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성경해석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구득영
글쓴이 : 구득영 날짜 : 2003/11/22 조회 : 43
[ 성경해석에 대한 몇 가지 생각 ]
03, 11 옥봉교회 목사 구득영(47회)
목회자로서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해석하고 설교해야 하는지, 새삼스럽게 여기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어떨지 몰라도, 그러나 그런 고민이 없으면 목회자의 자격이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말로서, 목회자 자신의 꿈과 이상을 달성하기 위해서 말씀이 왜곡되어 전해지는 한국교회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에 몇 자 적어봅니다.
먼저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 신약(새언약)과 구약(옛언약)을 바라보는 태도가 좀 구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왜 신약과 구약으로 구별되어 있는지, 여기에 대해 역사적으로 예수님의 오심을 전후로 그렇게 되었다고 넘어가지 말고,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달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구약의 가나안이라는 땅이 신약에서는 땅이 아니라 천국으로 나타나지 않습니까?
신약과 구약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율법인데, 이 율법이라는 것도 분명 그것이 구약에서는 복음으로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나 신약에서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 자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반응하는 인간들의 모습 때문에 말입니다.
그러나 신구약을 통틀어 일관되게 그 흐름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약속" 이라는 것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언약" 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약속은 구약의 틀 안에서는 제대로 그 모습이 보여지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오심으로 비로소 그 실체가 밝혀지는 것입니다.
구약은 아무리 구약 안에서 해석해보아야 율법 이상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율법을 지켜야만 구원을 받는다", 혹은 "율법을 지켜야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이다" 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둘을 똑같은 의미로 보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신약의 틀 안에서 보면, 도대체 이 율법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여기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에 대해서, 어떤 경우에는 폐해야 하는 것으로 보고, 어떤 경우에는 또 지켜야 하는 것으로 보기도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 이후에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할 율법과 그렇지 않아도 되는 율법으로 나누려고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율법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사도바울의 해석을 살펴봄으로서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요즘 인터넷 공간에서 종종 바울에 대해서 이단이라고 하는 자들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물론 사도바울 당시에도 유대주의자들이 그러했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와 다른 것은,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은 진리로 받아들이지만 바울의 주장은 예수님의 주장과는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기에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교회사에서도 이런 자들이 있었던 줄 압니다.
왜 이들이 그런 주장을 하는고 하니, 바로 행함의 문제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행함을 강조했는데, 왜 바울은 그렇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오해입니다. 여기서 이들이 말하는 행함을 저는 율법으로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이 율법의 특징이 바로 행함에 있기에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어서 로마서에서 행함과 믿음이 치열한 싸움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번에 십일조나 안식일과 주일성수 문제에 대한 논쟁을 살펴보면서, 이러한 틀이 좀 부족하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십일조를 이야기하면서, 예수님은 비록 구약의 율법이지만 이것을 부인하지를 않았고, 그리고 사도바울이 이런 율법을 강력하게 반대한 것은, 그것은 율법자체가 아니라 그 당시의 율법주의자들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십일조에 대해 총회에 낸 교수회의 글에서도 이런 내용이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저는 과연 갈라디아서나 골로새서에서 사도바울이 그렇게 율법을 반대한 것이 과연 그런 이유만으로 이해를 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히브리서에서도 그러하고 말입니다. 아니 지금 우리 대한민국에 그런 율법주의자들이 누가 있습니까? 한국에 사는 유대인들이 아니면 몰라도 말입니다. 그렇다면 그 말씀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사도바울이 그렇게 율법을 공격하는 것은, 그 당시의 율법주의자들만을 행한 것이 아니라, 옛언약을 통해서 드러난 인간의 율법주의 모습에 대한 이 세상을 향한 공격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의 그러한 태도는 로마서에 의하면, 모든 인류의 보편적인 속성인 죄로 드러나는데, 그것이 바로 인간 자신들의 행함을 강조하는 율법주의적 사고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모습이고 말입니다. 율법으로 인해서 드러난 인간의 죄, 즉 자기 노력으로 구원받으려고 하는 자기 자신을 버리지 못하는 종교적 행태들, 바로 그런 것들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로마서에서 믿음이 이야기면서, 그 믿음은 오직 "아들"로 말미암는 것임이 강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로마서의 주제가 "아들"이지 소위 말하는 "이신득의"가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자신들이 아니라 다른 그 누구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행위가 자기가 아니라 주체가 그분에게 있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율법과 율법주의는 분명히 다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려고 한다면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기에, 우리 인간에게는 선한 율법이 아니라 "율법주의"만이 남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그것을 인류의 대표자로서 잘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그 당시에 그런 짓을 했으면, 역시 지금 우리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들에게 있는 율법주의적인 모습이 무엇입니까? 십일조, 안식일, 그리고 예배당이 아닌 성전으로 불리우는 한국교회 등, 이러한 상황에서 그런 문제에 대해서 어떻게 반응을 보여야 하겠습니까? 물론 성경말씀이 이러한 시대상황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여기에 대한 상황인식은 분명히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성경을 해석할 때 옛언약을 대하는 모습과 옛언약을 대하는 태도는 좀 달라야 한다고 봅니다. 구약성경은 신약에 의해서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고, 그리고 더 나아가 복음서의 내용들은 바울서신서들에 의해서 보다 정확히 밝혀져야 한다고 봅니다.
