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주의 인도하심 따라서 - 인보라의 선교기행 [교계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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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주의 인도하심 따라서 - 인보라의 선교기행 [교계실상]


이름 : 중선 번호 : 52 게시일 : 2004/02/13 (금) AM 03:20:49 조회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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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8일부터 31일까지 중국 동북 삼성을 선교 여행차 다녀왔다.
중국 동북 삼성을 방문한 것은 이번이 세 번째이다. 갈 때마다 감회도 새롭고, 보는 것도 새롭다. 주님은 처음 중국에 갔다 올 때 나에게 하신 약속을 어김없이 지켜 주셨다. 나의 형편과 처지로는 올해에 두 번씩이나 중국에 갔다 온다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또 다시 중국에 갔다 왔으니 말이다.

더군다나 이번은 23박 24일이나 되는 장기 선교 여행이었다. 처음에는 선교 기행문을 쓰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중국이 개방되기 전에야 중국 선교 기행문을 쓰는 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되었지만 중국 여행이 개방된 지금 선교 기행문을 쓸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선교 기행문을 쓰는 것이 진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여행 중에 마음이 바뀌었다. 전과 같은 흥미진진한 기행문은 되지 않을 지라도 중국 선교를 위해서는 필요한 여행이었기에 선교에 초점을 두어 기록하기로 하였다.

이번 선교 기행문의 제목은 "주의 인도하심 따라서"이다. 잠언 16장 9절에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는 말씀과 같이 이번 선교 여행은 철저하게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여행이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나의 믿음이 좋아서 주의 인도하심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나의 계획대로는 거의 된 것이 없고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요, 그러면서도 내가 계획한 것보다 훨씬 더 좋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여행에 필요한 경비의 조달이 나의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이번 선교 여행에 250만원이 필요하였다. 그래서 내가 잘 아는 친지한테 200만원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 교회 성도들, 데이콤 신우회, 동역자들의 헌신으로 필요한 여행 경비를 채워 주셨다. 여정도 내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근본적인 여정은 그런대로 이루어졌지만 상당 부분이 처음 계획과 상관없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지나 놓고 돌이켜 보니 내가 계획했던 여정보다 지나온 여정이 더 좋았다. 이것은 분명 주님의 인도하심이었다. 여행을 하는 동안 '주님이 인도하신다'는 생각을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이것은 나 혼자의 생각일 뿐 아니라 동행한 조선족 동포 안내자인 000형제의 생각이기도 하였다. 달리는 이번 여행의 여로를 설명할 수가 없다.

이번 선교 여행은 지난 2차 선교 여행보다 준비가 부족하였다. 저번에는 정성을 다하여 준비하였는데 이번에는 그러지를 못했고 몸도 마음도 피곤한 가운데 출발하게 되었다. 아마 출발하기 전에 더위를 먹었었고 몸이 별로 좋지 않은 것이 여행하는 동안 두고 두고 나를 괴롭혔다. 체중이 늘 것 같지 않아 좋았지만 몸은 괴로웠다.

여행을 하면서 준비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두고 두고 아쉬웠다. 다음에 다시 선교 여행을 할 때에는 건강은 물론 모든 면에서 준비를 철저히 하겠다고 굳게 결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꼭 보아야 할 것은 보여주셨고, 만나야 할 사람은 만나게 해주셨고, 들어야 할 것은 듣게 해 주셨다. 주님의 은혜에 감격할 뿐이고, 종의 게으름과 불충이 죄송할 뿐이다. 우리 팀은 다섯 명이 출발하게 되어 부산한 맘으로 준비하였다.

8월 8일(月)

아침부터 바삐 움직였다.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고 환전을 하다 보니 공항으로 출발할 시간이 다 되었다. 그 때까지 준비가 덜 된 부분이 있어서 참 아쉬웠다. 공항에 도착해 보니 일행들이 도착해 있었다. 오 목사님과 홍 목사님도 배웅을 나와 주셨다. 수속을 마친 후 4시 20분 천진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하나님의 눈은 언제나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신다. 폐쇄 회로를 이용한 도난 방지 카메라는 카메라가 작동하는 범위에서만 사람의 범죄 행위를 감시하지만 하나님의 눈은 세상 어디에서나 우리를 지켜보신다. 우리의 행위뿐만 아니라 우리의 마음 씀씀이까지 하나님은 감찰하신다. 하나님의 감찰하시는 눈을 의식하면서 는 것이 귀하다고 깨달았다. 평생에이 깨달음을 잊지 않고 살고 싶다.

천진행 비행기에 탑승하니 이제 또 다시 중국에 가는구나 하는 실감이 난다. 그러나 처음 중국에 갔을 때의 감격은 생기지 않으니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하다. 비행기 안에서 들려 오는 소리는 집사님, 장로님, 사모님, 목사님 하는 호칭이었다. 내 주위에 보니 온통 교인들이었다. 하는 이야기들이 들려 오는 것을 들으니 아마도 수련회를 겸해서 여행을 떠나온 팀들도 있었고, 순전히 여행을 하려고 가는 팀들도 있었다. 그 때 두 가지 마음이 들었다. 한국 교회가 이렇게 성장했구나 하는 생각과 한국 교회가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었다.

천진에 도착해 보니 00 대학의 000교수가 마중 나와 있었다. 택시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저렴한 호텔을 찾아갔다. 택시 한대 당 20원씩(한국 돈 2,000원) 주고 호텔에 찾아가 보니 대략 210원에서 260원 짜리인데 210원에 방 세 개를 빌렸다. 도착 예배를 드린 후 바깥에 나가 과일을 사 먹었다. 호텔에 돌아와 목욕을 한 후 잠을 청하니 잠이 오지를 않는다. 사실 그 때 나에게는 화급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귀국하는 항공권의 날짜를 변경하는 문제였다. 애초에 나는 홍콩에 들려 마카오에서 사역하시는 김응삼 목사님을 뵙고 중국의 문혁 이후의 한국 교회의 선교의 발자취에 대하여 여쭈어 보려고 하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지도 교수인 조동진 목사님의 논문 집필을 위해서는 반드시 중국 선교의 산 증인인 김응삼 목사님을 만나서 그 역사적 과정을 들어야 한다고 간곡하게 말씀하셨기에 어떻게든 홍콩에 들르려고 하였다. 그런데 여비가 확보되지 않아서 엉거주춤하고 있는 사이에 항공권이 예매되었다.

안타까운 것은 항공권은 31일에 홍콩을 경유하는 것인데 경유만 할 뿐 홍콩에서 김목사님을 찾아 뵐 시간적 여유가 전혀 없었다. 그래서 북경에서 홍콩으로 출발하는 비행기 표를 29일이나, 28일로 변경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한국 여행사에서는 불가능하였다. 현지에서 해결해 보려고 하고 왔는데 그 일이 어찌될지 몰라서 잠이 안 온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 맡기고 나니 잠이 온다.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

8월 9일(火)

아침에 일어나서 식사를 하러 호텔 식당에 가보니 쌀 죽하고 아무 맛도 없는 빵이 나온다. 빵을 엄청나게 좋아하는 나인데도 겨우 먹었다. 그렇다면 그 빵의 질을 알 만하지 않은가?

호텔 로비에 한국 교회 청년들이 교회 전도사와 함께 여러 명이 와 있었는데 아마도 어제 같은 비행기를 탔나 보다. 알고 보니 같은 교단에 속한 강남의 모 교회 청년들이었다. 그들을 보면서 여러가지 상념에 젖는다. 한국과 한국 교회가 부유해 졌음을 실감하였고, 동시에 무분별한 선교를 빙자한 여행에 마음이 아팠다. 그 청년들의 부모들과 그 교회 목사님의 마음이 너무 넓은 것에 감탄이 나왔다. 그렇지 않아도 보도에 의하면 강남의 어떤 교회의 청년들이 동북 삼성에 와서 선교한답시고 어떤 동네에서 한국식으로 법석을 떨다가 고발이 되어 1만원(백만원) 벌금을 물고 추방되었다고 한다. 백만원 벌금 물고 추방되면 청년들은 상관없지만 현지 처소를 섬기는 집사님은 구속되어 6년간 수감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러한 일들을 누가 책임 질 것인가? 밥 좀 먹게 되었다고, 돈 푼이나 좀 생겼다고 이렇게 해도 되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죄송한 일이요, 하나님이 진노하실까 두려운 일이다.

천진 비행장에서 박성목목사님은 흑룡강 성에 있는 00처소에 집회를 하러 일행과 떨어져 하르빈 가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 북경으로 갔다. 연길행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환전을 하게 되었다. 안전을 위해서 달라로 환전할 때 800달러는 여행자 수표로 준비하였다. 그런데 중국의 큰 도시에서는 여행자 수표를 사용하지만 작은 도시에서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해서 염려를 했는데 마침 공항의 환전소에서 환전을 할 수 있었다. 200달라를 환전했는데 100달러 당 850원을 주었고 현찰로는 837원으로 환전해 주니 여행자 수표가 좀 유리하였다. 환전에 대한 염려가 사라지니 마음이 편해졌다. 점심을 쫄쫄 굶고 연길행 비행기를 타니 1시 50분이었다. 천진에서 연길 가는 비행기에서 주는 기내식은 도저히 요기가 안된다. 연길에 가까이 오면서 창밖으로 연변 지방을 내려다 보니 감회가 새롭다. 작년에 처음 연길 땅을 밟았을 때는 큰 감격이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렇지를 못했다. 내 마음의 간사함이 보이는 것 같아서 혼자 쑥스러웠다.

연길 비행장에 내려서 나와 보니 두 여집사님들이 마중을 나와 있다. 연길 비행장은 승객들의 짐을 트럭으로 실어다가 비행장 밖에서 일일이 짐표와 대조하면서 짐을 찾아 준다. 원시적이기는 해도 짐을 잃을 염려가 없어서 좋았고 짐 검사가 없어서 좋았다.

공항 밖에서 00학교 000 교장을 만났는데 처음 보는 분이었지만 인상이 좋았다. 다음에 찾아가기로 약속하고 대절된 택시를 타고 연길 시내로 들어왔다. 0교수가 환전을 하러 간 동안 두 집사님들은 우리가 배고파 하는 것을 보고 먹을 것을 사러 가서는 0정교수가 왔는데도 오지를 않는다.

한참을 기다린 다음에야 참외와 옥수수를 사 가지고 왔다. 0교수는 집으로 가고 우리는 000에 있는 K집사의 친정 집에 들어갔다. 낮에는 감시가 심해서 못 가고 밤에 K집사의 집에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비는 주룩 주룩 내리고 마음이 심란해진다. 그 집도 처소인데 방이 하나 있고 마루 비슷한 공간이 넓었다. 특징은 부엌과 마루가 한 공간 안에 있는 것이었는데 아마도 함경도식이 아닌가 짐작된다. 왜냐하면 함경도 식의 가옥 구조가 그러하기 때문이요, 연변 자치주의 주민들은 대부분이 함경도에서 이주한 사람들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1차로 김희원 목사님과 김창욱 목사님이 먼저 K집사의 동생인 000형제의 안내를 받아 갔고 한 참이 지난 후 최옥례전도사님이 또 안내를 받아 갔다.

그러고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짐을 싣는 당나귀가 끄는 리어카 비슷한 것을 끌고 K집사의 남편과 동생이 와서 짐을 싣고 나는 그 리어카 비슷한 것을 타게 되었다. 내가 눈이 나빴고, 길이 너무나 질어서 장화 없이는 갈 수가 없는데다가 마침 내게 맞는 장화도 없었다. 짐을 잔뜩 실은 리어카 위에 올라 타니 리어카가 부서지려고 한다. 간신히 짐을 실은 꼭대기에 탔는데 다리에 쥐가 나서 혼이 났다. 목적지까지는 약 1km 정도였는데 가는 동안에 3년은 감수한 것 같고 긴장이 되어서 참으로 괴로웠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손전등을 키려고 하니 못 켜게 한다. 겨우 겨우 집을 찾아 가보니 불이 훤하게 켜져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 집은 목적지가 아니었고, 그 집을 돌아서 목적하는 처소가 있었다.

일행들이 자리를 잡고 담화를 나누다가 늦은 저녁을 먹고 김창욱 목사님의 인도로 도착 예배를 드렸다. 기대한 것보다 너무나 상황이 안 좋아서 심히 실망이 되었다. 그 처소는 동네 한 가운데 있어서 외지의 가정 교회 지도자들이 와서 교육받는 것은 물론가정 교회 지도자들을 교육시킬 처소가 적합한 장소가 못되었을 뿐 아니라 그 동네의 처소로서도 부적합했다. 그리고 옆집은 외삼촌댁인데 외숙부가 당원이라 고발할까 겁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행이 숙의 끝에 원래는 월요일 새벽까지 교육을 하기로 계획했던 것을 조정하기로 하였다. 그런데다 나의 안내자가 되기를 원했던 000형제가 안보였다. 나는 낙심이 되기도 하고 심히 걱정이 되었으나 다음 날 전화하기로 하고 그것 조차도 주님께 맡기고 주님 안에서 꿈 나라로 갔다.

8월 10일(水)

아침 6시부터 교육은 시작되었다. 먼저 새벽기도회로 하루를 시작하였다. 새벽기도회는 내가 이사야 6장의 말씀을 가지고 가정 교회 지도자들에게 한족 선교에 대한 도전을 하였다.

강의 일정은 새벽기도회, 조직신학(인병국목사), 아침식사, 선교학(인병국목사), 예레미야(김창욱목사), 점심식사, 구약개론(인병국목사), 고린도서(김창욱목사), 저녁식사, 세계교회사(김희원목사), 비교종교학(최옥례전도사), 기독교교육,공관복음(김희원목사),종합토의. 오전과 오후 시간은 90분 수업이고, 저녁은 60분 수업이었다.

아침 식사 후 한 시간 수업을 하고 000형제와 0교수에게 전화를 하러 안내인과 함께 000진으로 삼륜차를 타고 갔다. 흑룡강 성의 00시와 연길에 전화를 하여 000형제와는 연락이 되어서 오기로 하였고, 0교수는 연락이 안되어 오후 5시에 다시 전화를 하기로 하였다.

5시에 다시 나와서 전화를 해 보니 비행기표 문제는 해결이 안된 상태여서 연길에 있는 친지인 000선생에게 맡겨 달라고 하였다. 참 난감한 일이었다. 이 날 전화료가 거금 120원이 들었다. 아마도 실제 전화료는 30원 정도 들었을 텐데 너무나 엄청나게 바가지를 씌운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내 편이니 어쩔 수가 없다. 전화를 한 후 화급한 용무를 볼 일이 생겼다.

사실 그 용무는 하루에 한 번은 보아야 정상인데 교육을 하고 있는 처소에서는 도저히 '홀로 다방'에 갈 엄두가 안났고 꼭 떨어질 것만 같다. 목욕도 할 수 없고, 세탁도 하기 힘든 그곳에서 그 일이 벌어진다면 얼마나 난감한 일인가? 그런데 마침 임업국에서 지은 공동 변소가 있어서 그곳에 가서 용무를 보았다. 용무를 보고 나니 삼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이 시원하다. 쾌식, 쾌변, 쾌면이 건강의 요체라는 말이 실감이 났다. 여유를 되찾아 000진의 시장을 구경하였다. 시장은 꽤 넓은데 시설은 아주 전근대적이었다. 먹거리들은 풍성했으나 선뜻 무엇을 사 먹고 싶은 생각은 나지를 않았다. 털털하기로 호가 난 나이지만 도저히 식욕이 돋지를 않는다. 그만큼 위생에 문제가 있었다.

처소에 돌아와 보니 흑룡강성 00에서 다섯 명이나 되는 가정 교회 지도자들이 학습에 참여하러 왔다. 나중에 가 보게 되었지만 흑룡강성 000에서 학습하고 있는 처소까지 오려면 차 타는 시간만 이틀이 걸린다. 그러니 차를 바꿔 타는 시간까지 감안한다면 거의 3일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다. 그들의 열성에 머리가 숙여지고 조금은 실망했던 마음이 풀린다. 하루 종일 강의나 하고 바깥 출입도 마음대로 못하고 집안에 갇혀 있으면서 고통스럽고 불편한 것은 말로 다 못한다. 1월에 있었던 00처소는 여기에 대면 호텔이다. 먹는 일도 고통스러웠다. 오로지 고추장과 오이에 의지하여 밥을 먹었다. 화장실 가는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큰 일이겠기에 처소를 담당하고 있는 K집사에게 화장실에 두꺼운 편판 쪽을 다시 올려 놓으라고 하였다. 그 후부터 긴장하여 모험을 감행하지 않고도 큰 용무를 볼 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8월 11일(木)

오전에 기다리던 000형제가 왔다. 어찌나 반가운지 필설로 다 형언할 수 없다. 9일 전화했을 때 마침 000교사가 인도하는 부부 모임에 참석했다가 곰시와서(곰시는 방금이라는 뜻의 조선족 말이다) 다른 곳에 가려고 하는 차에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조금 만 빨리 전화를 했거나, 조금 늦게 전화했어도 만나지 못했을 뻔했다. 만약 000형제와 연락이 되지 않았더라면 이번 선교 여행은 완전히 엉망이 될 뻔하였다. 왜냐하면 내가 머물렀던 그 처소에는 나를 효율적으로 안내해 줄 만한 청년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아찔하였다. 늦지도 빠르지도 않으신 하나님, 불꽃같은 눈동자로 지켜 주시는 그 사랑을 찬양한다. "세상 끝날까지 내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주님의 약속을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000형제는 전날 4시 기차를 타고 왔는데도 이날 오전 10시가 넘어서 도착했으니 그 길 또한 먼길임을 알 수 있다. 000형제는 전문직을 가진 문화인으로서 조선족이지만 중국어를 한족처럼 하고 있었고, 한족의 문화와 습성, 생활양식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었다. 그래서 믿은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자기 직업에 종사하면서 한족 선교에 헌신하고 있는 신실하고 유능한 장래가 촉망되는 귀한 형제였다.

여행을 끝내고 온 지금까지 이 형제와 같이 여행한 것을 은혜요 축복이요, 주님의 세심한 배려라고 확신한다.
조선족 동포라고 해서 의사 소통이 잘 되는 것은 아니었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함에도 의사 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경우가 많이 있다. 일행 중 한 분과 K집사의 동생이 어떤 일을 가지고 대화를 나누었는데 의사 소통이 되지 못하였다. 옆에서 듣고 있던 나는 둘 사이에 나누는 대화의 의미를 다 이해하고 있는데 대화를 나누는 당사자들은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면서도 상대방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그 대화를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족이 사용하는 우리 말과 다른 용어들을 먼저 습득했었기 때문이었고 또한 조선족 형제가 똑똑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선교에서 의사 전달 곧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 동족이라도 타문화권에서 살면 이렇게 의사 소통에 장애가 생겨서 곤란을 받는데, 다른 민족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고 선교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실감이 난다.

8월 12일(金)

오전에 일행이 모여서 학습 일정을 12일(토) 오전에 다 마치기로 결정하였다. 처음에 가졌던 긴장이 다 풀어지고 더 이상 학습을 진행했다가는 불상사가 일어날 것 같은 불길한 생각이 우리 일행 대부분에게 이었기 때문이었다. 옆집에 산다는 K집사의 외숙모도 우리가 학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텐데도 고발을 하지 않았다.

저녁 10시에 강의가 다 끝난 후 전원이 다 모여서 하고 싶은 말과 질문하고 싶은 것을 질문하게 하였다. 학습에 참여한 30여명의 가정 교회 지도자들은 우리가 와서 학습을 시켜 주는데 대하여 감사를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묻는 질문의 핵심은 베드로전서 3:19의 옥에 있는 영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문제였다.

8월 13일(土)

10시부터 종강 예배를 내가 인도하게 되었다. 사도행전 1:1-6의 말씀으로 은혜를 나눈 후에 세례를 베풀었다.

성찬식은 김창욱 목사님이 여기서 가져간 성찬기를 사용하여 성찬식을 행하였다. 그리고 김희원 목사님이 광고를 하고 교사들과 집사들을 임명한 후에 김창욱 목사님의 축도로 예배를 마쳤다.

예배 후에 점심 식사를 하고 각자 자기 집과 사역지로 돌아가게 되었다. 나도 일행과 헤어지기로 하였다. 회계를 맡은 김창욱 목사님이 남은 경비 중에서 내 몫에 해당하는 400달러와 120원을 주었다. 000형제와 함께 은밀히 그 처소를 나와 000역에서 기차를 타게 되었다. 그 차에는 흑룡강 성의 00에서 온 제직들과 연변 자치주의 00에서 온 제직들이 같이 타고 있었다. 일행을 두고 나만 먼저 나오니 미안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나는 흑룡강 성의 00에 가서 과업을 수행하기로 하였으니 양심에 가책 받을 일은 없다.

연길에 와서 친지인 000선생에게 전화를 하여 싼 호텔을 소개해 달라고 하여 10원을 주고 택시를 타고 약속한 장소로 갔다. 연길 시내에서는 웬만한 거리는 다 5원이다. 그런데 길을 잘못 들여놔서 한국인인줄 알면 무조건 10원을 받으려고 한다. 10원이야 별 것 아니지만 그러나 연길에서 살고 있는 한국인들을 위해서 조심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연길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이 괴롭다. 약속한 장소에 가보니 000선생이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같이 짐을 들고 000선생이 거처하는 아파트로 갔다. 친지인 000선생을 안 것은 작년(1993년) 11월 중국어문 선교회에서 였다. 내가 쓴 "마게도니아 환상"이라는 글을 주었더니 '중국 선교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50부를 복사해서 동료들과 후원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 후에도 두 어 차례 중국 선교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고 격려해 주었다. 그 때 나는 중국 선교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기 위해 매주 토요일 3시부터 6시 20분까지 방배동 이수교 근방에 있는 중국어문 선교회에서 중국어 전문 강좌를 듣고 있었다. 강의가 끝난 후엔 기도회가 있었고, 매주 두 사람씩 기도 제목을 내서 합심하여 기도하였다.

12월 어느 날 마침 기도 당번이 결석해서 즉석 기도 제목을 신청받게 되었다. 그래서 내가 중국 선교 여행에 필요한 경비를 채워 주십사하는 기도 제목을 내었다. 다같이 기도를 하였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000 선생이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러나 나는 000선생에게 금전적인 기대를 전혀 하지 않았다. 000선생 자신도 돈이 당장 필요한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가 000선생이 우리 교회에 주일 오후에 찾아와서 같이 예배도 드리고, 진지한 대화도 나누게 되었다.

그렇게 두 번을 왔는데 올 때마다 여행 경비에 대하여 물었다. 그래도 염려해 주는 것이거니 했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러다 000선생이 지방에 내려가는 바람에 만나지를 못했데 12월 말에 000선생에게서 시외전화가 와서 얼마가 부족한가와 통장 번호를 묻기에 그 때에 부족한 액수를 말해 주었다. 그 다음 날 통장을 확인해 보니 물경 120만원이나 되는 거금이 입금되어 있었다. 물론 120만원은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돈 일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1억보다도 큰 돈이었고, 000선생에게도 그 돈은 거금이었다. 나는 이 일에서 돈보다도 나와 함께 하시고 내가 하는 일을 후원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확인하였기에 감격과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그후 1월 하순 경 2차 중국 선교 여행을 마친 후 000선생을 우리 교회에서 만나게 되었고, 성도의 교제를 깊이 나누게 되었다. 그 때부터 우리는 주 안에서 형제가 되었고, 중국 선교에 뜻을 같이 하는 동역자가 되었다. 000선생의 부인도 대 환영이었다.

