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조용기가 이단인 이유
글쓴이 : 강종수 날짜 : 2004/05/15 조회 :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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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어가는 말
조용기 목사(여의도순복음중앙교회)에 대한 이단성 시비는 오래 전에 있었던 묻혀가버리는 인물사로 남고 있다. 이미 개혁주의 신학을 토대한 많은 교회가 조용기를 이단이라 말하는 것은 부당하거나 의미도 없거나 혹은 우리 교회가 부흥해야 하므로 긍정적인 측면으로 보자고 한다. 그러나 개혁주의 신학을 바탕으로 설교하고 목양 할 자라면 한번은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 올려 놓고자 한다. 제목부터 반감이 갈지 모른다. 그러나 세계적인 목사라고 이단이라 하면 안 되는 이유라도 있을까?...
조용기 목사는 부흥의 마인드를 각성케 했다. 혹자는 그러므로 조용기목사는 "목회에는 성공했으나 신학에는 실패한 자"라 평하기도 한다. 목회의 성공이란 정의에 문제가 있지만...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으나 몇 가지만 게재한다.
- 밝혀두는 말
1)1979년 12월 19일 수요일 성경강해 시간에 고전 9:을 강해하면서 "죽은 부모에게 음식물 차려놓고 절 해도 죄가 아니다"고 했다가 여러 목사와 교우들의 빗발치는 비난을 감수 못해 교계 신문에 사과 발표는 했으나 그것이 실수의 성질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남겼던 바 있다.
2)이단자 나운몽씨를 추종하며 존경한 사람이다. 나운몽씨는 그의 구국설교집 제 5집 134-139쪽에서 "공자는 이방인의 성자요 성경은 불교도 내용에 있으며 공자, 석가, 소크라테스 등은 지옥가지 않았고 모두 구원 얻었다"고 했다(나운몽씨에 대한 참고자료사이트 http://www.pck.or.kr/sub4_06.asp).
3)구원관 - 행위(순교) 구원론으로 그의 [요한계시록 강해] 249쪽에서(영산출판사,1980) 성령충만한 신자들은 공중휴거하여 공중잔치 할 때, 들림 받지 못한 자 중에 구원받을 자가 있는데, 이들은 "순교의 공로를 인정받는 것이 복"이 되어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한다. 그의 표현으로 이삭줍기로 하나님이 주신 복이란다.
4)축복론의 타이틀, [3박자 구원](5중 복음)은 비성경적이다. 성경 해석관에 있어서 긍정적 사고방식과 지상행복주의의 목적을 깔고 해석하고 있다. 지상에 받을 문화적 축복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조용기가 풀이하는 구절과 설교의 핵심에는 결코 정통 성경신학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
요삼 1:2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위 본문을 영적으로 잘 되어 있으면 범사가 잘된다는 평범한 원리(?)에 대해서는 무리가 없겠지만, 본문을 이어가는 뒤의 구절 3-5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 사랑하는 자여 네가 무엇이든지 형제 곧 나그네 된 자들에게 행하는 것이 신실한 일이니"
그리고, 요삼 1:8 "...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등을 이어 볼 때, 요한이 성도들을 기뻐하고 그렇게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기를 간구하는 것은 그들이 진리 안에서 행함으로 인하여 기뻐하고, 진리를 위하여 수고하는 자 되기를 간구한다는 것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또는 조용기가 즐겨 사용하는(일반 다른 설교자도 자주 사용함) 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말씀의 해석과 함께 소위 기적주의와 지상행복주의로 끌고 가는 것을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으며 보통 인간의 정서로는 민감하게 빨려들게 마련이고 부흥될 수 밖에 없는 영적 운동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구절은 약할 때나 강할 때나 모두 적응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하는 것이지 결코 이적주의 사고방식으로 해석될 수 없다.
- 나오는 말
조용기는 이번 "동국대 불교대학원 특강"에서 성경의 본질적인 구원의 유독무이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버리고 자연주의 구원을 말했다. 그가 스승으로 여겼던 나운몽의 리바이블이다.
개혁주의 신학이 왜 필요한가?
아니 왜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을 해야만 하는가!
왜 나는 고신인이 되어야 하는가!
다른 복음을 견제하고, 느슨해지는 그 편안한(?) 인본주의가 게으름과 죄에 민감한 실존적인 인간 나를 진리에서 부당하게 멀어지게 할까봐 돈독하게 복음의 능력과 원론으로 메어두려는 뜻에서이다. 가령 주일성수에 있어서도 해석한 뜻이 아무리 좋아 보여도 나는 좀은 절제주의로 성수를 외치고 싶다. 왜냐면 인간이란 게 얼마나 간사한지 조금 풀어놓으면 형편없이 망가지기 쉽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중세기의 수도사의 역사나 그 배경의 영화를 아주 감명 깊게 본다.
참고 사이트 - 이단의 정의 - http://www.church-heresy.com/
- 이단의 특성 - http://nulserom.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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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정의 - 참고, http://www.church-heresy.com/
- 이단의 특성 - http://nulserom.wo.to/
1. 일반적인 개념
"이단"이란 일반적으로 철학적 사상이나 종교적 교리를 추종함에 있어서 유형을 같이한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될만한 이념적 차이가 발생할 경우 보수주의 측의 반대 입장에서는 자들을 일컬어 지칭하는 명사이다. 한국사람들의 언어에 있어서 "이단"이라는 말의 일반적 의미는 자기가 신봉하는 도와 다른 길을 걷는 것, 또는 전통적인 것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 등을 의미한다.
