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고대와 중세의 성경해석 - 정규철교수님의 성경해석사 논문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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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고대와 중세의 성경해석 - 정규철교수님의 성경해석사 논문 소개


계신대 홈 교수자료실에서 인용 /kyeya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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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대 교부들의 해석

예수님과 사도들의 해석 방법의 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풍유적 해석 방법이 점점 성행하게 되었다 교부들이 풍유적 해석 방법을 즐겨 사용하게 된 동기는 구약을 기독교적인 자료로 이해하기 위한 소원 가운데서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원저자의 뜻을 전혀 무시한 풍유적 해석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제어할 수 없는 형편에 이르게 되었다.


(1)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Clement of Alexandrla, 150-215)

클레멘트는 교부 주석가로 잘 알려진 사람이다. 그는 헬라 철학의 신적 기원을 믿었다. 그는 성경이 참 뜻을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다. 클레멘트는 "성경의 감추어진 의미는 모든 사람을 위해 적합하지 않고 단지 참 지식을 위해 선택받은 그 완전한 기독교인들을 위해 적합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성경에 다섯 가지의 의미가 있는 것으로 이론화시켰으며, 가장 심오한 의미는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밝혀지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다섯 가지의 의미는 역사적 의미, 교리적 의미, 예언적 의미, 철학적 의미, 그리고 신비적 의미이다.

클레멘트의 창세기 22:1-4(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치기 위해 모리아로 가는 여정) 해석을 보면 그의 해석법을 감지할 수 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그에게 명하신 장소에 셋째날 도착했을 때 그는 눈을 들어 저 멀리 그 장소를 보았다. 왜냐하면 첫째 날은 좋은 것들을 보는 것으로 구성되어졌으며. 둘째 날은 영혼의 가장 좋은 소망이며, 셋째 날에는 제3일에 부활하신 선생님에 의해 이해의 눈이 열려져 마음이 영적인 것들을 감지하게 된다. 3일 동안은 하나님을 진실로 믿게 되는 인봉(세례)의 비밀일 수 있다. 따라서 그는 멀리서 그 장소를 감지할 수 있게 된다. 플라토(Plato)가 이데아(Ideas)의 영역이라고 부른 하나님의 영역은 모세가 모든 것을 우주적으로 포함하고 있는 장소라고 말한 것처럼 얻기가 힘드는 영역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는 멀리서 보여졌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은 세대 (generation)의 영역 안에 있었으며 그는 천사에 의해 인도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는 지식의 그런 순전하고 영적인 적용에 의해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고전 13 : 12)라고 말한다.


(2) 오리겐(Origen, 185-254)

오리겐은 사본비평의 창시자(Hexapla)이고 설교들을 통해 대중 강해 유형을 설정하였으며, 고전주석(scholia)을 통해 여백 설명의 귀감을 보여주었고, 주석들을 통해 교회 최초의 연속주석을 제공하는 등, 그의 성경지식과 성경해석에 대한 기여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이다. "헬라철학에서 소크라테스의 영향처럼, 교회사에서 오리겐의 영향은 수많은 상이한 사상의 흐름들의 분수령이다." 그는 특별히 문법적 풍유적 해석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성경관을 보면 70인경의 영감을 믿되 그 파격 (문법 위반, solecisms)과 오류들에도 숨은 신비들이 있다고 믿었으며, 외경들을 영감된 권위서들로 사용하였다. 그는 전면적, 교리적 일탈을 많이 하였고, 신약성경이 최고의 헬라어로 기록되지 않은 것을 알았지만, 계시는 단어들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계시된 것들에 있다고 설명했으며, 축자 영감(verbal inspiration)의 가장 강력한 형태로 성경 (외경 포함)의 한 점도 공허한 것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신 앞에 빈 손으로 나타나지 말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은 공허한 아무것도 말씀하실 수 없는 분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는 성경은 그 전체가 동질적이고 모든 단어에 있어서 초자연적으로 완벽한 책이라고 보았다.

그의 성경해석학은 풍유화(allegoric system)로 요약될 수 있는 데, 그의 풍유화는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의 모든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신모독이 된다는 것이다.

신인 동형적 표현들(Anthropomorphism)을 문자적으로 보면 하나님을 육체적 하나님으로 설명하는 셈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구약 기사들을 문자적으로 보면 비도덕적이라는 것이다. 가령 노아의 주정, 야곱의 아내들과 칩들. 룻의 근친상간, 유다와 다말 사건 등이 그렇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성경 문자 속에 본질적으로 유치한 것들이 들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독수리들을 먹지 말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유치한 것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성경의 규례들을 문자적으로 보면 무가치하고 불의한 것들이 있다는 것이다. 할례 받지 않은 남자 아이가 끊어진다는 것은 부모가 끊어져야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는데도 아이가 끊어져야 한다고 했으니 불의한 것이라는 것이다.

