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내가 아는 [주일성수와 십일조]
글쓴이 : 강종수 날짜 : 2003/12/05 조회 : 1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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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과 십일조에 관한 해석문제는 신구약의 예언 성취적인 면에서 해석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적 성경 해석은 비단 이 두 가지 뿐아니라 모든 율법과 성도의 삶의 형식을 재해석하는 관문으로 봅니다.
율법주의, 율법적이란 말은 두 가지 측면에서 나온 말일 것입니다. 하나는 구원의 방법론적 신학에서, 그리고 또 하나는 구원받은 자의 행위 규칙에 대한 엄격함을 무율법주의나 혹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신 영적 자유 은총을 너무 강조한 나머지 비아냥거림으로 나온 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혹은 해방 후 타 교단이 고신을 두고 율법주의 운운한다든가).
문제는, 신학적이면서도 너무 추상적으로 주일 성수에 대한 견해를 말하면 현실적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자칫 갈등 할 수 있으므로 좀은 규제가 강화되는 것 같아도 행위 규칙을 돈독하게 정하는 것이 좋다고 봅니다(구 청교도식). 이런 관점에서 성경해석의 근본을 다시 재론하고 율법주의 내지는 율법적이다거나 사변을 장황하게 거듭하는 것은 석연치 않다고 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른 성경의 해석이며, 적용 부분에서는 교단의 강화적 이념이 뒤따른다고 봅니다. 가령 성경에, 예수를 순교적으로 믿어야 가장 귀한 신앙으로 보이는 것은 우리 고신 교단의 특색이지 타 교단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 것입니다. 동시에 성경의 보편적인 원리인가 하는 문제는 그렇게 쉽게 답할 문제가 아니라 봅니다.
그처럼 주일 성수와 십일조, 예배와 기도 및 전도생활에 대한 강도 높은 성도들의 삶 형식을 심지어 우리는 성도의 의무라고까지 하며 거의 잘 지켜 왔습니다. 이런데, 작금에 주일에 밥 사먹는 것이 예사롭습니다. 시장 가는 것도 누가 말릴 수도 없고, 시간 나면 예수 믿자는 식입니다. 여유 되면 십일조도 하고, 새벽기도는 꼭 해야 하나? 수요 예배는 살기 어려운데 꼬박꼬박 어떻게 참여하나, 목사님 심방(구역예배)도 부담스럽다. 전도는 은사나 받은 사람 몫이지 나는 잘 못한다. 예배는 은혜롭게 하면 되지 무슨 형식이 그렇게 깐깐해야 하냐,...
사실 현실은 언제부터인가 고신도 여러 곳에서 이런 식으로 가고 있습니다. 부인 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먼저 결론을 적는다면, 한마디로 대표격이 되는 [예배]가 상실되고 충실치 못하면 끝나는(?) 것이라 봅니다.
1. 주일성수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 발췌하고, 고재수 교수의 안식일에 대한 간단한 내용 및 고려신학대학원 교수님의 논문을 발췌해 올립니다.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1. 종교적 예배와 안식일에 대하여)
21.6 ...각 가정에서는 날마다 홀로는 은밀하게 예배드릴 것이며 공동집회에서는 보다 더 엄숙히 예배드릴 것이니, 하나님이 그의 말씀이나 섭리에 의해서 그곳에 예배드리도록 부르시는 때에 부주의로나 고의로나 그 모임을 경시하거나 외면해서는 안된다.
21.7 ...특별히 칠일중 하루는 안식일로 정하시어 하나님께 거룩히 지키게 하셨다. 이 안식일은 창세부터 그리스도의 부활까지는 일주일간의 마지막 날이었으나, 그리스도의 부활 후부터는 일주간의 첫날로 바뀌었으니, 성경에서는 주의 날이라고 칭한다. 이 날은 그리스도교의 안식일로 이 세상 끝까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21.8 이 안식일은 먼저 사람들이 자기의 마음을 잘 준비하고 그들의 일상의 요구를 미리 정돈한 후에 그들의 세속적 직업과 오락에 대한 자신의 일과 말과 생각으로부터 떠나서 종일 거룩한 휴식을 지켜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공적, 사적 행사에 참여하며 부득이한 의무 수행과 자선행위에만 시간을 바쳐야 한다.
