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식] 성공회 김성수 주교의 경우 [교계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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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 성공회 김성수 주교의 경우 [교계실상]


분류: 소식- 교계 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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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젊음 나의사랑>성공회 초대교구장 김성수 주교(6)




『아니 이게 왠 웃지못할 진풍경이야. 신부들이 파출소 신세를 질 때도 다 있나』

파출소직원들이 신기한듯 한마디씩 던졌다. 그럴만도했다. 젊은 신부 10여명이 줄줄이 광화문 파출소로 끌려갔으니 말이다.

담당직원은 『무슨 음모를 꾸미고 있느냐』며 호통을 쳤다.

『아닙니다. 정신지체아들을 돕기위한 자선 음악회를 열려고 합니다』 신부들과 함께 거리에 나가 홍보전단을 돌린 것을 정부에서는 시국 반대성명서라도 뿌리는 줄 알았던 모양이었다. 72년 유신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시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을 것이다.

내가 정신지체아들과 인연을 맺은 것은 후리다와 함께 처음으로 영국의 처가댁을 방문했을 때의 일이다. 결혼한지 3년이 지나도록 장인어른의 기침소리조차 들어본 적이 없었다.

장인어른이 문전박대라도 하면 어쩌나. 정말 대책이 없는 노릇이었다. 맨체스터에 있는 처가집에 들어가는 순간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자선음악회등으로 기금 마련


그러나 그것은 한낱 기우였다. 후리다의 집안 분위기는 온화하고 부드러웠다. 장모는 나를 보자마자 한 식구처럼 대해줬다. 손주손녀가 예뻤던 모양이다. 장인어른은 예상대로 날 탐탁치 않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내가 우려했던 「극렬 반대」이미지는 아니었다.

「신부가 아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점수를 따는 것이 최고의 방법일텐데…」

다음날 확실한 「사위인정서」를 받기위해 속으로 끙끙 앓고 있는데 갑자기 퍼뜩하고 생각이 떠올랐다. 「맞아, 음식솜씨를 보여드리면 되겠구나」. 어머니의 손맛을 쏙 빼닮아 못하는 음식이 없을 정도였다. 한국 전통음식의 맛을 볼 수 있도록 해주겠다며 냉장고문을 열었다.

내가 택한 메뉴는 설렁탕과 만두국. 10시간도 넘게 사골을 푹 삶아 진국을 만들었다. 진짜 실력은 만두피에서 결정됐다. 밀가루를 얇게 빚어 그 속에 고기와 양파, 당근등을 다져 넣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만두는 보기도 좋고 먹음직스러웠다. 후리다는 그런 내가 신기했는지 옆에서 계속 거들어줄 일이 없냐며 부엌을 드나들었다.

드디어 음식이 완성됐다. 식탁위에 빙둘러 앉아 시식을 하는 순간, 「띵동」하며 벨소리가 울렸다. 퇴근하고 현관문을 들어서는 장인어른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무슨 냄새가 이렇게 고약하냐』며 창문이란 창문은 모두 활짝 열었다. 나보다 더 당황했는지 처가집 식구들이 얼어붙은 채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그러나 내 예상은 적중했다. 장인어른은 한국의 전통음식을 만들 줄 아는 내가 민족의 뿌리를 아는 남자이며 아내를 사랑할 줄도 아는 자상한 남편이라고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 것이 아닌가.

음식작전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제 양가의 축복을 받는 명실상부한 후리다의 남편이 된 것이었다.

영국 처가댁에서 1년간 머물며 셀리오드 신학대학에서 산업선교학을 공부했다. 그러던 어느날 영국 캔터베리 주교로부터 연락이 왔다. 정신지체아들을 위한 사업을 펼쳐보라는 권유를 받은 것이다. 곧바로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고국으로 돌아와 보니 암담했다. 영국에서 보조해주는 돈을 가지고는 단 한명의 어린이도 보살필 수가 없었다. 난 버스비를 아끼기 위해 10리길도 걸어다녔다.