사실 손님이 오는 것은 한편으로는 반갑고 한편으로는 귀찮은 일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000선생과 그 부인은 우리를 진심으로 환영해 주었다. 000선생에게는 두 자녀가 있는데 아들은 국민하교 5학년이고, 딸은 3학년이다. 000선생 부부는 자녀 교육 문제로 상당히 고민하였었다. 나는 그들에게 다른 사람의 의견은 참조는 하되 얽매이지 말고 소신껏 결정하라고 조언하였다. 그들은 기도하는 중에 자녀들을 중국에 같이 데리고 가서 교육시키기로 결단하였다. 000선생의 자녀들은 지금 연길에서 인민 학교에 다니고 있다. 산수나 미술 등 교육의 수준은 한국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 000선생도 인간인데 왜 고민이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자녀들의 교육 문제까지도 하나님께 온전히 맡겼기 때문에 평안할 수 있다. 현대 교인들의 2대 우상의 하나인 자녀 문제에서 자녀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그들을 보면서 존경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000선생은 앞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교사가 되어 중국의 뭍 영혼들을 주님께 돌이키고 중국 교회들을 굳게 세우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파트에 들어서자 우선 마음이 놓인다. 가장 시급한 건 목욕을 하는 일이었다. 저녁 8시에 뜨거운 물이 나온다지만 언제 그 때까지 기다리겠는가? 찬물이지만 참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목욕을 하고 더러운 옷들은 세탁기에 넣고 나니 개운하기가 이를 데 없다.

한참 이야기하면서 쉰 후에 저녁을 먹게 되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 날은 000선생이 같이 일하고 있는 동시(동역자를 그렇게 부른다)들을 몇 명 팅크(초대)하는 날이었다. 비빔밥에 호박전에 김치에 입에 맞는 음식들을 정갈스럽게 준비하였다. 초대되어 온 분들을 보니 구면인 사람들도 여러 분 있었다. 전 번에 왔을 때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던 분도 그 중에 있었는데 무엇 때문인지 나에 대한 선입관이 좋지 못한가 보다. 나는 그가 이야기한 말들을 금과 옥조처럼 지켰다. 그럼에도 나를 백안시하는 그를 보면서 섭섭한 마음 금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곧 잊기로 하였다. 좋은 침구에 잠을 청하니 오랜만에 긴장이 풀어지고 깊은 잠에 들었다. 사실 그때도 나는 몸이 좋지 않고 피곤해서 괴로웠었다.

주님의 은혜와 인도하심 가운데 000선생 댁에서 지낸 며칠 간은 긴 선교 여행을 위해 건강을 회복하고 기운을 충전하는 기간이었다. 만약 이러한 기간이 없었더라면 나는 건강 때문에 큰 곤욕을 치루었을 것이다.

8월 14일(主日)

IMC와 000선생을 연결시켜 주고 싶었다. 000선생의 동의를 얻은 후 몇 번의 시도 끝에 00에 있는 김희원목사님과 전화 연결이 되어 00에 찾아 가기로 하였다. 나와 000선생, 000형제가 택시를 타고 000에 도착하여 00 중심 처소를 찾아 가보니 김창욱목사님이 성찬식을 집례하고 있었다. 예배 후에 서로 진지한 대화를 나누었고 서로 교통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일행도 월요일에 000선생 집으로 와서 같이 묵기로 하였다. 번거로운 일이지만 교통하기 위해서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식사 시간에 내가 좋아하는 찰떡이 나와 찰떡으로 식사를 대신하였다. 연길에 돌아와 000선생은 일을 보러 가고 나는 000 목사님이 부탁한 책을 000 집사님에게 전달해 주려고 서시장에 있는 000 집사님의 매형 이 하고 있는 00점을 찾아갔다.

000 집사님은 나를 아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책을 전달하고 같이 사진을 찍었는데 책 몇 권을 받고 그렇게 감격해 하고 감사하는 사람은 평생에처음 보았다. 한국에서 오는 책들은 목사, 전도사, 교사들 차지가 되고 자기 같은 사람에게는 차례가 오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난번 000 목사님을 만났을 때 큰 맘 먹고 부탁을 드렸는데 이렇게 책을 보내 주셨다면서 울먹였다. 000 집사님은 그 책이 오도록 기도를 많이 했다고 한다. 000 집사님은 조그마한 00 공장을 하면서 연길에서 가까운 시골에서 처소를 섬기고 있었다.

서울에서부터 만나기를 원했던, 그러나 주소도, 전화 번호도 모르는 00교회의 000 전도사님을 000 집사의 안내를 받아 방문하였다. 000 전도사는 17세부터 설교를 하는데 00 교회가 세운 전도원 배양중심을 나와서 동북신학원에 입학하려고 준비하고 있는 23세된 여전도사였다. 0전도사님은 상가 아파트 비슷한 곳의 2층에 살고 있었다. 전도사님은 나를 잘 알아보지 못하다가 이야기하는 가운데 나를 기억해 냈다. 올해 4월 백주년 기념관에서 우리 교단 대륙선교회가 주최한 중국선교를 위한 모임에서 한번 본 경험이 있었던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만났기 때문에 몰랐지만 내가 특이해서 기억이 났던 것이다. 000 전도사님은 모태 교인이었다. 물론 신앙을 갖게 된 것은 개방 후이지만 조상들부터 주님을 섬긴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나고 성장했던 것이다. 특히 00 교회의 000 목사님은 000 전도사의 할아버지뻘이 된다.

마침 이 날 낮예배는 000 목사님이 인도하고 가셨다고 하는데 조금만 일찍 갔더라면 000 목사님을 뵙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는데 아쉬웠다. 박목사님과는 한국에서 두 번에 걸쳐 가정 교회와 관련하여 언쟁을 벌인 적이 있으나 지금은 내 마음이 바뀌어 000 목사님의 조언을 듣고 싶다. 서울을 떠나기 전 000 목사님에게 전화를 드리려고 그랬는데 전화를 드리지 못해 그것이 후회스러웠다. 여기서 평소에 인간관계를 잘 해야 되겠다고 깨달았다. 아무리 상대방의 주장이 내 생각과 다르다고 해도 언쟁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000 전도사가 섬기는 00 교회는 1년이 조금 넘은 교회이지만 교인이 재적 200명에 회집하는 교인이 120명 정도되는 급성장한 교회였다. 교회는 1주년이 지난 올 7월부터 000 전도사에게 400원의 사례비를 드리고 있었다. 중국의 경우에 비추어 볼 때 이는 획기적인 일이었다. 000 전도사에게 조선족 교회의 현황과 한국 교회가 어떻게 조선족 교회를 도와야 될 것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대화한 내용은 다음 기회에 term paper 형식으로 기술하려고 한다. 대화를 나눈 후에 000 집사님과 함께 0시장으로 돌아 왔다. 000 집사가 대접을 하겠다고 해서 연길에서 유명한 냉면 집에 갔다. 조용한 곳에 들어가니 무조건 150원이란다. 150원이 얼마나 큰 거금인지를 아는 나는 그곳에서 대접하겠다는 지집사를 억지로 이끌고 냉면만 먹는 홀로 갔다. 냉면은 5원(보통냉면), 7원(고급냉면), 15원(특별냉면)의 세 종류가 있었다.

내 생각엔 7원짜리 고급 냉면을 먹고 싶은데 먹을 때 보니 15원 짜리 냉면이었다. 냉면에 들어 있는 꾸미들이 기절 초풍할 만큼 많다. 그런 냉면은 난생 처음 먹어 본다. 세 명이 먹고도 5원 짜리 냉면을 더 먹었다. 이 곳은 사리를 팔지 않았기에 할 수 없이 사리를 더 먹기 위해 5원 짜리 냉면을 더 시킨 것이다. 그러니 000 집사님은 60원을 쓰게 된 것이다. 그들의 수입을 알고 있는 나로서는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다. 애초에 7원 짜리 냉면을 먹을 걸 하는 후회가 생겼다. 식 후에 000 집사가 섬기는 처소를 방문하여 예배를 드리고 싶었지만 몸이 좋지 않아서 할 수 없이 헤어져서 집으로 돌아 왔다.

8월 15일(月)

오전에는 0시장에 나가서 모시 옷을 맞추어 입기로 하였다. 000선생 사모님과 000형제와 같이 가서 모시 한 필을 사고 안감과 단추 등을 산 후에 바느질하는 조선족 아주머니의 집을 찾아갔다. 바느질하는 아주머니는 없고 딸 만 있어서 한 참을 기다렸다. 마침내 바느질하는 아주머니가 와서 반바지 둘과, 남방 둘을 맞추고 시간이 없어서 급행료를 주어서 수요일 새벽에 찾기로 하였다. 남방과 반바지 두벌을 맞추는데 300원이 들었다. 상하 한 벌에 150원 꼴이니 얼마나 싼가? 마침 남방과 반바지가 필요했던 나에게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저녁에 올 일행들의 식사를 위해 여러 가지 식료품을 여기 저기 다니면서 샀다. 낑낑거리면서 시장을 본 물건들을 들고 집에 와서 냉면을 해 먹었는데 식당에서 먹은 것 보다 훨씬 맛이 좋았다. 오후 일행이 오기를 무턱대고 기다리기에는 시간이 아까워서 00교회를 방문하기로 하였다. 마침 000 목사님은 출타 중이었지만 사모님이라도 만나기로 하고 택시를 타고 물어 물어 찾아갔다.

찾아 간 곳은 교회가 아니라 사택이었다. 알고 보니 이 교회에 매형인 허긴목사님(침신대 총장)이 올해 다녀갔다고 한다. 그래서 이야기가 쉽게 진행되었다. 00 교회는 겉으로는 삼자 공인 교회이나 속으로는 삼자애국위원회의 통제를 받지 않고 있다고 한다.

000 전도사의 증언에 의하면 00 교회가 00교회보다 더 복음 전도에 열정적이고, 열매를 많이 맺고 있다고 한다. 00교회는 현재 출석교인이 400여명이 되는데 자립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00 교회와 교통하는 지교회 성격의 처소들이 120-30개 정도가 있다. 그 중에 100명이 넘는 처소가 4,5군데 되고, 30-40명 모이는 처소가 대부분이며 10-20명 정도 오이는 처소가 한 20개 정도가 된다고 한다. 처소를 돌보는 처소장들에게 어떠한 물질적인 보상도 없다.
다만 4,5개 처소를 섬기느라 교통비가 드는 처소장의 경우에는 70원 정도 지급한다고 한다. 00 교회는 처소장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신학교를 하는데, 그 운영비만 외부의 도움을 받는다. 그러나 배우러 오는 학생들은 교통비를 자부담한다. 신학교를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지만 지금까지 주님의 보호하심으로 무사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다음에 다루기로 한다. 한 가지 00 교회에 대한 오해로 인해 잘못된 소문이 퍼져 있다. 00 교회를 '아담 축복교회'라고 한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000 전도사에게 물어보니 그것은 오해에서 생긴 일이었다. 000 목사님이 설교시 아담이 타락하였기에 구원받을 길이 열렸으니 아담도 축복을 받은 것이라는 식으로 말했나 보다. 그렇게 생각해 볼 수는 있는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필기한 사람들이 있어서 여러 가지로 말썽이 되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000 목사가 실수를 한 것이 아닌가 한다.

사모님의 안내로 00 교회에 가보니 교회는 아담하였다. 교회로 건축한 건물은 아니고 기존 건물을 구입하여 교회로 개조한 예배당이었다. 원래는 00 ####교회라는 간판을 붙였는데 당국에서 제지하여 지명을 따서 00교회라고 교회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집에 돌아와 좀 쉬고 있으니 일행이 도착했다고 전화가 왔다. 000선생과 000형제가 마중을 나가서 일행이 같이 들어왔다. 박성목목사님도 일행에 합류하였다.

그런데 낯선 사람이 한 분 일행 중에 있었다. 알고 보니 북한에서 친척 방문을 기화로 하여 돈을 벌까 해서 중국에 온 분이었다. 이 분은 나이가 50세로서 국경 변경에 산다고 한다. 첫날은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고 거짓을 이야기하였다. 쌀 밥을 먹고 살고 있고, 돈도 넉넉하다고 하였다. 김일성과 김정일에 대해서도 극도로 경모하는 감정을 드러내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처지를 십분 이해하였다. 그러나 하루를 자고 나자 마음이 열렸는지 북한 생활의 진실을 이야기하였다. 북한 사회의 비참한 현실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이야기하였다. 특히 망명할 생각이 없는가 라고 물어 보았을 때 혼자라면 얼마든지 북한에서 도망치고 싶지만 가족 때문에 그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족과 같이 라면 지금이라도 도망치고 싶지만 자기가 도망치면 남은 가족들이 어떻게 되는 지를 뻔히 알면서 어떻게 도망칠 수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공감이 되는 말이었다. 북한의 주님들이 북한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것은 가족 때문이라고 한다. 변경에 살고 있는 사람은 그래도 살기가 나은 편이라고 한다.

더구나 중국에 친척 방문차 올 수 있는 사람은 여러모로 괜찮은 계층에 속한다. 북한 당국이 믿지 못할 사람은 중국에 보내지를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족의 진실에 접할 때 그의 마음이 녹아지는 것을 볼 때 통일이 된 후의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는 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겠구나 하고 생각하였다. 이튿날 그 분이 떠나갈 때 일행이 400원을 주어 보냈다. 북한에서 귀순하거나 망명하지 않은 동포를 만나 본 감회가 깊다. 만 가지 생각이 떠 오른다. 중국 조선족을 통한 북한 선교의 가능성과 전망에 대해서는 후일 자세하게 언급하려고 한다.

내가 일행과 헤어진 후의 이야기들을 들었다. 김창욱 목사님은 00에 있는 처소에서 저녁 집회를 인도하였고, 김희원목사님은 두만강 근방인 000처소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세례를 주고 성찬식을 집례하였다. 한 밤 중에 2 km나 되는 진흙탕 길을 걸어서 갔다 하니 그 고생이 눈에 보이는 듯 선하다. 그리고 두만강 연안에서 한국 목사가 세례를 주고 집회를 하였으니 얼마나 긴장이 되었겠는가? 그러나 김희원목사님은 연변의 조선족 가정 교회의 현황을 파악하는데는 더 할 나위 없이 좋은 절호의 기회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북한 선교에 대한 꿈으로 설레이는 가슴을 안고 주일 밤에 잠을 설치게 되었다고 한다.

'북한도 복음화 하라'고 명하신 주님이 우리 선교 단체를 통해서도 역사하시리라고 믿는다. 우리 선교 단체의 대표인 김희원목사님에게 북한이 눈 앞에 보이는 000처소에 보내신 것은 의미심장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것이다. 최전도사님은 처음 도착했던 그 처소에서 주일을 보내고 집회를 인도하였다.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은 별 일이 없었는데 도문으로 오는 길이 무척 힘들었는데 장마로 철로가 끊겨서 망연자실하다가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서 화물칸에 노동자들과 함께 차를 탈 수 있는 곳까지 왔다고 한다. 여전도사로서 참으로 힘든 여행이었다.

박성목목사님은 우리와 헤어진 후 안내하는 사람이 호텔에다 데려다 주고는 가 버렸다고 한다. 그 때 박목사님이 얼마나 당황했겠는가 눈에 선하다. 하룻 밤을 지낸 후 호텔 근처에 있는 조선족 식당에 찾아가서 도움을 받아 북경 공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그리고 몸짓 발짓 다하면서 하르빈 가는 항공권을 좌석표로 바꾸었다. 가방을 탁송한 후 비행기에 탑승하는데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이 줄을 서서 하르빈 가는 비행기인 줄 알고 같이 줄을 서서 기다리다 보니 그 줄은 상해 가는 줄이었다. 젖먹던 시절의 힘까지 다 써서 마라톤을 하는 등 천신만고 끝에 하르빈행 비행기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흑룡강성 00에서 가정교회 지도자 80여명을 놓고 4박 5일간 집회를 하였다. 집회를 하는 동안 2번이나 공안원들이 찾아와서 집회를 중단하고 숨었다고 한다. 그러니 박목사님이 얼마나 긴장이 되었겠는가? 물론 1월에도 같은 장소에서 밤에 눈이 쌓인 속으로 도망한 경험이 있어서 도움은 되었을 것이다.

8월 16일 (火)

아침 식사 후 일행은 00에 가기로 하였다. 00가정교회를 섬기는 0교사의 남편 되는 분이 우리 일행을 초대하였기 때문이다. 약속시간 보다 조금 일찍 나가서 연길시 당국이 경영하는 호텔과 주변 경관을 구경하였다.

중국은 민간인들만 호텔을 경영하는 것이 아니라 집체 즉 국가의 각급 기관들이 호텔을 경영한다. 그래서 시 당국이 경영하는 호텔, 우체국에서 경영하는 호텔, 철도국에서 경영하는 호텔 등등 거의 모든 집체들이 호텔 뿐 만 아니라 여러 가지 수익 사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호텔을 경영하는 집체에서 그 수익을 갖는다. 그래서 수익이 좋은 집체에 쌍발(근무)하는 사람들은 주택이나 여러 면에서 보다 나은 생활을 하고, 그렇지 못한 집체에 쌍발하는 사람들은 어려운 생활을 한다. 0선생이 환전을 해왔는데 100달러당 867원 정도 받았다. 북경이나 천진에서 환전하는 것 보다 연길에서 환전하는 것이 훨씬 유리하였다. 환전을 할 때 조심하지 않으면 사기를 당하거나 강탈당하기 쉽다. 어느 지역이나 암달러 시장에서도 공정 가격이 형성된다. 그런데 지나치게 많이 주겠다는 사람은 피하는 것이 좋다.


일행이 두 대의 택시를 타고 10시까지 00에 갔다. 먼저 떠난 택시는 문제가 없었는데 우리가 탄 택시가 가다가 문제가 생겼다. 연길을 떠나 00시를 향하여 한참 신나게 달리고 있는데 교통순경이 우리 택시를 잡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한 30분 가량 지체되었다. 조선족 동포인 기사의 말에 의하면 벌금으로 100원을 요구했는데 50원을 주고 해결했다고 한다. 어느 나라든지 교통들의 횡포와 착취, 부정이 극성인 모양이다. 목적지에 도착해 보니 먼저 간 일행과 그곳 처소에서 나온 분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가 조선족 동포이고 안된 생각이 들어서 요금 외에 10원을 더 주어서 손해는 보지 않게 해주었다.
일행은 0교사의 안내로 그의 집에 도착하여 0교사의 남편이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집은 조선족 동포들이 사는 집으로서는 괜찮은 편이었다.응접실도 있었고, 침대가 있는 침실과 온돌 방이 있었는데 집은 대략 한 20평 정도되는 것 같았다. 화장실은 수세식이어서 좋았다. 화장실에 있는 휴지는 신문지 비슷한 것들이어서 어렸을 때가 생각났다. TV나 냉장고 등 웬만한 가전 제품은 다 갖추고 살고 있었다.

0교사의 남편이 00시에서 유망한 집체에서 간부 노릇을 하기에 그렇게 살 수 있는 것 같았다. 0교사의 가정은 중국에서는 드물게 보는 지식인 가정이었다. 생활이 안정되어 있어서 그런지 0집사는 돈에 대해서는 담백한 것 같았다. 적어도 그 문제에 대해서는 안심이 된다.

우리 일행을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느라고 부산하였다. 시집간 딸까지도 와서 음식 준비를 돕고 있었다. 시간이 상당히 지난 후 점심 때가 되어서야 0교사의 남편이 직장에서 우리가 타고 갈 차를 준비해 가지고 왔다. 차를 운전할 기사도 동행하였다. 0교사 남편을 모르는 일행들과 수인사를 나눈 후 준비된 점심을 먹게 되었다. 일행과 0교사 남편이 둥근상에 겸상을 하였고, 기사와 0교사 아들 그리고 0교사와 딸이 주방(부엌 겸 방의 역할도 할 수 있는 곳)에서 식사를 하였다. 채(반찬)는 여러 가지 로 정성을 다 해 준비하였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떡이 여러 종류 상에 올라왔다. 찰떡은 사람마다 앞앞이 주었는데, 한국하고는 좀 달랐다.

그곳에서는 인절미를 큼지막하게 썰어서 고물을 묻히지 않고 접시에 담고, 고물은 접시 한 쪽에 놓아서 고물을 묻혀서 먹든지, 그냥 먹든지 하게 해 놓았다. 인절미 외에도 술떡도 있었고, 절편도 있었다. 얼마나 풍성한지 떡 잔치를 하는 것 같았다. 밥이 또 들어와 일행은 밥을 나누어서 먹었다. 나는 떡을 주식으로 먹은 것이고, 일행은 떡은 간식으로, 밥은 주식으로 먹은 차이였다.

식 후에 삼합으로 가려다가 (삼합은 한중 국경의 북한측 소도시로서 조선족과 북한 친척이 상봉하는데 사용되는 곳) 장마로 길이 좋지 않다하여 두만강 유역과 도문등을 보기로 하였다. 그런데 차를 타려 하니 문제가 생겼다. 일행은 기사까지 9명인데 차는 다마스같은 차로 7명 정원의 차에 9명이 타니 되겠는가? 더군다나 일행 중에는 표준 체중이 넘는 사람들이 세명이 넘었다. 그래도 억지로 차를 타고 시내로 나오는데 기사가 도저히 갈 수가 없다고 한다. 할 수 없이 0교사와 남편이 멤바차 (15명∼20명 탈 수 있는 승합차)를 120원 주고 빌렸다. 차를 바꿔타니 마음이 놓인다. 여행은 역시 좌석이 여유가 있어야 편한가 보다.

시내를 빠져나가기 전에 주유소에 들려 급유를 하는데 규모가 컸지만 너무 엉성하였다. 급유기 마다 산소통이 있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차가 출발하자 소르르 졸음이 왔다. 긴장이 풀리고 식곤증이 오는 것 같았다. 길은 비포장 도로였다. 차창으로 보여지는 광경은 장관이었다. 과연 중국이 대륙임을 실감했다. 그렇게 넓은 곳이 아닌데도 광활했다. 그러니 정작 광활한 곳에 간다면 얼마나 장엄할까 ?

두만강을 끼고 있는 도로 옆에 집들이 보였다. 김희원 목사님이 주일날 와서 집회를 인도하고 잠을 잔 집을 가르쳐 주었다. 조금을 더 가니 두만강 유역에 있는 000처소로 들어가는 길을 김희원목사님이 가르쳐 주면서, 그 날 캄캄한 밤중에 쏟아지는 빗속을 뚫고 30여분간 진흙탕 길을 손전등 하나만 의지하며 걸었던 고생한 이야기를 하였다.

두만강을 보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중국을 두번씩이나 왔지만 두만강을 직접 보기는 처음이다. 처음 왔을 때 백두산에서 북한 쪽을 보았지만 너무 멀리 보였고,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그러나 이제 두만강을 직접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두만강은 중류쯤 되었는데 강이라 하기에는 좀 그럴만큼 폭이 대단히 좁다. 두만강을 끼고 가는데 강 건너편이 아주 가까이 보인다. 사람들도 보이고 보초를 서고 있는 군인도 보였다. 마침 건너편에 나 있는 철로(일제시대 때 일인들이 가설한 철도라) 위로 60년대 초에나 다녔음직한 칙칙폭폭 기관차가 두 대가 연이어 불과 몇 칸의 화물칸을 끌고 간다. 아마 기관차가 너무 노쇠하고 힘이 없어서 두 대가 합력하여 화물칸을 끄는가 보다.

한 가지를 보면 열 가지를 알 수 있다고 그 힘없는 기차를 보면서 동포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려왔다. 적당한 곳에 이르러 차를 세우고 일행이 내려서 강가로 내려갔다. 강에 내려가기 위해 내려가는데 너무 경사가 져서 신경이 곤두섰다. 그러나 어찌 두만강에 손을 담가보지 않고 갈 수 있겠는가 ? 주님의 도우심과 보호를 작은 일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강은 장마로 인해 물이 불어 있었다. 만일 보통 때 같았더라면 건너편으로 건너 갈 수 있을 만 하였다. 강가에는 도문에 산다는 나이 지긋하신 동포가 낚시를 하고 있었다. 바구니를 보니 작은 물고기가 두어 마리 있었다. 장마가 져서 고기가 잘 안 잡힌다고 하였다. 휴일도 아닌 평일에 낚시를 하는 사람이 있음을 볼 때 중국의 변화를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제일 먼저 한 일은 강물에 손을 씻는 일 이었다. 물가가 미끄러워서 잘못하면 물에 빠질 수도 있었다. 조심 조심 강물에 손을 대 본다. 그 기분을 두만강 물로 손을 씻어 본 사람이 아니면 어찌 알 것인가? 건너편에는 작은 시골 역이 보이고 역사에는 김일성의 사진과 구호가 보인다. 김일성이 간지도 벌써 한 달 가까이 지났는데도 사진은 그대로 걸려 있었다. 사진을 찍으려 무진 애를 썼지만, 망원렌즈를 갖고 가지 못해서 사진에 일가견이 있었던 박성목 목사님이 입맛을 쩝쩝 다시다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강 건너편을 배경으로 단체 사진을 찍었다. 사진을 찍을 때 일행의 마음이 어찌 증명사진을 찍는 덤덤한 마음일 수 있었겠는가? 그 때 우리 모두의 마음은 강건너에서 초근목피도 마음대로 먹지 못해 고통당하고 있는 동포들을 생각하느라 울적했었다.

