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설교난에 시달리는 현 교계의 단면 [교계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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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설교난에 시달리는 현 교계의 단면 [교계실상]


분류: 소식- 교계 현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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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신기간지 기독교보 인용) 번호 : 218 등록일 : 200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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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예 설교를 없애지요-김용출 목사

요즘 필자는 ‘설교를 왜 해야 하는지’ 하는 생각에서 시작해서 설교의 효과에 대해서 깊
이 생각하고 고민 중이다. 이런 생각이 자꾸 발전해서 아예 설교를 없애면 어떨까에 까지
이르렀다. 만약 예배순서에 설교를 뺀다면 그 시간에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생각도 해 본
다. 필자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다.

이유는 대개 이렇다. 설교가 과연 효과가 있기는 한 것인가? 왜냐하면 내 설교를 수십년 들
은 분들이 전혀 변하지 않더라는 점에서 우선 그렇다. 필자의 경험 역시 이십 수년을 한 교
회에서 설교했는데 교인들이 별로 변하지 않는 것을 보았다. 변하지 않는 것은 고사하고 나
중에는 배신과 변절을 밥먹듯이 하는 것을 경험했다. 그런데도 왜 설교를 해야 되는 것일
까?

백번 양보하고 좋게 말해서 그래도 옥토에 떨어지는 씨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면 될까? 콩나
물에 물을 주면 물은 밑으로 다 흘러도 콩나물은 자라듯이, 보이지 않게 그래도 자라는 교
인이 있다고 위안을 삼으면 될까? 그래도 역시 과연 누가 설교를 듣기나 할까 하는 쪽으로
필자의 마음이 기울어지는 것을 어찌하랴? 장광설을 늘어놓으면 ‘설교하시네’한다. 듣기
싫은 말에 대한 다른 표현이 ‘설교하시네’가 아닌가?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듣지 않는다고 선지자들로부터 수도 없이 많은 책망을 들었다. 그러
나 결국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다가 망했다. 남북 왕조가 다 그랬다.

그리고 설교를 없앴으면 좋을 또 다른 이유는 이 시대의 경향이 그것을 말해 준다. 필자의
경우 설교 초청을 받으면 대개 목사님들보다는 평신도들이 부탁했을 경우 “목사님, 설교
를 좀 짧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주문을 자주 받았다. 그런 주문을 받으면 어쩐지 마음
에 부담이 되고 설교 무용론으로 마음이 기울어지는 자신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왜냐하
면 설교를 짧게 해달라는 주문이 내게는 “설교 길게 한다고 누가 듣습니까?”로 들린다.
그리고 설교란 예배순서에 빠질 수는 없으니까 그저 지나가는 통과 과정이고, 그래서 하나
의 요식행위로 전락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배의 모든 순서가 하나의 요식행
위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이러다간 잘못하면 예배 무용론에, 나중에는 아예 신앙행
위 자체의 무용론까지 발전할까 두렵다.

그러나 사실 우리의 현실은 여기까지 와있다. 필자는 이런 오늘의 현실이 분명 어딘가에 병
이 깊이 들었고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왔다는 징표라고 생각한다. 그토록 목이 터져
라 외쳐도 듣지 않고 외면했던 옛 이스라엘 백성들과 오늘의 교회가 무엇이 다를까? 결국
“설교 짧게 해 주세요”의 문제는 설교의 길고 짧음의 문제를 떠나서, 설교 자체의 존립
문제라고 생각한다. 설교가 참으로 인간의 영혼을 살리고 감동을 주는 설교라면 그 시간의
길이는 전혀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이 징조는 모든 것이 기계화 전문화 다양화하면서 사람들의 흥밋거리가 다른 곳으
로 이동하고 있다는 의미일 게다. 예배가 아니어도 즐길 거리는 너무나 많고, 설교가 아니
어도 들을 거리는 널려 있다는 뜻일 게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의 심성이 그만큼 강퍅해지
고 각박해 간다는 의미일 게다.

실로 지금은 설교의 수난 시대이다. 홍수에 마실 물 없다고 했듯이 설교는 쏟아져 나오는
데 정작 들을 말씀은 없다고 하고, 설교의 길고 짧음이 관심의 대상이 되었으니 이를 어찌
하면 좋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한국교회의 너무 많은 설교 회수가 설교의 질을 떨어뜨리는
역할을 해서일까? 이래저래 짐작이 어렵다. 그래서 아예 “설교를 없애면 어떨까요?” 이
다.

서울남부교회 김용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