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애양원 소개 (조선일보 기사 2001.7.27) [교계동정][사진]
분류: 소식- 교계동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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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종교사의 현장...여수 애양원
사랑의 원자탄’손양원목사 나환자들과 생활하던 곳 "
"사랑의 원자탄". 한국 개신교 120여 년 역사에서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사랑을 가장 감동적으로 실천한 사람으로 꼽히는 산돌 손양원(1902~1950) 목사의 일대기를 담은 책의 이름이다. 1950년대 나온 이 책은 많은 사람에게 깊은 감동을 주어서 6개 국어로 번역됐으며 영화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나환자 요양 치료시설인 전남 여수 애양원 교회의 담임목사였던 손 목사는 죽을 때까지 신자들을 돌보는데 혼신을 다했다. 그는 또 일제말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하여 5년간 옥살이를 해야 했다. 해방 후 애양원으로 돌아온 손양원 목사는 이번에는 자신의 두 아들을 살해한 좌익 청년을 양아들로 삼았다. 6·25가 발발하자 주위 사람들의 피난 권유를 끝까지 물리치고 남아 있다가 결국 공산군에게 순교했다. 어느 것 하나 보통 사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들을 한 사람이 모두 했다는 것이 경이로움을 준다.
애양원은 여수공항 뒷편에 있다. 비행기를 내려 공항 앞 정류장에서 버스를 타면 5분도 지나지 않아 애양원에 도착한다. 마을 입구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애향재활병원. 병원 앞 두 갈래 길 중 오른쪽을 따라서 10분쯤 걸어가면 애양원 교회가 나온다. 1909년 광주에서 미국인 선교사들이 시작한 애양원이 1928년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교회도 함께 이전한 것이다. 돌집으로 된 교회 건물은 한 차례 증축했을 뿐 손양원 목사 당시 그대로이다.
경남 함안의 독실한 개신교 집안 출신인 손양원 목사가 애양원 교회에 부임한 것은 평양 장로회신학교를 졸업한 이듬해인 1939년 7월이었다. 그는 나환자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잠을 자면서 복음을 전했다. 의료진조차 접근을 꺼리는 중환자실에도 서슴없이 들어가 환자의 목을 껴안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기도를 했다. "하나님 다음으로 나환자들을 사랑한다"는 손 목사에 감동하여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
신학생 때부터 일제의 신사참배 요구에 강력히 반대했던 손양원 목사는 애양원에 와서도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1940년 9월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해방 때까지 옥고를 치뤘다. 1차 만기인 1943년 5월 "전향하면 나갈 수 있다"는 검사의 회유를 거절하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감옥에 남아 있기를 택했다.
보통 사람의 상상을 뛰어넘는 손양원 목사의 사랑이 극적으로 드러난 것은 여순사건 당시20세 전후였던 두 아들 동인·동신이 살해됐을 때였다. 자신의 아들들을 죽인 좌익 학생이 체포되자 손 목사는 "내 아들들은 죽어서 천당 갔지만 얘는 이대로 죽으면 지옥갈텐데 그 영혼이 불쌍해서 어쩌나"라면서 구명 운동을 벌여 양자로 삼아서 뒤를 돌보아 주었다. 이렇게 먼저 세상을 떠난 두 아들은 지금은 부모와 함께 애양원 교회 밑 바닷가에 나란히 잠들어 있다.
삼부자묘를 지나 다시 5분쯤 걸어가면 "손양원 목사 순교기념관"이 나온다. 지난 93년 건립된 기념관은 손 목사의 생애와 신앙을 보여주는 유품과 유물이 전시돼 있다.평일인데도 전시실은 방학이기 때문인지 학생들로 붐볐다. 최준석 전도사는 "한해 동안 이곳을 찾는 사람은 약 4만 명에 이르며 최근에는 일본인 등 외국인도 크게 늘고 있다"고 말했다.
( 여수=리선민기자 smlee@chosun.com )
http://www.chosun.com/w21data/html/news/200107/20010726032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