윗글에 대한 반론
《「천국 상급론」에 관한 再논의에 들어서며...》
일단락 난 줄 알았던 논의에 새로운 점화를 시도하신 것은 그만큼 이 사안 자체가 진리의 옳고 그름을 나타내는 중대한 표지로 여기신 까닭이라 생각됩니다. 제 판단이 그르지 않다면, 저또한 이화영 목사님과 변이주 목사님의 심정에 전적인 동의를 표합니다. 합신에 재학중일때의 기억입니다. 어느 교수님으로부터 ‘모름지기 목사란 자신의 배움에 책임을 질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목사의 정직성이다’라는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두 목사님의 진지한 토론 자세에 진심어린 경의를 보냅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두 분께서 제기하신 이 논의의 의도와 목적에는 (어느 정도) 공감을 하지만 진술하신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토론의 깊이와 내용을 더하고자 하는 마음과 나아가 성경에 대한 좀더 바른 이해가 무엇인지를 구도하는 마음으로 이화영 목사님께서 제기하신 진술에 따라 반론을 제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상급 차등론 & 상급 균등론?》
목사님은 이 논의에서 다른 주장을 〈상급 차등론〉과 〈상급 균등론〉으로 구분하시면서 자신은 〈상급 차등론〉을 지지한다고 하시면서 〈상급 균등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성경 구절의 모호함을 핑계로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진배없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밝히는 것은 만약 ‘지옥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라면 이 논의의 장에 들어올 자격도 없거니와 들어와서도 안됩니다. 하지만 목사님이 제기하신 〈천국 상급론〉의 두 가지 입장은 ‘천국이 있다 또는 없다’는 논의와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논의임을 아셔야 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소위 개혁주의의 밥물을 먹고 자란 사람이 ‘지옥이 없다’고 한다면 완전한(?) 자유주의자로 전향을 한 명목뿐인 개혁주의자든지 양의 탈을 쓴 늑대와 같은 이단임에 틀림 없습니다. 사소한 것을 가지고 딴지를 건다고 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목사님의 대체적인 진술의 방식이 자기 주장의 열심에 도취된 나머지 다소 현실성이 결여된 극단적인 예를 들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서 논의되고 있는 상급 차등과 균등에 관한 논의는 오랜 시간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고 지금도 되어지고 있는 주제들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의 주장과 다르다고 해서 ‘천국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과 같은 수준으로 여기신다면 더 이상 발전적인 논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또한 저는 개인적으로 이 이슈를 꼭 〈상급 차등론〉과 그에 반하는 〈상급 균등론〉이라는 대립적인 구도로 설정해서 보아야 하겠는가 하는데 의문이 있습니다. -앞으로 자세하게 언급하겠습니다만- 왜냐하면 성경을 보면, 두 주장이 전적으로 배치되기만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상급’이라는 낱말을 어떤 각도에서,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상급이 다를수도 상급이 같을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 칼빈 선생의 지적과 같이 ‘상급’을 포도원 품꾼에게 나누어준 달란트의 차이의 관점에서 본다면, 상급은 각자에서 주시는 ‘은사’처럼 다양성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상급’을 완전히 성취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누리는 ‘구원’으로 본다면, 여기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물론 목사님은 후자의 입장을 반박하시는 입장이신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앞으로 칼빈의 진술 방식-칼빈의 주석과 기독교 강요를 중심으로-에 따라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제 상황이 칼빈 주석이외에는 다른 것을 참고 하기 어려운 입장이므로 양해 바랍니다)
《"하나님 만이 상급이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목사님의 견해에 대한 일반적인 반론》
제가 보기에 그동안 목사님 줄곧 제기하신 내용중에서도 이 부분이 목사님을 가장 분통스럽게 하는 대목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도 목사님의 격앙된 어조만큼이나 다소 객관성을 잃은듯한 예가 언급되고 있습니다. 먼저 생각해 보셔야 할 것은 ‘하나님만이 상급이다’고 주장하시는 분들 대부분이 목사님의 주장처럼 ‘구원으로 상급을 다 받았으니 다른 상급을 받을 생각은 말고, 충성할 필요도 없다’(의역)고 말씀하시냐 하는 것입니다. 목사님은 그 대표적인 인물로 김영규 목사님과 소위 개성연 인사들을 지적하셨는데, 그 분들이 정말 그런 주장을 하셨냐 하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왜 중요한가 하면, 지난번에 말씀드린것같이 논쟁은 사실을 바탕으로 진행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난번 총회 교직자 세미나에 참석하신 지인 목사님을 통해 김영규 목사님의 강의를 송부받아서 어제, 오늘 자세하게 살펴보았습니다. 이 논의와 관련된 김목사님의 언급이 네 부분중 마지막 대지에 있더군요.
