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인간의 구성요소(이분설인가, 삼분설인가?)
2003/12/16 Article Number : 810 이광희 (ddlc@chol.com) Lines :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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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내용은 대동교회 고 김석준목사님께서 생존에 강의하신 것을 교재로 발간해 현재 궁극교회 김경형목사님께서 교역자 대상 강의의 교재로 사용하는 체계신앙신학의 내용중 인관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한글 2002로 작성한 것을 갈무리해서 올리는 관계로 혹시 읽는데 어려움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럴 경우 궁극교회 홈페이지 체계신학 방에 원본이 있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二절 영과 육이 결합된 존재인 인간
우리는 흔히 인간은 물질적인 육과 비물질적인 영혼과 결합된 존재임을 알고 있다.
이론적으로는 영과 육의 존재임을 알고 영이 주격이요 육이 소유격인 것을 말하지만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자신이 인간이면서도 종종 인간에 대해서 착각할 때가 적지 않다. 인간이라 할 때 단순하게 가견적 가식적인 인간을 하나의 인간으로 가치 평가해 버린다. 이것은 인간에 대한 지식이 빈약하다는 말이요, 솔직히 말해서 인관에 대해서 무식하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은 먼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에 대해서 바른 지식(바른 신관)을 가져야 하며, 나아가서 자신이 인간이니 만큼 인간(인관)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하게 되면 이는 자기가 자기를 영원히 불행한 자기로 만들고 마는 것이다. 임시적인 인간의 행 불행은 하나님의 대 주권섭리에 있다고 하나 인간의 영원한 행 불행은 자기에게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인간이 인관을 바로 가지면 자기의 현재라는 이 현재는 행복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다. 하나님께서 혹자에게는 행복하게 혹자에게는 불행하게 해 주셨다 할지라도 현재의 불행이 필연코 미래에 지속되지 못하고 현재의 행복이 미래에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는 까닭이다. 현재의 어떤 불행이라도 그 불행을 가지고 미래의 무한한 축복을 여기서 마련해야 한다. 현재의 축복이라는 그것도 얼마든지 미래의 자기의 불행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것도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참다운 인관을 가지게 되면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독권적으로 능력적으로 하자에게는 복을 주시고 나에게는 어떤 불행을 준다 할지라도 이것은 결코 하후하박이 아님을 알게 된다. 다만 이 현존 세상에 사는 동안에 하자에게는 행복을 주시고 또 하자에게는 불행을 주시는 것은 이 현존 세상에서 前章에서 말한대로 인간은 인격적인 존재인고로 행복과 불행을 비교해서 불행보다 행복이 얼마나 좋다고 하는 것을 절실히 느끼게 하기 위해서이다. 인격적인 인간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비록 임시적이기는 하지만 불행은 싫고 행복은 얼마나 좋다고 하는 것을 인간으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 행복과 불행을 인간에게 차별 없이 주는 것이다. 현존 세상에서는 하자에게는 행복을 주시고 어떤 하자에게는 불행을 주시는 것은 결코 하나님의 차별 대우가 아니다.
옛날 유명한 폴레토가 말하기를 인간이 이 세상에서 행복해지고 불행해지고 하는 것은 그 영혼이 신체 속에 들어오기 전에 前 세상에 있을 때에 많은 죄를 지은 연고로 그 죄의 중량대로 형벌을 받아 이 물질계에서 신체 속에 들어가서 자기의 전생에 죄를 지은 것만큼 그 육체도 역시 고통을 당한다고 하지만 우리는 이런 터무니없는 학설은 받아들일 수 없다. 기독교는 이런 이교(異敎), 이단적인 철학사상과는 전혀 다르다.
인간의 불행과 행복한 이 현실은 前生의 죄의 결과가 결코 아니다. 다만 행복과 불행, 만족과 불만, 희락과 슬픔, 쾌락과 고통의 이 상극적인 것을 비교급으로 알려 주시기 위한 일종의 계시에 지나지 않는다. 즉 인간이 이 세상에서 자타의 불행을 보고 그 불행이 싫다고 보여지면 자기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영원히 불행하지 않을 그 자기로 만들어 갈 수 있는 자유와 권리와 능력을 주셨고, 또 하나님께서 선지 사도들을 파송시켜 66권의 성경을 주시고 성령이 직접으로 오셔서 우리에게 협조하시고 계속적으로 권고하시고 도와주고 계신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물질적인 현세에서 자타의 행복이 좋게 보이고 좋게 느껴지면 자기가 자기를 영원히 행복한 자로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영원히 불행하도록 만들어 갈 뿐이다. 그런고로 영원계에 가서 우리 인간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원망도 할 수 없다. 다만 행복이 얼마나 좋다는 것을 깨닫고 자기를 영원한 행복한 자기로 만들어 갔으면 이 행복을 미리 보여 주시고 알려주시고 권고해 주시고 직접으로 간접으로 도와주시고 애써 주신 하나님 앞에 감사할 것뿐이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현존 세상에서 인관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인간이란 인간은 속에 ‘영원’이 들어 있음을 지식 하면서 인간은 영이 인격의 주격자임을 깨닫고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흔히 이론적으로는 인간 자기 속에 영이 있음을 지식 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그렇게 생활하지 못하니 이는 인관에 대한 지식이 빈약한 증거다.
