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반론에 대한 보충 설명
글쓴이 : 윤석준 날짜 : 2004/05/15 조회 :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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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1. 직분의 중요성
장동관님의 “설교와 장로직”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변
일단 질문을 제기해 주신 장동관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신앙이란 아무런 문제제기 없이 흘러가버리게 될 때, 죽은 신앙이 되고 전통과 구습에 따라 그냥 행하는 것으로 만족해 버리는 것이 되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장동관님의 지적에 의해 고려신학대학원 게시판에서 우리가 당연히 그럴 거라고 믿고 있지만 근거에 대해 잘 고민해 보지 않는 ‘목사직과 설교’에 대해 한번 다루어 볼 기회가 생긴 것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님의 제기에 대한 답변 형식으로 글을 쓰겠습니다. 문제가 있거나 반론이 있으시면 정당한 방법으로 이의를 제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장동관 님께서 개신교의 배경인지 로마교회의 배경인지조차 불분명하여 가급적이면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나 신앙고백적 근거는 다루지 않고 성경과 중세 이전의 교회역사로만 말씀드리겠습니다 - 이 말씀은 이 배경 하에 있는 자들에게는 훨씬 더 풍부한 답변이 있다는 의미입니다). 장동관님께서 이 글에 동의하지 않으신다 하여도 다른 분들에게 개신교 직분과 예배 원리가 성경적 근거를 가지고 있다는 자료가 될 것 같아 글이 좀 길어졌음에도 꼼꼼히 쓸려고 노력했습니다. 너무 글이 길어서 몇 부분으로 나눠 올리니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1. 목사 이외의 직분자는 설교할 수 없는가?
마지막에 1,2,3,4로 질문하신 대로 하자니 앞부분에서 빠지는 것이 있어 앞에 쓰신 글에서 제기된 문제를 먼저 답하면서 넘어가겠습니다(이렇게 하면 뒤의 1,2,3,4에 대한 대답도 동시에 될 것입니다).
님의 첫 번째 문제제기는 이것입니다. “목사 이외의 직분자는 설교할 수 없는가? 장로는 설교하면 안되는가? 스데반은 집사이면서 설교하지 않았는가? 이 문제가 모두 여기에 해당합니다. 먼저 직분이라는 것이 주께서 제정해주신 교회의 큰 구성원리라는 것을 살펴보고 목사와 설교에 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1) 교회에 직분이 존재하는 이유
이 질문은 제가 보기에는 아주 회중교회적인 질문으로 보입니다. 즉 말씀을 맡은 특별한 직분이란 게 존재하는가? 교회 중 누구든지 말씀에 어느 정도 능한 사람이 설교를 행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장동관님의 질문은 이런 것이라 생각됩니다(아마 이런 생각이시기 때문에 맨끝의 질문 중 3번에서 가르치는 은사가 있는 장로가 설교를 대신하고 성경을 가르치는 것을 말씀하셨겠죠?). 이에 대하여 저는 장동관님께 성경이 교회가 직분을 통해 세워진다고 증언하고 있음을 되새겨 드리고 싶습니다(이는 회중교회적 원리가 성경에 대한 무지에서 기인했음을 증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본문은 에베소서 4장입니다.
엡4:11-12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이 본문은 현대의 목회자들이나 회중교회 지지자들이 생각하듯이 직분이란 교회의 편의를 위하여 사람들의 협의에 의해서 세워진 것이 아님을 정확하게 지적하는 본문입니다.
본문의 바로 앞 구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가 나오는데, 이것은 예수께서 “사단을 제압하시고 승천하시면서 교회에게 주신 선물”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신’(6절) 위대한 분으로서 승천을 하시는데, 그 승천하실 때에 교회에 주신 커다란 선물이 있는데 그게 무엇이냐? 이것이 바로 뒤에 나오는 “그가 혹은 사도로....선지자로...복음 전하는 자로...”입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승천하실 때 교회에 어떤 목적을 가지고 선사하신 커다란 선물이 바로 직분이라는 말입니다. 이 직분을 설명하면서 성경은 한번 더 대단한 설명 “이는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심이니라”가 등장합니다. 이것은 전치사 ‘히나’(-하기 위하여)로 연결된 구절인데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것이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함”이며, 이 ‘만물을 충만케 하시기 위함의 내용 바로 다음에 직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승천시에 만물의 충만이 나오면서 승천과 주신 선물이 연결되어 있는 것은 이 선물이 만물의 충만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말씀은 직분을 함부로 생각할 수 없게 만듭니다.