그 부분에 관한 김목사의 언급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은 모든 신자들에게 지극히 높고 유일한 마지막 상급으로서 은혜언약을 통해 신자의 구체적인 삶의 원리로서 나타나는 ‘최고선’이심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은 어쩌면 개혁주의 역사에 있어서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주장입니다. 이미 칼빈과 츠빙글리가 말하였고 헤르만 바빙크가 말하고 박윤선 목사님도 말씀하셨던 내용입니다. 그리고 김영규 목사님도 그 선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높고 마지막 상급으로 알고 신앙하는 성도‘라면 오히려 주신 모든 상황에서 그 분의 섭리와 주권안에 내재된 은혜언약의 약속을 믿고 의지하며 삶의 조건과 환경이 어떠하더라도 그 분만을 섬기며, 신앙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최고의 선이요, 마지막 상급으로 여긴다는 사람이 어떻게 다른 선에 안주할수 있으며, 또 하나님 아닌 다른 상급에 목숨을 걸겠습니까? 하나님을 최고의 상급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찌 은혜안에 열심을 내지 않을 것이며, 주신 사역에 충성을 다하지 않겠습니까? 고로, 목사님의 제기는 말만 있고 삶이 없는 어떤 목회자들에 대한 일종의 경고요, 염려일 수는 있어도 ’하나님만이 상급이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목사님의 염려의 대상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드립니다.
《〈상급 균등론〉근거 구절에 대한 재반론》
이제, 목사님이 제기하신 문제에 대해 구체적인 논의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먼저 목사님은 소위〈상급 균등론〉을 옹호하는 이들이 근거로 삼고 있는 몇 성경구절을 소개하시면서 그 해석의 부당성을 설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1이하의 포도원 품군 비유와 22:1이하의 천국비유(혼인잔치비유)가 그것인데요, 목사님의 진술을 굳이 재술하면, 두 성경이 구원의 균등성을 말하기는 하나, 상급의 균등성은 아니다고 하셨습니다. 여전히 구원과 상급은 별개의 것임을 강조하려는 입장이신데요. 그렇다면 칼빈의 해석을 보겠습니다. 칼빈의 두 비유에 대한 강조점은 조금 다릅니다. 전자의 내용을 한문장으로 요약한다면,‘하늘의 유업은 행위에 의한 공적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시는 것이므로 모든 사람의 영광은 균등하다(칼빈 주석, 공관 복음Ⅱ, p.200)’는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각기 다른 시간에 온 품꾼들에게 한 데나리온을 준 것또한 주님의 자유로우시면서도 공평한 구원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반면, 두 번째 비유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선택과 관련된 말씀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칼빈 주석, 공관 복음 Ⅰ, p.564). 이 비유의 결론이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마22:14)로 끝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논리입니다.
이 두 비유를 굳이 종합해 본다며,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의지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주권과 의지가 그 어떤 것으로도 방해받지 않을뿐더러 그 누구에 의해서도 간섭될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본문을 가지고 굳이 구원과 상급이라는 대립각을 세워 ‘구원을 의미하기는 하는데, 상급에 관해서는 아니다’는 분석이 필요하겠느냐는 물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유란 여러 가지 해석의 개연성이 늘 존재합니다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하시고자 하는 이의 본의(本意)입니다. 칼빈은 이러한 성경 해석 태도를 가리켜 그의 책 「기독교 강요」에서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외에는 어떠한 곳에서도 하나님을 찾지 안하을 것,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것 이외에는 하나님에 대해서 어떠한 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 혹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것은 어떠한 것도 말하지 않도록 할 것”(기독교 강요Ⅰ.13.22)
이러한 성경 해석 입장에서 본다면, 목사님께서 〈성경균등론〉자들의 근거 구절로 드는 마태복음 25장에 있는 달란트 비유는 목사님 개인의 추측과 그로인한 억측이 드러난 예입니다. 상급 차등의 정당성을 주장할 근거로 일꾼들이 받은 달란트의 차이와 그들의 능력을 강조하셨는데, 그것은 마치 종들에게 있는 개인적인 관리 능력의 차이에 따라 주어진 것이므로 그 능력을 발휘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정당하다는 주장으로 연결될 듯 싶으나 칼빈은 전혀 다른 해석을 내놓습니다. 달란트를 다르게 맡긴 것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은사를 배분하시는 성격과 관련된 것으로, 그 사람에게 있는 재능과 성품은 하나님의 자기 의향에 따른 것이기에 자기에게서 난 듯 자랑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칼빈 주석, 공관 복음Ⅱ, p.229). 또한 주인께 받은 달란트를 잘 활용하여 이윤을 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이익(benefits)으로서 우리의 노력에 의하여 부하게 되거나 증진되지는 않지만 형제에게 유익이 될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인 구원을 가장 잘 활용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같은 장). 그런데도 목사님은 종의 개인 능력과 달란트의 차이에만 관심을 가짐으로써 개인 능력여하에 따라 보상이 다를수 있다는 주장을 하시는 것은 이 본문을 (칼빈이 지적하는바와 같이) 너무 경제적인 산술적 잣대로서 이 비유를 대하고 계신 것은 아닌지요?
