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신]고신교회 반세기의 회고 (1) - 최해일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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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고신교회 반세기의 회고 (1) - 최해일 [한국교회사]


번호 : 90 등록일 : 2004-03-03 ■ 고신 교회 반세기의 회고 (1) -최해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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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지난 8월 30일 부산 송도에 있는 고신대학교 전교직원 수련회에서 강의한 것과 10
월 28일 천안 소재 고려신학대학원 교직원과 전교생을 상대로 한 강의 내용, 그리고 11월
25일 고신대학교 영도캠퍼스에서 열린 제11회 한상동 기념 강좌에서 강의한 내용을 종합 정
리한 것이다. 이제 7순을 넘어선 노(老) 목사가 실제로 경험하고 지켜 보았던 지나간 날의
역사적인 사실들을 있는 그대로, 그리고 기억이 되는 대로 정리해 놓은 일종의 회고록과 같
은 내용들을 나름대로 분석하여 정리해 놓은 사견이라고 전제하면서, 이 지상(紙上)에 옮
겨 놓는다.
역사를 보는 눈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고 비록 같은 내용일지라도 그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달리 해석할 수 는 있으나, 다만 본인이 보고 느끼는 그대로 진술한 것일 뿐임을 이해하고
참고로 해 주시기를 독자들에게 부탁드리는 바이다. 혹시 잘못된 기록이 있을 지라도 이해
해 주시고, 교정부분이 있으면 서슴없이 충고해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마지 않는다. 그리고
개인의 명예에 관계되는 부분들은 가급적 익명(匿名)으로 기록했다는 것도 양해해 주시기
를 바란다.
아무쪼록 이 졸필의 기록이 후학들에게 또 역사를 연구하는 일에 다소나마 참고가 되었으
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1. 고신 교단 태동의 배경

1) 일본 제국의 침략
1894년 청(淸)국을 침략한 일본군은 요동반도를 탈취하고 만주국이라는 위성국가를 세워 중
국 정치에 개입하게 되었다. 일제는 1904년 러시아를 침략, 東卿平入郞 원수와 召木希典 대
장의 승리로 樺太 사하린 반도를 탈취하였다. 일본 제국주의는 1904년부터 한국의 외교 정
치 경제를 간섭하다가 1910년 8월 한일합방으로 우리나라를 식민지화 하였다.

