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누명을 벋은 네스토리우스 [세계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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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누명을 벋은 네스토리우스 [세계교회사]


분류: 교회사- 세계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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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라클레이데스 의 책
(The Book of Heracleid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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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년 시리아 의 한 사제 가 책 사본을 하나 발견 하였다. 이는 극적인 사건으로 내용인즉
네스토리우스 가 그의 적대자 들 과 벌인 논쟁들 과 그의 가르침 들을 내용으로 하여 저술
한 글들 의 그리스 어 원문을 주후 540 년 경 시리아 어 로 번역한 사본을 발견한 사건 이
었다.
이 사본은 수 세기 동안 헤라클레이데스 의 책 이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채 숨겨져 있었다.
그러나 이 책 의 저자 는 분명히 네스토리우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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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스토리우스
(Nestorius)
***
그는 안디옥 총 대주교 교구 의 유프라테스강 지역 에 있는 게르마니시아( Germanicia )에
서 태어났다. 그가 안디옥 근처 의 수도원 에 들어갔고 거기서 종종 안디옥 시내 의 중앙
대 성당에서 설교 하도록 요청 받았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 의 초기 생애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유능한 웅변가 였으며 매우 대중 적인 설교가 로서의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428년 그는 갑짜기 전 기독교 왕국 내에서 최고 의 직위들 중 하나 인 콘스탄티
노플 감독직 에 임명 되었다. ... 새 직위에 취임하기 위해 콘스탄티노플 로 여행하는 도중
, 네스토리우스는 몹수에스티아 에 들려 데오도르를 방문 했는데, 그는 네스토리우스 에게
주의 깊고, 신중하며, 다른 사람들 의 의견을 존중 하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는 그의 경고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428년 4월 감독 취임식 때, 네스토리우스 는 열정에
사로잡혀 외쳤다. " 오 황제 여 나에게 이단자 들로 부터 깨끝한 땅을 주시오. 그러면 나는
당신에게 하늘을 주리라. ". 그렇게 말함으로서 그는 아리우스 이단들을 향한 공세를 시작해
콘스탄티노플 에 있는 그들 의 유일한 예배당을 폐쇄했다. 다른 개혁 운동들 이 신속히 뒤
따랐다. 그러나 갑짜기 , 운명의 아이러니컬 한 비틀림 속에, 이단 사냥꾼 네스토리우스는
자신이 이단으로 비난 받았다. 네스토리우스 가 비록 신중한 인물 이었다고 할수 있으나 ,
알렉산드리아 학파 사이에 얽힌 묵은 긴장 관계와 , 새로운 수도(콘스탄티노플)의 감독 자리
를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 밀치고 들어가려고 획책을 꾸미는 한, 또 다른 심각한 문제가
야기 되기에 충분한 조건이 다 갖추어진 셈이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는 교회법 제 3항에서
"새로운 로마(콘스탄티노플)" 에게 서방 의 옛 로마 가 누렸던 것과 비슷한 권위를 동방에서
누릴수 있다고 허락했다. 그러나 당시 동방에서 가장 중요한 교구 로 자처 하였던 알렉산
드리아 나 안디옥은 쉽사리 용인하려고 들지 않았다. 결과적 으로 알렉산드리아 는 콘스탄
티노플 에 대해서 힘을 다해 반대했으며 , 특히 안디옥 학파적 인 경향에 서있는 사람이 그
교구의 책임자로 들어서자 격렬하게 반대 하였다. 이러한 반대는 이보다 앞서서 알렉산드
리아 의 데오필루스 가 콘스탄티노플 의 대 주교 요한 크리소스톰을 퇴위 시켜서 주후 404
년 에 유배 시킨데서 부터 일찍이 싹트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정황 하에서 분쟁은 네스토리우스 가 일련의 성탄절 설교 중에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동정녀 마리아를 묘사하기 위해 , 서방 에서는 사용 되었지만 안디옥 에서 사용되
지 않은 유명한 경구에 그의 주의를 돌렸을 때 시작 되었다.
콘스탄티노플 에서 그녀는 " 하나님 의 어머니 "- 하나님을 잉태한자 로 불렸으며, 이것이
안디옥 에서 교육을 받은 이의 귀를 거슬려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인성을 옹호 하도록 했
다. 안디옥 에서 교육을 받은 다른이 들은 이미 이러한 호칭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었으
며, 네스토리우스는 아주 의도적으로 이 논쟁을 중재하고자 했다.