이런 의미에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산상설교집"은 복음서에서의 예수님의 명령들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고 봅니다. 과연 예수님의 명령들을 오늘날 우리가 문자적으로 그대로 지켜야할 것들인지 아닌지를 말입니다. 저는 이 책이 복음서와 바울서신서들을 잘 연결하고 있다고 봅니다. 문창수 목사에 의해 두 권으로 번역이 되어있는데, 이 두권의 책들을 보약으로 생각하고서 푹 달여서 먹어보라던 정근두 목사님의 수련회 말씀이 지금도 새롭습니다.
조금 위험한 생각일지 몰라도, 저는 각 복음서들의 위치가 구약과 신약을 연결하는 그런 과도기적(?) 위치에 있다고 봅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들을 사도바울에 의해 새롭게 해석되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사도로서 예수님의 말씀도 새롭게(?) 해석하는 그런 권위가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사도바울에 의해서 새로운 바울복음이 만들어졌다고도 합니다만, 그러나 그것이 아니고 새롭게 조명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어디까지나 그분에 의해 보내심을 받은 사도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사도바울에 의해서 가장 확실히 드러나고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약은 구약대로 해석해서 율법을 지키자고 하고, 복음서는 복음서대로 해석을 해서 예수님의 명령을 지키자고 하고, 그렇게 되니까 실질적으로 율법이나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스스로 지킬 만한 것을 취사선택해서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실 그런 것은 하나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러니 성경말씀이 왜곡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서신서에 도착하게 되면 당연히 엄청난 혼란에 당면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렇게 강조해서 말하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가 도저히 서게 될 자리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왜 성경이 굳이 66권이나 필요하느냐는 점입니다. 창세기 다음에 바로 복음서로 들어오면 안 되고, 왜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를 거치고 역사서를 거치고 선지서를 거쳐서, 그렇게 많은 시간들이 지나서 그때서야 비로소 예수님이 오셨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옛언약 시절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처절하게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의 죄가 얼마나 뿌리깊은가를 수백 수천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동원해서 수천년에 걸쳐서 보여준다는 것입니다. 이런 차원에서 옛언약이 의미가 있는 것이며, 이러한 일들이 있고 난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들의 그 죄악을 제거하시기 위해 자기 몸을 희생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냥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 있다고, 어설픈 그런 낭만주의를 말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은 왜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직접 오셔서 죽을 수밖에 없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렇게 신약과 구약이 서로 극명하게 대조되는 것이고, 바로 여기에 대해 사도바울이 목숨을 다해서 증거하고 글로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자기의 모든 것은 다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십자가만을 증거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국교회는 과연 어떠합니까? 이러한 십자가가 증거되고 있습니까? 구약에 안식일과 십일조에 관한 계명만 있는 것도 아닌데, 절기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그 유명한 유월절이 있는데 왜 엉뚱하게도 맥추절이 지켜지고 있습니까? 유월절은 성찬식으로 대체가 되었던가요? 과연 그래서 지키지 않습니까?
저는 그것은 바로 주님의 몸으로서 교회가 아니라 인간들의 이 어리석은 두 눈에 보이는 교회 때문에 그렇다고 봅니다. 이 눈에 보이는 교회유지를 위해서 구약의 율법들이 총동원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야말로 선한 율법을 모독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지금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안식일과 십일조 등이 긍정적으로 논의될 수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시절에는 왜 예배당 건물이 없었습니까? 과연 그들이 가난해서 교회를 지을 돈이 없어서 그랬을까요? 평소에는 교회라고 하다가도 교회당만 지으면 "성전건축" 이라고 하는데, 정말 이래도 되는 것입니까? 너무나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지 않습니까? 정말이지 감정이 복받쳐서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제대로 정리되지도 못한 어설픈 글을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적다가 보니 또 설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회에 봉사한다는 핑계로 학업에 게으름을 피웠던, 참으로 어리석은 선배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몇 자 적어보았다고 너그럽게 이해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엉뚱한 것이 마음 빼앗기지 마시고 오직 그리스도만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분만이 저와 여러분의 상급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