2) 일본의 만행
한국을 강점한 일본은 내선일체라는 이름으로 민족말살운동을 전개하였다.
(1) 한국어 사용금지 : 일본의 초등학교 제도는 우리들이 경험한 대로 세 번씩이나 바뀌었
다. 처음에는 보통학교였고, 1930년대에 침상소학교로, 다시 국민학교로 개칭되면서부터 일
체 한국말을 쓰지 못하게 금지시켰다. 만일에 한국어를 쓰다가 발각되면 벌을 받게 했다.
(2) 창씨개명의 강요 : 민족말살 정책의 하나로 우리의 성(姓)도 이름도 일본식으로 바꾸도
록 강요했고, 불응자에겐 중벌을 내리기도 했다.
(3) 황국신민의 맹세강요 : 국민학교에서는 매일 조회 때마다 외우게 했고, 성인들은 이를
반드시 외워야만 배급을 지급해 주었다.
(4) 징용, 징병, 징발의 강요 : 30세 이상 40세 까지의 남성들은 징용이라는 이름으로 사할
린 남양군도 중국 등지에 근로보국대로 강제 동원되었고, 갑자생(甲子生)부터 시작하여 징
병으로 강제소집, 군에 입대시켰다. 그 이전부터는 지원병이란 명목으로 군에 입대시켜 일
본을 위해 헌신하게 했고, 그 중에는 소년 항공병으로서 어린 학생을 신풍특공대로 산화시
키는 일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5) 정신대의 만행 : 일본 제국주의는 17세에서 20세 까지의 소녀들을 강제모집, 군에 입대
시켜 일정한 훈련을 받게 한 다음, 낮에는 군인들의 일을 돕게 했고 밤에는 하룻밤에 10명
에서 20명까지 벌거벗은 몸으로 정조를 제공하게 했다. 시들해져 약해진 여성들은 731부대
라는 특수부대로 보내어 생체실험으로 살해했다.
(6) 牛賢鞭의 체형 : 황소의 생식기로 만든 회초리로 우국지사들을 벌거벗기고 때리면 살
이 떨어져 나가기도 하고 목숨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7) 찬송가의 선별제창 강요 : 일본제국주의는 교회에도 간섭을 하였는데, 특히 371장 삼천
리 반도금수강산, 389장 믿는 사람들아, 390장 십자가 군병들아, 391장 십자가 군병되어서
등 일본황실에 반대되는 찬송은 일체 금지시켰다.
(8) 동방요배와 신사참배의 강요 : 일제는 예배 전에 동방요배를 하고, 기미가요라는 일본
노래를 부른 다음 예배를 드리도록 강요하였다. 이 신사참배 강요에서부터 고신교단의 뿌리
는 내리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이 동방요배와 신사참배, 황국신민의 맹세 등을 입안한
자는 1936년 8월 우가끼 총독의 후임으로 조선총독이 된 미나미 지오로였다. 그는 1929년 8
월부터 30년 12월까지 조선군 사령관을 지냈고, 1931년 4월에서 12월까지 육군장관을 지내
면서 만주사변을 일으켰고, 1936년 2월까지 관동군사령관을 지낸 일본 군벌의 수장이었다.
1935년 12월 천주교 교황 비오 11세의 칙령으로 신사참배를 국민의례로 인정했고, 1938년 9
월 3일 감리교는 총리사의 이름으로 신사참배를 국민의식으로 인정하기로 결의 공포했다.
1938년 6월 29일 일본 기독교의 총회장(대표의장) 도미다 미쓰루 목사를 초청, 서울(경성)
과 대구 부산 등지를 순회하면서 신사참배는 국민의식이고 우상숭배가 아니라고 역설하고
다니다가 손양원, 주기철 목사 등으로부터 심한 반발을 샀다.
1938년 9월 9일 오후 8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가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개최되었
다. 이 총회는 본래 신의주에서 열리게 되어 있었으나, 경찰의 강요로 인해 평양에서 개최
되었다. 만주의 4개 노회를 포함해 27개 노회 총회 목사 86명과 장로 85명, 선교사 22명
등 도합 193명의 중간 중간에 경찰관 97명이 끼어 있었다. 총회장에 홍택기, 부의장에 김길
창, 서기에 곽진근, 회계에 고한규 등이 피선되었다. 이튿날 홍택기 목사의 사회로 열린
본 회의에서는 수 백명의 경찰관들이 배치된 가운데 찬송가(신편) 416장 내 평생 소원 이
것 뿐을 제창한 다음 평양노회장 박응율 목사의 제안과 평서노회장 박임현 목사의 동의, 안
서노회 소속 길인섭 목사의 제청으로 신사참배가 가결되었다. 홍택기 목사는 부(否)를 붇
지 않고 가결을 선언했기 때문에 한부선 선교사는 “회장! 불법이요”라고 항의 하다가 경
찰관에 끌려나가 투옥되었다.




2. 장로교단의 해체
1) 제1차 개편
1943년 5월 5일 일제의 강권에 의하여 장로교의 전통은 중단되고, 일본 기독교에 합류되면
서 대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으로 개편되고 총회장이라는 명칭은 통리라는 이름으로 바뀌
었다. 초대 통리에는 CHE 목사가 임명되었다. 한편 영성국장 겸 경남교구장에는 KGC 목사
가 임명되었는데, 김 목사는 당시 南次郞 총독의 양자라 할 만큼 막강한 권력을 누렸다.

2) 제2차 개편
1945년 8월 해방을 불과 15일 앞두고 일제는 다시 한국교회를 하나로 묶는 통합교단을 조직
하였다. 명칭은 대일본예수교조선교단으로 개칭하고, 장로교와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그리
고 구세군까지 합해서 새로운 교단을 통합 개편했다. 이때 대표는 장로교 27명, 감리교 21
명, 구세군 6명, 기타 군소 교단 각 1명씩이었다. 총리에는 KGS, 부총리에는 KOT, 총무에
는 SCG이 일제의 임명으로 취임하였다.

