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남선 소사 - 조헌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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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남선 소사 - 조헌국


거창이 낳은 위대한 신앙인 주남선 목사


조헌국(진주교회 장로, 거창교육청 학무과장)


우리나라 기독교 역사에 길이 빛날 훌륭한 목회자 주남선 목사는 거창에서 태어나서 1909년에 설립된 거창교회 초기 신자가 되어 한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로, 집사로, 장로로, 전도사로, 또 두 번에 걸친 담임목사로 시무하신 한국 기독교계 거목이시다. 나라잃은 시절 형제가 독립운동에 앞장서고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할 때 끝까지 굴복하지 않고 감옥에 갇혀 있다가 광복을 맞이하였다. 나라를 사랑하고 신앙 지조를 지켜온 애국자이며 신앙인인 주 목사는 거창이 낳은 위대한 인물이다.

주남선 목사 전기는 1976년에 심군식 목사에 의해 ‘해와 같이 빛나리’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으나 절판이 되어 거창에 기독교가 들어와 교회가 설립된 지 백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인 이번에 그 일대기를 요약 정리하여 귀감을 삼고자 한다.

주남선 목사는 1888년 9월 14일에 거창군 읍내면 동동 28번지에서 한학자이신 주희현(朱喜賢)과 최두경(崔斗卿)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처음 이름은 주남고(朱南皐)이었는데 1945년경 옥중에서 이름을 주남선으로 개명하였다. 그러나 경찰자료에는 본적 및 주소는 거창군 거창읍 하동 387번지이고 이름은 창씨개명한 신무남고(新武南皐)로 나온다.

형 주남재(朱南宰)는 백부댁에 양자로 입양되었는데 1927년 10월22일 창립된 신간회 거창지회 부회장으로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해방일보(1946.4.23) 보도에 의하면 광복후에는 거창인민위원회에서 군수로 선출되었으나 미 군정청 도 당국은 1946년 4월 14일 정순종을 임명하였다고 한다.

동생 주남수(朱南守)는 1919년 기미 독립만세 후에 군자금과 의용병 모집을 하고 동지를 규합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출감후 만주로 가서 독립군에 가담하여 순국하고 1982년 독립 유공 대통령 표창을 받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주남고는 9세(1897)때부터 서당에 다녔고 15세(1903)때 부친이 돌아가실 때 자신의 손가락의 피를 내어 드렸던 일로 군수로부터 효자상을 받기도 했다. 19세(1907)때는 군수를 안내하는 소임을 맡았고 23살(1911) 9월에 진주잠업실습소를 수료하였다.

한편 1908년에 거창읍에 기독교 복음이 전래되어 황해도 출신 오형선이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에 금광업을 위해 내려와서 웅양교회 안덕보 집사의 전도로 금광사무원 박창호와 금광사무실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 이미 2년전 안의교회 조정섭의 전도를 받았던 조재룡과 김극서가 이를 알고 함께 예배를 드리다가 1909년 10월 10일에 예배당을 마련하고 거창읍교회가 창립되었다.

이 때(21세) 주남고도 예수를 믿고 1912년(24세) 6월 호주 선교사 맥레(Macrae:맹호은:孟晧恩)에게서 세례를 받고 1914년(26세) 맹호은, 길아각(吉雅各:켈리: Kelly) 선교사와 황보기 조사(전도사)와 집사로 임명받은 최봉성, 이형근, 오형선, 주남수, 이평군과 함께 제직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1914년 5월 10일에는 합천군 가야면 남병현의 둘째 딸 남술남(南述藍)(1898년생, 열 살 차이)과 결혼하여 1917년(29세) 장남 주경중을 낳았다. 그 외 슬하에 차남 주경도(1920), 장녀 주경순(1924), 3남 주경효(1930), 4남 주경세(1933), 차녀 주경은(1938) 등 4남 2녀의 자녀를 두었다.


