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일 교단에서 2명 목사님이 꼭같은 발언을 하는데 한 명만 제명했다면?
글쓴이 : 권 0 0 날짜 : 2004/03/30 조회 : 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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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대원 교수회의 보고서(주일성수와 십일조)를 읽고
*** 아래의 글은 2003년 11월 17일에
기독교보 인터넷 게시판에 올린 저의 글입니다 ***
저는 경남중부노회 파서교회에서 목사로 섬기고 있는 권기현입니다.
저는
지난 가을노회에서 동대구노회가 이광호 목사를 제명한 이후,
교단 내 여러 목사님들을 중심으로
이것이 부당한 권징이 아니냐고
이 게시판에 올린 여러 글들을 읽으면서
이 문제가 다시 성경적으로 검토되기를
개인적으로 또 교회적으로 기도하며 기다려왔습니다.
한 노회의 결정이 사도적 공교회요,
보편교회인 고신 교회 전체의 결정과 같으므로
이는 이광호 목사와 동대구노회 뿐 아니라
저와 파서교회에게도 매우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여름에
이광호 목사가 (한국) 대표로 있던(현재는 아님)
한국 WIN 선교회를 통해
터키 단기 선교훈련을 다녀왔습니다.
파서교회가 미자립교회이며 교세가 매우 미약하긴 하지만,
저 뿐 아니라
다른 2명의 교인(한 명은 아내, 한 명은 대학부)도
이 선교훈련에 함께 참가하였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인해
3명의 선교훈련자를 위해 기도하던 파서교회는
우리 선교훈련 팀을 위해 기도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그 인솔자인
이광호 목사의 이름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이광호 목사가 선교 전문인일 뿐 아니라
오랫동안 고신대학교 및
보수적인 건전한 신학교의 강사로 출강하고 있으며,
또 같은 교단 내의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회자이므로
이 선교회에서 훈련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리고 파서교회에도 광고하기를,
인솔자가 신학적, 목회적, 선교적 전문성 등의
신뢰성을 갖추었으므로
믿고 기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뿐 아니라
터키 단기 선교훈련에 함께 다녀왔던 그 대학부 학생은
현재까지도 이광호 목사가 강의하는
고신대학교 수업을 듣고 있습니다.
저는 한 교회를 목양하는 목사입니다.
그리고 그 학생은 저의 양떼 중 한 명입니다.
그런데, 여러 가지 신학적인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동대구노회로부터 제명 당한 이광호 목사의 수업을
계속 듣는 것은 합당합니까?
(“제명”의 의미에 대해 설왕설래할 수 있으나,
아무리 법조문을 유권해석한다 하여도
이는 출교로밖에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학생의 말로는
비록 이광호 목사의 수업이 선교학 계통의 과목이긴 하지만,
신학 및 목회, 신앙생활과 관련된 실제적인 이야기를
수업을 통해 계속 듣고 있으며,
그러나 자기는 전혀 문제를 느끼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원리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저는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
이 학생을 어떻게 지도해야 할지 고민스럽습니다.
정말 이광호 목사가
고신 교회에서 제명을 당할 정도로
심각한 신학적 문제를 가지고 있는 분이라면,
비록 관선이사 체제 하에서 행정적인 어떤 사유가 있어
이번 학기만 수업하는 경우인지는 몰라도
(정말 그런지 저는 모름)
차라리 F 학점을 받을 각오를 하고 수업을 듣지 않는 것이
정상적인 성도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게는 더 큰 고민이 함께 다가왔습니다.
저는 터키에서 약 3주간 동안
이광호 목사와 함께 있으면서
매일 상당히 오랜 시간,
주일 성수, 십일조, 음주 등의 문제에 대하여
신학적인 대화를 하였습니다.
이광호 목사가
자신이 전권위원회의 조사를 받고 있는 가운데 있으며,
또 (당시) 아직까지 이에 대한 결론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제게 솔직하게 먼저 말해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 그와 대화하는 가운데,
저는 그의 주장이
성경 말씀의 원리에서 벗어나지 않다는 생각에
염려 대신 안도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광호 목사의 글을 단편적으로 읽어본 적은 있지만,
이 정도의 주장이면,
동대구노회의 전권위원회에서
심각하게 다룰 사안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비록 제가 속한 노회는 아니지만,
동대구노회에 대해서도 참 고마운 마음을 가졌습니다.
노회가 임원과 총대를 뽑고,
또 예산과 집행 등의 행정적인 것에만 치우치지 않고,
이러한 신학적인 문제에까지 관심을 가지고
조사를 한다는 것에 대하여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선교훈련 기간 동안,
이광호 목사는 우리 파서교회 대학부 학생에게
주일 성수와 헌금의 중요성에 대하여 자주 설명해주었고,
그 이전까지 종종 결석(한 달에 1-2회)하기도 하던 이 학생은
선교훈련을 다녀온 이후부터는
부산에서 밀양까지 매주 출석하고 있으며,
파서교회 여러 교우들로부터
“선교훈련을 다녀온 이후 신앙생활이 많이 달라졌다”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가을노회에서
이광호 목사가 제명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저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했습니다.
