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고신 현안 세가지 재고
분류: 교단- 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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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세령 날짜 : 2003/11/24 조회 : 218
고신의 현안 세 가지 재고
지난 총회 후에 우리 교회내에서 진행되는 흐름에서 세 가지의 사항을 함께 나누고 싶다.
첫째는 이성구 교수의 논문에 대한 신학적 판단이고 두번째는 학교 법인 고려학원의 관선이사 파송 이후의 진로에 대한 건이고 세번째는 동대구노회의 이광호 목사에 대한 제명건이다.
첫째는 이성구 교수의 논문에 대한 신학적 판단에 대한 건이다.
(이성구 교수 논문을 번역된 것이지만 전부 정독하고 또한 반복해서 문제의 부분들을 읽었고 또한 신학부에 제출된 박종칠 목사의 보고서도 제시된 내용들을 논문과 대조하면서 전부 확인했고 그리고 이성구 교수의 신학적 답변도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신대원 교수회의가 이성구 교수의 논문에 대해서 신학적 문제가 없다고 결론을 내린 일에 오류가 없음을 확인했다. 그런데 어떻게 총회의 신학부는 성경의 영감을 부인하고 모세의 저작성을 부인한다는 그러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는지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몇가지 문제를 나름대로 정리해서 의문시되는 부분에 답변이 가능하다.
먼저 용어에 대한 건이다.
전승, 전설(Sage) 등의 용어에 대한 의심을 하는 것은 논문이 제출된 상황에서의 일반적인 푠현이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성경 내용을 전승이라고 표현했을 뿐이지 소위 전승사비평이 추구하는 엄격한 의미의 전승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특별히 전승사 비평이 특정한 장소와 관련해서 전승의 발생을 탐구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오히려 이성구 교수는 남북왕국 어디서나 존재했던 아브라함의 선택 신앙을 근거해서 아모스의 선지자의 예언이 형성되었음을 밝혔다(하나님의 부름으로). 이는 전통적인 전승사적 방식을 뒤엎는 관점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전승사적 방식을 말하는 것은 용납되기 어렵다.
따라서 이교수의 논문에서 사용된 전승, 전설이란 표현은 단지 성경의 내용 그 자체를 표현하는 학문적인 방식이지 이것이 곧 그 용어의 발생과 특정하게 사용된 특정 학파의 견해를 수용하는 입장과는 거리가 멀다.
두번째는 최소논리에 대한 의심이다. 예를 들어서 논문에서 신명기의 저작권이 보통 기원전 7세기 이하에서 논의되는 분위기에서 논문은 8세기 이전의 가능성을 열어놓았다. 이것을 가지고 신명기의 모세 저작권을 부인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나치다. 논문은 논리적 증명이다. 기원전 7세기의 보편적 주장의 약점을 들어서 그리고 강하게 8세기 이전에 신명기의 존재 가능성을 열었다는 것은 신명기가 언제 저작되었는지의 적극적인 고백이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논문에서는 보편적인 견해를 논파하는 것에 그치고 이 이전에 있던 아브라함의 선택신앙이 8세기의 아모스에게 영향을 미쳤음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기에 그 이상 신명기가 모세로부터 기원했음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다. 논문은 좁은 목적을 가지고 기록된다. 따라서 논문은 8세기 선지자에게 과연 신명기의 내용이 영향을 미쳤는가만을 확인하면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한세기 후에 기록되었다는 신명기 저작권에 대한 비판을 가하고 아모스 이전으로 끌어 올림으로 논문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고 이러한 설득력이 학위 논문을 받을 수 있는 근거가 된 것이다.
따라서 신명기의 저작권에 대한 고백적인 판단은 논문을 통해서 이루어질 수 없다. 이것은 그의 실제적인 신앙 고백을 통해서만 확보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논문의 작업은 최소논리에 의한 최대 논리를 확보하려는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학자들의 학문적인 치열한 노력의 산물이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하기는 커녕 이를 자유주의 신학인 것처럼 호도하는 사태는 개혁주의 신학의 교회적인 정착을 가로막는 일이다.
