설교가 선포되었던 그 당시로 돌아가서 살펴보려 합니다.
본문에 사용된 단어 “주여(퀴리에)!”는 그 자체에 독특한 기독교적 색체를 가진 단어가 아닙니다. 일상생활에서 한국어의 “선생님”, 혹은 “아저씨” 같이 낯모르는 사람들에게, 혹은 손윗사람이나 힘을 가진 사람에게 흔히 형식적으로 사용하는 존칭어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이런 의미가 사용된 것 같지 않습니다. 자신을 향해 단지 인사치레로 “주여!” 부르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매우 심각하게 다루셨을 것이라고 예상하는 것은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일입니다. 따라서 단어 자체가 그렇게 사용될 수 있었다 하더라도 더 깊은 의미가 본문에 적당합니다.
종이 그의 주인을 부를 때 주로 이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권력과 군대를 가지고 생사여탈권을 휘두르는 사람에게 사람들은 진심이든, 마지 못해서든 “주여!”라고 불렀습니다. 밑에 있는 사람들이 위에 있는 사람들의 권한을 실제로 인정하면서 사용하는 단어가 “주여!”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이런 의미도 적합치 않습니다. 예수님이 부, 권력, 군대를 가지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것으로 보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산상설교를 하실 즈음의 청중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에게 몰려 왔습니다. 예수님은 병든 사람들과 장애인들을 고쳐주셨고 귀신들린 사람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예수님과 예수님이 가진 남다른 영적 힘, 그리고 이 힘을 사용한 선한 일에 대한 소문은 더 넓게 퍼져 나갔고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방에서 예수님에게 몰려 들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선포하셨습니다. 하나님 이외에는 누구에게도 무릎꿇기를 거부하고 웬만한 사람들에게는 “주님”이란 단어를 잘 사용하지도 않던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향해 “주여!”라고 말했다면 그 의미는 적어도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을 가지고 사람들과 귀신들을 영적으로 다스리는 그런 분이란 의미의 “주님”을 뜻했을 것입니다.
이 때는 예수님의 사역 초기 단계이므로 사람들이 이 “주여!”를 후대의 용어 즉 하나님의 아들이요 죽음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메시야요 온 우주와 세상을 다스리시는 권한을 가진 주님이란 의미로 사용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이런 의미의 칭호는 예수님의 제자들 예를 들어 베드로에게서도 예수님의 사역이 한 참 진행되었을 때 겨우 나타났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사람들의 말을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만 인용하셨다고 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자신의 정체에 대하여 처음부터 알고 계셨습니다. 사역을 시작하시면서부터 예수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 세상의 주님으로 경험하고 믿고 고백하도록 기대하셨습니다. 그런 수준의 신앙에 도달하도록 사람들을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 결과 제자들의 완벽한 신앙고백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 때 즉 사람들이 그런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 사용한 말을 인용하시면서도 자신이 의도하고 기대하는 그런 의미를 예상하시면서 필요한 교훈을 주셨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미래를 예측, 예언하는 능력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런 용법은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요약하면 첫째, “주여”는 이 단어의 긍정적 사용을 뜻합니다. 허위와 형식적 외침은 본문이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둘째, “주여”는 적어도 예수님의 사역 초기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시는 분을 부르는 믿음의 외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셋째, 예수님이 사람들의 말을 인용하셨을 때 사람들이 사용한 실제 의미보다 그 의미를 확대하여 사용하셨을 수 있습니다.
21절부터 수록되어 있는 종말에 있을 일에 대한 비유는 “주여 주여!”의 긍정적 가치를 한층 더 강하게 확인하는 말씀입니다. 그곳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낸 사람들이 등장하는 데 이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 외치며 은혜를 호소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으로 예수님은 자신을 향해 긍정적 의미와 의도로 “주여!”하고 부르는 모든 사람들을 염두에 두셨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진정한 신앙고백적 외침도 포함되어 있다고 해야 합니다.
3.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주여!” 부르는 것을 예수님이 본문에서 거부하셨거나 경고하신 것처럼 판단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오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 자체를 불필요하거나 무가치한 일이라고 배제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외침 그런 신앙고백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이 전제될 때 예수님의 말씀이 의미를 만들어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식하는 것이 불필요했다면 그 불필요한 것을 거론하시지 않고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을 향하여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관심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은 먼저 예수님께 와야 하고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어야 본문의 경고가 비로소 그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을 문법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부정어 “아니(우)”는 “주여 주여 하는 자”에 걸려 있지 않습니다. “아니”가 부정하는 것은 “모두” 혹은 “다”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 “다는 아니다”, “모두는 아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주여”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갑니다. 그런데 “다는 아니다”고 하심으로 “주여 부르는 것”과 “천국에 들어감”의 자동적 연결을 거부하신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서인데 이 점은 잠시 후에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본문도 전제하고 그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더 설명할 필요도 없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 지도부는 이런 믿음에 도달하는데 실패했던 것입니다. 반면에 많은 사람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비록 나중에 밝혀진 완전한 신앙고백적 의미로 “주여!”를 사용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믿고 따르며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가운데 그들이 믿는 예수님이 정말 어떤 분인가를 차곡차곡 배웠습니다. 삼 년이 지났을 때 그들은 예수님께서 만족하실 만한 수준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고백과 경배를 받아들이시고 그런 믿음, 그런 지식을 주신 분은 다름 아닌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고 찬양하셨습니다.
