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집수례, 악수례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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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집수례, 악수례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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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수례

서로 손을 잡고 반가움과 감사 등을 나타내는 인사법의 하나로 악수가 있다. 원래는 앵글로색슨계의 민족 중에서 자연발생적으로 나누었던 인사법이었으나 현재는 세계적으로 행하여지게 되었다. 정성을 다한 악수로 친근감을 상대방에게 전할 수 있으며 특히 소개를 받았을 때의 악수는 상호친교의 첫걸음이 된다. 악수에는 일정한 룰이 있으므로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손윗 사람이 아랫 사람에게, 부인이 남자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기혼자가 미혼자에게 먼저 손을 내밀어서 악수를 청하게 되어있다. 그리고 악수는 반드시 오른손으로 해야한다.

우리 장로회 총회헌법에 목사, 장로, 집사 임직순서 중 안수 후 공포하기 전에 악수례를 행하는 순서가 있다. 이는 ‘치하’하는 뜻이다(정치 15장 제10조 2항). 이 악수례를 한국 최초의 목사 7인을 장립하는 제1회 독노회에서는 ‘집슈례’라 칭하였던 것이다. 즉 “회장 마삼열씨는 긔도하시며 로회 회원들은 일졔히 신학사 셔경죠, 한셕진, 송린셔, 량뎐백, 방긔챵, 길션쥬, 리긔풍 칠인에게 안슈한 후에 우슈로 집슈례를 행하야 목사로 쟝립하니라”(뎨1회 독로회록 10쪽)로 되어있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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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公議會)

사가들은 한국교회사를 다섯 시기로 분류하고 있다.

즉 (一)장로회공의회젼사. (二)선교사공의회사. 이는 선교사로만 조직한 공의회로서 일명 영어공의회라고도 한다. (三)죠션예수교장로회공의회사. 이는 ‘션교사’와 ‘죠션인 총대’의 합성공의회로서 일명 죠션어공의회라고도 한다. (四)독로회사. 일명 총로회라고도 한다. (五)총회사가 그것이다.

한국의 초기 장로교회는 노회가 조직되기 이전이었으므로 교회의 치리행사는 선교사들이 개인 재량으로 하였다. 그러다가 합의체가 있어야 할 필요성을 느껴 1889년에 장로회공의회를 ‘쳐음 조직 하얏난대’ 당시에는 ‘북장로미순회’와 ‘오스트렐냐미순회’ 선교사들 뿐인난고로 회의명칭을 ‘미국 북장로미순과 빅토리야(오스트렐냐 중 일부) 미순 연합공의회’라 하였다.

1893년에 ‘장로회 정치를 쓰난 미순공회라 칭하난 회를 조직하얏나니’ 이것이 곧 ‘선교사 공의회’이다. 이 회는 경성 빈돈의 집에서 조직하였는데 설립자는 남장로회미순회원 목사 이눌서, 젼위렴, 최의덕 등이었다. 그 이후로는 이 공의회가 교회 치리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1901년 부터 조선인 총대가 참가하여 공의회를 조직하였으니 그해 회원은 조선인 장로 3인, 조사 6인, 선교사 25인었다. 이것이 곧 ‘죠션예수교장로회 공의회’이다(장로교회사 전휘집 1918년 8~18쪽).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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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석과 하석

한국은 동방예의지국으로 예의를 존중하였다.

그 예의의 기본은 바로 서열인 것이다. 우리네 선조들은 식사를 할 때에도 조부가 먼저 숟가락을 들어야 아버지가 들고 마지막으로 손자가 숟가락을 든다. 자리에 앉을 때도 조부, 아버지, 손자 순으로 앉는다. 어른이 자리에 앉기 전 아랫사람이 먼저 자리에 앉으면 꾸지람을 듣는다.

길을 갈 때에도 어른이 앞서고 연하자는 뒤를 따라야한다. 그러나 인사는 그 반대이다. 연하자가 먼저 인사를 하면 윗사람이 받는다. 방에 들어가서 앉는데도 순서가 있다. 어른이 상석에 앉아야 한다. 상석의 위치는 출입문에서 마주보는 정면이 상석이다. 대궐의 용상은 출입문의 정면에 있다. 한국의 상석은 아랫목인데 아랫목은 거의가 출입문의 정면에 있다. 초기 선교사들은 상석과 하석을 몰라 어려움을 겪었다.

