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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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답변


글쓴이 : 윤석준 날짜 : 2004/05/17 조회 : 206





의견개진에 감사드립니다..또한 어떤 내용의 글이든 자신이 믿고 있는 바가 한 순간에 변화될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므로, 장동관님의 말씀에도 수긍합니다. 더우기 동관님께서 교회의 개혁을 원하시는 분이시고, 주장들 중에는 더러 옳은 내용이 있기 때문에 저는 그에 관하여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하지만, 몇가지만 말씀을 드리는 것으로 두번째 답변을 하려 합니다.
우리가 교회를 개혁하든 무얼 하든, 그것이 개혁이라는 의도가 선행되고 말씀이 그것을 추종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현실이 성경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을 때 개혁하는 것입니다.
동관님의 글에서는 개혁에 대한 열망은 보이는데, 잘못된 현실에 대한 성경적, 역사적 연구의 치밀함이 부족해 보입니다. 이런 부분에 대해 좀 더 많은 연구와 성찰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역사가 때로는 잘못 가기도 하지만 아무렇게나 흘러온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떤 관습이나 역사, 혹은 전통이 형성되어 있을 때 그것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현재 상황에 대한 충분한 과거의 역사적 배경을 잘 알아야만 합니다. 쉬이 말하자면 중세시대의 로만 캐톨릭 교회가 심하게 왜곡되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것 또한 그 나름대로의 변명의 역사를 갖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아주 우습게 보이는 마리아 숭배조차 대단히 심각한 신학적 논쟁이 있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비난하기 위해서는 확실한 그 역사의 배경을 알고, 성경에 비추어 무엇이 그릇되었는가를 판단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이 단지 "내 생각과 다르다" 라고만 주장한다면 그 사람은 영지주의자들처럼, 이전 시대에 단 한사람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없었고 나만 옳다...고 주장하는 꼴이 되어 버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현실에 대해 비판할 때 그 현실이 왜 그런 꼴을 갖게 되었는가에 대해 역사적/학문적 이유를 알고, 그에 대한 대안으로서 성경의 답을 알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이말을 지금 문제에 적용시키자면 이런 뜻입니다.

1. 만약 목사직만 설교할 수 있다는 주장이 틀렸다면, 동관님께서는 "왜 그럼 지금 대부분의 교회들이 "목사만 설교할 수 있는 것처럼" 형성되었는지 그 이유를 알고, 그에 대한 성경적 비판을 가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 그게 없이 그냥 "내가 읽은 몇 몇 성경본문들에 의하면 다른 사람들도 할 수 있다" 라고 해버린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아집 이상 아닙니다. 제가 보여드린 것처럼 목사만 설교해야 한다는 진영의 사람들도 책을 몇권 쓸 분량의 근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냥 몇 마디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아닌데...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만약 정당하다면 동관님께서는 제가 제기한 성경본문의 주해에 대한 주해적 대응을 하셨어야 마땅합니다. 하지만 전혀 그런 글은 없이 그냥 이번에도 지난번과 똑같은 주장을 하고 계십니다. 그럼 도대체 제가 열페이지 가까이 쓴 글은 뭐가 되는 것입니까?

2. 두번째로 만약 예배에 설교가 없어도 된다고 하는 주장을 하시려면, 왜 지금의 예배가 설교 중심으로 형성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배경을 살피고, 이 역사가 어떤 성경구절들에 지지를 받아 그렇게 형성이 되었는지를 다 따져본 다음에 그것이 성경적으로 옳은지 그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의 한국교회 사람들마냥 초대교회의 교부들과 수많은 신학자들이 그렇게 이런 일들을 아무렇게나 한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대강 이게 좋겠지...해서 형성된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종교개혁자들 역시 당대 최고의 석학들이었습니다. 아무렇게나 만들어 낸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들이 예배에 설교가 있어야 할지 없어야 할지에 관해서 고민한번 안해보고 설교가 젤 중요하다...그랬다고 말한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역사를 얕잡아 보는 것이요, 기독역사의 수많은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을 하찮게 보는 것 외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무언가를 바로 잡으려면 그것이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먼저 알고, 그에 대한 성경적 맞대응을 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에 관해서도 저는 2세기의 역사적 증언들을 싣고, 교부들의 말을 싣고, 성경의 증거들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동관님은 또 지난번과 똑같은 자신의 주장만을 하실 뿐입니다. 제가 든 것과 같은 차원에서의 다른 근거들을 들어 제 주장을 공박하셔야 합니다.