어떤 명령들은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오른 빰을 치면 왼 편도 돌려대라"는 것이나, 그리스도가 세상의 모든 나라들을 보았다는 시험이나,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말라" 등이 그렇다는 것이다. 또한 바울과 복음서 기록들은 문자적으로 취하면 상치되거나 정면으로 모순되는 것들이 많다는 것이다.

바울과 베드로도 부분적으로 진리의 파편을 보았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풍유는 자발적 경건의 소산이 아니라, 플라톤에게서 온 합리주의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다.


둘째, 성경 자체 내의 풍유적 해석의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이사야서예서 그리스도는 고운 모양이 없다고 했는데, 변화산에서 그의 모습은 찬란한 윤이 났다. 이 원리는 성경 전체에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이 홍해 도해를 세례로 해석하고, 사라와 하갈을 풍유화하고. "문자는 죽이는 것이나 영은 살리는 것"이라고 했으며, 결혼을 "큰 비밀"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성경 전체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시내산에 이른 것이 아니라 시온산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 원리도 성경 전체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문자적 의미를 깨지 않으면서 위와 같은 풍유적 해석의 단편들을 사용하였으나, 오리겐은 플라톤 철학자들과 유대 철학자들에게서 빌어온 방법을 성경전체에 사용해서 문자적 의미를 깨뜨렸다.

오리겐의 알레고리가 천년왕국주의, 미신적 문자주의, 영지주의의 "반제들"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문제를 야기했다.


셋째, 오리겐은 풍유화의 근거를 삼분설에서 찾았다.

육은 문자적 의미, 혹은 도덕적 의미, 영은 신비적 의미의 근거라고 보았다. 70인경의 잠 22:20에 “너는 그것들을 삼중으로 쓰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삼중으로"는 삼중 의미의 근거가 된다는 것이다. 오리겐은 삼중적 의미를 말했지만, 실제로는 문자적 의미는 거의 언급하지 않고, 도덕적 의미도 아주 가끔 언급하면서 창조기사들 뿐 아니라, 율법, 역사, 예언서까지도 풍유화하는데 주력했다.


넷째, 오리겐은 자신의 불완전한 언어학적 지식 때문에 풍유화를 강화하게 되었다.

그는 히브리어의 병행법 (parallellsm)을 몰랐다. 예컨대 “리브가는 처녀였다; 어떤 남자도 알지 않았다”는 병행법인데도, 오리겐은 그리스도는 회심한 영혼의 남편이고, 사탄은 타락한 영혼의 남편이라는 해석을 여기서 끄집어냈다.


다섯째, 오리겐의 풍유화의 구체적인 예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리브가가 우물가에 가서 아브라함의 종을 만난 것은 우리가 매일 성경의 우물가로 가서 그리스도를 만나야 한다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출 1:5에서 산파들이 남아들을 구했을 뿐 아니라, 여아들을 죽였다는 말이 없다는 점에서 여아들은 육정들을 의미하고, 남아들은 이성과 지성을 의미하므로 사람들이 쾌락을 추구하면 바로가 그들 속의 남아들을 죽이고 여아들을 살린다고 해석되었다. 아브라함이 마므레 상수리 나무 아래 섰다는 사실에서 마므레는 "비전"을 의미하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통찰력을 기뻐하셨다는 것이다. 오리겐의 풍유적인 해석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웨스트민스터의 실바(Moires Silva) 교수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첫째, 실바는 당시의 변증적, 신학적 필요성 면에서 오리겐의 풍유화를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의 헬라인들은 신적 영감과 풍유적 의미가 흔히 상호 협조적이라고 생각했다(호머의 경우처럼).

오리겐은 당시에 두 가지 공격에 대비해야 했다. 한 가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당혹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 억지 풍유화에 호소한다는 공격이고, 다른 하냐는 성경을 풍유적으로 해석하지 못하면 성경이 영감되지 않았다는 증거라는 공격이었다. 전자에 대해, 오리겐은 성경의 문자적 의미의 진리, 선, 가치를 강조하여 풍유적 해석을 약화하였다. 후자에 대해, 지능이 있으면 풍유화가 가능하다고 하면서 오리겐은 풍유적 해석을 정당화하였다.