영어로는 이단을 "Heresy"라 하고 독일어로는 "Ketzrei", 라틴어로는 "Haeresic"인데 이들은 모두 헬라어 "Hairesis"라는 말의 음을 자기들의 글로 받아 적은 것들이다. 헬라어의 "Heiresis"라는 말은 보통 붙잡힘(Srizure), 선택(Choise), 결심(Resolve)등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다. 그러나 이 말이 헬라인들이 좋아하는 철학이나 과학등 학술적인 용어로 활용될 때는 전통적인 것과 특별히 구별된 어떤 견해나 학파 같은 것을 가리키는 뜻이 되었다. 이 용어는 70인역 헬라어 성경에는 선악(善惡) 간의 "선택"이란 의미(창49:5; 레22:18; 느12:40)로 쓰여졌고 요세푸스가 쓴 책들에서는 비난의 의미가 없이 일종의 "파당"이나 "분파"의 의미로 쓰여지고 있는데 성경에서도 이와 같은 의미로 활용된 경우(행5:17; 15:5; 26:5)가 있다. 그러나 이 용어는 신약성경에서 대체적으로 교회 안에서 일어난 한 분파주의나 그 추종자들을 능멸(행24:5; 고전11:19; 갈5:20; 벧후2:1; 딛3:10; 고전1:10, 11:18, 12:25; 롬16:17)하는 의미로 쓰여졌다.
히브리의 랍비적 용어에는 헬라어 "Heiresis"에 해당된 말은 나르바(Narba)와 메부(Meboo)인 바 이는 바리새, 사두게, 엣세네와 같은 유대인의 내부에 나타난 당파를 말할 때 사용되는 언어였다.
2. 성경적 개념
이단의 성경적 개념은 넓게 말하면 하나님의 뜻, 곧 진리에 거슬린 이론과 그것에 의한 동작이며 나타난 모든 행사이며 좀 더 좁혀 말하면 하나님이 싫어하는 삶의 행위이며 아주 좁혀서 말한다면 하나님이 허락한 것이 아닌 종교적 이론이나 행동을 말한다. 기독교의 역사는 이단과의 투쟁사이며 성경은 그 투쟁사를 수록한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요청인 진리와 그 진리로 이루어진 인간들의 삶 안에 하나님의 요청이 아닌 다른 것 곧 비진리가 들어와 잘못된 삶을 바르게 회복시키려는 하나님의 섭리를 기록한 책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단의 연구는 신약과 교회사만을 자료로 활용하는 그 동안의 태도를 버리고 신,구약 66권 전체와 구속사를 활용하는 연구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본다.
이단에 관하여 구약 성경을 총 대표하는 말씀은 십계명의 머리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곧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출20:3)고 하신 말씀이다. 역설(力說)하면 하나님 이외에 다른 신(God)을 섬기는 것이 이단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구약 성경에서 말한 이단의 개념을 올바로 알려면 다른 신이 무엇인가를 먼저 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첫째, 인간의 자율 이성을 부추겨서 자신을 하나님같이 보도록 해준 인본주의 신이다. 거룩한 에덴동산에 죄가 들어 와서 아담을 하나님으로부터 독립시킨(창3:5) 다음 자신의 것으로 존속시켜버린 마귀(요8:44)가 바로 그 신이다.
둘째, 각 지역의 부족이나 민족들의 풍속 안에 빌붙어서 신앙의 객체로 군림하는 신비주의 신들이다. 이스라엘 나라를 부패시켜 멸망으로 치닫게 한 바알신이나 아시스신 또는 말뚝신 같은 토속신이나 이방신들(사18:19) 그리고 드라빔이나 금송아지나 나무에 매달린 뱀같이 인공으로 만든 신들이 다 이것에 해당된다.
셋째, 하나님은 떠나버렸는데(렘3:16)도 깨닫지 못하고 율법적 겉치레만 강요하는 형식주의 신이다. 바리새인과 사두게인들은 이런 허상신을 숭상하고 있다가 하나님의 독생자도 알아보지 못하는 비극을 연출한다. 구약에서는 하나님이 인본주의와 신비주의와 형식주의의 모든 삶의 방식을 하나님의 뜻에 의한 것이 아닌 것 곧 이단으로 그것을 척결하는 일에 고심하셨음을 알 수 있다.
신약 성경에는 이단의 개념을 포괄적으로 함축하는 귀절이 있다.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 두번 훈계한 후 멀리하라"(딛3:10),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갈1:7)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화시켜 인간들이 유리하도록 활용하는 것이 다른 복음이며 이단인 것으로 인식된다. 복음이란 그리스도를 통하여 선포한 하나님의 인류 구원 계획서이다. 이것만이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길(요3:16; 14:6)이며 완전한 계시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복음 앞에 다른 복음이 있을 수 없다. 그런데도 교회에는 처음부터 다른 복음을 전하는 다른 영이 들어와서 역사함에 따라 다른 예수를 증거하고 혼란을 획책(고후11:13~14) 하였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성경을 통하여 이들을 조심하라고 교훈하였다. 그들이 말한 다른 복음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① 이단은 성경곡해(聖經曲解)의 논설로 이루어진 기독교 형태이다. 성경곡해의 논설이란 하나님의 말씀인 진리를 거역하고 인간이 사적인 탐심을 인하여 지어낸 말로 그 진리에 어긋난(벧전2:3~4) 이론을 말한다. 그러므로 자동적으로 비성서적(행5:17)이며 반복음적(갈1:7)이다.