=> ‘십계명 강해’, 고재수, (여수룬,1993),p.58 안식일(주일)
“일곱째 날은 거룩한 날이기 때문에 한 주간 중에서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는 날로 정해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모든 날에 하나님을 섬겨야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떤 날과 다른 날을 비교해 보면 하나님을 섬기는 모양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 주일은 특별히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바쳐진 날이므로 할 수 있는 만큼 일상 업무를 쉬어야 하며, 할 수 있는 만큼 교회의 예배에 참여해야 합니다. ”
=> 한정건, 현유광 - 그리스도인의 헌금생활의 표준으로서의 십일조
“... 구약의 신약에도 적용될 것인지에 대한 문제는 하나의 큰 신학적인 문제이다. 혹자는 새언약의 완성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십일조 포함)을 완성하셨다고 하며, 아직도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은 십자가의 주님을 모독하는 것으로까지 말한다. 우리는 성경이해에서 가장 큰 원리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근본적으로 구약의 원리와 신약의 원리가 다르다고 하면 안 된다. 구약도 하나님의 말씀이고 신약도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율법의 실제 적용에서는 너무 경직되어서는 안 될 부분이 있다. 즉, 제 칠일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명령에 있어서, 그 칠 일째(토요일)를 경직되게 고집해서는 안 된다. 구약의 안식일의 원리는 변하지 않으면서 신약의 안식일을 더 의미 있게 지켜야 할 필요성이 생긴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를 입은 성도로서, 자유함 안에서 주일성수를 율법적으로 얽매이지 말고 오히려 믿음으로 성수할 수 있게 하라는 말로 이해하고 옳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교단이 주일성수를 강하게 교훈 한 것이 율법주의였던가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반성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주일에 종일 예배와 구제와 돌봄의 거룩한 삶이 넉넉히 수용되고 생활화 되기 전의 초보신자라든가, 혹은 소위 시험에 든(?) 자로서 주일이 오히려 사는 게 더 바쁜 식이 될 때, 우리가 정죄를 할만한 근거는 없고, 다만 은혜 안에서 권면이 앞서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가령 과거 박윤선목사님의 주일성수 문제 제기는 지금의 사안으로 해석할 성질이 아니라 봅니다. 당시의 고신 정신은 모든 형식에 경건과 절제가 요청되던 시절이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그 정신은 살아야 한다고 봅니다. 가끔 한상동목사님의 지도가 매우 어리석음이나 큰 실수로 부각시키는 것처럼 어떤 말들 속에서 그렇게 느껴질 때마다 아픕니다. 우리가 그분의 자취를 무엇으로 감당하려고 함부로 말을 하는지 두렵습니다.
주일에 공무원 시험 등 자격증 취득을 위한 시험을 치루지 않고 주일성수(?)를 위해 살아왔던 고신인 안에 사람들은 어리석었던가? 지금도 어리석은가? 주일에 살기 위해 시험 친다고 아무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단지 나의 기본적 고민은 선배들의 신앙 전수를 함에 있어 그 이념적 차원의 물음입니다. 고신으로 편목하는 원인입니다.
2. 십일조
=> 한정건, 현유광 공동 논문 - 그리스도인의 헌금생활의 표준으로서의 십일조
“...기본 원리는 신약시대에도 그대로 살아있어야 한다. 따라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불가피한 경우 외에는 최소한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 그리고 또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있다면 그 이상도 기꺼이 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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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쪽 각주 6). 마 23:23에서 ... 여기서 "이것도 행하라"는 것은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을 행하라는 것이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는 것은 십일조도 버리지 말라는 것인데, 십일조를 버리지 말라는 것은 부정 시상과는 관계가 없으며, 따라서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십일조 헌금의 효력이 상실된 시점으로 보는 것은 도무지 관계없는 일임을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부정 시상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때가지만 효력이 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고 타당성이 없는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예수님의 죽음까지만 지키고 그 후로는 안 지켜도 된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실로암교회(이광호목사)서신강좌(144."십일조"를 어느 교회에 내야할까요?(2002.9.7)
전체 해석은 사이트에서 참고하시고, 십일조에 관련하여 간단한 발췌만 합니다. 앞뒤 연결부분이 없어서 혹 편협적인 관찰이 될 수도 있을 것이나 증거 하시고자 하는 내용은 상하지 않을 줄 압니다.