27세(1915)에 권서(문서전도인)가 되었는데 함양읍교회 기록에는 1916년부터 1917년까지 함양읍교회 전도사로 있었다고 되어 있다. 29세(1917) 3월 진주에 있는 경남성경학교에 입학하여 2년 후 1919년(31세) 2월에 졸업을 하고 같은 달 2월 28일에 31살로 장로 장립을 하였다. 그 해 기미년 독립만세운동이 거창에서는 3월 20일에 있었다.

1920년(32세) 3월 마산 문창교회에서 열린 경남노회에서 24세의 주기철 등과 7명이 전도사로 시취를 받아 허락되었다. 그 해에 평양에 있는 조선신학교에 입학을 하고 거창교회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경상북도 고등경찰 자료에 의하면 1919년(31세) 8월 주남고는 오형선장로 집에서 이덕생, 김태연, 고운서와 함께 국권회복운동의 군자금 및 의용병을 모집하여 만주군정서에 파견할 것을 모의하고 신도출로부터 군자금 813원을 받아 동생 주남수와 이사술, 이성년, 백기주 등 4명을 의용병으로 김태연이 인솔하여 파견하였다.

이듬해 1920년 3월 주남수가 돌아와 오형선 집에서 송명옥과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동지를 규합하는 ‘신한별보’를 등사하여 정장현, 이갑수, 안덕보, 유진성 등 4명을 통해 배포하다가 출판법 위반으로 군자금 및 의용병 모집 관련자들과 함께 거창경찰서에 체포되어 의성경찰서로 넘겨져 대구형무소에서 구금되었다. 이들은 1921년 1월 8일 사건이 송치되어 3월 4일에 부산지방법원에서 주남고는 1년 선고를 받고 진주형무소로 이감되어 지내다가 그 해 1921년(33세)말 12월 28일 가출옥되었고 다른 사람의 기록은 찾을 수가 없다.

1930년(42세) 3월 20일 평양 조선신학교 25회로 23명이 함께 졸업을 하였다. 그 해 9월에 목사 고시를 치르고 1931년(43세) 2월 22일에 거창교회 제 5대 목사로 취임하였다.

1935년 9월부터 일제는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1938년 해운대교회에서 열린 경남노회 봄노회에서 김만일, 김길창, 김석진 목사와 주남선, 한상동, 이약신 목사와는 의견이 달랐다. 1938년 평양에서 열린 제27회 조선 예수교 장로회 총회에서 치욕적인 신사참배 결의가 이루어지고 지도자들의 합동 신사참배가 실시되었다.

주 목사는 신사참배 결정에 반대하여 50살이 되는 해(1938) 12월에 거창교회 목사직을 사임하고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1939년 12월 6일 거창경찰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8일만에 석방되었는데 이듬해 1940년(52세) 7월 16일 다시 구금되어 이튿날 진주로 압송되고 진주경찰서에서 김을도에게 문초를 당하는 등 고생을 하였다.

1941년(53세) 3월 13일 부산으로 이송되었다가 그 해 7월 11일 평양형무소로 이송하려고 부산경찰서 유치장에 있던 한상동, 최상림, 주남고 목사와 이현속 장로, 조수옥 전도사 다섯명을 한 조로 하여 서울 종로경찰서에 수감하였다가 같은 해 8월 25일 평양형무소로 압송하었다.

1945년(57세) 5월 18일에 신사참배 반대자 21명에 대해 평양지방법원에서 예심종결을 결정하였다가 다시 번복하고 공판에 회부하였다. 다음은 평양지방법원 예심종결서에 나타난 주 목사의 활동사항이다. 1940년(52세) 당시 무임목사로서 한상동 목사 등과 함께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주도한 내용이다.

1940년 1월 3일 거창읍 하동 15번지 당시 주소에서 한상동, 이주원의 방문을 받고 그들과 그들이 벌일 운동의 목적과 방법을 설명했다. ‘우리들이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통해 가까운 장래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건설에 협력해야 한다.’는 점에 동지로서 협력을 권유하여 즉시 그것에 승낙을 얻고 계속 운동 방법을 논의하고 앞에 기술한 이념 목적으로 운동자금으로 주는 200원을 받았다.