또한 목사님은 달란트를 배로 남겨야 하는 것을 100%의 헌신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진정 우리에게 100%의 효과를 낼만한 100% 헌신이란 있을까요? 주인의 관심은 자기 종들이 얼마만큼의 이윤을 남겼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만약 주인이 배로 남긴 종들에게만 칭찬해 줄것이라면 과연 그 주인을 선하다 할수 있겠습니까? 이 비유에서 종들이 달란트를 땅에 묻지 않고 잘 활용한 것은 구원받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남겨야 할 구원의 열매인 것입니다. 포도나무에 포도가 열리고 무화과 나무에 무화과가 열리듯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 구원 받은 그 열매가 나타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열매가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만 열매가 맺어졌다해서 마치 자신이 스스로 그런 일을 한것마냥 자랑을 일삼거나 댓가를 요구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넌센스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다섯 달란트나 두달란트를 남긴 종이 스스로 뿌듯해 할 일이 아님에도 주인은 이들에게 자비롭고도 공평한 댓가를 치러줍니다. 바로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하라”는 명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가지고도 달란트를 남긴것에 따라 다르게 대우하는 것이라면... 글쎄요. 다섯 달란트 남긴 사람은 아주 아주 큰 즐거움에 참예하게 하고,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은 조금 부족한 즐거움에 참예하라고 하는 것이 될까요? 억지입니다. 이것은 비유의 본의를 벗어난 해석입니다.
《〈상급 차등론〉 근거 구절에 대한 성경적 반론》
계속 이어서, 목사님께서는 〈상급 균등론〉에 대한 논박이후, 주장하시려는 〈상급 차등론〉에 대한 근거로서 세가지 성경 본문을 제시하였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목사님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재발론을 기회를 갖도록 하겠습니다.
1. 누가복음19:11이하에 나오는 「므나비유」
이 본문은 목사님께서 바로 앞서 〈상급 균등론〉 주장의 근거로 제기하신 마태복음 25:11-30의 달란트 비유와 매우 유사한 내용과 구조를 가지고 있는 비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제게 있어서, 이 두가지 비유를 한쪽에서는 〈상급 균등론〉 근거로 또 다른 한쪽에서는 〈상급 차등론〉을 옹호하는 근거로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 아이러니 할뿐입니다. 이런 저의 갸우뚱거림을 이해하듯 칼빈은 그의 주석에서 두 본문을 구분짓지 않고 병행적으로 놓고 설명을 시도하고 있습니다(칼빈 주석, 공관 복음Ⅱ, pp.225-231). 그럼에도 두 본문은 마태와 누가의 기술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차이가 이 두 본문이 설정하고 있는 동일한 의도와 목적을 방해하지는 못합니다. 목사님은 이번에도 므나를 남긴 사람에게 주는 고을 통치권을 사후에 있을 상급의 차이로 이해하려 하십니다. 그리고 칼빈과 헨드릭슨 그리고 박윤선 목사님도 같은 견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드린대로 제 사정상 헨드릭슨과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을 볼 수 없는 상황에서 그 분들의 입장에 관해서는 말씀드리기 어려우나, 칼빈을 예로 드신 것에는 전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칼빈은 누가복음 19:13 본문을 해석하는 첫 머리에 이 비유에서 ‘돈의 금액이나 종들의 숫자는 의미가 없다’고 밝힌 후, 종들이 각기 다른 므나를 소지하게 된 것을 다양한 은사의 차원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친히 에베소서 4:7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또한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를 가진 자에게 주라고 하는 말씀을 해석할때도, 우리의 경제적 관념에 부합되지 않은 일로서 이 부분을 확대 혹은 가정 해석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칼빈 주석, 공관 복음Ⅱ, p.230). 오히려 이 비유의 관심사는 주인의 요구와 기대가 깃든 므나를 땅속에 묻어두었던 사람들의 태만과 불성실함에 경종을 울림으로써 이것이 그들에게는 두려움이 되겠으나, 착한 종에게는 자신을 살피며, 돌아보는 기회가 되어지는 또 다른 은혜의 계기인 것입니다. 이 은혜는 달란트와 므나의 양과 상관없이 주인의 관심에 집중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끼게 되고 알게 되는 진실입니다. 그런데도 이 비유에서 남겨진 므나의 차이를 개인의 역량의 관점에서 보고, 불성실한 종의 한 므나를 첫 번째 종이게 준 것을 내세에 있을 상급의 차이로 본다면 D.A.Carson의 말대로 풍유적 해석인 것입니다(D.A.Carson, Mattew. p.517).