※ 신관에 대한 바른 지식, 인관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게 되면 영원한 행복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모르면 어떻게 되겠는가? 옛 사람들은 ‘前生에 내가 어떤 죄를 지었기에 지금 이 고생을 하나’ 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행복을 주시면 행복하고 아무리 행복하고 싶어도 하나님께서 행복을 주지 않으시면 행복할 수 없다. 하나님이 행 불행의 주권자다. 똑 같이 힘을 썼는데 하나는 불행하고 하나는 행복하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편벽된 행위인가? 하나님은 하후하박은 없다. 만일에 똑 같이 행복을 주시면 불행을 느끼지 못한다. 그것을 느끼게 하기 위해서 행불행을 준다. 자타의 불행은 나쁘고 행복은 좋다. 그러나 행복과 불행이 찾아오는 정도는 각각 다르다. 불행을 느낄 수 있도록 불행을 주는 것은 영원한 불행을 만들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누구든지 자기는 영원한 행복자가 될 수 있는 자유와 권리가 있다.
一. 육, 육신(σ?μα)
우리가 육이라 하면 단순히 물질적인 육만을 육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육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신체, 육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육신 육정 육의 요소 육신에게 소속된 전부를 말한다.
이 인간의 육이라는 육을 분석하면
① 물질적인 육(σ?μα, 보디).
② 비물질적인 육: 육정이라, 정욕이라, 육신의 생각, 이성이라고 말한다.
이것을 합하여 육이라고 하는데 흔히 물질만을 육으로 알고 비물질은 영(靈)이라고 착각을 하는 자도 있다.
성경을 보면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신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말이 있는데 이 육신의 정욕은 물질이 아니고 비물질이다. 비물질이면서 영은 아니다. 영이 아닌 이유는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자는 정욕이라’고 했으니 이 정욕은 영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분명히 성경은 육신의 생각과 영의 생각이 있고, 육신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섬기지도 못하고 순종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원수라고 했다. 이것은 비물질이면서 영이 아닌 육에 속한 것이다.
③ 육은 영원히 주격이 될 수 없다.
④ 육은 영원한 존재가 아니다.
그런고로 우리 인간이 영을 무시하고 육본주의로만 살게 되면 그는 필연코 시간적으로 영원성을 무시할 수밖에 없고 공간적으로는 신령계를 부인할 수밖에 없고 본질적으로는 무한계와 완전계를 부정할 수밖에 없다. 우리 인간이 이 인관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 육본주의 신앙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
자기의 성패문제를 임시적인 현실에다 두고 자기의 안고(安苦)문제를 육에다 두고 자기의 빈부문제를 가식의 세상에다 두고 사는 이것이 곧 육본주의 신앙이라는 말이다. 자타의 활동의 성패문제를 이 물질세상에다 두고 살 수는 없는 것이다.
육본주의로 사는 자는 가식적인 면, 육적인 현실적인 그 면을 두고 성패와 빈부의 판단을 내리고, 심지어는 그것을 가지고 그 사람의 영적인 면의 생활까지 속단을 내리기 쉽다. 즉 육적인 면이 잘 되면 영의 신앙생활을 바로 하고 잘한 것으로 보고 육의 생활 면이 잘못되면 그 사람의 영의 생활 면이 잘못된 것으로 속단을 내리게 된다. 진실로 육본주의가 아닌 참 사람으로 사는 자는 가견적인 가식적인 그 면을 완전히 초월하게 된다.
사람이 아무리 신앙생활을 잘 해도 가견적 가식적인 면이 실패 같이 보이는 것이 얼마든지 있다. 어떤 사람은 영의 신앙생활이 잘못되어도 가견적인 면이 성공하는 사람이 많다. 간혹 영의 생활을 잘 해야 할 줄 알면서도 신앙양심을 어기고 미련한 생활을 하고 있을 때 일시적으로 징계의 채찍으로 잠깐 때리는 일도 있다. 그러나 그것도 사람마다 다가 아니고 간혹 그렇게 보여 주시는 것이다.
※ 육 ① 물질적인 육 ~ 뼈, 살(고깃덩어리).
② 비물질적인 육 ~ 영은 아니다. 육에 소속된 것. 육신의 정욕 소욕 생각 마음.