3. 평양신학교의 폐쇄와 조선신학교의 태동
1) 평양신학교의 폐쇄
1935년 2월 5일 평북노회가 최초로 신사참배를 가결했을 때, 이 일에 반대하고 일어난 교수
와 학생들을 일본 경찰이 강압하기 시작했다. 박형룡 김인준 등 교수들을 불구속 심문하는
한편 한창선 장홍연 김양선 안광국 등 신학생 다수를 검거 투옥시켰다. 그리고 일제는 1938
년 9월 30일 무기휴학 처분을 내렸고, 1941년 3월 이사회의 결의로 폐교하고 말았다.

2) 조선신학교의 태동
1940년 4월 김재준 송창근 윤인구 등이 승동교회당에 모여 일본 정부 방침에 순응하기로 하
고 조선신학교 설립을 결의함으로써 이 신학교의 기초를 놓았다.

4. 신사참배의 조직적 저항과 일제의 강압
영남에서는 주남선 한상동 이인재 손양원 손명복 채정민 최덕지 조수옥 박인순 안이숙 등
이, 북한에서는 주기철 박관중 이기풍 등이 조직적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했다. 일
본 정권은 이와 같은 저항에 강력 대처해서 마침내 대대적인 검거 투옥작전을 전개하여 한
상동 주남선 주기철 손양원 이인재 손명복 최덕지 주수옥 채정민 등 수많은 성도들이 투옥
되고 옥사를 당했다.

5. 일본의 최종음모
G.H.Maffet의 The Christian of Korea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일본정권 최종의 음모는 우리
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이야기로 전해지고 있다. 1945년 8월 18일을 기해 한국의 목사 장
로 2만 7천명을 살해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놓고 함경북도 연변에 20평 짜리 동굴이 준비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해방 후 전직 고등계 형사의 안내로 발견되었고, 그 명단까지
도 입수되었다고 하는데 당초 학살의 예정인원은 5만여 명이었다고 한다.

6. 일본의 패전과 조국의 독립
일 독 이 3국 동맹으로 미 영 중 소 등으로 구성된 연합군과 싸우던 일본은 1945년 8월 6
일 나가사끼와 9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두발의 원자탄으로 완전히 파괴되고, 드디어 8월 15
일 천황의 항복으로 전쟁이 끝나고 우리나라를 36년 만에 독립을 되찾을 수 있었다.

7. 옥중성도들의 출옥
8월 18일 몰살당할 뻔했던 옥중의 성도들은 8월 17일 일제히 출옥의 영광을 안게 되었다.
한상동 주남선 이인재 손명복 최덕지 조수옥 안이숙 등이 평양 옥중에서 출옥하던 날은 교
회사에서 잊을 수 없는 감격의 날이었다.

8. 해방 직후의 혼란과 한국교회
해방이 되자 공산당의 활동으로 우리나라의 치안은 극도로 혼란해졌다. 제주도의 4.3 사
건, 여수와 순천의 반란사건, 대구의 10.1폭동, 5.10 선거의 폭동사건 등으로 말할 수 없
는 많은 소요가 일어나 대혼란에 휩싸이게 되었다. 사랑의 원자탄이 바로 여순반란 사건
때 일어난 일이었다.
한편 한국교회에는 옥중성도들을 독선주의자로 매도하는 운동이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출옥성도들이 다같이 회개하자는 권고를 거부하고 적반하장으로 다수의 횡포를 서슴지 않았
다. 그러다가 1949년 12월 24일 대구 제일교회의 유아 압사사건이 일어나 50여명의 어린이
들이 목숨을 잃는 대 참사가 일어났는데, 그 일을 하나님의 경고라고 본다.
1950년 4월 21일 제36회 장로회 총회가 대구제일교회에서 개최되었는데, 최재화 총회장의
사회로 열린 총회는 조선신학교 직영문제, 고려신학교 인가 문제로 대 소란이 일어나 경찰
관이 총을 들고 강단에 뛰어 올라가 진압하는 추태가 벌어지기까지 하고 정회가 되었다.
이 총회는 동시에 고신측 경남노회의 회원권을 박탈하는 결의를 가결함으로써 고신교단 태
동의 동기를 부여하게 되었다. ■ 계 속

최 해 일 목사 -( 증경총회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