1940년 1월 중순경 함양읍 소재 함양교회를 방문하여 장로 황보기에 대해 신사참배는 다른
신에 대한 예배로서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며 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므로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1940년 3월 27일 진주 봉래동 황성호(황원택의 아우) 집에서 한상동, 이주원, 이현속과 모여 기도회를 가져 격려기도를 하며 서로 신사참배 반대를 표방하는 본 운동에 어떠한 탄압을 받더라도 무릅쓰고 싸워 지상에 하나님 나라 건설에 협력하기로 뜻을 모았다.

같은 날 앞에 적힌 자들이 같은 곳의 호주선교사 스터키(J.M.Stuckey:서덕기:徐德基)를 방문하고 선교사에게 그들의 그 후의 운동 상황을 보고하고 그로부터 금후 활동 방법에 대해 지도를 받았다.
1940년 3월 28일 황성호 집에서 한상동, 이주원에게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자금으로 40원을 제공받았다.

같은 해 3월 하순경 산청군 단계면 단계교회 영수 박명준, 합천군 가회면 장대교회 영수 김영숙, 삼가면 삼가교회 강 장로(강촌석횡)을 개별 방문하여 신사참배는 계명위반이므로 그것을 행하면 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니 절대 거부할 것을 말해 주었다.
같은 해 5월 초순 자택에서 한상동의 방문을 받고 둘이서 기도회를 하고 그 자리에서 평양에서의 회합상황을 상세히 알게 되어 이후의 운동 방법을 협의했다.
5월 23일 진주 봉래동 황원택 방에서 한상동과 만나 비밀기도를 하고 그에게서 평양을 중심으로 한 북조선 지방의 본 운동상황과 남북 동지들의 회합 연락상황을 상세히 들어 알고 서로 격려하였다.
그 날 밤에 한상동, 이현속과 같이 진주 봉래동 41번지 하은혜 방에서 전도부인 문창경업의 초대를 받고 그 집에 가서 황원택, 대산원석과 회합하여 한상동이 모인 사람들에게 본 운동을 전국적으로 할 필요가 있어 이를 실행하고자 한다고 말하여 같이 찬동하고 실행방법에 관해 상의하다.

5월 하순 김해군 대저면에 거주하는 신자 심문태를 방문하여 그에게도 신사참배는 계명위반이므로 그것을 행하면 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니 절대 거부할 것을 말해 주었다.
그 다음날에는 대저면 소재 대저교회에 모인 신도 다수에게 ‘신은 사랑이다"라는 제목아래 ‘신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어 이를 믿도록 하시었다. 세상은 이미 말세로 그리스도의 지상 재림과 천년왕국 건설이 가까와졌다. 그 때 반드시 우리들은 심판대 앞에 설 터인데 우리가 교리와 계명을 절대로 지켜야 한다’ 라고 설교했다.
그 다음날 부산 동래 해운대교회의 전도사 구재화를 방문하고 거기서 한상동을 만나 그 후 활동을 연락하기로 하고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로서 신에 대한 죄악이므로 즉시 회개하라는 뜻을 강조하였다

그 무렵 함양군 지곡면 시목교회 영수 김종대, 지곡면 개평교회 장로 정팔현 안의읍교회 전도사 장봉상을 개별적으로 방문하여 그들에게 ‘신사참배와 같은 반계명적인 행위를 하지 말고 교리를 신봉하여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어라’ 하고 말했다.
그 무렵 지곡면 시목리 김종대 방에서 피고인을 방문하러온 시목교회 전도사 윤봉기와 안의교회 장로 정은혁에게도 앞과 같은 내용을 말했다.

