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성경과 성서 등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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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성서
최초의 한글 성경은 1882년 스코틀랜드 연합장로회 선교사 로스(J. Ross)가 번역하고 만주 문광서원에서 간행한 ‘예수셩교누가복음젼셔’이다.
계속해서 1887년에는 신약전서 전체가 번역되어 최초로 묶어진 ‘예수셩교젼셔’가 출간되었다. 1900년에는 한국성경번역자회에서 신약전서를 간행하여 1906년에 한국 최초의 공인성경으로 인정받았다. 1910년에 이르러 성경번역위원회가 구약 전체의 번역을 완성하였고 그 이듬해 구약전서를 묶어 출판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1911년에 신ㆍ구약이 합쳐진 최초의 성경전서가 나왔다. 이는 1906년 공인된 신약성경과 1910년 번역이 완성된 구약성경을 한 권으로 묶은 것으로 서울 대한성서공회가 발행하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하였다. 또한 1906년에 유성준 장로가 편집하고 일본 요코하마에서 인쇄한 최초의 국한문 혼용성경이 나왔으며 1910년에는 카우만이 편집한 한국 최초의 관주성경이 동양선교회 간행으로 중국 상해에서 인쇄되었다. 그리고 한국 최초의 사역(私譯) 신약성경은 1919년 대한기독교회 창시자 펜윅(M.C.Fenwick)이 번역하여 원산 대한기독교회가 발행하고 일본 요코하마에사 인쇄하였다.
대한성서공회가 1923년에 발행한 대한성서공회사 제9쪽 범례를 보면, ‘성경’은 일반적인 성경의 총칭으로 사용하고(예: 성경사업, 성경번역, 단편성경 등) ‘성서’는 공회 기구명칭에만 사용한다(예: 성서공회, 성서위원회, 성서주일 등)고 되어있다.
우리 총회는 1977년 총신강당에서 회집한 제62회 총회에서 ‘성경’을 ‘성서’라고 호칭하지 않기로 가결한 바 있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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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지어다
예배 종료 시에 신자들을 향해 하나님의 은총을 선포하는 것을 축도(祝禱, benediction)라고 말한다.
이 축도는 일반적으로 목사가 행한다. 루터교 예배는 아론의 축도(민 6:24~26)가 사용되는데 마르틴 루터는 1526년 그의 독일미사에 축도를 공식화시켜 놓았다. 한편 스웨덴 예배는 삼위일체 양식문(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과 더불어 아론의 축도양식을 따르고 있다. 영국 성공회의 기도서는 성만찬시에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문구가 첨가된 바울의 축도(빌 4:7)를 사용하고 있으며 아침 기도 시와 저녁 기도 시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후 13:13)의 축도를 사용하고 있다.
이 축도는 원초기(原初期)부터는 아니었지만, 4세기 말까지 모든 교회의식에서 관습적으로 행해졌다. 중세의 이러한 관습은 대부분의 개혁교회 의식에서 채택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다.
우리 한국의 개신교회에서는 선교 초기부터 고후 13:13의 축도를 사용하고 있다. 근자에 축도의 종료를 “축원하옵나이다”와 “있을지어다”를 놓고 어느 것이 맞느냐는 토론이 있는 것으로 안다. 우리 총회는 1960년 서울 승동교회에서 회집된 제45회 총회에서 이 문제가 거론되어 성경대로(고후 13:13)하는 것이 좋을 줄로 알아 예배 끝의 축도는 “있을지어다”로 일치하게 실시키로 가결하였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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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교인과 상회비
헌금에 대한 역사를 살펴보면 초대교회 때는 성찬에 쓸 떡과 구제를 목적으로 물질을 바치는 일이 있었다. 그러다 4세기에 들어와서 교회의 운영을 위하여 자발적으로 헌금이나 헌물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과 같이 예배의 예전(禮典)으로 예배순서에 헌금이 들어가기는 11세기에 들어와서다.
헌금의 종류로는 십일조헌금, 주일헌금, 감사헌금, 목적헌금 등이 있다. 헌금의 용도는 주로 사제(司祭)의 생활이나 교회의 유지를 위하여 쓰였다. 더러는 중세의 사제들이 지나치게 부유하여 말썽이 되기도 하였다.