혹시 또 다른 신학적 문제 때문에 제명된 것은 아닌지 싶어
여러 사람들에게 수소문해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제명 사유가
동일한 문제에 대한 신학적 이유라는 것을 알고는
한편으로는 놀랍기도 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혹시 제가 그분의 주장을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지
확인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할 수 있는 대로 이광호 목사의 글을 입수해서
일단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기독교보 게시판과 실로암교회 홈페이지,
그리고 기타 여러 사이트 등을 통해
그의 글을 입수하여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글을 읽던 중,
신대원 교수님들이
주일성수(양낙흥)와 십일조(한정건, 현유광)에 대한 연구를 하여
총회에 보고하였다는 소식을 알게 되어
며칠 전 그 글도 입수하여 상세히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이 보고서가 총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말도
간접적으로 듣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글들을 읽은 후에,
신앙 양심에 따라 내린 결론이 이것입니다.
1. 이광호 목사의 주일 성수와 십일조에 대한 견해는
사소한 차이는 있지만, 그 신학적 원리상으로는
제가 평소에 교회에서 설교하고 가르치고 있는 내용과
다르지 않습니다.
2. 이광호 목사의 주일 성수와 십일조에 대한 견해는
신학적으로 신대원 교수회의 연구 보고서와
거의 완벽할 정도로 일치합니다.
저는 적어도 주일 성수와 십일조 문제에서
이광호 목사가 어떤 잘못을 범하였는지
도저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혹 제가 이를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싶어
이 문제에 대한 글이 올라오고 있는
기독교보 게시판을 보면서
누군가가 이에 대한 설명을 해주기를 기도하며 기다렸습니다.
일찌감치 이 글을 써서 올리고 싶었지만,
신학적인 깊이가 없는 저보다는
여러 다른 선배 목사님들,
그리고 외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목사님들의 글들이
간간이 올라오고 있어서
제 글이 오히려
이 논의의 흐름을 막는 것은 아닌가 하여 기다려왔습니다.
그러나 1달 정도가 지난 지금,
이 권징 사건이 교권적 횡포였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글이 주로 올라올 뿐,
동대구노회로부터의 적절한 답변은 전혀 찾을 수 없었습니다.
천헌옥 목사님께서 이광호 목사의 글을 읽고 비평해주셨지만,
그것이 제명 사유로서는
전혀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천 목사님께서 간간이 올리시는 글은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읽고 있습니다.
혹, 오해가 없으시길 바랍니다.)
물론 저는 인터넷 게시판 속에서의 토론이
익명성과 무책임성, 그리고 감정의 격화 등으로 인해
바른 신학을 정립해가는 것보다는
오히려 상대를 미워하게 만드는
사단의 도구로 종종 사용되는 것을 보아왔기에
이에 대한 두려운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광호 목사의 제명 사유에 대한 의문이
이렇게 여러 노회에 속한 목사님들,
그리고 심지어는 외국에서 유학을 하고 계신
목사님들의 입에서도 나오고 있는 와중에서도
그 어떤 답변을 들을 수 없다는 사실로 인해
마음이 답답하고 힘듭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저는 동대구노회, 또는 누군가가
계속 이 논의에 관심을 가져주시기를 호소하고 싶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도
목사인 제가 참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자꾸 듭니다.
지금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교회의 표지인 올바른 권징이 있는지를 살피고,
또 그 권징의 당사자인 이광호 목사를 염려하는 것 이전에
목자로 부르심을 입은 제 양심의 문제가
먼저 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정말 절박한 심정입니다.
요즘 이 문제로 인해 때로는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48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한 적도 있습니다.
단지, 같은 노회가 아니라는 이유로
저는 고신 교회의 목사로 남아 가르치고 있고,
이광호 목사는 이제 더 이상
고신 교회의 목사가 아니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함께 선교훈련을 다녀온 제 아내도
그런 저의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동대구노회에 부탁드립니다.
이광호 목사가 어떤 신학적 잘못이 있는지 밝혀주십시오.
제가 고신 교회의 목사로 남아 있고,
이광호 목사가 제명된 이유가
단지 다른 노회에 소속해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 말씀의 권위 때문이라고 말해주십시오.
그리고 이에 대한 정당한 신학적 사유를 설명해주세요.
제가 파서교회 성도들에게
“이광호 목사는 이러이러한 이유 때문에
고신 교회에서 제명되어야 마땅한 사람이다.
그는 성경에서 벗어났고,
고신 교회의 신대원 교수회의 성경적 연구와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다”
라고 설명할 수 있도록 그 정당한 이유를 설명해주십시오.
그리고 혹, 그렇지 않다면
이광호 목사의 문제를 재검토해주십시오.