끝으로 동관님께서 쓰신 글 중 제가 몇 몇 부분을 코멘트 하는 것으로 글을 맺고자 합니다. 정말 좀 더 나은 토론이 되기 위해서는 너무 광범위한 주제가 아닌 세부적인 질문 하나하나로 시작해야 할 것 같으니, 지금의 제 글에서도 동의가 안되신다면 주제를 좀 더 잘게 쪼개서 한번 더 문제제기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관님의 글에 대한 저의 코멘트>

# 인용부분--------------------------------------------------------------
1. 장로와 감독의 직분에 대하여
행 20:27-35에 성령이 양 떼 가운데에서 감독으로 세운 에베소 장로들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성령께서 양 떼 가운데에서 감독으로 세웠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처럼 신학대학(원) 졸업장이 없으면 감독이 될 수 있는 자격조차 주어지지 않는 것은 비성경적입니다.
성경은 신학대학(원) 졸업여부를 감독의 자격으로 요구한 적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지시를 받으면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성령의 뜻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행 20:27-29에 언급된 에베소 장로들이 성령께서 세우신 감독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3년 동안 사도 바울이 말씀으로 양육한 사람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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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먼저 이 부분을 보겠습니다. 동관님께서는 갑자기 주제와 상관없는 이상한 말을 하고 계십니다. 장로와 감독의 직분에 대해 논하는 성경구절이 "신학대학원 졸업장"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갑자기 논지를 이상한 쪽으로 몰아가시는데, 제가 말씀드린 것은 "성경이 직분을 어떻게 정의하고 있으며", "직분자는 어떤 사람들이 세워져야 하는가에 대한 성경의 증언"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신대원 졸업장...같은 것으로 이야기를 몰아가시는 것은 도무지 논지 자체와 아무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게다가 동관님의 주장을 한 번 고려해 보자고 할지라도.....
과연 사도와 장로들, 감독들이 아무런 가이드라인 없이 세워졌나요? 오히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이들이 매우 철저한 신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초대교회사나 교부들에 대한 책 몇권만 뒤져 보셔도 곧바로 아시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감독들에게 대해 "당신 신대원 졸업장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질문이 아닙니까? 당시에 신대원 같은 신학교육기관이 없었기 때문에 행하지 않았던 일을 마치 "신학교육이 전혀 없는 사람도 아무 상관이 없는 것처럼" 오해하면 곤란합니다. 신대원 졸업장이나...목사가 되기 위한 자격요건을 세운 것은 역사가 흘러가면서 워낙 가짜들이 횡행하다보니 최소한의 자격을 갖춘 자를 세우고자 하는 울타리를 친 것에 불과합니다. "적어도 이정도 신학교육은 받은 자라야 목사가 될 수 있다" 라고 한 것입니다. 그 정도도 해내지 않고 함부로 목사가 될 수 있다고 하는 자가 훨씬 더 비성경적이고 교만한 자가 아닌가요? 그리고 동관님 말대로 "성령을 받은 자"는 어떻게 우리가 구별할 수 있겠습니까? 동관님은 그 기준을 갖고 계십니까? 저한테 오늘날의 목사가 다 성령으로 세워졌는지를 물으셨는데 저는 도리어 묻고 싶습니다. 그럼 동관님은 어떤 기준으로 성령을 받았는지 판별해서 목사를 세워야 한다고 보십니까?

하지만 동관님의 글 중에 대단히 좋은 지적 한 가지는 꼭 우리가 받아들여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본 주제의 마지막 부분에 동관님이 이렇게 쓰셨습니다.