그래도 기금은 턱없이 모자랐다. 그때 송창식과 윤형주, 박상규등이 자선음악회의 밤을 여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의했다. 우리는 당시에 제일 크다는 이대강당을 통째로 빌렸다.

『자, 여러분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러면…』. 여기저기서 환호성이 터져나올줄 알았다. 너무 큰 강당을 빌렸던 것일까. 좌석이 텅텅 비었다. 신부들이 파출소로 끌려다니는 등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치른 공연치고는 너무 썰렁했다.

모금은 커녕 공연장을 빌린 값도 내지 못할 형편이었다. 우리가 불쌍해 보였는지 다행히 이대쪽에서는 돈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천만다행이었다. 1973년 성베드로 학교에 처음 입학한 학생은 8명. 사람들 눈에 띄지 않는 이른 새벽에 찾아온 아이들이었다.


친구들과 함께 골인 모습에 눈물


70년대에만 해도 지능이 떨어지는 정신지체아들을 둔 부모들은 고개를 들고 다니지 못했다. 방에 혼자 가둬놓거나 깊은 산속에 숨겨 두었다. 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느님, 이들은 죄를 지은 적이 없습니다』

그들은 혼자 밥을 먹지 못했다. 밥숟가락을 드는 것을 가르쳐 주면 밥만 먹는다. 반찬을 먹어야 한다고 가르치면 반찬만 먹는다.

밥과 반찬을 함께 오물오물 씹어먹어야 한다고 해도 알아듣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그들은 혼자서는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 수업도중 볼일을 보거나 여기저기 용변을 묻히고 다녔다.

동그라미를 가르쳐주면 금방 세모를 잊어버렸다. 가슴이 저려왔다. 답답한 마음에 화를 내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이들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그해 가을 운동회를 열었다. 이 사회에서 「바보」취급을 당하며 숨죽여 지내왔던 아이들. 부모에게 버림받은 아이들. 방구석에 갖혀 외롭게 생활해왔던 아이들. 그 아이들이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운동장을 뛰놀았다. 드디어 운동회의 마지막 피날레인 달리기 시합이 시작됐다. 『와∼』. 그런데 1등주자로 힘껏 뛰던 한 아이가 갑자기 결승점앞에서 멈춰섰다. 『빨리 뛰어야지. 어서 어서』. 선생님들이 목이 터져라 그 아이에게 외쳤지만 뭔가 고민스러운듯 아이는 계속 땅바닥만 내려다 보고 있었다.

순간 아이는 등을 돌렸다. 다시 거꾸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뒤처진 친구들과 함께 골인점에 도달하려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선생님들은 모두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이들처럼 순수한 마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몇명이나 될까. 그들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난 행복했다.

<계속>

/ 정리=정유미 기자 /
최종 편집: 1996년 12월 0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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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1세기 조용히 뿌리내린 성공회




나라의 운명이 바람앞의 등불처럼 위태롭게 걸려있던 구한말 이땅에 들어

온 성공회.

한국근대사와 함께 자치교구로서 숱한 영욕을 함께해온 한국성공회가 「민

중속에 뿌리내리는 교회」를 80년대의 기치로 내걸고 교회중흥을 위한 내실

을 착실하 다지면서 1990년 선교 1백주년을 맞을 준비를 하고있다.

60년대 중반 최초로 한인주교를 맞이함으로써 오랜외국선교시대에 종지부

를찍고 선교 대전환의 계기를 마련한 한국성공회는 다른 교화가 분열과 외

적성장으로 일관할때 산업선교, 에큐메니컬운동 「교회일치운동」등에서 교

계의 지도적 위치를 굳히면서 60-70년대 괄목할만한 성장을 기록했다.