이제 11-12절로 들어가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이러저러한 직분들을 세우셨고(11절), 그가 그런 직분을 세우신 이유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고 말씀하십니다(12절). 즉 이것은 직분이 사람의 편의를 위해서가 아니라 ‘성도를 온전하게 만드는 일’ 과 ‘교회를 봉사하는 일’ 과 나아가서는 (놀랍게도!!)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세우신 방법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좀 더 정확하게 해석하면 이렇습니다.
헬라어로 이 부분은(우리말로 쓰겠습니다..인터넷에 폰트가 안나오니..) “프로스 톤 카타르티스몬 톤 하기온 에이스 에르곤 디아코니아스 에이스 오이코도멘 투 소마토스 투 크리스투” 입니다. 이 문장 전체는 “-하기 위해”의 ‘프로스’ 전치사 구로서 ‘톤 카타르티스몬’이 목적어입니다. 즉 “온전케 하기 위하여”가 목적어 입니다. 다음에 나오는 문장들은 이를 설명하는 전치사구 ‘에이스’ 두개가 놓여있습니다. “봉사의 일 속으로” 와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 속으로”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을 원어를 바탕으로 정확하게 해석하면 “봉사의 일 속으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 속으로, 성도의 온전함을 위하여”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직분을 세우신 것이 “성도의 온전함을 위해서”인데, 이 성도의 온전함은 봉사의 일과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에 대한 정의이냐? 바로 하나님께서 직분을 주신 이유입니다. 이 직분을 주신 이유 두 가지가 성도에게 봉사를 하게 하려는 것과,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합하여 성도를 온전케 합니다. 즉!! 직분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세우시고 온전케 하기 위하여, 좀 더 강력하게 말하자면 자신의 부활과 승천이 여기에 관련된 것처럼!! 주신 직접적인 선물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직분을 주신 것이 단지 편의에 의해서가 아니라 커다란 계시사적 의미를 알려주시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회중교회식의 발상이나 현대교회에서의 “직분은 아무 필요없는 것이다” 라는 발상, 좀 더 나아가자면 교회에서 인간의 편의를 위해 방법론적으로 직분을 대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 직분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이 직분들은 “교회 속에서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역할”을 행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직분으로서 크게 세 종류의 직분이 나옵니다. 그것은 왕, 선지자, 제사장입니다(성경을 잘 아시는 분이니 이런 데 대한 설명은 없어도 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 왕과 선지자와 제사장은 그리스도의 삼중직을 나타내는 것입니다(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을 받은 자(메시야)이시며, 구약에서 이 세 직분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들입니다...물론 이것이 이유전체는 아닙니다..당연히). 즉 구약의 왕은 그리스도의 왕적 직분을,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선지자적 직분을, 제사장은 그리스도의 제사장적 직분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고백에서는 이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왕적 직분을 가지신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자기의 백성을 통치하신다는 것”과 다른 한편으로는 “사단의 대적으로부터 막아주심”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가 제사장적 직분을 가진다는 것은 “그가 단번에 자신을 드리심으로 참 제물이 되셨다는 것”과 “보좌 우편에서 우리를 위하여 영원토록 중보자가 되심”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가 선지자가 되신다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친히 하나님의 말씀이 되시어”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가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구약의 직분은 그리스도에게서 완성되었으며, 이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신 직분은 신약의 교회에 그리스도를 통하여 설립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의 교회 안에는 이 삼중직의 역할을 감당하는 직분들이 존재합니다(계시 완성 이전의 초대교회에는 좀 더 다양한 직분들이 존재했습니다-선지자, 전도자 혹은 복음전하는 자 등). 이 왕적/제사장적/선지자적 직분을 교회 속에 그리스도께서 심으신 것이 선지자적 역할로서의 목사와 왕적 역할로서의 장로와 제사장적 역할로서의 집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 직분을 세우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역을 오늘날의 교회에서 여전히 나타내도록 하셨다는 사실과 그 직분을 통하여 성도가 온전케 되며 교회가 세워지게 된다는 것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직분이 흐려지면 교회의 기초 자체가 흔들리게 됩니다(이 점은 한국교회에서 심히 염려되는 부분입니다. 집사의 남발과 집사직 자체의 실종, 장로의 역할의 실종, 목사의 월권행위들-집사와 장로의 직까지 혼자서 다 수행하려는 아집 등이 한국교회에서 직분의 상실을 초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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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사만 설교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첫 번째 문제...즉 직분이라는 것은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라는 주장에 대해서는 해결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 다음으로 우리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과연 그렇다면 이 직분들에게는 각각 어떤 직무가 주어졌으며, 동관님이 질문하신 대로 과연 설교는 목사만 해야 하는 것인가? 에 대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장동관님께서 “성경에 목사만 설교하라는 본문이 어디있느냐?”라고 물으셨기 때문에 성경이 목사와 설교를 결부시킨 부분을 먼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이 문제가 성경의 “장로 혹은 감독직”과 직접적으로 결부되어 있기 때문에 ‘2직분론과 3직분론’을 다루면서 장로의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뒤에 가서 ‘스데반은 집사인데 왜 설교했느냐?’를 말씀드리겠습니다.