선교사 언더우드는 후배 선교사들에게 한국인의 방에 들어가 선교할 때면 상석 아닌 말석에 앉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아무런 표식이 없는 방인데 상석을 알아내는 방법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으니 ‘갓’이 걸려있는 곳이 상석이고 그 정반대편이 말석이라고 가르쳤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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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한국기독교 초기 우리의 선배들은 오늘의 설교를 ‘강도’라고 하였다(뎨1회 독노회록 4쪽, 뎨1회 총회록 1쪽).

1914년 뎨3회 총회 개회예배에서는 ‘강해’(뎨3총회록 1쪽), 1916년 뎨5총회 셩챤례식에서는 ‘강셜’(뎨5총회록 6쪽), 뎨6총회 경건회 시에는 ‘강론’(데6총회록 9쪽), 1919년 뎨8총회 경건회 시에는 ‘말삼’(뎨8총회록 18쪽), 1921년 뎨10총회 경건회 시에는 ‘권면’(뎨10총회록 12쪽)이라 하였다.

그러다 1924년 뎨13회총회 시 ‘예수교장로회 혼상례식서’를 작성하면서 ‘설교’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하고 있다(뎨13회 총회록 76쪽). 동 례식서에 설교를 ‘경의(經意)를 간단케 설명함’이라고 부언하였다. 즉, 설교란 ‘성경의 뜻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주목할 것은 이 13총회에 와서 회록에 일본어가 등장하였다는 사실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노회 유지재단 기부행위의 규칙이 일본어로 기록되어 있다(뎨13회 총회록 69, 70, 71쪽).

이 일본어 기록과 ‘설교’라는 술어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전해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일본 사람들이 ‘설교’라고 하였는데 그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설교’는 일본식 술어라는 것. 지금도 우리 총회는 ‘강도사’라고 하지, ‘설교사’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본 이름을 찾아야 할 것이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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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주일


어린이 주일의 준수가 언제, 어떻게 기원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기록이 없다.

알려진 바에는 1856년 미국의 매사추세츠 주 첼시의 제일 유니버살리스교회 목사이던 찰스 레오나드가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제정하고 부모들의 헌신을 강조하였다. 1868년 미국 감리교의 한 위원회에서 매년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킬 것을 건의하였다. 이로써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83년 미국 장로교 총회는 6월 둘째 주일을 어린이 주일로 지정하였다. 한국 교회는 6월 첫 주일을 꽃주일로 기념하였으며 1925년 부터는 5월 첫 주일을 꽃주일, 즉 어린이 주일로 지켜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제13회 총회록 33쪽).

한편 한국의 어린이 날은 3ㆍ1운동을 계기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1922년에 시작되었다.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인 소파 방정환을 비롯하여 일본 유학생 모임인 색동회가 주동이 돼 5월 1일을 어린이 날로 정하고 기념 행사를 치루어왔다. 정부는 1970년 6월 15일 대통령령(5037호)으로 5월 5일을 어린이 날로 공포하였다. 어린이 날을 5월이나 6월로 정한 이유는 그 때가 꽃이 제일 많이 피기 때문이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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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풍습

중세에는 부활절 이른 아침에 흐르는 물가로 나가서 춤추고 노래한다.

옛 전설들은 부활절 아침에는 흐르는 물이 특별한 보호의 능력과 신유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간주되었다. 특별히 구름을 뚫고 나오는 광선을 보면서 3번 뛰어 오른다. 어떤 지역들에서는 동트는 순간을 기도와 노래와 축포와 타종 등으로 맞이한다. 이 옛 풍습으로부터 부활절 아침에 미국의 많은 지역들에서 드리는 일출예배가 유래되었다.

유럽 여러 지역에서는 부활절 예배가 끝난 후 사람들이 행렬을 지어 부활절 찬송을 부르며 마을 밖을 행진한다. 꽃이나 부활절 촛불로 장식된 십자가가 이 행렬의 앞장을 선다.

초기 교회에서는 새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흰옷을 입어야 했으며 이전에 이미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새 옷을 입었다. 이것들은 부활신앙을 의식적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일부 유럽국가들에서는 부활절에 어린 양을 주식으로 한다. 15~16세기 독일에서는 부활절에 토끼 모양의 과자를 선물로 사용하였다.

