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중국교회 관련 자료 [교계현실]
5, 중국의 종교를 관리하는 조직은 어떠한가?
중국 정부의 행정조직 안에 삼자회는 관방조직에 속해 있지 않으며 종교사무국의 협조와 지도 하에서 진행되는 군중 조직일 뿐이다.
종교사무국은 국무원 아래에서 종교 단체를 도우며 정부가 실행하는 종교정책을 돕는 조직이다. 그러나 종교사무국은 또 당중앙 통전부에 속해있다. 왜냐하면 종교 또한 통전 공작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며 그 조직 구조는 다음과 같다.
당중앙 국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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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전부 ----- 종교사무국 .............. 전국삼자회/기독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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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전부 ----- 각 지역 .............. 각 지역 삼자회
지방조직 종교사무국 기독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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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중국이 무신론 국가라면 왜 기독교의 존재를 인정하는가?
중국이 기독교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막스 레닌주의의 종교는 마침내 멸망한다는 신념에 의거하며 또한 이런 용인된 처리 역시 [통일전선]의 책략과 부합한다.
종교는 마침내 멸망한다.
막스 레닌주의자들은 종교는 역사의 산물이며 스스로 발생, 발전, 소멸하는 객관 규율이 있다고 여긴다.
다만 발생, 존재하는 사회적 근원이 소실되면 종교도 따라서 소멸한다.
그러므로 종교가 소멸하기전의 기간동안 종교의 신도들과 기타 인민계층을 이용, 단결하여 함께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한다는 것이 곧 중국 종교정책의 이론적 근거이다.
통일전선의 발휘
[신시대]의 [통전] 책략은 애국적인 종교 지도자도 또한 통전 대상에 속한다.
[통전]은 모택동 항일 시기에 내 놓은 구호로 목적은 당시 강대한 적인 일본에 대항하기 위하여 (이른바 [주요(主要)모순] 잠시 비공산당 세력이지만 자기와는 공통적인 단체(차요(次要) 모순)와 연합하는 것이다. 모택동의 설법에 의하면 공산당원과 종교신도는 동일선상에서 애국, 혁명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통전]의 원칙 아래 19호 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현 단계에서 신도 군중과 불신도 군중은 사상, 신앙상의 이런 차이점은 비교적 차요(次要)의 차이이다...... 신도 군중과 불신도의 군중이 정치상, 경제상의 근본 이익의 일치를 무시하거나 말살하여 당의 기본 임무가 전체 인민(많은 신도와 불신도 군중을 포함한)이 현대화된 사회주의 강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으로 분투하는 것임을 잊어버린다면, 다만 신도와 불신도 군중 사이의 거리를 증가시키고 종교의 광적인 열기만 증가시켜 사회주의 사업에 엄중한 악과(惡果)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통전]은 권모술수의 계책일 뿐으로 국가건설의 대 전체 하에 중국이 잠시 기독교의 존재를 용인하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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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중국은 어떻게 삼자회를 대하며, 삼자회의 임무는 무엇인가?
중국 기독교 삼자애국 운동위원회(삼자회)와 중국 기독교협회(기협)는 중국 정부 유일의 중국 기독교의 [전국적인 애국 종교조직]을 대표하도록 허락된 것이며, 둘다 모두 당과 정부의 영도를 받는다.
그 기본 임무는 [당과 정부에 협조하여 종교 신앙 자유의 정책을 끝까지 집행하여 많은 신도 군중과 종교계 인사를 도와 끊임없이 애국주의와 사회주의 각오를 노이고 종교계의 합법적 권익을 대표하여 정상적인 종교 활동을 조직함으로 교무(敎務)를 잘 담당하는 것이다.
당과 정부 간부는 삼자회 자체에서 해결해야 할 본래의 문제를 지지하고 도와서 그의 적극성과 마땅히 해야 할 기능을 발휘토록 함으로서 헌법과 법률의 범위 내에서 주동적으로 일을 전개토록 하여 당과 정부가 기독교인을 포섭, 단결, 교육시키는 교량적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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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문혁 전에 중국은 어떻게 크리스찬을 대했는가?
문혁 전의 17년(1949-1966) 동안 중국은 [삼자운동]의 추진을 통하여 밖으로부터 중국교회와 서방교회의 연계를 단절시켰으며 안으로 전국교회를 통제하여 국가 책략의 도구로 사용코자 하였다.
서방과의 연계를 단절함(1949-1954)
모택동은 기독교를 제국주의 침략의 도구로 보았음으로 [삼자운동]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교회 내의 제국주의 분자를 숙청했다.
많은 전도인 혹은 삼자회에 가입하지 않으려 하거나 혹은 외국 선교사와 왕래하는 자는 모두 체포되었다.
서양 선교사는 갖가지 압력 하에 잇따라 중국을 떠났다.
교회의 대연합(1954- 1958)
[삼자]를 통하여 설립되었던 전국교회 교회간행물, 신학원 등의 통치권은 모두 [삼자]에 귀속되었고 목회자들도 서명하고 [삼자]에 가입해야만 했다.
1954년 7월 삼자회가 정식으로 성립되었다.
[완고한 반대파] 왕명도를 체포하였다. 한편 삼자회는 또한 교회를 유도하여 [숙반(肅反)=반동숙청][대명대방운동=정치나 사회를 보는 관점을 마음대로 발표하게 하여 후에 숙청 함] [반우(反右)=우파분자] 등, 정치 운동에 참여케 했으니, 계속적으로 많은 신도들이 연약해 졌고 넘어지게 되었다.
1955년 10월 정부는 삼자 이외의 어떤 기독교 활동도 불법이라고 선포했으며 전국의 교회를 대대적으로 합병하여 교회 숫자는 크게 감소되었다.
에를 들면 상해에서는 약 200개의 교회가 15개로 합병되었고, 북경에서는 64개의 교회가 4개로 합병되었다.
교역자 개조운동(1958년- 1966)
반우(反右)로부터 1958년 [대약진] 초기에 모든 교역자는 집중적으로 [학습] 및 생산활동에 강제 참가하게 되었고 평신도는 모두 밤낮 없이 [대련동철(大煉銅鐵)](1958년-1961년 동안 영국의 발전상을 따르자는 취지 하에 각 직장마다 용광로를 만들어 쇠를 제련해낸 운동)에 동원되었음으로 교회집회는 정지되었다.
당시의 통치자가 가장 관심을 둔 것이 경제적인 부흥이었음으로 종교정책은 비교적 피동적으로 뚜렷한 계획이 없었다.
이 시기의 일은 주로 목회자들에게 [교육]과 [개조]를 진행시켰다.
각 지방의 삼자회는 회의를 개최하여 사회주의 교육을 시키고 목회자들에게 신속히 자아 개조할 것과 적극적으로 노동 관련과 노동 생산에 종사하며 [자유전도], [가정협회]등 반동활동을 금지할 것을 요구했다.
이 밖에 계속하여 [반혁명 분자와 파리 분자] 들에게 투쟁을 전개시켜 상해시의 인민법원에서 공품매 등 14명에게 각각 유기형과 무기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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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중국은 문혁 시기에 어떻게 기독교를 대했나?
문혁 10년(1966-1976) 동안 중공은 전면적으로 종교의 존재를 억압했다.
[4인방]은 공개적으로 [하나님으로 하여금 귀신을 만나러 가게 하라]라는 구호를 앞세워 종교는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종교는 이미 역사박물관에 들어갔다]라고 외쳤다.
교회당 파괴, 신도 비판
홍위병은 파서구(破西舊)의 구호 아래 교회당을 파괴하고 신도를 능욕하며 성경을 몰수 훼손했다. 종교 인사를 [잡귀신], [타도해야할 대상]으로 보아 가볍게는 사람을 능멸했고, 크게는 반혁명 분자로 몰아 얼토당토 않은 죄명을 씌워 많은 사람들을 거짓 죄명과 억울한 죄명으로 처형했다.
전도인은 전도가 범법임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에 다시는 기독교를 믿지 않겠다고 자백했다. 신앙을 버리지 않으려는 자는 매 맞고, 비판의 대상이 되고, 머리를 깍이우고, 거리에 돌림을 당했다.
어떤 전도인은 산채로 매맞아 죽었고, 비판을 받아 정신적, 영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다.
문혁 기간에 중국은 [정상] (온건파) 종교 정책이 멈추었고 격진파 사상이 우세했다.
통전부, 종교사무국, 삼자회 등이 모두 정지되었고 그 성원들도 모두 비판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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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공산당원은 신도가 될 수 있는가?
19호 문건에 [공산당원은 종교 신앙을 가질 수 없으며, 종교활동에 참가할 수 없고, 장기적으로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탈당할 것을 요구할 수 있다] 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유는 공산당원은 막스 사상의 추종자, 무신론자로서 무신론의 선전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의 종교 신앙 자유 정책은 다만 일반 공민에게만 해당되며 공산당원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종교활동에 참가하는 당원에 대하여 정부는 [생활회]를 조직해 주며 그들이 종교 사상의 영향을 벗어날 것을 돕는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그 주장을 굽히지 않으면 탈당, 탈단, 내지는 출당 시켜 제적시킨다.
간부 외에 교사도 역시 종교 활동을 지지, 참여할 수 없으며 개별적으로 직권을 이용하여 종교를 [선동]한 자는 엄중히 처리된다.
그러나 실제로 공산당원 가운데도 크리스찬이 있으며 혹은 기독교에 호감을 갖고 있는 자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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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자회]란? [삼자]의 의미란?
삼자회는 1954년 7월 중국의 200여명의 기독교 교회 인사들이 제 1차 전국 기독교 회의를 거행할 당시에 만든 중국 기독교 삼자 애국운동 위원회(약칭 삼자회)를 가리키는 것이다.
삼자회의 중요 취지는 [중국 공산당과 인민정부의 영도 아래 전국의 기독교 신도들은 단결하여 조국을 사랑하면서 국가의 법령을 준수하고 자치, 자양, 자전의 [삼자(三自)를 지지해 나가자]는 것이다.
당시 당국도 [삼자]에 대한 해석을 위의 취지에 의거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치(自治)란
각 교회가 제국주의와의 관계를 철저히 단절하고 중국 기독교 신자들 스스로 교회를 다스림을 말하며,
자양(自養)이란
제국주의와의 경제적 연관성을 철저히 제거 중국 기독교 신자들 스스로 교회를 책임 양성해야 한다는 것이고,
자전(自傳)이란
제국주의의 남은 사상들을 철저히 말살하여 각 교회에서의 설교는 오직 성경에 의거한 순수한 복음을 전달하는 목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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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자운동]의 기원과 발전은?
오요종이 총리를 만나, [선언] 초안을 작성함.
1949년 9월 오요종은 기독교의 다섯 번째 안에 드는 사람으로 제 1차 중국 정협회의에 참석했다.
10월 정협(政協)종교대표, 중화기독교협진회. 중화기독교전국총회, 청년회와 여 청년회 등의 인사들로 구성된 기독교 방문단이 전국의 각 교회에 정협의 의결사항, 인민정부와 공산당 정책을 전달하고 교회의 혁신과 자립, 자양을 건의했다.
다음 해 5월 방문단은 태원(太原)을 방문키로 한 계획을 미루고, 주은래 총리를 만나 13명의 기독교 인사와 5월 2, 6, 13일에서 21일 까지 3차 회의를 열고, 중국에서의 기독교 전망에 대해 의논했다.
회의 중 [선언]을 초안 작성했는데 [중국 기독교의 신중국 건설에 있어서 노력해야 할 과정]이다. 이것을 북경, 상해, 천진 등지의 교회에 나누어주어 수정시켜 다시 주은래에게 상정하는 등 8차에 걸친 수정을 통하여 주은래 총리가 7월 6일 결안을 작성하여 각 교회에 배부 했다.
그리고 다시는 결안 된 문서를 고치지 못하게 하면서 7월 28일 교회 인사 40명으로 정식 성명을 발표하게 한 후 전국적으로 [선언(宣言)] 운동을 펼쳤다.
삼자회의 정식 성립
1951년 4월 16일부터 21일 까지 전국 각지에서 모인 151명의 기독교회 지도자들은 정무원(지금의 국무원) 종교 사무처에서 개최한 [미국의 원조를 받는 기독교 단체 회의의 처리를 위한 회의]에 참가 한 후 [연합 선언]을 발표하고 [중국 기독교 반미 원조 삼자 혁신 운동위원회 준비위원회]를 조성했다.
즉시 미국 제국주의에 대한 고발을 시작했고, 또한 당시 중국 대표적 기독교 간행물인 [천풍]은 일련의 [반동] 기독교 지도자들에 대한 규탄문을 발표했으며, 각지에서 규탄대회와 기독교 정치 학습반을 열었다.
1954년 7월 28일 244명의 교회 대표자들은 북경에서 열린 제 1차 [중국 기독교 전국회의]에 출석하여 [중국 기독교 삼자 애국운동 위원회]를 만들고 계속적으로 반제국 애국운동, 교회의 혁신과 개조를 강조하면서 자유 전도인들의 반공, 반사회주의를 고발했고, 교회내의 사상 개조를 강화했다.
문혁 후의 발전
1964년 [천풍]은 정간(停刊)되고 문화대혁명이 일어나 홍위병들에 의해 교회가 파괴되고 문을 닫게 되면서 삼자회의 일도 정지 됐다.
1977년에 국무원 내의 종교사무국이 각 방면의 일을 회복, 진행하면서 삼자회도 회복되었다.
1979년 영파(寧波)의 예배당이 제일 먼저 문을 열게 되었으며 전국 각지의 삼자회도 분분히 일어나기 시작했다.
1980년 2월, 16개 성(省)에서 온 37명의 인사들은 상해에서 거행한 삼자회 상무 위원회 확대회의에 출석했다. 회의에서는 삼자 정책 노선을 인정하고 교회를 중개(重開)할 것을 결의하고, 성경과 찬송을 다시 인쇄하며 [천풍]을 복간시키고, 신학원을 복과(復課)시키며, 전국에 교무기구를 만들고, 동시에 [전국주안의 형제 자매에게 고함] 이라는 문장을 발표했다.
10월 중국 기독교 제 3차 전국회의가 남경 금릉 협화신학원이 증설되었다.
그 안에 제자 훈련반, 신학연수과정반을 열고 방문단을 조직하였다.
대외적인 활동과 대내적인 활동을 벌였고, [애국공약]을 만들어 당과 인민의 정부 지침을 옹호하고 중앙 종교정책을 준수하는 [애국애교(愛國愛敎)]의 삼자 노선을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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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기독교 선언]이란 무엇인가?
1950년 5월 오요종을 대표한 19명의 기독교 인사는 3차례에 걸쳐 중공 총리 주은래와 회의를 거쳐 [중국 기독교의 신중국 건설에 있어 노력해야 할 과정]이란 선언을 발표했는데 이를 [기독교 선언] 또는 [혁신 선언]이라 한다.
선언의 주요 내용을 세 부분으로 나뉜다.
1) 주요 임무:
중국 기독교 단체는 [공동 강령= 공산당 건국 초에 헌법을 대표하던 문건]을 철저히 옹호해야 하며 정부의 지도 하에 반제국, 반봉건, 반관료주의를 실행함으로 독립, 민주, 평화, 통일, 그리고 부강한 신중국 건설을 위해 분투해야 한다.
2) 기본 방침:
교회 내의 제국주의 그림자를 숙청하고 반제 및 토지개혁을 옹호하고 신도의 애국 정신을 배양하여 단시일내 삼자의 임무를 완수함으로 기독교 혁신 목표를 달성한다.
3) 구체적 방안:
단기 내에 교회 안에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외국 사람과 그들의 경제 협조에 대한 의지를 단절한다. 교회는 종교 사업상 종파 단결에 주력하여 지도자를 배양하고 교회제도를 개조한다.
일반적으로 반제국, 반봉건, 반관료주의를 중시하며 노동생산, 문화, 오락활동 등으로 인민을 위해 봉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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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의 [중국 기독교 전국회의]의 성과는 어떠했는가?
제 1차 회의는
중국 정부가 헌장을 통과시킨 후 1954년 북경에서 열렸다.
회의 중 오요방은 4년 간의 [혁신운동]을 종결짓고 이후의 방침은 애국애교로 삼자공작을 뒷받침해야한다고 지시했다.
[삼자혁신운동]은 [삼자애국운동]이라고도 하는데 정식 지도기구인 [중국 기독교 삼자 애국운동 위원회]로 결성되었다.
이외에 4가지 결의안은
1) [애국애교]의 원칙 위에 교회의 통일을 촉진시킨다.
2) 중화인민공화국 장정(章程)을 지지하여 사회주의를 건설한다.
3) 미제국주의를 반대한다.
4) 전국의 신자들이 애국을 배우도록 격려하고 제국주의의 남은 흔적을 제거한다.
이번 회의의 결속으로 삼자회는 삼자에 불참한 [강경파]교회의 지도자에 대해 비난을 시작하면서 왕명도 등을 반혁명 집단 두목으로 간주하여 각각 징역에 처했다.
다른 교회들도 대부분 정부의 정책에 복종하여 조직상 통일을 이루었다.
제 2차 회의는
류소기가 집정한 1960년 상해에서 열렸다.
삼자회 부주석 오태방의 공작보고에 참가한 319 대표 중 145명을 선출해 삼자회에 가입시켰다. 삼자의 장정(章程)은 당시 정치 노선에 맞추어 수정되었으며 삼자회는 반제국주의의 [애국조직] 이라는 것을 명확히 표명했다. 삼자회의 목적은 기도교인들을 연합하여 [사회주의 활동]에 참여케 하는 것이다.
제 3차 회의는
1980년 남경에서 열렸고 중국교회에 서광을 비추었다.
회의 중 [중국 기독교협회]를 만들어 전국적인 교무기구로 만들 것을 결의했다.
그밖에 회의 중 가정교회의 견해에 대해 새로운 충돌이 있었다.
즉 [교회 안이나 혹 가정 안에서나] 모두 한 마음으로 예수를 신망하고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는 동일한 마음을 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에 있어서의 변화는 아주 분명한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제 4차 회의는
1986년 북경에서 열렸다.
회의에서 [삼자]와 [기협] 양회(兩會)의 장점을 수정하고 새 직원을 선출한 외에도 장래 사역의 발전에 대해 토론했다.
다음 해 성도(省都)에서 거행한 양회위원회(兩會委員會)에서 미래의 삼자 공작을 방향을 설정했다.
그리고
1) 농촌 교회의 관리와 해외와의 관계 절단
2) 교회의 자치를 추진하고 교회 규칙과 제도를 정립한다는 내용도 설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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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삼자회가 관철하려는 [애국애교(愛國愛敎)]는 무슨 뜻인가?
사회주의 국가가 말하는
[애국]이란
공산주의 정권을 옹호하여 사회주의를 적극 건설함으로 [사화(四化)를 고취시키는 것이다.
[애교]란
삼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집정당과 정부에서 추진하는 종교정책을 철저히 시행해 나가는 것이다.
삼자회가 말하는 애국애교의 정수는 먼저 중국 공산당의 지도를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산당의 인도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데 근거한 것이다.
1980년 [천풍]의 복간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근자에 여러 해 동안 형제 자매님들은 굳센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려 왔다. 또한 신중국은 마침내 중국 공산당의 정확한 노선으로 귀결될 것을 확실히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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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중국 기독교협회]는 어떤 기구인가? 삼자회와의 관계는 ?
[중국 기독교협회](약칭: 기협)은 1980년 10월 남경에서 열린 삼자 전국대표회의 중 성립된 것으로, 그 목표는 삼자회의 공을 분담하고 교회의 사무를 전적으로 책임지는데 있다.
삼자회의 기본 임무는 신도에게 [애국]을 교육하는 것으로, 그 범위는 이데올로기와 정책 면에 속해 있어서 영적인 일을 하기에 불편함으로 각지 교회의 신도에게 봉사하기 위해 [전국적인 교무조직]을 세울 필요를 느꼈다.
이러한 대 전제 하에 기독교협회의 공작 범위는 다음과 같다.
1) 목사 안수 및 배치
2) 신학원 건립 및 사역 훈련반 개설
3) 성경, 찬송가 인쇄. 기타 기독교 종교서적 간행.
4) 각지에 요원을 파견 조사케 하고 해외 교회의 방문을 접대하여 [통전(統戰) 책략과 부합토록 함.
기독교협회의 유래에 관하여 주의할 두가지
1) 삼자회와 기협 위원 중 90% 이상이 중복된다.
예로 정광훈은 삼자회 주석이자 기협회장이다.
기타 위원도 지도, 인사, 정책과 방침, 각 방면에서 일치하며, [자매 단체]로 분담 협조하는 관계를 갖고 있다.
2) 기협의 중요한 일은 교무(敎務)상의 일이다.
그래서 정치적으로 큰 변동이 없으며 기협은 한가히 교회의 사무를 볼 수 있다. 과거 몇 년동안 [기협]은 실제로 성경을 찍어내고 후진을 양성하여 목사 안수, 배치 등의 일에 총력 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해야만 국내의 외국인 신도들에게서 신임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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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삼자예배당은 언제부터 그 활동을 회복했나? 그 수와 분포 상황은?
1978년 11차 삼중전회(三中全會) 이후 중국에서 개방정책을 실행하기 시작했다.
삼자회도 따라서 활동을 개시했으며 예배당들은 계속적으로 중개(重開)되었다.
문혁 후 가장 먼저 개방하기 시작한 예배당은 아래와 같다.
1979년 4월 8일 영파 백년당
4월 북경 숭문당
9월 9일 상해 청심당
9월 30일 광동 동산당
9월 30일 상해 경림당
11월 복주 화항당
11월 심양 동관교회
12월 12일 천진 천진기독교회
12월 16일 복건 장주기독교회
이 후에 각 성과 시의 예배당들이 연이어 집회를 회복했다. 신도들도 가뭄 끝에 오래 기다렸던 비를 만난 기쁨으로 교회로 모여들었다.
문혁이래 신도들은 마침내 기독교인의 신분을 공개적으로 알리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1987년 말까지 계속 개방된 삼자 예배당은 4,044개로 서장 지역을 제외한 각 성과 시, 자치구에서 골고루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집회를 갖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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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삼자회의 [신학교육] 사역은?