최소논리라는 것은 최대 논리 즉 신앙고백적인 진술을 위한 길을 열어놓은 작업이다. 따라서 현금의 지배적인 신명기 저작의 7세기 혹은 그 이후의 논리에 대해서 아모스 이전 시대에 존재했음을 밝힘으로 모세의 저작권을 논할 수 있는 분위기를 형성할 수 있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모세의 저작권을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고백적인 주장의 학문적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최소논리에 의거해서 최대논리 즉 고백적 진술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
따라서 이교수의 논문이 신명기의 모세 저작을 부인한다는 결정은 오류임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그가 신명기의 모세 저작을 믿는지 믿지 않는지 논문을 가지고서는 판단할 수 없다. 더우기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제 삼자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이것이 일반적인 학계의 평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겠다. 다시말하면 이성구 교수는 신명기 저작에 대해서 7세기의 요시아 시대를 넘어서 8세기 즉 아모스 시대이전에 존재했음을 최소한으로 논문에서 주장했기에 신명기의 저작을 8세기 이전 어떤 시점으로 잡고 있다. 그렇기에 그의 정확한 고백적인 저작권은 그만이 고백하는 상황이다. 따라서 신명기의 저작권은 그의 고백을 통해서만 알수 있다. 우리는 총회석상에서 그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고백을 들었다. 이것을 받아야 했다. 이것은 이미 교수 임용시에 비평학에 대한 논문에서 이미 밝혀진 사실인데 이를 이렇게 뒤집어 엎어서야 되겠는가?
학문적으로 말한다면 그는 정말 개혁주의 신학과 고백에 충실한 논문을 썼고 도무지 통하지 않는 현실에서 고백에 충실한 논문을 쓰려고 노력한 학자이다. 신대원 교수회의가 이것을 받은 것이다.
이제 몇가지 이성구 교수의 논문에 대한 신학적 결정에 미친 행정적인 문제를 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먼저 박종칠 목사가 신학위원회에 제출한 소위 해외 교수들의 평가서이다.
마치 해외의 건전한 신학교 교수들도 이성구 교수가 자유주의 학자인 것 처럼 오해하는 평가서들로 보인다. 왜 이러한 신학교 교수들의 글이 우리 교회의 신학적 판단을 위한 자료로 사용되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 신학교 교수와 우리 신학교 혹은 교단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와 직접적인 자매관계의 교단들의 구약 교수들의 평가서는 전혀 실리지 않았다. 우리 교단과 자매관계에 있는 화란의 두 신학교가 있다. 그곳의 교수들이 이금조 목사가 신학부장으로 있을때 분명 의뢰를 받았고 평가서를 제출했다. 그런데 그러한 보고서들은 실리지 않았다. 왜 들어온 자매관계의 한 교회의 신학교수들의 정말 공적인 보고서는 배제하고 아무 관계가 없는 신학교 교수들의 보고서가 총회의 판단을 위해서 사용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래도 되는 것인가? 박목사의 보고서에 들어있는 학교들이 정말 개혁주의 학교들인가? 근본주의 학교들은 아닌가? 진정한 개혁파 신학이 이교수의 논문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고신 교회 신학부가 정말 들을 생각이 있었는가?
심지어 박교수의 보고서에는 L교수의 논문 발표 평가에 대한 답변서까지 첨부했는데, 실제로 이성구 교수가 지적한 것은 에스겔 당시의 시대 정황에서 에스겔의 신학을 논하기보다는 교의적인 접근에 대해서 지적하고 논평한 것인데 이를 신학적으로 시비하는 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납득이 되지 않는다(L 교수의 발표 논문과 이성구 교수의 평가 발표 원문을 보았다).