"감독은 신학대학(원) 졸업장이 있어야만 감독이 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말씀으로 잘 양육하여 감독의 은사가 있는 사람들을 감독으로 세우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주장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 부분에서 앞부분 즉 "신대원 졸업장이 있어야만" 이라고 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금방 반론을 제기했습니다. 졸업장이 있어야만...이 아니라 그것이 최소한의 울타리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뒷부분의 "교회가....양육하여...세우는..."의 부분은 지극히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개혁교회들과는 달리 한국장로교회는 목사직을 교회와 상관없이 세우고 있습니다. 교회가 목사후보생을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소명이라는 것이 우선되고 교회는 그 사람이 참으로 목사될만한 자인지 아닌지 전혀 모른채 혼자서 노회와 맞닥뜨려 목사가 됩니다. 이 부분에서 동관님이 제기하신 내용은 우리 교회들에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인용부분-------------------------------------------------------
그런데 딛 1:5-9에서 장로와 감독으로 구분하여 언급한 것은 장로는 치리하는 장로를, 감독은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를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됩니다.

딤전 5:17“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두 배로 존경받아야 합니다. 특히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들은 더욱 그러하여야 합니다.”
라는 말씀으로 미루어보아 전자의 장로에 후자의 장로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다스리는 장로들중에 말씀을 전파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에 수고하는 장로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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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이 문제는 제가 충분히 다루었다고 생각합니다. 혹 제가 말씀드린 내용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으시면 [박용규."장로교회사".합동신학대학원출판부]를 참고하십시오.

#인용부분----------------------------------------------------------------
2. 목사 : 선지자적 역할, 장로 : 왕적 역할, 집사 : 제사장 역할로 분류한 것에 대하여
율법이 폐지되고 그리스도의 법 아래에 있는 신약에서는 만인이 왕같은 제사장입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 오실 그리스도에 대한 예표(그림자)입니다.

현재 한국교회에서 집사직분을 남발하는 것은 정말 문제가 많습니다. 오히려 직분을 교회의 계급으로 악용하여 헌금을 많이 뜯어내려고 하는 일부 몰지각한 목사들이 종종 발견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윤석준님께서 왕적/제사장적/선지자적 직분을 교회 속에 그리스도께서 심으신 것이 선지자적 역할로서의 목사로, 장로을 왕적 역할로, 집사를 제사장적 역할로 분류한 논리의 비약으로 보입니다.
성경이 언제 이렇게 분류한 적이 있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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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성경신학의 극히 기초에 관계되는 부분입니다. 제가 이 부분을 쓸 때 설명을 쓰려고 하다가 동관님이 글을 많이 올리시는 분이라 이런 부분은 알고 계실 것이라 생각하여 그냥 전제하고 썼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언제 이렇게 분류한 적이 있었나요?"라고 물으시니 참...답답합니다. 성경신학 기초 도서들을 읽으시면 그 이유를 잘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인용부분----------------------------------------------------
3. 엡 4:11-12에 관하여
“그분이 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예언자로, 어떤 사람은 복음 전도자로, 또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봉사의 일을 하게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교회의 기초였습니다.
교회의 기초였던 사도 직분이 계승되지 않았으므로 사도 직분은 당연히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예언자와 복음 전도자는 사라졌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에도 당연히 하는 것인데, 제도적인 모순으로 이런 직분자들을 세우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현재처럼 신학대학(원) 졸업하지 않으면 자격 자체를 주지 않는 제도에서는 이런 직분자들이 나올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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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이 부분역시 제가 정확하게 단어가 일치하지 않을 뿐 말씀이 완성되기 전 시대의 직분들이라고 예를 들어 말씀드렸습니다(스데반 문제를 다루면서).
거기 나오는 예언자....는 초대교회 당시에는 있었던 "선지자"를 가리킵니다. 초대교회 시대는 구약과 신약이 겹쳐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교회 안에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고린도교회 등에서 "선지자"라는 직분을 발견합니다. 또한 복음 전도자는 제가 말씀드린 "전도자" 입니다. 이 역시 초대교회 때는 있었던 직분입니다. 교회 역사를 살펴보면 사도들의 죽음과 말씀의 완성과 더불어 이 직분들은 모두 사라졌습니다. 2세기부터의 교회를 살펴보면 이런 직분들은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이 직분들은 계시와 관련된 직분이었고, 계시는 신약성경의 완성과 함께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와 선지자와 전도자 같은 직분은 당시에만 존재했고 이후에는 사라졌습니다.
만약 그 직분들이 사라지지 않고 존재했거나 지금 존재해야 한다고(동관님의 말씀처럼) 생각하신다면, 그 직분들이 교회 속에서 있었던 근거를 저에게 가져오십시오. 아니면 그 직분이 지속된다는 성경적 근거를 저에게 주십시오.