육은 영원히 주격자가 되지 못하고 물질적인 이 육은 영원히 존재하지 않는다.
육본주의는 성패 승패 부요 안고 문제를 육에다 두고 있고, 성공이라 하면 우선적으로 영적으로 믿음으로 생각하지 않고 먹고 마시는 물질적 부자밖에 모른다. 사도 바울이 성공했느냐, 망했느냐?
일반학자들은 성분적으로 나누지 않고 물질적으로만 나눈다.
二. 영(靈, πνε?μα)
인간이란 물질인 육체만이 아니고 비물질인 영과 결합된 것이 인간이다. 물론 영이란 말은 일반적으로는 비물질성 전부를 영이라고 말하나 성경이 말하는 영(πνε?μα)은 비물질 전부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비물질 중에서도 이성과 양심은 영에서 제외된다.
영이란 한 번 존재된 이후에는 영원 불멸의 것으로 있는 것이다. 이 영은 개개인의 인격의 주체성이요 본분적 책임적 권위적 주체성이다. 그러나 인간의 무형적 활동에 있어서는 필연적으로 이성을 통하여 나타나게 되어 있다.
얼핏 잘못 깨닫게 되면 이성을 영으로 착각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성이 주격인 것처럼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이성은 절대 자유성이 보장되어 있되 의존적 자유이다. 그런고로 이성은 의존적이기 때문에 주격은 될 수 없는 것이다.
※ 인간을 단순히 물질성으로만 말하는 자가 있다. 영육이 결합된 것이 인간이다. 여기서 영육 분리성에 있어서는 달라진다. 물론 성경을 기준 했겠지만 어떤 신학자들은 비물질성 전부를 영으로 말하려고 한다.
육
σ?ρξ(살크)
살 육체 몸 육신 인간혈통 인간성 물질성 육정 욕정 인간의 모양 세상생활
σ?μα(소마)
몸 신체 시체 사람 노예 실제 물건자체 인간의 물질면
ψυχ?(푸케)
목숨 생명 혼 호흡 생물 사람
καρδ?α(칼디아)
마음 내부 중간 중심 양심
영
πνε?μα
(프뉴마)
바람 호흡 기운 생명 마음 영 영물 성질 성령 성령의 은사 귀신
단어학적으로 보면 안 맞는 것이 많이 있다. 아들과 아버지는 동시 공존성이 아니다. 그런데 한 분이라고 한다. 성자는 성부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성부가 영원성이면 성자도 영원성이다.
동물은 영이 있느냐? 없다. 그러나 동물에게도 비물질성은 있다.
아담의 코에 불어넣은 것은 인격성이 아니다.
엡 2:1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영이라는 말에서 만일 여기서 이성이 영이라면 미중생자는 죽은 상태로 있어야 할 터인데 미중생자도 이성은 살아서 움직인다.
영이 죽으면 영의 활동성은 중지되어 버린다. 이성은 영이 아니다.
1. 타락 이전의 영
인간의 영은 실존체이다. 이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격적인 실체로 지음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원형이시라면 인간의 영은 그의 모형이다. 이 모형적인 인간의 영은 인간으로서 완전성이나 하나님과 같은 본질과 본성적 무한적 절대적 완전성은 아니다.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다는 것은 물체가 아니고 영체를 말한다. 이 영이 육체를 벗고 영만이 천국에 들어가서 지 정 의 감성을 느끼는 것과 같이 이 영은 본래부터 그렇게 되어 있는 실체이다. 그러나 이 영은 가범성적이요 가사성적이나 완전 멸절성은 아니다.
※ 아기는 인간으로서는 완전하다.
2. 타락 이후의 영
타락하기 이전의 영은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못한 영이요,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지 못했기 때문에 진리와 영감이 내주해서 결합적 상태로 있지 못했다. 다만 그 영은 진리와 영감의 접선상태에 있었던 것뿐이다. 즉 접선상태에 있었던 영은 단절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그 영이 절대 자유성이 보장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하나님의 은밀계시)를 버리는 것이 동시에 영감을 버리는 것이니 진리와 영감을 버리는 것이 곧 하나님과 단절이다.
하나님과 단절되므로써 인간은 무능해진 것이고, 무능해짐으로서 인간 속에는 부패성이 생기게 되었다. 마치 어떤 생물체가 그 자연생명이 끊어지면 외계에서 부패성이 들어온 것이 아니고 자동적으로 내적 자체적으로 부패해지는 것처럼 인간 속에는 부패성이라는 성분이 생긴 것이다.
혹자들은 죄의 기원을 인간이 타락 이전에 그 부패성이 외계로부터 들어와서 인간을 타락시키고 부패시킨 것처럼 말한다. 죄의 기원을 인간 속에서부터가 아니고 인간 이전에 어떤 다른 존재에 의해서 죄가 구성되어 죄라는 실체가 인간 속에 내립해서 인간을 타락시켰다고 한다. 만일 그렇다면 그 부패성이란 곧 죄의 원소라고 볼 수 있으니 죄의 기원을 또 다른데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죄의 기원이 아담에서부터임을 우리는 성경대로 믿어야 한다.