두번째는 왜 신학위원회는 문제의 본인을 불러서 그의 논문에 대한 해명을 듣지 않는가? 이런 식으로 일을 처리해도 되는가? 가장 중요한 일을 빼먹고 처리하는 것을 중립적이라고 생각하는 것인가? 이것은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사람을 잡는 방식이다. 그리고 생각해보자. 총회석상에서 내용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도 않고 "한번 보니 아 이래서 문제가 되는구나"식의 발언이 되는 이야기인가? 대부분 읽지 못한 총대들 앞에서 이런 식의 발언이 통하는 현실이 너무 안타깝다. 논문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저자를 불러서 대화를 하고 저자가 논문을 어떤 태도로 작성을 했고, 의문이 되는 부분의 진의가 무엇인지 물어야 하지 않겠는가? 혹자는 최선으로 심사를 했다고 하지만 필자는 최선의 길을 피하면서 심사했다고 평가한다.
세번째는 이성구 교수의 논문에 대한 심사 과정에 있어서 50차 총회가 주석을 써서 그의 입장을 해명키로 결정을 했지만 바로 다음해에 51차 총회는 다시 그의 논문에 대해서 재론을 해서 논문을 번역토록했다. 지난 주 이용호 목사의 시론에 의하면 총회의 결정은 다음 해에 바로 재론할 수 없다고 했다는 명목이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내용상 그것도 소총회를 통해서 재론했다. 그래서 실제로 아모스 주석 발간 비용에 대해서는 어떤 지출도 하지 않았고 51차 총회의 논문을 번역하자는 결정을 위해서는 삼백만원의 재정을 지출했다. 이것이 법적인 질서가 서는 총회의 모습인가? 내용은 차지하고 형식과 절차도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이제 이성구 교수의 논문에 대한 총회의 신학적 판단에 대해서 결코 옳지 않은 판단임을 제시한다.
한번 생각해 보자 북왕국 여로보암 II세 시대에 물질적으로 국가적으로 번성한 이 시대에 아모스 선지자가 하나님의 부름으로 홀연히 일어나서 그들의 풍성한 제의 밑에 깔려있는 잘못된 선택 신앙을 책망하고 제의가 담아야 할 바른 의와 공평을 흐르게 하라는 메세지의 확보를 위해서 쏟아야 했던 그 긴세월의 작업을 이렇게 짓밟아도 되는 것인가? 현실의 물질적인 번성을 유지시키는 제의신앙 즉 신앙을 보존하는 틀로서 예배행위에 대해서 철저히 비판하면서 이러한 예배가 보존하는 신앙의 틀 특히 선택신앙의 참된 정신은 바로 사회적인 삶에서 약자에 대한 의와 공평이 흐는 제의가 되어야 함을 말하지 않는가? 얼마나 오늘의 풍요시대에 그리고 지난 날 80년대 이전에 한국 사회가 겪었던 고통을 짊어지고 성경적인 윤리의 대안으로 몸부림 친 논문이다. 80-90년대에 나온 한국인의 해외에서의 박사학위 논문들을 교단에 관계없이 살펴보면 당시의 한국 사회가 겪었던 고통에 대해서 교회가 바른 답을 성경적으로 제시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대부분 작성되었음을 알수 있다. 구약학에서 이러한 질문에 대한 한국인으로서 쓴 거의 첫번째의 작품이 이성구 교수의 논문이다. 이를 평가하고 함께 나누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이성구 교수가 보여온 교회 정치적인 행보에 대한 평가는 그 사안으로 다루어야 한다. 그리고 그가 제출하는 사안을 교회가 평가하면 된다. 논문은 논문으로 다루어야 한다.
두번째 현안은 복음병원과 관련된 것이다.
관선이사 체제를 통해서 병원이 회복단계로 접어들고 있는 상황임을 알리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정말 이러한 관선이사 상태에서 벗어나서 이전의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진행하는 것인가? 만약에 이사를 교회가 직접 파송하는 일이 회복되었을때 간접경영이라고 하지만 정말 교회가 소유하고 관리하는 것이 아닌가? 거대한 병원의 경영과 감독이 교회의 손을 떠나서 겨우 회복되고 있음을 볼때-물론 자금의 투자는 별도로 이해하고-진정 교회의 것으로 회복되어야 하겠는가? 왜 이러한 근본적인 질문에 대해서 계속 논의 자체가 봉쇄되는 분위기를 만드는가?