내가 여기에 왔을 때, 교회의 구성원들 사이의 한 논쟁을 발견했는데, 그들 중 일부 는
복된 동정녀 ( Blessed Virgin )를 하나님 의 어머니 라고 부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 은
그녀를 인자 의 어머니 라고 부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양쪽 사람들 을 모아놓고 , 동정녀 가
성경에 있는대로 하나님 과 인자 모두를 대표하는 표현 인 그리스도 의 어머니 라고 불리워
야 한다고 주장 했습니다. ( 네스토리우스 가 430년 12월 안디옥 의 요한 에게 보낸 네스토
리우스 의 편지 일부 내용 )
당시 교구 의 대성당 소속 주임 신부 인 아나스타시우스 가 하나님 의 임신자 를 공격하자,
네스토리우스 는 정죄해서 출교 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묵살해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네스
토리우스 자신이 하나님 의 임신자(데오토코스, Bearer of God )라는 명칭의 사용을 반대하
는 설교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가 그것의 부 정확한 신학에 대해 비판하
고 있는 이 경구는 종교적 표어 의 모든 정서적 대중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성스러운 말
에 대한 그의 반대로 인해 그의 적들은 마치 늑대처럼 그를 공격했다. 그 당시 에는 대부분
의 기독교 인 들이 이 명칭을 정상적 인 것으로 받아들였고, 알렉산드리아 학파 신학자 들
도 감독 알렉산더 이후로 친근하게 사용해 왔고 , 이 명칭은 속성의 교류(communicatio
idiomatum )의 필연적 결과하고 생각 했기에 이다. 몹수에스티아 의 데오도르 까지 도 이
명칭을 올바르게 해석만 한다 면 받아들일수 있다고 할 정도였다.((영으로 난 것은 영이요
육 으로 난 것은 육 인데 ????))
그러나 네스토리우스는 하나님 의 임신자 라는 명칭을 마리아 에게 적용 시키면 예수 그리
스도 안에 신성 과 인성이 혼동될 가능성 이 있다 보았기에, 그리스도 의 임신자 로 부를수
있을 지언정 하나님 의 임신자 로 부를수 는 없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강한 반발이 즉각적 으로 몰아 닥쳤다. 이것은 그의 경쟁자 인 알렉
산드리아 의 감독 시릴이 바라던 기회 였다. 시릴이 네스토리우스 의 몰락을 추구하는 데
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정치적 이었다. 4 세기 말까지 알렉산드리아 는 로마 다
음으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총 대주교 직 이었다. 그러나 2 차 공의회( 381년, 콘스탄티노
플 )는 비록 로마가 물론 역사적 선재성( the precedence of antiquity )를 지니지만 로마
와 콘스탄티노플 이 동등하다고 선포했다. 따라서 알렉산드리아 는 콘스탄티노플 아래로
강등되어 시릴을 번민하게 하였다. 결국 시릴은 콘스탄티노플 대 주교를 정죄 하는데 힘이
될만한 모든 사람들을 즉시 소집했다. 알렉산드리아 교구의 대 주교로서 , 그는 궁정의 지원
을 받기에 충분할 만큼 강력하게 설득하여 돈을 마음대로 얻어 쓸수 있었다. 오랜 세월 동
안 알렉산드리아 교구는 많은 재산을 확보 했으며 , 이 재력으로 네스토리우스를 공격 하는
데 사용할수 있었다. 시릴은 풍부한 재원을 갖고서 신학 보다는 돈에 눈이 어두운 고위 관
직자들 의 지지를 얻을수 있었다. 그는 두 번째 로 로마 교구의 지원을 얻어서 자신의 배
경을 더욱 공고히 했다. 콘스탄티노플 회의 이후로 콘스탄티노플 교구 가 로마에 버금
가는 지위를 주장한 이래 알렉산드리아 는 옛 수도 로마 와 공동 으로 연합 전선을 펴서 새
롭게 성장해 가는 교구 의 거만함을 꺽으려 들었다. 때를 맞춰서 서방 교회 에서 정죄 받
고 쫓겨난 펠라기우스 주의자 들에게 네스토리우스 가 피난처를 제공해 주자 로마 는 알렉
산드리아 쪽으로 더욱 더 기울어 질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정치적 반목 과 더불어 안디옥 학파와 알렉산드리아 학파 간의 오래 계속된 신학적
대립이 있었다. 이 같은 이유 와 동시에 전의 와 권위적 인 요소 가 짙게 깔린 가운데,
429년 부활절 주일에 시릴은 공식적 으로 네스토리우스 가 이단 임을 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 의 신학적 주장의 저질성을 지적 하면서 그는 네스토리우스가 그리스도 의 신
성을 부인 했다고 고발 했던 것이다. 네스토리우스에 대한 그의 공격은 정확한 신학적 정의
나 혹은 충실한 성경 주석에 근거 했다기 보다는 정통 교회 의 감정을 직접적 으로 자극함
으로써 이루어졌다. 그의 예상 대로 교회는 다시 들끓기 시작 했다.