도문에 도착해 보니 강폭이 상당히 넓어졌다. 그러나 김정구 선생의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은 아무리 찾아 보아도 보이지 않았다. 아니 노젓는 뱃사공이 왜 필요한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마도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은, 달에 있는 계수 나무 한 나무와 토끼 한마리가 아닌가 싶다. 마음 속에 그리운 곳은 마음 속에 그리운 곳으로 남겨 두어야지, 한 번 가보면 실망하게 마련이다.

도문과 남영(북한쪽)을 연결하는 다리를 보면서 여러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 땅, 동포들이 살고 있는 땅이 바로 저기인데 눈 앞에 두고도 못 가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관광을 위해 만들어 놓은 광장에는 북한 우표와 돈을 파는 아낙네들만이 눈이 빠지게 손님을 기다린다. 마침 그 날은 날씨가 좋지 않아서 관광객들이 별로 없었다. 하류 쪽으로 조금 와서 강둑에 오르니 모터 보트를 타는 선착장이 있다. 흙탕물이 도도히 흐르는 강심을 두어 대의 모터 보트가 날아가듯이 달린다. 한국 부산에서 온 대학생들을 만났는데 그들은 연을 날리는 동아리로, 만리장성과 백두산에서 연을 날리기 위해 왔다고 한다. 특히 백두산에서는 통일을 염원하며 연을 날리려 했는데 일기가 불순해서 작정한 대로 연을 날리지 못했다고 한다.

사실 일행 중에 김창욱 목사님과 최전도사님은 백두산에 가보지 못했다. 그래서 백두산에 가기를 원했지만 일기가 허락치를 않았다. 연길에 사는 어떤 사람은 다섯 번이나 백두산에 갔음에도 천지를 보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가 중국에 처음 왔을 때, 비가 그렇게 왔음에도 불구하고 백두산 정상에 올랐을 때 그렇게 청명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주님의 특별한 배려였다.

도문을 구경하는 것이 좀 그랬다. 나는 내일 목단강에 가려고 도문에 다시 올 예정이었고, 일행은 이미 어제 도문을 구경한 참 이었다. 그러나 몇 시간 후에 보니 이것도 나에게 두만강과 도문을 보여주시려는 주님의 특별하신 배려였다. 만약 이때 두만강과 도문을 보지 못했더라면 이번 여행에서는 보지 못했을 것이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한계를 깨닫는다. 도문에서 00교회를 섬기는 000님을 만나고 싶었는데 내일 만나지 하는 생각에 그냥 왔더니 기회가 지나가 버렸다. 도문을 떠나오면서 0집사가 하는 말이 두만강은 도망강이라는 별칭을 갖고 있다고 했다. 문화혁명 때는 중국에서 조선족들이 북한으로 도망가다가 숱하게 죽었고, 근래에는 북한에서 중국으로 탈출하다가 많은 사람들이 강에서 죽었다. 과연 언제쯤이나 북한 동포들이 두만강을 다리를 통해 자유롭게 왕래 할 수가 있을 것인가 ? 아마도 그 때가 얼마 남지 않았나 싶다.

연길로 오는 길은 아스팔트로 포장이 잘 되어 있었다. 터널을 지나는데 통행료를 받는다. 하여튼 중국인들은 조금이라도 돈이 될 일은 다 챙긴다. 기가 막힐 뿐이다.

연길에 도착하니 오후 5시쯤 되었다. 저녁은 0선생댁에서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서 매식을 하기로 하였다. 내 제의로 일행이 어저께 냉면을 먹었던 냉면부에 가서 5원짜리 냉면을 먹었다. 나는 맛있게 먹었는데 일행의 표정을 보니 그렇지 않은가 보다. 민망한 마음이 든다. 게다가 냉면을 먹고 있는 중에 전기가 나갔다. 종업원들이 그렇게 많은데도 누구하나 서둘러서 사태를 수습하는 사람이 없었다. 한 참이 지난 후에야 식탁마다 촛불을 켜 주었기에 냉면을 먹을 수가 있었다. 아마도 이런 것이 사회주의의 잔재가 아닌가 싶다. 소화도 시킬 겸 걸어서 집에 도착하여 쉬니 마음이 편하다. 냉면이 입에 맞지 않았던 분들은 저녁에 꽤나 시장했을 것이다.

홍콩행 비행기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다가 북경에 있는 항공사에 연락이 되어서 문의해 보니 9월초까지는 좌석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일찍 북경에 가서 기차로 심천까지 갈까 하다가 결국 홍콩에 일찍 가는 것을 포기하였다. 포기하고 나니까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귀국한 후 한 달이 지난 10 월 1일에 마카오의 김응삼 목사님께 전화를 드렸더니 그 때는 마카오에 안 계셨다고 한다. 주님의 인도하심은 언제나 한치의 오차도 없으시다.

서울에 전화를 해서 아내에게 여정을 이야기하였다. 이제까지 해외 여행을 여러 번 하였지만 집에 전화를 해 보기는 이번 여행이 처음이다. 이번 여행에서는 네 번이나 집에 전화를 하였다. 전화를 한 것은 이번 여행이 장기간 여행이기 때문이요, 또한 일행과 떨어져 나 혼자 하는 여행이었고, 홍콩행 비행기표 문제를 알려 주기 위해서 였다. 아내의 목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놓인다. 교회와 집에는 별일이 없다고 한다. 주님의 은혜다.

한 참 쉬고 있는데 0집사에게서 전화가 왔다. 0집사는 0선생과 그 동시(동역자)들에게 허드레 일을 해주는 조선족 동포였다. 북한에서 탈출한 사람을 지금 보호하고 있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는 것이었다. 전화로 이야기하는 것이 위험해서 전화를 끊고 즉시 오라고 0선생이 얘기했다. 조금 있으니 0집사가 찾아왔다. 0집사에 의하면 연길 역에서 북한 탈출자를 만났다는 것이다.
한국의 어느 목사님이 돈을 주면서 이 북한 동포를 그가 원하는 북경까지 차를 타고 갈 수 있도록 도와주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일이 여의치 않아서 0선생에게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를 의논하려 한 것이다. 북한 탈출자가 장교 출신이라고 해서 일행의 관심이 더욱 고조되었다. 어제와 오늘 연이어 북한 동포를 만나게 된 것은 주님의 깊은 뜻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일행이 상의한 후 8시에 00공원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시간이 되어 남자들만 준비를 단단히 한 후 00공원에 갔다. 가는 길에 북한에서 탈출한 그 형제를 만나서 동행하였다.

00공원에 도착한 후 일부는 길의 좌우에서 망을 보고 박성목 목사님과 김희원 목사님이 그 형제에게 신상명세와 탈출 동기와 과정 등 여러 가지를 물어 보았다. 이야기 도중에 사람들이 오면 음치 사촌쯤 되는 목소리로 <두만강 푸른 물……>등의 노래를 불렀다. 이야기를 나눠 본 결과 그 형제의 신상명세와 탈출 동기, 탈출과정 등을 소상히 알 수 있었다.

그는 현역 군인이 아니라 34세된 육군 중위 출신의 제대군인으로 그의 탈출 동기는 그가 북한에서 살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란다. 정치적인 동기를 갖고 망명한 것이 아니라 북한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어서 탈출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8월 13일(금요일)압록강 상류를 건넜는데 마침 장마 때여서 강을 건너다 부인을 잃게 되었다.

중국에 건너 온 후에 조선족 동포들의 도움을 받고 한국인 여행자들의 도움도 받아 우리를 만나게 될 때까지 며칠을 지내게 되었다. 그리고 북경에 있는 한국대사관에 가서 망명을 신청하려고 돈도 400원 정도 모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북경에는 그 돈 갖고 갈 수도 없고, 대사관을 찾아가 보아야 냉대를 받을 뿐이고,잘못하면 특무(북한 국적의 정보원으로 주로 조선족 교포)들에게 잡혀 북송되기 십상이다. 북경 한국 대사관 정문 앞에는 특무들이 득실거린다고 한다. 마침 9시가 되어 일보러 갔던 0집사가 돌아와서 집으로 그 형제를 데려가고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안전을 위해서 택시를 타는데 까지 일행이 철저히 에스코트를 하였다. 집에 돌아와서 일행이 심도있게 의논한 후, 연길은 특무들이 득실거리기에 위험하니 우선 안전한 곳으로 그 형제를 데려가기로 결정하였다. 어디로 데려갈까를 의논하다가 IMC 의 사역지인 00성의 00으로 데려가기로 하였다. 참으로 다사 다난했던 하루였다.

8월 17일 (水)

0집사가 00행 오후 5시 침대버스표를 예매해 왔다. 비용이 더 들더라도 안전을 위해 버스를 타고 가기로 한 것이다. 버스 요금은 중국 실정으로 볼 때 거액이었다. 원래 나는 목단강으로 가려고 계획을 세웠었는데도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00으로 가게 된 것이다. 버스 시간까지는 꽤 시간이 남아서 연길 시내에 있는 연변 조선족 기술대학과 해원학교를 구경하기로 하였다.

기술대는 한국의 00교회 등 대교회들이 힘을 모아 조선족 인재 육성과 또 다른 목적을 위해 설립한 대학이다. 설립 배경을 보면 ① 연변지역은 항일운동의 근거지이며 21세기 동북아 경제교역의 전략적 요충지이다. ② 중국의 경제발전에 따른 고급 전문인력 수요 충당 ③ 중국과 한국 양국간의 합작 교육을 통해 문화 및 경제, 기술 교류 증진 ④ 특히 연변지역의 경제개발에 주도적인 참여조건 조성 등이다.

기술대의 설립취지는 ① 중국의 개혁 및 연변지역의 경제 발전을 위해 첨단 전문교육을 통한 고급 기술 인력 양성, ② 산학연계를 통한 지식산업 발전에 참여, ③ 산업 훈련학교를 통한 영어 및 전산교육의 강화로 전문 실력인 배출, ④ 기능훈련을 통한 선진 과학기술의 고급 기능인력 육성, ⑤ 교육 문화정보 및 산업정보 제공(중앙도서관의 지역정보 중심화) ⑥ 부속병원 설립에 의한 지역후생및 사회복지 기여 등이다.

기술대의 규모를 보면 ① 위치는 중국 길림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길시 북산가 ② 면적은 총 사용계획 면적 30만평 중 현재 17만평 정도를 사용 ③ 학교 체제는 과학기술 중심 대학으로 공과대학, 상경대학, 농과대학, 의과대학 등 4개 대학 21개 학과를 설치하려고 한다. 현재 설치되어 있는 학과는 전산학과, 전기 전자공학과, 건설공학과, 무역학과, 영어학과, 응용통계학과 등이 있다. 또한 산업 훈련학교 소속으로 산업 정보훈련원, 기아 기술훈련원, 건설 기능훈련원(동아건설과 협약되어 훈련 후 해외 동아건설 현장에 취업됨)등이 있었다.

대학 캠퍼스는 생각한 것 보다 넓고 좋았다. 언덕 위에 위치해 있어서 연길시가 한 눈에 들어와서 조망하기에 좋았다. 본관도 웅장했고, 기숙사와 식당, 교직원 숙소도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본관에 들어가니 0선생이 아는 교직원이 있어서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마침 과기대는 중국 소수민족 과학 학술대회가 열리고 있어서 전국 각지와 외국에서 많은 학자들이 모여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기에 매우 복잡하였다. 안내를 받아 회의실에서 기술대에 대한 브리핑을 받았다. 김진경 학장과도 만나려고 했지만 행사 관계로 분주하여 다음에 만나기로 하였다. 도서관을 보았는데 한국의 대학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그런대로 도서관으로서 외양은 갖추어져 있었다. 조선족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현실적인 정황을 알 수 있는 서적을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책들이 한국 등 외국에서 온 것이었고, 중국 내에서 출판된 책들은 별로 없었다. 안내자에 의하면 서울대에서 나온<연변의 조선족> 이 최근에 나온 책으로서 그 책을 능가하는 조선족 연구서가 중국 현지에서는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어떤 책이든지 무조건 출판해서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수요량을 서점과 대학들에서 주문 받아 출판하기 때문에 한 번 출판되어 판매된 후 절판되면 다시 구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원하는 책을 발견했을 때는 미루지 말고 즉시로 구입해야 하는데 언제 또 다시 출판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특이한 것은 김일성 관계 서적들이 진열되어 있는 것이었다. 안내자의 설명에 의하면 얼마 전에 북한에서 고위 인사가 찾아와서 협력을 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남북교류를 위해서 서적들을 받아 진열해 놓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김일성 전집 등 북한 선전 책들을 읽는 학생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도서관에서 나온 후 컴퓨터실로 갔다. 전산실에 들어가 보니 데이콤이 기증한 중형 컴퓨터가 실습용으로 쓰이고 있었다. 지금은 486정도로도 중형 컴퓨터의 기능을 다한다고 하니 과학의 발전이 놀랍기만 하다. 실습용은 주로 286기종이라 286이 단종된 한국의 경우와 비교해 보면 뒤떨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 곳에서는 대학생들의 전산교육에 요긴하게 쓰이고 있었다. 학교 당국은 아예 교실 한 칸에 컴퓨터들을 여러 대 설치하여 밤에도 연습을 하고, 숙제도 편지도 컴퓨터로 치는 학생들이 늘어가고 있다고 한다. 컴퓨터실이 학생들에게 단연 인기가 제일 좋은 곳이 되어 있었다. 기술대에서는 등록금을 1300원 정도 받는다. 중국의 경제 현실에서 보면 상당한 금액이다. 그러나 장학 제도를 잘 구비하여 80점이 넘으면 반액을 감면해 주고, 85점이 넘으면 전액을 감면해 주며, 90점이 넘을 경우에는 오히려 생활비까지 지급해 준다고 하니 가난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국제학술 세미나가 열리고 있는 교실들도 구경하였다. 대충 본관을 구경한 후 기숙사 동으로 갔다. 본관에서 기숙사동으로 건너가는 빈터는 호수와 같았다. 작업하는 불도저의 굉음이 요란하다. 식당을 보니 대단했다. 학생들 전원이 한 번만 교대하면 다 식사할 수 있을 만큼 장소가 넉넉하여 좋았다. 기숙사 시설은 오밀조밀하지는 않아도 상당히 신경을 써서 꾸며 놓았다.

학생 기숙사에 가보니 화장실도 깨끗하고 남녀 별로 샤워를 할 수 있도록 시설이 깨끗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기숙사 방은 사생들이 생활하기에 편리하게 설비되어 있었다. 마침 우리가 들어 간 곳에는 한국에서 영어 교사로 선교를 하려고 하는 여선생들이 네 명이 있었다. 현재 6명이 그곳에서 영어 교사로부터 교육을 받고 있었다.

동북삼성에는 56여 개의 고등 중학교가 있는데 영어교사가 있는 곳은 10여개 교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일어를 외국어로 배우고 있다. 이러한 사정이 조선족 청소년들이 학문을 하거나 국제 사회에 진출하는데 제약 요건이 되고 있다. 조선족 동포들의 생활의 향상을 위해서는 조선족 초중, 고중에서 영어를 배우는 것이 긴요하다. 그래서 기술대에서는 조선족 초중, 고중에서 영어 교사로 헌신할 헌신자를 찾고 있다.

영어를 전공한 사람은 물론, 비전공자라도 영어에 어느 정도 소양이 있으면 영어교사로 헌신할 수 있다. 중국선교의 비젼이 있고, 생활비를 모금할 수 있다면 지금이라도 헌신할 수 있다.

동북삼성에 산재한 조선족 초중, 고중에서 영어 교사를 한다면 선교 사명을 감당하는 일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선교적 차원에서 볼 때도 확실히 가치있는 사역이다. 교직원 숙사는 보지 못했지만 생활하기에 큰 불편은 없다고 한다. 기술대의 운영은 교수나 교직원들은 한국, 호주, 미국 등 외국에서 온 외국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그 외국인들은 다 한국인들이다. 교수를 포함한 모든 교직원들은 자기 생활비를 모금해야 한다. 학교 당국에서 주는 월급으로는 도저히 살 수 없다.

교직원들은 생활비의 모금액이 시간이 감에 따라 줄어져 갈 때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것은 기술대 교수들 뿐만이 아니라 프로젝트로 나가 있는 대부분의 헌신자들이 겪고 있는 현실이었다. 자신을 부르시고, 그곳에 보내신 하나님을 의지하는 수 밖에 달리 무슨 길이 있겠는가? 기술대는 연길시와 합작이기에 토지는 물론 전기와 수도료를 연길시에서 부담하고, 한국측은 건물과 운영비를 책임지고 있다.

기술대는 원래의 목적을 수행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비록 수업 시간에 복음을 증거하지 못하고, 공개적으로 채플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기숙사를 중심으로 은밀히 학생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양육하고 있다. 기술대에도 정상적인 조직 외에 당조직이 다른 이름으로 들어 와 있다.

중국에서 공식적으로 큰 프로젝트를 갖고 일하는 곳에는 이름이야 어떻게 부르든 공산당 조직이 공식적으로 들어와 있다. 그래서 교직원들과 학생들의 동태는 물론 도서관에서 대출되는 책의 종류와 수량, 기숙사의 출입자 등 감시의 눈초리를 늦추지 않고 있다. 물론 교직원들도 그들에게 감시당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니 사명을 갖고 그곳에 간 사람들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기술대에 투자된 그 많은 돈이 투자되는 것에 비해 선교적인 효과가 얼마나 될는지 회의가 생긴다. 그러나 기술대는 동북삼성의 조선족 외에 북한에도 깊은 관심을 갖고 기술의 협력을 창구로 하여 진출할 계획을 갖고 있고, 그 계획은 지금 상당히 진척되고 있다. 그 프로젝트가 시행되면 북한 선교에 통로를 여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기술대에서 나와 좀 걷다가 택시를 타고 해원학교로 향했다. 해원학교로 가는 길은 너무 좋지 않았다. 진흙탕 길이다. 도착해 보니 주변에서 나는 향긋한 냄새(?)가 코를 괴롭힌다. 교장실에서 김두한 교장을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었다. 해원학교는 성공적인 사역을 하고 있는 곳으로서 금년에 3년 6개월제 전문대학으로 인가를 받은 선원양성 학교이다. 전에는 6개월 코스로 1인당 3,000여원을 수업료로 받고 선원을 양성하는 일에 주력을 했는데, 지금은 40명 정원의 사관들을 양성하는 과정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해원학교를 졸업하기만 하면 취직은 따 놓은 당상이다. 사람이 없지 자리가 없는 일은 없다고 한다. 중국적인 경제 여건에서 7,000원의 월급은 엄청난 수입이 아닌가? 더군다나 고중 필업자를 자격으로 하는 사관 과정은 40명을 선발하는데, 전원 장학금으로 운영하려고 한다. 사관이 되면 월 2-3만원 수입이 된다고 하니 놀라울 뿐이다. 안내하는 노교수님(000목사가 시무하는 서울00감리교회 파송)이 인도하는 대로 학교의 구석 구석을 구경하였다. 별별 시설과 교육과정이 다 있었다. 심지어 음식을 조리하는 것을 배우는 주방도 있었다. 교사는 낡기는 했어도 상당히 넓었다.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이곳이 원래 연길 공산당 간부 훈련소였다는 점이다. 공산당이 준비한 것을 해원학교에서 매입하여 사용하고 있으니 주님의 역사는 참으로 오묘하다. 해원학교는 전문대학으로 승격되면서 새롭게 교사를 건축하고 있었다.

해원학교의 운영은 교직원들은 각자 생활비를 모금해서 사는데 학교에서 정한 기준에 미달되면 채워 준다고 한다. 좋은 제도라고 생각했다. 연길에서도 선교사들 간의 빈부 격차가 많은 문제들을 야기시키고 있었는데 해원학교의 처사는 귀감이 되고 있다. 해원학교는 훈련생들을 복음으로 양육을 잘 하고 있다고 한다. 뿐 만 아니라 00교회라고 1월에 방문했던 적이 있는 교회도 개척하여 지금은 100여명이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있다고 한다.

해원학교는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여 사역을 하고 있다고 생각됐다. 해원학교에서 나오다가 나를 알아보는 000교수를 만났다. 우리 <사>기독교 국제 선교협회의 고성 선교대학원에서 몇 번 강의도 들었다고 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처음에는 잘 생각이 나지 않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기억이 났다. 김희원 목사님과도 안면이 있었다. 자기 집에 와서 쉬고 가라는 걸 시간이 없어서 가지 못하고 헤어졌다. 참 세상은 좁다. 해원학교에서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나다니……!

차가 없어서 한참 기다리다가 시내버스를 타고 시내로 들어 왔다. 집에 도착하여 점심을 먹고 목욕을 한 후 푹 쉬었다. 연길에 와서 보고 싶은 용무는 다 보았는데 다만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연길교회 0목사님을 만나보지 못한 것이다. 전번에도 만나려고 했으나 출타해서 만난지 못했고, 이번에도 만나려고 했는데 너무 바빠서 가도 못 만날 것이란 0선생의 충고를 받아 들여서 가지 않았는데 가보지도 않은 것이 못내 아쉽다. 찾아 가보면 어떻게든 만날 수 있었을 텐데. 그러나 이제는 다음을 기약할 수 밖에 없었다.

오후 4시가 넘어서 준비를 하고 그 동안 정들었던 0선생의 집을 나왔다. 택시를 나누어 타고 버스 정류장에 나와 보니 우리가 타고 갈 침대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 형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버스에 짐을 싣고 좌석을 확인해 보니 버스 입구의 2층이 우리 좌석이었다. 아래층 침대였으면 편했을 것을 위층 침대라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 형제가 변장을 하고 와서 같이 차에 탔다. 그 형제는 창쪽으로, 나는 안쪽으로 자리를 잡고 누웠다. 0형제는 내 뒤에 자리를 잡았다. 눕지 않으면 앉아 있어야 하는데 이층이라 도저히 앉을 수가 없었다.

버스는 이층으로 된 침대를 설치해 놓았는데 30명 가까이 탈 수 있었다. 기사들의 운전석도 잠을 잘 수 있도록 침구를 갖고 다녔고, 두 사람이 교대로 운전을 하였다. 버스 요금이 기차보다는 상당히 비싸지만 침대차인 워프를 타지 못할 바에야 너무 장거리가 아닌 한 침대 버스를 타는 것도 괜찮다.

외국인으로 기차를 타면 요금이 엄청나게 비싸서 차라리 내, 외국인 차별이 없는 버스가 마음 편할 수 있다. 특히 기차에는 짐 검사가 심하나 버스에는 없기 때문에 귀중한 짐을 갖고 갈 때에는 버스가 안전하다. 버스는 우리가 승차하고도 30분 이상 지체하는 것 같다. 승객은 거의 다 승차했는데 짐을 싣느라고 지체되었던 것이다. 중국은 짐을 버스 밑에 싣는 것이 아니라 버스 위에 짐을 싣도록 해 놓았다. 그리고 그 곳에 싣는 짐에 대해서는 별도의 요금을 받았다. 일행은 우리가 떠나기까지 우리를 에스코트하였다. 드디어 버스가 출발하였다. 출발하니 안심이 되면서 마음이 좀 놓였다. 차창으로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서 좋았고, 주변의 경치를 보면서 가니 좋았다. 그러나 좀 쉬고 싶어서 한 참 자고 있는데 버스가 정차하였다. 깨어 보니 날은 이미 캄캄하였다. 시간은 이미 저녁 8시가 넘었다.