즉 공석에서 제 삼자 인수에 대해서 말도 꺼내지 않는 분위기가 형성되는가? 왜 삼자 인수가 안되는가? 왜 하나님의 뜻은 삼자 인수가 아닌가? 교회가 건사하지 못할 만큼의 비대해진 병원의 소유와 경영의 목적이 무엇인가? 정말 교회가 그 병원을 가지고 어떤 복음에 합당한 일을 하려고 하는가?
복음병원이 경영이 정상화되면 연약하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구호병원으로 탈바쿰하려는 자세를 다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는 첨단 시설의 암병원이 되려고 한다면 왜 굳이 교회가 이를 소유하고 있어야 하는가? 더 자금력이 좋고 경영이 효률적인 이들이 맡아서 관리 경영하는 것이 더 국가의 경쟁력에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교회는 복음의 정신이 구현된 직접적인 일에 소용되지 않는 재산 관리에 신경을 쓰지 않아야 한다. 돈과 재산은 현대 사회에서 힘과 권력을 생산하고 자리를 만들어서 힘을 신으로 삼는 타락의 선봉에 서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복음 병원을 포기하자. 경영 정상화 이전에 이러한 일이 생긴다면 도덕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경영을 정상화해서 사회에 환원하고 교회는 정말 교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섬김의 일에 몰두하자. 잃어버리면 더 부요해지는 복음의 원리가 교회를 더 굳게 세울 것이다. 돈을 넣지 않고서는 말을 하지 말라는 식의 분위기를 경계한다.
우리는 지난 몇달동안 관선이사 시대를 바벨론 포로라고 불렀다. 그러나 지금 필자는 바벨론 포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바벨론 포로의 의미는 포로됨에 대한 강조가 성경의 의미가 아니다. 바벨론 포로의 성경적인 의미는 새로운 언약을 맺는 광야와 같은 장소이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시내에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것과 대조해서 다시 광야 바벨론으로 가서 이스라엘은 마음에 새로워지는 새언약을 맺었던 것이다. 단지 포로로 가는 것만을 성경이 가치있게 판단하지 않는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앗수르의 포로로 갔지만 성경은 언약을 말하지 않는다. 바벨론 포로가 의미있기 위해서는 마음의 새로워짐, 강퍅함에서 마음의 부드러워짐, 죄의 회개와 사죄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서 돌아와서 새로운 교회, 나라를 시작하는 것이다.
오늘 관선이사의 사태가 진정한 바벨론 포로가 되기를 바란다면 교회는 이전의 부정과 불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죄를 회개하고 이러한 사태에 이르게 된 근본적인 원인인 수익기관화하는 과정과 만성화된 악성 방식을 버려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나님보다 병원을 의지해서 교회를 세우고 건물을 세우려 했던 모든 악에 대해서 돌이켜야 한다. 잃어야 할 것은 잃어야 바르게 세울 수 있다. 그래서 바벨론 포로의 기간은 일이년이 아니고 두세대가 더 지나는 칠십년이 되어야 한다고 예레미야 선지자는 외치고 있는 것이다. 왜 바벨론에 복종하라고 외치는가? 그것이 이스라엘을 새롭게 하고 이전의 방식으로의 귀환을 막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지자는 뽑고, 갈고, 뒤엎은 후에야 비로소 하나님이 세우고 가꾸는 새언약의 메세지를 선포하였다.