교황 셀레스틴 의 주도 아래 430년 8월 로마에서 모인 대회는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고 말
았다. 마지막 으로 시릴은 알렉산드리아 의 주장이 정통 이라고 믿고 있던 이집트 수도사들
의 지지를 얻어냈는데 이들은 아타나시우스 이래로 참된 신앙 이라고 인정 하기만 하면 물
불을 가리지 않고 끝까지 옹호하는 열성분자 들이었다. 반면에 네스토리우스 는 안디옥
의 대 주교 요한 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요한은 알렉산드리아 에 자리잡고 있던 상대편 적
수 시릴 만큼 세력이 있는 인물 은 아니었으나 , 그 또한 만만치 않은 인물 이었음을 알수
있을 것이다.
430년 에 모였던 로마 대회는 시릴을 지명해서 네스토리우스 의 주장을 취소 하도록 종용하
는 대표자 로 세웠다. 시릴은 성명서 를 통해서 네스토리우스 에게 그의 주장을 철회 하도
록 요구했다. 그러나 그가 쓰는 용어등은 네스토리우스 가 아무리 유순한 성격을 지니고 있
었다고 해도 도저히 용납할수 없을 만큼 오만했다. 콘스탄틴 대 주교 네스토리우스 에게 두
차례에 걸쳐서 글을 보낸 후 , 시릴은 세 번째 보내는 편지의 부록으로 네스토리우스 에게
12개 의 저주를 적어놓고서 이것들을 그대로 준수 하라고 요구했다 . 이 저주문 들은 네스
토리우스를 정죄 했을 뿐만 아니라 , 알렉산드리아 의 신학이 유일한 정통 이라는 입장에서
신학을 해석하는 내용 이었다. 이렇게 해서 시릴은 네스토리우스를 패배 시키고 동시에 알
렉산드리아 학파의 적수인 안디옥 학파 의 신학에 대해서도 결정적 인 승리를 얻은 것처럼
자위했다. 이에 대해 안디옥 학파 네스토리우스 도 시릴을 반대하는 12개 의 저주 문을 보
냈다 하는데 , 이 12 개의 사유 들은 네스토리우스 의 좀더 온건한 입장을 반영하고 있는
데 , 오늘 에 와서 이것들은 그가 쓴 것이 아님이 밝혀지고 있다.
이렇게 상대방을 상호간 에 정죄하는 서신 교환 은 동방 교회 전체를 뒤 흔들어 놓았으며,
급기야 발렌티니안 황제3세 와 테오도시우스 2세는 431년 6월7일 에베소에 총회를 소집 하
였다. 화해 기키기 위한 제 3차 세계 공의회 였으나 그 결과는 화해가 아니라 더 심각한 대
립 이었다. 431년 의 에베소 회의는 고대 기독교사 에 있어서의 그 중요한 일곱 차례의 공
의회 중 가장 격렬하고 또 가장 평형을 잃은 회의였다. 이것은 교회사 의 한 오점 과 같은
사건 이었다. 이 회의는 네스토리우스 를 지지하는 황제 의 정치적 권위 하에 소집 되었으
나 막상 회의 가 진행 되면서 시릴은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았다.

시릴은 수많은 감독들 과 수도사를 대동하고 일찍이 자리를 잡고서, 네스토리우스를 기필코
정죄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겠다고 단단히 버티었다. 그 지방 멤논은 시릴을 지지하며
네스토리우스를 반대하는 선동 집회를 주도했다. 6월22일, 안디옥 의 요한 과 그의 일행이
도착하지도 않아 네스토리우스 의 대변자 격인 안디옥 의 총 대주교와 그의 수행 감독들 이
그들 의 사정을 들어 회의 개최를 좀 늦추어 줄 것을 통고 했음에도 시릴은 그가수행한 50
여명 의 감독들 과 함께 , 78명 의 다른 감독들 의 항의와 제국 황실 의 대표자 들의 반대
를 무시해 버린채 회의 의 회무처리 개최를 강행했다. 네스토리우스 는 참석을 거부했고 ,
상황 이 너무나 험악한 것이어서 호위병이 네스토리우스를 불의 의 사고로 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 의 숙소 주위를 경비해야 했다. 바로 이날 몇 시간에 걸친 짧은 회무 처리를 통해
서 ,시릴 의 의사에 따라 그 회의는 네스토리우스를 파문하는 쪽으로 200 표를 던지는 투표
를 계속 진행 시켰다. 결국 네스토리우스 의 입장을 밝히는 공개 청문회도 거치지 않고 그
를 정죄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안디옥 의 대주교 요한 과 그의 일행 40명 의 수행 감독들은 그로 부터 4일 후에 도착했다.