의미에 변화가 있기는 했지만 예수님의 제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주님으로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신앙고백이 아닙니다. 아니 꼭 필요한 신앙이요 꼭 있어야 할 신앙고백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예수님을 세상과 자신의 주님으로 믿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생애를 경험하며 오랜 시간에 걸쳐 배운 것을 우리는 신약성경을 통해 그냥 배웠습니다. 직접 경험함이 없이도 믿게 되었고 그 주님께 우리의 삶을 맡기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것은 누구에게나 필수적 교리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예수님의 사역과 통치 아래 들어왔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세상과 나의 주님으로 믿으십시오. 주님이라고 부르십시오. 여러분의 모든 것을 그 주인님께 맡기십시오. 이것이 믿음이고 이것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부정하신 것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에서 이것을 부인하는 말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을 인용해 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3). 그렇다면 성령님께서 나에게 역사하신 가장 확실한 표식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마음에 생기는 것입니다. 모든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서 그 죄를 대신 짊어지셨음을 믿고 감사하며 예수님께 자신의 인생을 맡기며 “주여!”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러니까 믿는 사람들의 표식이요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특권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는 주님의 말씀은 따라서 예수님을 믿고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한 특수한 문제를 경고하신 것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4. 착각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 시대로 산상설교를 한 번 가지고 와 봅시다. 누가 현대에 예수님을 향하여 “주여 주여” 하고 부르는 사람들입니까? 이천 여년 전에 예수님을 향해 어떤 의미로든 “주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 주변에 모여 있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을 향해 어떤 의미로든 “주여!” 하고 부르는 사람들은 교회 밖에 있지 않고 모두 교회 안에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매 일, 매 시, 매 순간, 어떨 때는 습관적으로 “주여!”를 외칩니다. 다급할 수록 목소리도 커지고 주님을 부르는 회수도 잦아집니다. 믿음이 강할수록 모든 면에 “주여!”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 믿는다고 공언하는 우리 기독교인들이야말로 예수님의 이 말씀이 적용될 수 있는 최적임자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무엇하러 믿지도 않는 주님을 부르겠습니까? 그들은 형식적으로도 장난으로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기는 고사하고 이름도 싫어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라는 이름은 마을 뒷산의 서낭당처럼 소름끼치는 이름일 뿐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교회 안에 있습니다.
회개가 없고 중생이 없으며 믿음에도 이르지 못한 사람들의 입에서 “주님”이라는 용어가 쉽게 터져 나올까요? 교회에서 돈이나 벌고 먹고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겠습니까? 무언가 배우기 위해서 교회에 드문드문 나오는 사람의 입술이 예수님을 향해 주님이라는 소리를 만들어내겠습니까? 설령 그렇게 한들, 예수님께서 그런 허위에 찬 외침을 심각하게 다루고 경고를 심어놓으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이 귀중한 자리에 한 자리를 할애하고 예화까지 드시며 경고하셨다는 것은 교회 안의 신자들이 자신도 잘 모르는 엄청난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에서 여러분 자신은 제외되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회수가 많아질수록 이 경고가 여러분에게 적용될 가능성은 더 많아지고 더 강해집니다. 나는 예수님을 진실히 믿으니까 이 말씀을 내가 읽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옛날 그 산에 모여 있던 사람들처럼 이 말씀은 어쩌면 바로 나에게 주신 가장 필요한 말씀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자들은 모두 자신은 잘 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한국 교회에서 “예수-천당”만을 배우고 신자가 된 사람들은 어떤 다른 문제도 고려하지 않은 채 올 곳까지 다 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말한다면 그 진위를 가릴 방법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의 신앙고백, 믿음, 이 믿음에서 나오는 “주여!” 외침을 판단하려 하면 더 심각하고 복잡한 문제가 파생됩니다. 믿는 사람 자신이 가장 확실한 증인인데 때로는 본인 자신도 그 진위를 가리지 못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이 위험을 경고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종종 본인의 확신에도 불구하고 거부당하는 사람의 얘기가 나옵니다. 당사자들은 잘 가고 있고 틀림없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예수님은 “아니다” 하시며 밖에 쫓아내는 그런 경우입니다. 22절부터 나오는 예화도 바로 이 점을 경고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주여 주여” 부르는 사람들은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치고 예언을 했다는 것을 근거로 강한 확신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을 따르면 착각이었습니다. 떠날 것을 명령하시는 예수님의 선언으로 그 비유는 끝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했다. 병자들을 고쳤다. 귀신도 쫓아냈다. 얼마나 위대한 일입니까? 우리 시대에도 이런 것을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명확한 표로 인정합니다. 그런데 비유는 그것을 진실이라고 말하지 않고 착각이라고 합니다. “(밖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 8:12; 13:42,50; 24:51; 25:30)는 경고문이 부착된 말씀들은 모두 같은 얘기들입니다. 