② 이단은 전통부정(傳統否定)의 교리로 전통에 역행하는 기독교 형태이다. 전통부정교리란 사도시대부터 내려온 제도와 관행을 변경함으로 교회의 단결을 저해하고 분열을 획책(고전1:11~12; 11:18~19; 벧후2:1등)하는 것을 말한다.
③ 이단은 공해사익(公害私益)의 행위로 남에게는 막대한 손해를 입히면서 자신에게는 한없이 유익을 추구(벧전2:3; 골2:4; 고후2:17; 딤전6:5등)해 나아가는 자들이다. 구약의 이단관과 신약의 이단관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니다. 전적으로 같은 것이다. 구약에 있어서 이단의 주체는 "여호와가 아닌 다른 신을 섬김"이고 신약에 있어서 이단의 주체는 "예수의 것이 아닌 다른 복음을 믿음"이라 했다. 여기 두 주제에 나온 여호와와 예수가 같은 분이며 섬김과 믿음이 같은 말이다. 그러므로 다른 신을 섬긴다는 말과 다른 복음을 믿는다는 말은 결국 같은 뜻이 된다.
3. 신학적 개념
이단의 신학적 개념은 그것들을 심도있게 연구하는 신학자들의 관점에 따라 여러가지 학설들로 나타나는데 정리해 보면, 교부시대에는 사도들과 속사도들이 퇴장한 2세기 초반에서부터 기독교가 로마의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황제로부터 공인을 받은 4세기 초반까지 100여 년간 교부들이 기독교를 지도했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로마의 권위주의, 헬라의 사변주의, 히브리의 율법주의, 동방의 신비주의, 중동의 기복주의 등 잡다한 이단적 요소가 기독교로 몰려 들어 왔던 시대였다. 교부들은 이들이 언급하는 근원들을 많이 남겼다.
익나티우스(Ignatius)는 이단(Hairesis)이란 말을 최초로 사용한 교부급 신학자였다. 그는 자신의 저서를 통하여 이단은 "교회의 단일성을 파괴함으로 기독교와 거리가 멀다고 하였고, 유스티아누스(Justianus)는 이단 편에 선 사람들을 가리켜 ?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자", "신앙심을 벗어난 자", "불경스러운 신성 모독 자"라고 말하였다.
오리게네스(Oligenes), 이레나이누스(Irenainus), 터틀리아누스(Tertrianus)등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릇되게 부르고 전통적인 성경의 올바른 가르침을 그르치는 교리"를 이단이라고 인식하였다. 이처럼 초기 교부들은 외부에 나타난 상황을 보고 이단을 언급하였다. 그러나 후기 교부들은 보다 더 진지하게 내면적인 것을 보고 이단을 언급하고 있다.
히포리투스(Hipolitus)는 "신앙에 어긋난 것"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기독교 이전의 교의까지도 이단이란 용어를 사용하여 평가하였다.
아다나시우스(Athanasius)와 아리우스의 논쟁 때 와서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교리에 어긋나는 악마적인 이론"을 이단이라 인식하고 피나는 논제를 전개하였다. 곧 후기 교부들은 사단의 사주를 받은 인간의 의지로 지어 낸 신학적 이론을 이단이라고 하였다.
가톨릭 교회(Rome Catholic Church)의 이단관은 로마 가톨릭에서는 "교회 내에 있으며 교회의 단일성을 파괴하려는 교의"를 이단이라고 간주한다. 가톨릭에서는 "교회는 하나님의 거룩한 구원의 기관이며 진리의 보고"라는 교회관이 일찍부터 정립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모든 교회의 결정에 의하여 그 진리성의 진위를 판별 받게 되어 있다. 콘스탄티누스(Constantinus) 황제가 교회에 그런 권한을 전폭적으로 부여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의 재판에 의해서 이단과 정통이 판별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데오도시우스(Theodosius) 2세 시대에 이르러서 이단은 중대한 범죄로 정죄 받기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 가톨릭에 있어서 이단은 교회에서 정죄를 받은 교설과 그 집단을 일컫는다.
개신교회(Protestant Church)의 이단관은 로마 가톨릭에서 이단이라고 정죄된 교리로부터 시작되었다.
종교개혁자의 효시인 마틴 루터(Martin Ruther)가 파문을 당함으로 그 이론은 로마 가톨릭에서 완전히 배척 당하였기 때문이다. 루터는 로마 교황으로부터 서품을 받은 신부로서 자신이 소속된 로마 가톨릭에 도전하여 95개 조항을 써서 비텐베르그 교회 정문에 내어 걸음으로서 종교개혁의 불을 붙였다. 그러므로 그의 개혁 이론은 자연히 가톨릭의 이단성을 지적해 나가며 기독교의 정통성을 찾으려고 노력해 나간 흔적이 보인다. 이런 의미에서 살펴볼 때 루터의 이단관은 곧 자신이 세운 정통교리의 역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루터는 첫째 비 신앙적인 교리와 교회이며, 둘째 반 은총적인 교리와 교회이며, 셋째 비 그리스도적인 교리와 교회이며, 넷째 비 성경적인 교리와 교회를 이단시 한 것으로 보인다.