같은 해 6월 10일경 자택에서 한상동의 방문을 받고 본 운동의 내용을 관청에서 알아채고 내사할 염려가 있으므로 금후 신변을 충분히 경계할 것과 두 사람이 금후 어떠한 곤란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절개를 굽히지 말고 활동하도록 말하고 그 때 운동자금으로 40원을 주는 것을 받았다.

1940년 1월 초순경부터 6월경까지 함양군 봉평, 시목, 개평, 안의, 거창군 가천, 무릉, 위천, 산청군 단계, 합천군 삼가, 장대 등 각 교회에서 10명 내지 80명의 신도들에게 1회 내지 5회 ‘하나님은 사랑이다’ ‘우리들은 어떠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겠느냐?’ 등의 제목으로 ‘현재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세로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지상 천국을 건설할 때가 임박했다. 따라서 우리들은 주님을 맞을 준비가 필요하다. 현재 우리들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느냐? 우리들은 회개해야 할 것이다.’라고 설교하고 계명을 지킬 것을 강조하여 암암리에 신사참배 반대사상을 고취했다.
이 같이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하여 그 목적 실행에 관하여 협의하고 위 사항을 실행을 위해 선동하고 또 그 정황을 알고 돈을 제공받았다.

이상을 통해 볼 때 주 목사는 1921년 군정서 의용병 및 군자금 모집사건으로 1년간 수감되었다가 가출옥하여 신학교를 졸업하고 거창읍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다가 1938년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시무 사면을 강요받고 무임목사로 1940년 경남 각지를 다니며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하다가 다시 수감되어 옥중에서 광복을 맞이하고 1945년 8월 17일 출옥하였다.
신사참배 반대로 입건 된 신자는 51명이었는데 1941년 8월 25일 평양형무소에 갇혀 있던 사람은 37명이었고 법원 예심 종결서에는 21명의 기록만 보이고 1945년(57세) 을유 광복으로 출옥한 성도는 17명이다. 이것은 옥중에서 다수가 순교하였고 더러는 병 보석 등으로 중간에 나왔다고 본다.
주 목사는 평양 옥중에서 주남선(朱南善)으로 개명을 하였고 광복후 출옥하여 1945년(57세) 12월에 거창읍교회 제 7대 목사로 다시 목회를 하였다. 1945년 9월 18일 부산진교회당에서 경남노회 재건을 위해 모여 신사참배한 목사의 충분한 자기반성과 회개를 촉구했지만 거부당하여 12월 3일 마산 문창교회에서 제47회 경남노회가 정식으로 회집되어 노회장으로 피선되었다.

1946년 6월 13일 진해에서 박윤선 목사를 강사로 제 1회 신학강좌를 3개월간 가져 63명이 수강하였다. 이것이 효시가 되어 그 해 9월 20일 부산진 일신여학교 (현 금성중학교) 교사에서 고려신학교(현 고신대학, 고려신학대학원의 전신)가 개교함에 모두 입학하여 후에 목사가 되었다. 출옥성도 황철도, 이인재와 조수완 등은 3학년에 편입하여 1947년 6월 7일 제 1회 졸업생이 되었다. 주목사는 고려신학교 창설 공로로 초대 이사장을 맡게 되었다. 그후 같은 출옥성도인 한상동 목사와 함께 박윤선, 박형룡 박사 등을 모셔 학교를 육성시켰다.
1946년(58세) 3월 1일 삼일절 기념식에서 독립유공자 표창 수여하려고 했으나 사양했다. 정부 수립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출마를 권유하여도 정치에는 뜻이 없다고 하고 1948년(60세)에 고려고등성경학교 설립하고 1950년(62세) 4월 20일 거창성경학원을 설립하였다.
한편 광복후 1945년 대한 예수교 장로교 경남노회가 재건되고 장로교단 남부총회가 소집되었으나 1949년 경남노회가 신사참배 자숙과 신학교 문제로 총회파와 법통파로 분열되어 나중 거창교회가 소속한 법통파 경남노회가 1952년 9월 11일 진주성남교회에서 이약신 목사와 주남선 목사 등 출옥성도들이 중심이 되어 대한예수교장로회 총노회로 발전되어 오늘날 고신교단이 성립되었다.