당시에는 위와 같은 변증적 필요성 뿐 아니라 신학적 필요성도 있었다. 유대인들의 불신앙은 예언들을 문자적으로 해석한데 있다고 오리겐은 파악하였다. 구약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메시야를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구약의 영적인 해석을 통하여 메시야를 증언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둘째, 오리겐은 모든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신모독이나 모순을 일으킨다고 보았는데, 이 면에 있어서 오리겐과 현대 해석자는 정도의 차이일 뿐이라고 실바는 지적하였다.


셋째, 실바는 오리겐이 신약 자체가 알레고리 사용한다고 본 점을 지적하였다(고전 9:9-10: 10:1-4, 갈 4:21-71, 엡 5:31-32). 여기서도 오리겐과 현대 학자의 차이는 이런 신약본문을 어떻게 보느냐의 차이 뿐이다.


넷째, 우리가 설교 등을 통해서 성경을 적용할 때, 풍유화가 불가피하다는 점을 실바는 지적하였다. 가령 시 137편에 바벨론 아이들을 돌들에 던지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루이스(C.S. Lewis)와 같은 대학자는 이것은 작은 탐닉들, 작은 분개들을 내던지라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실바 교수가 오리겐의 풍유적 해석을 이상과 같이 평가한 점은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표면상의 의미 면에서 해석할 것인가, 아니면 배후의 "더 깊은 의미"면에서 해석해야 하는가 하는 심각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로버트 그랜트(Robert M. Grant)도 다음과 같은 평가를 통해 같은 문제를 제기했다. “하르낙은 오리겐의 작품을 "성경적 연금술"이라고 조롱했다. 그의 방법은 우리가 바라는 만큼 합리적이 아니며, 그의 "영적인" 해석들은 아주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인간 정신의 어떤 작품의 해석에 있어서 객관성을 기한다는 것은 도달할 수 없는 목표라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해석자는 그가 해석하는 것 속으로 자신의 사상을 집어넣는 것이다.”

주웨트(Paul K. Jewett)는 개신교의 성경해석학자들이 대부분 풍유적 해석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보면서도 사실상 수용하고 있다고 하면서 (예, 아가서) 풍유적 해석의 타당상의 기준은 "합리적 유추" (rational analegy)라고 주장했다.

이 문제는 여기서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여하간 풍유적 해석에 대한 절대 부정적인 태도는 논의되어야 할 문제임에는 틀림이 없다.



(3) 크리소스톰 (John Chrysostom, 347-407)

오리겐을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거장이라고 한다면 크리소스톰은 안디옥 학파의 만개한 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동료 학생 데오도레 (Theodore)만큼 독창력과 지성적 다양성은 가지지 못했지만, 그보다 더 명확한 통찰력, 더 냉철한 논리, 더 실제적인 지혜를 소유했고, 제롬만큼 유식하거나, 오리겐만큼 신비한 의미에 공감하거나, 어거스틴처럼 위대한 신학자는 아니었으나, 감독으로서 영혼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탁월한 웅변으로 설교했고, 학식과 양식에 근거한 대중적 강해를 했으며, 성경 전체에 익숙하여 혈관 속에서 그 맥박을 감지하였다.

크리소스톰의 해석학은 문자적 의미를 행위의 지침으로 사용할지언정 형이상학적 사변의 장이나 논쟁의 무기로 사용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는 바울을 모델로 삼았으나, 열정과 사랑에 있어서 요한을 닳았고, 실제적 경향에 있어서는 야고보를 닳았다. 그는 실제적인 활동가였기 때문에 히브리어나 헬라어가 정확하지 못했으나, 헛된 교리주의나 무근거한 풍유에 빠지지 않았다. 그는 의미를 유입하기보다 도출하는 일반원리를 지켰으며, 성경 속에 있는 인적 요소를 솔직하게 인정했고, 성경을 개인적 교훈을 위하여 읽는 것이 유익하다고 보았고, 신비적 의미도 건전한 의식을 가지고 채택했으며, 상치한 본문들을 조화시키는 데 있어서 "조화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고, 문맥의 연구를 통하여 문자적 의미를 개발하였고, 성경의 대부분은 "명료하다"고 보았으며, 성경 이해의 보조 자료는 감심과 현자들의 지도와 성령의 도움이라고 하였다.