정광훈은 중국 기독교 신학교육의 6단계를 발표했다.
1단계:
서신, 혹은 우편을 통한 과정
금릉 협화신학원에서 출판된 월간 간행물을 통해 가장 기초적인 신학 훈련의 자료들을 교회 지도자에게 보내는 교육사역이다.
2단계:
여업성경학교
노동자와 농민이 일의 여가 시간에 공부하는 학교, 평신도를 위해 개설된 단기 훈련으로 상해에서 시험적으로 개설된 적이 있다. 전문직 훈련은 아니다.
3단계:
신학 단기 훈련반
기협의 주관 하에 각 성과 시에서 단기 훈련반이 개설되었다.
과정은 기협에서 출판한 6권의 사역자 훈련 과정에 근거하며 교회 사역자들에게 4,5개월의 전시간 훈련을 제공한다.
4단계:
전문학교
2년 과정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도를 모집, 훈련시키는데 기존 교회를 위하여 교역자 및 사역자를 양육시킨다.
5단계:
신학 본과(신학대학)
4년제 과정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신도를 모집, 훈련시키는데 기존교회를 위하여 교역자 및 사역자를 양육시킨다.
6단계:
연구소(신학대학원)
남경에서 설치하여 대학 졸업생 혹은 신학 본과 졸업생을 모집하는데 수업 연한은 3년 내지 4년이다.
1988년 초에 이르러 전국에 이미 개설된 신학원으로는
금릉협화신학원
연경신학원
동북신학원
천진신학원
중남신학원
복주신학원
성도신학원
절강신학원
화동신학원
광동신학원
제남신학원
협서기독교성경학교 등 모두 12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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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삼자회가 개설한 신학교의 주요 업무는 무엇인가?
당과 정부의 지도 하에 신학원의 임무는
[정치상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당의 지도와 사회주의의 제도를 옹호하면서 우수한 종교적 지식을 갖춘 젊은 종교 직업인들을 배출해 내는 임무를 갖는다]
그래서 신학원의 학과 과정 중 정치는 필수과목으로 선정되어 신학생들은 매주 2-3시간의 정치 학습을 받는데 내용은 애국주의, 사회주의와 국제주의 등이다.
모든 젊은 종교 직업인은 부단히 애국주의와 사회주의의 각성을 위해 힘쓰고 문화수준과 종교학식의 고취에 이바지하면서 당의 종교정책에 충성을 다한다.... 원로 종교계의 애국진보 인사들과 서로 화합하여 당의 지도 하에 우리나라 종교조직의 확고한 방향과 활동 역임을 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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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삼정(三定)]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1982년 3월 운남에서 거행된 삼자회의에서 통과시킨 규정으로 신도의 활동 범위를 구체적으로 구분해 놓은 것이다.
삼정(三定)이란
정편(定片),
정점(定點),
정인(定人)이다.
정편: 선교사(사역자)가 선교할 구역을 정해 놓아 다른 지역에 가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정점: 지정한 교회 안에서만 종교활동을 한다.
정인: 삼자위원회가 파견한 책임자로 외부인사를 맞아들이거나 외국인이 주관하는 종교활동을 안배하지 못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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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열 가지 금지사항 [십불준(十不准)이란 무엇인가?
1) 개인이 교회를 설립할 수 없다.
2) 국가가 공인한 성직자가 아니면 세례를 줄 수 없다.
3) 외국과 연계하여 서적을 구입할 수 없다.
4) 성경과 관계서적을 마음대로 인쇄할 수 없다.
5) 이 지역에서 저 지역으로 이 공사(公社)에서 저 공사(公社)로 다니며 전도할 수 없다.
6) 매일 기도할 수 없으며 단지 일요일만 기도해야 한다.
7) 만 18세 이하의 청소년에게 종교 사상을 전수하면 안 된다.
8) 18세 이하의 청소년에게 찬송가를 부르게 해서는 안 된다.
9) 명목을 내세워 헌금을 받아들여 종교를 발전시킬 수 없다.
10) 신도에게 헌금으로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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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견지할 4가지 사항이란?
1980년 후 삼자회가 반포한 결정, 규칙, 공약은 모든 전체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다음 4가지 사항의 기본 원칙을 지켜야만 한다고 강조했다.
1) 조국을 사랑해야 한다.
2) 공산당의 인도에 순응한다.
3) 사회주의 노선을 견지한다.
4) 무산계급 독재정권을 옹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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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삼자회는 어떤 성질의 조직이며 그 본질과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삼자회의 정확한 이름은 [중국 기독교 삼자 애국운동 위원회]로 중국 정부가 승인한 유일한 기독교 조직으로 전국 기독교회의 행정, 경제, 활동 등을 총괄 책임진다.
삼자회의 본질
삼자회의 본질은 그 기원, 조직, 신앙의 세 방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1) 기원
삼자회는 원래 50년대의 [삼자운동]으로 시작되었으며 중국교회와 서양 선교회의 관계를 단절시키고 집중적으로 교회를 관리하여 교회의 힘을 정부정책에 전가시키려는 것으로 역사상의 [정치운동]의 일환으로 보면 된다.
2) 조직
정치기구의 구분에 의하면 삼자회는 통전부 아래 종교사무국의 한 [민간조직(民間組織)]이다. 정부조직은 아니나 종교사무국의 지도와 협조 하에서 활동하며 서로 협력관계에 있다.
삼자회의 책임자는 모두 정부가 파견하거나 혹은 인정한 자로 피차간에 서로 협력관계에 있다.
3) 신앙
삼자의 지도층의 신학입장은 비교적 개방적이며 신신학적이다.
예를 들면 그들은 믿는 자와 안 믿는 자의 대립은 부당한 것이라고 지적한다.
부활에 관해서 심지어 [부활은 복음 자체가 지닌 걸림돌이다]라고 까지 생각한다.
존재목적: 삼자회의 종지(宗旨)와 목표
1) 당과 정부의 인도 아래 전국의 기독교인을 단결시켜 조국을 사랑하게 하며 삼자 운동을 보호 발전시킨다.
2) 정주를 도와 종교신앙 자유정책을 관철한다.
3) 국제 우호 교류를 전개시킨다.
4) 중국을 고도의 민주국가로 건설하기 위해 힘을 다 한다.
그러므로 삼자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고 교회로 하여금 [전도]와 [가르침]의 사명을 다하도록 하는데 있지 않다. 반면에 삼자회는 국가건설을 대전제로 삼아 전국의 교회로 하여금 당에 부합시키려는 정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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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삼자교회를 어떻게 보는가?
인보라
삼자교회를 몇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1. 원칙중심이냐 성과중심이냐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원칙은 성경말씀을 기본으로 하며 성과는 사역의 결과를 기준으로 한다. 원칙중심으로 볼 때 삼자교회는 지금도 애국종교사회조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선교사역의 결과를 고려해 본다면 삼자교회도 현실교회라고 할 수 있다.
현실교회라 함은 삼자교회의 본질은 애국종교사회조직이지만 그 안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있고, 복음적인 교역자들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선교사역을 함에 삼자교회를 무조건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삼자교회를 성경이 지지하는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성과에 급급하지만 하나님은 성과보다도 원칙을 더 중요시하신다. 사역자는 당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계산할 것을 염두에 두고 살고 사역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선교사가 원칙인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보시지 그가 쌓은 업적에 따라 평가하지 않으신다.
2. 삼자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중국토착교회인가? 삼자교회는 중국토착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삼자교회는 자치를 주장하지만 정부의 관리를 받고 있기 때문에 자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삼자교회는 자양 내지 자급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자양이나 자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급을 외치면서 해외에서 오는 선교 달러를 환영할 뿐 아니라 선교 달러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삼자교회는 자전을 주장하지만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이웃이나 다른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러므로 삼자교회는 삼자가 이루어지는 중국토착교회가 아니라 교회 밖 세력의 지배를 받으며, 교회 밖에서 지원을 받으며, 교회 밖에서 원천적으로 복음을 스스로 전할 수 없는 반삼자교회, 즉 토착되지 못한 중국애국종교사회조직인 것이다. 물론 삼자교회가 처한 지방과 교역자에 따라 은밀히 복음을 전하고, 주일학교를 운영하는 교회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해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3. 삼자교회가 추구하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삼자교회가 추구하는 근본적인 것은 기존의 기독교신도들을 관리하는 것이요, 복음적인 교역자들과 신도들의 신앙을 자유주의적인 신앙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삼자교회가 초창기에는 "기독교를 박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문혁을 통하여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기독교신도들을 관리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가정교회로 종교국에 등록하도록 강요하는 것도 중국의 모든 기독교도들을 관리하기 위함이다. 관리하는데 유익하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깨어있지 않으면 이 전략에 넘어가기 쉽다.
또한 삼자교회(삼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대로 삼자교회 안에 있는 복음적인 교역자들과 신도들을 자유주의적인 신학과 신앙으로 변질시킨다면 통전부와 종교국은 승리의 축배를 들것이다. 지금도 이 전략은 은밀히, 그리고 집요하게 수행되고 있다.
4. 삼자교회와 협력할 때 유의할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삼자교회 안에 있는 복음적인 교역자들과 구원받은 신도들을 지혜롭게 섬기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하다. 삼자교회와 협력하면 오바댜와 같은 현실과 타협하고는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돕고 섬길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삼자회가 의도하는 대로 자유주의적인 신학과 신앙으로 세뇌 당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 또한 삼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구원받은 신도들을 관리가 아닌 목양을 부분적으로라도 할 수 있도록 섬길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이 완전히 개방될 때 삼자교회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른 길을 걷도록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삼자교회와 협력하려면 철저히 은밀하게 해야 한다. 공개적인 협력은 대부분 단명하다. 중국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자신의 사역을 감추는 것이 지혜롭다. 더군다나 삼자회의 앞잡이가 되어서는 안된다. 삼자회의 대변인이 될 때 그것은 통전전략에 놀아나는 것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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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인 교회 일제히 단속령
인보라
중국 허베이성 바오딩시 공안국에서 비공인 기독교 교회와 단체들에 대한 일제 단속령을 내렸다고 홍콩 사우스 차이나 모닝포스트가 4일 보도했다.
미국 종교 단체인 중국종교박해조사위원회에서는 바오딩시 공안국이 지난해 8월 발행한 기밀 문서를 통해 정부의 공인을 받지 않은 교회 운동가들을 분리, 고립할 것을 공안에 지시했다고 밝혔다.
위원회는 공안국이 교회를 염탐하고 기독교 단체의 고립화를 지시했다고 주장하고 "이는 중국 정부가 자신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기독교를 경계하고 있는 증거"라고 덧붙였다.
이영선 기자 yslee@ch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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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운동과 중국교회
자치, 자양, 자전의 3자 운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기독교 중심적 운동이며, 또 이 3자 운동의 조직이 교회를 대표하는 조직으로 되어있다.
1949년 10월 종교계 대표 7명이 정부의 초청으로 인민정치활동협상회의에 참가했다.
이 7인중 2명은 불교 대표자이고 5명은 개신교의 대표자로서 오요종(吳耀宗), 조자신(趙紫宸), 등유지(鄧裕志), 장설암(張雪岩), 유양모(劉良模)였다.
1949년 12월 25일부터 12월 27일까지 개최됐던 중국기독교협진회의 위원회에서는 전국의 교회에 출판물을 통해서 신중국의 교회로서 특별히 다음 사항을 강조해서 전달할 것을 결의하였다.
(1)교회의 중국화
운영 면에 있어서는 아직도 완전히 중국화가 되어 있지 않으며, 다른 집단과는 가까운 장래에 본색화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따라서 지금부터 모든 기독교 집단은 기본적으로 중국인으로서만 구성되어야하며, 운영기구는 진실로 민주주의적 정신을 양성할 수 있는 원칙에 서서 조직되어야 한다.
(2)해외로부터의 원조
중국 교회는 완전히 자립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교회가 현재로서는 경제적으로나 인적으로나 모든 것이 부족하고 어려움이 많음을 위원회에서 인정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로 외국 선교부의 원조를 계속 받기를 희망하고 있다.
(3)자 양
아직도 완전히 자양이 안 된 교회는 하루 속히 독립해서 자양의 교회로 만들어야 하며, 이것을 제일 목표로 설정해 놓고 있다. 일정한 기간 내에 그 목표에 도달하도록 필요한 모든 노력을 하고, 관계하고 있는 선교부와 구체적인 방법을 수립하고 있다.
또한 상기 위원회에서는 교회 지도자들이 전국 주요 도시를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그 방문에 있어서는 각 지방에서 교회의 회의를 개최할 것을 결의하였다. 교회 지도자의 파견 계획은 중화기독교협진회의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지방 방문시 인민정치협상회의 개신교 대표자와 남녀 기독교청년회, 전국협의회 등의 지도하에 진행되며, 그 여비까지도 이들 단체에서 부담했다.
지도자 단체는 5개조로 편성하였으며 동부, 중부, 동남부, 북부 및 동북부(심양) 지방으로 나누어 방문을 실시했다. 그 목적은 신정부의 근본 방침과 기독교계에 대한 요망 등을 성명하고 새시대 교회의 구체적인 방침을 토의하기 위함이었다. 중부지방 방문단이 1949년 12월에 중화기독교협진회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남창에서는 교회 대표자 5명과 정부 대표5명이 모임을 갖고 교회와 정부가 처음으로 교섭을 가졌다.
방문단은 강서 지방의 교회 지도자와 더불어 다수의 정부 요인들과 회담을 갖기도 하였다.
북부 지방 방문단은 1950년 5월 북경에서 주은래를 비롯해서 정부 요인과 몇 차례 회담을 가졌다. 이때 주은래는 교회가 불평등 조약 이래 제국주의와 결탁해서 내려온 것을 지적하고 이 관계를 완전히 단절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후에 오요종이 중심이 되어 새시대의 교회 방침을 설명하기 위해서 선언문 초안을 작성하여 그 해 5월에 오요종을 비롯한 인민 정치 협상대표자를 포함한 기독교 지도자들이 북경을 방문하여 정치 요인 몇 사람과 몇 차례 회담을 갖고 선언문 초안을 제시한 후 주은래의 의견을 물었다.
혁신 선언과 중국 교회
그 후 이 초안을 기독교 지도자 다수에게 제시하였으나 많은 비판이 가해져 이 수정안을 근거로 해서 정정을 하여 다시 주은래에게 제출해 인가를 얻어 그 해7월에 공포하였다. 이것이 그 유명한 '중국 기독교회 선언' 또는 '혁신 선언' 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중국기독교재신중국건설중노력적도경>이란 제목으로 전문을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1)총괄적 임무
① 중국 기독교회 및 단체는 철저하게 공동 강령을 옹호하며, 정부 지도 밑에서 제국주의, 봉건주의 및 관료자본주의에 반대하고 독립, 민주, 평화의 통일된 부강한 신중국을 건설하기 위하여 싸운다.
(2)기본 방침
① 중국 기독교회 및 단체는 최대의 노력과 유효한 방법에 따라 교회의 군중에게 제국주의가 중국에서 저지른 죄악을 인식시키는 한편 과거에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이용한 사실을 인식시켜 교회 내부의 제국주의 영향을 숙청하고 제국주의 중에서도 특히 미 제국주의가 종교를 이용해서 반동 세력을 배양하려는 음모를 경계토록 하며, 동시에 저들이 전쟁 반대, 평화옹호 운동에 참가하도록 호소하고, 정부의 토지 개혁 정책을 철저하게 주지시켜 옹호하도록 교육 시켜야 한다.
② 중국 기독교회 및 단체는 유효한 방법을 사용해서 일반 교인의 애국, 민주의 정신과 자존 자주의 심리를 길러내야 한다. 중국 기독교가 과거에 제창, 지도한 자치, 자양, 자전의 운동은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어 왔다. 금후 최단 기간 내에 이 임무를 완수해야 한다. 동시에 자기 비판을 강화하여, 각종의 작업에서 검토, 정리하고 근검 절약하도록 하여 기독교 혁신의 목표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국 교회는 정부의 지도하에 반제국주의 운동을 추진하여 신중국 건설에 매진할 것을 새롭게 강조하고 나섰으며, 이를 근본 정신으로 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의 교회 전체를 지도하며 통일시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 운동이 바로 삼자 운동이다.
삼자란 자치, 자양, 자전의 약자이지만 1930년대의 중국교회 자립 운동과는 현저한 차이가 있기 때문에, 이 운동의 성격은 철저하게 교회 혁신 운동 및 반제국주의 운동, 애국 운동을 의미한다. 삼자 운동으로서의 활동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혁신 선언의 서명 운동
이 혁신 서명 운동은 최초 선언문 발기일로서 인민정치협상회의 대표를 포함한 교계 지도자 40명의 서명이 있었는데 그 후 계속 서명운동을 펴서 1개월을 경과한 8월까지 1,527명이 서명을 하였고, 1951년 말까지는 326,465명이 하였으며, 1953년 9월까지는 400,222명이 서명함으로써 중국 각 지역의 개신 교회 지도자 대표 절반이 여기에 서명을 하였다. 이 혁신 운동에 앞장섰던 지도자는 1930년대의 삼자운동 책임자였던 오요종이었다.
(2) 반제국주의 운동 및 애국운동
이 운동은 1950년 한국 전쟁 때 '항미원조애국운동' 이라 명칭하고 교인들은 미 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조선을 원조할 것을 표명하였으며 교인이 개인 또는 연명으로 항미원조(抗美援朝)의 글을 써서 인민일보 및 공보 등에 발표하게 했다.
또 전국교회 및 기독교 단체는 '기독교삼자혁신호' 라고 명명하는 전투기 헌납을 위한 모금 운동도 전개하였다. 오요종의 보고에 따르면 15억 원을 목표로 출발하였는데 이것 보다 훨씬 많은 27억 원 이상이 모금되었다고 한다.
또 미국이 일본을 무장시키는 일에 반대하는 강연회와 시위운동을 전국에서 실시하였으며, 월남 전쟁이 발발한 후 1964년 9월에는 반미 투쟁을 지지하는 성명서를 내기도 하였다.
(3) 공소운동
이 공소운동은 교인들 가운데 스스로 반제국주의 분자를 고발하게 하는 운동으로 각지에 공소회를 개최케 하여 제국주의 분자와 친구로 생각되는 사람들이 고발 연설을 하게 하였다.
제1회 공소회는 1951년 5월에 시작하여 그 해 12월까지 108회에 걸쳐서 공소회가 있었다.
1053년 9월까지 133개 도시에서 227회나 성토가 있었다.
고발된 주요 이유는 종교의 이름 밑에서 제국주의와 반동통치 계급의 이익을 꾀하여 출판 사상, 무저항주의, 종말론의 사상을 선전하여 중국 교회의 애국사상을 소멸케 했다는 등의 조항이었다.
또 외국 선교사의 경우는 좋은 집에서 잘 먹고 잘 살면서 단지 중국인에게는 빈곤을 감수하면서 영혼 구원만을 강조하는 일도 이에 해당되었다.
중국인의 경우에는 미 제국주의 수족으로 활약했던 자, 장개석을 돕고 인민을 압박한 자, 장개석 정권하에서 유교적 신생활 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한 자 등이다.
그 후 1958년, 즉 백화제방 시대를 지날 무렵에 전국 각지에서 개신교 대표자 130명이 북경에 초청되어 정부 요인으로부터 반혁명분자로 간주되는 목사, 전도사 6명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이유는 정부의 정책과 공산주의를 비판한 것과 삼자애국운동에 해를 주었다고 진술한 것이다. 대표자들은 각기 임지에 돌아간 후 이 노선에 따라 각지에서 공소회를 개최하였다.
(4) 학습 운동
이 운동은 그리스도를 신봉하는 교인들이 신중국 정치와 가치관을 학습하는 운동이다.
기독교 출판부인 '청년협회서국'은 <신시대 학습총서>를 출판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ː오요종<기독교 혁신운동 학습 수책>
ː유양모<기독교와 애국주의>
ː응원도<기독교적 공척운동>
ː유양모<모택동 사상 학습 수책>
또한 상해, 광주, 북경, 남경, 중경, 서안, 장사, 무한, 항주장 등지에서 시사 학습회를 조직하였다. 이 학습회는 삼자운동위원회와 정부 당국이 공동으로 개최하였다.
예를 들면 1953년 8월 20일부터 11월 16일까지 상해에서 개최한 학습회는 81명의 목사, 전도사 등이 참석을 하였으며, 강사는 9명의 공산당원과 2-3명의 교인이었다.
일과는 아침 30분간 예배를 드리고 강의, 토론으로 학습을 실시하였다. 강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①학습의 목적과 그 올바른 학습태도에 대하여
②중국의 위대함과 장래의 전망에 대하여
③제국주의에 대하여 특히 제국주의가 기독교를 문화 침략을 위해 이용한 것에 대하여
④정부의 종교정책과 삼자운동에 대하여
또한 토론은 참가한 한 사람씩 과거를 말하게 하고 자신에 대한 비판을 하게 하여 새로운 학습에서 얻은 지식의 바탕 위에 자신의 삶을 정립하게 하였다.
(5) 출판물 심사
기독교 출판물은 친미 반공의 독소를 갖고 있으며 이러한 출판물에서 제국주의 사상을 제거하기 위해서 심사하는 일이 출판물 심사이다. 최근 1951년도에 상해, 성도, 한구의 주요 기독교 출판사 서적 1,750종을 심사한 결과 절반 이상이 불합격을 당하였으며 또 상해에서 발행한 약 40종의 정기 간행물에서도 11종이나 정간 처분을 당하였다. 또한 1951년 4월 삼자혁신운동위원회 준비위원회가 성립되었을 때에 정식으로<주간 천풍>을 동 위원회의 잡지로 선정하였다.
삼자운동의 조직화
이상에서 살펴본 대로 애국, 반제국주의, 삼자혁신운동의 조직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으며 1951년 4월 북경에서 북경회의가 개최되었을 때에 개신교 지도자 151명과 정부 요인간의 회의가 열렸다. 이 대에 25명의 인원으로 중국 기독교 항미 원조 삼자혁신운동위원회 준비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해서 전국적인 조직망을 갖게 되었다.
1951년에는 170개, 1953년 9월까지는 257개가 조직되었다.