1950년(62세) 6.25동란이 발발했을 때 교인들 대부분이 피난을 갔지만 주 목사는 폭격 속에서도 기도와 심방을 계속하며 교회를 지켰다. 인민군들이 그를 잡아 처형하려 하였으나 그가 지닌 신앙과 인품 앞에 총을 겨누지 못하고 돌려보냈다고 한다. 그는 일생 소원이 순교였지만 순교를 하지 못하였다. 1951년 1월에는 강남쪽 교인들을 위해 창남교회를 개척하여 세웠다. 그 해 1951년 3월 23일 63세에 주남선 목사는 간암으로 소천하여 3월29일 장례를 치를 때 전국에서 온 교역자를 비롯한 조객의 행렬이 2Km에 뻗쳤다고 한다. 이약신 목사가 집례를 하고 묘소는 거창읍 가지리 묵실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주 목사 서거후 1953년 장남 주경중 장로가 중심이 되어 거창고등학교를 설립하였다. 1966년 9월 20일 고려신학교가 개교 20주년 행사를 가지고 주남선 목사 기념관을 건립하였다. 1976년 심군식 목사에 의해 성광문화사에서 ‘해와 같이 빛나리’라는 제목으로 주남선 목사 전기가 발간되었다. 1977년 정부로부터 건국포장 추서되었다가 1990년에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2001년 1월 21일 거창교회에서 주남선 목사 장학회를 설립하였고 2001년 4월 23일 주 목사 서거 50주년 기념강좌를 거창교회와 고신대학이 공동 개최하였다.

주남선 목사는 거창이 낳은 한국 기독교의 산 역사이자 자랑스런 인물로서 우리 모두가 그 분의 행적을 알고 본받아야 할 것이다.
자료 사진은 1930년 신학교를 졸업한 주남선 목사 사진과 광복으로 출옥한 성도 12명이 평양감옥에서 순교하신 주기철 목사의 부인 오정모 사모가 사는 집을 1945년 8월 19일 방문하고 찍은 것으로 귀한 자료이다. 거창박물관에도 소장되어 있는데 그 사진 앞줄 왼쪽부터 최덕지, 이기선, 방계성, 김화준, 오윤선, 서정환이고 뒷줄 왼쪽부터 조수옥, 주남선, 한상동, 이인재, 고흥봉, 손명복 등이다.






<참고자료>
신사참배 반대 항쟁 옥중성도 21명중 주남선 목사에 대한 평양지방법원 예심종결서 소화 17년(1942) 예제 23호, 소화 18년(1943) 예제2호 예심종결 결정된 열한 번째 피고인으로 무임목사 주남고 (당 58세)라고 기록되어 있음