어딘지도 모르는 길가에서 승객들이 내려서 용변을 보았다. 다시 승차하여 한참 곤하게 자는데 또 다시 정차를 한다. 못 먹은 저녁을 먹으라고 식당에 차를 정차시켜 준 것이다. 우리 일행도 내려서 식당에 들어가 식사를 하였다. 시간은 밤 10시가 넘었다. 나는 준비해온 빵을 먹고, 두 형제는 밥과 닭도리탕, 마른 두부 볶음을 시켜 먹었다. 식후에 버스는 목적지를 향하여 힘차게 달렸다. 여름이 다 지나지 않았는데도 날씨가 선선하다. 단잠을 자다 깨워서 보니 종점에 도착해 있었다. 시간은 새벽 3시가 넘었다.

8월 18일 (木)

버스 터미널과 기차역은 걸을 만한 거리였다. 00에 가는 기차는 4시가 넘었다. 여관에 갈 시간은 안되고 해서 휴식간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밤에는 문을 열지 않는다. 휴식간은 보통 1인당 5원 내지 10원 정도씩 하는데 자리도 좋고, 개찰할 때 특전을 주어 먼저 나갈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좌석이 지정되지 않는 기차의 경우는 좌석 잡기가 수월하다. 할 수 없이 대합실에서 기다리다가 기차를 탔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0형제에게 조선족과 한족의 갈등과 민족 차별에 대하여 들었다. 민족간의 갈등은 심각한 것은 아니지만 엄존하는 것이 또한 사실이었다. 민족 갈등은 주로 상권을 놓고 한족 싸움패들과 조선족 싸움패들이 싸우기도 하고, 깡패들이 조선족 마을에 와서 행패를 부림으로 야기되기도 한다. 어떤 때는 한족들이 조선족이 지어놓은 농산물을 도둑질해 가는 과정에서 일어나기도 한다. 심한 경우는 살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한다. 민족 분쟁이 발생했을 때 조선족은 처음에는 분노하여 일어나다가도 나중에는 흐지부지, 유야무야 된다. 그렇지 않고 끝까지 문제를 삼으면 한족에 비해 차별 받는 문제들이 해결될 터인데 그러지를 못하고 있다. 아마도 씨는 못 속이는 것 같다. 중국 당국은 겉으로는 소수민족을 차별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내면적으로는 분명히 차별을 한다.

백인이 흑인을 차별하는 정도는 아니지만 소수민족이 직장에서 승진할 때나 송사를 할 때 차별 당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다. 조선족들도 그것을 알고 있지만 어쩌지를 못하고 있다. 그래서 조선족이 우세한 시장의 상권이 한족에 의해서 잠식을 당하고 도전을 받을 때 싸움께나 하는 건달들이 한족 건달들과 싸

우게 되고, 이것이 민족간의 싸움으로 비화되는 것이다. 조선족 건달들이 이기면 그 시장의 조선족의 상권은 보장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조선족의 상권이 위협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족과 한족 개인간의 싸움도 나중에는 마을 단위의 민족분쟁이 되고, 이것이 발전하면 현급 단위로 민족 분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00에 도착해 보니 오전 9시였다. 0형제의 집에서 가까운 곳에 여관을 잡기 위해 사람이 뒤에서 페달을 밟아 가는 리어카를 탔다. 요금은 1인당 1원씩이었다. 사진도 찍고 한참 가는데 타이어가 펑크가 났다. 요금을 안 주어도 되는데 펑크 때우는데 드는 비용 1원을 주고 다른 리어카를 탔다. 내가 묵을 빈 관은 00시 집체들이 경영하는 빈관 이었는데 요금은 50원하였다. 객실은 허술했어도 꽤 넓었다. 우선 안전하게 도착한 것을 연길에 있는 일행에게 알렸다.

연길의 일행도 오후 1시 비행기로 북경에 가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빨리 연락을 취할 필요가 있었다. 빈관에서 세수를 하려고 가보니 수도에서 물이 나오지 않는다. 고장 난 것을 방치해 두고 수리하지 않고 있었다. 보일러 실에서 물을 구할 수 있었다. 세수를 한 후 객실에 들어와 나와 그 형제는 잠을 자고, 0형제는 집에 들려서 그 형제의 거처를 마련하고 점심을 준비하기로 하였다. 12시가 되어 배에서 요란한 소리가 나고 0형제는 오지를 않는다. 밖에 나가서 구경도 하고 바람도 쐬다 들어오니 0형제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0형제의 집으로 갔다. 0형제 집은 자그마했다. 대지가 90평방 미터에 45평방 미터 짜리 집을 지어 동생과 나누어 살고 있었다. 동생은 마침 한국에 노무로 나가서 그 집을 세 놓으려고 했는데 이미 주일에 한족이 세를 들어 왔다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다른 집을 찾아 보기로 하였다. 집안에 들어가 보니 거실 비슷한 곳에 부부 침대가 있고, 0형제가 생업으로 하고 있는 기구들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안쪽에는 아이들 방이 하나 있었다. 밥상에는 여러 가지 요리가 준비되어 있었지만 나는 오로지 한국에서 갖고 간 고추장에 의지하여 밥을 먹었다. 0형제가 나 를 생각해서 여러 가지 음료수를 사왔지만 콜라밖에는 마실 수가 없었다.

중국 여행을 하면서 불편한 점이 많지만 그중에서도 물 때문에 상당히 괴로웠다. 500cc짜리 생수가 3원인데, 그 마저 맛이 병원에서 주는 식사와 같이 닝닝하여 갈증도 해소가 안되고 마시기가 괴로웠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콜라를 마셨다. 콜라는 한 캔에 보통 3원50전 하지만 동네 잘 아는 곳에서는 3원 하였다. 콜라를 좋아해도 그렇지 콜라를 매일 물대신 마시는 것도 괴로운 일이었다. 갈증이 해소도 안되거니와 체중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여지는 것이 아니었다.

0형제의 부인은 사람이 수더분하니 좋았다. 우리 교회 임성찬 전도사님에 의하면 0형제의 부인이 0형제보다 믿음이 더 좋다고 하였다. 임전도사님은 올 2월에 중국에 가서 0형제의 안내로 선교 현지를 돌아보며
부인을 만 난 적이 있었다. 나는 내 평생에 임전도사님 같은 사람에 대해 들어본 적도 없고, 만나본 적도 없을 만큼 대단한 사람이다. 나는 여간해서는 남을 칭찬하지 않는 좋지 못한 성격이 있는데 나를 감동시킨 사람이라면 어떠한 사람인지 알만한 사람은 알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이 있지만 주님은 틀림없이 임전도사님을 들어서 조선족 교회를 바로 세우고 한족 선교를 하는데 크게 쓰실 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무릇 신앙은 부인이 남편보다 좋아야 그 집안이 잘된다. 남편이 부인보다 신앙이 더 좋으면 말도 많고 탈도 많게 된다. 이곳에 와서 알고 보니 0형제보다 부인이 오래 전부터 주님을 믿고 있었다. 뿐 만 아니라 0형제 처가집은 거의 다 믿음의 집안인데 0형제의 집은 형제들 가운데 믿는 사람이 전부 하다시피 하였다. 그래서 0형제에 대하여 안심이 된다.

그 형제의 거쳐가 문제였다. 0형제와 그 부인 0집사 그리고 내가 상의한 결과 다른 집을 구하기로 하고 그 동안은 0형제의 집에서 가까운 00처소에서 잠을 자고 식사는 0형제 집에서 하기로 하였다. 알아보니 마침 가까운 곳에 방이 나는 곳이 있었다. 0형제 옆집만은 못하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그리고 그 형제가 우리 일행이 또 다시 중국에 올 때까지 생활할 수 있도록 취사 도구를 마련해 주었고, 충분하지는 않지만 생활비도 0형제에게 주었다.

전화국에 가서 00처소를 섬기고 있는 0교사에게 전화를 걸어서 만나기로 하였다. 떡 본 김에 제사지낸다고 애초에 0교사와는 친한 사이도 아니고 만나려고 계획하지 않았었지만 이곳까지 왔으니 만나고 싶었다. 전에 나와 교통했던 00의 0교사의 소식을 듣고 싶었고, 또 그 지역 가정교회의 변화되는 정황을 알고 싶어서 였다.

00현의 0교사와는 작년 중국에 처음 갔을 때 그 처소에 배정되어 집회를 하였기 때문에 알게 된 사이였다. 나의 과거의 모습이 생각나서 그에게 친근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큰 아들의 교육을 도와주기로 약속을 하였다. 그 약속은 내 형편에서 지킬 수 있는 것이었고, 지킬 의지도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사람은 지나 놓고 보아야 한다. 내가 비교적 사람을 잘 보는데 이번엔 실패한 것 같다.

임전도사님이 중국에 갈 때 그에게 안내를 부탁하면서 200달러를 경비로 지난번에 주고 왔는데, 사정이 생겨서 0형제에게 안내를 부탁하게 되었다. 그래서 임전도사님의 동의하에 그 돈을 0교사에게 100달러는 그냥 주고, 100달러는 감비차를 사달라고 부탁하는 편지를 써서 보냈다. 그 후에 편지가 왔는데 내 마음에 흐뭇하게 했다. 그래서 이번에 가면 만나서 이야기하리라 생각하고 편지를 안했는데 6월 어느 날 새벽에 국제전화가 왔다. 그래서 다음에 만나서 이야기하자고 편지를 보냈다. 중국에 입국하면서 천진에서 00처소로 따로 떨어져 가는 박성목 목사님에게 0교사의 전화번호를 알아 달라고 신신 당부를 하였다.

그런데 지난 화요일 저녁에 박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인간에 대하여 대단히 실망하게 되었고, 가정교회 지도자들이란 사람들에게 엄청난 실망을 하게 되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만나려한 것인데 0교사는 마치 내가 전에 맡긴 그 돈을 찾으려 만나려는 줄 알고 박목사님의 부탁을 받고 전화한 0교사에게 감비차는 사지 못했고, 그 돈은 다 썼으니 적당히 둘러서 보내라고 했다고 한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0교사에게 그 아들의 교육을 도와주겠다고 약속한 것을 후회했고, 또한 경솔히 행동했던 그와의 교통을 후회했다. 조선족 교회의 지도자들과 교통할 때 돈이 들어가면 거의 대부분의 경우 씁쓸한 결말을 보게 되는 것이 십중팔구이다. 아무리 선의로 도와준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중에는 올무가 된다. 0형제의 부탁으로 만주 조선족 가정교회에서 만주의 두 여장군 가운데 하나라고 일컬어졌던 00처소의 0교사 (다른 한 사람은 한국에 와서 불법 체류하며 초창기 간증집회를 하고 다녔던 000집사이다) 에게 전화를 걸어서 반갑게 만났고, 유익한 정보를 교환했다.

저녁 식사를 0형제 부인인 0집사가 빈관으로 가져왔다. 식후에 말씀을 듣고 싶다고 해서 그 형제와 0집사에게 예수님의 유일성에 대해 이야기해 주고 그 형제에게 결신을 촉구하였더니 예수님을 영접하였다. 그 형제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도 귀하지만 0집사가 말씀을 사모하는 것도 나를 감동시키고 부끄럽게 만들었다. 9시가 넘어서 시내 야경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00은 별 특징이 없는 도시였지만 그런대로 야시장 등은 구경할 만했다.

8월 19일 (金)

새벽에 일찍이 일어나서 잠시 기도한 후 그 형제와 대담하는 것을 녹음하였다. 자료로서 남기기 위함이었다. 다른 목적은 없다. 귀국하여 기행문을 쓰는 지금까지도 그 테이프를 아무에게도 틀어주지 않았다.

이렇게 하는 것은 나 스스로 선교 브로커가 되지 않기 위해서이다. 내가 중국선교 전문가가 되려는 것은 오직 주의 인도하심을 따라 중국선교에 쓰임 받고 싶어서이지 돈을 벌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상존하기에 깨어 있어야 하고, 주님이 내 마음을 지켜주시도록 내 마음을 주님께 맡긴다.

중국선교 전문가가 되고 그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려면 경비가 필요하다. 내가 수행하려고 하는 중국선교 전문가는 요즈음 새롭게 대두되는 용어로 하면 일종의 비거주
선교사의 역할과 기능도 포함한다. 나는 돈이 없고, 내가 의지할 수 있는 사람도 없지만 주님의 약속 빌립보서 4:19을 의지한다. 나에게 중국선교의 비젼을 주신 주님께서 필요한 경비도 채워주셨고, 앞으로도 채워주시리라고 확신한다.

7시쯤 되어서 00처소 0교사가 찾아 왔다. 여러 가지 가정교회의 정황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고, 특히 0형제의 문제에 대해서 심도있게 이야기했는데 썩 내켜하지 않았다. 0교사는 연변에 있는 우리를 만나려고 전화를 했으나 연결이 안되어서 지난 토요일에 연변에 오려고 출발하다가 아들 0교수가 약혼할 처녀를 데리고 오는 것을 만나서 도루 돌아갔다고 한다. 0교사가 중국이 개방된 이후 조선족 가정교회의 설립과 성장에 공헌한 것은 기억할 만한 공헌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많이 변질되어 있었다. 주님이 그것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신 그것의 맛에 길들여져 있었다. 건덕상 구체적으로 언급은 할 수는 없지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목숨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헌신했던 주의 일이 하나의 돈벌이의 도구로 전락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고 서글픈 일인가? 참으로 마음이 아프다. 여기에는 나를 포함한 한국교회의 허물과 실수가 기여했다고 생각하니 더욱 답답한 마음에 괴로웠다.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맘몬에게 마음을 빼앗기는 여종을 보면서 착잡한 마음 금할 길 없다. 나에게는 이런 괴로움이 있다. 중국 동북삼성을 다니면서, 또는 국내외에서 되어지는 일들을 보면서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하면 나 자신이 그렇지 않아도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성격이 강해서 괴로운데 더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변할 수 가 있고, 또한 그 사실을 전해 들은 한국교회가 선교에 대하여 더 냉담해 지고, 희미한 선교의 불을 끄는 것 같아서 괴롭고, 사실을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또한 잘못된 일들이 시정되지 않으니 괴롭다. 그래도 나의 영웅심을 위해서 선교의 열을 끌 수는 없다. 이런 고민은 지금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성령이 감동을 주시면 사실을 사실대로 이야기할 수 밖에 없다. 그러한 확신이 없는 한 건덕과 선교열의 진작을 항상 고려할 것이다.

000시에 도착하여 00에 가는 버스를 타려고 하였으나 막차가 떠난 뒤였다. 00은 거리가 상당히 멀고 길이 안 좋아서 오후 1시만 되면 막차가 떠난다. 그래서 우선 쌍크스 역에 있는 철도 빈관에 들었다. 45원인데 방은 천장이 상당히 높고 넓이도 상당히 넓었다. 중국 빈관은 숙박료 말고도 열쇠 예치금으로 20원을 예치해 두었다가 나갈 때 열쇠와 바꾼다. 수속을 끝내고 객실에서 한 참을 쉰 후 00교회를 찾아 나섰다.

버스를 타고 00에서 내려 교회를 찾았다. 00에는 00교회 뿐 만 아니라 천주교회, 00교회(러시아 정교회) 등도 있었다. 00교회 같은 경우는 상당한 규모였다. 00교회는 전형적인 예배당의 모습을 한 1층 짜리 건물이었고, 사택과 사무실 비슷한 가건물이 있었다. 마침 000시에서 왔다고 하는 여집사님의 안내로 000 목사님을 사택으로 찾아갔다. 사무실로 와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000목사는 31세된 여자 목사로서 교포 3세이다. 할머니가 신앙생활을 한 분이었다. 그녀의 남편은 동북신학원 동기동창인 한족으로서 00교회를 시무하고 있다. 그러니까 부부가 한 교회에서 두 민족을 상대로 예배와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문화혁명 때는 할머니가 무슨 노래를 흥얼거렸다고 한다. 무엇 하느냐고 물으면 제대로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000 목사가 예수를 믿은 것은 모택동 사후 중국이 개방된 이후이다. 개방된 후 00교회를 정부가 되돌려 주었을 때 할머니 몇이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고 한다. 그 때 대부분의 신자들이 공산당이 무서워서 공개적으로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을 때 00교회 교인들은 위험을 감수하고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0목사는 가정교회에 대하여 아주 부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었다. 가정교회는 00교회의 교인들이 꿍꿍이 속이 있어서 한국 목사들과 손을 잡고 차린 교회라는 것이다. 신앙의 자유나 경건한 생활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경제적인 목적을 위해서 가정교회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0목사의 주장을 100% 받아들일 수 는 없지만 그런 면이 가정교회에 있는 것이 또한 엄연한 현실이다.
00신학원은 한국의 00교단이 00성 종교국의 허가를 받아 설립하려고 하는 2년제 신학교이다. 00측 총회선교부 00신학원 설립 추진위원회에서 만든 팜플렛에 의하면 00성은 토지면적 460,000km에 인구 3,442만명 46개 소수 민족이 어울려 살고 있으며 조선족은 43만명이 499개 민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전 성의 기독교 인구는 30-40만명이며, 최근 신도수가 매년 5%씩 급격히 늘고 있다. 10여명의 목사와 5명의 장로들이 3,000여개 교회를 돌보고 있다. 수천여개의 가정교회 처소들은 義工 (자원 전도인)들에 의해 인도되고 있으며, 이들을 위해 매주 1회 지도자 성경학습반을 운영하고 있으며, 매년
수차례 義工培訓班(단기 지도자 학습반)을 개최하고 있다. 성경 외에 다른 참고서적이 없고 지도자들의 자질문제, 시설공간 부족등으로 배우기를 갈망하나 효과적인 학습을 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인구 450만의 000시에는 7개의 교회가 있으며 각 교회마다 3,000명 이상이 모이고 있다. 000시 기독교협회는 시 교구 지역에 10개의 교회를 수년내 설립하기 위한 목표를 가지고 노력하고 있다.

000신학원 설립개요에 의하면
① 중국 하얼빈 시에 000신학원 (2년제)를 설립한다. ② 000교회당을 3층/ 800평으로 신축한다. (1층/신학원, 2층/ 조선족 예배실, 3층/본당) ③ 94년 3월 착공 95년말까지 완공 신입생을 모집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000목사의 반응은 시큰둥한 것이었다. 애초에 5억원(한화,인민폐로 500만원)으로 교사를 신축하려 하였으나 00측 형편이 여의치 못해서 규모도 축소하여 5층으로 짓기로 했다는 것이다. 3월에 시작한다던 건축공사는 볼 수가 없었다.

0목사는 저 땅에다 건물을 지으려 한다면서 현 교회 옆의 빈터를 보여주었다. 그후 심양 서탑교회에서 0목사님과의 인터뷰시 000신학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0목사님은 상당히 부정적으로 말하였다.

000신학원이 1년짜리 성경학교이지 신학교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목사님 가운데 한 사람은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0목사님이 경솔한 분이 아닌데 그렇게 말씀하신 것은 집고 넘어갈 일이라고 사료된다.

그 외에도 00교회가 처소의 지도자들을 교육시키는 일, 동북신학원 출신들의 동정,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의 갈등, 한국교회가 조선족 교회를 돕는 방법 등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 중에서 한 가지만 언급한다면 중국의 삼자정책은 외국에서 선교비를 받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비를 보낸 후에 간섭하는 것을 금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선교비만 보내주고 이쪽 일에는 상관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돈이 있으면 000시 기독교 협회에 요청하면 예배당 건축이 필요한 교회를 알려 주고 연결시켜 주겠다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건축비만 보내주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는 교회도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지만 다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0목사와의 대화에서 새겨들어야 할 것이 한 가지 있다. 한국의 00교단이 어떻게 000시에서 자리를 잡게 된 것과 관계있는 이야기이다. 000선교사는 부친이 대만에서 선교사를 하였고, 본인도 대만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거의 중국인이나 진배없이 되었다. 그래서 중국인의 의식구조와 문화, 관습을 잘 이해하고 있어서 00교단이 000시 기독교 협회와 교류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여기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지금 중국 선교를 하려면 기존의 교회(삼자교회나 가정교회)와 교통하는 것이 첩경이다.

그런데 한족의 문화와 관습, 의식구조를 잘 이해하지 못해서 실책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 중국선교에 성공하려면 중국의 문화와 습관, 의식구조를 잘 이해할 뿐 아니라 선교사의 의식구조가 중국인화 되어야 한다. 그리고 중국인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섬기려는 자세가 확립된 사람이 선교사로 가야 한다. 그러한 선교 역량이 갖추어진 선교사들만이 중국 선교에 귀하게 쓰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00교회는 한족이 6000명이 넘는다고 하는데 예배당의 규모를 볼 때 도저히 납득이 되지를 않았다. 그 정도의 규모를 갖고 그런 인원이 모여 예배를 드린다는 것은 내가 보기에 불가능하다. 그러나 만약 그 인원이 00교회와 교통하는 처소들까지 다 포함한 인원이라면 그럴 수 있다. 그리고 조선족은 11시에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노른자 시간을 어떻게 조선족이 사용할 수 있느냐고 하니, 한족은 마음이 우리보다 넓다고 했다. 저녁 예배는 자신이 중국어로 예배를 인도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00교회에는 많은 한국 목사들이 와서 설교를 하게 하고, 강의를 하게 하는데 각양 각색이라 교인들이 혼돈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한국 목사들이 교파와 교회마다 다르게, 같은 교단이라도 목사마다 다르게 설교하고 강의하니 교인들이 갈피를 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000목사가 한국 목사들의 청을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래서 오는 목사들마다, 요청하는 목사들마다 강단에 세울 수 밖에 없다.

그러나 한국 목사들은 자기는 중국 조선족 교회에서 설교해서 좋지만 설교를 듣는 교인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혼란에 빠지는 상황을 야기하는데 일조해서야 되겠는가? 그렇게 하고 귀국해서는 선교를 하고 왔다고 하면 주님이 뭐라고 하시겠는가? 주의 종은 사람을 의식하지 말고 주님만을 의식해야 한다.

저녁을 먹기도 그렇고, 안 먹기도 그래서 길가에서 명태 구이와 소세지 구이를 사서 먹었다. 가격도 저렴하고, 입맛에 맞았다. 그런데 같이 먹던 꼬마가 내가 한국인임을 알고는 조선조의 상평통보와 같은 엽전을 사라고 한다. 여기서 나는 중국인들의 상술에 기가 질려 버렸다. 그런 그들에게 복음을 어떻게 전하고 선교 사역을 수행해야 효율적이고 효과적일까를 생각하면서 주님의 지혜를 구하였다.

8월 20일 (土)

8시 20분 00행 버스를 탔다. 한 참을 달리다 보니 홍수로 인해 도로가 많이 파손되어 있었다. 심지어 육중한 다리까지도 홍수에 떠 내려간 것을 볼 수 있었다. 오래 전이 아니라 불과 얼마 전에 있었던 홍수임을 알 수 있었다. 어떤 곳은 마을 전체가 물에 잠겼던 흔적들도 보였다.

0형제가 사는 00에서는 한 마을 전체가 홍수에 휩싸여 절단 난 곳도 있었다. 나도 강동구 성내동에서 두 번이나 홍수를 당한 경험이 있지만 한국의 홍수는 중국의 홍수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땅덩어리만 큰 것이 아니라 홍수까지도 상상을 초월했다. 마침 내 옆 통로에 심양에서
00에 친정 조카 혼인 잔치에 참석하려고 가는 조선족 동포 일행을 만났다. 그들에게서 동포의 진한 정을 느꼈다.

일행은 자매와 그들의 이질녀 부부와 아들 이렇게 다섯명이었다. 아마 심양에서 00까지 가려면 하루 갖고는 안되고 하루를 더 가야 하는 먼 거리였다. 그들은 말하자면 선발대였다. 결혼식은 29일에 하는데 먼저 가서 음식 장만 등을 해 주려고 먼저 가는 것이다. 대화를 나눔으로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또한 지루함도 어느 정도는 덜 수 있었다. 조선족은 축의금으로 상당한 액수를 냈다. 살만한 사람은 동기간에는 2,000원-3,000원까지 축의금을 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형편이 안되면 200 -500원 정도 축의금을 낸다고 한다. 우리의 형편과 비교하면 대수롭지 않을 수 있으나 조선족의 경제 규모를 고려해 보면 그것은 엄청난 액수인 것이다. 그렇게 하면 언제 재산을 모을 수 있느냐고 하니 조선족은 재산 모으는 것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중국의 정치의 변혁에 따라 수도 없이 재산을 몰수당하고 약탈당한 쓰라린 경험이 있어서 장래를 보고 재산을 모으기보다는 생기는 대로 쓰게 된다고 하였다. 그럴 수 밖에 없는 동포들의 처지가 이해는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서글펐다.