이제 관선이사 체제를 진정한 바벨론 포로라고 생각하는 교회들은 헛된 것에 기초해서 세운 이전의 화려함을 잊어야 한다. 필자는 여러번 신대원에 대해서 언급했다. 대학을 언급하기 앞서 교회의 참된 교사들은 신대원의 장래에 대해서 솔직하게 결단을 내리기를 촉구한다. 오늘의 교회의 문제의 바른 해결을 위해서 무엇을 결단해야 하는지 자명하지 않는가? 현금의 문제가 왜 이런 방식으로 밖에는 갈수 없는지에 핵심이 신대원에 있음을 왜 눈감으려고 하는가? 사태가 발생하기 전이었다면 전문대학원의 분리가 이루어져서 문제를 달리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세기관은 한배를 타고서 이 문제를 맞았다. 그러면 진정으로 사는 길은 죽는 길밖에는 없지 않는가? 이런 문제가 논의되기를 제안한다.
세번째는 동대구 노회가 이광호 목사를 제명한 사건이다. 이것은 한번의 경우가 아니다. 박상현, 박길현목사를 이은 같은 노회에서 세번째 일어나는 사건이다. 주일과 안식일에 대한 신학적 견해에 대한 판단이다.
이로 인해서 신대원 교수회의는 이전의 신학부에 요청에 의해서 보고서를 작정해서 제출했지만 신학부는 다루지 공적으로 다루지 않았다. 그래서 결국 교회는 신학교수 개인의 명의로 된 연구서를 열람했을뿐이다. 이러한 신학교수들의 보고서가 교회의 공론이 될 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는 없지만 내용상 극단적인 입장을 배제하면서 한국교회의 정서를 잘 이해하고 서술된 보고서이기에 문제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대원 교수들의 보고서에 의해서 이광호 박길현 박상현 목사의 문제를 재론할때 과연 이들이 제명될 만큼의 문제가 있는지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율법주의와 무율법주의의 양극단에서 어떤 목사의 견해가 약간의 좌로 약간은 우로 치우쳐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위의 세목사의 입장이 뭐가 그리 무율법주의적인가?
여러가지 형편을 상정할 수는 있지만 신학적 사안을 들고서 제명으로 가게 되면 교회는 스스로를 위험에 노출시키는 것이다. 즉 우리 교회의 공적인 신학적 입장에 대한 거부를 스스로 자초하는 결정이다.
왜 우리 교회들이 이러한 담대함에 이르게 되었을가? 이것은 결국 결과주의의 함정이다. 힘에 대한 신뢰이다. 큰 교회, 성장한 교회와 그 목사는 스스로를 반성할 줄 모른다. 자신의 생각에 오류가 있음을 되돌아 보지 않는다. 필자는 동대구 노회에서 이런 냄새가 물씬 배어남을 느낀다. 제명된 목사의 교회가 노회의 결정에 대해서 질의를 해도 답변도 없다. 그리고 왜 노회가 해교회의 담임목사를 제명할 수 밖에 없었는지에 대해서 교회를 설득하려고 들지도 않는다. 그런 교회는 안중에도 없다는 식이다. 이게 바로 힘의 우상에 찌들은 교회 아닌가? 힘을 숭상하는 교회, 성장이 모든 것을 말하는 교회 이제 우리 교회들도 이러한 병에 물드는 정도가 아니라 찌들어 썩은 냄새가 나고 있지 않은가? 원칙도 성경도 참고하지 않고 내 정서에 맞느냐 맞지 않으냐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어버린 교회의 전형이 아닌가? 전권위원이 바로 앞에 놓인 제명하는 목사의 글도 제대로 읽지도 않고 소문만 듣고 제명하는 교회 이런 교회의 모습이 바로 다름 아닌 우리 교회이다. 너무 슬픈 현실이다.
이제 필자는 우리 교회를 생각하면서 이런 세가지의 논의의 현안을 제시해 본다. 복음의 빛을 이시대에 발할 수 있는 교회이기를 소망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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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이성구 교수에 논문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에 대해서 궁금한 분들을 위해서 요약해서 밑에 부록으로 제시한다. 논문이기에 구하기 어려운 성도들의 판단을 돕기 위해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