현재 우리 총회는 세례교인헌금으로 총회를 유지 운영한다. 원래는 노회비도 부담하였다.(제4총회회록 23쪽)
상회비와 관련한 재미있는 기록이 있어 소개한다. 1915년 전주 서문 밖 교회에서 회집된 제4회 총회 시 경상노회 회의록을 보면 책벌교인에 대한 헌의내용으로 책벌교인은 총계에는 올리되 별표로 하고 총회비나 노회비를 받지 않기로 한 청원건이 있다.
이에 대하여 규칙위원의 보고는 “총 노회비는 내년도까지는 전례를 의지하여 받고 내명년도부터는 성찬 참예할 사람의 수효를 따라 받기로 작정할 것”이라 하여 채택되었다.(제4회 총회회록 33쪽) 즉 책벌교인은 상회비 의무에서 제외되었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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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경회장
국어사전에 보면 회장을 ‘회의사무를 총괄하며 회를 대표하는 사람’으로 풀이하고 있다.
우리 총회록에는 회장의 명칭에 대하여 ‘회쟝’(뎨4회 독로회록 4쪽, 뎨일회 총회록 1쪽), ‘증경(曾經)회쟝’(뎨4회 독로회록 1쪽), ‘젼회쟝’(뎨1회 총회록 1쪽, 뎨2회총회록 1쪽), ‘증왕(曾往)회쟝’(뎨6회 총회록 78쪽)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근자에 와서는 직전회장이라는 말도 쓰여지고 있다. 그중에서 가장 생소한 것은 ‘증왕회장’이다. 증왕이란 뜻은 사전에 보면 ‘일찌기, 지난간 적’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증왕회장이란 명칭은 역사에 잠시 나타났다가 자취를 감추었다.
증경회장이란 명칭은 1910년 뎨4회 독로회 때에 사용된 이후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1921년 제10회 총회시에는 정식 가결까지 하였다. 정치편집부 보고 뎨3항에 ‘젼회쟝의 젼쟈는 도말하고 대(代)에 증경(曾經)이라 개정함’(뎨10회 총회록 52쪽)이라고 되어 있다. 한한(漢韓)대사전에 보면 증경의 뜻을 ‘일찌기, 이전에 겪은’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말이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천이 되고 있다. 그런 중에 아름답고 사랑받는 말은 역사에 오래 남게 된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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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색고퇴
1907년 9월 17일 오후 2시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회집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에서는 태극고퇴를 만들어 사용하였다(제1회 독노회록 6, 7, 16쪽).
5년 뒤 1912년 9월 1일 오후 10시 30분, 평안남도 평양 경창문안 여성경학원에서 회집된 예수교장로회죠션총회 뎨일회에서 “길션듀시가 로회가 갈 때에 고퇴도 가시니 총회를 대(代)하야 고퇴를 졔조하되 위원은 편하설시를 택하기를’ 동의하야 가결하였다”(뎨1회 총회록 7쪽).
3일 뒤 동년 9월 4일 상오 9시에 “회장 원두우시의 사회로 속회된 총회에서 고퇴위원이 보고하되 ‘칠교회를 응(應)하야 닐곱빗나모(七色木)와 삼위를 응(應)하야 셰띄(三帶)를 뜻하였고 십자가 우에 반셕갓흔 교회를 생각하야 견고한 나무로 제조하였다’하매 마노덕씨가 채용하기를 동의하야 가결하였다”(뎨1회 총회록 13, 31~32쪽).