4시간 남짓 걸릴 것이라던 시간은 다섯 시간이 거의 다되어서야 송화강에 도착할 수 있었다. 다리로 건너지 않고 바지선에 버스와 승객이 타고 건넜다. 강을 건넌 후 한 20분쯤 가니 목적지인 00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식당을 찾기가 힘이 들고 시내에 콜라 한 병 없는 곳이면 어느 정도인가를 알수 있을 것이다.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00처소를 아는 한족자매를 만났다. 그 자매를 통해서 00현한족 가정교회의 서글픈 분열을 듣게 되었다. 0교사 내외가 섬기는 한족교회가 5백명도<여러 처소에 회집하는 교인>넘는 규모로 성장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북경 0선생 밑에서 한족 선교를 하는 0집사가 와서 처소로 쓰는 집을 중심 처소에 고쳐 달러고 하라고 했다고 한다. 중심 처소에 돈이 많이 있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것은 사실도 아니고, 어떻게 처소들까지 다 고쳐줄 수 있겠는가? 만약 중심 처소에 돈이 있다면 그것은 선교비 일터인데. 그곳 성도들도 헌금을 하지만 경제 규모가 작기에 그 액수는 미미한 것이다.

한족은 신앙 생활에 있어 한국 선교사들에게 선교비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일단 돈이 생기는 줄을 알면 걷잡을 수 없다. 신중하지 못한 한 여집사의 주책으로 한족교회가 와해된 것을 들을 때 마음이 아팠다. 중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한족 선교를 할 수 없다는 실례인 것이다. 여기에도 성숙된 신앙 인격과 선교 역량을 갖춘 선교사가 있었더라면 그렇게 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족 선교를 바로 지도하고 이끌어 줄 선교사가 꼭 필요한 곳이다.

그 자매가 불러준 사륜차를 타고 00처소에 갔다. 도착해 보니 눈이 빠지도록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숨 돌린 새도 없이 설교를 한시간쯤 하였는데, 0형제가 통역을 맡았다. 그곳에는 조선족 성도들은 많지 않고 한족 성도들이 한 40명쯤 와 있었다. 먼저 한족에게 세례를 주는데 감격스러웠다.
그런데 13-14세 된 소녀 둘이 세례를 받게 해 달러고 울면서 애원하였다. 자기들은 세례를 받기 위해서 학교에서 소년단에도 들지 않았다고 하면서 울었다. 처음에는 세례를 안 주려고 하다가 마음을 고쳐먹고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세례를 받는 한족 성도들의 자세는 아주 진지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은 성도들은 거의 다 울먹이며 기도하였다. 한족 성도들은 세례받는 것을 아주 귀중하게 여긴다. 세례 받을 수 있는 기회가 희소하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족 성도들에게도 세례를 주었다. 이날 세례를 준 성도들이 아마 50명은 넘는 것 같다.

내 평생에 한꺼번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기는 처음이다. 물론 92년 10월에 전방부대 신교대에 가서 30명쯤 되는 신병들에게 세례를 준 일은 있지만 이날과 같은 감격은 없었다. 성찬식도 집례했다. 성찬기도 없고, 떡이나 포도주도 엉성했지만 감격은 한국에서 집례한 어떤 성찬식과 비교할 수 없었다.

그리고 00처소를 섬길 교사와 00처소와 교통하는 처소들의 인도자들인 조선족 처소 집사들과 한족 처소 집사들을 임명하였다. 예배가 끝난 후 한족 성도들은 자기들 집으로 돌아가고 조선족 성도들만 남았다. 한족 성도들은 같은 동네에서 온 것이 아니라 몇 십리, 몇 백리도 더 되는 곳에서 왔다. 그들의 은혜를 사모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이 숙연해 진다. 예배 후에 00처소에 있는 욕조에서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니 살 것만 같다. 나는 욕조에다 물을 직접 끓이는 줄 알았는데 바깥에서 물을 끓여다가 욕조 안에 갖다 붓는 것이었다. 목욕을 해서 개 운하기는 했지만 그들에게 미안했다. 주방을 보니 큰 거위를 잡아 놓은 것이 있다. 한족 성도들이 주의 종이 온다고 잡아 온 것이라고 한다. 과연 듣던 대로 한족 성도들의 정신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00에 오면서 나는 식사에 대한 과민 반응을 갖게 되었다. 임전도사님과 같은 비위가 좋은 사람도 힘들어 했다는 그들의 음식을 비위가 약한 내가 어떻게 먹을 수 있을 것인가? 선교사가 현지 문화에 적응하는 단계가 6단계 있는데 현지인의 음식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는 것이 5단계이다. 나는 4단계까지는 되었는데 5단계로 승급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아마 주님이 나를 선교사로 부르지 않으셨나 보다. 이런 사정을 알았는지 0교사가 한국에서 귀중한 물건을 안전하게 갖고 가기 위해서 위장하는데 사용되었던 라면을 끓여주어서 위기를 넘겼다. 조선족인 0형제도 거위 고기에 한 번 수저를 대고 그 다음은 수저가 한 번도 거위 요리로는 가지를 않았다.

몸이 좀 안 좋아서 쉬려고 하는데 은혜를 받겠다고 또 설교를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닌가? 할 수 없이 한 두시간 동안 성령에 대한 설교를 하였다. 마침 오후 예배에 참석하지 못했던 성도들에게 세례도 주고 그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들도 가르쳐 주었다. 한족 성도들이 부부와 한 자매가 있어서 0형제가 통역을 하면서 하니 그래도 좀 수월했다. 말씀을 증거한 후에 성령이 감동 주시는대로 한족 부부와 한 자매에게 격려해 주는 말씀을 전했다. 한족 부부는 0교사 내외가 이사와서 전도하여 세운 사람으로 남편은 창고를 관리하는 집체에 나가고 있었고, 부인은 초등중학교 교사였다. 이후 또 은혜를 받게 설교 해 달라는 것은 0형제가 말씀을 전하기로 하였다.

눈을 감고 자는데 0형제가 설교하는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이튿날 새벽 2시까지 설교를 했다고 한다. 하기야 한번에 6시간 정도를 설교했던 김희원 목사님의 경험이나 박화평 전도사님의 경험에 비하면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들의 말씀을 사모하는 열정에 머리가 숙여진다.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하였는데, 천국을 침노하는 실제를 보게 된 것이다.

8월 21일 (主日)

처소에서 올라온 집사님들은 자기 처소에 나를 데려 가려고 하였지만 몸이 불편했고, 또 식사에 대한 공포, 거기에다 여정이 어떻게 될지를 몰라서 거절하였다. 목단강에서 월요일에 만나기로 약속을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아침 식사후 서둘러 싸룬차를 불러 타고 버스 터미널로 나왔다. 차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0교사 내외와 그리고 저녁에 예배에 참석했던 한족 부부가 같이 배웅을 나와 주었다. 0교사가 가다가 간식이라도 하라면서 50원을 잔돈으로 손에 쥐어 준다. 나도 100원을 아이들 학비에 보태 쓰라고 주었다. 아쉽지만 작별을 하고 버스를 타고 오는데 문제가 생겼다. 내내 잘 달리던 멤바차<중형버스>가 고장이 난 것이다. 기사와 엔진을 아는 또 다른 사람이 아무리 애를 써도 시동이 걸리지를 않았다. 무려 한 시간이 넘어서야 겨우 고칠 수 있었다. 큰 고장이 아닌데도 애를 먹었다. 나는 차가 고장난 이유를 생각해 보고는 그 원인을 알았다. 그리고 즉시로 하나님께 회개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고 왔어야 되는데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그냥 온 것에 대한 주님의 징계였다. 요나를 생각했다. "이 큰 풍랑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라"는 요나의 고백처럼 이 차에 탄 사람들이 한 시간 이상씩 늦은 것이 나의 연고라고… 하기야 중국인들은 한 시간 정도 늦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기는 해도 말이다. 주님은 나의 생각과 행동거지를 하나 하나 다 체크하고 계신 것을 확인하고는 등골이 오싹해 진다. 주님 앞에서 까불었다가는 큰일 나겠다 싶었다.

000시에 도착하여 국수와 포자로 점심을 먹은 후 쌍크스 역에서 목단강행 기차 시간을 알아보니 7시 차가 있었다. 침대 칸이 없어서 좌석표를 끊었다. 짐을 임시 보관소<중국 여행시 가방이 무거우면 역 임시보관소(寄存處)에 맡기고 그 도시를 떠날 때 찾는 것이 편리하다>에서 찾아온 후 휴식간에 들어가서 푹 잠을 잤다. 휴식간은 1인당 10원씩이었는데 시설이 괜찮은 편이었다. 사람들이 거의 없어서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할 수가 있었다.

중국식 사발면으로 저녁 요기를 하고 시간이 되어 VIP대접을 받으면서 출구를 먼저 나가 기차에 몸을 실었다. 밤에 딱딱한 기차의 좌석에 앉아서 8-9시간을 간다는 것이 어떤한 고역인지는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차 안에서 중소국경 지대에 사는 동포를 만나서 그쪽 사정을 들어보았다. 그곳은 가목사시에서도 한 참을 가야한다고 한다. 그곳에도 조선족이 있는데 많지는 않지만 그곳에서는 주로 논을 임대해서 많은 농사를 짓는데, 이 농사가 잘되면 돈을 많이 벌고 그렇지 못하면 빚더미에 올라 않는다고 한다. 농사가 안정된 일이 아니라 일종의 모험인 것이다. 그곳에도 교회는 있는데, 교세가 왕성하지는 못한 것 같다. 기차 여행을 하면서 조심할 것이 바로 소매치기와 강도다. 소매치기들은 다른 사람들이 보는데서도 자고 있는 사람이나, 걸어 놓은 옷의 주머니를 싹쓸이하고, 강도들은 객차의 앞 뒤 문을 막고 싹쓸이를 하기 때문에 무서운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전대를 바지 안에 차고, 전대를 찬 쪽을 창가로 하고는 잠을 청했다. 0형제가 깨우면 그곳이 목단강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꿈나라로 들어갔다.<아멘>

8월 22일 (月)

한참 곤히 자고 눈을 떠보니 목단 강에 거의 다 와 있었다. 기차가 도착하여 내린 목단 강은 처음인지라 어리벙벙하였다. 큰 가방을 기존처에 맡기고 여관을 안내하는 중국인을 따라 한 10분 가까이 골목길을 따라 가보니 여인숙보다도 못한 아주 허름한 초대소가 나왔다. 숙박료는 20원, 중국 여행 중 숙박료가 가장 싼 초대소였지만 그래도 TV도 있고 침대도 있었다. 워낙 피곤했던지라 금방 잠이 들었다가 깨어 보니 아침 8시가 되었다. 4시간은 족히 잔 것 같다. 00교회를 찾아가기 위해 전화를 해서 9시에 목단 강 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00교회 000목사의 따님을 만났다. 교회에 가서 아침식사를 하자는 것을 초면에 실례하기도 싫고 여러 가지 곤란할 것 같아서 굳이 먹고 가겠다고 하였다.

마침 그 분도 손님을 배웅하러 나온지라 잠시 후에 만나기로하고 헤어졌고 그 시간을 이용하여 0형제와 같이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한 후 다시 만나 택시로 00교회로 갔다. 역에서 멀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한 십분은 간 것 같다.

00교회는 한국의 전형적인 시골교회같이 비록 작은 규모였지만 예배당이 있었고, 십자가를 붙이고 있었다. 교회 안에 들어가 기도를 한 후 돌아보니 바닥은 마루였고, 강단도 있고, 강대상도 있었으며 놀랍게도 피아노도 있었다. 2-300명이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교회 울타리 안에는 다용도로 쓰는 건물도 있었다. 그곳에서 교인들이 밥도 해먹고 잠도 자는 가보다. 식사가 끝난 후 대화를 시작하였다.

목사님은 원래 장로의 직분이었는데 작년(1993년)에 안수를 받았다고 한다. 신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안수를 받은 조선족 유일의 목사님인 것 같다. 목사님의 고향이 충남 부여라고 하니 공주가 내 고향이라 반가웠다.

목사님은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와 같이 신앙생활을 시작했는데 신앙생활 초기엔 마귀 역사도 강했고, 핍박도 심했다. 그래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중국으로 오게 되었다고 한다.

한민족이 중국에 이주한 동기는 거의 대부분이 경제적인 것이고, 그 다음이 정치적인 동기에서이고, 일제에 의해 강제 이주된 경우도 있으며 신앙적인 동기에서 이주한 경우도 있었다. 목사님은 요즈음 보기 드문 이민 1.5세인 셈이다. 오늘날의 조선족들은 대부분 이민 2세나 3세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목사님과의 대화에 기대가 컸다. 목사님과의 대화에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해방전 만주에는 3개 노회가 있었고, 노회마다 중앙교회가 있었다고 한다.

남만노회의 중앙교회는 심양의 서탐교회였고, 동만노회의 중앙교회는 연길의 연길교회였으며, 북만노회의 중앙교회는 목단강교회였다고 한다.

00교회는 1968년 경에 예배드리는 것을 중단하게 되었고, 1973년에 가정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 물론 때의 가정예배는 비밀리 드리는 지하교회였다. 그러다가 1986년 10월에 예배당을 지어 헌당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여기에는 할렐루야교회 김상복목사님이 미국에서 목회하고 있었을 때 상당한 도움을 준 것이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해방(1945년)이 된 후 흑룡강성에 있는 대부분의 목사들은 귀국하였다. 뿐만 아니라 평신도 지도자들과 유력한 교인들도 대부분 귀국하였다. 그래서 흑룡강성에서 한국인 교회들의 지도력의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이 일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중국이 개방 정책을 채택한 후 예배당을 복구하는데도 엄청난 장애 요소로 작용하였다.

예를 들어 목단강 지구 같은 경우에도 분명 한국인 교회가 4-5개 있었는데 그 사실을 입증할 사람이 없어서 정부로부터 되돌려 받을 수 없었다.

00교회도 원래의 자리가 아니라 다른 건물과 땅으로 대체해서 되돌려 받았다. 그나마 이전의 규모보다 축소해서 받게 되었다고 한다. 길림
성이나 요녕성의 조선족 교회들보다 흑룡강성의 교회들이 약한 것 같다.
흑룡강성의 공인교회들은 비공인 교회(가정교회)보다 약한 것 같이 보였다. 그 원인이 정부에 몰수된 예배당을 되돌려 받는 일과 관련이 있는 것이라고 사료된다.

이는 공인교회를 회복할 교역자들의 절대부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목사님을 비롯한 흑룡강성의 조선족 공인교회 지도자들은 비공인교회인 가정교회에 대하여 길림성이나 요녕성의 공인교회 지도자들보다 더 강박 관념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이는 흑룡강성의 조선족 공인교회들의 역량 부족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사료된다. 흑룡강성 조선족 교인들 사이에서는 공인교회를 아주 좋지 않게 보고 있다. 그래서 별의 별 말들이 다 돈다. 공인교회는 타락한 교회, 공산당과 타협한 교회라고 하는 것은 물론 심지어는 삼자교회(공인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까지 한다. 흑룡강성을 여러 곳을 다니면서 관찰한 결과 적어도 조선족 사이에서는 삼자교회가 가정교회에 몰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삼자교회 지도자들은 가정교회에 대하여 과민성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목사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가정교회를 비난하고 삼자교회를 옹호하는데 대화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였다.

목사님도 처음에는 삼자애국운동에 가입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어려움도 많이 겪었다. 그러다가 흑룡강성 기독교 제일주석인 한족 목사님의 권유를 받고 삼자애국운동에 가입하게 되었다고 한다.

한족 목사님의 말씀인즉 삼자애국운동에 놀아나지 말고 그것을 이용하여 교회를 이끌어 나가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자는 것이었다. 그래서 목사님과 00교회는 종교국의 지시에 대해 타당한 것은 받아들이고, 타당하지 않은 것은 묵살한다고 한다. 삼자애국위원회의 예배에 대한 간섭을 거부하고 자기들 나름대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즉 겉으로는 삼자애국운동에 동참하는 것 같이 하면서 속으로는 소신껏 사역과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목사님이 삼자애국운동에 대하여 그 타당성을 강변하였지만 이미 내가 알고있는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필자는 그 주장에 대하여 별로 동의할 마음이 없었다.

한국교회는 해외선교를 외치면서 중국에서도 교통이 좋은 곳에만 가고 목단강 같은 외진 곳에는 거의 한국목사들이 거의 오지를 않는다는 안타까운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교통이 좋은 연길이나 심양, 하얼삔 같은 곳에는 선교비와 성경, 기독교 서적이 넘쳐나고 목단강 같은 곳은 기근이 심하다는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목단강도 그렇게 교통이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북경에서 일주일에 두번 정도 비행기가 다닌다고 한다.

사실 한국교회가 중국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비장의 그릇인 조선족 선교를 하려고 한다면 교통이 편한 곳 뿐 아니라 교통이 좀 불편해도 목단강같은 곳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헌신해야 한다. 목사님의 바램은 한국교회가 00교회를 건축하는 일에 도움을 주었으면 하는 것이었다.

현재의 00교회는 그 교회 자체의 필요도 다 채워줄 수 없을 만큼 좁다. 뿐만 아니라 00교회는 목단강지구의 지도적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00교회가 다시 건축되어 공간을 갖춘다면 목단강시는 물론 목단강지구와 인근 흑룡강성 조선족 교회 지도자들을 육성하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고 사료된다. 00교회는 교회 건축을 위해서 거의 모든 헌금을 저축하고 있었다. 그래서 약 30만원(한화 약 3,000만원) 정도를 건축비로 저축하고 있었다. 이만한 돈은 현지에서 거금에 속한다.

그러나 이 돈으로 00교회가 필요로하는 예배당을 건축할 수는 없다. 매입하고자 하는 토지대금 만도 백만원(한화 1억)이 넘는다. 몇 백명 수준의 조선족 교회로서 이 정도로 건축헌금을 모아 놓은 것도 사실은 대단한 헌신인 것이다. 00교회가 건축되어 목단강 지구의 선교기지 역할을 감당하려면 한국교회의 헌신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목사님은 병중이라서 심히 피곤해 보였다. 그리고 성격은 상당히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사실 대화를 나누면서 당신의 견해에 동조하면 좋아하고, 다른 견해를 피력하면 상당히 경직되곤 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여정에 대해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여간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대화를 나눌 때 시험에 들만 하였다. 물론 문화혁명을 거치면서 고초당한 것을 감안할 때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다. 그러나 목사님이 그런 태도를 견지하면 한국교회와 교류하거나 동역할 때 장애 요소로 작용하지 않겠나 생각되었다. 참으로 어려운 일은 교회에서 사례비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는데 목사님이 전에 집체에 다니다 퇴직하였기에 연금이 약250원 정도가 나오는데 그것으로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심히 어려운 일이다. 중국도 요즈음에도 상당히 인풀레가 심해 올해는 20%정도의 인풀레가 있었다.

그 돈 갖고 목사님 내외분과 따님들이 생활하기가 얼마나 어려울까 생각하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따님들이 집체에 쌍발을 하는지는 모른다. 교회에서 생활비를 드리겠다고 하는데도 막무가네라고 한다. 나중에 알고보니 조선족 공인교회를 시무하는 연세 지긋한 목사님이나 교역자들은 대부분 연금에 의존해서 생활하고 있었다.
교회 식당에 나오니 식사준비가 되어 있어서 점심을 먹었다. 그곳에서 조영기 장로님을 만나서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모님과도 진솔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모님이 목사님의 목회에 큰 힘이 되는 것 같이 보였다. 사모님의 노고가 눈에 보이는 듯 하다. 마침 집안에서 열린 성경 공부 모임에 갔다가 돌아와서 식사 중이었다. 그래서 동승촌으로 가는데 안내를 부탁할 수 있었다. 택시를 타고 가는데 20원 거리인데 50원을 달라고하여 협상끝에 40원을 주기로하였다.

바가지라고 생각되었지만 안내자로 나선 000형제가 되돌아가야 했기 때문에 가만히 있기로 하였다. 000 형제는 28세로서 조부의 고향이 제주도인 교포 3세였다. 흑룡강성은 남한 출신 교포들이 많이 있다. 50%가 영남과 호남 출신들이다. 이는 흑룡강성의 한인들이 일제의 강제 이주에 의해 이주하였기 때문이었다. 고성룡 형제는 초중을 필업한 신학지망생이었다.

마침 이 날도 집안에서 처소장 70명이 모여서 하루 10시간씩 5일간 성경 인물연구를 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이 집회는 흔히 한국의 목회자들이 중국에 가서 하는 지도자 훈련의 일종이었다. 000 전도사와 목사 한 분, 그리고 다른 사람 등 3명이 강의를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교육도 필요는 하다. 운용의 묘만 살린다면 여러 가지로 제한된 상황에서 조선족 교회 지도자들을 육성하는데 얼마만큼은 기여를 할 것이다.

동승촌에 가는데 예상외로 시간이 걸렸다. 동승촌에 도착하여 물어 물어 ㅁ형제의 집을 찾았다. 000형제가 ㅁ형제를 만나 인사를 한 후 돌아갔다. 마침 ㅁ형제네 집에서는 잔치를 벌리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동승촌 처소장인 여집사님의 안내로 처소로 갔다. 동승촌의 처소는 비공인 가정교회가 아니고 공인교회인 00교회와 교통하는 삼자계열의 처소였다. 처소의 외모는 낡은 초가집이었다. 집안은 방이 두 개였고, 부엌이 있었다. 방은 누추했지만 상당히 넓어서 30-40명은 앉아서 예배를 드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강단은 없었지만 강대상은 있었다. 이런 곳에까지 동포들이 있고, 교회가 있는 것을 보니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처소에 가서 안 일인데 ㅁ형제네 집에서 잔치를 하는 이유는 이러했다. 형제의 누나가 이혼했는데 마침 이 날 재혼할 상대가 찾아와서 약혼식 비슷하게 인사를 하는 자리였고, 아버지가 한국에 친척 방문차 갈 수 있도록 비자가 나와서 겸사 겸사 동네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잔치를 벌리게 된 것이다.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임에도 이혼이 생각한 것 보다 많이 발생하고 있었다. 자본주의의 유입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안타까웠다.

그런데 ㅁ형제의 아버지가 한국에 가게된 비자는 브로커를 통해서 얻게된 비자였다. 그래서 한국에 가봐야 가는 그런 비자인 것이었다. 조선족 동포들이 한국에 가려고 하는 것은 동북삼성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였다. 전에는 친척방문이 자유로웠는데 지금은 나이 제한이 있다.

그나마도 한국에 친척이 없는 사람은 갈 수가 없다. 동북삼성 조선족 동포들 사이에는 한국에 친척이 있으면 부자가 되고, 북조선에 친척이 되면 가난해진다는 말이 있다. 북조선에서 친척 방문차 오면 너무나 불쌍해서 있는 것 없는 것, 빚까지 얻어서 바리 바리 실어 보내면
부채에 허덕이게 되는데, 한국에 친척이 있어서 한국에 다녀오면 큰 돈을 벌어 중국에서 기반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동포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한국에 돈벌러 가려고 한다.

이로 인한 부작용이 심각한 정도에 이르고 있다. 한국에 친척이 있고, 나이도 55세가 되었으면 상관없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문제였다. 이런 경우 여기나 거기나 브로커가 날뛰는 것은 같았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 인가보다. 처소장인 여집사님의 경우도 딱했다. 집사님에게는 2남 1녀의 자녀가 있었다. 그리고 행인지 불행인지 집사님 자녀분들은 다 한국에 다녀갔다. 거기까지는 좋았는데 그래서 문제가 생겼다. 큰 아들은 한국에서 돈 벌던 때를 못잊어서 또 다시 가려고 브로커에게 부부의 비자를 4만원에 구하기로 하고(비자 내는데 보통 1인당 3만원) 4만원을 주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많이 연결시켜 주었다. 그런데 브로커가 도망가고 말았다. 기왕지사 떼어먹힌 돈은 할 수 없어도 브로커에게 소개시켜 주어서 돈을 떼어먹힌 사람들의 돈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런 일들이 그곳에는 비일비재하였다.