1954년에는 정식으로 '중국기독교 삼자혁신운동위원회'가 성립되었다.
위원장에는 오요종이 선출되었으며, 이 삼자 운동의 조직은 종전의 어느 교회 단체 보다 가장 많은 교파가 참여한 전국적인 조직체가 되었으며 중국의 모든 기독교를 통합해서 인민 단체로서 정부의 지도하에 혁명과 건설에 협력하고 나섰다.
이상과 같은 삼자운동 조직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종교 정책에 순응, 종교계에서 제일 먼저 새로운 체제로 정비를 한 것이며, 이 후에 카톨릭, 불교, 이슬람교, 도교도 모두 이와 비슷한 체제로 변모하였다.
구체적인 방법
①중국 기독교회 및 단체들 가운데 아직도 외국인 또는 외국의 경제 원조에 의존하고 있는 곳은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서 최단 시일 내에 자립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②금후 중국 기독교회 및 단체는 종교 활동 면에서 기독교의 본질을 깊이 인식하고 교파간의 단결, 지도자 양성 및 교회 제도를 개혁하는 일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일반 활동 면에서 반제국주의, 반봉건주의, 반관료주의, 반자본주의적 교육 및 노동 생산 시대를 인식하여 문예 활동, 식자교육, 의료위생 및 아동 복지 등 인민을 위한 사업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중국 교회 지도자들이 삼자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신중국 건설에 동참한 것은 아니다. 여기에 반대를 하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나타났다.
개신교 대부분이 이 삼자 운동에 협력한 것처럼 말하지만 실은 혁신 선언문에 서명했던 사람들은 전체의 약 절반 정도였고, 이에 반대했던 사람들 중에는 삼자운동에 완강히 저항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들 중에는 얼마 있지 않다가 체포되어 투옥당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 체포 이유가 정치적 이유이지 종교적 이유는 아니었다고 발표하였다.
실질적으로 삼자교회를 반대했던 사람들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왕명도는 북경에서 유명한 설교자로 소문이 나 있었다. 그는 삼자운동은 "예수를 파는 것이다"라고 강하게 삼자교회에 대하여 비판하면서 끝내 삼자교회에 협력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1954년 9월 북경에서 왕명도를 고발하는 공소회가 열렸다. 그 후에도 왕명도는 계속해서 삼자 운동을 반대하고 나섰으며 그가 발행하였던 계간지 <영식(靈食)>에 삼자교회에 대한 반대 의견을 연재하였다.
이 일로 1955년 8월에 체포되었다가 그 다음 해인 1956년에 석방되었다. 그는 1년 간 옥중 생활로 건강을 잃어 출감 후 곧 바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1966년대에 접어들면서 삼자 운동 조직은 점점 확대, 강화되어 갔다. 이와 관련되어서 다른 성격의 교파와도 합동 운동이 진척되어 갔다. 또한 1958년 이후 노동법의 변화에 따라 목사, 전도사도 종전 보다 더 많은 시간을 생산 현장에 충원하게 되었다. 이 일로 한 지역에 하나의 교회만 남겨 두고 여러 교파가 합동이 되어 한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고, 이 일로 문을 닫는 교회가 속출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북경에 잇던 65개의 교회가 동서남북에 각각 1개만 남겨 두고 모두 문을 닫고 말았다. 역시 상해에서도 200여 교회 중 23개 교회만 남겨 두고 모두 문을 닫고 말았다.
폐쇠된 교회당은 정부가 공용기관으로 사용하였으며 많은 목사, 전도사, 신학생들이 주로 노동현장이나 공장에서 종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계로 교회는 합동되고 이제 까지 삼자 운동에 가입하지 않았던 교회도 정부의 강요로 이 운동에 모두 참여하게 되었다.
산서성 태원에서는 중화기독교회, 내지교회, 구세군, 기독교청년회, 소그룹교회 등 8개 교파가 합동해서 하나의 교회로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여기에 3-4명의 목사님만 남겨 두고 다른 목사는 전부 생산 노동현장으로 투입시켰다.
이 가운데 노령자와 병약자는 퇴임을 시켰다. 따라서 8개 교단의 모든 행정과 조직은 해산되고 교회의 운영은 삼자운영위원회에서 맡고 교회 재산도 모두 위원회가 관리하였다.
또한 교파를 합동하였기 때문에 교회 의식이나 성경 해석도 공동으로 규칙을 만들었고, 찬송가는 삼자운영위원회에서 편집하여 하나로 만들었으며, 성경 강의에서는 최후의 심판을 제외시켰고, 정의와 악의 대립, 노동의 신성, 교회는 하나라고 강조하였다.
이상과 같이 삼자운동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종교정책을 위한 운동이었음으로 삼자교회는 교회로서의 본질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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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개신교회사'의 책에서 발췌하였습니다.
제 목: 중국 개신교회사
지은이: 김수진
출판사: 홍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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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삼자교회신학사상과 최근 신학동향
인보라
왕쓰웨 목사
(중국복음선교회 중국교회와선교연구소 소장)
2000년 5월 25일
Ⅰ. 들어가는 말
1949년 중국공산당에 의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은 중국정치 발전에 있어 획기적인 사건일 뿐만 아니라 중국의 기독교와 신학사상의 발전에 있어서도 전환점이 되게 하였다.
중국의 기독교는 1949년 이후, 교회의 조직과 체제, 신앙의 내용과 실천, 목회자의 형태와 탄생, 신학사상의 형성과 발전 등의 측면에서 그 이전과 비교해서 큰 변혁을 맞이하게 되었으며, 특히 신학사상의 영역에서 새로운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과 이에 따른 사회의 변화는 교회인사(敎會人士)로 하여금 막대한 충격과 새로운「영성체험」을 갖도록 하였다. 그 결과 기존 중국교회의 신학사상에 대한 재고(再考)와 함께 신학사상의 대립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본 글의 목적은 1949년 사회주의 중국의 수립이후 삼자교회(三自敎會) 내의 신학사상의 형성요인과 신학사상의 내용을 탐구하고 또 최근의 신학적 동향을 살피는데 있다.
본 글에서 말하는 삼자교회의 신학사상은 실제에 있어 삼자교회의 모든 교회인사와 목회자들의 신학사상을 가리킨다기 보다는 삼자교회를 전국적으로 이끌어 가는 지도자와 지도급 신학자, 특히 남경(南京)의 금릉협화신학원(金陵協和神學院)의 대표적인 신학교수들의 신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대부분의 삼자교회의 교회인사나 목회자들은 복음주의적이며, 보수적인 신학적 성향과 경향을 지니고 있지만 전국적 삼자교회 지도자나 삼자교회를 대표할 수 있는 신학자들과 금릉신학원의 대표적인 신학교수들은 사회주의 중국이라는 상황 속에서 신학사고와 신학적 체계를 세워 나가고 있다. 따라서 본 글은 이들을 중심으로 한 삼자교회의 신학사상을 탐구하고자 한다.
필자는 이하에서 이들의 신학사상을「삼자교회신학사상」이라고 통칭 할 것임을 밝힌다. 글의 전개에 있어 먼저 삼자교회신학사상의 형성요인을 밝히고, 삼자교회신학사상의 주요내용을 인간론, 현세와 종말론, 신론, 기독론을 중심으로 살필 것이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라고 할 수 있는 최근의 삼자교회 신학사상의 제반 동향들을 알아보고, 마지막으로 삼자교회신학사상에 대해 다각적인 평가와 전망을 해 보고자 한다.
Ⅱ. 삼자교회 신학사상의 형성요인
삼자교회 신학사상은 1949년 중국에서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이후 중국공산당과 정부의 지도와 협력으로 기독교에서 적극적으로 전개된「기독교혁신운동」과「삼자애국운동」을 지도하거나 참여한 교회인사와 신학자들이 사회주의 사회현실과 상황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형성, 발전시킨 독특한 신학사상이다.
이와 같은 신학사상은 과거 중국기독교의 신학발전의 역사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새로운 신학사상이며, 서재에서 탄생한 사변적 신학이라기 보다는 현실에 입각한 실천적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삼자교회 신학사상은 현실적이며, 상황적인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정치적이며, 자위적(自衛的)인 특징을 지니고 있다. 1949년 이후의 형성된 삼자교회 신학사상은 그 독특한 형성요인들이 있다.
1 사회주의 정권과 사회에 대한 신학적인 긍정과 의미의 부여
1949년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은「해방」의 환호와 더불어 새로운 정권과 사회에 대해 불안과 두려움이 있었으며, 특히 기독교회내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공산당의 무신론(無神論) 사상이 교회에 대해 핍박을 갖아다 줄 것이라고 두려워하였다.
한편 일부 교회인사는 공산당을「적(敵) 그리스도」,「붉은 용」으로 칭하며「세상종말」을 선포하기까지 하였다. 또 당시 보수적이며, 근본주의적 신앙관과 신학입장은 세상과 인간을 부정적으로 보며, 하나님과 세상, 신앙과 실천, 경건과 현실 등을 이분법적(二分法的)인 시각으로 보고 있기에 소위 반(反)사회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사회주의 혁명과 정권에 대해 긍정하면서 삼자애국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회인사와 신학자들(이하 삼자신학자들로 약칭)은 기성교회와 보수파들이 그들의 신앙관과 신학적인 견해에 의해 사회주의 정권과 사회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고 주장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으며, 이런 견지에서 적극적으로 사회주의 정권과 사회에 대해 긍정하는 신학주장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결과 삼자신학자들은 인간론과 현세와 종말론을 중심으로 신학적 체계를 세워나갔다.
삼자신학자들은 인간의 본성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각을 배격하였으며, 인간은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그 하나님의 형상이 비(非)신도들 속에도 있다고 하였으며, 현재의 사회주의 사회는 세상의 종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통치하고 이끄시는 새로운 제도의 사회라고 긍정하였다.
또 인간의 역사란 긴 하나님의 창조·구속(救贖)·성화(聖化)의 과정 속에 놓여 있으며, 사회 속에서 나타난 진선미(眞善美)는 모두 하나님의 참 진리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한편 개혁개방의 시대이후 삼자신학자들은 중국교회가 처한 상황이「개혁」이기에 개혁에의「참여」가 중국교회신학의 상황화의 관건이라고 하여, 개혁개방 사회에 대한 긍정적인 참여와 건설을 주장하게 되었다.
2 삼자애국운동의 존립과 발전에 대한 정당성 부여
사회주의 중국의 수립이후 공산혁명과 사회주의 정부에 대해 적극적인 지지와 긍정의 입장을 지닌 기독교인사들은 공산당과 정부의 지도와 협력 속에서「기독교혁신운동」을 전개하였고 그후 「기독교 반제애국(反帝愛國)삼자혁신운동」과「기독교삼자애국운동」등의 명칭으로 기독교에 대한 혁신과 개조를 단행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움직임은 신학적으로 보수파, 근본주의파, 복음주의파에 속하는 인사들에 의한 비판과 공격을 받게 되었으며, 이런 비판과 공격은 단순한 신학적 차이와 입장의 비판을 넘어서 삼자애국운동의 세력과 삼자애국운동을 통한 교회의 통합 움직임에까지 막대한 영향을 끼치는 엄중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따라서 삼자신학자들은 보수파 등에 대한 신학적 응답과 대응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 되었으며, 이로서 삼자애국운동의 존재와 발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길 원하였다.
1950년대에 대표적인 인물은 왕명도(王明道)였다. 그는 먼저 기독교혁신운동과 삼자애국운동을 이끄는 지도자들을「거짓 선지자」,「가롯 유다의 제자」라고 비난하였고 또 그들의 중요한 구호(口號)들인「제국주의 사상적 독소(帝國主義思想毒素)」와「연합하여 하나가 되자(合而爲一)」에 대해 비판을 하였다.
또 삼자신학자들인 오요종(吳耀宗), 정광훈(丁光訓), 왕유번(汪維藩) 등을 신학적으로「현대파(現代派」,「불신파(不信派)」라고 규정하면서 이들「현대파」들은 성경의 무오성(無誤性), 동정녀 탄생, 속죄, 신도의 부활, 예수의 재림 등에서 근본주의파와 심각한 차이점을 보이고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왕명도는 이들 모두를 "신앙이 없고, 예수를 믿지 않으며, 기독교인이 아니고 양 무리 속에 들어온 양의 탈을 쓴 늑대이다" 라고 비난하였다.
삼자신학자들은 보수파와 왕명도 등이 주장하는 현세에 대한 부정적 시각과 역사발전에 대한 비관적 견해를 비판하였으며,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현세와 세상을 축성(祝聖)하는 것으로, 성(聖)과 속(俗)의 단절을 제거하였으며, 신도와 비신도 사이의 차이점이 없고, 대립될 필요가 전혀 없다고 보았다. 보수파들의 신학적 비판이 삼자신학사상의 현세와 종말론, 인간관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3 삼자애국운동의 존립과 발전에 대한 정당성 부여
1950년대에 시작된 삼자애국운동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와 기독교 신도들을 단결시키고 사회주의 중국 건설과 발전에 적극적인 노력과 공헌을 하도록 지도하고 이끌고 있다. 이 막중한 과업을 이루기 위해 삼자애국운동의 지도자와 삼자교회의 교역자는 신도들을 목양하면서 항상 사회주의 건설에 유념해야 했다. 사실 이 문제는 목회 실천적인 문제와 직결될 뿐만 아니라 신앙관과 신학사상과 긴밀한 내재적 관계가 있다.
1950년대 보수파들의 이원론적인 신앙관과 신학입장은 하나님과 세상을 분리시키고, 신도와 비신도의 간격을 벌여놓는 결과를 낳게 하여, 신도들을 이끌고 사회주의를 건설하는데 크나큰 사상적 장애로 간주하였다.
따라서 이에 대한 비판과 세상과 비신도에 대한 적절한 신앙적이며, 신학적인 의미 부여는 삼자애국운동을 통한 기독교회의 목양에 중대한 의미와 영향을 주게 되었다.
한편 1980년대 이후 삼자애국운동은 기독교와 신도들을 사회주의 현대화에 노력하고 공헌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할뿐만 아니라 개혁개방이 주는 많은 도전들과 자전(自傳) 문제의 시급성, 그리고「진정한 중국의 기독교」가 되기 위해 신학적인 작업과 함께 중국특색의 신학의 구축 문제가 진지하게 제기되었다. 따라서 삼자애국운동과 삼자교회는 이러한 다양한 삼자교회의 목양과 자전문제와 도전에 응답하기 위해 삼자신학에 대한 형성과 구축의 필요성이 한층 더 느껴지게 되었다.
삼자신학자들은 1950년대에 소위「신학군중운동(神學群衆運動)」을 전개하여, 현세와 인간본성의 문제, 신앙과 신령한 것에 대한 토의를 전개하였으며,
1980년대에는 믿음과 행위, 영성과 윤리, 역사의 종말과 현실의 역사 등을 진지하게 사고하였다.
특히 1990년대 이후 띵꽝쉰(丁光訓)은「신학사상의 다원화」를 주창하였으며, 현재의 중국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의 주석인 루오꽌쫑종(羅冠宗)은「신학사상과 사회주의 사회와의 상호적응」과 중국기독교협회의 회장인 한원타오(韓文藻)도「신학사상의 활성화와 창조」들을 제기하여 기독교의 신학사상이 사회주의 중국사회 속에서 어떻게 전해져야 하며, 봉사해야 하며, 또 어떤 역할들을 감당해야 할 지를 숙고하기 시작하였다.
Ⅲ. 삼자교회신학사상의 주요내용
1950년대 이후 삼자신학자들은 그들에게 제기되었던 수많은 신앙적이며, 신학적인 문제들을 놓고 사회주의 중국 정권과 사회에 대해 긍정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신학사고를 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사회주의의 정치사회현실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으며, 신학의 주제를「화해(和解)」로 설정하였으며, 항상「인민(人民)」의 신학이 되기를 원하고 있다. 삼자교회 신학사상은 인간론, 현세와 종말론, 신론, 기독론을 주요내용으로 삼고 있으며, 이것들에서 삼자교회신학사상의 특징들이 잘 반영되고 있다.
1. 인간론
삼자교회신학사상의 인간론은 주로 인간의 하나님형상, 원죄, 인간의 본성, 비기독교인의 도덕성을 중심으로 전개와 발전되었다. 삼자신학자들은 우선, 인간은 비록 범죄하여 타락하였으며, 원죄가 있음을 인정하지만 인간이「전적으로 타락」하였으며,「인간 안에는 선한 것이 전혀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반대하였다.
오히려 인간은 타락하였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으며, 여전히 하나님의 영광(고전 11:7)이라고 보았다. 인간 안에 있는 사랑, 공의, 선(善), 고상한 도덕, 희생정신 등은 비록 인간이 타락하였지만 여전히 인간 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다는 것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인간을 비관적이며, 절망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하고 오히려 인간의 긍정적인 요소를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한편 삼자신학자들은 인간이 죄인이며, 원죄가 있음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오히려 은혜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죄의 대한 메시지보다 은혜에 대한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원죄란 인간의 한계성과 국한성(局限性)이며, 일종의 심령의 빈곤상태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원죄에 대한 강조로 말미암아 인간을 전적으로 부정적으로 보고 가치없는 존재로 치부하지 않기를 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원죄에 대한 정의도 한계성, 국한성, 빈곤상태로 약화시켜 원죄를 너무 비극적, 절망적으로 보지 않으며, 해소불능의 심각한 문제로 간주하지 않고자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삼자신학자들은 비기독교인의 도덕성문제에 대해 그들이 도덕성을 지닐 수 있는 것도 그들 안에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이며, 이들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긍정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특히 인간은 모두 하나님의 긴 창조과정의「절반의 완성품(半成品)」이며, 인생을 살면서 지속적으로 가공(加工)하여「완성품(成品)」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에 대해 차별적으로 생각하고 또 갈등적 관계가 있다는 것을 해소하고 오히려 동등하게 보려 하는 것이다.
특히 인간을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으로 양분시키는 것보다「완성품」을 향해 가공되어져 가는「절반의 완성품」으로 보고 싶어하였다.
2. 현세와 종말론
삼자교회신학사상의 현세와 종말론은 주로 현세와 역사에 대한 이해, 성(聖)과 속(俗)의 문제, 창조와 구속의 관계, 천년왕국과 종말 등을 골자로 전개되었다.
먼저, 삼자신학자들은 현세에 대해 부정적으로 보거나 하나님과 세계를 대립적으로 이해하고 규정하는 것을 배격하고 있다. 오히려 하나님이 현실세계를 통해 인간들에게 주는 계시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현세를 긍정적으로 해석하려고 하고 있다.
따라서 이 모든 세계를 누리고, 좋게 보고, 찬양하며, 감사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세상의 모든 진선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보았다. 또 인류의 역사를 하나의 통일체로 보고 창조, 구속, 성화의 긴 과정의 일원사관(一元史觀)을 주장하고 있으며, 역사를 세속의 역사와 구속의 역사로 구분하는 것은 인위적이며, 억지라고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세속(俗)과 거룩(聖)의 절대적인 구분이 없어졌으며,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성사(聖事, Sacrament)로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삼자신학자들의 이러한 현세관과 역사관은 현재의 역사를 하나님의 역사 밖으로 배제하는 것을 반대하면서 오히려 현세와 현재의 중국공산당의 중국통치를 하나님의 긴 역사의 일부로 귀속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 현세와 현재의 공산당 통치와 사회주의 정권과 사회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문제에 있어 삼자신학자들은 역사의 창조는 끝난 것이 아니며, 지속적으로 창조의 과정 속에 있다고 보며, 역사를 추진하는 힘과 동력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인류의 최후가 파멸이며, 이 세상이 소멸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다.
이들은 성육신된 그리스도는 창조를 계속하였고, 구속을 완성시켜, 역사를 최종의 정점(頂點) 즉 오메가 포인트(Omega Point)로 이끌어 나간다고 하였다.
그래서 현재가 역사의 종말이며, 말세(末世)라고 주장하여 예수의 재림을 예비하라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며, 이는 복음(福音)이 아니라 화음(禍音)이다라고 비난하였다. 특히 전천년설(前千年說)에 대해 배격하고 있으며, 무(無)천년 혹은 후(後)천년이 바람직한 종말관이라고 하였다.
또 하나님이 사랑이며, 이 세상을 창조하셨기에 이 세상을 파멸시킬 수 없으며, 이 세상은 더욱 더 발전적이며, 진보되며, 진선미와 사랑이 가득한 세상으로 달려갈 것이라고 하였다.
삼자신학자들의 이런 종말관은 사회주의 현실과 통치와 건설사업에 대한 신앙적이며, 신학적인 긍정을 하면서 사회주의 현실과 통치를 비난하는 행위나 사회주의 건설과 현대화 사업을 참여치 않거나 저해하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긴 창조의 역사를 역행하며, 거부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3. 신론
삼자교회신학사상의 신론은 무신론의 사회에서 신에 대한 존재의 증명이나, 무신론 문제에 대한 문제제기와 비판보다는 사회주의 중국의 통치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속성이 어떻게 계시되었으며, 또 어떻게 역사를 움직여 나갔는지에 대해서만 논의를 발전시켰다.
우선 신 존재 증명이나 무신론에 대한 기독교의 유신론변증은 사회주의 정치 이데올로기와 철학사상과 직접적으로 충돌되기에 논의의 전개를 피하였다. 단지 종교가 비록 아편이며, 일부 사람들에게 마취 작용을 하였다 할 지라도 하나님의 존재가 이로서 부정되거나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라고 만 하였다.
한편 신론에 대한 논의는 1950년대보다 문화대혁명(1966-1976)의 민족적 고난시기 이후에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고 신론 문제를 깊이 있게 숙고하였다.
삼자신학자들은 민족적이며, 교회적이며, 개인적인 고난 속에서 사랑의 속성과 함께 질곡의 역사를 이끄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체험하게 되었으며, 뿐만 아니라 고난을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으로 이해하여 심판과 징벌이라고 생각하는 것을 철저히 배격하였다.