우리의 선조들은 고퇴를 만들 때 기도하고 위원을 선정하여 연구를 거듭하는 등 하나, 하나에 뜻을 부여하였다. 또 그 고퇴는 총회를 대(代)한다고 하였다. 아깝게도 그때의 고퇴는 지금 찾을 길이 없다. 고퇴를 두드리는 회장들은 그 의미를 알고 엄숙하게 두드려야 할 것이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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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의례로 시작한 예배
예배는 하나님께 경배하는 일로서 가장 신성하고 거룩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출 20:3~6)고 했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수가성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요 4:24)고 하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1938년 9월 제27회 총회에서 “아등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고 기독교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또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 이해하고 추이 국민정신 총동원에 참가하며 비상 시국하에서 총후 황국신민으로서 적성을 다하기로 함. 소화 13년 9월 10일 조선예수교장로회 총회장 홍택기”(조선예수교장로회 제27회 총회록 9쪽)라고결의하였다. 그후 한국 교회는 예배시작을 국민의례로 시작하였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민의례: (일동기립) 국가봉창, 궁성요배, 대동아전쟁 필승기원 묵도, 황국신민 서사 제창, 국민가 제창 등이었다(이 순서는 교회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음).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
기자 등록일 2003-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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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맹긔도
한국의 교회가 선교 일세기만에 세계적으로 그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부흥되었다. 그 배경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첫째, 한국에 입국한 초기 선교사들은 모두가 경건주의자였으며 성경적 보수주의 신앙가였다. 만약 초기에 입국한 선교사들이 인문주의자들이나 자유주의 신앙가들이었다면 한국 교회의 오늘과 같은 대부흥은 없었을 것이다.
둘째, 한국 국민의 마음 밭이었다. 모두가 경건성을 좋아하고 성경적 신앙을 추구했던 것이다. 그 증거로는 초대교회의 독노회나 총회 보고서를 보면 네가지가 두드러진다. 기도, 성경공부, 연보와 전도가 그것이다. 그 중에 기도에 관한 어느 보고서를 보면 ‘집안 식구기리 시간을 쟉뎡하고 사긔기도 하며 몃날동안식 날을 쟉뎡하고 특별긔도회도 하며 교인끼리 동맹긔도도 하고 직분끼리 특별긔도 하난 곳도 잇삽네다.’(뎨5회독로회록 47쪽)라고 씌어있다. 이 보고서에 특이한 것은 ‘동맹긔도’다. 이는 몇 사람씩 조를 짜서 날과 장소를 정하고 모여서 특별히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배당에서나 집에서나 산이나 동굴이나 초막에서 더러는 금식하며 기도하는 특별기도회였다. 참으로 그리운 옛 모습이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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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신사
일제 총독부는 천황제 이데올로기 주입도구로 신사 건립을 계획하여 1912년 부터 조선신사(朝鮮神社) 건립 예산을 편성해 이를 추진했다.
위치를 서울 남산 한양공원으로 정하고 여기에 제신(祭神)으로 일본 건국신화의 주신인 ‘아마데라스 오미가미’(天照大神)와 1912년에 죽은 ‘메이지왕’(明治王)으로 결정해 수년간 준비하여 1919년 7월 18일자 일본 내각고시 제12호로 조선신사 창립을 확정 공포했다. 남산 한양공원에 부지를 확보하고 1920년 5월 27일 지진제(地鎭祭)라는 착공식을 갖고 건립에 착수했다.
총부지 12만 7900여 평에 총공사비 156만 4852엔을 들여 일본 신사 건축양식에 따라 정전(正殿), 배전(排殿), 신고(神庫), 참배소(參排所) 등 15개 건물을 배치하고 여기에 오르는 돌계단을 조성했다.
공사가 마무리되어 가던 1925년 6월 27일 신사명칭을 조선신사에서 ‘조선신궁’으로 개칭했다. 신사에 둘 3종신기(三種神器)라는 상징물을 일본에서 가져와 그해 10월 25일 진좌제(鎭座祭) 행사를 갖고 한국인들에게 참배를 강요했다. 광복 이튿날 오후 승신식(昇神式)이라는 신사폐쇄행사를 거행한 후 9월 7일부터 해체작업에 들어가 10월 6일까지 마무리하고 이튿날 나머지를 소각하고 철수했다. 조선신사는 선량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고난과 죽음의 길로 인도하였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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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산장려운동
물산장려운동은 1920년 7월 30일 평양의 조만식, 김동원, 김성업, 김취성 등 남성 지도자들과 김보원, 이겸양, 이진실, 채광덕 등 여성 지도자들을 포함한 50명의 기독교 지도자들이 평양 예수교서회에서 조선물산장려회의 발기대회를 개최함으로써 시작되었다.