회의 에 늦게 도착함 으로 어떤 조치도 취할수 없었지만, 도착 후 회의 에서 내린 결정 사
항이 무었이었는지 알게되자 , 회의 의 결정을 불법으로 선언하고 이들도 따로 별도 의 회
의를 소집해서 자신들 이 참으로 정당한 회의 라고 선언하고 반 에베소 회의를 개최하여 시
릴과 멤논을 정죄하여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였다. 한편 교황청 의 대표단 도 에베소 에
도착 하였다. 이들은 시릴 의 회의에 참석해서 네스토리우스를 정죄하는 문서를 인정했을
뿐 아니라 요한이 주재했던 회의 에 참석했던 자들에 대해서 도 정죄 한다는 조항을 첨가
시켰다. 로마 의 지지를 얻은 대가로 시릴은 대부분 의 교황 들의 골치거리로 애를 먹이
던 펠라기우스 주의를 이단으로 동시에 정죄했다.
상황이 이렇게 혼잡하게 뒤 얽히게 되자 , 비잔틴 제국을 둘로 갈라 놓을수도 있는 위기에
처한 터오도시우스 2세는 이러다가는 다시 회복할수 없는 분열을 초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염려에서 그 어려운 상황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문제의 두 총대주교, 네스토리우스 와 시릴
을 면직 하기로 결정했고 네스토리우스 , 시릴, 요한을 다같이 옥에 집어 넣게했다.
이때 시릴은 재빨리 뇌물을 써서총대 주교 의 자리에 복귀했다. 그는 황제 의 모사이며 대
관 인 어떤이 의 환심을 사기 위해, 14장 의 아시아 산 양탄자, 8개 의 긴 의자, 6장 의 탁
자보, 4장 의 테피스트리, 4개 의 상아 벤치와 6개 의 가죽 벤치, 그리고 6 마리의 타조를
선물로 바쳤다. 이로 인해 알렉산드리아 교회는 현 가치로 300여만 달라(1922년 당시 6만
영국 파운드 액수)에 해당되는 빚을 지게 되었다. 한편 정치적 인 것에 둔감하고 고지식 하
지만 언제나 진실한 네스토리우스 는 그저 그 판결 의 부당성을 조용한 목소리 로 항거했을
뿐 , 그것을 자신 의 것으로 받아들였다. 얼마되지 않아서 시릴은 자신 의 유능한 정치적 수
완을 발휘해서 자신 과 양쪽 파의 대표자 들이 칼케돈 에 모이면 의견 차이를 극복할수 있
다고 황제를 설득했으며, 따라서 회의 소집을 알리는 선언을 하도록 유도 하는데 까지 이르
렀다. 이렇게 해서 황제 의 면전에서 개최된 회의 에서 시릴과 그의 지지자 들은 황제의 호
의를 얻었으며, 그 결과 네스토리우스 는 자리에서 물러나 안디옥 근처 의 오래된 수도원
에 유배 당하게 되었고 콘스탄티노플 에는 새로운 대 주교를 앉혔다. 시릴 자신은 황제 의
영향권에서 먼 알렉산드리아로 다시 되돌아갔다.
네스토리우스 는 435년 에는 그에 대한 반대가 더욱 심해지게 되자 아라비아의 페트라 로
유배 되었다. 마지막 으로 그의 영향력 의 지대함에 위기를 느낀 반대자 들에 의해 리비아
광야에 있는 조그만 오아시스 로 보내고 말았다. 그곳에서 네스토리우스는 오랫동안 지냈
기 때문에 몇 년 뒤 콘스탄티노플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신경쓰지도 않을 정
도로 잊어 버렸다. 그러나 그는 칼케돈 회의 가 개최된 후 까지도 살아서 자신 의 입장이
옳다고 증명 되기를 기다렸다. 그는 말년에 외진 유배지 에서 자신의 입장을 알릴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칼케돈 회의에 모인 교부들 이 자신 의 주장이 옳았음을 인정해 주었다고
자랑 스러워 했다. 그러나 이미 구 세대 사람으로 당시에 살아있었지만 알아주지 않았고 황
실 에서나 교회 적 삶 의 큰 중심지 에서도 그가 부르짓는 소리에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
았다. 그는 451년 생을 마감했다. 서방 교회 에 대하여는 이단 이었으나 페르시아 교회에
대하여는 영웅 이요 순교자 였으나 자신 에 대하여는 이단 도 영웅도 될 수 없었다.