성공회는 지난달29일 찰스황태자의 결혼식광경에서 보여준것과같이 침착하

고 장려하고 위엄있는 전통으로 일반인에게는 「조용하고 점잖은 분위기를

가진 교회」로 알려지고있다.

기본교리중에서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

회임을믿는다」라고 되어있다(One Holy, Catholic Apostolic Church).

여기서 「홀리」와 「가톨릭」을따 성공회라고 명명하였다.

대한성공회는 1890년 9월29일 개척선교의 사명을띠고 한국에 첫발을 디딘

영국인 고요한주교에의해 시작되었다.

첫교회는 1890년 5월17일 서울충무로 「현재대연각건물지역」에 「부활의

집」이라고 명명한 선교본부와 함께성당을 축성함으로써 시작되었다.

이어 1890년 9월 28일 인천에 두번째교회가건립되었고 1897년 11월 27일에

현재 서울정동에있는 서울대성당전신으로 한국식건물의 성당이 축성되었다.

서울교구 주교좌 대성당은 1926년 5월 2일 중세기 구라파에 유행했던 로마

네스크식으로 낙성되었으며 그리스도교의 토착화를 상징하는 한국풍의 강화

읍성당은 1900년 11월 15일 축성, 오늘에이르고있는데 현재는 많은수의 성

당들이 한국식건물로지어져 있기도하다.

대한성공회는 현재 3개교구 (서울 대전 부산)안에 8여개의 교회(서울에 12

개)가 전국에 산재해있다.

성적은 사도계승을 인정하여 주교 사제(신부)부제의 세가지로 나누어지는

데 한국인성직자가 60여명이있고 외국인선교사는 3명뿐으로 최근한국인성직

자들이 급격히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있어 명실공히 한국인주도의 시대를

열었다.

신자는예비신자, 명예신자, 영세신자, 견진신자(이중 결격사유가 없는 신

자는 영성체신자이다)로 구별되는데 전체신자수는 4만 5천2백81명에 달하고

영성체신자는 2만4천9백50명이다.

성공회는 토착적 교회, 민주적의회제도, 예전전통등의 특징으로 지식층에

크게 어필하고 있기도 하다.

현재 대한성공회의 저명인사로는 김종철국민당 당수, 전교통부장관 류양수

씨를 비롯, 실업계에서는 한국화약회장이었던 고김종희씨와 부친의 위업을

계승한 현회장인 김승연씨, 석유공사부사장 김재석씨, 대림기계 부사장조천

호씨, 성인문화사장 서유호씨등이 음양으로 교회를 지원하고있다.

학계에서는 김진만(고대) 임병윤(고대) 이제민(전연대) 임경순(서울대) 고

이학송(서울대) 이대현(서울대) 이성락(연대) 고곽복산(중대)교수와 그의아

들 곽동일교수(고대)가, 문화계인 사로는 조경희(예총부회장) 김양식(여류

시인) 이주훈(아동문학가.지금은 신부가되었음)씨, 연예계에서는 한주열(코

미디언) 사미자(탤런트) 김관수씨 부부, 체육계에서는 박신자씨(전국가대표

농구선수)가 성공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고 있다.

세계적으로 성공회는 국교로 삼고있는 영국을 비롯해 캐나다, 호주, 뉴질

랜드, 인도, 인도네시아, 말레이지아, 싱가포르및 아프리카 여러나라, 그리

고 한국, 일본, 중공등에 약1억명의 신자를갖고있다.

성공회는 간단히말해 예전전통은 외형적으로 천주교와 흡사하고 신앙이나

신학적으로는 기독교개신교와흡사하다.

로마가톨릭이 교회의 감독 수익권을 로마교구에 두는데비해 성공회의경우

는 각교구자치에 두는점이 커다란차이가있다.

따라서 교회의운영도 피라밋식의 지도체제에따라 운영되지않고 다양성에입

각해교회위원중심으로 민주적인의결을거쳐운영된다.