8월 24일 창립총회에서 발포한 창립취지는 다음과 같다.
(1)경제의 진흥 (2)사회의 발달 (3)실업자 구제 (4)본화(本貨)를 애중히 여김 (5)근검, 감용성(敢勇性)을 화성(化成)케 함이다. 처음에는 금주, 금연과 같은 절제운동의 형식을 취하다가 아편, 축첩, 매음, 잡기, 인신매매, 공창폐지, 인권유린 등 사회악 제거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뒤에 가서는 여성해방운동으로 번지기도 했고 덴마크식 협동조합, 소비조합, 저축조합 운동과 양계, 양돈, 축산, 토지개량과 같은 농촌운동, 사회개발운동으로 번지기도 했다.
그러나 물산장려운동은 보다 배일적이며 투쟁적인 민중운동의 성격을 띠고 일어났다. 이 운동은 세계경제동향을 파악하는 동시에 민족경제의 현재와 장래를 내다보는 거시적 운동이었다(기독교대백과 6-668~670).
조만식 같은 교회 지도자는 처음부터 말총모자와 짧은 수목두루마기와 편리화를 착용함으로써 한국의 간디라는 칭호를 받기도 했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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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기도 5000번
이대영 목사는 경북 예천군 금당실 출신으로 1921년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15회로 졸업하였으며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장립을 받고 1922년 중국 산동지방 선교사로 파송받아 1948년까지 선교사로 일하였다.
이후 1954년 승동교회에 부임하여 1968년까지 시무했다. 이 목사는 일생동안 자녀들과 함께 아침식사를 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새벽에 교회에 나오면 오전 9시가 넘어서야 기도를 마쳤기 때문이다. 이 목사는 매일 새벽마다 주기도문을 300번씩 했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물으니 이 목사가 일제말엽 중국에서 육로로 압록강을 건너 한국에 들어 오다 신사참배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신의주 경찰서에 구금된 때가 있었는데 이 목사는 그 때 감방에 들어가자마자 벽에다 얼굴을 대더니 식음을 전폐하고 주기도문을 5000번이나 기도하니 일본 형사가 문을 열고 “이대영, 나가!”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이 목사는 매일 새벽마다 주기도문을 300번씩 드렸다. 이 목사의 좌우명은 ‘다도고 다능력, 소도고 소능력, 무도고 무능력’이었다. 즉 기도 많이 하면 능력을 많이 받고 적게 하면 적게, 안하면 전혀 못 받는다는 뜻이다.
참으로 훌륭한 목회자이다. 오늘을 사는 후배 목사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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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목사다”
13세기에 기원을 둔 한 전설에 의하면, 에드워드왕이 웨스트민스터 예배당 건축현장을 살펴보러 나갔다. 마침 한 석공이 망치로 돌을 다듬는데 너무 기뻐서 찬송을 부르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왕은 조용히 다가가 “그대는 무엇이 그렇게도 기쁘오?”하고 물었다. 석공은 “나의 이 작은 손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짓는데 기쁘지 아니하겠습니까?”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그 옆을 보니 다른 한 석공은 얼굴을 찌푸린 채 원망과 불평으로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왕은 “그대는 무엇이 그렇게도 괴로운가요?”하고 물었다. 그 석공이 말하기를, “나는 처자식을 먹여 살리기 위해 죽지못해 억지로 일을 하고 있으니 괴롭지 아니합니까?”라고 대답을 했다.
이처럼 같은 일을 하면서도 기쁘게 일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괴롭게 일하는 사람도 있다. 우리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 억지로 목회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사명감을 가지고 기쁘게 목회하는 이가 있다. 제41회 총회장을 역임한 이대영 목사(1887~1968)는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1910년 집에서 쫓겨났다. 이 목사는 제9회 경북노회에서 목사로 장립을 받은 이후 평생토록 새벽에 잠을 깨면 두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내가 목사다!”하고 감사와 기쁨을 표현했다고 한다. 우리 후배들에게 큰 교훈이 아닐 수 없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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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교회
전남 고흥군 도양읍 소록리에 아름다운 섬 하나가 있다. 그 이름 소록도이다.