연보(年譜) 1888.9.14 거창읍 출생하였고 15세때 군수로부터 효자상 수상하였다. 1909년경 호주선교사 전도로 기독교 입교하여 1912년 맥레(한국명: 맹호은) 선교사에게서 세례받았다. 1914.4-1915 거창교회 집사로 임명받아 봉사하였으며 1916-1917 함양읍교회 5대 전도사로 시무하였다. 1919.3.20 거창만세운동에 참여 군자금 모집에 관여하여 체포되어 부산지방법원에서 1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일시 보석으로 출옥하여 1919.12.28 거창교회 오형선 장로에 이어 2대 장로로 장립받았다. 1921 평양신학교 입학하고 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다가 1930.3.12 제25회 23명 동기들과 평양신학교 졸업했다. 1930.6.11 목사 장립을 받고 거창읍교회 제5대 목사로 취임했으나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1938.9 일제의 강요로 사임했다. 1940 무임목사 주남고는 서상원, 이주원과 함께 140원 운동자금으로 경남순회 함양, 진주, 산청, 교회지도자와 신사참배 반대 결의하고 1940.5 김해, 함양, 개평, 안의, 가천, 위천, 월계, 삼가, 장대교회에서 신사참배 반대 및 민족사상 고취 설교하다가 1940.7.16다시 체포되어 평양감옥 수감되었다. (수감중 이름 바꿈) 1945.5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예심종결 결정을 번복하고 공판에 회부되었다가 1945.8.17 광복과 더불어 출옥했다. 1945.12 거창읍교회 제7대 목사로 부임하고
예심종결결정서(이 문건에는 21명의 피고를 나열하면서 창씨개명한 이름을 사용했으나 처음만 쓰고 그 외는 본명을 사용하도록 함. 참고로같이 예심종결을 받은 인사들을 소개해 본다. 1.본적 및 주거 평북 의주군, 전 목사 이기선, 67세 2.본적 및 주거 평북 선천군, 전 전도사 김본인희(김인희), 38세 3.본적 및 주거 평북 정주군, 농업, 김전영락(김영락), 43세 4.본적 평북 선천군, 주거 평북 철산군, 농업, 전 집사, 염야신근(박신근), 37세 5. 본적 및 주거 평북 의주군, 농업, 전 전도사, 김화준, 47세 6. 본적 및 주거 평북 강계군, 할저제조업, 전 목사, 고도흥봉(고흥봉), 51세 7.본적 및 주거 평북 강계군, 무직 전 전도사 서정환 40세, 8.본적 평북 위원군, 주거 평북 강계군, 무직 전 서기 장원두희(장두희), 35세 9.본적 및 주거 평북 초산군, 토목청부업 전 집사, 청천대록(양대록), 32세 10.본적 부산 다대리, 주거 경남 밀양군, 무임목사 서원상동(한상동) 45세 11.본적 및 주거 경남 거창군, 무임목사, 신무남고(주남고), 58세 12. 본적 경남 하동군, 주거 부산 초읍리 부인전도사 삼산수옥(조수옥), 32세 13.본적 및 주거 경남 함안군, 무직 전 전도사 이원현속(이현속) 14.본적 경남 고성군, 주거 마산 상남동 무직 전 부인전도사, 최덕지, 45세 15.본적 경남 창원군, 주거 부산 초읍리, 무직 전 전도사, 광천명복(손명복), 35세 16.본적 및 주거 경남 밀양군, 무직 이인재 또는 국본주원(이주원) 40세 17본적 및 주거 평남 개천군, 무직 채정민, 74세 18.본적 평북 박천군, 주거 평양 경창정 무직, 안천이숙(안이숙), 38세 19.본적 평북 의주군, 주거 평양 경창정, 매약상, 목촌 또는 단양광록(이광록), 39세 20.본적 부산 초량정 주거 평양 인흥정, 전도사 방계성, 58세 21.본적 경남 함양군, 주거 평양 대치령정, 무직 오윤선, 75세)