그리고 혹, 신대원 교수님들께서 이 글을 보고 계신다면
학자의 양심을 굳건히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고신 교회 내에서
신대원 교수님들의 위치가 때로 너무 미약하여
교회의 교사로서의 존경보다는
교권의 시녀가 되기 쉬운 연약함을 갖고 있음을 잘 알기에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송구함과 부끄러움을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광호 목사의 가르침이
정말 신학적 문제가 있는지 검토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같은 노회가 아니라는 이유를 넘어서
고신 교회가 참 교회의 표징으로
힘 있게 띠 띠고 굳건히 일어서서
사단의 모든 거짓된 가르침의 화전(火箭)을 꺾는
담력을 얻도록
최선을 다해 노력해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들을
선악간에 판단(심판)하실 것을 믿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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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최재호 날짜 : 2004/03/31 조회 : 313
<기독교보>게시판을 보고 부끄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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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고신교단 관련 게시판에서 자주 보게 되는 이름이 있다. 바로 "권정희"라는 이름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기로는 영국에 거주하는 평신도 여성이라고 한다.
지켜보기로는 상당히 날카로운 안목과 신학적 기반을 가지고 있으며 성경적 원리를 따지는 일에 있어서 매우 적극성을 가진 분인 것 같다. 그동안 이성구 교수논문에서 촉발된 신학문제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고 최근에는 양무리마을이라는 인터넷카페를 통해 ‘십자가마을’의 이근호 목사 신학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룬 바 있었다.
그러던 그가 이제 이광호 목사 복권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기독교보>게시판에 이같은 글을 올리며 자신의 카페 게시판에도 다루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간의 그의 스타일을 볼때 성경적 원리를 따르며 치열한 논쟁과 설득작업을 할 것같다.
그의 신학적 입장이나 주장이 옳고 그름을 떠나 참으로 귀한 분 중 하나가 아닌가 싶다.
그런데 한가지 아쉬움이 남는 것이 있다.
이광호 목사 복권문제를 거론하는 분이 어째서 이분이어야 하는가? 전통적인 고신교단의 입장에 의하면 ‘잠잠해야 할’ 여성인데다, 외국에 거주하며 정식으로 신학을 공부하지도 않은 평신도가 신학적 사상문제로 제명된 교단의 목사를 복권시키자고 나설 수 밖에 없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남성’에 신학을 공부한 ‘목사(신학자)’들이 잠잠하기 때문이었다.
그분은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적 원리를 바로 세우는 일을 피하거나 외면하지 않았지만 많은 분들은 그같은 결단도 없었고 행동도 없었음이 사실이다.
이 문제가 발생하기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나름대로 사실을 알려왔던 필자도 이제는 한가지 제안을 해 볼때가 되지 않았나 싶다.
이광호 목사의 신학과 사상이 문제가 있다고 하는 입장에 대해 수긍하는 분도 있고 그렇지 않다고 하는 분도 있다. 하지만 이것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침묵하는 다수에 의해 교단신학적 정체성을 분명히 할 기회는 계속 미루어져 가고 있다.
가장 좋기로는 신학교수들께서 이 문제에 대해 분명한 답변을 가부간에 해 주는 것이다. 물론 간접적으로 답변한 몇몇 교수들에 의해 이광호 목사의 주일, 십일조에 대한 신학이 그릇되지 않았음이 증명되긴 했다. 하지만 그 답변이 ‘직접적이고 구체이지 못해’ 교단신학자들의 명확한 답변이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래서 제안하는 것은 원리적인 교단신학자의 답변을 기초로 하여 이곳 게시판에서 우리교단 목회자, 신학생들의 해석을 나누어 보자는 것이다. 그래서 건전한 고신교단의 신학을 공부한 이들은 이 문제를 어찌 해석하고 있는지를 모아 보자는 것이다. 사실 이 역할은 교단의 신학자들이 할 역할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교회의 교사인 교단 신학자들은 골치아픈 일에 휘말리기 보다 독야청청하기를 더 원했다. 이같은 일들에 대해 감시하고 알려야 할 교단 언론도 이같은 역할을 회피했다. 그리고 많은 목사들이 이같은 입장을 가장 현명한 처신(?)으로 보고 동조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공동체를 잘못된 방향으로 몰고 가는 일이 됨을 우리는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지금의 평안과 화평이 내일의 멸망의 싹이 된다면 이것은 거짓평안이자 거짓화평이 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이광호 목사 제명사태를 한 개인의 문제로 봐서는 안된다. 내 일이 아니라고 외면하고 있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는 고신교단의 교인이자 목사이기 때문이다. 그가 성경적인 관점에서 ‘제명’이라는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면 그의 입장에 동조하는 많은 이들을 바른 관점을 가지도록 이끌어야 할 책임이 공교회와 교회의 교사들에게 있으며 혹 잘못된 평가를 받았다면 그것은 우리공동체가 가진 신학을 병들게 하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곳을 통해 우리 고신교단 보편적인 신학을 가진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해석하는지 의견을 수렴해 보자.
강둑은 작은 구멍에서 시작해 허물어져 버린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광호 목사로 인해 촉발된 신학적 나뉘어짐은 자칫 고신교단을 분열시킬 우려가 있다.
적지않은 이들이 이목사를 지지하거나 반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침묵하고 방치하는 것은 또 교회의 건전성 유지와 하나됨을 저해하는 일이 된다. 특히 연합과 일치를 촉구하는 고신교회의 지도자들은 이같은 상황의 심각성을 이해해야 한다.