그럼에도 존경하는 박윤선 목사님께서 이 본문을 ‘내세의 상급에 층계가 있다’고 하신 것이 분명하다면, 이 해석은 적어도 칼빈의 관점에서는 전혀 다른 해석이다고 할수 있습니다.
2.고린도전서 3:11-15
이 구절은 전통적으로 상급 차등을 주장하시는 분들이 가장 많이 언급하는 본문중의 하나입니다. 하지만 칼빈은 이 곳에서도 이러한 주장을 하시는 분들과 달리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칼빈의 해석을 따라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11절의 ‘다른 터’와 ‘이 터’는 대조 어법입니다. 후자가 그리스도라면, 전자는 그리스도께 반하는 교훈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건축 구조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즉 교회가 세워질때, 가장 중요한 터(기초)가 무엇이어야 하겠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변입니다. 12절의 표현은 대조적 은유법으로서 그리스도의 기초위에 세워진 건물이라면 상부 구조또한 가치있는 것들(금,은,보석)로 장식해야 하는데, 어떤 이는 값싸고 보잘 것 없는 것(나무,풀,짚)으로 세운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후자의 재료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 가치있는 기초에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터위에 세워지는 것이라면 그에 합당한 내용물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라는 기초위에서 자신의 욕망과 허영으로 가득찬 거짓된 가르침과 비진리의 도구들로 구조물을 세워나갑니다. 여기에는 악한 사역자들의 속임의 역사가 있습니다. 이러한 어두움의 역사가 현저한 형태로 침노할때, 믿는 자들에게 위협이 되어집니다. 그러나 그 어둠의 역사는 잠깐입니다. 빛이 비췰때, 그 어둠속에 묻혀진 모든 진실이 드러나게 되어있습니다. 13절의 그 날(the day of the Lord)이 바로 이때인 것입니다. 그 날은 역사 속에 감추어진 모든 공력들이 불(하나님의 성령)의 판단(시험)을 통해 백일하게 드러나게 될것입니다. 그 날은 그리스도의 터위에 세워진 모든 진실이 평가를 받는 날입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의 진리(가르침)와 같은 재료로서 세워진 공력이라면 상을 얻을 것이나, 나무,풀,짚같이 가치없는 재료들로 구성된 것이라면 해(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은 내세후의 있을 성도간의 상급의 차이를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방식과 전혀 다른 차워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기대하며, 어떠한 역경과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그 날에 이루어질 주의 약속과 평가를 기대하며 교회와 성도를 진리위에 세워나갈 것을 권면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18절 참조)
이러한 해석의 흐름에서 본다면, 목사님께서 상급 차등의 직접적 근거로 제시하신 15절 하반절의 말씀, 이를테면 "불가운데서 얻는 구원" 혹은 "부끄러운 구원"(의역)도 과도한 비약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자세히 보시면 이 본문에서 말하는 "공력에 따른 상"이란 내가 얼마만큼의 공력을 세우냐에 따라 지급되는 차별적 상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최후에 날에 남겨질 그 내용물을 말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의 터위에 그리스도의 것으로 세운 사람이 받게 될 상이요, 구원인 것입니다. 물론 칼빈은 15절 ‘자기는 구원을 받되’라는 구절에서 그리스도라는 기초위에 서 있으나 불순물이 섞여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기초삼아 세워지기는 했지만 육신의 연약과 무지로 인해 완전한 말씀의 순수성으로부터 약간 벗어난 사람들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지금 바울이 바라보는 고린도 교회의 형편이 그러하며, 오늘날 우리의 형편이 그러합니다. 칼빈의 이 본문에서 이러한 사람의 예를 들고 있는 것은 이 사람들로 하여금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될수 있다는 두려움을 주려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지금은 흐트러짐이 있을지라도 그 날에 성취될 주의 약속을 신뢰하며 나아갈때, 불가운데서 구원을 얻을 성도에 대한 구체적인 격려이며, 안전한 확신을 주고자 하는 표현입니다(칼빈 주석, 고린도전서 pp.116-122). 그러므로 이 본문은 영원한 세계에 있을 구원의 차이나 상급의 차별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3. 요한계시록 3:11-12