삼자신학자들은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의 속성이라기 보다 모든 속성보다 우위에 있는 속성이며, 하나님 자신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주의 기초이며, 원리이며, 진리이기에, 하나님은 이 우주와 역사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통치하시며, 이끌어 나가며, 완성한다고 보았다. 이런 견지에서 하나님의 부성(父性)보다는 모성(母性)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삼자신학자들의 사랑의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신론의 논의전제를 통해 사회주의 통치 속에서 나타난 부정적 역사발전이나 이에 대한 부정적인 신학적 해석을 될 수 있는 대로 배제하면서 하나님의 사랑 속성 강조를 통해 조화(Harmony)를 이루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4. 기독론
삼자교회신학사상의 기독론은 그리스도의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에 대한 논의와 쟁론을 피하고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와 성육신을 중심으로 전개하였다.
우주적 그리스도란 하나님의 창조과정 가운데 하나님과 한결같이 동역(同役)하며, 하나님 사랑의 계시자로서 그의 전능하신 명령으로 만물을 붙드시는 부활의 주라고 하였다.
또 우주적 그리스도가 갖는 의미를 그리스도의 주재하심과 관심과 보호는 온 우주에까지 이르고 있으며, 그리스도는 온 우주를 주재하는데 사랑이 그 본질이라고 하였다.
삼자신학자들이 그리스도의 우주적 특징을 강조하므로 그리스도가 우주를 주재하고, 통괄하며, 사랑하고 있으며, 이로서 그리스도는 우주와 역사, 인간, 그리고 사회와 대립적인 존재가 아님을 나타내 보이고자 하였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에 대해 삼자신학자들은 성육신된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는 과정을 보게 될 뿐만 아니라, 또 하나님과 인간, 말씀과 육신, 영원과 역사, 무한과 유한, 절대와 상대, 생명과 부활, 믿음과 행위, 영성과 몸, 하늘과 인간, 거룩한 일(聖事)과 세상적인 일(俗事) 등의 모순관계를 해결하였으며, 결국 성육신된 그리스도를 통해 통일과 상생(相生)을 이루게 되었다고 강조하였다.
특히 성육신으로 그리스도는 세속의 생활에 참여하였으며, 세속생활을 축성하여 결국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었다고 하였다. 성육신적 그리스도론은 현실적 차원에서 제기되고 있는 하나님과 세계, 성과 속 등의 문제를 해결하고 또 모든 것을 이원론적으로 보고, 주장하는 이들에게 일원론적인 근거를 제시할 수 있기 때문에 삼자교회신학사상의 중요한 부분이 되고 있다.
결국 우주적 그리스도와 성육신된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론을 전개하게 된 것은 모든 현실과 우주와 역사를 포용하고 내포하는 그리스도를 주장하는 것으로 현실사회에 대한 긍정과 현실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성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Ⅳ. 최근 삼자교회 신학사상의 동향
1990년 이후 삼자교회신학사상은 당과 정부가 종교계에게 종교와 사회주의 사회와의 상호적응에 대한 수행문제와 관련된 신학사상 측면의 작업진행의 필요성과 진정한 중국기독교가 되기 위한 중국특색의 신학사상의 구축, 또 해외와의 빈번한 교류와 왕래를 통한 해외 신학사상과의 접촉으로 인한 자극과 신학적 수용문제 등으로 새로운 신학사고와 신학사상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다음은 최근에 제기된 신학사상의 다원화, 중국특색적 신학이론의 구축으로 진행된 토착화작업, 해외의 신학 특히 서구신학과의 교류를 통한 신학적 수용 등을 중심으로 최근 삼자교회신학사상의 동향을 알아보고자 한다.
1. 신학사상의 다원화 논의
삼자교회에서 신학사상의 다원화에 대한 논의는 당 총서기인 강택민(江澤民)이 종교계에게 종교와 사회주의 사회와의 상호적응을 요구하면서 정광훈이 진정한 적응은 사상적인 적응이며, 이는 신학사상의 적응이라고 하면서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정광훈은 중국에서 신학사상의 건설이란 실제에 있어 신학사상과 사회주의 사회와의 상호적응을 촉진시키는 것을 가리키며, 이것은 애국주의와 사회주의를 받아들이는 신학사상적 장애를 제거하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애국주의와 사회주의를 옹호하는데 사상적 기초를 갖도록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따라서 정광훈은 신학사상의 활성화를 위해 신학사상의 다원화를 제기하였는데, 즉 신앙은 하나이지만 신학관점의 다양(多樣)과 다종(多種)을 추구하게 되었다.
신학사상의 다원화 논의는 사실 무엇보다도 신학사상이 사회주의 사회와 적응을 하면서 애국과 사회주의에 대한 옹호를 신학사상적으로 정당화하는데 큰 의미를 두고 있다.
즉 신학사상의 다원화 제창을 통해 다양한 신학적 관점을 통해 사회주의 정권과 사회를 옹호하고 뒷받침하기를 원하였던 것이다. 삼자신학자들은 이런 측면에서 당과 정부의 충실한 봉사자가 되었다.
한편 신학사상의 다원화 논의를 통해 개혁개방이후 중국기독교내에 여전히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는 보수적이며, 복음주의 성향의 교회인사들의 신앙관점과 신학입장을 제어하기 위함이었다.
즉 보수파와 복음주의파들이 삼자애국운동와 삼자교회의 지도자들을 지속적으로「신앙이 없는 파(不信派)」라고 비판하고 있어 이들에 대한 적절한 대응이 필요하였는데 신학사상의 다원화 논의를 통해 보수파와 복음주의파들을「교회의 경찰로 자처하는 자들」의「비도덕적이며」,「사랑이 없는」행위라고 응답할 수 있게 되었다.
2. 중국특색적 신학이론을 구축해가는 토착화 작업
1979년 개혁개방이후 삼자애국운동은 과거「삼자(三自)」에서「삼호(三好)」로 그 정책과 노선을 조정 하였으며, 삼자교회의 목양문제를 관심 갖기 시작하였다.
「삼호」를 잘 이룬다는 것은 진정한 중국의 기독교를 구축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에 따라 중국특색의 신학이론의 건설을 제창하였다. 삼자신학자들은 중국특색적 신학이론의 건설을 위해 기독교와 중국 전통문화와의 대화와 접목, 융화 등의 문제를 진지하게 사고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토착화신학 작업이 본격적으로 삼자교회신학의 영역으로 들어오게 되었으며, 삼자교회신학사상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삼자신학자들의 토착화 작업은 일단 기독교와 중국 전통문화의 문제를 탐구하지만, 단순하게 기독교와 중국 전통문화와의 차이점, 일치점, 상통성(相通性), 구별성 등을 찾고 비교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를 통해 사회주의 정권과 사회에 대한 정당성 부여와 함께 사회주의 정권과 사회에 대한 중국특색의 신학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즉 삼자교회신학의 토착화 작업은 신학적인 의미와 중국 전통문화적인 의미를 지닐 뿐만 아니라 사회현실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으며, 사실 사회현실적인 의미가 근본이면서 지향노선이며,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다.
삼자신학자들 가운데 토착화 작업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사람은 전(前) 중국기독교협회의 부회장인 썬이반(沈以藩)과 현재 남경의 금릉협화신학원의 교수인 왕유번(汪維藩)이다.
썬이반의 토착화 작업의 방법은 중국 전통문화 특히 유교(儒敎)사상의 심층으로 들어가 장기적인 가치가 있는 부분을 찾아내고, 기독교 신앙이 중국민족의 우수한 문화적 전통을 통해 중국의 인민군중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다.
썬이반은 여기에서「중국의 인민군중이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을 강조하였는데 이것이 썬이반과 삼자신학자들이 기타의 중국 토착화신학자와 토착화 작업을 하는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
썬이반은 먼저 기독교의 신학주제인 성육신, 인간의 본성,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 등과 유교사상과 접목을 시도하였다. 특히 성육신을 통해 하나님은 세상 안에 계신 하나님임을 강조하면서 유교의 실천이성과 현실적 인간관계와 접목하면서 현실과 현세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거나 입장을 지니는 것은 기독교신앙과 중국의 전통문화와 위배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런 썬이반의 토착화신학은「상황화된 토착화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왕웨이반의 토착화 작업은 썬이반에 비해 다루는 영역과 내용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고 할 수 있으며, 삼자신학자들 가운데 가장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왕웨이반의 토착화 작업의 방법은 먼저 기독교신앙과 중국문화 사이의 융합점을 찾고 그후 기독교신앙과 신학에 대한 중국문화적 의미를 부여하며, 마지막으로 중국문화적인 의미를 부여받은 기독교신앙과 신학을 사회주의 현실과 사회적 의미를 찾고 평가를 하는 것이다.
왕웨이반은 썬이반이 단순히 유교사상과의 접목을 시도한 것에 반해 중국의 전통적 사고(思考), 중국전통의 논리형식, 중국의 전통문화 등 세가지 측면에서 토착화 작업을 진행하였다.
왕웨이반은 중국의 전통문화 가운데「실천중시(篤行)」가 중요한 부분이며, 바로 중국 전통문화의「실천중시」와 기독교의 실천적 신앙과 신학을 접목시키면서 기독교의 실천적 신앙과 신학은 기독교적 의미를 넘어서서 중국의 전통문화적 의미를 지닌다고 하였다. 즉 기독교의 실천적 신앙과 신학에 대한 중국의 전통문화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리고 왕웨이반은 여기에서 토착화 문제를 종결시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 현실과 사회에서 실천적 신앙의 결여와 실천적 신학에 대한 부정은 기독교 신앙과 중국의 전통문화를 배격하는 것으로 비판을 잊지 않고 있다. 왕웨이반의 이런 토착화신학은「토착화된 상황화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3. 서구신학사상과의 교류와 수용
1979년 개혁개방이후 삼자교회와 해외교회들과 교류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확대되어지자 과거 서구 신학사상에 대한 적대적이며, 비판적인 태도에서 교류와 수용의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1980년대에 띵광쉰은 세계의 수많은 신학학파는 삼자신학과 부합되지 않아 수용할 가치가 없다고 비판하였지만,
1990년대 이후 상호교류를 통해 상호보완하고 서로 풍부하게 할 수 있다고 하여 포용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한원타오는 정치적으로 중국의 상황에 부합되고 신학적인 지향성도 적극적으로 작용된다면 서구의 신학사상을 수용하는데 적극적으로 고려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삼자교회신학사상에서 서구의 많은 신학사상 가운데 해방신학과 샤르뎅(Teilhard de Chardin)신학, 그리고 과정신학에 대해 개방적이며, 심지어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먼저, 삼자신학자들은 해방신학이 실천(Praxis)을 중시하고 또 역사실천과 인민의 입장에서 신학을 출발하고 있는 것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특히 해방신학이 사회의 어두움과 식민주의와 제국주의를 폭로하는 것에 대해 매우 찬동하였다.
그러나 해방신학이「해방」을 신학의 주제로 설정하는 것과「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편에 서고 있다」고 하여 가난한 자에 대한 이상화, 절대화, 우상화하는 것에 대해 반대의사를 보였다. 삼자신학자들은 신학의 영원한 주제는 「화해」라고 하였으며, 이는 하나님과 인간과의 화해와 신자와 비신자와의 화해를 포함하고 있다. 또 가난한 자를 이상화할 때 부자(富者)를 배격하게 되어 사회의 혼란이 생길 수 있다고 하여 가난한 자에 대한 절대화에 대해 유보하는 자세를 보였다.
삼자신학자들은 샤르뎅의 신학관점과 사상을 대량으로 수용, 흡수하고 있다. 특히 정광훈은 샤르뎅의 신관, 기독론, 인간론, 역사관, 종말론을 적극적으로 그 자신의 신학에 흡수하고 있다.
삼자신학자들은 샤르뎅이 하나님을 삼위일체의 공동체이며, 권력에 대한 의지(Will-to-Power)가 아니라 교제에 대한 의지(Will-to-Fellowship)로 보는 것을 수용하고 있으며, 특히 샤르뎅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무비판적으로 흡수하였다.
우주적 그리스도론을 수용하게 된 것은 그리스도가 우주의 주재자로서 모든 우주에 대해 관심을 갖고 사랑하고 있으며, 그런 그리스도는 사랑을 본질로 우주를 주재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는 문화대혁명을 겪은 중국인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심판과 징벌의 하나님이 아니라 사랑과 주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으며, 이런 샤르뎅의 우주적 그리스도론은 중국의 정치, 사회현실에 적합한 그리스도론이며, 적절한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된다.
한편 샤르뎅이 인간을 하나님의 긴 창조과정의「절반의 완성품(半成品)」이며, 인생을 살면서 지속적으로 가공(加工)하여「완성품(成品)」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수용하고 있으며, 이런 그의 인간관은 모든 인간은 신도와 비신도로 구분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하나님의 긴 창조과정의 일부로 보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신도 뿐만 아니라 공산당원들 까지도 적극적으로 수용하게 된다.
한편 샤르뎅이 역사를 오메가 포인트로 향하는 과정이며, 우주의 종말은 진선미와 믿음, 소망, 사랑의 실현으로 보는 것을 적극적으로 환영하고 있으며, 이로서 보수파와 전천년설파의 주장을 견제할 수 있게 되었다. 전체적으로 삼자신학자들은 샤르뎅의 신학사상을 적극적으로 그들의 신학 속에 수용하고 있으며, 그 중 띵꽝쉰(鄭光訓)은 샤르뎅신학의 열렬한 지지자이다.
삼자신학자들은 과정신학이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며, 성육신사상은 세상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수정하고 보완해준다는 것에 대해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특히 인간은 하나님의 창조과정의 참여자이며, 우주에서의 창조자의 동역자(Co-Creators)이라는 주장과 인간이 존엄성과 아름다움을 지닐 수 있는 것도 우주에서 하나님의 동역자이기 때문이라고 하는 부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있다.
과정신학의 신관과 기독론, 인간관, 그리고 창조관은 현실 속에서 하나님을 더 이상 징벌과 심판의 하나님이 아니며, 성육신 사상을 통한 만물과 사회를 긍정하며, 사회 속에 나타난 선과 악, 진보와 후퇴 등도 모두 긴 하나님의 창조의 일부로 간주할 수 있다. 이렇게 과정신학을 수용하는 것은 과정신학이 사회주의 중국현실과 사회를 신학적으로 해석하고 조화를 이루는데 적절하기 때문이다.
Ⅴ. 삼자교회 신학사상의 평가
1949년 이후 사회주의 중국의 기독교회에서 생성되고 전개된 삼자교회신학사상을 어떻게 보아야 하며, 또 어떻게 평가할 수 있겠는가?
첫째, 삼자교회 신학사상은 중국의 기독교 신학사상의 역사에 있어 전례가 없었던 획기적인 신학사상으로서 1949년 이전 서양선교사들에 의한 선교신학과 반기독교운동에서 중국인 신학자들에 의해 창출된 토착화신학(本色神學)과 구국신학(救國神學)과 신학의 출발점, 사고방법, 내용 등 측면에서 현격한 차이와 독특성을 보인 신학사상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삼자교회신학사상은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된 이후 공산당의 영도와 공산정권, 사회주의 사회와 현실에 대해 옹호하고 지지하므로 생성된 사회주의 애국의 변호신학이다.
삼자신학자들은 한편으로 보수파의 신앙관과 신학입장을 논박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당과 정부의 정치노선을 긍정하는 신학사고와 탐구를 하여 왔다. 따라서 정치적으로「반제국주의 애국」을 강조할 때 선교사와 보수파의 신학관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으며, 사회주의 혁명과 정권을 정당화하는 신학을 구축하였다.
또 정치노선이「개혁개방」으로 전이될 때 세상에 대해 염세적이며, 소극적이며, 현세가 종말이라고 선포하는 보수파와 전천년파의 신학주장을 배격하였으며,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과 사회주의 사회에 적합한 성육신과 우주적 그리스도론, 사랑의 신론 등을 중심으로 하여 신학을 구축하였다.
삼자교회의 이러한 사회주의 애국의 변호신학은 삼자교회신학의 특징이자 독특성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기독교 신학역사에 있어 하나의 정치이념과 정당을 수호하면서 신학적인 사고와 탐구를 한 것은 삼자교회신학이 그 첫 번째 시도였다.
셋째, 삼자교회 신학사상은 당과 정부의 정치노선과 그에게 부여한 통일전선(統一戰線)의 임무를 따르면서 신학의 사고와 구축을 하여왔다. 따라서 삼자교회 신학사상은 항상 시대의 다양한 정치노선을 찾아야 함은 물론이거니와 당의 통일전선 정책을 올바로 인식하여 신학을 전개해야 하기에 일종의 통전신학(統戰神學)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삼자신학의 통전임무는「반제국주의 애국」,「반봉건 반관료자본주의」,「새로운 중국의 건설」이기에 제국주의와 봉건, 관료자본주의에 관계된 신앙과 신학에 대해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새로운 중국의 건설을 위해 새로운 인간관과 현세와 종말론을 구축하였다.
1980년대 이후 삼자신학의 통전임무는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 건설이기에 보수파의 이원론과 전천년설파의 종말론을 적극적으로 배척하면서 성육신론과 사랑의 하나님, 창조, 구속, 성화의 긴 역사관을 제시하였다. 결국 삼자교회신학이 통일전선적인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통전신학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지닌 신학적 위상이면서 그의 운명과 사명이기도 하다.
넷째, 삼자교회 신학사상은 시종(始終) 사회주의 사회의 현실상황을 신학의 출발점, 지향점, 귀결점으로 삼고 있으며, 항상 상황화적인 사고를 견지해야 하기에 일종의 상황화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삼자신학자들은 모든 신학사고란 상황화의 사고라고 여기고 있으며, 늘「시대의 조류」와「변혁의 조류」에 따라 신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비록 삼자교회 신학사상이 상황화의 신학이지만 삼자신학자들이 인간론, 현세와 종말론, 신론, 기독론 문제를 사고하고 심지어 토착화 문제를 처리할 때 항상 사회주의 정권과 사회현실을 긍정하면서 조화와 적응을 염두 해두면서 신학적 전개를 해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권과 사회현실을 부정하고 조화와 적응을 할 수 없는 모든 신앙과 신학적 입장은 비판과 거부될 수밖에 없다.
다섯째, 삼자교회신학사상의 형성과 발전에서 볼 때 삼자교회신학은 사회주의 애국의 변호신학이며, 통전신학, 상황화신학 등으로 규정할 수 있는데 향후의 발전추세와 전망은 어떠한가?
사실 삼자교회신학사상은 항상 당과 정부의 정치노선과 통일전선 정책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으면서 형성되고 발전되어 왔으며, 변화할 수 있었다. 따라서 삼자교회 신학사상도 향후 당과 정부의 정치노선과 정책, 그리고 당이 종교 특히 기독교에게 부여한 통일전선의 임무에 따라 변화되거나 또 발전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삼자교회 신학사상은「울타리 신학」으로, 당과 정부에 따라 그「울타리」가 신축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약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중국의 정치체제와 통치방식에 큰 변화가 발생하고, 또 이에 따른 정치와 종교와의 관계나 종교정책이 변동이 생길 때 삼자교회와 삼자교회의 신학사상도「탈 정치화」를 이루게 되어 삼자교회신학의「정치우위」,「정치지향」의 신학형태도 변화될 것이다.
그럴 때 삼자신학자들은「탈 정치화」로 새롭게 사회주의 중국과 사회보다는 중국교회의 현실에 적합한 신학사고를 할 것이며, 중국교회가 요구하는「복음과 경건(敬虔)」이 첨가되어 삼자교회신학사상의 성격과 내용과 귀결도 변화될 것이라 전망한다. 그렇지 않으며, 당과 국가의 영도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삼자교회 신학사상은 중국교회로부터 버림과 배척을 받을 것이다.
Ⅵ. 맺는 말
삼자교회 신학사상은 1949년 사회주의 정권의 수립이후 새로운 사회현실에서 사회주의 정권과 사회에서 생성된 신학으로 사회주의 정권과 사회에 대한 신학적인 긍정과 의미를 부여하고, 또 삼자애국운동의 존립과 발전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하며, 아울러 삼자애국운동의 존립과 발전에 대한 정당성 부여를 위해 형성, 발전되었다.
삼자교회신학사상은 주로 인간론, 현실과 종말론, 신론, 기독론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으며, 사회주의 정치사회의 현실과 상황과 조화를 이루고 적응하는 방향으로 발전되어 나갔다.
그리고 삼자교회 신학사상은 사회주의 애국의 변호신학, 통전신학, 상황화신학, 울타리신학으로 규정할 수 있기 때문에, 향후 당과 정부의 정치상황과 사회주의 사회의 현실의 변화에 따라 삼자신학도 변화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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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간에 중국정부의 종교국으로 부터 삼자교회에 내려온 지침입니다.
살펴보시면
1) 삼자교회가 무엇인지
2) 삼자교회가 어디에 속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2, 한국교회와 선교사들이
중국교회에 전 할 것은
1) 개혁주의 신앙입니다.
2) 순생 순교의 신앙입니다.
3) 선교사는 본분은 선교입니다.
4) 교회의 머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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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자교회-애국공약(愛國公約)
1, 중국 공산당과 인민정부의 영도를 견결히 옹호하고 사회주의의 길을 견정히 걸으며 조국을 사랑하고 4개 현대화 건설에 적극적으로 헌신해야 한다.
2, 참답게 당의 종교 신앙자유 정책을 관철집행하며 행정, 사법, 교육과 혼인을 불간섭하며 다른 사람의 신앙자유를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
3, 국외 종교조직이나 개인이 우리나라 내부의 종교사무를 간섭하는 것을 견결히 반대하고
"독립자주, 자체로 교회를 꾸리는" 방침을 견지해야 한다.
4, 정상적인 종교활동을 견지하여야 한다.
5, 비법적인 종교활동을 견결히 막고 반대하며 국가의 정책 법령을 준수하여야 한다.
6, 본직사업을 잘하고 정치학습에 적극 참여하며 애국주의 각오를 부단히 제고하여 좋은 공민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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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교회활동 관리제도
1, 비법적이고 위법적인 종교활동을 진행하지말고 헌법, 법률, 법규와 정책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활동을 조직하여야 한다.
2, 정부에서 허가한 종교활동 장소 안에서 활동하는 것을 견지하여야 한다.
3, 정상적인 생산, 생활, 사업질서를 방해하지 않도록 종교활동 시간을 합리적으로 배치하여야 한다.