집사님의 딸은 한국에 갔다 와서 지금은 위해에서 한국인 무역회사에 다니며 통역으로 일하는데 한 달에 천원 정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남편 따로 살고, 또한 딸도 엄마와 떨어져 학교에 다니니 돈도 헤프고 가정도 어려움이 얼마나 많겠는가 생각해 보라. 둘째 아들은 한국에서 벌어온 돈으로 목단강시에서 식당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집사님은 올해가 회갑인데도 잔치를 할 엄두를 못내고 있었다. 조선족 동포들이 회갑을 중요시 여기는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섭섭할까?

한 참을 쉬고 있으니 ㅁ형제가 왔다.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여기서 하루를 묵기로하고 시급한 목욕문제를 해결하기로 하였다. 처소를 나와 한 5분 정도 가니 개울이 나왔다. 물은 깨끗하지 않았지만 빨래는 잘된다고 한다. 기분이 좀 그랬지만 팬티만 입고 목욕을 했다. 목욕을 하고나니 날아갈 것 같다. 돌아 오는 길에 학교를 둘러 보았다. ㅁ형제 이야기로는 이 학교는 조선족 인민학교인데 낡아서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새로 건축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 학교의 대지는 약9,000평방이 넘고, 낡았지만 교실도 일곱개나 되는데 8만원에 판다고 한다. 학교를 둘러보니 상당히 넓었다. 이 학교를 매입하여 장애인을 상대로 하는 직업학교와 회사를 만들고, 교회를 하면 좋겠다고 하였다. 지금 당장은 그렇지만 장래를 본다면 누군가 재력이 있고, 중국 선교에 비젼이 있는 분이나 단체가 정부당국의 허가를 얻어 직업기술학교를 만들어 선교적인 차원에서 운영한다면 비젼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교회에 돌아 온 후 ㅁ형제와 중국선교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토론도 하고 인터뷰도 하였다. ㅁ형제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인이었다. 왕년에 건달로 다니다 사고로 다리를 다쳤다고 한다. 믿은지는 4년이 되었고, 나이는 27세인데 아직도 세례를 받지 않았다.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는지 동북삼성을 많이 돌아다니면서 교회 지도자들을 많이 만난 것 같았다. 그래서 동북삼성 조선족 교회의 형편에 대해서는 소상히 아는 편이었다. ㅁ형제와 인터뷰한 것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선족 마을이 있는 곳에는 어느 곳이나 처소라도 다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조선족 선교의 방향이 교회 개척 위주보다는 교회 육성의 방향으로 나가야 함을 알 수 있다. 조선족 교회들의 당면 문제는 이단과 교회의 분열이었다. 조선족 교회에 횡행하는 이단에는 1) 백모자패 : 그들은 성경을 유대인식으로 믿고 하얀모자를 쓰고 다닌다. 2) 회개패 : 그들은 회개한다고 3일이나 5일씩 운다. 3) 방언패 : 누구나 손들고 방언을 하는데 대만에서 유입되었다고 한다. 4) 입신패도 있다.

조선족 교회가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교회분열이다. 교회가 분열되는 요인은 1) 삼자교회와 가정교회의 대립에서 온다. 2) 한 교회에 여러 목사들이 와서 순리대로 일을 하지 않고 안내인이나 특정인을 잡고 일을하니 교회가 분열된다. 3) 처소들은 어느 교회에 소속되어 있는데 한국 목사가 와서 내가 너의 교회 지어줄 터이니 나하고 손잡자고 해서 분열된다. 4) 성경상 해석의 문제로 분열이 된다. 신앙상 자기들이 갖는 관념에 따라 분열된다.

성령파는 오순절 순복음의 영향을 받고, 축복파는 미국 한인은혜교회와 김기동파의 영향을 받고 있다고 한다.

조선족 교회가 당면한 가장 큰 문제는 지도자의 양적인 부족과 질적인 부족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기적으로 현재 처소나 교회를 섬기는 지도자들을 양육해야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청년들을 교회 지도자로 양육해야 한다는 것이다.




청년들을 양육하기 위한 제안.

1) 배양(양육) 대상을 바로 선택해야 한다.

(1) 조직능력이 있어야 한다.

(2) 지식이 있어야 한다. 대졸정도가 좋다.(그러나 현실적으로 대졸정도의 지원자를 찾는 일이 쉽지 않다. 필자의 견해로는 고중필업이면 좋고, 초중필업도 가능하다고 본다)

(3) 부담이 없는 사람.(가족 부양 의무가 없는 사람) (4) 신앙의 뿌리가 박힌 사람 (5) 쓴맛 단맛을 본 후 예수를 믿은 사람.
2) 배양의 방법.
(1) 하얼삔의 000 목사의 배양 방법. 10명을 선택하여 7단계 학습을 시킨다. 1회에 1주일씩 2회에 걸쳐 학습한다. 과목은 성경과 교리, 전도, 그리스도인의 변화되는 삶등이며 목사들이 각기 다른 과목을 교육시킨다. 교육이 끝난 후 2인을 한 팀으로 하여 500원식 주어서 파송한다. 파송받은 전도대는 전도해서 교회를 세우고 한 달 동안 있으면서 예배를 드릴 상황에 이르게하고 오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 본 결과 몇 군대에서는 열매를 맺었다. 그 교회들이 지금도 예배를 드리고 부흥 성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 후에 양육해주지 못하니 어려움이 생기게 된다.

(2) 요양의 000전도사(여)의 배양 방법. 똑똑한 사람들을 불러다가 비디오 신학을 교제로 교육을 시킨다.(비디오 신학이란 아마도 한국의 비디오 선교회에서 하는 비디오신학강좌를 말하는 것 같다) 처음에는 동북삼성 여러 곳에서 청년들을 뽑고 뽑아서 불러다가 보름씩, 3회에 걸쳐 교육을 실시하였다. 교육을 실시할 때는 보안을 위해 식사 등 모든 생활을 집안에서만 하였다. 비디오 학습은 신학의 각 분야에 걸쳐 이루어졌다. 또한 S.O.L 교제를 갖고도 학습을 하였다. 학습 후에는 청년들에게 선교비를 주어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게 하였다. 좋은 결과도 있었지만 열심이 과하여 전도하여 교회를 세우는 마을에 덕이 안되는 경우 있었다.

(3) 목사들이 몇명씩 청년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양육하는 방법.
이 방법의 장점은 청년들이 목사들의 변화된 삶에 접촉하면 빨리 변화 되는 것이고, 단점은 목사들이 보고 실망하며, 성경이 아닌 목사의 말을 신앙의 중점으로 삼는 것이다.
이 경우 돈을 쓰는 방면에서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3} 배양 대상의 정황에 따라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책임을 져야 한다. 전도하고 양육해서 사역하는 모든 일을 뒷받침해야 한다.

4) 남의 터위에 교회를 세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 훈련받은 청년들로 하여금 교회 없는 곳에 가서 한달간 받은 바 은혜로 교회를 개척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부족한 점을 깨닫고, 돌아와서 부족한 점을 다시 배우게 해야 한다.

5) 청년들을 가르치고 훈련할 교사들은 중국에서 사역하고 있는 현지 조선족 교역자들을 교사로 택하여 세우는 것이 좋다. 중국에는 많지는 않지만 그럴만한 일꾼들이 있다. (000, , 등) 6) 한족 청년들을 1년에 한 명이상, 2년간 양육하여 자기 수준까지 양육한다. 그래서 자기를 대체할 수 있는 수준까지 양육한다. 한족을 1인 양육하면 후에 엄청난 열매를 맺을 수 있다.

7) 이 일을 하기 위하여 반드시 한 개의 기업을 세운다. 그 기업은 사회에서 지지를 받는 기업으로 이윤이 많은 기업이어야 한다.
이상의 제안에 대해 나름대로의 가치는 있다고 본다. 다만 제안자로서의 ㅁ형제의 신실성에 대하여 문제가 있다고 보기에 신중히 대하고 싶은 것이다. ㅁ형제에 의하면 심양의 00에는 000전도사, 요양에는 000 (여)전도사, 장춘시에는 000 집사, 길림의 교회에는 000 집사, 상지에는 000 전도사, 할빈에는 00 0, 쌍압산에는 000, 영안에는 000, 대련에는 000 전도사, 북경 청하대학에는 000학생 등과 교제한다고 했다.

8월 23일 (火)

아침에 일어나니 상쾌하다. 심양가는 와프(침대칸이 있는 기차)표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지만 구하기가 힘들다. ㅁ형제가 저녁에 구한다고 갔는데 아직 소식이 없다.

기다리고 있는데 인민학교를 빌려 집회를 한다고 해서 인근의 여러 지방에서 교인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시간도 있고해서 인민학교를 둘러 교사에 들어가보니 일곱칸이 전부인데 너무 낡아 있었고 그 중에 한 칸은 교무실이었다.

게시판에 보니 "래봉을 배우자"라 는 표어 밑에 어린이들의 실천 사항같은 것이 어지럽게 기록되어 있었다. 래봉이 누구인가? 래봉은 불쌍한 종이었다. 그런데 래봉은 팔로군에 들어가 궂은 일은 도맡아하고 좋은 일만하다가 죽었다. 그래서 중국 당국이 국민을 계도하기 위해 내 세운 인물이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래봉이 유학갔다"는 말이 인자에 희구되고 있다. 현재 중국에는 믿을 만한 사람, 본받을 만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듯이다. 그래서 사람들에 대한 실망, 공산주의에 대한 실망이 복음에 대한 중국인들의 수용성을 제고시키고 있다. 호기심을 갖고 교무실에 들어가 보니 여선생님 세분이 있었다. 마침 방학 중이어서 수업은 없었다. 그래서 학생들의 교과서도 구경하고, 교사들의 교안도 구경하였다. 교과서나 교안이나 다 한글로 기록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용은 너무나 빈약했다. 이제 중국과 국교도 맺었으니 우리 정부도 조선족 동포들의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갖고 배려를 해야 한다. 교사들에게 참고서적과 여러 가지 문헌들을 제공해주고, 한국에서 교사들에게 방학을 이용하여 강습을 하듯이 조선족 동포 교사들을 위하여 현지에 강사들을 파송하여 단기로 강습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이런 일은 외교적인 갈등을 일으킬 일이 아니라고 본다.

만약 그렇다면 외교적인 노력을 해서라도 이런 일은 시행해야 한다. 그리고 조선족 학교의 시설면을 개선하는 일에도 협조가 있어야 한다고 사료된다. 이런 일이 동포들을 구제하는 차원이 아니라 민족 공동체로서 마땅히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의 동족이기 때문이요, 그들이 교육을 제대로 받는 것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기 때문이며, 또한 실천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앞으로 우리 나라의 정치는 물론 경제도 중국을 제외해놓고는 되는 일이 없게 되어 있다. 우리가 중국과 정치, 경제적으로 교류하고 협력하는데 있어서 조선족 동포들은 아주 귀한 존재들인 것이다. 물론 그동안 조선족 동포들과 우리 사이에 서운한 일도, 섭섭한 일도, 갈등도 많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동족이고, 서로가 서로 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갈등을 넘어서 동반자의 입장에서 서로 협력해야 서로가 살 수 있다. 이 일을 정부가 할 수 없다면 민간 단체라도 나서서 해야 한다. 반드시 해야 한다.

교장선생님의 책상도 같은 교무실에 있었고, 책상이나 의자도 일반 교사의 것이나 차이가 없이 허름했다. 학교의 규모가 적어서 교감선생님은 없다고 한다. 억양이 좀 낯설기는 했지만 이곳에서 우리 글과 우리 말로 교육하는 현장을 보니 감개가 무량하다. 여 선생님 중 한 분은 정식으로 오상에 있는 사범학교를 필업하였고, 두 분은 고중을 필업한 후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한 선생님은 외부에서 와서 자취를 하고 있고, 또 한분은 친척집에서 다니고 있으며, 한 분만 자기 집에서 다니고 있었다. 세 분 선생님이 다 처녀였는데 한국 청년들에게 시집가고 싶으냐고 물으니까 계제가 되면 갈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솔깃하지는 않았다. 한국의 노총각 문제는 앞으로 더 심각해질것은 명약관화한 일이다. 현재로서는 해결할 방도가 없다. 노총각으로 늙어 죽거나, 외국인하고 국제 결혼하는 것 보다는 그래도 동족인 조선족 처녀하고 결혼하는 것이 약간의 도움은 될 것이다. 비록 문화의 차이로 인하여 갈등은 있지만, 그로인한 고통은 노총각으로 인생을 마치는 것보다는 적을 것이다. 선생님들의 월급은 150원 남짓하였다. 쌀 100kg에 120원 정도하는 것에 비한다면 얼마나 적은 금액인가? 그래서 조선족 동포들 가운데 교사들이 한국에 어떻게라도 와서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다. 학부형들에 의하면 인민학교이지만 학교에 내는 잡부금과 공과금이 상당히 많은 것 같다.

학부모들에게 부담이 될 정도라고 한다. 그럼에도 동포들의 교육열은 대단하였다. 그들 나름으로는 최선을 다하고, 과할 정도였다. 처소를 맡고 있는 집사님 손자와 외손녀도 하숙을 하면서 인민학교와 초중에 다니고 있었다. 그렇게 유족한 형편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한족들은 교육을 중시는 해도 조선족과 같이 자녀 교육에 열과 성을 다하지는 않는다. 문화는 달라도 피는 속일 수 없는가 보다.

처소에 돌아와 보니 외지에서 온 교인들이 상당히 있었다. 필자보고 설교를 하라고 하는데 할 수가 없었다. 필자가 집회를 하러 온 것이 아니고, 또한 집회를 인도할 목사님들이 오고 있는데 내가 설교하는 것은 실례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집회를 인도할 고신측 목사님 세 분을 기다리면서 교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았다. 그 중에 할렐루야 기도원을 하는 분을 만났다. 이 분은 정00 전도사라는 분인데 한 50대 중반정도로 보였다.

정전도사님은 한국에 와서 갈릴리 선교신학교에서 1년간 신학교육을 받았다고 했다. 처소장 집사님 말에 의하면 처음에는 좋았는데 변질이 되었다고 한다.
소위 성령파라고 하는데 방언을 해야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 같다.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하는 일은 주로 기도해서 병고치는 일이다. 그래서 인근의 여러 지방에서 환자들이 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정전도사님이 가르치는 성령파의 영향이 인근의 교회들에 좋지 않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 같았다. 정전도사님은 성령이 다 가르쳐 주시기 때문에 배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무엇하러 이곳엔 왔을까? 몇 몇 집사님들은 이곳에서 가까운 곳에서 왔다. 그들은 임업을 하는 마을에 살고 있는데 요즘 경기가 안좋아서 생활이 어려운 것 같았다. 물가는 오르고 월급은 오르지 않으니 사는 것이 얼마나 힘겹겠는가? 그 마을에는 조선족 동포들이 많지 않지만 그래도 몇 몇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고 한다.

알고 보니 이 집회는 ㅁ형제가 고신측 목사를 알선하여 모이게 된 것 같다. 처소장 집사님에 의하면 ㅁ형제는 집에서 일하지 않고 돌아다니면서 집에 돈을 갔다 준다고 한다. 그러니 그 돈이 무슨 돈이겠는가? 아마도 한국 목사들을 안내해 주고 받은 돈이거나 선교비조로 받은 돈이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그 돈으로 여비와 용돈을 쓰고도 집에다 생활비를 내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ㅁ형제는 처소와 00교회에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외부에 돌아다니면서 선생노릇을 하고 있었다. 사실 필자가 이곳에 온 것도 연길에서 만난 라는 가목사시에 사는 초중교사에게서 소개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집사는 교사를 그만두고 동북신학원에 시험을 보았다고 한다. 그런데 집사는 ㅁ형제를 선생이라고 불렀다. 믿은지 4년이나 되었는데도 세례를 받지 않은 청년한테 '선생'이란 칭호를 붙였다. ㅁ형제는 아마도 세례를 못받은 것이 아니라 안받은 것 같다. 그러니 그가 동북삼성에 다니면서 교회와 교역자들에게 어떻게 행세하며 다녔는지 알만하다. 필자가 알고 있는 감리교 목사님이 길림성 어느 곳에서 종교국의 허락 아래 조선족 처소지도자들을 150명 모아놓고 교육울 하게 되었다. 그런데 목사님 일행을 안내해준 집사님의 아들의 호주머니를 보니 백달라짜리 지폐가 한 웅큼이나 되었다고 한다. 이들이 누구이겠는가? 선교 브로커가 아니겠는가? 이 곳에서 집회를 할 고신측 목사님들도 선교 브로커에 연결된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집회는 학교 교실 한칸을 빌려서 하기로 되어 있었다. 교인들은 교실에 모여있고, 강사 목사님들은 안 오고 그래서 할 수 없이 필자가 한 시간 설교를 하게되었다. 교실에 들어가 보니 교단은 강단이 되고, 교탁에 십자가와 성구를 그린 보를 둘러서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한 두어시간 동안 성령에 대해서 설교를 하였다. 설교를 하면서 살펴보니 은혜를 받는 사람들도 있있고, 전혀 반응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다. 아마도 전혀 반응이 없는 사람들은 ㅁ형제가 손을 써서 모집해 놓은 사람들 같았다.

처소에 돌아와 점심을 먹은 후에 고신측 목사님들이 세 분 도착하였다. 수인사를 한 후 대화를 하는데 서상준이라는 목사님은 상당히 경직되어 있었다. 전에도 이곳에 왔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번에도 이 목사님이 인도하여 일행이 이곳에 온 것 같았다. 나는 친절하게 여러 가지 정보를 제공해 주어도 한 분 후덕하게 생긴 목사님만 좋은 반응을 보이고 다른 두 분 목사님은 별 반응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더 이상 이야기할 필요를 못 느껴 가만히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 보니 경남노회에 소속한 목사님들로서 중국에 여행차 왔다가 지나가는 길에 설교를 한 번 하고 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교인들은 성경 진리에 대한 가르침을 원하는데 목사님들은 한국에서와 같이 세 분이 한 번씩 설교하고 내일 떠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그러고는 한국에 와서는 선교했다고 이야기 할 것이 아닌가? 세분 목사님들은 처소에 왔으면 처소를 맡고 있는 집사님에게 배려를 해야 하는데 전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가방을 갖고 왔는데 처소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는지 굳이 ㅁ형제네 집으로 갔다 놓겠단다. 이것을 보면서 처소장인 집사님은 세 분 목사님들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 간파하였다. 선물을 가져왔는데 ㅁ에게 주고 싶지 자기에게는 주고싶은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해 안되는 것이 있다. 모여온 교인들은 처소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하게 하고는 처소장으로 봉사하는 집사님에게는 나 몰라라 하면서 어떻게 ㅁ에게만 선물과 사례를 할 수 있는가? ㅁ에게 놀아나는 목사님들을 보면서 서글픈 마음에 나까지 우울해졌다.

시간이 되어 싸룬차, 트럭을 개조한 차등 여러 가지 차를 타고 목단강역에 도착하여 ㅁㅁㅁ을 만나보니 차표를 구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돈을 돌려 받고 헤어졌다. 돈을 좀 주고 싶었지만 주지 않았다. 기차에 탄 후에 조금 주고 올 걸 하고 후회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역에서 짐을 맡아 보관해주며 표를 알선해주는 조선족 아주머니를 만나서 웃돈을 조금 얹어주고 심양행 콰이차 좌석을 구할 수 있었다. 여기서도 역시 동포애를 느겼다. 저녁으로 포자를 사갖고 기차에 오르니 6시가 넘었다. 심양에 도착할 때까지 약 15시간 걸린다고 한다. 앞이 까마득하다. 어떻게 15시간을, 그것도 밤에 앉아서 가나? 그러나 별 수 있는가? 포자로 저녁을 먹고 0형제와 대화하다가 자는 둥 마는 둥 어설픈 잠이 들었다.

8월 24일 (水)

아침에 깨어보니 기차는 달리고 있었다. 하얼삔과 장춘을 이미 지나왔다. 그럼에도 심양은 아직 멀었다. 아침을 컵라면에다 소시지를 넣어서 먹었다. 처음에는 소시지가 비위에 맞지 않을 것 같아서 먹지 않았는데 먹고 보니 먹을만하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길이었다. 예정 시간보다 두 시간이 더 걸린다고 한다. 그래도 명색이 콰이차(한국의 특급정도에 해당됨)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가? 이유인즉 이러했다.

흑룡강 기차가 요녕성에 들어오면 차별대우를 받는다고 한다. 별일 없으면 상관없지만 요녕성의 기차와 철로를 놓고 다투게되면 요녕성의 기차에 우선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왕 늦었으니 더 늦어도 상관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 시간이나 에정시간보다 늦게 된 것이다. 지루하고 피곤한 시간이 지나고 11시가 넘어서 심양북역에 도착하였다. 큰 가방을 기존처에 맡기고 점심을 해결하려고 역전 근처에 있는 북조선 냉면집으로 가서 냉면과 짜장면을 시켰다. 연길에서 먹은 냉면을 기대하면서 냉면을 시켰는데 나온 냉면은 글자 그대로 냉국수였지 내가 아는 냉면은 아니었다. 짜장면도 내가 아는 짜장면과는 닮은 것이라곤 국수가 들어 있다는 것 뿐이다. 그래도 나는 먹었는데 0형제는 조선족이면서도 먹지를 못했다. 괜히 속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양에서 머무를까 하다가 곧바로 단동으로 가기로 하였다. 심양남역으로 가는 버스를 탔다.

남역에서 단동행 기차표를 샀는데, 여기서는 공항세같이 대합실 사용료가 첨가되어 있었다. 대합실에 에어콘이 가동되니 그 비용을 승객들이 부담하라는 것이다. 참으로 중국인 다운 발상이다. 기차를 타고 난 후 0형제가 와프표를 사왔다. 그런데 내 자리가 2층과 3층이 아닌가? 2층에 가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0형제가 복무원한테 자신이 의사이고, 나는 환자이니 아래층을 달라고 사정하여 아래층을 배정받았다. 피곤하고 졸리워서 곧 바로 꿈나라로 직행했다. 깨어보니 단동 역인데 시간은 9시가 되어 있었다. 여관을 정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한 참 헤메이다가 괜찮은 빈관을 찾았다. 60원짜리인데 괜찮았다. 무엇보다도 따듯한 물로 샤워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비록 하루에 한 시간 밖에 시간을 안주지만 이 정도면 만족할 만하였다. 목욕 후에 출출해서 거리에 나가 꼬치로 된 쇠고기 구이를 사먹었더니 요기가 되엇다. 빈관에 돌아와 잠자리에 누우니 사르르 잠이 온다.

8월 25일 (木)

아침에 일어나서 조선족 식당을 겨우 찾아서 식사를 하게되었다. 음식이 입에 맞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먹을만 하였다. 단동에 있는 조선족 교회를 찾아보려고 하다가 찾지 못하고 우선 압록강 구경을 하기로 하였다. 걸어서 강안에 이르니 공원이 있고 입장료를 받는다. 공원을 구경하면서 배타는 곳에 가보니 손님이 차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배삯은 5원이었다. 배에 타서 뒤쪽으로 가보니 60대의 한국인 어른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눠보니 작년에는 2개월에 걸쳐 러시아를 여행했고, 올 해에는 6월 중순부터 중국 각지를 여행중이라고 했다. 보기에 이 분은 사업가로서 은퇴한 분이 아닌가 싶었다. 한참 후에 승객이 다 타자 배는 강십을 향해 출발하였다.

강은 그렇게 넓지는 않았다. 한강보다 좁은 것 같았지만 강심은 더 깊은것 같았다. 강건너에 북한 땅이 보였다. 어서 빨리 북한쪽 강안 가까이 가보고 싶었다. 배가 지름길을 가려고 하다가 얕은 곳에 걸려 한 20분 정도 애를 먹었다. 겨우 빠져 나와 정상적인 수로를 따라 북한 쪽 강변에 근접하여 지나갔다.