피고인 신무남고(新武南皐)는 본적지에서 1888년에 태어나서 9세 경부터 약 10년간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고 그 후 자택에서 농사를 짓다가 24세 경부터 장로파 기독교에 입교하여 27세 때 권서가 되고 30세 때 전도사가 되어 거창군 내 7개 교회를 맡아 돌보는 한편 진주에 있는 경남성경학원에서 3년 간 성경 연구를 하였다. 33세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1919년(대정 8년) 정령 제7호 위반 죄로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복역 중 34세 때 가출옥의 은전을 입어 출소하여 계속 전도사를 하면서 43세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이후 거창읍교회 담임목사 겸 당회장의 직임을 가졌다. 1938년(소화 13년) 12월에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거창읍교회를 사직하고 무임목사로 자택에 있게 되었다.
그가 갖고 있는 주의 사상이 제일 앞에 기술한 피고인 이기선과 같았다. 결국 독선적인 해석에 기초한 성서관에 따른 것으로 신궁, 신사 등 여호와 이외 다른 신은 거짓 신으로 그를 참배함은 기독교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잘못된 믿음과 일본제국의 천황도 여호와가 통치권을 부여한데 지나지 않아 신의 뜻에 따라 빼앗을 수 도 있고 일본제국의 존망도 신의 뜻에 있는 것인데 신사참배정책은 신의 뜻에 어긋난 것이므로 반대한다는 것이다. 현재의 전쟁과 흉년 등이 계속됨과 기독교도에 대한 압박이 심한 것은 소위 말세현상이 두드려진 것으로 기독교 예언을 통해 볼 때 곧 가까운 시일에 다음 세상의 재림이 되어 일본을 포함한 현존 각 국의 조직은 붕괴되고 새로운 기독 독재, 소위 천년 왕국이 지상에 건설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의 실현을 위해 신의 뜻에 합한 충성스런 신자들의 협력이 절대 필요하여 신사참배와 같은 신의 뜻에 어긋난 정책에 극력 반대하고 앞에서 보인 독선적 성경관의 교리를 널리 전도하여 그에 공감하는 다수의 동지를 얻는 목적을 달성하여 일본제국의 국체변혁을 반드시 이루어내고 천년왕국의 실현을 간절히 바라고 협력할 목적으로 그 주의 사상을 선전하는데 힘써 그 실천 운동을 하고 있는 바이다.
⑴1940년(소화15년) 1월 3일 거창읍 하동 15번지 당시 주소에서 피고인 서원상동(한상동), 국본주원(이주원)의 방문을 받고 그들과 피고인 한상동 ?항에 적시한 것과 같이 그들이 벌일 운동의 목적과 방법을 설명했다. ‘우리들이 신사불참배운동을 통해 가까운 장래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 건설에 협력해야 한다.’는 점에 동지로서 협력을 권유하여 즉시 그것에 승낙을 얻고 계속 운동 방법을 타합하여 앞에 기술한 이념아래 죄를 저지를 목적으로 운동자금을 백 원씩 200원을 제공하여 받았다.
⑵1940년 1월 중순경 함양읍 소재 함양교회를 방문하여 장로 황보기에 대해 신사참배는 다른 신에 대한 예배로서 계명을 위반하는 것이며 신에게 죄를 짓는 것이므로 절대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⑶1940년 3월 27일 진주 봉래정 황성호(황원택의 아우) 집에서 한상동, 이주원, 이원현속(이현속)과 모여 피고인 한상동 (33)에 적시한 대로 기도회를 가져 격려기도를 하며 서로 신사불참배를 표방하는 본 운동에 어떠한 탄압을 받더라도 무릅쓰고 싸워 지상에 하나님 나라 건설에 협력하기로 뜻을 모았다.
⑷같은 날 앞에 적힌 자들이 같은 곳의 호주선교사 J.M.Stuckey(한국명:서덕기)를 방문하고 피고인 한상동 (34)에 적힌 바와 같이 선교사에게 그들의 그 후의 운동 상황을 보고하고 그로부터 금후 활동 방법을 지도 받았다.
⑸1940년 3월 28일 황성호 집에서 한상동, 이주원과 본 건의 범죄를 할 목적을 알고 피고인 한상동 (35)에 적힌 것과 같이 운동자금 40원을 제공받았다.