4, 각 교회 조직은 분공하여 책임지며 자체관리를 잘 하여야 한다.
5, 교직인원은 직권범위를 넘어서 종교활동을 하지 말며 비교직인원은 교직인원의 직권을 행사해서는 안 된다.
6, 봉건미신활동을 반대하고 본 종교의 규칙과 교의를 이행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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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자교회-학습제도
1, 국가 대사를 관심하고 정치, 시사를 학습하며 나라를 사랑하고 인민을 사랑하는 자각성을 부단히 높혀야 한다.
2, 나라의 종교정책과 국가법령을 학습하여 정책관념과 기율과 법을 지키는 자각성을 부단히 증강시켜야 한다.
3, 우리나라의 독립자주하고 자체로 교회를 꾸리는 방침을 학습하고 참답게 관철 집행하여야 한다.
4, 정부에서 꾸리는 종교계 인사 학습반에 적극 참가하여야 한다.
5, 각 교회는 경상적으로 관계인원들을 조직하여 정책, 법규를 학습하며 적어도 한 달에 한번씩 교인들을 조직하여 학습하여야 한다.
--------------------------------------------------------------------------삼자교회-국외 종교계 인사 접대제도 (國外宗敎界人士接對制度)
1, 국외 종교계 인사 접대사업은 애국 종교 조직의 책임자나 각 교회당의 주요 책임자가 나서서 접대하며 정부 관계부분의 허가 없이 어떤 사람도 마음대로 외국 손님이 있는 곳을 찾아 만나면 안 된다. (친척은 제외)
2, 자주적으로 교회를 꾸리는 원칙을 견지하고 우리나라의 종교신앙 자유정책을 선전하며 나라와 민족의 존엄, 교회의 주권을 견결히 지키며 국외종교 단체나 개인이 우리 내부 종교 사무를 간섭하는 것을 용납하고 허락하지 않는다.
3, 외국 사람을 자기 마음대로 강단에서 설교하게 하는 것을 용납하고 허락하지 않으며 국외 종교 단체와 종교계 인사에게서 재물과 종교 선전품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4, 자각적으로 외사 규율을 지키고 국가 기밀을 엄수하여야 한다.
5, 지역 경제건설을 위하여 벗들을 많이 사귀고 친선을 도모하여 중계인이 되어야 한다.
6, 의사의 표시가 단정하고 열정적이고 예의가 있으며 비열하거나 거만하지 말아야 한다.
7, 국외 종교단체나 종교인사를 접대할 때 시(市) 종교국에 먼저 보고하며 접대 후에는 즉시 회보 하여야 한다.
8, 접대 기록부를 만들어 매 계도마다 소속 지역 종교국에 회보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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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중국선교의 역사 중국선교동원
1. 초기의 선교활동
기독교가 중국에 들어온 지 13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매우 천천히 중국 땅에 뿌리를 내렸다. 초창기 세 번의 선교를 시도했다. 그래서 당시 네스토리안 기독인들(618-907), 원대의 프란체스코 수도사들(1271-1368), 그리고 明(1368-1644)과 淸(1644-1911)대의 예수교 선교사들 등 여러 선교사들이 있었지만, 이러한 선교 노력들이 중국인들이 영적인 생활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1) 네스토리우스파의 첫 시도(618-907年)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당대 초기에 비단길을 통해 중국으로 들어왔다.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가장 찬란했던 왕조들 중 하나였다.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크고 부유한 제국이 되었다. 중앙 아시아, 페르시아 그리고 인도와의 교역은 당의 보호 하에서 번창했고, 수많은 외국인들이 비단길을 따라 수도인 장안으로 들어왔다. 군사력과 정치적 힘에 자신감이 있던 당의 왕실은 외국인들에 의해 전해지는 종교를 묵인했으며 후원하기까지 했다.
외국의 예술과 음악 역시 환영을 받았다. 당시 황제 자신이 종교를 연구하고 그것을 승인했다. 황제의 칙령으로 알로펜은 수도원 건축을 허락 받았고 포교 활동을 보장받았다. 당시 몇몇의 주요 도시들에 적어도 50개 이상의 교회가 세워졌다. 네스토리우스파 기독교는 대체로 금욕주의적이었던 것으로 보여지며, 대개 서민들의 생활 속으로 깊숙이 파고들지는 못했다.
AD 84년 황제의 칙령에 의해서 외래 종교의 수도원, 사원, 그 밖의 모든 재산들이 몰수당하고, 당의 쇠퇴기에 접어들면서 본국과의 지원도 끊어지고, 중국인 지도자들을 세우지 않음으로 인해 중국인으로부터 고립되어 갔다. 10세기경 중국의 네스토리우스파 교회는 그 자취를 감추었다.
(2)원조(元朝:1279-1368年)∼송(宋)의 그리스도인
1280년경 몽골족은 위대한 징기스칸의 영도하에 동유럽에서 중국에 이르는 제국을 이룩하였다. 몽골족의 원나라는 1368년까지 지속되었다. 이 기간 동안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인들은 중국으로 다시 돌아온다. 그리고 13세기 초 로마 카톨릭의 선교사들도 들어왔다. 이러한 선교 활동들은 몽골 제국이 몰락하기까지 번영하였다. 몽골제국은 종교에 대해 비교적 관용했던 것에 주로 기인한다. 황제는 포고를 내려 모든 종교가 각기 나름대로 존중받을 것을 보장했다.
13세기 후반, 아득한 동방에 대한 로마의 관심은 마르코 폴로와 그의 삼촌들의 놀라운 중국 여행으로 인해 새롭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1266년 그들이 첫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들은 교황에게 쿠빌라이 칸의 친서를 전달하였다. 그는 기독교를 잘 알고 있고 또 그것에 헌신한 사람들을 최소한 100명 이상 중국으로 보내어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로부터 20년 후 프란체스코파의 수도사인 몬테 코르비노 출신의 요한(John of Monte Corvino: 1247- 1328)을 중국에 보내고, 계속해서 교황은 로마 카톨릭의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더 많은 프란체스코 선교사들을 보내 수 천 명을 회개시켰다.
1305년에 6천여 명의 신자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뻬이징에서 성당을 셋이나 세웠다. 송의 지도자들은 네스토리우스파와 프란체스코파 신자들을 추방하였고 또한 친 몽골파에 대한 적대감의 표현으로 그 종교의 개종자들을 몰아내었다.
(3) 명과 청대의 로마 가톨릭 선교
1582년에 드디어 마테오 릿치(Matteo Ricci: 1552-1610)는 중국 내에서의 예수회 선교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의 전략은 지식 계층의 호응을 얻게 되면 가난한 사람들이나 하층계급의 복음화도 가능하리라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다. 릿치는 천문학, 수학 시계수리, 지도 제작 기술로 황제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베이징에 머물 수 있게 되었고, 기독교 교회의 기반이 점차적으로 형성되었으며 중국의 기독교 문학이 발전해 갔다.
마침내 릿치는 2천여 명의 교인들과 기독교를 도와준 많은 영향력 있는 학자들을 남겨 둔 채 1610년 베이징에서 사망했다. 이렇게 해서 처음으로 중국에 기독교회와 선교의 견고한 기초를 닦아 놓은 것이었다. 그 후 2세기 동안 잦은 박해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중국에서 계속 뿌리를 내렸다. 청의 위대한 황제 강희제는 자신을 개인 교수하고 고위 관리들을 가르치게 하기 위해서 베르비스트를 초빙했다. 1692년에 황제인 강희제는 기독교의 법적인 지위를 보장하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1674년 첫 번째 중국인 성직자인 로웬 챠오가 주교로 임명되었다. 다양한 교단의 중국에서의 성공은 서로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러나 "의식논쟁"은 일부 특정의 의식 즉, 조상숭배에 참석의 해야하느냐, 말아야하느냐 하나님의 이란 용어를 중국식으로 예수회는 대개 "상제(上帝)"나 "천(天)"을 사용했던 반면, 도미니크파 선교사들은 "천주(天主)"가 하나님의 유일한 정확한 이름이라고 주장했다. 이 의례논쟁은 1645부터 1745년까지 계속된다. 이에 반작용으로 황제인 강희제는 릿치에 의해 세워진 강령에 위배된 선교사들은 남아 있을 수 있었고, 후계자인 건륭제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포고를 내림으로 선교사들은 추방되거나 은신했다. 서양 및 중국인 성직자들은 죽음을 무릅쓰고 은밀하게 복음을 전했다. 신자들은 순교 당하고 교인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2. 기독교 선교 활동 역사
1807년 스코틀랜드 장로 교회의 모리슨이 마카오에 도착한 후부터 1950-51년 사이에 중국에서 선교사들이 추방되기까지 개신교의 업적에 대한 기록은 아주 복잡하다. 개신교 선교의 시기를 다음의 4시대로 나눌 수 있다.
준비기(1807-1842), 개척기(1843-1869), 확장기(1861-1900), 발전기(1901-1949).
(1) 준비기(1807-1842)
19세기 중국의 힘이 쇠퇴해 가던 반면, 서양은 경제력과 군사력에서 급속 성장해 갔다. 개신교 국가인 영국과 다른 서양 국가 상인들이 카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의해서 그전에 이루어 졌던 독점 체제를 와해시키기 시작했다. 청조는 밀(William Milne)과 프러시아 출신의 칼 구츨라프(Karl Gutzlaff), 미국 출신의 피터파커(peter Paker)와 선교사역을 위한 준비를 했다. 그들은 중국어를 배웠고, 성경을 번역하고 인쇄했으며,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를 출판, 배포사역을 감당했다.
최초의 중국인 목사는 리안 아파(Liang Ah-Fa)로 목사 겸 복음 전도자였다. 홍콩은 99년 동안 영국에게 양도됨으로 선교회들은 선교사들을 동남 아시아에서 중국의 5개 항구 도시들과 홍콩으로 재배치시켰다. 그것에서 개신교 선교회들은 복음 전파, 교육사업, 의료 봉사라는 세 가지 차원에서 그들의 사역을 전개해 갔다.
그러나 불평등 조약들은 중국인들 사이에서 외국인들에 대한 분노를 가중시켰다. 이로 인해 기독교 선교는 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이 기간 중 선교 노력의 간접적인 결과 중 하나로 태평천국의 난(1851-1864)이 일어났다. 우상으로 가득 차고 부패한 중국을 정화시키라는 상제(上帝)의 소명을 받았다고 한 홍시우취엔(Hong Xiuquan)이 천국(天國)을 건설하고자 했다.
이 난은 급히 군대를 조직해 청의 군대를 지원함으로 무산되었다. 선교사들이 이 운동을 저지하기 위해 서구 국가들을 지지했으며 만주 왕조를 도와주었다. 태평군들은 실제로 만주인들 보다도 외국인들에게 더 호의적이었다. 그들은 중국이 서양과의 교역하는 것과 여행하는 것에 대하여 개방적이길 바랬다. 그들은 선교사들에게 우호적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서구 열강의 간섭으로 순수한 중국식 기독교운동은 무산되고 말았다.
(2) 확장기(1861-1900)
태평천국의 난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며, 서양의 침략이 계속되는 상황하에 1861년 베이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그 조약으로 중국 본토에서 땅을 소유하고 교회를 세우고 기독교를 전파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적인 장애물들을 모두 제거한 것이다. 만주 정부가 너무나 약하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드러내 주었다.
허드슨 테일러의 지도하에 있던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를 위시한 다양한 선교회들로 인하여 기독교는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이시기의 선교 활동은 일반 교육과 서양의 과학과 기술의 소개, 의료 및 사회적 봉사와 사회개혁에 크게 공헌한 것으로 특징 지워 진다. 선교사들은 아편, 노름, 매춘 및 전족(纏足)을 없애려는 개혁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또한 여성과 억압받는 사람들을 위한 인권 운동을 벌이는 데에도 한 몫을 감당했다.
1870년대와 1880년대에는 구제의 손길을 폈다. 사회 봉사에 그들의 사역을 더욱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영국, 러시아, 일본, 프랑스, 독일 등의 중국 침략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것이다. 비근한 예로 선교사들은 중국에 대한 자신들의 통제력을 확장시키려는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에 의해서 조종당했다. 복음 전파의 결과들을 급히 얻으려는 일부 선교사들의 조급함으로 인하여 그들은 중국인들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둔감한 태도와 도전적인 방법을 서슴치 않고 사용했다.
이러한 모든 요소들은 중국인들과 선교사들 사이에서 긴장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반기독교 폭동이 양조우(楊洲:1868)와 티엔지(天津:1870)에서 발생하였고, 그곳에서 개신교와 카톨릭 선교사들은 엄청난 손실을 치렀다.
1900명 이상의 중국인 개신교 그리스도인들, 186명의 개신교 선교사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살해되었다. 3만 명 이상의 중국인 카톨릭 교인들과 47명의 외국인 성직자 및 수녀들 역시 살해당했다. 세력가들은 외세를 중국 밖으로 몰아내는 방편으로 이용하였다. 반제국주의 반서구운동은 중국의 기독교 교회를 뒤흔들어 놓았고 선교 사업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890년경 선교 운동의 확장기 말엽에는 중국인 개종자의 수는 112,808명으로 늘어났다. 2,000여명의 외국인 선교사와 1600여명의 중국인 사역자들이 중국에서 봉사했다. 중국 교회는 크기와 질 양면에서 성장했다. 복음은 거의 중국의 모든 지역에 널리 확산되었다. 그러나 교회는 여전히 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중국의 문화와 사회의 주류에 침투되지 못한 채 수많은 중국인들에게는 여전히 외국 기관으로 비춰졌다.
(3) 발전기(1900-1949)
중국 관리들과 빈곤한 농민들의 격분으로 인하여 1900년에 의화단 사건(The Boxer Rebellion)이 발생했다. 태평 천국의 난은 의화단 사건을 또한 지원했는데, 외국 8개국의 군대가 베이징에서 중국 반란군들을 몰아냄으로 의화단 사건은 종결을 맺었다. 의화단사건으로 서구 열강들의 세력을 증가시켰으며, 부상하는 민족주의 운동의 불만과 적의의 초점을 만주 왕실에 집중시키는 결과를 낳게 했다. 중국은 또다시 굴복했다. 제국주의 세력은 큰 배상을 요구했으며, 만주정부는 중국의 내부 및 외부적인 문제들에 대한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의화단 사건으로 반성과 함께 선교사들과 본토의 중국인 동역자들과 평등한 동반자 의식을 발전시켜 나갔고, 기독교가 중국의 변화하는 상황과 문화에 적절하게 대응하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중국 그리스도인들 스스로에 의해서 새로운 교회들이 세워졌고, 독립 교회의수는 급속하게 증가되었다. 많은 중국인들은 확신과 소망을 갈구했다. 수많은 중국인들은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었다.
1911년 쑨원이 이끄는 공화국 혁명은 쇠약한 만주 왕정을 와해시켰다. 손문의 지도하에 있던 혁명 운동은 점차 대중성을 획득하게 되었으며, 국민당만이 명분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상호간에 피를 부른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었다. 온 인류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과학적인 지혜, 합리적이고, 민주적인 기독교 문명으로 간주되었던 서구를 본받으려든 중국 지식인들의 꿈은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그리하여 베르샤이유 조약으로 중국에서의 제국주의의 통치가 종식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독일이 중국에서 소유했던 지역을 일본에게 할양 받도록 조인하였다. 이러한 사건의 추이로 중국의 지식인들을 격분시켰으며, 민족주의자들은 직시하게 되었다. 베르샤이유 조약에 항의하는 시위가 1919년 5월4일 에 일어나고, 이를 기점으로 몇몇 지도자들은 서구의 자유주의로부터 등을 돌려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중국에서 실행 가능한 혁명 이념과 전략으로 수용하기 시작했다. 외세의 침략과 내부적인 위기를 견디며 중국의 민족주의가 중국적인 동일성의 기반으로써 유교문화를 대치하긴 했으나 중국을 하나로 묶어주는데 필요함을 인식하게 된다. 결국 공산주의자들은 한발 앞서서 중국의 문제들을 무신론적 유물론의 방법으로 해결함으로써 이러한 이념적인 공백을 메워 버렸다.
마오쩌뚱은 비록 1920년대에는 대수롭지 않은 인물로 남아 있었지만, 그 역시 마르크스주의에로의 유사한 지적인 전향을 경험했다. 국민당과의 내전 와중에 일본은 만주를 침략함으로써 중국에 대한 그들의 야욕을 넓혀 갔다. 중일전쟁이 격화되었을 때, 마오쩌뚱의 게릴라전 이론은 1938년 - 1940년 사이에 벌어진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성공적으로 입증되었다.
또한 긍정적인 개혁들로 인하여 그들은 점점 더 많은 대중적인 지지를 획득해 갔다. 1946년 미국의 마샬 장군은 연합 정부를 구성하라고 지시했으나, 공산당과 국민당 양자는 권력에 대한 그들의 야망을 포기하지 않았다. 전면적인 내란이 일어났고, 1949년 10월 1일에 제1회 인민 정치 자문 평의회를 개최하였고, 10월1일 마오쩌뚱은 베이징 자금성의 천안문에서 중화 인민 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3. 근대사와 기독교
(1) 교회에 대한 통제와 박해가 증가된 시기
1949-1966년의 기간 중, 교회는 일정 한도 내의 자유를 누렸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압력은 부단히 증가되어 갔다. 1950년, 총리 죠우언라이의 영도 하에서, "그리스도인 선언(Christian Manifesto)"에 서명한다. 그 목적은, 교회를 외국과의 유대나 영향력에서 벗어나게 하여, 다음 해에 결성할 삼자회의 기초를 다지는 데 있었다.
1950년대에 수많은 그리스도인 목사와 사역자들은 삼자회에 협조하기를 거부함으로 인해 결국 체포되어 수년간 투옥생활을 했다. 그리고 그들의 대부분은 1979년 후에야 비로소 복권, 석방되었다. 시골 교회는 이미 1950-1953년에 토지 개혁 운동 감행될 때 폐쇄되었다. 1958년 말기, 원래 64개였던 북경의 교회는 네 곳만이 개방되었고, 200개의 상해 교회는 23개로 줄었으며, 기타 다른 도시에도 1-4개밖에 남지 않는다.
(2) 문화혁명-전면적 종교 탄압
문화 대혁명은 1966년 5월에 젊은이들이 홍위병 집단을 구성하여 사대구습을 소멸하고, 구 지식인, 전문직업인, 종교인 그리고 마오쩌뚱과 좌파에 대해 반대할 우려가 있는 정부와 당의 지도자 등을 공격하였다. 대규모의 유혈극과 엄청난 수난이 있었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박해와 홍위병과 노동자들 간의 경쟁적인 파벌로 인한 싸움의 와중에서 자신의 생명을 잃었다. 그리스도인들이 무시무시한 수난을 겪었지만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혹독한 박해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특기할 만하다. 이때 극좌 분자들은 당과 종교의 "평화적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믿고, 종교는 "아편"이라고 규정했다. 1965년에는 극좌파가 득세하는데, 문혁 기간중의 박해는, 무력으로 종교를 없애야 한다는 신념의 자연스런 결과로 치닫는다. 모든 종교 단체 건물은 훼손되고 폐쇄되었다. 종교 서적 및 상징물은 모두 파괴되었고, 어떠한 종교적 신앙의 표현-십자가를 다는 것까지-도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가정은 수색되었으며 성경 및 다른 여러 책들은 모두 몰수되어 잿더미가 되고, 많은 이들이 투옥되거나 노역에 처해졌다. 어떤 이들은 혹형을 받았으며 또 어떤 이들은 그런 괴로움을 견디지 못해 자살을 하기도 했다.
(3)비교적 완화된 정책의 실시
1977년부터 현재까지는 고무적인 양상, 문혁 기간에 극좌 분자에 의해 폐쇄되었던 종교 사무국은, 1977년초에 중국 공산당의 허가를 받아 일을 다시 시작했다. 같은 해에, 수년간 잠적했던 "애국" 종교 지도자들이 정부 기관에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1978년 3월 다시금 조직되었다. 그 당시 정치적인 통제는 완화되어, 공산당은 빼이징 민주 벽을 개방할 정도로 상당한 언론의 자유를 허용했다. 각 도시의 재개방된 몇몇 교회들마다 사람으로 가득 찼으며, 그들의 대부분은 청년이었다. 도시와 농촌에서는 모두 가정 교회가 급성장하여 전도하거나 대규모 집회를 열기도 했다.
문혁의 정책이 급전되었으므로, 당 간부들도 "극좌 분자"로 몰릴까봐,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을 보고도 종종 못 본 척했다. 그 결과, 중국은 종교적 부흥 같은 것을 겪고 있음이 분명해졌다. 더불어 거짓 종교인 마오져뚱 종교에 눈을 돌리기도 했으며, 특히 농촌에서는 미신이 다시 활개를 쳤다.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모여들었다. 이때 사찰과 회교 사원도 다시 개방되었다.
2] 중국의 기독교 상황
중국 정부의 종교에 대한 태도는 마르크스주의의 유물론에 입각한 것으로, 19세기의 과학 사상을 근거로 하고 있다. 마르크스 레닌주의는, 종교란 인류의 구시대적 유물로서 그것이 혁명 과정을 저지시킬 수 없다고 단언한다. 마르크스주의는 근본적으로 무신론이며 물질 세계만이 존재하는 것으로 본다.
인간에게는 영혼이 없으며 사후에는 어떤 세계도 없다. 레닌주의는 이렇게 하여 독특한 중국의 색채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종교방면에 있어서 마오져뚱은, 철저히 공산주의 의 기본 교조에 의거한다. 마오져뚱의 천재성은 서양의 사상 체계를 중국 문화에 적용시킬 수 있었다는 점에 있다. 마오져뚱에게 있어서 중국은, "인간의 왕국"이고. "우리의 신은 바로 무수한 중국 인민들이다."라고 말한다.
떵샤오핑의 경제 개혁 정책이, 마오져뚱 말년 정책과는 완전히 상반된다 해도 그의 기본 사상은 여전히 공산주의다. 1985년 3월에 발표한 담화문에서 중국 현대화의 궁극적 목표는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는 것임을 표방하고 있다.