i. 성경의 목사와 관련된 구절들
① 목사요 교사 (엡4:11)
: 앞에서 살펴본 성경 본문 중에 에베소서 4장의 직분을 설명하는 부분 중에 “혹은 목사와 교사로”(엡4:11)라는 부분을 보면 헬라어로는 ‘투스 데 포이메나스 카이 디다스칼루스’ 입니다. 다른 직분들에 대해 설명하는 구절들에서 각각의 직분은 각각의 관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사도와 선지자는 각각이 하나씩의 관사 ‘투스’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분 즉 ‘목사와 교사’의 부분은 두 단어가 하나의 관사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한 관사 ‘투스’ 아래에 ‘포이메나스’(목사)와 ‘디다스칼루스’(교사)가 함께 접속사 ‘카이’(그리고)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우리가 중학교 영어에서 배운 예에 ‘a black and a white dog’이라고 각각의 관사가 붙으면 검은 개 한 마리, 흰 개 한 마리의 두 마리 개가 있는 것이지만 ‘a black and white dog’이라고 하여 한 관사만 붙으면 ‘얼룩덜룩한 한 마리의 개’가 된다는 것을 알고 계실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서 ‘목사’ 와 ‘교사’가 한 관사아래 있다는 말은 “목사이면서 교사인 한 직분”을 지칭하는 말인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사용되는 단어인 ‘교사’가 그냥 중고등부나 유초등부 주일학교 교사의 의미가 아니라 교사로서의 목사에게 사용된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의 주제와 관련된 목사의 직무가 간접적으로 설명됩니다. 즉 목사는 “가르치는 역할”을 하는 자입니다. 목사는 교사인 것입니다. 이런 부분에서 목사가 회중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기 위해 세워진 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교사의 직무”는 목사에게 있습니다.
②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딤후4:2)
: 디모데후서의 “말씀을 전파하라”는 본문이 목사의 설교를 근거하는 두 번째 본문입니다. 이 구절의 앞에는 무시무시한 선언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라는 구절이 붙어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을 전파하라’의 막중한 중대함을 미리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전파하라’는 본문은 두가지 이유에서, 흔히 사용되듯이 ‘전도’를 위한 근거구절로 사용될 수 없습니다.
첫째 이유는 이 단어의 의미입니다. 여기서 사용된 단어는 설교와 관련된 단어입니다. 헬라어 ‘케뤼소’는 ‘선포하다’는 의미인데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 즉 설교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기서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은 “설교를 통한 말씀의 선포”를 의미하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두 번째 이유는 이 글의 대상이 되고 있는 “너는”이 누구냐는 것입니다. 이 서신은 사도 바울에 의해서 디모데에게 전해진 것입니다. 우리는 디모데가 교회의 목사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즉 이 본문에서 바울은 일개 성도에게 권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의 목사였던 디모데에게 “너는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충실하거라”라는 권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같은 맥락에서 뒤에 나오는 말들 즉 ‘경책’과 ‘경계’와 ‘권함’이 설교의 요소라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딤후4: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그러므로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설교하는 일이 누구에게 주어졌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설교를 위해 다른 성도들에게 말한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교회의 설교자였던 디모데에게 이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을”(4:3-4)지라도 목사 디모데는 자신의 성도에게 세상의 허탄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고 바울은 권고하고 있는 것입니다.
③ 그리고 디모데서의 다른 근거들
: 이것은 이후에 나오는 5절에서도 같은 어투로 강조되고 있습니다. “전도인의 일을 하며”의 ‘전도인의 일’ 역시 목사의 설교사역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외의 디모데전, 후서의 내용에서도 바울이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는 것은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이 되어 있습니다.