칼빈(John Calvin)의 이단관은 어떠한가? 그는 자신이 쓴 주석들에서 비교적 소상히 이단에 대한 소신을 피력하였다.
"이단이라는 명칭에 관한한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항상 악하고 높은 가증한 것들"(벧후2:3의 주석)이라고 그 주체를 설명하고 "무엇이 이단을 생산하는가? 그것은 야심이다. 야심은 낮고 천한 감각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의 최고 주요 위치에 자리잡고 있는 감정이다"(갈5:20의 주석)라고 말하면서 그 근본을 밝혔고 "거짓 사도들의 교훈인 다른 복음은 혼란과 파괴의 원인"이라(행24:14, 갈1:7)고 정의를 내렸다. 인본주의 교설로서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침해하는 제 교설과 그 추종세력을 이단이라고 본 것이다.
이상과 같이 이단의 개념을 성경적인 의미에 기초를 두고 일반적 의미와 신학적 제 의미를 종합하여 정의를 내려보면, 이단이란 성경을 곡해하여 인간이 자기 주관대로 해석(벧후3:16)하고 말한 것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시켜 하나님이 세운 교회를 파괴코자 하는 다른 복음(갈1:7)을 전하는 일이며, 영원한 절대적 온전한 진리(딤후3:16~17)인 기독교 경전 신?구약 66권을 가감(계22:18~19)시켜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정하는 주장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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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영일 날짜 : 2004/05/16 조회 : 255
조용기 목사님의 구원론의 배경에 대한 나의 상념.
----기독교만이 구원이 있다는 것은 유아독존적인 생각이다.---
사실 조용기 목사님같은 분이 그런소리를 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또 고신의 흐름을 볼때 그러한 발언은 명백히 이단적인 언사다.
그러나 우리가 맹목적으로 조용기 목사님의 이러한 발언에 대해 비판하기 전에 그분이 그러한 발언을 한 배경에 대해 연구해 보는 것은 우리에게 좋은 것을 지시해준다.
본시 신학을 할때 이러한 신학의 두종류의 파로서 나누어진다. 하나는 말씀중심의 입장을 취하는 자들이다. 이들은 말씀의 문자주의에 얽메이는 부류들로서 철저히 이성중심주의의 신학하는 사람들이다. 아마 어쩌면 우리 고신이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리라.
둘째는 실제적인 하나님과의 만남위주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만남이란 말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겟지만 어땠든 영적인 경험을 즉 신비주의적인 경험 예를 들면, 방언, 신유,입신,예언등을 경험하면서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이들중에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 말씀중심의 삶을 산다고 하는 사람들은 철저한 이성에 얽메임으로서 감성으로서 다가가야할 하나님에 대한 기쁨을 맛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반면에 신비주의적인 계통의 사람들은 그릇된길로 빠지기 쉽다.
난 요즘 기도원에 다니고 있다. 이유는 내 어머니께서 말기암으로 죽을 판국이어서 원자력 병원에서 손들었는데 기도원에서 세시간동안 성령치유받고 완치 되었기 때문이다. 난 너무나 기쁘다. 그래서 그곳에서 설교하신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을기회가 있다. 그런데 나는 통합측 목사님들의 설교를 듣고는 가끔가다 저런 소리를 했다간 고신에선 당장에 이단이 되겄군 하는 실소를 머금지 못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분들을 이단이라고 말하고 싶지 않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있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런데 신비주의적인 계통 이하 영성위주의 신학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자. 이런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 공통점은 뭣인가 하면
첫째로 관용적이다. 포용적이다. 즉 모든 것을 수용하는 자세를 취한다. 그러다 보니 이러한 사람들은 함부로 남을 이단이라고 정죄하려 하지 않는다. 확실히 이것은 고신의 목사님들이 본받아야할 자세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의 배경에는 이러한 포용적인 자세를 취하다 보니 이것이 확장되었을때 단순히 기독교적인 부분에서만 아니라 타종교에 대해서까지 포용적이 된다는 것이다. 본시 포용적이라고 하는것은 상대를 인정하는데서부터 출발한다.
그런맥락에서 볼때 우리는 먼저 조용기 목사님같은분들에게는 불교에 대해 포용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영지주의자들의 특성이다. 많은 경우 성경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영지주의자들의 세게에서 흐르는 보편적인 사상은 칠층천의 사상이다. 이 칠층천이란 천국이 일곱단계로 나뉘어져 잇는데 가장 높은 곳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다음단계에 극락이 있는데 이극락에 불교신자들이 들어간다는 사상이다. 이에 대해 어떤 이들은 법화경에(난 법화경 모름) 하늘에서 꽃비가 내린다고 하는데 이 꽃비는 바로 천국에서 내린것이다 라고주장하기도 한다.
