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 - 최덕성 고신대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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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 - 최덕성 고신대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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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Views of the Church of Sang-Dong Han & Ki-Chul Ch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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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가 민경배 교수는 일제치하의 수진(守眞)성도 한상동 목사와 주기철 목사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주장한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주도한 한상동과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순교한 주기철이 당시의 한국교회에 대한 각각 다른 인식을 가졌다고 본다. 상이한 교회론을 가졌던 결과로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이 새 노회를 조직하려 할 때 주기철은 그들과 같지 않은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신사참배를 반대한 것은 동일하지만 한상동은 분리주의적 교회관을 가졌고, 주기철은 정통 교회론을 가졌다. 민경배의 이러한 주장은 다른 교회사가들에 의해서도 주창되고 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의 동력(動力) 한상동은 동일한 신앙을 가진 전국의 여러 동지들과 함께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회들로 구성된 노회를 조직하고자 했으며, 그것을 통해 배교하는 한국교회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항하고자 했다. 한상동 목사가 주기철에게 그것을 제의했을 때, 주기철은 ?시기상조(時機尙早)의 감(感)?이 있다고 말했다. 새 노회 조직의 시기가 너무 이르다는 반응을 보였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역사를 기록한 일제의 사건 취조문은 주기철의 이름을 신사참배거부항쟁자 군(群)에 포함시키지 않고 있다.

민경배는 위 두 가지를 근거로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관이 달랐다고 주장하면서 주기철을 우상숭배를 행하던 당시의 교회와 동일시하고, 한상동을 그것에 항거했던 신사참배거부운동 공동체와 동일시한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이 우상숭배를 행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강요하며 또 백귀난행(百鬼亂行)을 저지르는 교회를 파괴하려고 한 것이 교회론적으로 보아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한. 당시의 한국교회는 상처받는 교회였으며, 비록 순결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수호한 교회였다는 것이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는 민경배의 주장은 근거가 될 수 없는 것을 근거로 삼은 논점일탈의 오류(Red Herring)이다. 이러한 주장은 한국교회사 안에 만연한 역사왜곡과 친일파 역사 시각의 대표적인 예이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의 정체에 대한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사 기술은 대체로 다수 집단의 시각이나 힘의 역학 관계에 따라 이루어져 왔다. 일제말기와 광복 후의 한국교회의 역사는 시종일관 신학적인 함의(含意)를 지니고 있다. 그런데도 그 역사를 기술하고 해석하는 자들이 성경적, 교리사적, 신앙고백적 관점에 따른 것이 아니라 다수 집단의 당파적 시각과 친일파 인사들의 자기변호적인 교회이해 에 따라 역사를 기술햇따.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는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는 주장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이 분리주의 운동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기존 교회가 순결을 잃었어도 그것을 무너뜨리려고 하고, 분리하여 새로운 교회조직을 가지려고 시도한 것은 3세기 이후의 교회관 논쟁에서 드러난 분리주의 교회관이 재현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일제에 항거한 운동인 동시에 배교한 한국교회에 항거했던 운동이었다. 신사참배거부운동 공동체는 그 자체로 하나의 교회였다. 사도들이 전수해 준 보편적 기독교 신앙을 계승하면서 유일신론과 십자가의 구속 사건에 대한 감격과 신앙의 정조를 가진 교회였다. 우상숭배를 하고 배교하는 교회로부터 축출, 면직, 제명을 당한 교역자들은 신도(神道)주의화 된 교회에 대항하여 장로교 본래의 신앙고백적, 교회론적 정체성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그 운동이 새로운 교회조직을 가지려고 한 것은 정당했으며, 오히려 개혁 교회론에 충실한 시도였다.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의 교회론에 근거한 성경적 개혁신앙 운동이었다.



1. 민경배의 주기철론

일제말기의 한국교회에 대한 역사왜곡은 민경배의 작품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는 일제말기의 한국교회가 ?상처받고 수모를 겪는 교회였지, ?악마?의 교회는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주기철 목사의 교회론은 놀랍게도 전통적 교회론에 잇닿아 있고, 그래서 [주기철은] 한상동 목사와는 달리 교회의 순결성을 명분으로 한 교회 분열이나 기존 교회 탄핵을 부당하다고 보았다?고 한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이 ?신사참배하는 교회에는 출입하지 말고, 이를 취소(파괴)하도록 할 것?을 포함하는 5가지 항목의 구체적인 저항 방법론을 제시한 것을 언급하면서, 그 운동을 과격하다고 단정한다.