크리소스톰은 풍유화를 엄밀하게 제거하지는 않았지만, 그는 예표론에 자신의 해석을 제한했다. 그는 갈 4:24에 나타난 바울의 단어 사용을 비판했다. 바울은 "예표"라고 해야 할 젓을 "풍유"라고 한 것이라고 비관한 것이다. 그러면서 예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표는 진리가 등장할 때까지만 진리라는 이름이 주어진다. 그러나 진리가 나타나고 나면, 그 이름이 더 이상 사용되지 않는다. 그림을 그릴 때도 화가가 왕을 스케치한다면, 색칠을 할 때까지는 그는 왕이라고 불리지 않는다. 색칠을 하면, 예표는 진리에 의해서 감추어지고 보이지 않는다. 그제야 우리는 "왕을 보라" 말하는 것이다."


(4) 제롬(Jerome, 347-419)

제롬은 주석가로 보다는 번역자로 잘 알려진 학자이다. 그의 벌게이트(Vu1gate)는 그가 남긴 큰 공헌이다 제롬은 빌레몬서,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디도서의 주석을 썼다. 그는 히브리어와 헬라어에 능통했다. 제롬은 처음에 풍유적 해석을 격찬했으나, 후에 풍유적 해석의 약점을 발견하고 그 해석 방법을 공격했다. 그러나 제롬 자신 역시 풍유적 해석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

화라(Farral)는 제롬을 평하여 “그는 풍유와 문자주의의 진퇴양난 사이를 안전히 운행하는 데 성공했다고 스스로 자랑하지만, 실제에 있어서 그의 다중 의미" (multiple senses)와 ‘영적 의미의 전체 숲’(whole forests of spiritual meanings)은 본문의 한 구절의 가치도 없다”라고 말했다. 제롬은 위대한 학자였음에 틀림없다. 그는 고전 문헌을 많이 이용하여 주석을 했다. 우리는 제롬의 예에서 명백하고 바른 주석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배운다.


(5) 어거스틴 (Augustine, 354-430)

어거스틴 성경해석자라기보다는 신학자와 변증가였다. 그는 다양한 지식과 자신의 변증법적 재질과 사변적 호기심으로 중세 스콜라 철학의 아버지가 되었고, 열정으로 중세 신비주의자들에게 자극을 주었고, 교회제도에 대한 관심으로 중세 카톨릭 교회의 계급제도를 강화하였고, 성경의 충족성과 명료성을 강조하여 중교개혁의 원동력을 제공한 신학자였다.

성경 해석 면에서 어거스틴은 계시의 점진성을 인정하였고, 구약 전체에서 복음을 발견하려고 시도하였으며, 풍유적 해석이 역사적 의미에 근거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히브리어는 모르고 헬라어도 약간 아는 정도에서 70인경과 라틴 역본에 의존하였기 때문에 역사적 의미에 약했으며, 티코니우스의 해석법칙들을 수용하여 성경에 풍유적 해석을 가하였다.

어거스틴의 풍유적 해석의 근거는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임이니라""(고후 3:6)이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죽이는 것이요, 풍유적이나 영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살리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이 성경구절은 여러 면으로 남용되어진다. 혹자는 성경의 영적이해는 생명을 주는 것이고, 학문적 연구는 죽이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정통주의자는 실존적 해석은 생명을 주는 것이고, 문자적 해석은 죽이는 것이라고 하며 정통주의 공격에 사용하기도 했다.

어거스틴은 성경 해석을 위해 건전한 원리가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풍유적으로 성경을 해석했다. 그 한 예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눅 10:30-37)이다. 여리고로 내려가는 사람은 인류(Adam)로서 사탄과 마귀들에게 공격을 받았고, 구약의 제사장들과 그들의 사역에 의해 보호를 받지 못했지만 그리스도에 의해 구함을 받고 교회로 인도함을 받은 것으로 이는 하늘나라로 가는 순례자들의 소생을 위해 기록되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누룩"은 "진리"나 "사악"을 의미하고, "사자"는 "악마나 그리스도를 의미하고, "무화과 잎"은 "외식", 짐승 가죽은 "필멸성", 에덴의 4강은 4주덕, 안팎으로 칠한 방주는 "교회"가 안팎의 이단으로부터 안전한 것, 노아의 술취함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수난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어거스틴은 요2장의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사건을 해석할 때, "물"은 구약 예언을 의미하고,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시각에서 본 예언을 의미하고, 6개의 물 항아리는 인류 역사의 6시대를 의미하고, "두세 통"은 삼위일체를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요 5장의 5행각은 오경을 의미하고 "동하는 물에 내려가다"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신앙을 의미하고, 38년은 좋은 숫자인 40에 못미친다는 뜻으로 모든 행위가 부족하다는 의미라고 해석했다.