영국에 사는 평신도 여성이 나서 문제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구체적으로 다루고 검증하려는 일에 대해서 자랑스러운 신학의 정통을 이은 고신교단의 목사, 신학생들이 잠잠하고 있어서는 결코 안된다. 심히 부끄러운 상황을 맞았으나 이제라도 나서야 한다. <2004.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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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윤석준 날짜 : 2004/03/31 조회 : 222
게시판의 한계...대안은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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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현재 신대원 3학년에 재학중인 목사 후보생입니다. 최재호님의 글을 읽고 생각나는 점이 있어 몇자 끄적여 봅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그렇게 되었으면..하는 간절한 소망이기도 합니다.
신대원 게시판은 많은 신학적인 논의가 오고가는 곳이고, 최근들어서는 고신교단의 정체성, 혹은 한국교회 자체에 대한 자성의 소리가 나오기도 하는 것을 봅니다. 또한 이광호 목사님의 제명 문제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모든 글이 다 중대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정말 심각하게 다루어야 하는 문제들도 이 게시판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것을 봅니다. 한때는 신학교에서의 성찬 문제로 토론이 있었고(이것은 교회론에 대한 지극히 중요한 논의입니다), 얼마 전에는 고신교단이 거짓교회인지에 관한 논의도 있었습니다(이것 역시 참으로 중요한 문제일 것입니다) 또한 이광호 목사님의 제명사건도 교단 자체의 정체성을 가늠할 수 있는 중대한 문제일 것이며(만약 떠도는 말처럼 교권으로 누른 것이라면 교단 전체의 정체성이 심각히 위협받을 것입니다), 오늘은 보니 이광호 목사님께서 오랫동안 묵인 가운데 있었던 군대에서의 떼로주는 세례식에 대한 이야기도 올라와 있습니다(이 역시 세례와 성찬이라는 교회의 가장 중요한 은혜의 방편 중 하나에 대한 논의이므로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논의들이 너무나 심각한 사안들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계성을 봅니다. 그러니까 이런 논의가 과연 효력을 나타내고 있는가? 에 대한 문제입니다.
저희 교회 목사님께서는 제가 한참 게시판의 쟁점에 있었을 때에도 저에 대해서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 사실조차 모르셨습니다. 저희 목사님은 그때 노회장이셨고 기독교보에도 자주 나오시는 분이셨습니다. 하지만 이런 논의가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셨고 그런 사실은 아마 소위 교단의 어른들...대부분의 양상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대원 게시판에는 소수 젊은 목사님들과 신학생들이 들어와서 글을 남기고 보고 또 논쟁도 일어나고 토론도 벌어지지만, 이것이 실제로 우리의 터전이요 어머니가 되는 교회 속에서 어떤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떤사람이 만약 불의한 일을 저질러 신대원 게시판에서 계속 언급이 된다고 할지라도 가만히 있으면...그러니까 게시판에서 페이지가 밀려 내려가 버리기만 하면 곧 그 이야기는 잠잠해져 버리고 맙니다. 지난번에 고신교단의 거짓교회 논쟁이 있었을 때에도 저는 그것이 공론화 되기를 바랬지만(당시 연루된 목사님들의 공통적인 견해가 그랬습니다) 그냥 페이지가 밀려 내려가는 것과 함께 그 말들은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허탈했습니다. 현실은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과 함께...
저는 그런 모습들을 교수님의 글들을 통해서도 간접적으로 발견합니다. 교수님들 중에서는 기독교보에 글도 자주 싣고, 목소리도 자주 내지만, "글"들은 말그대로 "글"들일 뿐인 것을 봅니다. 그냥 그렇게 실려 있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것을 외쳐도 그냥 그것으로 끝입니다. 정작 소위 "힘"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고 그런 목소리에 대해서 잠시만 침묵하고 있으면 일은 그냥 원래 해 나가던대로 진행되어 가고 맙니다. 쉽게 말하자면 "세월이 약"입니다.
그런 일들을 생각하니...게시판에 글 올리는 것이 참으로 아무 힘도 없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이광호 목사님께서 부당하게 제명당하셨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기까지 여기저기서 글이 올라오다가는 곧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덮여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동대구 노회에서 이광호 목사님 앞에 제명당하신 두 분은 이광호 목사님과 비슷한 맥락을 가진 분들이었지만 그분들은 이제 아예 거명되지도 않습니다. 잊혀져 버린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광호 목사님은 그래도 지명도가 있어 아직 언급은 되고 있지만 곧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겠습니까? 또 잊혀져 버린 일이 돼 버릴 것이고 교단과 노회는 또 원래 하던 그대로 갈 것입니다.