그가 생을 마감하기 전에 다음 과 같이 썼다.

세속적 인 것들 에 대해서 나는 추호의 관심이 없다.
나는 세상에 대하여는 죽었고 그 분에 대하여는 살았다......
네스토리우스에게는 저주가 있을 찌어다!... 그리고 나를 정죄함 으로써
그 모든 사람 들은 하나님 과의 화해에 가까워 질수 있도록 하나님은 역사
하실 것이다. ... 잘있거라
나의 친구 사막이여......유배지여. 나의 어머니.
그는 부활 의 날까지 나의 몸을 지키실 것이다. ... 아멘.
*********네스토리우스. " 헤라클레이데스 의 바자아르 "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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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 의 말에 의해 재심 의 자리에 선 네스토리우스 는 그가 정죄 당했던 만큼 " 네스토리
우스 적 " 이지 않았고 , 그의 적대자 들 보다도 오히려 더 정통에 가까운 자리에 서 있었
다. 예를 들어 루터는 그의 저작들에서 발견될수 있는 모든 이단적 가능성을 검토한 후에
그것들 안에 이단적 인 그 어떠한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 지었다. 다만 속성의 교류
설을 충분히 진지하게 고려하지 못함을 아쉬워 하면서...
그의 신학은 근본적 으로 복음 안에 계시된 역사적 그리스도의 토대 위에 세워져 있다.
사실 그의 대적자 들이 공격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한 번도 그리스도 의 신성을 부인한 적
이 없다. 그리스도 의 통일성 역시 부인하지 않았다. 그가 공식적 인 정죄를 받은 것은 바
로 이 문제에 관련해서 였는데......문제는 부분적으로 그의 용어 선택에 있다.
시릴은 네스토리우스의 가르침을 이단설 로 몰아 세우려 했다. 그러나 시릴이 네스토리우스
가 그렇게 가르쳤다고 주장하는 내용 들은 실제로 그가 가르친 것이 아니었는데...
그의 초기 저작들 에서 뿐 아니라 그의 후기 작품인 헤라클레이데스 의 책에서도 찾아볼수
없음은 물론이라 는 것이다.
에베소 회의 전까지 그는 구원자 의 인성 과 신성 사이에 긍극적인, 그리고 근본적 인 차이
가 있다는 가장 중요한 진리를 양보함 없이, 성육하신 그리스도 인격 의 본질적 통일성을
표현하는 방법을 찾기 위해 노력했다.
ㄷ 본성 안에서 의 그리스도 위격 의 통일성을 말하는 이 교리는 그 의미가 충분치 못하여
이 교리의 신학적 깊이를 다 담아낼수 없는 한 단어에 의존하여 설명 되었는지도 모를 일
이지만 그렇다고 그 본래적인 의도가 이단 적인 것은 아니었다.
네스토리우스 는 그의 적대자 들로부터 양자론 이단의 혐의를 받았어야 했는데, 이 문제에
있어서도 그는 결백했다.
시릴은 네스토리우스 가 그리스도 는 단지 인간일 뿐이며 인간 으로서 그리스도 는 너무 선
하고 또 너무나 순종적 이었기 때문에 신성 안에서 양자적 " 아들 됨"을 획득하게 되었다는
식의 양자론 적 기독론을 전개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네스토리우스 에게 있어서 성
육신은 단순히 신성을 획득한 한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 빌 2:7에서 잘 말해주고 있
는 대로 하나님 이 자신을 비우시고 " 사람들 의 모양 으로 태어나셨다" 고 하는 하나님 의
은혜의 행위 인 것이다.
********
우리 모두 주 예수님 의 사활 대속 의 사랑을 기립시다.
모든 영광은 단일한 신성의 삼위로 있으시는 여호와 주 하나님 께.!
샬롬. 아멘.
* 위 글은 전부 두권의 책에서 가져와 진술한 것입니다.
1. 아시아 기독 교회사 사무엘 H.마펫 지음 김인수 옮김 장로회 신학대학교 출판부
제 9장 279-304쪽.
2. 기독교 사상사 1 후스토 L. 곤잘레스 저. 이형기. 차종순 역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통합)출판국 397-452쪽.

통상 알려진 네스토리우스 의 교리는 분명 이단 일 것입니다.
그런데 정작 네스토리우스 본인은 그러한 의도 의 진술을 하지는 않은
사실 또한 지적 해 주어야 하겠다 생각되어 글을 올렸습니다.

모든 영광은 단일한 신성 의 삼위로 있으시는 여호와 주 하나님 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