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건회와 예배, 성찬...
글쓴이 : 이성구 날짜 : 2004/06/23 조회 : 302
토론
인터넷이 정보의 매개체로 등장하면서
자연스럽게 토론이 활성화되고 있다.
누구나 글을 써서 올릴 수 있는 곳이 많아졌고
신문기사에 대한 반론을 마음대로 펼칠 수 있다.
익명성을 이용한 폐해도 적지 않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속에 있는 생각을 드러내면서
일방적인 정보에 속지 않을만큼 지혜로워져 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런데
토론이란 본질적으로
어떤 주제에 관하여 자신의 의견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남의 의견을 듣고 새롭게 생각할 여유를 가져야만
진행이 가능한 작업임을 인식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토론은 결국 감정싸움으로 끝날 가능성이 매우 농후하고
토론을 하지 않으만 못한 경우도 생겨난다.
오래동안 익혀오면서 확신을 가지게 된 자기의 생각을
설득력 있게 펼쳐 생각이 다른 사람을 설복하려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미쳐 생각해 보지 못한 점을 발견하고
자신의 생각을 새롭게 교정하며 가다듬는 것은
전혀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정당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는 토론이 제대로 되지 않는다.
우선 질문을 제기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답을 이미 드러내고 있다.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지 않으면
아예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자세를 보인다.
상대로 하여금 아예 토론에 나설 생각을 막아버린다.
그러다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토론에 응하지 않으면
비겁하다하고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틀리다고 몰아부친다.
최근 최재호 기자가 학교 경건회 문제를 들고
원장의 대답을 요구하였다.
자기가 원하는 대답을 달라는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였다.
그러면서 자신의 요구에 빨리 응하지 않는다고
책임회피라느니
교단 모든 일에 대한 역사적 책임을 져야하느니 하며
사태를 확대시켜간다.
그의 관심과 충정을 안다.
최근 교단 상황에 대한 그의 답답함을 헤아릴 수 있다.
최기자는 고려학원이 부도가 났을 때
교수회가 발표한 문건과 그 문건 때문에 교수들이 받고 있는
교단의 시선을 알고 있는지 알 수 없다.
대화는 서로 들을 준비가 되어야 하며
토론은 그 때 가치를 발한다.
다시 돌아가보자.
경건회가 예배냐와 같은 문제가
왜 최기자의 관심이어야 하며
그것을 왜 최기자에게 대답해야 하는가.
마치 정확한 대답을 듣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말의 꼬투리를 잡아 무슨 문제를 야기시키려 하는
저의가 있는 같은 느낌이 든다.
신대원 원장이 학교 바깥의 사람들에게
일일히 대답할 위치에 있지 않다.
신대원장의 말은
곧 신대원 전체의 공식입장이 될 수도 있는 것이어서
작은 일이라도 쉽게 말해서는 안된다.
다시 또 돌아가보자.
예배냐 경건회냐 하는 질문.
우습지 않은가?
신학이 그런 데 사용되는 것인가?
그게 무슨 큰 문제인가?
예배라 하면 어떻고 경건회라고 하면 어떻다는 것인가?
보편적인 지역교회와 다른 공동체들, 예컨데 중세 군주의 대저택, 궁정, 학교 군대 심지어 교도소 등 특수한 공동체의 예배와 예배처소를 가리켜
채플이라고 하였고
그곳에서 예배인도하고 설교하는 목사를 chaplain이라고 불렀다.
chaplain을 사전에서 찾으면 "예배당 목사 (군대 학교 궁정 등)"로 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채플린도 목사이고 그가 인도하는 집회도 예배이고
그가 사역하는 곳도 예배당이다.
그걸 우리말로 옮기면서 일반 학교에서는 채플이라 그대로 옮겼고
우리 신학교에서는 경건회라고 했지 않았나 싶다.
그러니까 명칭은 단지 그 예배 공동체의 특수성을 나타낸 것일 뿐이다.
왜 그렇게 내용보다, 우리가 행하는 실제적인 일보다
표현상 제약이 많을 수밖에 없는 용어에 그렇게 신경을 쓰는가?
롬12:2절은 무엇을 예배라고 번역하고 있는가?
몸을 산제사로 드리는 것이 영적 예배에 해당된다고 하지 않는가?
公예배가 있으면 私예배도 있다는 것인가?
그래서 공예배는 정성을 다해야 하고
사예배는 드리면 안되는 것이든지 별 가치가 없기라도 하다는 것인가?
"구역예배"는 사예배인가, 공예배인가?
"가정예배"는 사예배인가, 공예배인가?
심방가서 드리는 예배는 무슨 예배인가? 아니면 그건 예배가 아닌가?
북한의 가정교회가 틈을 내어 드리는 예배와
봉수교회의 동원된 군중이 주일에 드리는 예배 중 어느 것이 공예배일까?
노회나 총회와 같이 일시적이고 특수한 공동체가 월요일이나 금요일에 드리는
개회, 폐회예배는 공예배인가, 사예배인가?
그게 공예배면 그건 목사와 장로들과 같은 중요한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인가?
청년회, SFC, 전도회 등과 같은 특수한 연령이나 성별에 따라 모인 사람들이
월례회로 모여 드리는 예배는 공인가, 사인가? 아니면 예배가 아니고
경건회라 불러야 하는가?
아니, 그렇게 나누어 도대체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신학은 우리가 믿는 바를 분명하게 하고
신앙의 내용을 바르게 알도록 돕는 작업이다.
신학으로 남을 정죄하고,
신학으로 하나님께 나아감을 머뭇거리게 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관심을 좀 더 생산적이고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부분으로 돌릴 수는 없을까?
하나님이 무엇을 어떻게 부르며 어떤 절차를 따라 행하느냐에 그렇게 관심을 가지실까?
성찬은 정말 소위 "주일 공예배"시에 치리권이 있는
당회가 있는 교회에서만 행하여야 할까?
노회와 총회가 평일에 성찬식을 하는 것은 그 회의가 치리권을 가졌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과연 정당할까?
모든 조직신학책들이 성찬이 기도와 함께 은혜의 방편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은혜를 받기 위하여 기도는 언제든지 어디서든지 행하는 것이 좋으나
다른 은혜의 방변인 성찬은 정한 날 정한 시간에만 행해야 하는가?
성경 어디에 그런 규정이 있는가?
성찬의 근원인 유월절은 각 가정에서 행하여지고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일까?
규정과 절차에 예민한 까다로운 바리새인들의 모습인가?
일상의 삶조차 시원찮은, 종교적 규율을 지키는 것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리며
손을 내리고 소리없이 흐느끼는 세리의 기도인가?
토론의 결론을
하나님께 관심을 돌리는 것에서 찾도록 해 보자.
자기 생각, 기호, 성격, 자기가 받은 전통, 해석이 아니라
누구든지, 정말 신학적 지식이 일천한 사람도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는 일이 중심이 되도록
방향을 분명히 하는 토론문화를 정착시켜 보았으면 좋겠다.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
한국교회는
너무 똑똑하고 잘나고 말잘하고 판단력 분명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많아
주님이 보이지 않고 설자리가 없어지고 있다.
점점 심해지고 있다.
주님
오셔서 좌정하시고
어디서나 언제든지 순서없이 때로 무례하게라도 드리는
우리의 경배를 받으시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