이러한 개념들은 어쩌면 단테의 신곡에서 영향을 받은 사상인지도 모르지만 실제로 성경을 말씀을 위주로 공부하지 않고 영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의 공통적인 현상이다. 우리는 김계화 원장이 무당하고 친구라는 사실을안다. 한경직 목사님의 절친한 친구가 불교의 스님이었다는 사실도 안다. 김진홍 목사님은 원효 사상에 관여한사람이다. 조용기 목사님은 영성위주의 신학을 가지신 분이다. 어쩌면 그러한 분이 이러한 사상을 갖고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럼 왜 이러한 영성위주의 신학하는 분들이 타종교와 친근감을 갖게 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중요한 포인트가 있다. 본시 하나님의 창조원리는 생명체에 있다 그리고 이 생명체의 기운은 우리가 존재하는 대지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대지를 살피면 곧 자연계를 살피면 우리는 거기에서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력을 발견할수 있다. 그리고 실지로영적으로 어느정도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불교도든 기독교도든 혹은 무당이든지 간에 이러한 생명력을 느끼게 된다. 나는 많은 위대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결국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았다. 왜 그들은 자여으로 돌아가려는 것일가? 자연속에 생명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연속에 존재하는 생명력을 느끼는 사람들은 그것을 느끼는 사람들끼리 갖는 보편감각을 갖게 된다. 곧 친근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면에서 볼때 나는 조용기 목사님이 불교에 대해 친근감을 갖게 되엇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럴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언젠가 어떤 사람이나에게 말하기를 하나님이 만드신자연을 보면 하나님을 알듯이 사람의 말행동을 보면 그 사람의 생각을 알수 있읍니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만일 자연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모든 것을 알수 있었다면 구태여 율법을 주시지 않으셨으리라.
문자적인 말씀에 얽메어 하나님과 관계를 소홀히 하고 바리새적으로 흘러가는 사람들도 문제지만 그 말씀보다도 경험되는 현상속에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하는 것은 더욱더 문제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은 결코 온전한 인식을 가져온다고 장담할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든 어쨌든 나는 내 어머니가 암말기에서 고침받았다는 것으로 인하여 기쁘다. 주여감사합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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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도 착각이요 믿음도 착각을 할 수가 있다.
성경에 어디를 보아도 포용할 것이 있고 철저히 배제해랴 할 것들이 있다.
바울이 헬라인에게는 헬라인 처럼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바울이 진리 앞에서는 어떤 것이라도 타협하거나 용납한 일이 없다.
우리가 사랑이 많고 크고 깊고 높아도 하나님과 같을 수는 없는 법
물론 불교 뿐만 아니라 천주교도 그들은 전도나 구원의 대상일 뿐
그들의 진리관을 놓고 옳고 그러니 하면서 대화의 장을 열어야 할 상대는
원초적으로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같이 할 수가 있는가 말이다.
그래서 기독교가 종교라고 이름할 때에는 반드시 절대종교라고 한다.
왜 절대 종교인가?
절대자는 오직 하나님 한분 뿐이시기 때문이다.
그 외에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이끌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상에 제일 유치하고 추잡한 존재들이 환경에 따라 변하는 카멜레온 같은 자들이다. 결코 일반 성도가 세미나를 했어도 그런 추잡한 행동은 아니하였을 것이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를 아는가?
원형 경기장에서 굶주린 사자들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했더 무리들을 기억하는가?
포용력이라고?!!!!!!!!!!
그것은 비굴한 자들에게 붙여지는 사치일 뿐이다.
지금 한국교회를 더럽히고 기복적인 신앙을 심겨준 자들이 영성주의 자들이다.
그리고 KNCC나 WCC라는 단체들의 목적이 하나님 보다 더 포용력이 있고 사랑이 많은 단체들이다.
형제님께서는 어머님께서는 병원이 고치지 못하는 병을 기도로 고치셨으니 이제는 신학을 집어치우시고 고신도 별볼일 없는 존재요 용문산 주의로 돌아가시는 것이 은혜일 것입니다.
병을 고치고 않고치고가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은 조금 빠르고 늦게 흙으로 돌아 갈 뿐 우리의 본향은 이 땅이 아니질 않습니까?
병고침을 준 목사는 진짜이고 자신이 몸 담은 고신 목사들은 가짜이십니다.
그러니 하렐루야 기도원의 김계화가 형제님의 목사이면 만족할 것이외다.
김계화가 구원까지 시켜드릴터이니 말입니다.
조용기는 이미 목사의 탈을 쓴 자 일뿐 그는 목사라는 말을 붙여서는 안될
자임을 아시고 삼가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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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영일 날짜 : 2004/05/16 조회 : 239
허 저의 말을 오해하셨군요.
나는 영성위주의 신학이 옳다고 말한것이 아니외다 다만 내 어머니가 나은 것이 기쁘다는 것일뿐........
그러나 그렇다고 문자적 율법주의에 얽메인것도 옳은 것도 아니라는 말이외다.
우리가 신학교 다닐때 흔히 말했듯이 머리는 고신 가슴은 순복음이라는 말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성뿐만이 아니요 감성도 더불어 있어야 한다는 말이외다.
그리고 참고로 말하건데 울어머니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고친것 아니우. 오해마시우........
정통 장로교기도원에서 고친것이라우. 그리고 내가 기도원에 간다는 말은 그곳에 빠졌다는 말이아니라 아직 어머니가 그곳에 계시기때문에 하루에 한번씩 드나들고 그러다보니 예배도 참석하게 되고 한다는 말이라우.
그리고 참고로 한마디 더하자면 차거운 이성주의의 신학을 가졌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거우.
이씨조선 오백년에 왜 당파 싸움만 했거우 진리는 있다고 하는데 용서와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니겠읍니까?
왜 예수믿는 사람들이 날마다 싸웁니까? 사랑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까?