아시다시피, 애석하게도 칼빈의 주석에 요한계시록이 빠져있습니다. 고로 저의 설명을 장황하게 덧붙이느니 차라리 이 주제에 관한 좋은 글 한편을 소개해 올리는 것으로 제 생각을 대신코저 합니다. 제가 합신에 재학할 때, 신약학을 가르치시기고 하셨는데요, 홍창표 교수님의 「산상보훈 해설」중 〈하나님 나라의 상급 계념〉이라는 소논문에 요한계시록의 상급 개념에 대해 자세하게 언급이 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에 관한한 홍교수님의 입장을 따르기에 읽어보시기를 권합니다. 아울러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정독하시기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특히, 「기독교 강요」Ⅲ.15-19)
《글을 마치며...》
오해없으시기를 바라는 것은 지금까지 말씀드린 내용이 이목사님의 〈상급 차등론〉에 대한 〈상급 균등론〉의 입장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굳이 이 두가지 논제를 구별하여 본다면, 저는 두가지 모두를 받습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상급을 어떠한 관점에서 보느냐에 따라 상급 차등도 상급 균등도 다 진리일 수 있고, 또한 진리가 아닐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상급 차등론이든 상급 균등론이든 하나님께서 구원을 베푸시는 방식과 그 구원을 이루어가시는 능력에 걸림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상급 차등을 반대하는 사람들로 인해 위축될지 모를 인간의 의지적 측면에 대한 이 목사님의 배려와 관심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자칫 잘못하면〈상급 차등〉과 〈상급 균등〉이라는 언어적 뉘앙스에 매여서 더욱 중요한 것들을 간과하고 잃을수 있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한 예로, 이목사님께서는 구원의 은혜가 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상급을 제시하시는 이유를 가리켜 인간의 심리가 대가없는 일에 충성하는데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대가없는 일은 안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대가를 요구하지도 바랄수도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입니다. 대가를 바란다는 것은 자신의 수고와 노력과 행함이 가져온 결과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에는 적용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설사 우리의 행위에서 나는 그 어떠한 선한 것도 그 자체로 주의 은혜를 충족할 수 없으며, 구원받을 만한 정당한 요구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 전체를 통해 모든 역사 속에 끊임없이 그리고 주저함없이 설득하고 깨우치시며 고백케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의 내용이요, 그리스도의 공로로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이 고백해야 할 내용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행여나 인간의 공로나 노력이나 행위가 하나님의 구원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하는 생각과 의도는 진리의 저편에서 호시탐탐 회유와 속임을 거듭하는 우리안에 남겨져 있는 펠라기안이요, 알미니안이요, 카톨릭주의입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성경의 목적은 오직 우리의 자랑을 억제하며, 우리를 낮추어 거꾸러뜨리며 완전히 부스는 것이다”(기독교 강요 Ⅲ18.4) 또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선한 것을 자신 안에 보유하시며 다함이 없는 샘과 같으시다면, 최고선과 행복의 모든 요소를 구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이외에 다른 것을 구해서는 안된다”(기독교 강요 Ⅲ.25.10). 그렇습니다. 성도는 현세와 내세의 상급 때문에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가장 지극히 크신 상급이신 하나님 때문에 그 상급의 가치를 알고 누리며 사는 자입니다.
김병혁 목사(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