여기 이들 신사참배반대운동자들에게 나타난 과격함이 눈에 띈다. 현존하는 교회를 간음죄로 고발하면서 그 파괴를 공언하고 그런 교회의 종말을 고하면서 새 노회의 건설을 주장한 사실이 그것이다. 한상동이 그 대표적 인물로 경남노회를 순수한 신도들로 새로이 결성한다고 단언하고, ?그것은 경남 만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그때 그자리에는 김인희, 채정민, 이주원, 오윤선, 이광록, 방계성, 안이숙, 박의흠, 김의창, 최봉성, 그리고 주기철 부부가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민경배는 주기철이 이들 신사참배거부자들과 달랐다고 하면서 한상동을 분리주의자로 단정하고, 또 폄하한다.

여기에 대해서 주기철은 단호히 말했다. 신 노회 즉시 재건은 시기 상조의 감이 있다. 우리는 그의 이 놀라운 판단이 얼마나 훌륭하였으며, 그런 의미에서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가 신사참배 문제로 불행한 분열에 휘말릴 때 주기철의 신앙이 분열의 전거로서 조회되지 않았던 점에 대하여, 그의 통찰력의 건전함과 심원함에 버금하는 예찬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은 주기철이 오랜 옥살이를 끝내고 석방한 1940년 4월 20일, 이틀 지나 한상동이 부산에서 급히 평양에 달려와 채정민 등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 13명과 주기철 부부가 함께 즐거이 만났을 때에 한 이야기이다. 출옥한 몸으로 한국교회 재건에 불타던 44세의 한상동에게 이런 말 하기에는 용기와 판단이 필요하였는데 말이다.


민경배는 ?주기철이 이 때 그의 신앙 투쟁이 이들과 다른 방향을 다른 방향을 가고 있다고 느꼈는지 모른다고?고 하면서 그 까닭이 ?방법과 신학의 차이? 때문이었다고 한다. 주기철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대한 신비주의적 사랑을 품고 있었음이 분명하였다. 상처받은 교회가 순결을 잃어가고 있어도, 교회의 역사적 전통 수호의 흔적은 남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교회의 변질을 참을 수 없었고, 따라서 이러한 신학의 차이 때문에 해방 후 평양 산정현교회가 분열로 내분하는 비통을 겪어야 했다?고 한다. ?역사적 교회[신사참배를 수용한 교회]를 공격하며 새로운 교회를 건설하자는 이들 틈에서 주기철은 그들과 같을 수 없어, 한없이 외로운 신앙의 길을 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

민경배가 보는 주기철의 교회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주기철은 신사참배를 수용한 한국교회를 배교한 교회, 간음죄를 범한 교회가 아니라고 보았다. (2) 주기철은 기존 교회를 공격하며 새로운 교회―신사불참배노회를 재건하자는 한상동을 비롯한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과는 다른 방법과 신학―교회론을 갖고 있었다. (3) 한상동과 신사참배거부운동은 분리주의적 교회관을 가졌고, 주기철은 전통적 교회관을 가졌다.



2. 시기상조(時期尙早)의 감(感)

민경배는 신사불참배 거부 항쟁자들이 평양에 모여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기로 한 것을 언급하면서 ?그 해 경상남도에서 한상동, 주남선 목사가 중심이 되어 ?빠른 시일 내에… 비타협적 새 노회?를 결성하려고 모사했다?고 한다. 모사(謀事)란 계략을 세우거나 어떤 일을 꾀하거나 계책을 세우는 것을 일컫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단어이다. ?모의?라는 표현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우상숭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새 노회 결성을 시도한 것을 일컬어 ?모사했다?고 표현한다. 이러한 역사기술에는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에 대한 짙은 냉소가 담겨있다.

민경배는 신사참배거부운동과 관련을 가진 주기철의 신앙이 강렬한 유일신론, 십자가의 구속과 신앙의 정결성, 곧 순결의 신앙과 더불어 철저한 교회론을 지녔다고 지적하면서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주장한다.


한국교회사 계보에서 때에 따라 주기철 목사가 오늘날의 고려신학파(예장 고신파)에 연결된 것으로 판단하는 경우가 있다. 한상동 목사와의 연결 때문에 그런 맥(脈)의 구성이 가능하다고 본다. 하지만 주기철 목사의 교회론은 놀랍게도 전통적 교회관에 잇닿아 있고, 그래서 한상동 목사와 달리 교회의 순결성을 명분으로 한 교회 분열이나 기존 교회 탄핵을 부당하다고 보았다…. 교회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징표 때문에 정통성이 의심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교회 역시 상처받고 수모를 겪는 교회였지, ?악마?의 교회는 아니었던 것이다.