신학적 논의가 교회를 이끌어가고, 말씀의 생활원리가 교회를 지배해야 하는데, 외쳐도 소용이 없습니다. 참으로 힘이 지배하는 교회요 교단의 모습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디에선가 우리의 모습이 말씀에 어긋난다고 하는 이야기가 나오면 행여나 우리가 주의 말씀에 어긋나 있지는 않은가하여 전전긍긍하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게시판의 한계, 소리냄의 한계, 부르짖음의 한계를 봅니다. 진리를 외치는 자들이 거대한 해일 앞에서 그저 반동으로 몰아치는 찰싹대는 잦은 역물결 몇자락으로 죽어없어지는 그런 존재들이 되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하니 서글프기 그지 없습니다(물론 저는 후스나 위클리프처럼 그런 자들을 통해 하나님께서 장래를 기약하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대안은 없는 것일까요? 이렇게 글로 쓰고 투고를 해서 기사로 나오고 그래서 몇몇 사람들이 웅성웅성하는 것 외에는 더이상의 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교회의 개혁은 어떻게 해야 오는 것일까요?
주께서는 지금보다 훨씬 완악하던 시대에 시대의 선지자들을 세우셨습니다. 우리의 선배 칼빈과 루터가 그들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에는 어떤 식으로 교회가 개혁될 수 있을까요? 어떻게 해야 교회가 올바로 주의 교회로 설 수 있을까요? 참으로 바른 신앙을 통해 생활을 개혁해 나가는, 그래서 신자들이 교회 속에서 변화되어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삶을 거룩한 새것으로 변모시켜 나가는 그런 일들은 어떻게 하면 이루어지는 것일까요?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게시판의 한계...대안은 무엇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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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천헌옥 날짜 : 2004/04/01 조회 : 241
이광호목사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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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호목사의 문제는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
1.
나는 이광호목사를 개인적으로는 전혀 알지 못한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다. 다만 그의 문제가 이슈화되고 노회에서 제명된 다음에 알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 속사정은 잘 모른다. 그러므로 어쩌면 내가 왈가왈부활 문제는 아닌 듯하다.
이 점에 있어서 직접 당사자가 아닌 제 삼자가 누구는 옳고 누구는 틀렸다는 결론을 내려서도 안된다. 우리는 공교회의 권위도 인정하여야 하고 개인의 신앙도 존중하여야 한다. 하도 이광호 목사의 문제가 이런 저런 이유로 나오게 되니 무엇이 문제인가를 내 나름대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동대구노회가 제명을 하기까지에는 그 나름대로의 이유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무시하거나 간과하여서는 안된다. 이광호목사의 항변도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 실체를 놓고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어느 한쪽에 서서 주장을 한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합일을 이루어 내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우선 이광호목사의 고신맨 정신을 높이 사고 싶다. 그는 고신을 떠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가 아직은 살아 있다고, 나 여기 있노라고 간간히 게시판에 그의 이름 석자를 올리는 것으로도 고신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헤아릴 수 있다.
그처럼 고신에 있고 싶어 하는 그를 고신에 있게 할 수는 없을 것인가? 그를 아는 동기들이 동료들이 교인들이 그처럼 원하는데도 말이다. 과연 그렇다면 그를 제명 할 때 지적된 그의 신학이 고신에 반하는 것일까? 나는 그의 글들을 면밀히 살펴보면서 얻은 하나의 결론은 큰 틀에 있어서 그는 고신신학의 틀을 벗어났다고 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면에 있어서는 독자들을 헷갈리게 하고 교회생활을 혼란하게 할 소지가 있는 글들이 있으므로 그 부분은 자신이 스스로 인정하여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으로 생각이 되어 좀 길런지는 모르지만 내 생각을 피력해 보려고 한다.
2.
총선을 불과 2주를 앞둔 한국의 정치 상황은 어지러움 그 자체이다. 탄핵정국은 이 나라를 태풍으로 몰아넣은 것 같은 느낌이다. 노무현씨는 탄핵을 받아 대통령 직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직무를 정지 당하여 있다. 이 점에서는 이광호 목사와 비슷하다고 본다. 그 역시 노회로부터 탄핵을 받아 목사직은 가지고 있으면서 노회원의 자격은 정지되어 있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헌재의 결론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9명의 헌법재판소 판사들의 입만 바라보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판결을 내리던지 한국민 누구나 다 수용하고 순응한다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한층 더 성숙하게 될 것이다.
나는 교회 안에도 그런 헌재가 없을까 생각했다. 사실 교회 안에도 헌재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목사후보생을 가르치는 신학교의 교수회이다. 그들은 신학에 있어서는 교단에서는 최후의 보루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아니하면 그들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목사가 되는 그 목사에게까지 큰 문제가 생기기 때문이다.
아마 여기 신학교 게시판에 와서 교수들의 결론이 뭐냐고 항변하는 사람들은 그런 인식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 것이라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신학교수회는 헌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오늘 그 권한은 오히려 총회 신학부가 가지고 있다. 어떤 문제에 있어서 총회가(어쩌면 대법원) 결론을 내지 못하는 문제가 있을 때 신학교수회에 질의를 하고 교수회가 결론을 내려 주면 총회 신학부는 그것을 최고의 권위로 인정을 하고 시행한다면 그 순서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총회 신학부는 스스로 판결하고 시행하며 헌재의 위치에 있는 신학교수회의 결정까지도 뒤엎고 있다. 물론 헌재에서도 개인의 소신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6:3으로 결론이 나면 소수의견은 의견에 불과한 것이고 효력을 발생하지 못한다. 그런데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떤가? 소수 의견을 가지고 교수회의 전체 결정을 뒤엎으려 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사족을 붙이는가 하면 이런 힘도 없는 교수들에게 결론을 내지 않는다고 항의하고 마치 그들이 어떤 노회의 문제도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양 데모성 글을 올리는 것은 우리 신학교수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 아니겠는가 해서다.