딤전1:5의 ‘경계의 목적은’ 이라고 할 때 이 ‘경계’는 좀전에 살펴본 설교의 요소 중의 하나입니다. 딤전4:6에서는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이라고 되어 있는 데 바로 앞절인 5절에 의하면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된 것입니다. 딤전 4:12에서 디모데는 말씀 선포자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연소하다고 해서 업신여겨서는’ 안되었습니다. 4:13에서는 바울이 이르기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곳 역시 목사의 사역이 나타납니다. 여기서 말하고 있는 ‘읽는 것’은 교회에서 공적인 예배시에 성경을 봉독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은 설교하는 것을 말합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예배를 폐하지 말고 착념하라는 것입니다. 16절에서 역시 ‘이 일을 계속하라’고 바울이 말했을 때 그것은 바로 앞에서 말한 이 사역(읽는 것, 권하는 것,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④ 딤전 4: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 이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 이 부분에서 성경은 “네 속에 있는 은사”를 말할 때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그 사람의 개인적인 자질이나 특성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본문을 잘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여기서 이 은사는 “안수를 통하여” 받은 것이고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입니다(여기서 예언은 ‘프로페테이아’로서 성경에 번역된 ‘예언’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즉 그가 가지고 있던 어떤 자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외부로부터 그에게 주어진 어떤 책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에게 주어진 이 ‘은사’(헬라어로 하면 은사는 ‘선물’입니다)가 무엇입니까? 이 은사는 아까도 보았지만 그 바로 앞의 절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즉 이 은사는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직무”를 가리킵니다. 그런데 이 직무가 무엇을 통해 온 것이라고 말합니까? 이것은 장로들의 회로부터 ‘안수를 통하여’ 받은 것이고,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예언으로 말미암아” 즉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침을 받은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목사의 직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일은 따라서 인간적 기원을 가진 것이 아니라 신적인 기원을 가진 것입니다.
저는 설교에 관하여 여러 본문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장동관님께 요청합니다. 제가 설명한 것들을 근거로 하여 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목사 외의 다른 사람이 설교한 예를 저에게 증거로 제시해 주십시오. 님께서는 목사에게만 설교권이 주어졌다는 증거가 어디있느냐? 고 물으셨지만 제가 볼 때에는 오히려 성경에는 말씀을 위해 특별히 세워진 직분자 외에 설교한 것이 어디있느냐? 라고 묻고 싶습니다(스데반은 나중에 말씀드리겠습니다). 동관님께서는 그런 증거가 있다면 저에게 제시해 주십시오.
ii. 설교와 장로직
그러나 이렇게 이야기를 해 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문제제기의 소지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는 동관님이 제기하신 것처럼 목사 외에 장로가 설교와 결부된 것처럼 보이는 부분이 있기 때문입니다(사실 성경에는 목사라는 단어가 몇 번 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대표적인 두개의 본문은 사도행전 20장의 에베소 교회 장로들을 “감독자”라고 불렀다는 것(초대교회 때 감독을 다 아시겠지만 감독은 설교자입니다)과 곡식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본문과 결부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라는 본문입니다(여기서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입니다).
저는 이 부분의 동관님의 질문을 보면서 한국교회가 전반적으로 역사만 좀 더 공부했더라면 이런 질문은 나오지 않을텐데...라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이 부분은 장로교회에서는 직분과 말씀에 관한 중요한 제기입니다. 하지만 이 내용은 이미 과거 ‘감독제’ 혹은 ‘교황제’를 추종하는 자들과의 논쟁에서 이미 다루어진 부분입니다. 이 논쟁은 성경이 ‘2직분’을 말하고 있는가 ‘3직분’을 말하고 있는가의 부분에서 논의된 것입니다.
감독제나 교황제를 선택하고 있는 자들은 성경에는 세 개의 직분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에 ‘감독 장로 집사’의 세 직분이 존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장로교회나 개혁교회에서는 성경에는 두개의 직분만이 즉 ‘장로’와 ‘집사’만이 존재한다고 믿었습니다. 이 논쟁에 대한 근거는 이미 다 밝혀진 것이지만 우리는 지금 ‘감독’이라는 직분이 존재하느냐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장로’와 ‘목사’를 다루는 것이니 차치하기로 하고....주의를 여기에 기울여 보십시다. 신중히 읽으신 분은 아시겠지만 여기 직분에 ‘목사’는 없습니다. ‘장로’와 ‘감독’에 대한 구별이 이 논쟁의 관건이었지 목사는 아예 나오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목사가 바로 장로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한 성경의 근거를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① 행20:17-28
: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여기서 에베소 장로들은 한편으로는 ‘장로’라고 불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말씀을 전하는 자인 ‘감독’으로 불리웠습니다.