시력이 좋지 못한 내 눈에도 동포들의 모습이 분명하게 보였고, 북한 군인들과 손을 흔들며 인사를 나눌 수 있었다. 감개무량했다. 몇 발짝만 더 가면 북한 땅인데 그곳을 갈 수 없는 내 마음은 심히 서글펐다. 북한 출신이 아닌데도 그러한데 북한 실향민들이야 더 말해 무엇할 것인가? 보트를 타면 더 가까이 갈 수 있는데 시간도 없고 해서 그만 두었다.

배에서 내려 북한쪽을 향하여 망원경으로 보기도 하고, 국경선 표시석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기도 하였다.

공원을 구경하면서 압록강교를 보려고 한 참을 걸어 갔다. 6.25때 폭격으로 파괴된 압록강교에 오르는데 20원씩이다. 압록강교는 거의 반쪽만 남아 있는데 관광하기에 좋게 시설을 해 놓았다. 압록강교가 이렇게 된 유래를 적어 놓은 안내판이 있어서 사진도 찍고 자세히 읽어 보기도 하였다.

다리에 올라 끝까지 가보면서 주위를 둘러 보기도 하고, 북한쪽을 보기도 하고 새로 놓은 다리 위로 다니는 트럭들을 보기도 하였다. 중국쪽에서 북한쪽으로 가는 트럭마다 무언가를 가득 싣고 갔다. 배를 탔을 때도, 다리에 올랐을 때도 단동쪽의 풍경과 신의주쪽의 풍경이 전혀 달랐다. 단동쪽은 살아 움직이는 풍경이었고, 신의주쪽은 어두 침침한 풍경이었다.

단동 시내에서 가까운 전망대에 가면 신의주 풍경이 일목요연하게 보인다고 해서 가보려고 했는데 몸이 좋지 않아서 그만두었다. 빈관에 돌아오니 11시가 넘었다. 세면을 하고 좀 쉬고 있는데 복무원이 와서 어서 나가란다. 12시가 안됐는데도 막무가네로 나가라고 했다. 툴툴거리니까 0형제가 여기는 서울이 아니고 중국이라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빈관에서 나왔다. 점심 때가 되어서 어제 저녁에 보아둔 북조선 냉면집에 갔다. 이번에는 심양북역에서 먹었던 냉면과는 다르겠지 하고 기대를 크게 갖었는데 이번에도 역시 '역시나'였다. 겨우 냉면을 먹은 후 단동역으로 갔다. 심양가는 기차표는 완행 밖에 없었다. 그것도 좌석표는 없었다. 8시간 가까이 가는 기차를 서서간다고 생각할 때 아찔했다. 기차에 오르니 다행히 좌석이 있어서 앉아서 가게 되었다. 시간도 있고 좌석도 잡아서 맥가브란의 '교회성장이해'를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지루하면 0형제와 같이 조선족 선교에 대해 허심탄희 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나한테는 상당히 도움이 되었다.

조선족 교회는 지금 앞으로는 교인들이 들어 오고 뒤로는 나간다는 것이다. 전도를 해서 교회에 나오지만 기성교인들이 사는 삶을 보고 실망해서 교회에서 나간다는 것이다. 또한 가정교회에 분열이 생기는데, 이는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전보다 잘 살게된 것을 보고 교인 가운데 돌똘한 사람들이 왜 너만 축복을 받느냐 나도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 교회를 세우게 된다는 것이다. 교회를 세우고 섬기는 것이 하나의 생활 방편이 될 때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를 생각할 때 모골이 송연해 진다.

0형제는 전도에 열심이다. 기차 여행을 할 때 그냥 있는 법이 없다. 단동에서 심양에 가는 동안에도 네명에게 전도를 했다. 두명은 믿겠다고 결신을 했고, 한명은 복음에 대해 호감을 표시했고, 한 명은 시간이 안되어 전도지를 받아갔다. 0형제가 이렇게 열심히 전도를 하는 것은 나에게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구령의 영에 불타기 때문이었다. 임성찬 전도사가 지난 2월에 왔을 때에도 천진에서 택시 기사를 전도하여 믿게하였다. 그리고 그와 성도의 교제를 나누며 양육하는 것을 보았다. 0형제가 신앙 연조가 얕지만 이렇게 열심히 전도하고, 전도한 사람을 양육한다면 한족 선교에 크게 쓰임받게 될 것이다. 물론 전도만 하고 내버려 두어서는 안된다. 전도하고, 전도한 사람들을 순회하면서 양육하고, 그들로 하여금 교회를 세우게 하고, 멘토해 준다면 훌륭한 개척 선교가 될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려면 0형제도 양육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도 대책을 세워 놓았다. 주님이 0형제를 통해서 하실 일이 기대된다.

시간이 흘러 소가툰을 지나게 되었다. 원래 소가툰에 있는 000전도사를 찾아 갈려고 내리려다가 너무 피곤해서 내일 오기로 하고 그냥 지나쳤다. 심양남역에 도착해 보니 9시가 되었다. 그래도 이번 기차여행은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오토바이 비슷한 싸룬차 뒤에 둘이 타고는 서탑거리로 갔다.

서탑교회를 보고 건너편에 있는 조선족 식당 거리에서 쇠고기 불고기를 먹었다. 쇠고기 불고기는 한국식 불고기가 아니라 그야말로 불고기였다. 생고기를 숯불에 구워먹는데 그냥 먹을 만 했다. 실컷 먹었는데도 가격은 비싸지 않았다. 숙소를 찾아 보았지만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호텔은 너무 비싸고, 값싼 합숙소는 안전이 문제가 있을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택시를 타고 심양북역에 갔다. 겉으로 괜찮은 초대소에 들어갔다. 숙박비는 40원으로 쌌지만 시설이 말이 아니었다. 방문은 잘 닫히지 않았고, 수도시설도 형편없었고, 결정적으로 화장실이 없었다. 소변만을 해결할 수 있지 대변은 해결할 길이 없었다. 목단강의 20원짜리 초대소도 이보다는 나았다. 세수를 하고 누웠지만 도선생이나, 강선생이 오실 것만 같아 잠이 안 온다. 주의 보호하심을 생각해 내고서야 잠이 들었다.

8월 26일 (金)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숙소를 옮길 생각부터 하였다. 마침 역전 근처에 장춘초대소라는 괜찮은 초대소가 있어서 그리로 가기로 하였다. 70원에 침대 네개 짜리 방이었다. 하루에 한번 저녁에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입구에는 공안원이 보초를 서준다. 이만하면 좋지 않은가? 긴장해서 못잔 잠을 좀 더 자고나서 000선생에게 연락을 해보나 연락이 되지를 않는다. 그래서 먼저 00교회 ㅂㅂㅂ목사님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00교회에 도착하여 사무실에서 목사님을 찾으니 수업중이라고 하였다.

00교회는 옛 예배당이 옆에 있고, 새 예배당이 웅자를 자랑하면서 서 있다. 서울에 갖다 놓아도 외형으로는 꿀릴 것이 없는 번듯한 교회였다. 00교회는 1913년 5월 봉천 대화구 대화가 15-3(현 심양시 화평구 시부대로 33-1)에서 20여명의 신자로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義州교회의 도움을 받았으며 평북노회에 속해 있다가, 뒤에 義山노회가 분립되자 의산노회의 관할로 들어갔다. 1935년 10월 22일 奉天노회가 창립되자 봉천노회의 중심교회가 되었고 나아가서는 동북지역(만주)에 있는 한인교회 전체의 핵심역할을 맡았다. 1945년 8월 해방이 되자 귀국하려는 동포들이 봉천으로 집결해서 00교회는 흥왕하는 모습을 보였으나, 동포들의 대거 귀국과 중국의 공산화로 00교회는 가시밭길을 걸었다. 1951년까지는 남은 교인 20여명이 예배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1951년부터는 교회에서 쫓겨나 東敎會(이성봉목사님이 시무하던 성결교회)에서 중국 침례교회 교인들과 예배를 드렸다. 1957년 7월부터는 燕京神學院을 졸업한 ㅂ전도사님의 인도로 따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으나 문화혁명이 일어나 예배가 금지되었다. 1970년대 후반기 중국의 개방정책에 의해 교회의 문이 열리게 됨에 따라 1979년 12월, 예배금지 13년 만에 중국 안에서 소수민족을 위한 최초의 공인교회로 문을 열게 되었다. 이후 00교회는 날로 부흥성장하여 예배 처소의 협소를 해결하기 위하여 새 예배당을 건립에 착공하여 6층 4,000 평방의 예배당을 600만원을 들여 짓고 1993년 7월 3일 헌당 예배를 드렸다. 여기에는 00교회 교인들의 뜨거운 헌신과 예장통합측의 헌신적인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ㅂ목사님은 심양여중을 졸업하고, 19 53년 연경신학원에 입학하였다가 1957년 졸업과 동시에 00교회 교인들의 예배를 인도하였다. 1964년까지 00교회 교사와 집사로 봉사하였다. 문화혁명의 돌풍이 일어나 교역자들이 모두 체포, 투옥될 때 ㅂ목사님도 1년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뤘는데 시멘트 바닥에서 기거하며 매를 많이 맞아 병을 얻었다. 이 병의 휴유증이 지금도 목사님을 괴롭히고 있다. 그 뒤에는 공장에서 프레스 공으로 일하다가 교회 문이 열리게 되어 복직하였으며 1981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목사님은 1948년 결혼하였으나 자녀를 생산치 못하셨고, 부군되시는 분이 얼마 전에 소천하셔서 지금은 혼자 사신다.

한 시간쯤 기다린 후에 목사님을 만날 수 있었다. 2년제로 본 교회 집사들과 처소교회 지도자들, 그리고 차세대 지도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강의를 하고 나오시는 중이었다. 손에는 두툼한 교안이 들려 있었다. 목사님의 안내로 응접실에 들어 갔다. 응접실은 상당히 넓었다. 목사님이 친히 생수를 따라 주셨다. 그리고 묻는 말에 친절하고 자상하게 말씀해 주셨다.

동북신학원은 원래 4년제였는데 교역자 수급이 화급해서 지금은 한시적으로 2년제로 운영하고 있다. 동북신학원은 중국 13개 신학원중에 조선족 반이 있는 유일한 신학원이다. 물론 남경 신학원에도 조선족이 있지만 그곳은 수업을 중국어로 한다. 동북신학원 졸업생들은 1기 졸업생 53명 중 조선족 5명, 2기 8명, 3기 23명(이때부터 조선족이 따로 수업하였음)등 모두 36명이고, 남경신학원 졸업이 7명이다. 그래서 도합 43명이 조선족 교역자 가운데 정식으로 신학원을 졸업한 사람들이다.

이번에 졸업한 23명은 길림성에 6명, 흑룡강성에 5명, 요녕성에 9명으로 분포되어 있다. 연령층은 24세부터 49세이지만 주로 30세부터 49세이다. 그리고 조선족에는 목사가 12명이다.(1994년 11월 현재) 길림성에 3명, 흑룡강성에 3명, 요녕성에 5명, 북경에 1명이 있다.

길림성에는 유두봉(연길교회), 박용호(용정교회), 박서영(연길 기독교전도원배양 중심) 목사가 있고, 흑룡강성에는 고동욱(미국유학중), 이미란(하얼삔 남강교회), 유영노(목단강 평안교회) 목사가 있으며, 요녕성에는 오애은(심양 서탑교회), 석은복(소가툰교회, 싱가포르 유학 중), 지인화(동북신학원), 박계성(전진교회, 동북신학원), 이창길(무순) 목사가 있고, 북경에는 장진만 목사가 있다. 이전에 오애은 목사님과 김성하 목사님만 계셨던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이다. 그러나 조선족 교회가 필요로 하는 교역자의 수급에는 턱도 없는 형편이다.

동북신학원에는 이번에 42명의 신입생들이 입학한다. 이들은 동북삼성에서 고루 고루 뽑았다. 이들의 학력은 대부분이 고중출신이고 전문대학 출신과 대학출신도 상당수 있다. 이로 볼 때 정규 신학원을 지원하는 조선족 신학생들의 학력은 우려할 정도는 아니다. 아마도 앞으로는 더 나아질 것이다. 이들은 교회의 추천과 공안국에서 신원 조회를 거쳐 신학원에서 입학 사정을 하여 합격 여부를 결정한다. 이들의 등록금은 1년에 1,300원이고, 출신교회에서 등록금을 부담하고, 그럴 형편이 못되는 학생은 신학원에서 도와주는 것 같다. 신학원에는 이사회가 있어서 신학원을 운영한다. 학생들은 00교회 2층에 있는 임시교사에서 수업을 하는데 교실이 너무 적다. 40평방(13평 정도)에 신학생 40여명이 수업을 하는 것을 상상해 보라. 지금은 여건이 갖추어지지 않아서 2년에 한 번씩만 신입생을 뽑지만 건물, 교수, 학비등 여건만 갖추어지면 여러 방면에서 개선이 될 것이다. 동북신학원은 성서신학면은 그런대로 이끌어 가는데 조직신학, 교회사, 기독교 윤리학, 실천신학등이 어려운 편이다. 그 동안 장신대 등에서 정부의 묵인 하에 교수를 파송하여 강의를 하였는데 문제가 있다. 그래서 가을부터는 정부의 공식 허락을 받아 장신대 교수들이 방문하여 부족한 과목들을 강의하려고 한다.( 현재 이 일은 시행되고 있다.)

조선족 신학생들을 한국에 초청하여 교육하는 것은 문제가 많다. 물론 교수요원으로 육성하려면 그렇게 하는 것도 좋지만 그렇지 않은 한 조선족 교회의 교역자나 지도자들은 중국 현지에서 양육되고 교육되어야 한다. 김인철이라는 동북신학원 1기 다니다 퇴학당한 신학생이 있었는데 그가 한국에 와서 총신대 신대원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아 중국에 귀국하였다. 왠만하면 오목사님이 신학원 교수로 등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목회는 하지 않고 공안원들과 결탁하여 조선족을 상대로 한국에 나가는 일을 알선하는 브로커로 전락하였다.

그가 신학원에서 퇴학 당한 것도 사실은 윤리적인 문제 때문이었다고 한다. 후에 들은 이야기인데 한국 목사들이 중국에서 그에게 여러번 당하였다고 하니 조심해야 할 인물이다. 또한 다른 경로를 통해 최근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그는 지금 교도소에 있다고 한다. 필자가 한국에서 어떤 형태로든 신학교육을 받고 있거나, 받은 조선족 동포들을 몇 명 만나서 인터뷰를 해 본 결과 그들은 거의가 불법 체류자였다. 물론 그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제는 필자의 관찰에 의하면 변질되었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한국에서 고급 기독교를 접하기 보다는 타락하고 세속화된 기독교를 접해서 물이 들었고, 돈맛을 보게 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미 세속화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 귀국해서 그 곳에 적응하기 힘들고, 또한 현지에서 잘 받아 주지를 않는다. 한국에 와서 예수를 믿고, 고급 기독교를 접하고 저급 기독교를 접하지 않은 사람들은 중국에 가서 교역자는 아니지만 헌신적으로 일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이것은 예외이지 일반적인 사례는 아니다.

평신도 지도자들은 서탑교회에서 2년 동안, 계절제로 하여 1기를 졸업시켰다. 그래서 서탑교회와 교통하는 요녕성의 처소교회 지도자들은 대부분 교육을 받았고, 지금은 2기를 교육 중인데 처소교회 지도자들은 물론 차세대를 이끌어 갈 청년들도 교육을 받고 있다. 그리고 이들 중에서 가능성이 있는 지도자 몇 명을 뽑아서 동북신학원에 입학시켰다. 이것은 아주 좋은 교육 방법이라고 사료된다. 동북신학원에는 연길에 있는 전도원 배양중심(우리의 성서학원 비슷한 것, 처소지도자들을 교육한다) 출신들도 진학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다. 처소교회 지도자들의 교육은 출신교회와 서탑교회가 그 비용을 부담하는 것 같다.

동북삼성의 조선족 교회는 지금 대략 길림성에 100교회, 흑룡강성에 10여 교회, 요녕성에 100교회 정도 되고, 처소는 삼자와 가정을 합쳐 대략 길림성에 1,000 처소, 흑룡강성에 2,000처소, 요녕성에 4-500 처소 정도 된다. (총신대 김성태 교수님은 교회 형태를 갖춘 교회를 400개, 처소를 6-7,000개 정도로 추산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김성태 교수가 직접 조사한 것은 아니고 요녕성의 어떤 목사님이 청년들을 보내서 동북삼성에서 교회 형태를 갖춘 교회를 조사해 본 것이라고 한다. 처소수는 대략 김교수님이 추정해 본 것이다. 또 다른 견해는 홍콩에서 만난 모 선교사님은 교회를 약 200여개, 처소를 약 2,000여개 정도로 추정하고 있었다. 현 상황에서는 정확한 교회와 처소의 통계는 하나님 만 아시는 것 같다.)

조선족의 복음에 대한 수용성은 높은 편이다. 이는 1) 중국의 개방정책, 2) 기독교의 위치가 올라간 일, 3) 그리스도인들의 변화된 생활의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족의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저하될 수 있는 요인도 있다. 그것은 조선족들이 돈에 대한 관심이 커져 간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족이 조선족보다 복음에 대한 수용성이 높은데, 이는 "예수 믿으면 복받는다."는 "福"의 개념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신앙과 신학면에서는 조선족 교회가 한족교회보다 7-8년은 앞선 것 같다. 한족교회가 조선족 교회에 도움을 바라고 의지하는 경우가 많다. 조선족 교회에서 한족들이 조선족 교회와 다른 시간에 예배를 드리기도 한다. 그래서 한족교회가 자립하려고 힘을 안쓰게 되기도 한다.

조선족 부락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교회(처소)가 있다. 조선족 교회는 현재 왕성하게 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장하고 있다. 농촌 교회는 현상을 유지하는 상태이고 도시교회는 계속적으로 성장한다. 특히 교역자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는 계속적으로 성장한다. 3-4년 전부터 도시화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도시로 몰려들고 있다. 4-5년 후에는 도시화 현상이 더 심화될 것이다. 앞으로 농촌교회는 어려워 질 것 같고, 조선족이 많이 모여있는 도시교회는 계속 성장할 것이다.

조선족 교회의 예배당을 건축하거나 매입하는 데 조선족 교회 자력으로만은 불가능하다. 농촌은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수준에서 기존 건물을 매입해서 수리하여 사용하는 것이 좋고, 도시는 조선족의 규모를 감안하여 건축하는 것이 좋다. 농촌의 경우 총비용의 80-90%정도를 후원하는 것 좋고, 도시는 70-80%를 후원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처소지도자들은 생활비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교역자들은 생활비를 받는데 농촌의 경우 어려운 곳은 80-100원 정도를 받고, 150-200명 정도 모이는 교회는 150원 정도를 받는다. 연세 지긋하여 집체에서 연금을 받는 교역자들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지 않고 젊은 교역자들은 교회에서 생활비를 받고 있엇다. 특이한 것은 교회 체제를 갖춘 공인교회 교역자들보다 가정교회 지도자들이 훨씬 많은 생활비를 선교비로 받는다는 점이다. 삼자교회 교역자들이 가윗돈이 생기는지는 알 수 없지만, 가윗돈이 생기지 않는다면 조선족 가정교회 지도자들의 사역의 동기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족 교회의 한족 선교 역량은 그리 높은 것은 아니다. 교역자의 경우 자기에게 맡겨진 처소들도 다 돌보지 못하고 있는데 한족 선교에 헌신할 여력이 없는 형편이다. 이번에 졸업한 23명의 동북신학원 졸업생 가운데 한족 선교에 헌신하려고 하는 교역자는 한 사람 뿐이다. 또 한 사람은 한족 선교에 대한 생각은 있지만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다. 그리고 23명의 졸업생 중 한족 선교를 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춘 교역자는 4명 정도된다. 조선족 중에 도시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중국어 구사에 별 지장이 없고, 조선족 2,3세는 한족 선교에 헌신할 수 있는 가능성은 있다. (이상에 기술한 것은 오목사님과의 대화, 그리고 11월 말 장신대에서 인터뷰한 동북신학원 출신 교역자들과의 인터뷰를 종합한 것이다.)

오목사님은 예배당 건축보다는 인물 양성에 주력한 분이다. 적어도 요녕성에서 어떤 형태의 선교를 하려고 하든 오목사님과 상의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교회 청년의 안내로 교회 내부를 구경하였다. 6층은 본당이고, 5층은 다용도로 쓸 수 있는 본당과 같은 규모의 교육관이고, 4층에는 교회 각부서들과 게스트 룸등 숙소가 있고, 3층에도 숙소와 사무실 등이 있었다. 2층에는 동북신학원 교실 한 칸과 신학생들 숙소가 있었고, 1층에는 식당과 은행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하실은 없었다. 중국 건물들은 지하실을 만들지 않는 것이 특징 인것 같다. 옛 예배당도 그대로 있어서 여러 모로 사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6층이라 그런지 엘리베이터도 있었다. 최고의 시설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이정도만 되어도 서탑교회가 요녕성은 물론 동북삼성의 중심교회로서 역할을 하는데 아쉬운대로 감당할 수 있으리라고 사료된다. 사실 서탑교회는 교인들의 헌금을 교회 건축을 위해 사용하고 기본적인 재정 사용외에는 상당 부분을 동북삼성에서 도움을 청하러 오는 교회들에게 베푸는 것 같았다.

서탑교회를 나와서 교회 바로 옆에 있는 냉면집에 들어갔다. 얼마나 사람이 많은지 돗대기 시장같았다. 조선족만 오는 것이 아니라 한족들도 많이 오는 것 같았다. 값은 2월 50전이라 아주 싼데 맛은 소문과는 달리 별루였다. 식당 안에 자리가 만원이라 길가에 서서 냉면을 먹었다. 마치 거지와 같이. 초대소에 와서 돌아와서 오후는 쉬기로 하였다. 만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연결도 안되고 요양애 가서 000선생을 만나려고 했는데 내일로 미루고 오후는 쉬기로 하였다. 쉬게 하시는 것도 주님의 인도하심이라 생각했다. 서탑거리에 가서 불고기로 포식을 한후 돌아와서 샤워를 하니 날아갈 것 같다.

8월 27일 (土)

아침에 일어나 000선생에게 전화를 하니 마침 연결이 되었다. 얼마나 반가웠든지. 그러나 기대했던 0선생은 귀국하였고, 새로온 ㅁ선생이 나왔다.
나는 ㅁ선생을 모르는데 ㅁ선생은 나를 알고 있었다. 부랴 부랴 택시를 타고 00 거리로 가서 ㅁ선생을 만나 00교회 1층 로비에 가서 이야기를 하였다. ㅁ선생과 간단히 대화를 나누었다. 0선생 후임으로 온 ㅁ선생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자리가 잡히는 대로 새로온 선생부부와 협력하여 조선족은 물론 한족 지도 훈련에 매진하려고 한다. 보안상 자세한 이야기는 기록할 수가 없다.

어제 전화를 해도 연결이 안된 00회사 총경리인 000집사의 전화가 고장인체로 수리가 안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00회사를 찾아가는 길을 ㅁ선생에게 알아가지고 역에서 00행 버스를 타고 00교회를 찾아갔다. 00교회는 000목사님이 시무하는 교회로 교외에 있었다. 00교회가 위치한 곳은 완전한 농촌도 아니고 도시도 아닌 어정쩡한 곳이었다. 예배당은 그런대로 아담했다. 목사님은 신학원에 출타중이었다. 그 교회 청년에게 물어 보니 교인은 약 70여명 정도 모이는 것 같았다. 사무실에서 근 한 시간을 기다리고 있는데 0집사님이 왔다. 수인사를 한 후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0집사님은 중국에 온 지가 5년이 되었다. 그래서 중국에서 산전 수전을 다 겪었다. 처음에 사업을 시작했다가 쫄딱 망했다. 그래서 남의 밑에 가서 공장장 노릇도 했다. 그러다가 다시 재기해서 현재 다른 동업자와 함께 00회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통역해 주는 조선족만 있으면 공장도 직영해서 건축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심양에는 한국인 기업들이 많이 진출해 있는데 협회에 가입한 기업체는 120-30 업체 정도 된다. 중국 진출 기업체 책임자들은 돈을 벌려고 애를 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중국 관리들과 노동자들한테 뜯기지않을까 노심초사한다. 그들의 경험에 의하면 조선족은 최소한의 인원만 채용하고 노동자의 대부분을 한족을 채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0집사님은 조선족을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역시 사업은 한족을 채용해야 된다고 자신도 지금은 생각을 바꾸었다고 한다. 한족은 묵묵히 시키는데로 성실하게 일하는데 조선족은 그렇지를 못하다. 조금만 대우를 잘 해 주는 곳이 있으면 미련없이 떠나간다. 그래서 인력 관리에 여간 애로 사항이 많은 것이 아니라고 한다.