3.
고신을 사랑하여 죽어도 고신에 남아있기를 원하는 이광호목사에게 이렇게 제안을 드리려고 한다. 그것은 “목사님의 문제는 목사님 스스로가 해결 하십시오“인 것이다.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해결이 안 되니까 여러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있다. 그것은 한 가지도 아니고 두 가지씩이나 있다.
그 첫째는 총회 신학부에 소원을 올리는 것이다. 전권을 가진 총회 신학부가 이광호 목사의 신학(문제가 있다는)에 대해서 철저한 조사와 연구를 하고 신학교수회의 자문을 받아 결정을 내리는 것이 그 하나의 방법인 것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을 수 있다. 그것은 제명이 된 당사자는 총회에 서류를 접수 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방법은 안 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노회에서 반대표를 던졌던 즉 이광호 목사의 신학과 신앙을 인정하는 목사 3인쯤 연명하여 노회를 거쳐(접수하지 않겠다면 부전지를 붙혀) 총회에 접수 시키면 된다.
거기서 치열한 신학논쟁을 거쳐 노회의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얻어 낼 수 있거나, 아니면 이광호 목사의 신학의 오류를 지적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 첫 번째 문제 해결의 길이다.
두 번째는 무엇인가?
그것은 자신이 자신의 주장에 대해 스스로 반성하고 사과함으로써 공동체의 일원으로 복귀하는 과정이다. 나는 잘못한 게 없다. 그러므로 노회가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에 대해 제명한 것을 철회하라고 하면 이 문제는 주님 오실 때까지 해결되지 않을 것이다.
국회의원 193명은 탄핵을 결정했다고 해서 도매금으로 매도해야할 만큼의 가벼운 사람들은 아니다. 그들 한사람 한사람이 다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춘 사람들이고 법지식을 가진 사람들이다. 우리는 또한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노회의 2/3가 제명 결정을 했다면 거기에도 상당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결정을 존중하여야 한다.
이광호 나 한 사람만 옳고 2/3의 노회원들은 다 틀렸다는 인식을 가지고서는 문제해결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로 하여금 이광호 목사의 신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도록 만든 문제는 무엇인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여기서는 한가지 문제만 살펴보려고 한다. 그것은 십일조와 헌금에 관한 문제이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연보는 꼭 자기 교회에만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위의 인용한 말은 이광호목사가 어느 장로님에게 상담으로 해 준 말 가운데 일부이다. 이 한 구절만 보면 그는 충분히 교회의 질서를 현격히 무너뜨리는 발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한 구절의 말을 모 신문사가 인용하여 신문에 게제하였고 이를 본 누구든지 오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면 그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 오해를 풀기 위해 그의 글 전문을 살펴보아야 한다.
연보는 꼭 본교회에 해야 하는가?
(이 글은 대구 D교회의 박 H.S. 장로님께서 질문해 오신 내용에 대한 답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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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장로님께,
주님의 이름으로 문안드립니다. 장로님의 질문에 대한 저의 부족한 생각을 말씀드릴까 합니다. 우선, 오늘 우리의 시대는 돈에 관련된 문제라면 상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터라 여간 조심스럽지 않습니다. 사실 성숙한 사회에서는 돈에 대해 그렇게 민감해 할 필요가 없으며 성숙한 교회에서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만 우리의 교회현실이 그렇지 못해 안타깝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배시간을 통해 교회에 내는 돈을 연보(捐補)라 하기도 하고 헌금(獻金)이라 하기도 합니다. 주일 연보든 감사 연보든 십일조 연보든 모두가 이에 포함됩니다. 그렇지만 "연보"와 "헌금"은 의미상 커다란 차이가 납니다.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연보"란 "금품을 내어 남을 도와 줌"이라고 되어 있고 "헌금"이란 "돈을 바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참고로 영어에서는 연보를 일컬을 때, "기증"을 뜻하는 "gift"나 돈을 "거두어 모은다"는 뜻으로 "collection"이라 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헌금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뜻으로 "offering"이라 하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가 교회에 내는 돈의 성격이 무엇이냐 하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리라 생각됩니다. 과연 그것이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냐, 아니면 성도들이 그 돈을 거두어 모으는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헌금"이라든지 "offering"은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가지게 되며, "연보"라든지 "gift" "collection"은 "돈을 거둔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실 여기에는 중요한 차이를 가지게 되며, 그 차이를 이해하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이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더욱 본질적인 설명을 약간 더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한다"고 할 때, 구약에서는 "제사", 혹은 "희생제물을 드림"으로 설명이 됩니다. 영어에서 "희생"을 의미하는 "sacrifice"가 곧 희생제사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막이나 성전을 통해 하나님께 드린 경배는 곧 희생제사였습니다. 양이나 비둘기를 잡든지 곡물을 바치는 것등은 모두 희생제사를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은 곧 완결의 의미를 가지는 최종적 제사로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완전한 제물로서 하나님의 요구를 완벽하게 충족시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사역을 통해 자기 몸을 완전한 제물로 제공하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고 있는 우리는 더 이상 희생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된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날 신약시대에 우리가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은 구약의 "제사"와는 성격이 다릅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의 몸된 교회가 되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예배는 영어로 "Service" 혹은 "worship service"라고 합니다. 이 의미는, 완전한 희생제물이 되어 하나님의 요구를 충족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말씀과 더불어 누리는 성도의 고백적 교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고백하고 있듯이 우리 자신은 이미 하나님의 것입니다. 세례를 받을 때 이미 우리는 하나님의 것이라 고백하여 그에게 바쳐진 몸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피로 값주고 우리를 사셨다고 하지 않습니까? 세례를 통해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살아계심"을 교회 앞에서의 고백과 함께 확증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주님"이라 부르는 것은 내가 그의 노예이며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라는 고백일 것입니다. 그러한 마당에, 다시 하나님의 관여를 떠난 나 자신만의 별도 소유가 있어서 그것을 하나님께 바치겠노라 한다면 지나친 말일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교회에서 연보를 하는 것도 나의 물질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함께 모으는 것이어야 합니다. 즉 나의 것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것을 겸손하게 모으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성도들을 통해 모으는 돈은 "하나님께 바치는 헌금"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이 모으는 연보"입니다.