당사자의 확신을 예수님이 착각으로 취급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태가 우리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생각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이 말씀 앞에서는 좀 더 세밀한 분석이 필요합니다. 정확하게 따져보면 우리의 믿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십니다. 우리는 이것을 믿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주여!”라고 외치는데 예수님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우리의 생각을 착각이라고 하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몰랐다” 후회하며 슬피 울고 이를 갈아도 모든 것은 끝난 다음일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사실을 미리 알려 주신 예수님께 감사합시다. 이런 사태를 피해 가도록 예수님은 미리 경고하신 것입니다. “몰랐다”는 말도 하지 못하고, 가슴을 치고 후회해도 그 사람이 모든 책임을 지도록 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이 경고의 범위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라면 정말 다행이고 축복입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이 말씀이 나에게 적용되는 것이라면 이 경고를 듣고 예수님의 지시를 따르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방법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주여!” 외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이 말씀을 주셨습니다. 주님께 오는 사람들 누구도 신앙적 착각과 정신적 안위에 빠지지 않고 끝내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신 때문입니다.
5.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21절을 이제 전체적으로 다루어 봅시다. 그러면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라’가 아니라 ‘나를 주님이라고 부르는 사람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행하라’가 부각됩니다. 즉 예수님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해야 한다. 그래야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예수님은 예수님 없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을 다루시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경우라면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천국에 들어갈 것이다’는 한 문장으로 충분합니다. 이 문장 앞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라고 다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문장을 먼저 말씀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행함’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름’에 첨가되는 결과가 만들어집니다. 앞에서 말씀하신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는 논리를 예수님은 21절에 계속 사용하신 것입니다. 또 24절부터 나오는 “내 말을 듣고 지키는 자가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다”는 논리를 21절에서 준비하신 것입니다.
22절에 수록되어 있는 비유는 이 반대의 경우 즉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경우를 설명하는 예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능력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었지만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않고’ “불법을 행함”으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 당했습니다. 좋은 나무라고 하면서도 좋은 열매를 맺지 못했기 때문에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며 좋은 열매가 없을 때 나무를 잘라버린다는 원칙에 따라 쫓겨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논리가 가능한 것은 예수님이 오셔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일을 하셨으며 동시에 인간의 삶에 필요한 하나님의 뜻을 예수님께서 쉬지 않으시고 선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 주님의 말씀을 거절한다면 그는 예수님을 정말 주님으로 모시는 사람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주님으로 믿고 주여라고 부른다면 그 주인이 선포하신 하늘 아버지의 뜻을 하나라도 무시하거나 외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설령 불가능한 것, 위험한 것, 정말 싫은 것을 명령하셨다 하더라도 종된 우리의 입장에서는 순종하거나 순종하러 최선을 다 할 도리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는 사람에게 주님의 인격, 주님의 말씀, 주님의 이름은 둘로 쪼개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음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름,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을 지킴은 전인격적인 하나의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향해 “주여!” 부르는 사람이 에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뜻을 전심 전력하여 순종하려 한다면 그의 믿음, 그의 부름은 더 이상 착각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행함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외침의 열매, 즉 외부적 흔적으로 제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가 예수님의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기고 믿음과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전인적 삶을 우리 주님께 바칠 수 있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6. 의지력과 실천력
설교를 마치기 전에 한 가지를 더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적 기능에 관한 것입니다. 오래 전부터 육체를 가진 인간의 정신적 기능을 지 정 의 세 가지로 말해 왔습니다. 지식은 외부의 것을 받아들이고 간직하는 능력입니다. 감정은 자신의 상태를 표현하는 능력입니다. 의지는 자신을 나타내는 능력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 세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지만 그 균형은 다르게 작용합니다. 그래서 사람에 따라 우리는 지성적이다 감정적인 사람이다 의지적이다고 분석합니다.