차거운 진리를 주장하지만 사랑을 잃어버리면 주님의 책망을 면치 못할것이라우. 그리고 사랑은 진실로 사람을 향한 간절함이랍니다.
난 조용기 목사님이 잘했다고 한것이 아니라오. 잘못했지 그런소리는 할소리도 아니고 해서도 안되지 아니 애초에 동국대에 가지말았어야 했다오. 그러니 나에 대해 오해는 마십시오.
ㅋㅋㅋㅋㅋ
어쨌든 나는 내 어머니가 죽음의 위기에서 살아나게 되어서 넘 기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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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보성 날짜 : 2004/05/18 조회 : 241
말씀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물론 조용기 목사의 사상과 언행에 대해 저 역시도 마음 속에 분을 느끼는 바
이지만, 김영일 님의 글에 대한 박양 님의 글은 표현에 있어서 너무 지나치신
것 같습니다.
물론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에 자기 생각대로 충분히 표현할 수 있지만, 이
공간의 글들은 김영일 님과 모든 읽는 이들에게 표현 이상의 "불쾌감"을 느끼
게 할 수 있다는걸 기억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기분은 오늘 이 글을 읽는 순간만이 아니라는 것도 생각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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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종수 날짜 : 2004/05/22 조회 : 48
야훼는 왜 가나안 우상과 대화를 안 하셨나?
야훼는 왜 가나안 우상과 대화를 안 하셨나?
작금의 조용기 다원화주의적 발언에 대한 변명을 아래와 같이 들을 수 있는데,
[ 여의도순복음교회 국제신학연구원의 국신원은 "현재 한국 사회는 이념, 계층, 노사, 지역, 세대, 남북 간의 갈등이 심화된 가운데, 종교 간의 대립과 갈등마저 연출된다면 이야말로 걷잡을 수 없이 심각한 사회문제가 될 것"이라고 지적하고,
"이러한 때 한국의 주된 종교인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이해하고 대화하며 공존하는 상생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갈등구조를 개선하고 위대한 국가번영을 이루어 낼 수 있는 초석이 마련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참고 ; http://biblenara.com/ - 크리스챤뉴스 ]
우리의 질문은 간단하다.
1. 우선, 구약의 야훼 하나님은 왜 이집트와 가나안의 여러 종교들과 대화하시지 않았냐 하는 것을 답할 수 있으면 더 이상 의문이 있겠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시고, 지혜로우시되 사랑이 많으신데, 오늘의 대화의 신학(문화신학, 폴 틸리히)을 왜 가르치시지 않았을까?
2. 기독교가 사회에 증거되기 위한 현대식의 접근방편을 왜 하나님은 좀더 소상하게 교시하지 않으셨는가? 겨우 바울이 말한 한 두 구절로 다원화주의적 발언을 변명하려 하지만 우리는 바울이 말하고 있는 당시의 배경과 상황이 다르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고 본다(고전9:20-24, *22).
유독무이한 창조주 신과 중보자도 한 분 뿐이신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은 보편적인 종교인 가운데 한 무리가 아니다. 고전 8:5-6 "비록 하늘에나 땅에나 신이라 칭하는 자가 있어 많은 신과 많은 주가 있으나 그러나 우리에게는 한 하나님 곧 아버지가 계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났고 우리도 그를 위하며 또한 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시니 만물이 그로 말미암고 우리도 그로 말미암았느니라"(요 1:18,골 1:15,히 10:20).
정교분리의 정치적 입장이 중세 개혁가들의 교회의 입장 표명이었고, 교회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사회와 우주를 설명하고 접근하는 것이지 교회가 사회 속에서 함께 공유할 가치관이나 아무런 영적 정서적 어려움 없이(진리의 부당성 문제) 그들과 연합운동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복음이 사회를 만날 때, 복음이 복음으로서의 정체성을 보유하고 또한 선포적(결국 전해져야만 한다는) 성질의 당위성을 품고 있다면 한 마디의 말에도 그들을 이해한답시고 기독교 진리의 절대성을 상대적으로 분명하게 증언도 못한다면 그것은 증거자로서의 근본을 상실한 것이다. 성도는 본시 인생 사명이 증인으로서의 삶을 지닌 자가 아닌가?
누가 건전하고 명성 높은 지 아비의 이름을 아무렇게나 이해하려는 자에게 분노하지 않겠는가!
특히, 하나님이 주신 생명(生命)을 부정하고 해탈(解脫)하려는 석가를 따라 삶을 이해할 뿐 아니라 지상에 엄연히 설법(說法)을 하고 활동(活動)을 하는 자(者)에게 감히 누가 하나님보다 은혜로울 수 있기에 그런 식으로 불교에도 나름대로 진리가 있니 어쩌니 운운하는 게 옳은가?
우리가 빌라도의 질문을 기억한다. 진리가 무엇이냐?(티 에스틴 아레데이아, What is truth?) 여기에 관사가 없이 기록되었다. 즉 빌라도가 그냥 흔히 말하는 대로 소위, "진리가 뭔데?" 뭐 이 정도이다. 세상은 절대 진리, (그) 진리(요14:6)가 없고 관심의 동기도 없다. 우리가 받은 바 이 절대 진리를 가진 자로서 과연 창조주도 없고, 절대 진리도 없는 이에게 그들의 인식 안에서 하나님을 대변할 자로 말을 그렇게 흘릴 수 있냐는 것이다.