1982년 당과 정부는 현황을 검토한 후 두 개의 문서를 반포하는데, "19호 문서", "국민 헌법"성명 역시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신앙의 자유에 대한 존중과 보호는 종교 문제에 대한 우리 당의 기본정책이다. 이것은 장기적 정책으로, 장차 종교가 자연히 소실될 때까지 계속 집행될 정책이다. 종교 자유의 정책은 다만 현재의 전략일 뿐이며 종교는 장차 자연히 소멸될 것이니, 공산주의의 최종 목표와 상충되지 않는다. 종교는 인민의 "아편"으로 유해한 것이며, 국가의 진정한 통치권은 무신론 마르크스주의자에게 있어야 한다는 중국 정부의 관점은 현재도 변하지 않고 있다.
중국 공산당은 "애국" 종교 단체를 승인함으로 종교의 자유라는 명목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제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정부는 8개의 국민 애국 종교 단체를 승인했고, 그중 다섯 개 단체는 기독교와 천주교에 속한다. 공산당은 이 단체들의 임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정의를 내렸다.
각 급 애국 종교 단체의 기본 임무는, 정부에 협조하여 종교 신앙 자유의 정책을 실행하는 가운데 종교인들의 부단한 애국적·사회주의적 각성을 도모하며, 종교계의 합법적 권익을 대표하며, 종교인들이 정상적 종교 활동을 하도록 조직 및 지도하고, 종교와 관련된 공작을 잘 처리토록 한다. 모든 애국 종교 단체는 당과 정부의 영도에 복종해야만 한다는 내용이다.
또한, 18세 이하의 청소년에게 전도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다. 19세 이하의 청소년들을 입교시키거나, 사찰로 보내 중이 되게 하거나 종교 경전을 학습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1983년 12월, 「중국 청년보」는 청소년의 무신론 교육 강화를 호소했다. 특히 초등학생들은, "미신의 해악과 종교의 악영향"에서 보호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러나, 삼자교회의 예배 시에 어린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실제상으로는 그리스도인 가정의 아이들은 출석할 수 있다. 왜냐하면 아이들의 출석을 금지시키면, 삼자 교회에 나오던 부모들이 가정 교회로 떠나갈 것임을 교회 지도자들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종교 정책과 국제 관계
중국 공산당은 종교가 국제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들은"종교계의 대외적 관계는…우리 나라의 정치적 확산에 중요한 작용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국민헌법"에도 명시한 것처럼 중국 공산당도 이런 경고를 했다.
"세계의 종교적 반동 세력은, 특히 로마 교황청과 기독교 선교회는 각종 기회를 틈타 침투 활동을 벌여, "중국 재탈환의 발판 마련"을 위해 기를 쓴다. 종교적 방면에서 우리의 방침은, 국제적 우호관계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되, 적대적인 외세의 침투는 어떠한 것이든 결연히 반대한다." 이처럼 중국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두려워하며, 강하게 막고 있다. 이로 인해 라디오나 문서, 혹은 기타의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러 중국에 가는 것을 막고 있다.
1. 삼자교회
정부 통제의 신사회(新社會)내에 있는 여러 비공산주의적 조직을 감독하는 부서가 바로 통전부(統戰部)이다. 이 통전부의 기능은 사회 다수 단체의 지지, 또는 최소한 묵인을 얻어내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반대 세력을 약화, 고립화, 중립화시켜서 마침내는 분화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통전부는 국가 내 소수 민족, 부농, 민족 자본가(상인과 공업가) 및 각종 종교 신도들의 협조를 얻어내는 임무를 감당한다. 통전부는 종교 사무국 간부를 관리 및 임명하며, 종교사무국은 "애국" 종교 단체를 관리한다(삼자 교회 및 중국 기독교 협회 포함).
삼자회는 종교 사무국 책임 하에서 교회라기 보다는 정부와 교회간의 중개인 역할을 하는 것임을 주목해야 한다. 삼자회는 정부의 한 행정 기관으로, 개방된 모든 교회를 통제하며, 교회가 규정에 따라 활동하도록 감독한다. 헌법 제29조는 삼자회의 정치적 종교적 양방면에서의 목적을 설명하고 있다.
「본회는 중국 그리스도인들의 반제(反帝), 애국적 조직으로 다음과 같은 목적을 가진다. 즉 중국 공산당과 인민 정부의 영도 하에 전국의 그리스도인들의 단결을 도모하여 조국 사랑을 촉구하는 동시에, 국가의 법률을 준수하며, 자치, 자양, 자전의 원칙과 교회의 독립과 자주의 원칙을 견지하고 삼자 애국 운동의 성과를 보위하는 것, 또한 정부의 종교 신앙의 자유 정책 집행에 협조하고, 고도의 민주화와 고도로 발달된 문명을 갖춘 현대화된 사회주의 강국인 중국 건설에 적극 이바지하며, 대만의 조국 복귀를 촉진해 조국 통일을 실현하며, 패권주의에 반대해 세계 평화를 수호한다.」
1950년대 초 중국 공산당은 점차적으로 기존의 개별 종교 단체에 압력을 가하면서 그 기관들을 삼자회의통치권에 복속시켰다. 교인들은 반드시 교회의 정치 학습반에 출석해야 했으며, 특히 자아 비판 회에서는 자신들뿐만 아니라 남들도 비판해야 했다.
2. 가정교회
가정교회의 뿌리는 중국이 공산화되기 이전의 토착교회라고 할 수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되기 전 가정교회와 토착화 운동은 서로 연관되어 있었다. 가정교회는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교회와는 조금 다른 그들 나름대로의 토착회 된 교회, 즉 소군교회, 진야소교회, 야소가정 등의 형태로 단체끼리 가정에 모여 집회를 가졌다.
오늘날 가정교회의 많은 사람들은 취회소에 속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1949년 혁명 이후 가정 교회 모임들은 삼자회 가입을 거절한 목사와 동료 기독교인들을 배반하도록 종용하는 삼자회의 태도를 비난했다. 문화 혁명 시기까지 그러한 혼란 가운데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은 소그룹 모임뿐이었다. 가정교회는 문화혁명 기간 감옥에 갇혔던 성직자와 신자들이 석방되면서 그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기독교인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이런 모임이 정규적으로 계속되면서 교인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문화혁명 이후 중국의 기독교인들은 박해를 피해서 지하로 잠입해 들어갔으며 이를 계기로 중국의 상황에 맞는 토착화된 가정교회가 출현한 것이다. 이와 같이 가정교회는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 가정교회운동에서 기원하였으며 삼자운동기의 반대세력들의 모임에서 등장하게 되었고, 문화혁명기의 탄압을 통해 제도 교회가 사라져 가는 것을 계기로 본격화되었다고 본다.
오늘날 중국 그리스도인의 80% 이상이 가정 교회 교인으로 그들은 중국 기독교의 대표적인 주류이다. 문화혁명의 종말을 고한 1976년 이후 가정 교회는 눈부신 성장을 이루었다. 운남성의 한 지역을 예로 들면 그곳의 현 그리스도인들 중 95%가 1976년 이후에 그리스도께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가정 교회는 극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백성을 보존시키시고 자신의 목적을 성취시키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능력을 시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 세계 그리스도인들이 배워야 할 중요한 교훈이다.
가정 교회들은 극심한 시련을 통해 정화되었다. 종파의 분열 같은 불필요한 요소들도 과감히 탈피해 나갔다. 단지 말씀 선포에만 의존하지 않고, 개인적인 친숙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즉각적인 믿음의 고백에 기반을 두어야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신자 개개인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간증들이 예배 시간에 포함되기도 한다.
(1) 가정교회의 유형과 조직
가정교회는 농촌 가정교회와 도시 가정교회로 분류할 수 있다. 중국 인구의 80%가 농촌에 거주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가정교회 신자들도 농촌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농촌교회에는 연장자가 많지만 청년들과 어린이들도 참석한다. 대체로 나이 많은 연장자가 지도자로 있고 근래 들어 청년들이 훈련되어 설교나 전도활동을 담당하고 다른 지역을 파송되기도 한다. 도시교회는 농촌처럼 연령의 구분 없이 모이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연장자들 모임과 젊은 지식인들, 고급중학교 이상 학력의 직장인들, 대학생들의 모임으로 구분되어 있다.
2,000명, 또 하나는 500명으로 구성된 가정교회는 주일 저녁에 계속 모임을 갖고 있다. 그중 일부 교인들은 주일 오전에는 삼자 교회에 참석하여 당국과의 마찰을 피하고 있다. 개방된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수용할 정도로 크지 않았으므로, 당국은 현재까지 주일 저녁의 가정 집회는 반대하지 않았다. 독립된 가정 교회에 대한 정책은 지방마다 각 지역 당국의 입안에 달려 있음을 반영한다.
가정교회는 3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는데
1)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이시다는 입장을 분명히 한다. 가정 교회들은 죄를 회개케 하는 영과, 한 때 십자가의 원수 되었던 자의 회심과, 그리고 병고침과 악한 영들로 인해 귀신들린 자들의 치유를 통해, 성령님이 역동적으로 일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2)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이 크다.
3) 대부분의 목사들이 투옥되는 바람에 평신도의 지도력이 성숙되었다. 최근에 들어 이전에 투옥되었던 교회 사역자들이 풀려났으며, 그 후 나이 어린 제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해 평신도 사역자들과 함께 일하고 있다.
3.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의 문제점
(1) 삼자교회의 문제점
1) 목회자 문제. 목회자가 양적으로 부족하다. 또한 있다고 해도 부적격자가 많고 부패현상 또한 심각하다. 그리고 목회자간의 세대차이에서 오는 갈등, 복음적이고 충성된 목사와 정치적이고 완고한 목사간의 갈등이 크다. 그리고 농촌교회의 전임 목회자 부재 현상은 상당한 기간 동안 호전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있다.
2) 가정교회와의 갈등도 해소되지 않고 있다.
3) 삼자교회의 정통성 문제. 중국이 더 과감한 시개혁과 정치체제 변화를 추구할 경우 삼자교회는 정통성 논리에서 가정교회의 입장보다 훨씬 불리한 입장에 놓이게 된다.
4) 어린이 주일학교 운영 문제와 청년회 지도 및 운영 문제가 심각하다.
(2) 가정교회의 특성과 문제점
데이비드 애드니(David H. Adeney)는 가정교회의 특성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1) 가정교회는 토착적이다.
2) 가정교회는 가족단위에 기초한다.
3) 가정교회는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했다.
4) 가정교회는 그리스도의 主되심을 강조한다.
5) 가정교회는 하나님의 통치하심을 확신한다.
6) 가정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한다.
7) 가정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이다.
8) 가정교회는 서로 돌아보며 나누는 교회이다.
9) 가정교회는 평신도의 지도력에 의존한다.
10) 가정교회는 성경적 가르침이 필요하다.
11) 가정교회는 고난으로 정결케 되었다.
12) 가정교회는 열심히 전도한다.
가정교회는 문제점도 안고 있다. 강성광은 가정교회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즉 사역자의 양적, 질적 부족, 이단문제, 무분별한 지도자 순종 의식, 과거의 방법을 맹목적으로 고집하는 경직성, 외지 사역자들의 그릇된 선교활동, 종파간의 차이점, 삼자교회와의 갈등, 삼자회와 중국 공산당으로부터의 새로운 압력, 복음의 편중 현상, 농촌과 도시의 균형적인 교회 성장의 문제, 물질적 유혹의 위기에 처한 신자들, 성경 및 신앙서적의 부족 현상 등이 있다.
또한 믿음의 시련이 가져다준 문제점으로, 고난의 경험이 없는 자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 그리고 박해 기간 동안 다른 그리스도인들을 배반하거나 신앙을 저버린 사람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태도, 이로 인한 영적 자만심 그리고 다른 사람, 특히 서양인들을 포용하고 용납하며, 함께 나누는 일을 꺼려하는 일들이 새롭게 문제시되고 있다.
부흥하는 교회 가운데 훈련받은 사역자가 부족하다. 중국의 다양한 신학교 출신의 기독교인들 모두가 성숙하고 훈련받은 목회자와 복음 전도자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한탄하다. 삼자 애국 운동(TSPM)/CCC신학교의 600명 이상의 전임 신학생들과 가톨릭 애국 협회(CPA) 신학교의 700명의 신학자들로는 너무 적은 수여서 특히 신학적으로 훈련받은 연로한 지도자 세대가 빠르게 사라져감에 따라 더욱 현재의 필요들을 충당할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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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적인 중국선교전문가 조나단 차오 사망 - 국민일보
세계적인 중국선교 전문가 조나단 차오(중국복음선교회 CMI 국제총재) 박사가 4개월간 임파선암과 투병한 끝에 최근 주님의 품에 안긴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을 주고 있다. 향년 66세. 1938년 랴오닝(遼寧)성에서 태어난 차오 박사는 미국 제네바칼리지, 웨스트민스터신학교를 거쳐 펜실베이니아대에서 중국교회사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래 ‘중국공산당의 기독교정책’, ‘중국선교핸드북’, ‘당대 중국 기독교발전사’ 등을 펴내며 중국선교의 세계 네트워크를 형성하는데 앞장섰다. 수차례 한국을 방문, 중국선교의 시급성을 알리고 한국교회가 지도자 훈련, 신학서적 보급 등을 통해 중국교회가 완전히 자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었다.
차오 박사는 특히 한국교회가 잘 훈련된 막대한 선교적 자원과 열정을 갖고 있으면서도 조선족 중심 선교에 머물고 있음을 아쉬워했다. 그는 중국이 인류 역사 이래 최대의 영적 추수 현장이자 차기 세계선교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차오 박사는 지난 88년 이래 매년 100여명의 사역자들과 중국을 방문,가정교회 지도자를 훈련시켜 건강한 가정교회 신학을 세워가는데 힘썼다. 그는 홍콩 중국신학연구원과 중국선도신학원, 대만 중화복음신학원과 도생신학원 등을 설립 또는 복교하는데도 앞장섰다. 특히 지난 78년과 86년 홍콩 중국교회연구센터, 대만 기독교와 중국문화연구센터 등을 각각 설립하고 해외 크리스천 화교 사역자들을 발굴하는 한편 중국교회 지도자들과의 협력 시스템을 구축, 사실상 중화권 사역의 대부로 활동해왔다.
그밖에 미국의 댈러스신학교 휘튼칼리지 풀러신학교,캐나다의 리젠트칼리지 등에서 객원교수로 후학을 키웠다. 지난 87년 중국복음선교회(CMI)를 세운데 이어 한국 대만 홍콩 필리핀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등지에 지부를 결성, ‘중국 민족의 복음화’, ‘중국교회의 하나님 나라화’, ‘중국문화의 그리스도화’를 목표로 중국선교의 세계화를 주도했다. 한국CMI 대표 유전명 목사는 “중국선교를 위해 전세계를 다니며 중국교회의 참된 현실을 전하고 세계적으로 협력 시스템을 형성한 차오 박사의 소천은 매우 애석하다”면서 “그는 한국인과 화교들이 함께 설립한 중국복음선교회가 세계 네트워크에 편입되는데 큰 힘이 돼주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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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개 다민족 국가의 인구의 분포와 특징 - 주한 중국문화원
1. 인구와 분포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인구는 1953년 3,352만명에서, 1964년에는 4천만명, 1982년에는 6,724만명이었으며, 1990년 제4차 인구조사 때에는 9,120만명이었다. 각 소수민족간의 인구수는 매우 차이가 크다. 1990년에 이르러 인구가 가장 많은 민족은 좡족(壯族)으로 1,500여만명이고, 인구가 가장 적은 민족은 뤄바족(珞巴族)으로 단지 2,300여명이었다.
① 인구 100만 이상인 소수민족 :
좡족(壯族, Zhuang), 회족(回族, Hui), 위글족(維吾爾族, Uighur), 카자흐족(哈薩克族, Kazakh, Hassake), 다이족(?族, Dai), 이족(?族, Yi), 묘족(苗族, Miao), 만족(滿族, Manchurian), 장족(藏族, Zang, Tibetian), 몽고족(蒙古族, Mongol), 투쟈족(土家族, Tujia), 부이족(布依族, Puyi), 조선족(朝鮮族, Korean), 둥족(?族, Tong), 요족(瑤族, Yao), 바이족(白族, Bai), 하니족(哈尼族, Hani) 등 17개 민족이 있다.
② 인구 10만 이상 100만 이하인 소수민족 :
리족(黎族, Li), 리수족(??族, Lisu), 서족(?族, She), 라후족(拉祜族, Lahu), 와족(?族, Wa), 수이족(水族, Shui), 둥샹족(東鄕族, Dong xiang), 나시족(納西族, Naxi), 시버족(錫伯族, Xibo), 토족(土族, Tu), 거로족(??族, Gelao), 키르기스족(柯爾克孜族, Kirghiz), 다월족(達斡爾族, Dawor), 챵족(羌族, Qiang), 징퍼족(景頗族, Qingpo) 등 15개 민족이 있다.
③ 인구 5만 이상 10만 이하인 소수민족 :
무로족(??族, Mulao), 싸라족(撒拉族, Sala), 모난족(毛南族, Maonan), 부랑족(布朗族, Pulang) 등 4개 민족이 있다.
④ 인구 1만 이상 5만 이하인 소수민족 :
다지크족(塔吉克族, Tadzhik), 푸미족(普米族, Pumi), 누족(怒族, Nu), 아창족(阿昌族, Achang), 에벵크족(鄂溫克族, Ounke) 지눠족(基諾族, Jinuo), 우즈베크족(烏孜別克族, Uzbek), 러시아족(俄羅斯族, Russia), 보안족(保安族, Baoan), 징족(京族, Jing), 더앙족(德昻族, Deyang), 위구족(裕固族, Yugu) 등 12개 민족이 있다.
⑤ 인구 1만 이하인 소수민족 :
고산족(高山族, Gaoshan), 다다르족(塔塔爾族, Tatar), 두룽족(獨龍族, Dulung), 오르죤족(鄂倫春族, Oulunchun), 먼바족(門巴族, Menpa), 뤄바족(珞巴族, Lepa), 허저족(赫哲族, Hezhe) 등 7개 민족이 있다.
이외에도 등인(?人), 샬바인(夏爾巴人) 등과 같이 아직 그 민족성분이 식별되지 않은 인구가 약 70여만명 있다.
중국 소수민족의 지역분포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분포지역이 광대하고 차지하고 있는 면적이 넓다.
중국의 소수민족은 비록 전국 인구의 1/10에도 못미치지만, 분포되어 있는 지역이 매우 넓고 차지하고 있는 면적은 전국의 절반 이상이나 된다. 5개의 소수민족 자치구 외에도 대부분의 성(省) 시(市)에도 소수민족 자치주(自治州) 자치현(自治縣)이 있다. 소수민족이 가장 많은 성은 운남성(雲南省)으로 그곳에는 35개의 민족이 거주하고 있다. 이외에도 내몽고(內蒙古), 신강(新疆), 티벳(西藏), 광서(廣西), 영하(寧夏) 지역 및 흑룡강(黑龍江), 길림(吉林), 요녕(遼寧), 감숙(甘肅), 청해(靑海),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광동(廣東), 호남(湖南), 하북(河北), 호북(湖北), 복건(福建), 대만(臺灣), 해남(海南) 등의 성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둘째, 잡거(雜居)가 많고 집거(集居)가 적다.
90% 이상의 중국인구는 한족(漢族)이다. 각 소수민족 지역에는 모두 일정한 수의 한족이 살고 있으며, 비록 소수민족 자치지구라 할 지라도 대부분은 한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렇지만 각 소수민족은 모두 자신들의 집거지역을 가지고 있는데, 비교적 큰 지역도 있고 약간 작은 지역도 있다. 몇몇 집거지역은 각 지역에 분산되어 있으며, 단지 부분적으로 집거하고 있는 지역도 있다. 그 나머지는 다른 민족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있다. 이와 같이 잡거(雜居)가 많고 집거(集居)가 적어 각 민족이 뒤섞여 살고 있는 국면을 형성하였다. 예를 들면, 회족은 800여만명이 있는데 영하회족자치구(寧夏回族自治區)에 집거하고 있는 사람은 단지 100여만명 뿐이고, 또 100만여명은 감숙성 신강 위글자치구에 집거하고 있으며, 나머지 600만명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다. 장족(티벳족)은 모두 450여만명인데, 단지 200여만명만 티벳에 집거하고 있으며, 나머지는 감숙, 청해, 사천, 운남 등지에 따로따로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중국민족 분포의 특징은 소수민족과 한족 및 각 소수민족간의 밀접한 관계를 반영하고 있으며, 이것은 중국이 통일된 다민족 국가를 이루는 중요한 기초가 되고 있다.
셋째, 자원과 산물이 매우 풍부하다.
소수민족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은 대부분 고원 산맥 초원 삼림지대로써, 지역이 광대하고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목축업이 발달되고 농작물의 종류가 많다. 내몽고와 영하는 중국 식량작물의 중요 생산지이다. 신강은 중국 면화의 중요 생산지이고, 광서는 사탕수수의 중요 생산지이며, 티벳에는 쌀보리가 많이 생산되고. 운남과 해남에는 각양각색의 열대 과일이 생산된다. 소수민족 지역의 삼림복개 면적은 4,500ha로 전국 삼림복개 면적의 37%를 차지하고 있다. 중국의 5대 천연 목축지역인 내몽고, 신강, 티벳, 청해, 감숙은 모두 소수민족 지역이다.
넷째, 국경 부근에는 인구가 적고 경제 문화가 비교적 낙후되어 있다.
소수민족이 집중된 지역은 대부분 중국의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고, 주변 국가들과 인접하고 있어, 국방 및 이웃 국가와의 관계에서 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역이 광대하고 변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구밀도가 낮고 교통이 불편하여 개발이 비교적 늦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비교적 낙후되어 있다. 해방 이후에 비록 거대한 변화가 발생하였지만 한족 지역에 비하면 아직도 많은 차이가 있다.