00회사는 공원 160명에 직원 20명 등 180명 규모의 회사인데 한국인은 총경리 외에 두 명이다. 한국인 세 사람의 급여가 전 종업원의 급여보다 많다고 하니 여간해서는 한국인 직원을 채용할 수 가 없다. 점심 때가 되어 총경리 사택에 올라 가서 식사를 하게 되었다. 식사는 조선족 아주머니가 책임을 지고 있었다. 점심은 카레라이스였는데 그래도 김치가 있어서 잘 먹었다. 한국에는 주말 부부가 있지만 이곳에는 계절 부부가 있다. 0집사는 1년에 두 번 귀국하고, 부인이 두 번 중국에 와서 같이 지내다 간다. 다른 업체들은 가족이 와서 같이 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점심 후에 총경리실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오래 간 만에 마셔보는 커피였다. 마침 0형제가 의사여서 0집사를 진찰해 보니 건강 상태다 상당히 좋지를 않았다. 이 곳에 와 있는 업체 관리자들은 여러 가지 스트레스가 많아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고 한다. 0집사는 한국교회 목사님들이나 교인들이 중국 교회의 현실을 잘 모르고 있는 것을 마음 아파하고 있었다. 0집사님은 삼자교회에 다니고 있고 직공들도 삼자교회에 다니게 해 주고 있다. 그곳에 가정교회가 없기 때문에도 그렇지만 삼자교회에서 다른 점을 찾지 못하기 때문에도 그렇다. 삼자교회가 변하고 있는데 한국에서는 옛날 생각만 하고 있어서 그럴 것이다. 00회사에도 교인들은 있다. 0집사가 전면에 나서서 전도한 것이 아니고 공원 중에 믿음이 있고 헌신적인 조선족 공원이 있어서 자체 내에서 전도할 수 있게 여건을 만들어 주고, 주일은 물론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가도록 해주고 수요일도 에배를 드리러 가도록 해주었다. 그리고 물심 양면으로 회사 내에서 전도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래서 전도의 열매가 많이 맺혔었다. 그런데 믿는 공원들이 지혜롭게 처신하3지 못하고 너무 과하게 신앙 생활을 하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외부에서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 데려간 직원들이 이의를 제기하고 나선 것이다. 주일에 교회에 가는 것은 상관 없지만 회사 내에서 너무 과하게 신앙 생활을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만약에 이 과도한 신앙 생활을 제지하지 않으면 자기가 귀국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지급은 회사 내에서의 신앙 생활과 전도 활동에 약간의 제지를 하고 있다. 주일에 교회에 나가고 쉬는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전도하는 것은 허용하지만 일하는 시간에는 하지 말도록 하고 있다. 헌신적인 고원이 있을 때 조선족은 물론 한족 전도도 쉽다는 것이 입증된 것이다.


더군다나 농촌에서 도시와 공장으로 조선족 젊은 인구의 이동이 심화되고 있는 이 때에 헌신적인 기업주나 회사 책임자가 마음만 먹으면 전도하기가 쉽고, 이 일도 반드시 은밀하고 지혜롭게 해야 할 중국 선교의 중요한 기회임에 틀림 없다. 0집사는 이 일로 인하여 심양시 공안국에 불랙리스트에 올라 있다. 경고도 여러 번 받았다. 그래서 지금은 은연 자중하며 은밀하게 공원 복음화를 위하여 기도하고 뒤에서 협조하고 있는 중이다.

0집사는 한국 기업체를 발판으로 해서 선교사들이 중국에 정착하려는 시도에 대해서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전에 0집사가 남의 밑에서 일 할 때 사주가 장로님이라 어떤 목사님을 직원으로 받아들이라고 해서 받아 들였는데, 이 목사님이 지혜롭지 못하게 그리고 조심성 없이 행동하다가 길림 근방에서 공안원에게 잡혀서 추방 당한 일이 있다. 중국 진출 기업체의 사장이 아무리 신앙이 좋고 헌신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선교사들이 자기 회사를 발판으로 헤서 중국에 정착하는 일에 대하여 반대할 것이라고 했다. 크리스챤 기업가는 성도요 주님께 헌신하기를 원하지만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해 중국에 온 것이지 선교를 위해 온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선교사들에게 힘이 될 수 있는 일들은 힘이 되어 주지만 사업에 막대한 지장을 받으면서까지 그럴려고는 않는다고 하였다. 한국 선교사들이 중국에 진출하려면 한국 기업을 이용하려고 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신이 투자해서 사업을 하는 것이 났다고 한다. 약 5만불 남짓이면 페스트 푸드등 사업을 하면서 선교 사역을 수행할 수 있는 길이 많이 있다고 한다.

00회사에 와서 의외의 소득을 얻었다. 역동적으로 조선족 교회 지도자 훈련을 하고 있는 분을 알게 되었다. 처음에는 접선하기가 어려웠지만 우여곡절 끝에 000집사(조선족)을 만나게 되었고, 그의 안내로 000 선생댁에 갈 수 있게 되었다. 000집사의 집은 양옥집으로서 조선족 집으로서는 괜찮은 편이었다. 신앙 서적도 여러권 있었고, 한국에서 출판된 신앙서적과 설교집 등이 여러권 있었다. 0집사는 아프리카에 갔다가 한국 선교사와 신자들을 만나 복음을 전도 받았다. 건들 건들 거리고 건달 기질이 있지만 시원 시원해서 좋다. 집에는 전화도 있었다. 집에 콜렉트 콜로 전화를 했다. 교회와 집에는 별 일이 없다고 한다. 그냥 나올 수 없어 0집사 딸에게 학용품 값을 주고 나왔다. 0집사의 안내로 처소에 가 보았다. 외양은 초가집이었지만 내부에는 강대상도 있고, 허름하지만 장의자들도 있었다. 풍금도 있고 선풍기도 있어서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0집사의 안내로 0선생댁에 갔다. 0선생은 외출 중이었고 사모님만 있었다. 기다리다 저녁을 얻어 먹은 후 내일 새벽에 오기로 하고 심양으로 왔다.

8월 28일 (日)

새벽에 일어나 세수를 한 후 택시를 타고 0선생댁으로 갔다. 택시비가 상당히 나왔지만 택시비를 아낄 때가 아니었다.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녹음을 하고 있으니 0선생이 녹음하지 않는게 좋겠다고 해서 녹음을 중단했다.

0선생은 중국에 온 지 3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실패도 했고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주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이제는 자리를 잡게 되었다. 0선생이 하는 사역은 필자가 흥분할 만한 일이었다. 0선생은 일을 하기 전에 ㅁ선생을 6개월 동안 관찰했다. 요녕성은 길림성이나 흑룡강성보다 조선족이 현저하게 적은데도 왜 교회가 왕성한가? 그것은 ㅁ선생 때문이었다. ㅁ선생이 조선족 교회의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기에 요녕성의 조선족 교회는 왕성하게 일어날 수 있었다. 누가 뭐라해도 ㅁ선생은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비록 엘리야는 아니었지만 오바댜임에는 틀림없다. 오바댜가 있었기에 아합의 핍박 아래서 선지자들이 살아 남을 수 있었고, 엘리야가 아합에게로 인도될 수 있었다. 그래서 0선생은 어느 주일날 교회 중앙 아무도 도청할 수 없는 곳에서 ㅁ선생에게 자기 계획을 말하고, 무언의 내락을 받았다. 0선생은 ㅁ선생을 무척 존경하고 있었다.

0선생은 조선족 처소지도자들과 차세대 지도자들 200여명을 여러 개 반으로 나누어 한 달에 한 번씩, 한 번에 2박3일씩 3년을 한 텀으로 하여 교육을 하고 있다. 그 과정은 초인적인 사역이었다. 필자는 죽었다 살아나도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다. 무엇보다도 체력이 감당을 못할 것 같다. 0선생은 젊은 분도 아닌데 그렇게 사역을 하는 것을 보면 입이 딱 벌어진다.


0선생은 이 사역을 교회 중심으로 수행한다. 기존 교회 중에 사역을 하고 싶은 지역의 중심교회나 처소를 찾는다. 그리고 그 중앙처소의 지도자가 어떤 종류의 지도자인지를 관찰한다. 괜찮은 사람이라고 판단될 때 접근하여 교육할 처소지도자들과 청년들을 추천하게 한다.

훈련 장소도 교회를 이용한다. 처소 지도자들이 왕래하는 교통비도, 식사 비용도 다 교회가 부담하게 한다. 결코 선교비를 주지 않는다. 그래서 불만인 사람은 아예 오지를 않는다. 처소지도자들이 먼 거리에서 교육 장소까지 오가는데 드는 비용이 그들의 처지로 보면 부담이 된다. 그럼에도 눈을 감고 교통비를 주지 않았다. 시작한지 1년 정도 지난 지금 오히려 교육을 받으러 오는 처소지도자들이 선생님 가시다가 요기하시라고 10원을 주기도 하고 옥수수, 고구마 등을 갖다 주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미꾸라지를 갖다 주어서 0선생이 난생 처음 추어탕을 해 먹기도 하였다. 이 날 아침에도 추어탕을 끓였다. 교육받은 처소지도자가 갖다 준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교육을 하다보면 사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됐다 싶은 사람에게는 경우에 따라 선교비도 주고 이모 저모로 돕기도 한다. 이것은 결단코 선교비를 앞세운 것이 아니요 필요에 의해서 선교비를 주는 것이다. 네베우스 선교정책도 무조건 재정적인 자립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때에 따라서 선교지 동역자들의 재정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것을 장려하고 있다.

0선생은 예배당을 건립하는 것 보다 사람을 키우는 것을 더 중요시한다. 지도자만 바르게 키워 놓으면 한족 선교도 할 수 있고, 북한 선교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0선생이 얼마나 과로를 하였든지 올 초에는 쓰러져서 한국에 와서 치료를 받고 가기까지 하였다. 해야 할 사역은 많은데 0선생의 건강이 염려된다. 0선생도 육신을 가진 인간이지 초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0선생은 어떻게 처신해야 안전하게 사역할 수 있는 지를 아는 분이었다. 다른 선생들은 두려워서 소극적일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0선생은 담대하게 사역을 하였다. 0선생도 사람인데 어떻게 그럴 수 있는가? 믿음 때문인가? 물론 신앙의 힘이 크다. 그러나 무대포로 믿사오리 하고 이렇게 사역하는 것은 아니다. 배짱이 큰 성격 탓도 있다. 그리고 0선생이 이전에 사업을 해봐서 그럴 수도 있다. 이 모든 것 외에 중국의 상황에 맞게 처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은 <관시>의 세계이다. <관시> 안에 든 사람에게 중국인들은 한없이 자애롭다. 그러나 <관시>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몰인정하다. 한국인으로서 처음부터 현지 한족들과 관계를 맺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관시>가 없으면 만들어야 한다. 중국인들은 먹는 것을 굉장히 중요시한다. 먹는 것은 생존의 수단일 뿐 아니라 중요한 중국인 문화이다. <관시>를 맺는데도 이 먹는 문화를 이용한다. 어느 지역이든지 새로이 사역을 할 지역에 가면 그 지역의 권력의 실세를 초청해서 진탕 먹인다.

그 지방 최고의 음식점에 가서 최고의 요리로 접시를 세지 않고 주문하여 그들로 마음껏 먹게 한다. 술도 마시게 한다. 그리고 어떤 부탁도 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이 지방에서 사업을 하려고 하는데 잘 지내자고만 인사를 한다. 이 때 절대로 돈을 주지 않는다. 그들이 0선생에 대하여 기대를 가질만큼만 행동한다. 한 번 이렇게 대접하면 그 다음부터는 문제 될 것이 없다. 문제가 될 일이 있으면 그쪽에서 먼저 정보를 주어 대처하게 하고, 자도자 훈련 사역을 해도 상관하지 않는다. 어떤 때는 그들을 설득하여 허가를 받고 처소지도자들을 교육하기도 한다. 그래서 지급은 열 곳 중 한 곳에는 성경학교 허가까지도 나 있는 상태이다. 그러나 함부로 경거망동하지는 않는다.

주일 예배를 0선생 가족과 같이 00교회에 가서 예배를 드렸다. 예배당은 허름했지만 교인들은 약 3-400명은 됨직했다. 설교자는 남경신학원에 입학한 신학생이 했는데 우리 말을 모르다가 배우는 가운데 있어서 그런지 우리 말이 어눌했다. 예배 후에 설교자와 인사를 하고 집에 와서 0선생 사모님이 만들어 준 국수를 맛있게 먹었다. 0선생이 0형제를 못미더워해서 0형제로 하여금 사모님을 진찰하게 하고 둘이서만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누었다. 저녁 때가 되어서 0형제는 심양남역에 북경행 기차표를 사러가고 나는 방에서 좀 잤다. 저녁식사후 다시 저녁 예배를 드러 갔다. 예배가 끝난 후 교회에서 나오면서 천풍지 한 권을 얻었다. 파는 것인데 한국에서 왔다고 거저 주었다. 0선생은 자기가 사는 지방에서는 절대로 설교를 하지 않는다. 물론 이 지방에서도 공안원들과 <관시>를 맺어 놓았다. 공안원들도 0선생이 무엇하는 사람인줄 짐작하지만 그런 일로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 0선생은 여기서는 선생이 아니고 뷰유한 기업가이기 때문이다. 0선생은 자녀가 한 명인데 그 자녀도 이곳에서 같이 생활하고, 학교에 다닌다. 참으로 존경스러운 0선생이다.

필자가 중국에서 많은 선생들을 만나보았고, 국내에서도 많은 선생들을 만나보았지만 0선생과 같이 헌신적이고, 유능하고, 지혜롭게 사역하는 분은 처음 보았다. 조선족 선교를 위해서 어떤 선생이 필요한가? 바로 0선생과 같이 인생이 무엇인지도 알고, 쓴맛과 단 맛도 보고, 사역도 해 보고, 분별력이 있고, 사람을 키우고 가르칠 수 있는 선생, 멘토를 잘 하면서도 결단력이 있고, 추진력이 있는 선생이 절실히 요청되는 것이다. 한국에 그런 선생이 있을까? 분명히 있을 것이라고 본다. 100%는 아닐지라도 근접한 선생은 있을 것이다. 조선족 교회는 한국교회에서 바로 그런 선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집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0형제가 헐레벌떡 들어 왔다. 간신히 북경가는 와프표를 암표로 구했다는 것이다. 0형제가 택시를 불러 왔기에 0선생에게 인사하고 심양남역으로 왔다. 기차는 11시 5분 출발인데 북경까지 가는 표가 아니라 당산까지 가는 표였다. 그래서 당산에서 다시 요금을 더 물어야 했다. 기차에올라 침대에 누우니 꿈만 같다. 중국 여행을 하면서 기차표 때문에 고생한 것을 생각하면 암표이지만 표를 사서 침대에 누워서 간다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인지!

요양에 가보지 못한 것이 아쉽다. 그런데 귀국해서 보니 요양에가지 못한 것이 주님의 정확하신 인도하심이었다. 요양에 가서 만나려고 했던 0선생은 요양 00교회에서 배척을 받아 00에 가서 사역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에서는 만나지 못했지만 서울에서 전화로나마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8월 29일 (月)

아침에 깨어보니 기차는 힘차게 북경을 향하여 달린다. 기차가 당산에 도착했을 때 0형제가 복무원에게 이야기 하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식으로 정다상 요금보다는 싸게, 그러나 새로 내야하는 요금은 복무원이 갖는 것으로 합의가 된 것 같다. 좌우간 요지경 속의 나라이다. 당산은 지진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그 지진이 얼마나 굉장했던지 옛 도시는 함몰되고 인근에 새롭게 도시를 조성하였다고 한다. 특콰이(최고 빠른 기차)라 그런지 10시간 만에 북경에 도착하였다. 승용차로 가면 막힐 때는 19시간, 20시간 걸린다고 하는 거리이다. 짐이 무거워서 나는 역광장에 있고, 0형제가 전화를 해서 북경남역에 인근에 있는 유학생초대소에 전화를 해서 방을 알아보니 빈방이 있다고 한다. 전에 0형제와 임전도사님이 같이 갔다고 하는 김삿갓식당에 갔다. 김삿갓식당은 북경 역에서 큰 길을 건너 편에 있었다. 식당은 깨긋했고 2층으로 되;어 있었다. 2층에 올라가서 냉면으로 점심을 하고는 좀 쉬었다. 0형제가 돌아갈 기차표를 물어 보니 지금은 구할 수 없다고 한다. 다마스같이 생긴 택시를 타고 남역에 이르니 요금이 상당히 많이 나왔다. 버스를 탈 걸 하고 후희를 했다. 남역에서 내려 할아버지가 끄는 탈것을 타고 유학생 초대소를 찾아갔다. 유학생초대소는 남역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그래서 중국인 할아버지가 요구하는대로 요금을 내니 싱글 벙글하신다.


유학생 초대소는 말이 초대소이지 저렴한 호텔이었다. 외양도 10층 건물로서 호텔에 못지 않았다. 요금도 북경에서는 파격적으로 시설이 낡은 방은 130원, 씨설을 새롭게 한 방은 150원이었다. 130원짜리 방에 여장을 풀고 목욕을 하였다. 그리고 드라곤 항공사에 연락을 한 후 한잠 푹 잤다. 오후에 일어나서 시내 구경을 하였다. 약도 사고 시장 구경도 하다가 돌아와서 남역 근처에 있는 조선족 식당에서 식사를 하는데 겨우 먹었다. 남역 근처에서 보니 남방에서 온 사람들이 뜨내기 인생을 사는 것이 보였다. 잠은 거리에서 자고, 식사는 1원짜리 밥을 거리에서 사먹고 있었다. 우리 나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있지만 이정도는 아니다. 방에 돌아와 오랜 만에 마음 놓고 T.V도 보면서 편히 쉬었다. 이 때 중국 T.V에는 MBC에서 방영했던 <마지막 승부>가 인기였다. 긴장이 풀리니 잠만 온다. 잘 자 두어야 귀국해서도 할 일을 하지 하는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8월 30일 (火)

오늘은 전에 작년에 처음 왔을 때 보지 못한 이화원과 자금성을 보기로 하였다. 남은 돈도 달랑 거리고 해서 버스를 타고 가다가 마이크로 버스로 갈아타고 이화원에 갔다. 시간이 상당히 오래 걸린다. 이화원을 보면서 벌린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이화원이 황제의 여름 궁전이엇다지만 정말 어마 어마했다. 제대로 구경하려면 하루 갖고도 부족할 것 같다. 그래서 대충 보기로 하였다.


우선 호수 옆으로 난 길을, 그것고 복도와 같이 연결된 곳을 따라 구경을 하였다. 배타는 곳에서 배(발동선) 다고 돌아 보는데 정말 인공으로 만든 곳치고 절경이었다. 그 넒은 호수를 인력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그 당시 국민들이 얼마나 고초를 겪었을 까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이화원을 나와서 마이크로버스를 타고 자금성에 갔다. 여기서 해프닝이 벌어졌다. 이 때까지 나는 조선족 행세를 했는데 자금성에 들어가다가 들통이 난 것이다. 중국인은 20원, 외국인은 60원인데 40원 내고 0형제와 둘이 들어가는데 쌍라이트같이 생긴 수문장한테 들키고 말앗다. 부르는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모르는체 들어갔는데 0형제가 붙잡힌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0형제가 오지를 않아서 몇 번이나 나가는 문으로 입구에 가보았지만 0형제는 보이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애라 모르겠다 하고 혼자 자금성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한 참을 구경하다 한국인 관광단을 만나서 같이 구경을 하였다. 자금성의 웅장함을 어찌 필설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대충 대충 감탄하면서 구경을 하다보니 반대편 나가는 문에 다달았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다시 되돌아 가는데 0형제는 보이지 않았다. 혼자 유학생초대소에 돌아갈 것을 생각하니 앞이 캄캄했다. 그런데 포기하고 나가려고 하는데 0형제를 찾았다. 0형제는 문직이한테 사정했지만 통하지를 않았다. 그래서 곤욕을 치루다가 60원을 물고 외국인표를 사서 들어와서 나를 찾았다는 것이다. 돈은 돈대로 더 들고 마음 고생은 고생대로 했다.

피곤한 몸으로 집에 돌아오다가 다시 김삿갓식당에 가서 냉면으로 저녁을 먹고 초대소에 돌아 왔다. 인목사는 냉면만 좋아하나보다 생각할 수 있지만 그래도 비싸지 않고 입맛에 맞는 것이 냉면이니 어쩌겠는가? 유학생 초대소에는 세계 각국에서 청년들이 많이 와 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여행 정보도 교환하고, 기차표도 구하고 서로 모르는 외국 청년들끼리 교제도 하였다. 인근에는 외국인들 상대로 하는 식당들이 성황리에 영업을 하고 있었다. 가방에서 상비약과 우산등 물건을 0형제에게 주고, 서운하지 않게 사례도 하였다. 00에 0형제가 전화를 해보니 태영이도 잘 있다고 한다. 성경도 열심히 읽고 00처소에서 개최한 집회에도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고 한다. 안심이었다. 00에 있는 0선생에게도 이제 북경을 떠나 귀국하게 되었다고 안부 전화를 하였다.

8월 31일 (水)

드디어 집에 가는 날이다. 다마스 같은 택시를 불러 50분을 달려 공항으로 갔다.

차창으로 보이는 북경은 현대도시였다. 고속도로도 뚤려 있고, 교통도 도시의 규모에 비하여 양호한 편이었다. 지금까지는 0형제가 있어서 안심이었는데 난생 처음 나 혼자 홍콩을 거켜 서울에 가야하니 긴장이 된다. 0형제와 헤어져 항공권을 받아보니 홍콩에서 다시 수속하지 않아도 되고 항공권을 두 장 주었다. 드라곤 항공과 영국 항공이 자매회사라 그렇게 하는 가 보다. 한 시간 이상 기다리다가 홍콩행 비행기에 탑승하였다.

책을 보고 있노라니 기내식이 나왔고, 또 한참을 가니 홍콩에 도착하였다. 트랩을 내리면서 걱정도 되었지만 주님을 의지하고 평안한 마음을 가졌다. 공항 청사에 들어서니 서울가는 승객을 찾는 팻말이 보였다. 안내를 받았지만 한 눈 파는 사이에 안내자를 잃어버려 한참을 헤메었다. 다시 안내자를 만나 2층으로 올라가서 게이트 번호를 알아서 그 자리에서 한국인 여행자들을 만나 이야기 하다가 서울행 영국항공 트랩에 올랐다. 좌석에 앉으니 감사가 절로 나왔다. 주님은 참으로 신실하신 분임을 체험했고, 주님의 인도하심은 정확하고 늦지도 빠르지도 아니함을 체험하였다. 작년에 중국에 가고 싶은 마음을 주신 분도 주님이시고, 필요한 경비를 주신 분도 주님이셨다. 올 해 두 번이나 중국에 갈 수 있도록 인도하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 주신 분도 주님이셨다.

이번 여행을 통해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철저하게 체험하였다. 지금까지 나를 인도하신 주님께서 나의 인생 여정은 물론 목회 사역도, 중국 선교의 사역도 인도하시리라고 믿는다. 김포에 도착하여 공항버스를 타고 가려고 나서는데 아내와 전도사님이 마중 나와 있었다. 반가운 얼굴들이다. 수요일 예배 시간 때문에 기대하지 않았는데 마중을 나와 주어서 고마웠다. 다음에 주님이 또 다시 기희를 주신다면 주의 깊이, 세밀하게 동북삼성은 물론 내몽고지역과 중국 전역에서 어떻게 해야 한국교회가 중국 선교를 잘 감당할 수 있고, 조선족 교회와 동역하여 한족 선교와 북한 선교를 잘 감당 할 수 있을 것인지를 탐구하려고 한다. 주님께서 또 다시 기희를 주시기를 기도한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