이 정도에서, 장로님께서 질문하신 내용에 대한 결론을 어느정도 도출할 수가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일 연보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라면 바치는 자체로서 자신의 할바를 다 했노라고 말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연보라면 문제가 좀 다릅니다. 만일 연보로서 돈을 모으는 것이라면 용도에 대해서 파악을 해 가며 연보에 참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시 말씀 드려서 "헌금"이라면 내가 일단 헌금을 한 후에는 교회가 알아서 할 것이란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연보라면 그 연보가 어떻게 사용이 되는지 보아 교회에 모금된 연보가 너무 많다거나 용처(用處)가 잘못되었다든지 하면 달리 개별적으로 판단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잘 사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연보의 목적은 크게 보아 "전도와 구제"로 말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그것은 다시 많은 설명이 필요한 말이기는 하나 우선은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전도"는 오늘날 교회에서 복음을 선포해 가르치는 교사인 목사나 전도사 등에게 생활비로 지급되는 돈까지 포함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구제"란 단순히 가난한 사람을 도와준다는 의미를 넘어 나 아닌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가질 것입니다. 만일 주님의 몸된 교회에서 모은 연보가 그러한 일을 하기 보다 달리 불필요한 일을 위해 지출된다거나 할 경우에는 각 성도들은 기도하는 가운데 용처(用處)를 찾을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찾아야 할 것입니다. 교회의 앞선 자들이 성도들로부터 모은 물질을 잘못 사용한다면 성숙한 성도들은 마땅히 달리 물질을 잘 쓸 곳을 찾아야 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미성숙한 성도들이 이를 자의로 해석해 무책임하게 아무렇게나 사용하는 어리석음을 범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지금 성숙한 성도가 취해야 할 원리를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연보는 꼭 자기 교회에만 해야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자기가 속한 교회의 재정적 필요를 늘 살피는 가운데 형편껏 연보에 참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자기가 속한 교회를 염려하지 않은 채 자의적으로 돈을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을 것입니다. 교회의 재정적 형편을 잘 살피는 가운데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다른 용처가 있다면 겸손한 마음으로 그렇게 하면 될 것입니다.
이 정도의 설명으로 장로님께서 궁금해하시던 부분이 해소될지 모르겠습니다. 저의 부족한 답변이 장로님께서 가진 질문에 다소나마 도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혹 나중에 만나 뵐 기회가 된다면 좀 더 상세하게 말씀드릴 수 있으리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2000. 3. 30
이광호 목사 드림
물론 전문을 다 본 다음 우리는 그가 말하고자 하는 취지를 십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관찰한 나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무엇이 남더라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는 헌금과 연보를 나누어 설명하려 했는데 이는 오히려 독자들을 더 혼란하게 만드는 함정이 있다는 것이다.
헌금은 어떤 것이며(구체적으로) 연보는 어떤 것인가? 가령 예를 들어 헌금은 십일조와 감사이며 연보는 구제헌금이라고 한다면 그래 헌금은 필히 본교회에 내야하지만 연보는 개인적으로도 할 수 있는 것이다는 인식에 동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한국교회가 언제 헌금과 연보에 대해 그렇게 인식하고 사고하게 하였던가? 오늘날 목사들이 그런 인식을 가지고 교회를 지도해 왔던가? 그러므로 이런 대중화 되지 못한 개인의 주장을 가지고 연보는 꼭 자기 교회에만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면 그 어느 누가 오해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이광호 목사 자신도 연보는 구제헌금 정도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도 연보라고 주장함으로써 그의 말이 설득력을 잃어버리게 한다는 것이다.