개혁주의는 왜 개혁주의인가!
복음을 아는 것과 복음을 전수하려는 사명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난 바,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대한 최상의 성실성을 가지고 목숨 바쳐 절대 진리를 증언하고, 굴절되는 인생심사를 직시하면서 부단히 본래대로 돌아가고자 하는 진리운동이요 성경 귀속 운동이다.
한신대에서 미국 출신 중을 불러 종교 다원화를 말하고 난리를 치더니 이제 불교대학원에서 이상한 목사를 가지고 진리의 직언을 휘어보려는 음흉한 석가 귀신의 역사가 일어나고 있다. 기독교가 사회의 문화의 한 패턴인가?
복음의 활동은 참여 정부의 개념하고 다른데....
철학과 신학의 만남을 시도한 신학의 계열은
토마스 아퀴나스를 시작으로
하비 콕스의 [세속도시]와 함께 대화(문화)의 신학 폴틸리히,
남미의(구티에레츠) 해방신학 그리고 한국의 민중신학(서남동,안병무)을 이어
많은 복음주의 신학으로 전이되고 있음을 본다.
고신에 영향력을 준 크레샴 메이첸과 K.스킬드에 대해 다시 공부가 필요함을 느낀다.
http://nulserom.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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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종수 날짜 : 2004/05/25 조회 : 116
예수가 목적이냐, 수단이냐?
예수가 목적이냐, 수단이냐?
- 조용기가 이단이 아니면 한국에는 이단이 없다
중세기 종교개혁의 내용은 기독교 사상을 교황 정치의 수단으로 삼았기에
진리의 본질을 되돌려 하나님의 주권으로 회복시키는 작업이었다.
신학의 변천은 논리주의와 감성주의 간의 교차를 거듭하면서
오늘의 한국 기독교 사상에 과연 개혁주의가 활동하는가 하는 의문을 갖는다.
세상이, 특히 한국에 하도 진짜가 가짜같고, 가짜가 진짜같아서
무엇이 옳고 틀린 것인지 모호해져 버린 것이 많다.
지상행복주의적 웰빙식 목회로 어차피 정착해가니까
누가 감히(?) 조용기를 이단이라, 건전치 못하다 말하는가!
조용기가 부산에 처음 집회 왔을 때, 부산에 750교회에 설문지를 보내고
조용기 이단이란 내용에 수많은 전화 중에 찬반이 거의 반반이었다.
그리고 집회 당일에 반박의 전단지를 돌리다 어깨(?)들에게 잡혀
화장실에 끌려가 면상을 얻어맞았다.
그 때 한 덩치 큰 사람이 멱살을 잡고 왈,"나도 당신 뜻은 이해하겠는데,
이번에 좀 빠져줘!.."였다.
이단 아닌 사람을 이단이라 한다고 치자. 그렇다고 보디가드가 와서 사람을
패서 상해를 입히는 일은 대개 거친 이단들의 행패가 아니던가! 입이 터지고
피가 나면서 무서운 감정도 있었지만, 참 무서운 단체구나, 했다.
통합측에서는 교단적으로 이단으로 결정보았고, 많은 목사들이 조용기가
불건전하다고 혹은 이단이라고 생각던 시절이 엇그제인데...
그 사람은 달라진게 없어보이는데,
마치 교인을 바꾸려다 목사만 바뀌더라는 식으로 조용기는 아무 문제 없고
도리어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한 자들도 교파 상관없이 뒤쫓고 있다.
그에게 내세주의적 기독교 철학이 강조되던가, 그에게 말씀의 회복 운동이 있던가,
그에게는 일년 내내 들어봐도 잘먹고 잘사는 일 밖에 없다.
한번은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이 우리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친정이 부산).
그날 설교가 화나신 예수님으로 성전청결운동에 대한 내용이었다.
예배를 필한 후 그 성도가 대뜸, 우리 조용기목사님은 화 내시지 않는데요...
이상하다, 왜 예수님이 화를 내시죠? ㅎㅎㅎ
참으로 어처구니 없었다. 예수는 안 보이고 조용기가 보인다.
기독교 사상이 삶의 문명적 수단인가, 아니면 삶의 목표인가를 정립하는 것은
목회관에 드러나고, 교단 색채를 나타내보이고, 개인의 정체성까지 대변한다.
목회의 설교에서 저절로 표현하게 되어 있다.
바울이 우상의 도시에서 분을 느끼는 그 영적 감성이 그립다.
개혁주의 신학을 기초한 목회와 성도들의 삶의 감각에
예수는 목적이지 수단이 아니라고 하는 분명한 태도가
항상 나타나야 한다고 본다.
성도가 날마다 성화되자는 뜻에서 개혁을 모토로 늘 새롭자고....
늘새롬의 홈페이지 http://nulserom.w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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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수님의 말씀대로 본인도 조용기가 이단이 아니면 한국교회에 이단이 없다는 글자 한자도 틀리지 않는 말을 하였지요 사실대로 이단이라는 것이 어느 교단이 인정한다고 이단이 아니며 또 어느 교단이 이단을 풀어 주었다고 이단이 풀리는 것이 아닌데 조용기가 이단이 아니라 이번 사건에서는 보수교단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하고 있으니 도대체 무엇이 보수고 무엇이 자유주의인지도 모르는 자들이 그런 기사를 함부로 쓰고 있으니 울분이 넘칩니다.