이곳에 환우들이 정착하기는 1915년 일본 총독부에 의해 환우촌으로 전용함으로 비롯되었다. 1916년에는 자혜의원을 설립함으로 병원업무도 시작되었다. 1922년에 제2대 자혜의원 원장 일본인 하나이(花井善吉)가 교회설립의 청원을 받아들였고 일본인 목사 다나까(田中眞郞)가 자원봉사로 와서 교회를 개척하였다. 그이후 몇 분의 일본인 목사가 교회를 인도하다가 1946년에는 출옥성도 김종복 목사가 순천노회의 파송을 받아 시무하던 중 1950년 9월 30일 6ㆍ25동란 때 후퇴하는 공산군에 의해 순교하였다. 지금 소록도연합교회 마당에 그의 순교비가 서 있다. 그후 고대작 목사, 지익풍 목사, 이덕길 목사, 여운원 목사, 김두영 목사, 박창훈 목사 등 여러분이 담임목사로 수고를 하였고 1997년에 지금의 김명환 목사가 부임하여 충성되이 봉사하고 있다. 지금 소록도에는 600여 명의 성도가 5개 교회로 분산해 예배를 드리고 있으며 교역자는 세분 뿐이다. 교역자들이 순회하면서 예배를 인도하려니 열악한 환경에서 수고가 많다.
정년 은퇴한 교역자도 좋으니 건강만 허락된다면 가서 도움을 주면 큰 보람을 느끼게 될 것이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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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비뽑기
땅 위에 던지거나 용기에서 뽑는 형식의 제비가 고대 세계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구약성경에는 제비를 사용한 여러가지 예가 있다. 새로 정복한 땅을 이스라엘 지파들에게 나누어 주기 위해(민 26:55, 수 14:2), 금기를 어긴 죄인을 찾아내기 위해(수 7:14, 삼상 14:42), 또 속죄제에 두 염소 중에 어느 것을 제물로 드리고 어느 것을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낼 것인가를 결정하기 위해(레 16:7~10) 제비를 뽑게 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도 제비로 선정되었다. (삼상 10:20~21) 제사장, 찬양하는 자, 성전 문지기 등의 직임도 제비를 뽑아 맡겼다. (대상 24:5, 25:8, 26:13) 구약에서 제비는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잠언 16장 33절에는 “사람이 제비를 뽑으나 결정은 오직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였다.
신약성경에서도 제비를 사용한 예가 있다. 유다의 후계자를 결정하는데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행 1:26)고 했다.
우리 총회는 제86회기 부터 임원을 제비로 뽑고 있다. 한국 기독교 역사상 초유의 일로서 타 교단에서도 많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모쪼록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한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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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
일본 자민당 정조회장 아소 다로(痲生太郞)가 2003년 5월 31일 도쿄도 대강연에서 “일제의 창씨개명(創氏改名)은 조선인들의 요구로 시작됐다”고 발언해 파문을 일으켰다.
창씨개명은 한국인의 황민화 촉진을 위해 1939년 11월 10일 조선민사령(朝鮮民事令)을 개정, 성명제를 폐지하고 일본식 씨명제(氏名制)로 설정하도록 1940년 2월 11일 부터 8월 10일까지 씨를 결정해 제출할 것을 명령한 일본의 대표적 민족말살정책 중 하나다.
조선총독부는 관헌을 동원, 협박과 강요로 강행하여 창씨를 하지 않은 이들은 자제들의 학교입학을 불허했고 노무징용에 우선했으며 식량배급 대상에서도 제외를 시키는 등 온갖 제재를 가하였다. 당시 한국인의 일본식 창씨는 극소수였고 대개 자기 본관을 따서 썼으며 ‘산천초목’(山川草木), ‘청산백수’(靑山白水), ‘에하라 노하라’(江原野原)’ 등 장난삼아 짓거나 성을 가는 놈은 개자식이라는 뜻으로 ‘견자’(犬子)라고 창씨하는 사람도 있었다.