② 딛1:5,7
: 디도서 1장에는 직분을 세우는 기준에 대해서 나와 있는데 5절에서 바울은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지만 6절 이하, 명시적으로 7절에서는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라고 함으로서 바울은 장로들을 세우겠다...라고 해놓고는 감독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장로가 바로 감독이라는 뜻입니다.
③ 사도들은 자신을 장로라고 칭함
: 사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말씀선포자로서 초대교회의 감독과 같은 역할을 하던 자들이었습니다. 하지만 벧전 5:1에서 베드로는 자신을 ‘장로’라고 칭합니다. “나는 함께 장로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또한 요이1:1과 요삼1:1에 의하면 사도 요한 역시 자신을 장로라고 칭합니다. “장로는 택하심을 입은 부녀와 그의 자녀에게 편지하노니....”, “장로는 사랑하는 가이오 곧 나의 참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편지하노라...”
④ 초대교부의 증거
이렇게 성경은 말씀을 전하는 자를 ‘장로’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는 어떤 곳에는 감독이라고 부름으로서 두 단어가 사실은 두 단어가 같은 의미임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는 초대교부들에 의해서도 증거되는 것입니다. 교회사가 네안더에 의하면 클레멘트는 “감독직에 대해서는 침묵하였고 감독이라는 말을 장로와 동일한 단어로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는 감독과 장로 즉,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장로로 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목사와 장로를 나눈 것일까요?
이것은 성경이 장로라는 직분을 폭넓게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칼빈을 따라 장로직은 크게 네가지의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동의어를 여러 방법으로 기술함으로서 장로직을 “장로 목사 교사 감독”의 네가지로 쓰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2직분론을 따라서 성경에는 장로와 집사라는 직분만을 말하고 있지만 장로의 직분은 세분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칼빈은 장로의 역할이 이렇게 여러 가지로 나타나기 때문에장로들을 ‘장로’ ‘목사’ ‘신학자들인 교사’들로 나누었습니다. 감독은 목사와 같기 때문에 나누지 않았습니다....이 모두가 다 장로입니다).
대표적으로 치리하는 장로와 가르치는 장로를 나눈 본문이 바로 동관님이 제기하신 딤전5장의 본문입니다. 동관님께서는 성경에서 장로와 감독, 장로와 목사, 장로와 교사를 한 단어로서 쓰고 있다는 것을 모르셨기 때문에 단지 한글 번역을 따라 장로라고 된 사람이 설교하는 것처럼.....생각하신 것입니다. 딤전 5장에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딤전5:17)
여기서 우리는 같은 장로는 장로인데, 장로에 두가지 구분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것은 ‘다스리는 장로’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입니다. 즉 오늘날 말로 표현하자면 ‘치리장로’와 ‘설교장로’입니다. 장로교회와 개혁교회는 이 말씀을 따라서 목사 역시 장로라는 것을 인정하지만 목사는 설교하는 장로로 세우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밖에 설교장로로서의 목사에게 주어진 설교와 관련된 말씀은 이미 앞에서 디모데서를 통해서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정리하자면 장로와 목사는 다같이 하나의 직분으로서 성경은 ‘장로’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장로와 목사는 그 역할에 있어서 다를 뿐 위치에 있어서는 같습니다. 개신교는 말씀사역의 중요성을 크게 두어 온전히 말씀사역을 위해 자신의 생업을 갖지 않는 장로를 따로 두었습니다. 한국교회에서 비록 이것이 왜곡되어 목사가 거의 수위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사실은 초대교회 때 이미 로마를 통해 장로보다 감독이 더 우위에 있는 사상이 시작되었습니다...대표적인 감독이 레오입니다), 성경과 초대교회 교부들은 목사와 장로는 다같이 장로로서 동일하며, 장로와 집사역시 교회의 직분으로서 동일하다는 것을 가르쳤습니다.