그러면 왜 진정한 보수교단들이 입을 다물고 있는가? 그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저들 또한 조용기의 뒤를 밟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KNCC나 WCC나 한기총 같은 단체들을 기독교라는 이름을 가지고 무슨 짓들을 하고 있는지 참으로 구역질이 나는 존재들이다.
저들이 바로 예수를 팔아 먹은 가롯유다며 기독교를 종교 나부랭이로 만든 종교 장사꾼이 아니던가요!
우리는 하나님을 다른 말로 절대자라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런대도 다른 종교를 기독교와 같이 운운하는 발람선지 보다 악안 것들이 아닌가요
우리 목사는 적어도 바울이 아덴에서 설교를 하듯 떳떳하게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 외에는 없음을 어디던지 바로 외쳐야 합니다.
왜 우리가 사도신조를 합니까 말입니다.
요즈음 기독교tv를 통해서 한참 코미디 설교로 소위 뜨고 있는 목사들이 거의 귀신론의 고수 김기동의 제자들이라니 그 대표적인 인물이 대전에 있는 침례교 장경동 목사 연세중앙교회 윤석전 목사이지요
이 때가 바로 홍수에 기갈이는 말이 실감이 나는 때 입니다.
이러할 때 고신이며 고려는 어디에서 깊은 잠에 빠지고 계십니까?
참 진리가 무엇인지를 이제는 한수 가르쳐야 하실 때가 아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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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강종수 날짜 : 2004/05/27 조회 : 45
저는 잘 보이지도 않는 티끌입니다
평안을 빕니다.
이 부족한 사람은 학문에나 인성에 많이 보잘것 없고 약해서
누구의 인격적인 면을 시비하기에는 부적격자입니다만,
박양님은 옳고 그름보다 주장의 언어에 필요 이상의 격한 어감을 지닌
형용이 많아서 쫌 싫습니다.
그러나 리플이 개인적으로 종용히 물으심에 답합니다.
만약,
제가 칼을 바로 갈았다면, - 이런 식은 대체로 시시하고 매우 부적합하지만...
이런 시기에 무슨 일을 벌리고 싶지만,
저야 거저 고신 교단에서 전혀 보이지도 않는 아주 작은 티끌이기에
아무리 고함 질러도 별수 없는 존재입니다.
말하자면, 아쉬워서 생각하기는,...
기왕에 힘겨운 이런 시기에,
만약 내가 어느 위치에 서 있다면 이러고 저러고 싶다는 생각도 많습니다.
가령, 고신 대학(원) 입학 조건부터 근본적으로 정비를 한다든가,
고신인의 특수성을 지극히 헌법적 성질을 지닌 차원에서 엄격하게 제한하고
선별하는 작업을 하겠습니다.
타 교단이나 사회가 뭐라든 [저기 고신대학(원)이라는 데는 참 희한하다]고
하드라도,...
주의 뜻을 다시 묻고 실행에 한번 옮기고도 싶습니다.
그게 혼자서 되는 일은 아니겠지요...
이래 저래 방법적인 정책이야 필요하겠지만,
전능하신 하나님, 순교적 신앙 곧 말씀의 권위 안에서
오직 성경, 오직 예수, 그 단순함으로의 경건은 어디를 가버리고...
그리고...
현금의 한국교회사회가 건덕스럽지 못한 유형의 범죄와 함께
마치 너무 많이 두들겨 맞아서 어디가 아픈지도 모를 지경의
강도 만난 사람의 정신마냥,
어느 것부터 말해야 하는지를 잃어버린 듯 멍청....한 것을 느낍니다.
사실아닙니까? 하지만 별로 대안이 없군요. 제가 보기엔...
개혁주의 신학이 없는 것도 아니고,
아직도 건재한 신학자와 정통교회관이 없는 것도 아닌데,
제가 알기로는, 빠르게는 70년대 말기부터 정통은 방 안에서만
튀는 공처럼 통통통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WCC 는 이미 많은 보수 교단에서 탈퇴를 하고 격리하고 있지만,
그 후속으로 생긴 각양 단체는 그냥 긍정적인 측면에서 지속되고 있는 것 같고
제대로 된 단체가 있습디까?
더브류씨씨만 시시한게 아니고, 무슨 무슨 CC ... 다 시시합디다.
교회 단체가 부처님(?) 석탄일을 공적으로 축하하는 세상입니다.
더 이상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합니까?..
이것들을 누가 목소리 질러서 해체라도 하겠습니까?
그냥 그대로 가는거지요.
토마스를 우리에게 보낸 기념 교회당에는 비 오면 물이 새어 나와도
예배당 고칠 사람 하나 없고 장로님 부부 둘이서 지키고 있습니다.
유럽의 수많은 교회(약 2천 교회)가 건물이 팔려나갔고,
고고장(넓어서 춤추기 좋잖아요),카페, 술집,
혹은 여러 불교와 잡종교의 건물로 팔렸습니다.
불과 140(-120)년 전에 흥황하던 교회라 하는데,...
우리 세대가 눈을 감고 아버지께 가고 나면,
지금 십대가 자라서 한국교회를 지켜야 할 것인데,
글쎄요. 불안하지요? 예, 암담합니다.
은혜로 마음을 굳게 하고 ...
평안을 빕니다.
http://nulserom.w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