애국인사들은 끝내 이를 거부하였으나 기한까지 322만호가 창씨하는 등 이에 따르는 이들이 전체 인구의 80%에 다랐다. 창씨개명은 한국어 말살운동과 함께 한국인의 얼을 없애려는 일본 제국주의의 간악한 행위였다. 당시 한국 교회는 이 가시밭길을 밟고 넘어 성경을 한글로 보급하여 언어의 보존을 꾀하였으며 신사참배 반대와 함께 창씨개명의 부당성을 개몽하였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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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천(召天)
인간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에 여러가지가 있다. 예를 들면, 인간계를 떠나 딴 세계로 간다는 뜻으로 타계(他界), 세상을 떠난다는 뜻으로 별세(別世). 세상을 버린다는 이유로 기세(冀世), 지상에서 지하의 세계로 간다는 뜻으로 하세(下世) 또는 하계(下界), 영원히 잠을 잔다는 뜻으로 영면(永眠), 영원히 떠나가 버린다는 뜻으로 영서(永逝), 영원한 이별이란 뜻으로 영결(永訣), 또는 영별(永別), 여의어 이별한다는 뜻으로 사별(死別), 죽어서 세상을 떠난다는 뜻으로 사거(死去), 존경하는 사람의 죽음을 높이어 일컫는 말로 서거(逝去), 죽어서 멀리 간다는 뜻으로 졸서(卒逝) 또는 졸거(卒去), 영원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장서(長逝) 등이 있다.
이 외 우리 전통 예절에서는 쓰지 않는 말로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뜻으로 ‘소천(召天)’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주로 기독교에서 쓰는 말이다. 이 말을 두고 왈가왈부(曰可曰否)한다. 제 나름대로 일리가 있겠으나 써도 좋은 말이다. 성경에는 “데려간다”(창 25:24), “도로 찾는다”(눅 12:20), “영원히 집으로 돌아간다”(전 12:5), “아비 집으로 돌아간다”(창 28:21)는 기록이 있다. 이는 하나님께서 부르신다는 의미가 그 말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우리 총회는 혼상예식서를 작성 결의하였는데 하관식 때 축사순서가 있고 그 내용이 “전능하신 주께서 이미 친애하는 형제 자매의 영혼을 부르사 천부께로 돌아가게 하신고로”라고 하였다(제13회 총회록 제77쪽, 하관식순서 제4항). 그러므로 우리 교회가 소천이라는 말을 쓰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닌 줄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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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성경학교
(신세원 목사의 교회사 이야기)
여름성경학교
여름성경학교란 여름방학을 맞은 아동들이 교회에서 단기간의 집중적인 교육을 받는 것을 말한다.
초기 이 학교의 수업은 2주간 또는 3, 4주간을 계속하기도 했다. 여름방학 기간, 간혹 아동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소일했다. 또 아동들이 보다 많은 성경에 관한 지식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미국과 캐나다 등지의 교회 지도자들이 이 두가지를 모두 해결하는 해답으로 찾아낸 것이 바로 여름성경학교다. 1866년의 보스톤제일교회, 1877년 몬트리올의 로얄아더(공립)학교, 1894년 일리노이주 호프데일감리교회, 1898년 뉴욕 주현(主顯)교회 등이 여름성경학교를 설립했다.
1901년에는 미국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했고 1922년에는 한국에서도 실시했다. 최초로 시작한 교회가 정동 제일감리교회라는 설이 있는가 하면 평북 선천에서 마펫 부인(S.A. Moffett)이 시작했다는 기록(기독신보 1932. 5.18)도 있다. 이와 별도로 1923년에는 서울중앙YMCA에서 ‘아동성경학회’라는 이름으로 같은 프로그램을 시작한 바 있다. 이는 또한 같은 해, 서울 시내 8개소에서 시행되었다.
한편 1924년 3월 31일에는 조선주일학교연합회 안에 하기아동성경학교 위원회를 조직한 바 있다(기독교대백과). 이리하여 여름성경학교는 경향 각지에서 활발히 실시되었다. 그간 여름성경학교를 통해서 많은 아동들을 교회로 인도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기독신문 김희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