이교회운영위원는 성직자1명에 평신도 2명꼴로구성되어 다른교회보다 평신

도들이 강력한 의결권을 갖는것도 성공회만의 독특한 점이다.

성공회는 어느교파의 독선주의에 빠지지않고 한국의역사 문화를 배경으로

교파간의 연합활동, 일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개방교회며외형적인 성장

에 중점을두지않는 토착적인 학국교회로서 해외교회와는 공동체로서의 유대

강화와를 표방하고 있다.

세계성공회는 상호선교적협력과 신학적이해를위해 10년마다 열리는 전세계

주교회의인 람베스의회와 각지역교회대표로구성, 선교적과제를 조정협의하

는 세계성공회협의회가 있는데 올9월에는 한국성공회를 주요의제로 삼게되

어 한국성공회는 세계성공회로의 발돋움을 기약하고있다.

이두협의회는 어떤 구속력이나 실천에따른 지배적인권한을 행사하는것이

아니며 의견을통합.조정하는입장에서 실천은 각교회의 지역성과 특수성에따

라 적절히 옮겨지게 된다.

대한성공회는 선교초기 독자적인 입장에서 병원의 의료사업, 고아들을 위

한 사회사업, 출판사업등을 추진하면서도 적극적인 선교활동과 직결시키지

못해 교세신장에는 특히 일제하에서는 커다란 성장을 하지못했다.

그러다가 1935년을 전후한 일본의 정책과 6.25동란으로 성공회는 커다란 커

다란 피해를 입었다.

전자의 경우는 선교활동의 극심한 제약을 받았으며 후자의 경우는 평안도

의 약30개 교회를 잃고 말았다.

대한성공회는 60년대 초부터 재건의 움직임을 보여 기독교연합사업의 참

여, 지역사회개발과 기아해방운동의 시작, 평신도교육 사업의 진작과 평신

도사제직 참여운동의 전개, 우리나라 최초의 산업선교시작, 전도를 위한 기

본적여건의 확립, 일제말에 문을닫았던 성미가엘 신학원의 재개와 확충등을

추진하면서 65년5월27일 최초의 한국인주교로 현이천환주교가승좌, 서울교

구장에 서품되면서 한국인이 주축이된 선교시대로의 전환기를 맞게 된것이

다.

그후 교회의 확장과 정비로 오늘에 이르게 된 것이다.

개혁중에는 민중을위한 예전개혁을 단행, 내년부터는 개정된 공기도서를

사용키로했으며 중세이후 고수되어온성가도 개혁에착수한것으로 알려지고있

다.

현재 대한성공회는 성미가 엘신학과 성베드로학교등교육기관과 음성나환자

구호및 생활안정을 위한 성생원, 극빈자의료를 위한 충남의 성모병원, 학생

신도를위한 성베다관, 여학생을 위한 성모관, 성안나의집, 예수원등의 일반

기관을 통한사업을 펴고있다.

또한 일본성공회와 공동으로 원폭피해자구제사업, 정신박약아를위한 사업

도 벌이고있다.

한경배교수(연세대)는 한국성공회에 대해 「넘치는 기동력과 중간적, 중보

적, 매개적존재양식에 의한 놀랄만한트시와 정력으로 에큐메니컬운동에 주

도적으로 임해왔으므로 우리종교역사에 이교단이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고

평가하고있다.

이천환주교는 선교 1백주년을맞아 80년대 한국성공회의 토착화에 특히 중

점을두고 앞으로 (미완성인 현재의 대성당을 한국의 로마네스크건물로 완성

시키고 대학을설립하는한편 정신박아들을위한 전문적인 자선병원을세워 교

회본질에 따른 사업을 펴나가겠다」고 밝혔다.

교육기관으로는 천신신학교가 내년봄 개교되어 본격적인 신학교육과 성직

자양성에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 <이용>



최종 편집: 1981년 08월 0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