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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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무덤


생명과 죽음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에서 "사흘"의 의미는?

(이 글은 왜관 0교회 000 전도사님의 질문에 대한 목사님의 답변입니다

김00 전도사님께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전도사님은 현재 신학생인가요? 전도사님께서는 답변하기에 결코 쉽지않은 어려운 질문을 하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사흘만이 아니라 훨씬 오랜 세월이 흐른 후 지금 살아나신다 해도 죽음에 대한 승리의 의미는 여전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일반 신학서적이나 주석 같은데서 볼수 없는 저의 견해가 어떤지 물어왔습니다. 저는 전도사님의 질문을 요구받고 상당히 재미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질문하는 사람은 객관성 있는 답변을 요구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전도사님께서는 저의 개인적인 생각을 물어왔기 때문입니다. 물론 오십보 백보이기는 할테지만 말입니다.

전도사님! <생명>과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본적이 있습니까? 있을테지요. 저는 전도사님께 이에 대한 매우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합니다. 전도사님은 이 세상에 생명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까? 흔히 일컫는 동양철학에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생명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주의 모든 것은 죽은 물질의 세계가 아니라 살아있는 생명으로 뭉쳐진 하나의 생명체라는 것이지요.

동양철학적 사고를 하지 않는 일반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생명체, 즉 생물과 무생물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는 생물체와 무생물체가 있습니다. 생물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고 무생물은 생명없는 것이지요. 저는 여기에서 말하는 "생물체"라는 것이 지닌 생명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든 생물체는 생물체일 따름이지 진정한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즉, 한계있는 "제한적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진정한 "생명"이라 하려면 적어도 죽음과 상관이 없는 생명이어야 합니다. 죽음에 의해 회복 불능상태로 침해당할 수 있는 생명이란 이미 생명이 아니며 그 죽음을 이겨 계속적인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생명이 아니라면 이미 진정한 생명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생명체들이란 우리 눈에 생명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진정한 생명이 아니라 죽음과 밀착된 "제한적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복음이 가르치고 있는 바는 이 세상에 진정한 생명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죽음의 상태에 있습니다. 살아움직이지만 실상은 죽은 것이지요. 아담이 범죄한 이후 인간을 비롯한 모든 자연은 죽음아래 놓이게 됩니다. "아담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자연의 죽음 역시, 창세기 앞부분에 인간의 범죄 이후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는 부분에서 설명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사탄이 공중권세를 잡고 있으며 죽음 아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는 생명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생명체들은 일시적 생명체일 뿐 참 생명체가 아닙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인간, 동물, 식물 등 어느 하나 죽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지금 살아 움직이지만 언젠가는 죽는다는 의미는 곧 "생명없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죽음의 세상에 "참 생명"이신 주님께서 오셨습니다. 세상 가운데 참 생명체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넓고 넓은 세상 가운데, 그리고 긴 역사 가운데 참 생명을 가지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밖에는 없다는 말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곧 생명이다"고 선언하신 것은 바로 그 의미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의미는 생명이 없는 인간들이 그 참 생명체 속에 흡입되어 그에게 예속되어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고 죽으셨습니다. 그 죽음의 의미는 죄와 사망의 세상/인간이 그 생명체를 그냥 두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 참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셨다는 것은 죄 가운데 죽음에 빠져있는 "자기백성"의 죽음을 대신 감당하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생명"의 승리이며 죄악 세상 가운데 참 생명의 공급원이 마련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전도사님이 질문하신 내용 가운데 왜 하필이면 "사흘"이냐 하는 문제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도사님이 저의 개인적 견해를 물었으니 저도 그렇게 답변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흘만에 부할하신 것은 그렇게 해야만 할 충분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선 "예언의 문제"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내가 죽어서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리라"(마16:21, 참조)고 미리 선언하시고 그것을 약속대로 이루셨습니다. 자기 백성들에게 그것을 보여주심으로써 생명이신 자신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미리 약속하신 후 그것을 이루신 것은 자기 백성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의 죽음 가운데서의 경험이 익숙해 있어서 참 생명에 대해서도 의심을 품게 될 자기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을 그렇게 확증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사흘"이냐 하는 문제가 남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매우 쉽게 생각할 수도 있고 다소 복잡하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생각한다면,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지 않았느냐? 굳이 그 이유를 알려고 생각지 말라. 그냥 그렇게 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라"는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왜 하필 사흘이었는지 그 의미에 접근해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은지 "사흘"만에 부활하신 것은 하나님의 창조사역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주님께서 무덤에 사흘을 계셨는데 그 사흘이란 "24시간 × 3일"이 아닙니다. 즉 만 사흘이 아니란 말입니다. 주님이 무덤에 계셨던 "사흘"은 십자가에 달리시던 날 오후에서 시작하여 그 다음날이 지난 다음날 새벽까지였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날 수로 계산하면 앞 뒤 날들의 몇시간을 제외하면 꼬박 "온전한 하루"를 무덤에 계셨던 것입니다. 저는 그 의미를 매우 중요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날들"의 의미는 매우 중요하며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인간을 포함한 천지만물이 지어졌습니다. 즉 "날"과 관계 없이 한꺼번에 삽시간 천지를 창조한 것이 아니며 그냥 생각나는데로 적당하게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거룩하고 온전하신 뜻에 의해 "날들"에 따라 천지만물을 창조하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온전한 하루"를 무덤에서 보내게 된 의미는 바로 그런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즉 이틀도 좋고 사흘도 좋고 나흘도 좋은 데 하다보니 사흘이 되었다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저는 전도사님의 질문에 어떤 정답을 드리려 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 의미를 생각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를 더 가까이 깨닫게 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사망의 그늘아래 생명없이 살다가 참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 생명 안에 살게 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요.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의미를 잘 깨달아야 할 것이며, 그 가운데 끼어 있는 "사흘"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 봄으로써 하나님의 크고 놀라우신 은혜를 더욱 깊이 새기게 되기를 바랍니다.

이 정도에서 그치겠습니다. 앞으로도 주 안에서의 교제가 있기를 원합니다. 제가 살고있는 곳과 그렇게 멀지 않은 지역에 사시는 듯하니 틈이나면 한번 놀러 오시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2000. 5.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