미국에서는 백합이 부활절 상징이 되어왔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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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 제정 유래


부활절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절기로서 탄생을 기념하는 성탄절과 함께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절기이다.

부활절은 신ㆍ구 교회가 같은 날에 지키는 가장 오래된 절기이기도 하다. 절기의 제정은 니케아공의회에서 비롯된다. 서로 다른 지역에서 역시 서로 다른 날에 부활절을 지키는 일을 통일시켰던 것이다. 모든 공의회들 중 최초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공의회로서 주후 325년 5월 20일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소아시아의 아스카니아호 동부 연안에 위치한 니케아(터키 이스닉시)에서 소집되었다. 318명의 주교들이 초청되었고 두 명의 장로들과 세 명의 시종들이 수행하게 되었다. 주교들 가운데는 박해의 표시로서 두 눈이 뽑힌 사람, 양손이 불구가 된 사람도 있었다. 이 공의회는 8월까지 계속됐다.

니케아 공의회는 부활절을 춘분 직후 망월(보름달) 바로 다음 주일로 고정하였다. 춘분은 항상 3월 21일에 있게 된다. 그렇다면 부활절은 3월 22일 보다 빠를 수 없으며 4월 25일 보다 늦을 수 없다. 부활절이 3월 22일에 오는 경우는 망월이 춘분날인 3월 21일에 오게 된 때이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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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의 대부흥운동

1907년에서 1937년에 이르는 30년은 실로 한국 교회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때였다.

이 기간 중에 한국은 간악한 일본에게 합병을 당하는 불행한 일이 일어났지만, 조선장로교회의 조직과 한국어성경이 완성됐고 특히 1907년에 일어난 대부흥운동과 같은 여러가지 감사한 일이 일어난 시기이기도 했다. 일본의 침노로 한국민에게 좌절과 절망감의 구름이 내리덮고 있을 때 한국 교회는 새로운 활로를 찾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사경회를 통하여 영적인 빈곤을 채우고자 함이었다.

사경회는 1890년 원두우 선교사가 서울에서 7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경연구를 시작함으로 비롯되었다. 전국적인 운동으로 발전하여 1906년에는 하디 선교사가 인도하는 원산에서의 사경회가 그 절정에 달했다. 드디어 1907년 1월 6일 부터 평양 장대현교회를 중심하여 선교사들과 시내의 한국인 신도들이 함께 모이는 대부흥사경회가 개최되었다. 이 사경회는 10일간이나 계속 되었으며 백만인 구령운동과 같은 전도운동으로 연결되었다.

한국 교회는 여기에서 얻은 영적인 신앙의 힘으로 일제 하에서의 모진 박해의 골짜기를 헤치며 수난을 견디고 전진하는 견인차가 되었다. 이 모든 것은 한국 교회의 장래를 예견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하고도 비상한 섭리였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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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권과 계


지금 우리나라는 복권열풍에 휩싸여 있다.

지난해 12월 부터 판매된 로또(lottoㆍ행운)복권 1등 당첨금이 천문학적으로 불어나며 빚어진 사회현상이다. 복권의 기원은 서양의 경우 고대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우구스투스황제가 로마를 복구하기 위해 연회에서 복권을 팔고 당첨자에겐 노예, 집, 배 등을 주었다. 동양에서는 중국의 진나라 때 만리장성 축조 등 국방비 조달을 위해 복권을 팔았다. 우리나라의 복권의 유래는 조선후기 산통계(算筒契)다. 산통계는 통이나 상자 속에 계원의 이름이 적힌 알을 넣은 뒤 그 통을 돌려 나오는 일에 따라 당첨을 결정했다. 근대적 복권의 효시는 1947년 대한올림픽위원회가 이듬해 열리는 런던 올림픽대회 참가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발행한 올림픽 후원금이다.

한데 로또복권의 1등 당첨 확률은 815만분의 1도 안된다고 한다. 더욱이 1등에 당첨된 사람의 80%가 모두 불행해졌다는 신문의 보도가 있었다. 이에 사회지도자들은 한탕주의로 사행심을 불러 일으킬까 걱정을 한다.

우리 교단은 1968년 계를 주선한 사람은 책임을 묻고 계를 해체하기로 가결한 바 있다.

김희돈 기자 등록일 2003-0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