이런 정신적 특징은 한 개인의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나타납니다. 어떤 분은 지성적으로 혹은 이지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러 합니다. 이 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배우고 묵상 연구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을 신앙생활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꼽습니다. 감성적인 사람들은 아름다운 찬양에 감명을 받고 멋있는 예배분위기에 감동되어 하나님께 고개 숙입니다. 의지적인 사람들은 일을 만들고 운동을 일으키고 추진하는 데 신앙생활을 집중합니다.
이런 특징을 한 나라 한 민족에게서도 대충 얘기해 볼 수 있습니다. 외국 기독교인들은 오래 전부터 한국 기독교인들을 감성적 기독교인들로 분류했습니다. 특히 의지적인 면에 약점을 안고 있다고 지적해 왔습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문제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의지력으로 풀어가려 하지 않고 고함지르고 신경질내고 화풀이 분풀이하는 것으로 매사를 해결하려 합니다. 이런 태도는 신앙생활에도 반영되어 그대로 나타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려는 의지력, 실천력을 활용하지 않고 그의 기분을 좌우하는 신앙 환경에 자신을 맡겨 버리는 것이 한국 기독교인인 것 같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배웁니다. 그 거룩하신 뜻을 배우면서 자신의 과거의 허물과, 실수, 죄들을 깨닫고 회개하며 용서를 빕니다. 나아가서 다시는 범죄하지 않겠다고 결심하고 약속합니다. 혹은 거룩하게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수 있게 해달라고, 이제는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살게 해 달라고 성령님의 인도를 호소합니다.
하지만 많은 신자들이 이 단계에서 멈추고 맙니다. 의지력과 실천력을 사용하여 하니님의 말씀대로 자신의 인격과 생각, 행동과 삶을 고쳐가는 차원에서는 별 힘을 쓰지 못하고 실패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본문의 말씀은 이 약점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부르며 따르는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를 따라 자신의 의지를 사용하고 실천력을 동원하여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지키도록, 우리의 인격과 생애에 실현되도록 규범으로 주어졌습니다.
결론
신앙생활은 때로는 지식이나 감정의 요소보다 의지의 요소 그리고 이 의지력의 결정인 실천의 요소에 의해 좌우되거나 결정적인 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 안드레, 요한과 야고보를 부르셨습니다. 그때 그들은 어부로 생업에 종사하고 있었는데 그들을 부르는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나를 따르라는 음성을 들었을 때 그들은 그 부르심에 거역하지 않고 따라 나섰습니다. 지식이나 감정보다 개인적인 결단, 의지와 실천이 앞섰습니다. 그들은 한 참 후에 예수님이 누구신지 무엇을 하러 오셨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신앙심이 전혀 없으면서도 수십 년 교회에 출입하는 교인들을 만납니다. 이와 정반대로 교회에 처음 출입하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보다 강한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고 부끄러움을 느낄 때도 있습니다. 여러분! 이들이 갑자기 신앙의 길에 들어선 그 비결이 어디에 있을까요? 반대로 수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적을 두고 있으면서도 별 유익을 얻지 못하거나 깊은 기독교 신앙을 체험하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 있을까요?
저는 오랫동안 이 문제를 두고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습니다. 신앙의 진수는 인간의 의지와 실천에 혹은 의지력과 실천력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처음 교회에 발을 들여 놓으면서도 남다른 신앙심을 가지는 사람들은 대개 생의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거나 얼마 전에 그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난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들은 금식하며 몸부림치며 알지도 못하는 하나님께 매어 달립니다. 성경지식엔 거의 백지 상태지만 그의 의지와 실천력을 이용하여 식음을 전폐하고 하나님의 대답을 기다립니다.
여러분 이 경우 그 난제가 해결되느냐 해결되지 않느냐 하는 것은 사실은 핵심이 되지 못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의 호소를 들으시고 그의 기도를 들어주시느냐 들어주시지 않느냐도 문제의 핵심이라 부를 수 없습니다. 그같은 고난, 곤경은 인생의 길에 수없이 널려 있고 수시로 경험하기 때문입니다. 핵심은 한 사람이 자신의 노력을 포기하고 하나님께서 개입해 주시기를 그의 삶 전체를 걸고 요청한다는데 있습니다. 그의 의지, 의지를 사용하는 실천력이 하나님을 찾는데 동원된 것입니다. 수십 년 교회에 출입하며 설교를 듣고 성경을 배웠어도 하나님의 뜻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자신의 인격과 생활을 고쳐보려고 해 본적이 없는 사람과는 너무나 판이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의지와 실천력을 주님의 말씀을 준수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이야말로 신앙생활의 지름길입니다. 여러분의 전인격을 다해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시며, 주님이 가르쳐주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고 실천해 가실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렇게 할 때 이 말씀은 더 이상 우리에게 주는 경고가 되지 않고 천국을 약속하는 축복의 기능을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