#인용부분-------------------------------------------------------
저는 요즘에도 신유의 은사는 초대교회에서 끝났다고 믿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합니다.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그런 은사들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더군요.
그리고 성경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방언도 사라지고 없고 지금 방언이라고 말하는 것은 귀신들이 하는 짓이라고 하더군요.
성경을 자의대로 해석하면 이와 같이 엉뚱한 주장을 하게 됩니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순간 방언을 받았는데 정말 신기한 일이 아닙니까?
그리고 10일 후에 소아마비와 곱사병에 걸려 한 쪽 다리가 엄청나게 짧고 등뼈와 어깨뼈가 휜 30대 중반의 여자가 그 자리에서 치료받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오른쪽 어깨뼈인지 왼쪽 어깨뼈인지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그 부분만 치료되지 않고 나머지 부분은 그 자리에서 정상으로 치료되는 것을 직접 목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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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 : 신유에 대한 문제는 그 자체로 대단히 방대한 양을 다루어야 합니다. 그래서 여기서 쓰는 것보다는 읽을 것을 소개합니다. 제 카페("개혁교회를 사랑하는 사람들"(http://cafe.daum.net/reformed2001))에 오셔서 말씀,설교,신학 게시판의 "방언의 은사"글을 참고하시거나 B.B워필드의 책 "기독교 기적론", 리차드 개핀의 "성령은사론"등을 참고하십시오.

그리고 신유를 주장할 때 성경적 근거가 아닌, 실제로 동관님처럼 치유된 경험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런 근거가 될 수 없습니다. 이런 일들은 기독교 뿐 아니라 다른 이방종교들에서도 일어나는 일이며, 무속적인 신앙일수록 더 강력하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그것들을 증거로 해서 "성령의 사역"을 주장할수는 없습니다.
저도 신앙생활의 시작을 그런 교회에서 했기 때문에 저희 교회에서 암덩이를 뱉어내고 낫는 사람도 보았고, 귀신들린 교회 형이 이상한 소리 하는 것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때는 그게 신기했지만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건 스님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의 사역임을 증명하려면 말씀으로 하셔야 합니다. 저는 기회가 닿는다면 신유나 방언등의 은사가 중지되었음을 증명하는 글을 쓸 채비가 되어 있습니다(여기서는 다 다룰 수 없으니 앞에 소개한 글들을 참조하십시오).


이하 6번 뒤에 나오는 질문들은 제 글을 다 읽어보지 않고 쓰신 것으로 생각됩니다. 앞에 제가 쓴 글과 제가 링크를 걸어논 글에 그에 대한 대답이 있었습니다. 다시 한번 읽어보신 후 질문해 주십시오.

이정도로 글을 맺습니다. 서로 쟁투하는 일로 화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가서 대단히 기쁩니다. 다른 생각을 나누는 것은 성경이 말씀하는 옳은 것을 찾기 위한 목적이어야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는 것이 되어서는 안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면에서 동관님의 글은 상대를 존중하는 상태에서 쓰는 것이어서 마음이 편안합니다. 그냥 싸잡아 욕하고 비난하는 일이 많은 세상이라 이런 일에서 기쁨을 느낍니다.
다른 의견의 부분이 만약 조율이 가능하다면 하나님께서 저와 동관님,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을 말씀을 통해 옳은 길로 인도해 주실 줄을 기대해 봅니다. 이만 글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