⑹같은 해 3월 하순경 산청군 단계면 단계교회 영수 박명준, 합천군 가회면 장대교회 영수 김영숙, 삼가면 삼가교회 장로 강과 강촌석횡을 개별 방문하여 신사참배는 계명위반이므로 그것을 행하면 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니 절대 거부할 것을 말해 주었다.
⑺같은 해 5월 초순 자택에서 피고인 서원상동의 방문을 받고 피고인 한상동 (45)에 적은 것처럼 둘이서 기도회를 하고 그 자리에서 평양에서의 회합상황을 상세히 알게 되어 이후의 운동 방법을 협의했다.
⑻5월 23일 진주 봉래정 황원택 방에서 피고인 한상동과 만나고 피고인 한상동 (49)에 적은 대로 같이 비밀기도를 하고 그에게서 평양을 중심으로 한 조선 지방의 본 운동상황과 남북 동지들의 회합 연락상황을 상세히 들어 알고 서로 격려하였다.
⑼그 날 밤에 한상동, 이현속과 같이 진주 봉래정 41번지 하은혜 방에서 피고인 한상동 (50) 적은 것과 같이 전도부인 문창경업의 초대를 받고 그 집에 가서 황원택, 대산원석과 회합하여 앞의 항과 동일한 내용을 전해 듣고 본 운동에 전 조선이 같이 함이 필요하여 이것을 실행하도록 말하는데 같이 찬동하고 실행방법에 관해 타합하다.
⑽5월 하순 김해군 대저면에 거주하는 신자 심문태를 방문하여 그에게도 ⑹과 같은 내용 즉 신사참배는 계명위반이므로 그것을 행하면 신에게 죄를 짓는 일이니 절대 거부할 것을 말해 주었다.
⑾그 다음날에는 같은 면 소재 대저교회에 모인 신도 다수에게 ‘신은 사랑이다"라는 제목아래 ‘신은 우리를 위해 독생자 그리스도를 보내어 이로써 믿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세상은 이미 말세로 그리스도가 지상에 재림하여 천년 왕국 건설이 가까와졌다. 이제 우리들은 심판대 앞에 설 터인데 우리가 교리와 계명을 절대로 지켜야 한다’ 라고 설교했다.
⑿그 다음날 부산 동래 해운대교회에 부임한 전도사 천곡재화(구재화)를 방문하고 거기서 피고인 한상동 (53)에 적은 대로 피고인 한상동과 타합하여 그 후 활동을 연락하기로 하고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로서 신에 대한 죄악이므로 즉시 고치라는 뜻을 고취 강조하였다
⒀그 무렵 함양군 지곡면 시목교회 영수 김종대, 지곡면 개평교회 장로 정팔현 안의읍교회 전도사 장봉상을 개별적으로 방문하여 그들에게 ‘신사참배는 반계명적인 행위에서 나온 것이다. 교리를 받들어 믿음으로써 신의 백성이 되어라’ 운운하고 말했다.
⒁그 무렵 지곡면 시목리 김종대 방에서 피고인을 방문하러온 시목교회 전도사 윤봉기와 안의교회 장로 정은혁을 대하고도 앞에 항과 같은 내용으로 말했다.
⒂같은 해 6월 10일경 자택에서 한상동의 방문을 받고 피고인 한상동(56)에 적은 것처럼 여 본 운동의 내용을 관청에서 알아채고 내사할 염려가 있으므로 금후 신변을 충분히 경계할 것과 두 사람이 금후 어떠한 곤란을 만나더라도 신을 믿는 절개를 굽히지 말자고 하고 그 때 운동자금 40원을 제공받았다.
?1940년 1월 초순경부터 6월경까지 함양군 봉평, 시목, 개평, 안의, 거창군 가천, 무릉, 위천, 산청군 단계, 합천군 삼가, 장대 등 각 교회에서 10명 내지 80명의 신도들에게 1회 내지 5회 ‘하나님은 사랑이다’ ‘우리들은 어떠한 그리스도인인가’ 등의 제목으로 ‘현재 성경 교리에서는 말세다. 그리스도가 재림하여 지상 천국을 건설할 때가 임박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신을 맞을 준비가 필요하다. 현재 우리들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우리들은 회개해야 한다.’라고 설교하고 계명 엄수를 강조하며 슬며시 신사참배 반대사상을 고취했다.
이 같이 국체변혁을 목적으로 하여 그 목적 실행에 관하여 ⑴,⑶,⑷,⑺,⑻,⑼,⑿,⒂와 같이 협의하고 위 사항을 실행을 위해 ⑵,⑹,⑽,⑾,⑿,⒀,⒁,?과 같이 선동하고 또 ⑴,⑸,⒂와 같이 그 정황을 알고 돈을 제공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