“ ... 우리 한국교회에서 십일조를 율법화 하고 있는 것은 시정되어야 할 문제입니다. 그리고 ... 한국교회의 십일조 연보제도에는 전반적으로 많은 문제가 있습니다.
..... 구약성경의 십일조 제도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인해 그 의미가 완성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즉,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마23:23)고 하신 기록은 성도들이 십일조를 계속하라고 주신 내용이 아닙니다. ..... 이제 결론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일조 연보를 할 때 의무적으로 하지말기를 바랍니다”.
나는, 신대원 교수님의 논문과 이광호목사님의 논문에서 원리적으로는 차이를 크게 발견하지 못하지만, 다소 그 강조함에는 조금 다르게 나타난 것을 보게됩니다.
십일조를 꼭 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 비 성경적이면 성경적인 것은 편하게 알아서 내는 것일까? 아니면 소위 그렇게 가르치기도 전에 들을 수 있는 평신도의 말처럼, 신앙이 깊은 사람(직분자?)들이 내는 것이다고 결론적으로 평신도들의 양심에 맡길 일인가? 십일조를 내는 사람들은 논문처럼 원만한 신구약 성경 이해가 갖추어져서 잘 내는 것일까? 마땅히 듣고 순종함으로 자원하여 내고 있는 것일까? 이것 저것 알지도 못하지만 순종하여 거의 억지같이 십일조 내는 생활 잘 하였더니(?) 축복 받은(물질만 아니라) 사람들의 묘한 신앙 간증과 그 원인은 어떻게 이해 해야 할까?
위로하기 위한 신학은 인본화입니다. 바른 신학 터 위에서 사랑하는 것은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숨겨진 믿음의 또다른 권면성 신앙 규칙은 신학적 논제가 아니라 차라리 교단 이념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나는, 주일을 온전히 - 상업적 거래 없는 날(시장보기 등등)로 온전히 드려져야 하며, 질적으로도 특별한 날로 이해합니다. 이 날의 축복 선언은(창2:3 ‘하나님이 일곱째 날을 복 주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신약에도 예수 안에서 유효하다 봅니다. 이래 저래 현실 이해 다해버린다면 무엇으로 교인의 칼라를 보일 수 있을까 합니다. 교인인지 불신자인지 무엇으로 구분할까? 사랑, 봉사, 이런 저런 좋은 말이 나오겠지만, 그런 것은 불신자들에게도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고, 기독교 신자가 주일에 교회라도 꼬박 꼬박 나가야 불신자들에게 증거가 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성도의 감사 표현에 기본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십일조도 못내는 이유가 많은 사람이라면 무엇에 물질 봉사를 하겠는가 싶습니다. 솔직히 목회 현장에 경험이 그러하지 않던가요? 그래서 십일조를 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입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봅니다. 그 은혜는 어떻게 어떤 연관으로 입혀주실 지는 모르지만, 반드시 은혜를 받는 줄 믿습니다.
어느 날 평일인데, 교회당 가까이 저녁 식사를 하러 갔더니 거기서 우연히 교단 목사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후에 또 그 곳에서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주인 왈, 목사님이시죠? 예, 인사를 하고 저번에 오신 그 목사님은 주일에 성도와 식사를 오셨습니다(목사님두....우리 식당에 장사를..). 나는 그 소리를 듣고, 그래요? 목사님이 주일에 식사를 오셨어요? 그러고 왜 이 소릴 듣고 주일에 밥 장사 해주세요, 하는 간접적인 소리를 - 구약 표현으로, 이 할례 받지 못한 이의 권면을 받아야 하나! 싶어 얼마나 짜증이 났는지 모릅니다. 그 뒤 그 음식점을 잘 지나가지 않습니다.
강종수목사 홈페이지 http://nulserom.wo.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