2. 언어와 문자
중국의 55개 소수민족은 거의 모두 자신들의 언어를 가지고 있으며, 그 중에서 단지 21개 민족만이 자신들의 문자를 가지고 있다. 회족, 만족, 서족이 한문(漢文)을 사용하고 있는 것 외에, 몽고족, 장족, 좡족, 시버족, 다이족, 위글족, 키르기스족, 다다르족, 러시아족 등 11개 민족은 모두 그들 민족의 고유 문자를 가지고 있는 동시에 통용 문자도 사용하고 있다. 이족, 나시족, 묘족, 징퍼족, 리수족, 라후족, 와족 등 7개 민족은 비록 자신들의 문자를 가지고 있지만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 그 나머지 34개 민족은 자신들의 문자가 없다.
중국 각 민족의 언어는 각각 서로 다른 어계(語系)에 속하는데,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한장어계(漢藏語系)에 속하는 것이 가장 많으며, 중국어(漢語), 좡어(壯語), 부이어(布衣語), 다이어(?語), 둥어(?語), 수이어(水語), 무로어(??語), 모난어(毛南語), 리어(黎語), 묘어(苗語), 요어(瑤語), 티벳어(藏語), 바이어(白語), 징어(京語), 리수어(??語), 나시어(納西語), 라구어(拉祜語), 하니어(哈尼語), 징퍼어(景頗語) 투쟈어(土家語) 등 20개 어종(語種)이 있다.
알타이어계에 속하는 것으로는 위글어(維吾爾語), 카자흐어(哈薩克語), 우즈베크어(烏孜別克語), 다다르어(塔塔爾語), 조선어(朝鮮語), 키르기스어(柯爾克孜語), 싸라어(撒拉語), 위구어(裕固語), 몽고어(蒙古語), 다월어(達斡爾語), 둥샹어(東鄕語), 보안어(保安語), 에벵크어(鄂溫克語), 오르죤어 (鄂倫春語), 만주어(滿語), 시버어(錫伯語), 허저어(赫哲語) 등 17개 어종이 있다.
남아시아어계에 속하는 것으로는 와어(?語), 부랑어(布朗語), 더앙어(德昻語)가 있고, 인도유럽어계에 속하는 것으로는 다지크어(塔吉克語), 러시아어(俄語)가 있으며, 대만의 고산어(高山語)는 남도어계(南島語系)에 속한다.
3. 종교와 풍속
중국의 소수민족은 일반적으로 모두 종교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 3대 종교인 이슬람교, 불교, 기독교는 중국의 소수민족들에게 매우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슬람교를 믿는 민족은 회족, 위글족, 카자흐족, 키르기스족, 다다르족, 우즈베크족 등 10개 민족이 있다.
라마교나 불교를 믿는 민족은 장족(티벳족), 몽고족, 토족, 위구족, 다이족, 부랑족, 더앙족 등이 있다.
기독교를 믿는 민족은 일부의 묘족과 이족 등이 있다.
이외에도 어떤 소수민족은 조상숭배, 토템숭배, 무교(巫敎), 샤머니즘(薩滿敎) 등을 포함한 원시 자연숭배의 여러 가지 신앙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두룽족, 누족, 와족, 징퍼족, 고산족, 오르죤족 등이 있다.
소수민족간의 풍속 습관도 매우 다르다. 옷차림 음식 거주 관혼상제 명절 오락 금기 등 각 방면에서 모두 자신들의 전통적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이슬람교를 믿는 10개의 소수민족은 돼지고기 먹는 것을 금기한다. 각 민족은 모두 자신들의 전통 명절을 가지고 있는데, 예를 들면 다이족의 발수절(潑水節), 이족의 화파절(火把節), 장족(티벳족)의 장력절(藏曆節), 몽고족의 나담페어대회(那達慕大會, Nadam Fair)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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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교회의 다른 이름 광야(曠野)교회-인보라 글
근래에 광야교회라는 용어로 이전의 가정교회를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 한족가정교회들이 자신들의 교회를 광야교회라고 즐겨 부르고 조선족들은 광야교회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고 있다. 또한 모든 가정교회가 광야교회라고 호칭하는 것은 아니다. 한족가정교회가 굳이 자신들의 교회를 광야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가정교회라고 할 때 삼자교회의 처소인 가정교회와 혼돈이 생기기 때문이다. 가정교회들이 자신들을 광야교회라고 부르게 된 연유가 중국선교 현장의 급속한 변화를 웅변으로 말해주고 있다.
1. 왜 가정교회를 광야교회라고 부르는가?
1982년까지만 해도 삼자교회에는 가정교회 형태의 교회가 없었다. 가정에서 모이는 규모의 교회는 정부로부터 비준을 받을 수 없었기 때문에 가정교회 형태의 교회가 삼자교회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정부로부터 비준을 받지 않은 교회들이 급성장하자 공산당과 정부는 당황하여 급히 비준을 받지 않은 교회들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교회들을 통제하기 위해 삼자교회에 등록하든지 교회를 폐쇄시키든지 선택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래서 비준을 받지 않은 어떤 교회들은 삼자교회에 등록하기도 하고, 스스로 소멸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핍박 속에도 끝까지 삼자교회에 등록하지 않고 피해 다니며 교회를 유지하는 교회도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핍박을 받지 않고 삼자교회와 관계없이 광야교회로 존재하는 교회들도 있다. 이런 배경에서 지금은 삼자교회에도 처소교회 또는 가정교회들이 많이 생기게 되었다. 그래서 진정한 가정교회와 삼자교회의 처소교회가 외면적으로만 보아서는 분별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광야교회 지도자들은 교제할 때 자신들을 광야교회라고 소개한다. 이는 그들이 가정교회라고 말하면 삼자교회와 구별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광야교회는 삼자교회에 등록하지 않은 가정교회를 말한다. 가정에서 모이기 때문에 가정교회가 아니라 삼자교회에 등록하기를 거부하는 교회이기 때문에 가정교회인데 삼자교회의 처소교회와 분별이 잘 되지 않기 때문에 광야교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가정교회에도 수백 명씩 모이고, 예배당을 건축한 교회도 있기 때문에 가정교회라고 부르기가 적당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래서 가정에서 모이든, 예배당에서 모이든 삼자교회에 가입하기를 거부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를 광야교회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2. 동북지역의 조선족 삼자교회에 소속된 가정교회가 많은 이유
동북지역의 조선족 삼자교회에는 많은 처소교회 또는 가정교회들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동북지역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처소교회들은 외형상으로는 광야교회 계열의 가정교회인지 삼자교회에 소속된 가정교회인지를 분별하기가 어렵다. 특히 연변자치주와 심양 인근에 있는 처소교회들은 광야교회로서의 가정교회가 아니라 삼자교회에 소속된 가정교회인 것이다.
동북지역 조선족삼자교회 소속의 가정교회들이 삼자교회에서 개척한 것은 아니다. 몇몇 교회는 삼자교회 전도자들이 세운 곳도 있지만 대부분의 가정교회들은 광야교회 계열의 가정교회 전도자들이 전도하여 세운 것이다. 그러나 정부와 삼자교회의 집요한 핍박과 회유로 이들 가정교회들을 흡수하여 현재는 대부분 삼자교회 소속이 되었다.
조선족가정교회들이 삼자교회에 흡수되어 소속하게 된 것은 한국교회의 영향이 절대적으로 작용하였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연길의 연길교회와 심양의 서탑교회를 방문하여 한국교회가 삼자교회와 교류를 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교회가 삼자교회에 중국교회의 정통성이 있는 것처럼 왜곡한 것이다. 나아가 한국교회가 연길교회와 서탑교회에 선교비를 집중적으로 지원하여 대형교회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연변이나 심양 인근에서는 삼자교회만이 바른 교회이고 광야교회는 이단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고, 광야교회의 전도자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게다가 한국으로부터 선교비를 받으려면 삼자교회에 소속하는 것이 거의 필수 조건이 되다시피 한 것이다. 그러니 조선족가정교회 또는 처소교회는 거의 대부분 삼자교회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3. 아직도 계속 핍박받는 광야교회
광야교회의 이미지는 핍박받는 교회이다. 사실 광야교회는 핍박받는 교회라는 뉴앙스가 강하게 나타난다. 광야교회는 크든지 작든지 계속 핍박을 받고 있다. 오직 진리를 지키기 위해 광야교회는 핍박을 받으며 고난을 당하는 것이다. 광야교회가 받는 핍박은 광야교회가 삼자교회에 가입하든지, 공산당 정부가 무너지기 전에는 끝나지 않을 것이다.
광야교회와 협력하는 어느 선교사의 증언에 의하면 하남성의 성도 5명이 춘절기간에 복음을 전하다가 귀가하여 예배를 드리다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 받아 형을 살고 있으며, 어머니와 오빠가 13년 전에 예수를 믿는 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고 언니는 무기형을 받았다가 감형되어 최근에 출옥한 자매도 있다고 한다.
광야교회에 대한 핍박은 점점 교활해져서 갈수록 감당하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다. 광야교회의 형편을 알고 기도로 그들을 섬기며 선교자원도 삼자교회에 치중하는 것을 지양하고 광야교회에도 공급되도록 특별히 배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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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삼자교회를 어떻게 보는가?
작성일: 2003/01/26 14:38:13
작성자: 인보라
현재 삼자교회를 어떻게 보는가?
삼자교회를 몇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다.
1. 원칙중심이냐 성과중심이냐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원칙은 성경말씀을 기본으로 하며 성과는 사역의 결과를 기준으로 한다. 원칙중심으로 볼 때 삼자교회는 지금도 애국종교사회조직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선교사역의 결과를 고려해 본다면 삼자교회도 현실교회라고 할 수 있다. 현실교회라 함은 삼자교회의 본질은 애국종교사회조직이지만 그 안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도 있고, 복음적인 교역자들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국선교사역을 함에 삼자교회를 무조건 배제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삼자교회를 성경이 지지하는 교회라고 할 수는 없다. 사람들은 성과에 급급하지만 하나님은 성과보다도 원칙을 더 중요시하신다. 사역자는 당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계산할 것을 염두에 두고 살고 사역을 해야 한다. 하나님은 선교사가 원칙인 하나님의 말씀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를 보시지 그가 쌓은 업적에 따라 평가하지 않으신다.
2. 삼자교회가 진정한 의미의 중국토착교회인가? 삼자교회는 중국토착교회를 의미한다. 그러나 삼자교회는 자치를 주장하지만 정부의 관리를 받고 있기 때문에 자치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삼자교회는 자양 내지 자급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자양이나 자급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자급을 외치면서 해외에서 오는 선교 달러를 환영할 뿐 아니라 선교 달러를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삼자교회는 자전을 주장하지만 18세 이하의 청소년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하게 할 뿐 아니라 이웃이나 다른 지방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금지한다. 그러므로 삼자교회는 삼자가 이루어지는 중국토착교회가 아니라 교회 밖 세력의 지배를 받으며, 교회 밖에서 지원을 받으며, 교회 밖에서 원천적으로 복음을 스스로 전할 수 없는 반삼자교회, 즉 토착되지 못한 중국애국종교사회조직인 것이다. 물론 삼자교회가 처한 지방과 교역자에 따라 은밀히 복음을 전하고, 주일학교를 운영하는 교회들이 있음을 인정한다 해도 크게 다를 것은 없다.
3. 삼자교회가 추구하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삼자교회가 추구하는 근본적인 것은 기존의 기독교신도들을 관리하는 것이요, 복음적인 교역자들과 신도들의 신앙을 자유주의적인 신앙으로 개조하는 것이다. 삼자교회가 초창기에는 "기독교를 박멸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문혁을 통하여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기독교신도들을 관리하는 것"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가정교회로 종교국에 등록하도록 강요하는 것도 중국의 모든 기독교도들을 관리하기 위함이다. 관리하는데 유익하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깨어있지 않으면 이 전략에 넘어가기 쉽다. 또한 삼자교회(삼자회)가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대로 삼자교회 안에 있는 복음적인 교역자들과 신도들을 자유주의적인 신학과 신앙으로 변질시킨다면 통전부와 종교국은 승리의 축배를 들것이다. 지금도 이 전략은 은밀히, 그리고 집요하게 수행되고 있다.
4. 삼자교회와 협력할 때 유의할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삼자교회 안에 있는 복음적인 교역자들과 구원받은 신도들을 지혜롭게 섬기는 것이 이 시대에 필요하다. 삼자교회와 협력하면 오바댜와 같은 현실과 타협하고는 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돕고 섬길 수 있다. 그렇게 함으로 그들이 삼자회가 의도하는 대로 자유주의적인 신학과 신앙으로 세뇌 당하지 않도록 도울 수 있다. 또한 삼자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구원받은 신도들을 관리가 아닌 목양을 부분적으로라도 할 수 있도록 섬길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이 완전히 개방될 때 삼자교회에 있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바른 길을 걷도록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삼자교회와 협력하려면 철저히 은밀하게 해야 한다. 공개적인 협력은 대부분 단명하다. 중국에서는 물론 한국에서도 자신의 사역을 감추는 것이 지혜롭다. 더군다나 삼자회의 앞잡이가 되어서는 안된다. 삼자회의 대변인이 될 때 그것은 통전전략에 놀아나는 것이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는 일을 하는 것이다.
* 이 글은 어느 선교사 대회에서 "삼자교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강의를 하고 미리 취합된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준비하여 참석자들에게 나누어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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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역사
작성일: 2003/12/31 16:34:32
작성자: 인보라
조선족 역사
1. 조선족이란?
중국과 조선은 지리상으로 서로 인접된 나라이며 자고로 정치,경제,문화,등 제분야에서 밀접한 교류관계를 가지고 있던 나라이기에 오랜 옛날부터 중국에는 많은 우리 민족이 살고 있었다. 우리 민족의 선인들이 일찍 중국 동북지역에 고조선,고구려,발해 등 고대국가를 세웠거나 산동,절강,복건등 연해지방에 신라방(新羅坊)이 있었따는 것을 제쳐놓고라도 수많은 력사문헌들은 료(遼),금(金),명(明),원(元) 등 어느 시기에나 적지 않은 우리 민족이 중국에서 살고있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료사(遼史)>>지리와 <<고려사>>기재에 의하면 14세기중엽 원나라 지순(至順)년간 (1330-1332)에만 해도 료동일대에는 몇십만의 고려인들이 살았다고 하며,명나라 홍무(洪武)년간에도 료동에는 많은 고려인들이 집거하고 있다고 하였다.명나라 홍무년간에 동녕위(東寧尉)소속부대에는 고려인 병사가 3만몀이 된다고 하였으며,영표(永票)년간 만산군(漫散軍)에도 고려인 병사가 적지 않았다고 하였다.군인가운데 이처럼 많은 고려인이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지방에는 더 말할 것 없이 많고 고려인들이 살고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료동지(遼東志)>>의 기록을 보면 명나라 홍무년간에 료동일대에서 살고있던 고려인은 료동 총인구수의 10분의 3을 차지하고있었다고 하였으며 또 그들은 서쪽으로는 료양,동쪽으론느 개주(開州),남쪽으로는 해주(海州)와 개주(蓋州)에 이르는 광활한 지구에서 살고있었다고 하였다. 력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명나라 홍무년간에 료동에서 살고있었다는 고려인들은 대다수가 원나라 시기부터 여러 경로를 통해 조선반도에서 중국으로 건너온 사람들이라고 하였다.
명나라 시기 료동지구에서 살고있던 고려사람가운데서 큰 벼슬을 하여 명뭄가족으로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를테면 명나라 시기에 20년간이나 료동총병 관직에 있으면서 명성을 날리던 리성량(李成梁)과 그의 후손들은 대대손손 오랫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아왔는데 혈통으로 보면 고려사람인 것이 분명하다. 이로보면 고조선,삼국시기는 물론 그뒤 고려조,조선조 초기에 이르기까지 줄곧 중국에는 우리 민족이 살고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오늘의 중국조선족이 그들의 직접후손들인 것은 아니다. 일찍 중국 동북지방에까지 세력을 뻗쳤던 고려 사람들도 기원 4세기에 서울을 평양으로 옮기면서 대부분 사람들이 남으로 이동했으며 중국에 남았던 사람들도 오랫동안의 력사와 흐름속에서 그곳 민족에게 동화되고말았다. 그리고 명나라나 원나라시기 료동지역에서 살고있었다는 고려인들도 모두 동화되고 오늘은 그 흔적을 찾아볼수 없다.
명나라 말기 후금(后金)사람들이 여러 차례 조선에 침략해가서 많은 조선사람들을 랍치해 로력으로 사용했다. 그러나 그들도 절대 다수가 만족이나 한족에서 동화되고 말았다. 최근 료녕성과 하북성에는 일부 박가성ㅇ르 가진 민족들이 자기들은 원래 조선민족이였다고 하면서 조선족으로 돌아올것을 요구했다고 하는데 그들 역시 조선사람의 기본특성을 거의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중국조선족은 원나라 명나라 시기에 건너온 조선사람의 후손도 아니며 고구려 유민은 더욱 아니다.
오늘의 중국 조선족은 생활의 핍박에 의해 지난세기 중엽으로부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살길을 찾아 중국에 정착한 사람들과 그의 후손들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조선족은 대대로 중국땅에서 살아온 그런 토착민족과는 달리 조선반도에서 이미 근대민족으로 형성된 뒤 중국에 이민해온 사람들로서 그 성격으로 보아서는 백여년래 로씨야나 일본,미국 등지에 이민간 우리민족과 별로 다를바가 없다.
그러나 중국에 이민해온 우리 민족은 이민초기부터 중국의 다른 여러 민족과 함께 중국의 강토를 개척하고 경제를 발전시키며 일본제국주의 등 국내외의 적들ㅇ르 물리치고 중화인민공화국을 창건하는 과정에서 점차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로서의 주인공적 지위를 얻게 되였다.
우리 민족이 중국땅에 발을 내디디기 시작할 때 백두산을 중심으로한 천여리 땅은 청나라의 봉금책으로 사람 없이 거의 비여있다싶이 되였다.
중국 관내지방과 가까운 료녕성일대에는 산동,하북 등 지구에서 이사온 한족들이 많이 살고있었지만 북간도와 서간도 등 조선과의 접경에는 소수 토착민족이외 다른 민족이 별로 많이 살고있지 않았다.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우리 민족의 초기 이민들과 관내에서 들어오는 한족과 함꼐 오랫동안 황무지로 묵여두었던 땅을 개척하여 삶의 터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비록 이국땅에서 살고있는 고독감과 슬픔을 감지하면서 제손으로 일군 땅과 삶의 터전에 정을 붙였으며 또 일본 제국주의 침략의 마수가 중국에까지 뻗칠 때 이 땅을 보위하기 위해 중국의 다른 민족과 함께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이런 력사과정에서 중국의 조선족은 점차 중국을 자기 삶의 유일한 고장으로 여기게 되였고 또 자기의 운명과 중국의 운명을 함께 놓고 생각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중국의 조선족은 중국에 있어서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되였으며 자기를 재중조선교민,재중한인이라고 하지 않고 중국조선족이라고 한다.
2)중국조선족의 어제
중국의 조선족은 이민력사가 근 2백여년이나 된다. 그동안 그들은 봉금책으로 수백년간 묵여두었던 땅을 일구어 논밭을 만들고 삶의 터전을 만들어야 했으며 청나라 정부의 <<변발이복,귀화입적(弁發易服,歸化入籍)>>의 동화정책과 민국시기 봉계군벌(奉系軍閥)의 민족기시,위만시기 일본제국주의의 민족동화정책 등과 싸워 민족생존권리르 확보해야했다. 더욱이 중국 동북지역의 조선족거주지역은 오랫동안 반일 무장투쟁의 주요한 근거지 및 전쟁터로 되고 있었으므로 중국조선족의 력사는 말 그대로 처절한 민족의 수난사이자 생존사로 되고 있다.
우리민족이 중국으로 많이 이주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중엽 조선 북부지구에서 련속 재황이 들고 리재민들이 월강금지령에도 불구하고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넘어 중국 동북지역으로 들어오던 때부터였다. 물론 그 이전에도 비밀로 중국에 들어온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 수가 많지 못했으며 또 있다고 해도 대다수는 봄,여름에 강을 건너와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다시 돌아가는 형식을 취했다. 살길을 찾아 중국에 넘어온 초기 이주민들은 봉건통치배들의 민족기시정책의 유린을 당하면서 굳은 삶의 의지와 노력으로 묵은 땅을 개간하고 논을 풀어 삶의 터전을 만들었다. 더욱이 중국동북지역은 자고로 밭곡식을 위주로 재배하던 곳인데 조선족 초기 이민들은 동북 각지에서 만난신고를 들여 논을 풀고 벼를 재배하는데 성공하였다.
1910년 한일강제합병을 전후로 하여 한국의 많은 우국지사들도 중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므로 이때부터의 이민은 단순한 <<살기위한>>움직임만이 아니라 나라를 찾기위한 정치망명 성격을 띤 이민자도 적지 않았다.
당시 중국 동북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의 인구집계를 보면 1907년에 7만명이였다면 한일강제합병을 선포한 1910년에는 10만명을 초과하였고 1916년에는 20만명을 넘었으며 1920년에는 45만 9천명에까지 이르렀다고 하였다. 이것을 보면 이때부터 중국으로의 이민은 단순히 살길을 찾아 온 것이 아니라 일제통치를 피해오거나 반일을 위해 온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10년대에 중국으로 이주한 반일지사들과 초기 이민들은 즉각적인 항일투쟁보다 우선 학교를 설립하고 후세에 대한 교육을 통하여 애국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이리하여 1906년 리상설,리동녕 등이 먼저 룡정에다 서전서숙을 꾸렸으며 그뒤에는 명동학교,창동학교 등 수많은 학교가 세워졌으며 1919년에는 군사인재양성에 목적으로 한 신흥무관학교까지 세워졌다.
1910년대에 이렇게 반일을 목적으로 한 학교가 연변에만 해도 72개소가 되였으며 1926년에는 191개소로 까지 늘어났다고 한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중국조선족 거주지역에서 반일운동은 새로운 고조를 이루었다.
같은해 3월초 , 조선의 <<독립선언서>>가 연변에 전해지자 우선 먼저 연길,룡정 등지의 학생들이 자동적으로 거리에 나가 강연을 하거나 삐라를 산포하는 방식으로 3.1운동의 실황의 의의를 대중들에게 선전했다. 3월9일에는 조선인반일단체 지도자들이 회의를 열고 3월13일 <<조선독립선언사>>발표를 경축하는 민중대회를 룡정에서 거행할 것을 결정했다. 3월13일 예정대로 룡정에서 2만여명의 사람이 모인 성세호대한 민중대회가 조직디였으며 대회 이후에는 큰 규모의 반일 시위행진이 있었다.