iii. 스데반의 설교
마지막으로 동관님이 제기하신 질문...그럼 왜 스데반은 설교했나? 를 말씀드림으로서 이 챕터를 끝냅시다. 스데반의 설교에 대한 우리의 오해는 우리의 직분에 대한 오해에서 생겨납니다. 일단 초대교회 때에는 지금은 존재하지 않는 직분이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선지자’와 ‘전도자’였습니다. 이 두 직분은 말씀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존재했으나 말씀의 완성과 더불어 사라진 직분입니다(사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즉 이 직분들은 하나님께서 말씀의 완성 이전에 임시적으로 초대교회에 있도록 하셨으나 이후에 사라지게 하신 직분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전도자’는 일종의 설교자였습니다. 우리가 전도자의 직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성경에 전도자 자체가 많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마도 성경이 ‘전도’라고 말할 때 그것은 언제나 말씀설교이기 때문에(앞에서 말씀드렸습니다...전도라고 번역된 헬라어 케뤼쏘는 늘 설교입니다) 전도인은 말씀설교자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들은 ‘순회설교자’였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사도들은 구제에 대한 문제 때문에 행 6장에서 일곱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집사인 것 처럼 생각은 되지만 사실은 그게 정확치가 않습니다...행 6장에서는 ‘일곱을 택하라’ 라고 되어 있지만 사실 집사라는 말은 나오지가 않습니다. 이들을 집사라고 부르는 근거구절이 행21:8인데 여기서 빌립을 말하면서 “일곱 집사 중 하나인 빌립”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글 성경을 가만히 보시면 이 부분에서 ‘집사’라는 말이 작은 글자로 되어 있는 것을 보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작은 글자는 원본상에 나타나 있지 않은 말을 번역할 때 편의를 위해 삽입하였거나 신빙성 있는 본문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 이 일곱이 집사였다는 확실한 근거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 21:8을 보시면 빌립의 직분은 정확하게 “전도자”라고 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에 이르러 일곱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들어가서 유하니라”
따라서 행6장에서 세운 일곱명의 사람들은 두가지의 가능성을 가집니다.
첫째로, 이들은 사실 집사였으나 직분에 유동성이 있어서 나중에 전도자로서도 사용되었거나...
둘째로, 사실 이들은 아예 집사가 아니었고 애초부터 전도자로 세워졌거나...
가능성은 두가지입니다. 그러나 둘 중 어느것이라고 하여도, 동관님이 제기하시고 다른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집사가 설교할 수 있다”의 근거본문은 되지 못합니다. 스데반이 설교하고 죽을 때에 그가 집사였는지, 전도자였는지가 불분명합니다. 더욱이 더 나아가서 그 때 스데반이 행한 권면을 설교라고 할 수 있는지가 더 큰 문제입니다. 스데반은 예배 시간에 나가서 설교를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동관님이 제기하신 질문, 즉 “스데반은 집사인데 설교하지 않았느냐?”라는 것은 사실상 질문이 되지 못하고, 집사가 설교할 수 있다는 근거는 성경에 없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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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개신교 예배 순서의 유래에 관하여
이제 넘어가서 개신교 예배 순서에 대한 동관님의 지적을 다루겠습니다.
장동관님께서는 ‘교회가 없다’라는 책을 인용하시면서 개신교 예배 전체에 대한 비난의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저는 이 글을 읽으면서 그렇다면 과연 동관님의 주장은 카톨릭의 예배가 옳기 때문에 그렇게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인가? 라는 생각이 들엇습니다. 동관님은 루터에 대해 비판한 글을 인용하시면서 성찬이 중심이었던 카톨릭의 미사가 루터 한 사람에 의해서 설교 중심으로 변질되었다는 식으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동관님의 주장은 우리의 예배는 카톨릭처럼 성찬 중심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의미입니까?
루터가 카톨릭의 미사를 비판한 것은 님의 글에만 의하자면 완전히 개인적인 취향인 것처럼 보입니다. 루터가 카톨릭 식의 미사를 설교 중심으로 바꾸어 버린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루터가 그 정도로 성경적/신앙적 식견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루터의 글을 읽어보셨는지요? 그의 개혁은 성경말씀이 가리키는 예배로의 회복을 위한 것이며 중세 카톨릭 교회 이전의 바른 교회의 모습으로 되돌이킨 것이지 ‘성찬중심’이라는 테마를 ‘설교중심’이라는 테마로 단순히 변용시킨 것이 아닙니다.