다시 그의 상담을 하나 살펴보자
선교사에게 십일조를 보내도 되는지요?
(이 글은 미국에 사는 박지훈 형제의 질문에 대한 이광호 목사님의 답신입니다)
박지훈 형제, 안녕하세요? 서신으로 인사를 나누게 되어 반갑습니다. 진작 답변을 드려야 했는데 바쁘다는 핑계로 늦어진 점 이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친동생이 키르키즈스탄의 선교사로 있다니 더욱 친밀한 느낌을 갖게 됩니다. 저도 선교학을 연구하는 학자로써 투르크족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며 선교에 참여하고 있습니다. 터키와 중앙아시아 여러 국가들은 늘 제가 관심을 기울이는 지역입니다. 언제 형제와 함께 동생을 만나 교제하는 시간이 있었으면 하는 막연한 기대를 해봅니다.
열악한 환경의 선교지에 나가있는 동생의 선교비가 부족한 것을 마음 아파하는 형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것은 비단 그 선교사님이 친동생이 아니라 해도 모든 성도들이 함께 나누어 가져야할 마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형제께서 고민하고 있는 문제에 대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겠습니다. 형제의 말처럼 많은 교회의 목회자들이 십일조는 본 교회에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원리적으로 그것은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로써 세상에서 열심히 일해 얻은 수입 중 일부를 교회가 더불어 나누며 마땅히 해야할 복음사역을 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한 교회에 여러 성도들이 있으면 서로간의 형편을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성도로써 기본적인 의무에 속합니다. 그러므로 선교지에 나가 있는 동생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는 형제의 염려를 온 성도들이 함께 나누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형제의 경우, 교회의 현실적 형편에 어려움이 있는 것으로 짐작됩니다. 형제께서도 이미 말씀하신 것처럼, 그 동안의 신앙적 습성으로 인해 동생에게 직접 십일조를 보내는 것이 마음이 편치 않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교회에 연보하는 것 이외에 동생에게 따로 선교비를 보내는 것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형제에게 이런 권면을 드려봅니다.
형제께서 저에게 말씀하신 동일한 고민을 지금 소속된 교회의 목사님과 상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형제의 십일조 연보가 교회를 통해, 교회의 이름으로 동생인 선교사님을 후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한다면, 교회는 형제가 십일조를 한 액수보다 오히려 더 많은 액수를 후원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들어, 형제가 매월 100달러를 십일조 한다면, 교회는 거기에 보태 200달러를 선교비로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한 교회 성도인 형제의 기도제목을 함께 나누며 그에 참여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요?
물론 예외적인 경우가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만일 형제의 소속 교회가 경제적으로 매우 궁핍하여 형제의 십일조가 없으면 교회의 기본적인 유지마저 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다른 문제일 것입니다. 그럴 경우는 더 많은 생각이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을 것이므로 교회는 자연스럽게 선교에 참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교사님의 입장에서도 형님이 개인적으로 선교비를 보내는 것 보다 교회가 보내는 것이 훨씬 바람직할 것입니다. 형님이 보내게 되면 인정에 의존할 가능성이 있지만 교회가 적절한 선교비를 부담한다면 교회의 요구를 수행하는 선교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한번 말씀드리지만 목사님과 잘 상의하시기를 바랍니다. 상식적인 교회라면 형제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을 것입니다. 하지만 상식을 벗어난 교회들이 워낙 많은 시대이기에 염려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만 주님의 선한 인도하심이 있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계세요.
2003. 2. 25
이광호 목사
(다음 2편으로 계속)
그는 위 글에서 분명히 십일조 연보라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앞의 말과 연결 시켜보면 십일조 연보는 꼭 자기 교회에만 해야 되는 것이 아닙니다 라는 말이 성립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딘가 모르게 그의 글에서 우리는 십일조를 꼭 본 교회에 내야한다는 사상이 결여된 듯한 인식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만약 십일조를 본 교회에 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이광호 목사의 주장이라면 그것은 교회의 질서를 현격해 저해하는 것임이 틀림없다)
어쩌턴 사람인 이상 누구든 실수가 없을 수는 없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본의 아니게 오해 할 수 있는 말로 잠시 질서를 혼란케 했다면 진심으로 사과하고 앞으로는 교단의 헌법과 노회의 질서에 순종하는 목사가 될 것을 천명한다면 동대구 노회가 다시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도 없으리라 생각한다.
아직도 동대구 노회 안에서 이광호 목사님을 기다리고 있을 목사님들이 많을 것이다. 그들이 추천을 하고 해벌 절차를 따르고 재 가입을 시도한다면 동대구노회는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라 생각한다.
고난주간을 앞두고 있는 우리는 죄 없으신 주님이 우리를 찾아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사건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최고의 가치고 진리며 선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적대관계에 놓고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기만 하셨다면 오늘의 기독교회는 없었을 것이다. 먼저 자신이 죽고 낮아지는 모습이 진정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하여 나는 감히 이광호 목사님이 스스로 낮아지고 겸손해 져서 먼저 사과하고 엎드리라는 것이다. 그래도 노회가 받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적 노회의 책임이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