일제와 당지 반동경찰들은 맨주먹의 시위군중을 향해 란폭한 사격을 퍼부어 10명이 당장에서 숨지고 4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30여명이 경상을 입은 참사가 발생했다. 룡정에서 일어난 <<3.13>>반일민중시위와 같은 만세시위는 연변각지는 물론 통화,류하,집안,홍경 등 서간도 지역의 조선인집거구들에서도 맹렬히 일어났다.
<<3.13>>운동을 계기로 반일무장대오가 중국조선인집거구에서 조직되였다. 그들은 <<3.13>>피의 교훈에서 오직 무장반항만이 일본의 침략을 물리치고 생존권리를 찾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는 것을 인식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1919년 4월부터 중국 동북각지의 조선인반일단체들은 모두 무기를 구입하고 무관학교를 세우며 무장대오를 건립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 건립된 조선인반일무장대오중 비교적 큰것으로는 안무(安武)가 이끄는 국민회무장대회(대원 400명 ,보총 450자루), 서일(西一), 김좌진(金佐鎭)이 이끄는 북로군정서(대원 600명,보총500자루,권총150자루), 홍범보(洪范圖)가 이끄는 대한독립군, 최명록 , 박영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삼원포에서 조직된 독립단 등이며, 이외에도 왕청의 의군단,훈춘의 청년단,장백의 독립군비단 등이다.
이러한 반일무장대오들은 변경지구 및 조선에 건너간 부단히 일본군경들을 습격했다. 한 통계에 의하면 1921년 한해동안 반일부대들이 일본군과의 교전차수는 602차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큰 승리를 거두어 세상을 들썽하게 한적도 한두번이 아닌바 그중 가장 유명한 전투로는 우리가 모두 잘 아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 봉오동에서 반일 무장대오가 홍범도장군의 지휘하에 단번에 150염여의 일군을 소멸하는 큰 전투로 그 승리가 국내외에 준 영향은 자못컸다. 그리고 동년 10월하순, 화룡현 청산리,와룡일대에서 진행된 <<청산리대첩>>은 그 규모와 적군을 소멸한 수로 보아 <<봉오동 전투>>보다 훨씬 컸다. 김좌진장군이 지휘한 <<청산리전투>>는 곳곳에서 조직된 조선인반일부대들이 련합하여 경신년토벌시기 연변에 들어온 일본침략군을 족친 전투인바 이 작전에서 일본군 도합 1,400여명을 섬멸하고 수많은 무기와 군용물자를 로획하였다. 그러나 봉오동 등 전투에서 참패를 당한 일본침략군은 중국 군벌정부와 결탁하여 일본군이 직접 연변 등 중국조선민족집거구에 출병하여 조선인반일부대들을 소멸할 계획을 세웠다.
그들은 소위 불령선인(不逞鮮人)들이 일본령사관을 습격했다는 이른바 훈춘사건을 조작한후 이를 구실로 자기의 침략군을 직접 중국 동북땅에 보내여 중국경내에 있는 우리 민족에 대하여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이것이 곧 력사상 이름있는 <<경신년 대토벌>>이다.
일본군은 제19사단의 두개 려단을 주력으로 씨비리로부터 철퇴해나오는 제11,13사단과 동북주재 관동군 그리고 조선헌병대와 총독부 경찰대까지 동원하여 1920년10월부터 시작하여 주로는 동남과 남만일대의 조선인집거구에 대하여 대토벌작전을 벌렸다. 일본침략군은 이르는 곳마다에서 살인,방화,략탈 등 갖은 야수적 만행을 다 감행하였다. 어떤 곳에서는 조선인마을을 포위하고 남녀로소를 막론하고 모두 집안에 가둔채 불을 질렀으며 어떤 곳에서는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여 총살하였다.
한 자료에 의하면 같은해 10월 9일부터 30일까지 21일밖에 안되는 토벌기간에 훈춘,왕청,연길 등 몇 개 현에서만 도합 3,500여명의 조선인들이 학살당했다고 하며 소각당한 민가는 2,600여채,학교 31개,교회당이 7개라고 한다. 정확한 수자는 알수 없어도 <<토벌>>기간에 수천명의 무고한 우리 동포들이 일본병사에게 학살당했으며 수많은 조선인마을들이 재더미로 되었다.
1931년 9.18사변이 일어난 뒤 중국 동북지방은 일본의 완전한 식민지로 전락되였다. 이어 일본은 1937년 7월7일 <<로구교사변>>을 일으켜 중국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을 발동하였다.일본의 전면적인 대중국 침략전쟁과 함께 중국은 전면적인 항일전쟁시기에 들어섰다. 9.18사변후 한동안 일본의 침략에 대하여 부저항주의, 소국적항일을 일삼던 국민당정부도 부득불 중국공산당과 합작하여 공동히 항일을 하지 않을수 없게 되었다.
주로 중국 동북지구에 집거한 조선족들은 9.18사변후 주로는 중국공산당의 령도하에 반일유격대를 조직하여 광복이 오는 날까지 무장투쟁을 견지하였다. 특히 30년대초엽 조선인유격대들은 당시 일본의 식민통치가 아직 공고히 되지 못한 기회를 리용하여 장백산과 대흥안령 그리고 중쏘변경 등 산악지구에 수많은 유격근거지를 건립하였으며 어떤 근거지에서는 인민정부까지 세웠다. 이러한 조선인유격대들은 30년대 중엽 통일적인 동북항일련군이 조직되면서 이에 가담하여 중국의 다른 민족의 반일전사들과 함께 싸웠다.
1945년 8.15광복도 중국에 사는 우리 민족에게는 그다지 큰 기쁨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광복의 기쁨과 흥분은 며칠 지속되지 못하고 중국은 또다시 국공량당의 전쟁터로 변했다. 이리하여 중국의 조선인들은 다시금 손에 총을 들고 근 4년간이나 지속된 해방전쟁에 참가하게 되었다.
통계에 의하면 해방전쟁시기 동북3성에서 조선족청년들이 참군한 수는 도합 62,942명이나 된다고 하는데 이 수자는 전 동북조선족인구의 5%이상을 차지한다. 그중 연변 5개 현에서 참군한 조선족의 수는 34,855명이며 원 송강성에서 참군한 수는 12,644명, 원 료동성에서 참군한 수는 8,753명, 기타 지구에서 참군한 수는 근 7,000명이라고 한다. 정규군외에 공안부대,기간대, 무장민병등 지방 무장조직들에 참가한 조선족의 수도 10만 명이나 된다고하니 모두들 합하면 엄청난 수가 된다.
그리고 전선지원을 위해 담가대, 전선근무대, 운수대로 나간 조선족도 기지부수이다. 불완전한 통계에 의하면 원 송강성에서만 해도 12,000명의 조선족 청장년들이 담가대에 나갔다가 돌아왔으며 연변에서는 1948년 한해ㅏ엠나해도 14,000여명의 조선족담가대원이 전선에 나갔다고 한다.
각곳에서 참군한 조선족전사들은 대부분이 동북민주련군 제10종대 278,28,30사 그리고 연변, 목단강, 통화, 할빈 및 길림지구에서 조직된 , 조선족 병사를 위주로 한 동북군구직속 3개 독립사단에 편입되였다.이 부대들은 후에 모두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의 주력부대들로 되였다. 조선족을 위주로 하여 조직된 이 부대들은 <<삼하강남(三下江南)>>,<<4보림강(四保臨江)>>등 초기전역과 그뒤의 사평보위전,길림과 장춘을 해방하는 전역,료심전역과 평심전역에 참가했으며 백만대군이 장강을 넘어 전 중국을 해방할 때 그들은 머나먼 광서 , 해남도까지 나갔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르는 4년간의 해방전쟁시기에 전선에서 희생된 조선족의 지휘관과 병사만 해도 도합 3,550명이라고 한다.
이처럼 중국조선족의 어제는 삶의 터전을 만들기 위한 피눈물나는 민족의 개척사, 수난사이며 국내외 적들과 생사판가리 싸움을 진행한 투쟁사,전쟁사였다.
3) 중국조선족의 오늘
1990년도 전 중국 제3차인구보편조사에 의하면 지금 중국에는 192만 597명의 조선족이 살고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1990년이래 오늘까지 증가된 수를 고려하면 오늘의 중국조선족의 수는 200만명선을 넘는다.
오늘 중국조선족의 대다수는 지금도 여전히 동북3성과 내몽골자치구에 살고있으며 , 일부는 북경, 하북, 등 기타 지역에 분포되여있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살고있는 길림성에 118만 2천명, 료녕성에 23만명, 내몽골에 23,000명, 하북성에 6,000여명이 살고있다. 북경,상해,천진 등 전국 기타 성,시에도 조선족이 얼마간씩 살고있는데 대부분은 새중국이 창건된 뒤 사업전근,졸업배치,비즈니스등 원인으로 동북에서 살던 사람들이 거기로 옮겨간 것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면서 중국조선족 생활에서 일어난 가장 획기적인 변화는 중국조선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의 하나로서의 주인공적지위가 법적으로 확정된것이다. 물론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되기 이전에도 중국공산당은 줄곧 중국경내에서 살아온 조선족을 중국의 소수민족의 하나로 인정해왔으며 민족평등정책을 실시해왔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뒤 중국조선족은 중화민족대가정의 어엿한 성원으로서 모두가 중화인민공화국의 공민으로 되였으며 헌법에 규정된 모든 공민의 권리를 행사할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 뒤 소수민족들이 집거하는 구역에서는 구역자치를 실시할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조선족도 자기들의 집거구에서 구역자치를 실시하기 시작했다. 중국에는 지금 조선족 자치구 1개,자치현 1개,자치향 21개 있다. 자치권리의 기본내용에는 당지 민족의 특점에 의해 자치조례를 제정할수 있으며 정부기관에는 일정한 비례의 민족간부가 있어야 한다거니와 본 민족의 언어문자를 사용할 권리를 가진다는 것이 모두 법적으로 규정되있다. 더욱이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비록 길림성에 소속한 일정한 구역범위내의 자치구이기는 하지만 여기에는 전체 중국조선족의 교육과 문화사업을 지도할수 있는 기관들이 설치되여있다.
민족자치구역의 핵심적문제는 그 민족이 그곳에서 나라의 주인공 역할을 하는가 못하는가에 있는데 나라의 주인공으로 되려면 자기의 민족간부가 있어야 한다. 왜냐 하면 국가의 주인으로서 역할을 오직 자기의 간부를 통해 발휘될수 있으며 민족의 요구와 의견도 많이는 민족간부를 통해 반영되고 채택될수 있기때문이다. 목전 중국에서는 구역자치를 실시하고 있는 지구는 물론 산거지구(散居地區)에도 무릇 우리 민족이 사는곳에는 모두 우리 민족의 간부가 그곳 정부 혹은 인민대표대회, 정치협상회의에서 일정한 직무를 맡고있다. 자치구역에는 규정에 따라 주요한 행정부문의 정직(正職)은 조선족이 담임하고 또 그 지구 당, 정 간부중 자치민족간부가 점하는 비례는 그 민족 총수의 비례보다 얼마간 높다.
례를 들면 연변조선족자치주 총인구중 조선족이 점하는 비례는 41%이지만 처급이상 간부는 54.5%를 차지한다. 산재지구에서도 조선족이 비교적 많이 살고있는 지역에서는 적어도 부현장 ,부향장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 직은 조선족이 맡고있으며 교육부문, 민족사무위원회에도 한두명 조선족이 책임을 맡고 있다.
중국에서는 각 민족은 언어사용, 문자사용과 발전에서 평등하다고 법적인 규정을 내렸으며 민족자치구역에서는 자치민족의 언어문자가 첫째가는 관용언어문자로 규정하였다.
연변 같은 큰 조선족자치구역에서는 조선어와 문자가 관용어의 하나로 되였으며, 그것을 감독집행하는 기구까지 설치되였다. 본민족의 언어문자로 된 방송,텔레비죤,신문들이 합법적으로 나라의 돈으로 꾸려지고있으며 민족학교들에서는 본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첫자리에 놓고 배우고있다. 통계에 의하면 중국에서 출판되는 조선문신문이 12종이며 조선문 잡지는 20여종 , 성급이사의 조선말 방송국이 5개, 대,중,소학에서 우리 민족의 어문을 가르치고있는 교원이 1,800여명이나 된다. 이로 하여 오늘의 중국조선족의 대다수는 여전히 자기말, 자기 문화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다.
1990년 통계에 의하면 중국의 조선족은 모두 192만명인데 조선족 중,소학교가 1,651개가 되며, 그중 중학교가 288개, 소학교가 1,363개,학생 총수는
35만 5천명이다. 그리고 연변대학,연변의 학원,연변농학원,길림예술학원연변분원 등 민족대학이 설치되여 매년 천여명의 조선족 고급인재를 양성하여 사회에 내보내고있다. 최근년간 민족어 사회환경이 축소되면서 한족학교(중국인학교)에 다니는 조선족학생이 얼마간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기는 하지만 그수는 아직 조선족 전체 학령아동수의 15%를 초과하지 않고 있다. 한족학교에 다니는 조선족학생은 연변에서는 9.2%,료녕,흑룡강에서는 각각 30%와 22%로 나타나고있는것으로 보아 지금 85%이상의 조선족아동은 모두 조선족학교에서 기초단계의 교육을 받고있다는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조선족들은 다년간의 노력을 거쳐 유치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민족교육체제를 세우는데 성공하였다. 마을마다 민족유치원이 있고 촌마다 민족소학이 있으며 향과 현에는 민족중등학교와 고등학교가 있다. 연변자치주 소재지인 연길에는 각종 민족대학이 있으며 또 민족학교 교원의 자질제고를 위해 세운 교원연수학원,연수학교만 해도 10개나 넘는다.
료녕,길림,흑룡강 각 성에 민족사범학교를 설립했으며 각종 민족전문기술학교도 수십개나 된다. 각 성,현마다 중국조선족이 있는 곳에는 민족교육관리부문이 있으며 통일적인 민족교과서 편집부문과 민족교육출판사가 있어 자체적으로 교과서를 만들고 교원을 양성하며 조선족교육의 발전을 보장한다.
총적으로 오늘의 중국조선족은 비록 이민력사가 근 200년이나 되지만 대다수가 여전히 자기의 말과 문화를 고스란히 보존하고있다. 그리고 중국조선족의 대다수는 지금도 여전히 농업에 종사하고 있기는 하지만 경제상으로나 문화, 교육 등 제반 사업에서 국내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발전된 상태에 있다. 그러기 때문에 강택민주석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시찰방문할 때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시찰방문할 때 연변조선족자치주는 마땅히 전국의 모범자치주로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4)중국조선족의 미래
중국조선족의 미래를 구체적으로 말하면 21세기의 중국조선족은 어떻게 될것인가? 20세기에 있어서 중국의 조선족은 대부분 시간을 전쟁과 사회혁명에 보내다보니 경제생활방면에서 지금도 락후한 상태를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있다. 중국조선족의 대부분은 지금도 여전히 농촌에 거주하며 전통적인 소농경영방식으로 농업생산에 종사하고 있으며 생활수준은 중국경내 다른 소수민족에 비하면 그리 낮은 편은 아니나 국제수준으로 보면 퍽 낮다.
본세기 80년대부터 중국에서 개혁개방정책을 실시한 뒤 중국 조선족 생활에서도 거대한 번화가 일어났다. 조선족이 가장 많이 집거하고 있는 연변만 놓고보더라도 1979년부터 1991년까지 13년동안 조선족 개인 공상업자의 수는 72배, 자금량은 222배, 영업액은 152배가 증가되였다.
그리고 농촌으로부터 도시로 진출하는 중국조선족이 증가되였으며 대외개방과 함께 한국, 일본 등 국외로 진출하는 조선족들도 날따라 증가되는 추세다. 1990년 통계에 의하면 북경에 사는 조선족수는 6천명에 불과했는데 최근 통계에 의하면 근 3만명이 될것이라고 하며 그중 다수는 연변이나 흑룡강성,료녕성의 조선족 농촌에서 들어간 사람들이라는것이다. 이리하여 최근 중국조선족의 도시인구와 농촌인구의 비례는 급격히 변화되고 있으며 오라지 않아 도시인구비례가 농촌인구비례를 초과될 전망이다.
다음 점차 동북아경제권이 확립되고 한국,일본,미국 등과의 교류가 많아지면서 중국조선족으로 하여금 점차 선진공업민족으로 발전될 전망이 뚜렷해지고있다. 특히 두만강하류지방이 국제범위에서의 경제개발의 중심지의 하나로 되면서 연변 등 많은 조선족집거구들은 멀지 않은 장래에 경제발전의 속도가 중국에서는 비교적 빠른 지역의 하나로 될것으로 전망된다. 이렇게 되면 중국의 조선족들도 늦게나마 점차 현대화한 선진민족을 향해 발돋음을 하게 될것이며 이에 상등한 민족문화교육이 새로운 번영도 도래될 것이다.
그러나 중국조선족의 미래에는 문제점도 적지 않다. 오늘까지 많은 경우네는 국가의 힘으로 유지되던 조선족문화교육사업이 시장경제의 도입과 함께 적지 않은 애로에 부딪치고 있으며 많은 조선족들이 상대적으로 집중되고있는 농촌을 떠나 도시로 들어가면서 민족문화보존의 주요담보로 되고있던 일부 민족집거구도 허물어져가고 있단는것이다. 이리하여 일부 지구에서는 민족교육이 위기에 처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집거해있던 조선족 부락들이 없어지거나 조선족학생수가 급속히 감소되면서 어떤 곳에서는 부득이 조선족학교를 없애버리거나 아니면 몇 개 학교를 합해야 하며 또 그러자면 기숙학교를 꾸려야 하는데 나라에서나 사회단체에서의 재정지원이 없이는 불가능이다. 그리고 시장경제가 발전되면서 돈만 벌면 되지 중국에 살면서 우리말과 글을 배워서는 무엇하느냐 하는 <<조선말 무용론>>사상이 점차 조선족들 속에 만연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리하여 한족(중국인)학교에 들어가는 조선족학생수가 점차 늘어가는 현상이다.
다음은 조선족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의 학습질이 한족학교학생보다 점차 낮아지고있다. 우리말로 된 책이 중국말로 되것보다 적은데서 조선족 학교에 다니는 조선족학생들의 과외독서범위가 한족학교에 다니는 학생보다 좁다. 그리고 조선족학교에 다니는 조선족 학생에게는 한족학교에 다니는 학생보다 1,000여시간의 중국어 시간이 더 있으므로 학습부담이 많다. 한족학교에 다니는 학생은 중국어와 외국어만 배우면 되지만 조선족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민족어까지 합해 모두 세가지 어문을 배워야 한다. 조선족학교의 학습질이 낮아지면 자연 그런 학교에 다니는 학생이 줄어들기 마련이다.
또 다음은 시간이 흐를수록 민족언어 상요환경이 점차 축소되고 민족언어에 대한 감정이 약해지며 지어는 우리 말과 글을 잊어버리는 현상이 나타난다. 연변 같은 자치구역에서는 언어환경이 넓어 어느정도 괜찮지만 산재지구에는 그렇지 않다. 산재지구의 일부 조선족들은 조선족학교에 들어가 우리말을 좀 배우기는 했지만 우리말 기능이 약해 공개적인 교제장소에서 감히 말하지 못하는데서 조선말 사용을 아예 포기해 버린다. 통계에 의하면 북경, 할빈, 심양, 장춘 같은 큰 도시에 산재하는 조선족 청년들 가운데서 이처럼 조선어 사용을 포기해버린 학생의 비률은 조선족청소년 총수의 60%를 초과하고있다고 한다.
그리고 지난날 대부분 소수민족 도서 및 신문 , 잡지의 출판은 국가의 재정지원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시장경제체제가 확립되면서 국가의 재정지원이 줄고 조선문독서범위가 날로 축소되면서 민족도서출판업 등 민족문자사용의 주요한 매체들이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 이런 상황은 적지 않은 조선족들로 하여금 중국에 살면서 조선말을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중국조선족의 미래에는 자칫하면 민족교육이 쇠락되거나 민족언어 및 문자사용 등에서 많은 문제점들이 생길수 있으리라는 것이 예견된다. 총적으로 중국 조선족의 미래는 밝지만 문제점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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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교회 신학교의 교과과정
작성일: 2003/11/22 19:21:26
작성자: 인보라 ()
동북삼성의 어느 교회에서 실시하는 신학교육 교과과정입니다. 동북삼성의 조선족교회는 중심교회 마다 나름대로의 신학교육을 실시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조선족교회 신학교들이 어떻게 교과과정을 실시하는지 볼 수 있는 자료입니다. 신학교육은 대개 3년 동안 실행되고 있습니다.
교학과목
1. 신조학: 천로역정, 소요리문답, 웨스트민스트신앙고백.
2. 조직신학: 서론, 신론, 인간론, 기독론, 구속론, 교회론, 말세론.
3. 석경학: 모세오경, 역사서, 시가, 대선지, 소선지, 공관복음, 요한복음,사도행전.
교의서신: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옥중서신: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히브리서.
교목서신: 미모데전후서, 디도서.
공동서신: 베드로전후서, 요한1,2,3. 요한계시록.
4. 교회역사: 초기교회, 중세교회, 종교개혁, 근대교회.
5. 실천신학: 강도학, 경배학, 기도론, 교육학(주일학교), 교회행정.
6. 성경신학: 하나님의 나라.
수업순서.
1. 천로역정, 소요리문답.
2. 서론, 오경.
3. 신론, 공관복음.
4. 인론, 역사서1.
5. 기독론, 역사서2, 사도행전, 교회행전.
6. 구원론, 시편, 강도학.
7. 교회론, 말세론, 교의서 1, 교회사(초기).
8. 교의서2, 교회사(중세, 종교개혁), 교육.
9.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선지.
10. 소선지, 경배학, 하나님의 나라, 교목서신.
11. 옥중서신, 히브리서, 도고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