카톨릭의 미사는 제사입니다. 즉 미사는 그 시간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신 사건을 재현하는” 시간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성찬론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그들은 성찬을 “나를 기념하라(원어로 하면 ‘나를 기억하라’입니다)”의 사건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 시간에 다시 그리스도의 죽으시고 피 흘리시는 일이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속죄적/계시사적 사건을 비웃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미사라는 제사 시간을 통해서 성찬이 일어날 때에 그 시간에 ‘빵은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변하고’, ‘포도주는 실제적으로 그리스도의 피로 변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잘 아는 ‘화체설’입니다. 카톨릭의 미사는 이 ‘화체설’의 성찬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사제들에 의해 행해지는 미사는 이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다시금 미사시간을 통하여 재현되는 제사시간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초대교회 교부들의 증거에 의하여 예배는 제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동관님께서는 종교개혁자들이 ‘성찬중심’을 ‘설교중심’으로 변형시킨 것처럼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중세 카톨릭의 이전에, 그러니까 고대와 중세를 잇는 어거스틴의 시대가 이르기 전까지의 시대에 교부들과 교회들이 예배의 중심에 설교를 두었던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물론 성찬에 대한 우리의 입지가 약해진 것은 사실입니다. 성경에서 예배를 위해 모인 것을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행20:7)라고 할 정도로 성찬은 예배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 역시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지를 동관님은 무시하는 듯이 보여 이에 대한 근거를 들겠습니다.
2세기 중엽의 순교자 저스틴 마터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습니다.
“일요일에 도시나 농촌에 사는 모든 사람이 한 장소에 모이면, 시간이 허락되는 대로 사도의 글이나 선지자의 글을 읽었다 농독자가 읽는 것을 끝내면 사회자가 설교를 통하여 이러한 영광스러운 모델을 닮을 것을 권면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일어나서 우리의 기도를 위에 계신 분께 올려보냈다. 기도가 끝나면 떡과 포도주가 나누어 졌고 사회자가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잘 사는 사람들과 나누어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선물을 모아 구제하는 사람들과 사회자에게 맡겨 필요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또한 2세기 당시 비시니아의 총독 플리니2세가 로마황제 트라쟌에게 보낸 서신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정한 날 해뜨기 전에 모여 그리스도께 찬송을 드렸습니다. 그들은 죄악을 범하지 말자고 스스로 맹세하였습니다. 그리고 도적질이나 강도질을 하지 말고, 간음하거나 약속을 깨지말고 소환되었을 때에 진리를 부인하지 말자고 서약했습니다. 그 후 해산하였다가 해 없는 음식을 먹기 위하여 다시 모였습니다”
이러한 초대교회의 증거들을 통해 볼 때 비록 우리가 성찬에 대해 중요성을 떨어뜨리고 있는 점을 반성해야 한다고 할지라도 설교의 중요성에 대해서 무시해서는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의 예배의 모습은 단순하였지만 설교와 성찬이 중심된 예배였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모습의 기록들 중 어떤 교부의 모습에 의하면 당시는 1부로서 설교 중심의 예배를 드리고, 2부에서는 자리를 옮겨 성찬을 실시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이는 세례받지 않은 자를 제외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어거스틴은 예배시 5-6시간을 설교했기 때문에 설교 중에 쉬는 시간을 두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모든 사실에서 어디에 루터가 “원래의 성찬중심예배”를 “자신의 취향에 따라 설교중심예배”로 바꾸었다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까? 루터와 종교개혁자들은 ‘옛것’에서 ‘새것’으로 변형시킨 것이 아니라 ‘옛것’(설교중심의 예배)이 카톨릭에 의해 변질(제사로서의 미사)되었기 때문에 다시 ‘옛것’으로 돌아가게끔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쁘게 종교개혁자들의 견해를 따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언약의 예배는 제사가 아니라 “언약의 갱신”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언약의 갱신’입니다. 신약시대의 예배는 늘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모인 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과의 언약의 재체결 과정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바로 동관님이 질문한 “예배에 반드시 설교가 있어야만 하는가”의 문제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예배에 대하여 특별하게 형식을 정해 준 것이 있었는가? 이런 문제가 이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글이 너무 길어지고 쓰는데 시간도 많이 걸려 이 부분은 제가 이미 써놓은 글을 링크시키겠습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토론방’에 가셔서 제가 써놓은 예배에 관한 글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http://cafe.daum.net/kts2002).
동관님에 대한 답글은 이정도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