영이 진리와 영감에서 단절되는 찰나가 영의 타락이요 죄의 기원이요 인간 타락의 시초이다. 진리와 영감으로 하나님과 접선되어 유기적 피동적으로 활동했던 영이 진리와 영감을 버림으로 하나님과 능력적 생명적 연결이 단절되고, 단절되므로 말미암아 인간 속에는 부패성이 생기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래 인간에게 부패성을 넣어서 창조하지도 않았다.
이렇게 타락된 영은 죄와 사망에게 완전히 포로 되었다. 무활동 상태로 인간 개체 속에 존재해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존재된 영은 하나님에게 피동 되지 못하는 한 악령이나 마귀에게 피동될 수도 없다.
※ 타락 전의 영은 진리와 영감이 내주 결합된 영이 아니고 다만 접선 상태라서 끊어질 수 있다. 그래서 가범성적 가사성적이다. 타락 후의 영은 영행이 중단되었는고로 마귀도 어쩔 수 없다. 왜냐하면 영이 죽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끊어진 영은 활동을 못한다.
사단과 영행이 된 것이라면 이것은 죄행이다.
타락 후의 영은 하나님과 단절이고 그런고로 의행이고 선행이고 간에 활동중단이다. 일반적인 의행과 선행은 천국과는 상관이 없다.
心行은 의행도 죄행도 있다.
靈行은 무엇이던 의다.
타락 전에는 어떤 영행이던 다 선인가, 선이 아닌 것도 있나? 타락 전에 영 자체적 독립적 行이 있었나? 없다(의존성임). 하나님과 접선상태였다. 한 번 끊어지면 자기가 못 잇는다.
3. 중생된 영
이 중생된 영은 그리스도의 대형과 대행을 입어 인격의 주격자로서 모든 죄책임을 져서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서 해방이 되고 즉, 허물과 죄로 포장되어 있던 것이 완전히 벗겨지고 그리스도의 대행으로 그리스도의 본질과 본성대로 성분적으로 의로워지고 진리와 성령이 영 속에 들어와서 결합하여 내주해 계시게 되었다.
그리고 이 중생된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인양성 일위의 중보적 결합으로 되어진 것이니 과거에 타락 이전의 영은 끊어질, 단절될 가능성이 있었으나 중생된 영은 그리스도의 중보로써 결합된 영이요 그리스도의 구속을 입고 하나님의 본질과 본성대로 되어진 것이니 그 영 자체가 본성적으로 하나님과 끊어지고자 하는 성질이 없고, 또 이 결합성은 그 누구도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고로 이제는 이 중생된 영은 절대적으로 단독적 활동기관이 아니고 성령과 결합된 상태로써 유기적 피동적 활동의 기관이니 이 영행은 전부가 의요 죄행은 있을 수 없다. 만일 중생된 이 영행이 죄행이 있다고 하면 이 영 속에 내주해 계시는 성령은 하나님이 아니고 악령으로 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이상 성령이 주격이 되어 영행이 나오는데 이 영행이 어떻게 죄행이 될 수 있느냐? 그런고로 이 영행으로 사는 것을 새사람으로 사는 것이라 하고 옛사람으로 사는 것은 전부가 죄행이라 하는 것이다. 영행인 새사람으로 사는 것은 전부가 의행이다.
※ 타락 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으나
중생 후: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영은 하나님의 지공과 지성의 법에 의 해서 완전히 탈색됨. 시간적으로는 동시이나 논리적으로는 탈색을 먼저 시키고 중생 시킴.
그리스도의 구속: 대형을 입으므로 탈색(진공상태)해서 대행(칭의)을 입힘. 성분적으로 타락 전과 전혀 다르다.
신인양성 결합은 하나님도 성령도 마귀도 아무도 못 끊음. 대형 대행을 입혀 칭의 되고 성령이 내주함. 하나님과 성령의 유기적 방편과 종별이 죄 같이 보일 때도 있으나 근원은 선인 것이다.
4. 성장된 영(성장되어 가는 영)
영의 성장이라는 말은 물질인 육의 성장과는 다르다. 육의 성장은 가식적이요 가견적인 반면에 영의 성장은 지혜 지식적 성장 도덕적 성장 능력적 성장이다. 이 영의 성장에 따라 활동이 다르고 모든 감성이 달라진다. 감성이 다르다는 말은 곧 쾌락성 향락성이 다르다는 말이다.
우리 인간이 이 물질 세상에 내재해 있는 동안 알아야 할 것은 영적 자기를 성장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