요 6장의 5병 2어 사건에서 5병은 모세 오경을 의미하고, 2어는 제사장과 정치가를 의미하고, "보리떡"은 구약성경을 의미하며, "5000명"은 모세 오경을 의미한다고 해석했다. 어거스틴은 알렉산드리아 학파의 성경해석의 흐름을 막지 못하고 그것을 수용해서 중세의 4중적 의미로 가는 다리를 놓았다고 할 수 있다.


2 중세의 성경 해석

(1) 4중적 의미

중세의 성경해석은 "4중적 의미"로 요약될 수 있는데, 여기서 4중 의미란 문자적/풍유적/도덕적/천상적(anagogical) 의미이다. "문자는 하나님과 우리 선조들이 한 일을 보여주고, 풍유는 우리의 신앙이 숨은 곳을 보여주며, 도덕적 의미는 일상생활의 규칙들을 보여주고, 천상적 의미는 우리의 싸움이 끝나는 곳을 보여 준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의미의 복합성이 의미의 모호성음 야기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지시하기 때문에 의미가 복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단어에 의해 지시된 것이 다른 것들의 유형(types)이기 때문에 의미가 복합적이 되는 것이다.

4중 의미의 예로, "예루살렘"을 보면, 문자적으로는 팔레스틴의 예루살렘 도시를 의미하고, 풍유적으로는 교회를 의미하고, 도덕적으로는 인간 영혼을 의미하고, 천상적으로는 하늘의 도시를 의미한다. "물"은 문자적으로 물을 의미하고, 풍유적으로 세례 혹은 민족을 혹은 은총을 의미하고, 도덕적으로는 슬픔 혹은 지혜 혹은 이단 혹은 번영을 의미하고, 천상적으로는 영원한 행복을 의미한다.

"빛이 있으라"는 문자적으로 실제의 창조행위를 의미하고, 풍유적으로는 "그리스도는 사람이 되라"를 의미하고, 도덕적으로는 "그리스도에 의해 정신적으로 조명을 받으라"를 의미하고, 천상적으로는 "그리스도에 의해 영광으로 인도되라"를 의미한다. 4중 의미의 극단적인 결과는 이사야서 1장에 관해 24전의 책이 집필된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Hasselbach의 경우).

중세에 이런 해석이 유행한 이유는 무엇인가? 교부신학은 주로 주석에 근거하였는데 원래 신학이란 말씀을 가급적으로 넓게 적용 하는 것이기 때문에 주석을 확대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헬라 교부들과 아울러 플라톤의 사상이 어거스틴을 통하여 기독교 세계관에 영향을 주었다. 이에 따라 성경은 보이는 세계로 보이지 않는 세계의 하나님과 모든 다른 진리들을 보여주는 커다란 거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2).. 니콜라스(Nicholas of Lyra. 1270-1340)

니콜라스는 중세의 4중 의미라는 대해에 녹색 고도와 같은 프란시스 종단의 불란서 해석자이다. 그는 매 단어에 의미를 부여하는 언어적 의미 (the verbal). 전통에 전혀 주목하지 않는 순수한 주관적 의미, 거룩한 본문에 신비를 읽어 넣는 풍유적 의미, 문자들/숫자들/음운들에서 신비스런 의미를 개발하는 카발리스틱 의미 (the kabbalistic), 저자들의 실제의 의미 파악에 국한된 문자적 의미(the literal) 등, 다섯 가지 의미를 분석한 후 마지막 의미를 채택하였다. 그는 사본들의 부식에 대한 관심과 사본비평적 관심을 가졌으며, 원어 이해를 중시했고, 본문을 끝없는 파편들로 쪼개는 것은 유치하다고 보았고, 강해와 가능한 석의를 구분하였으며, 문자적 의미에 확고하게 근거해서 의미를 파악하였다(문자적 의미에 근거한 신비한 의미 인정).

니콜라스는 성경 전체에 대한 50권의 주석을 집필했다. 그러나 실제 주석에 있어서 그는 위의 원리들을 따르지 않는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가령 대상 17:13의 "나는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나의 아들이 되리라"는 구절은 그리스도가 천사들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의미하고, "나의 아들"을 문자적으로는 솔로몬에게서 성취되고, 후에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해석했다. 끄는 구약의 영적인 의미가 신약의 문자적 의미라고 했고, 어떤 구절들의 경우 역사적 신비적 문자적 의미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3) 총평

중세의 성경해석은 니콜라스를 제외하고 4중의미의 대해에 표류했다고 볼 수 있다. 어학적 능력 결핍, 비판적 분석력 결핍, 변증법 남용 등으로 성경해석이 교회와 교회 전통의 시녀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