민경배는 이처럼 주기철을 기성교회―친일전력자들과 동일시하고, 신사참배거부운동을 고려신학파―예장 고신파와 일치시킨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관이 달랐다고 하는 민경배 주장의 근거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주기철이 새로운 노회 조직을 시기상조라고 말했으며, 둘째는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수난을 당한 일제의 취조기록, 곧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에 주기철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를 근거로 ?주기철 목사의 교회관은 놀랍게도 전통적 교회관에 잇닿아 있고, 그래서 한상동 목사와 달리 교회의 순결성을 명분으로 한 교회 분열이나 기존 교회 탄핵을 부당하다고 보았다?고 단정한다.

주기철은 제3차 투옥에서 석방된 후에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교회들을 규합하여 노회를 조직하자는 한상동의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선뜻 응하지 않았다. 이 사건을 일컬어 민경배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자들이 현존교회를 간음죄로 고발하면서 그 파괴를 공언(公言)하고? 새 노회의 건설을 주장하자 주기철은 ?신(新) 노회 즉시 재건은 시기상조의 감이 있다?고 하면서 단호히 거절했다고 본다. 그리고 전술했듯이 ?이 놀라운 판단이 얼마나 훌륭했으며…, 그의 통찰력의 건전함과 심원함에 버금하는 예찬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칭송한다.

그러나 이 말이 오고간 역사적 맥락과 그 회합에 참석했던 사람들의 반응과 증언은 민경배의 주장을 반증(反證)한다. 주기철이 석방된 것을 기회로 위문을 겸하여 모인 이 회합의 목적은 신사불참배주의에 입각한 노회를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3월 22일에 김린희, 김의창, 김형락, 박의흠, 방계성, 안이숙, 오윤선, 오정모, 이광록, 이인재, 주기철, 채정민, 최봉석, 한상동 등 13명은 채정민 댁에 회합했다. 김린희는 선천에서, 박의흠은 신의주에서, 한상동은 부산에서 각각 멀고먼 길을 달려 평양에 도착했다. 교통이 오늘날처럼 발달한 시대가 아니었는데도 전선(全鮮)을 위한 신사참배거부운동의 구체적 방안을 모색하고 새 노회 조직을 위해 희생을 무릅쓰고 회합에 임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전국 조직망은 이 회합이 있기 전에 이미 만들어졌으나, 장로교 조직체계를 갖추기 위한 목적이었다.

주기철은 농우회 사건으로 수감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나 머물 곳이 없어서 채정민 목사의 집에 기거하면서 건강을 돌보고 있었다. 한상동은 자신이 멀리서 그를 찾아온 목적, 곧 신속한 노회 조직의 필요성을 말했다.


경남에[는] 반대운동이 활발합니다. 신사참배 불참 노회를 재건하자는 소리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경남은 그 실행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경남만의 일이 아니므로 북쪽 여러 동지들을 찾아보았습니다. 역시 그런 뜻이 많습니다. 자꾸만 강압적으로 나오는 일제의 동향을 볼 때, 힘이 모여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그러기 위하여 노회가 조직되는 것이 힘을 모으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한상동의 제안에 대해 주기철은 ?아직 시기가 빠르지 않겠습니까? 만일 재건노회가 조직되고 반대운동의 세력이 강해지면 일제가 더 강압적으로 달려들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희생자가 더 많이 나지 않을까요??하고 말했다. 그는 노회를 당장 조직하여 운동을 전개하면 일제가 더 조직적으로 박해를 하고 그렇게 되면 희생을 당하는 신자가 많이 생길 것을 염려했다. 한상동은 말하기를(정확히 말하자면, 한상동의 전기 편찬자가 한상동이 증언한 것을 기록하기를) 그가 옥중에서 수개월 시달린 고통이 너무 컸기에 희생자가 많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고, 지도자들만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끝났으면 싶었다고 했다. 이 말을 하는 주 목사의 얼굴엔 피로가 서려 있었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대화는 계속되었다.


[한상동:] ?아닙니다. 이미 반대운동은 시작되었습니다. 북쪽에는 이기선 목사가 조직적으로 반대운동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경남도 제가 내려가면 조직을 하여 운동에 나설 예정입니다.?

한 목사가 열을 올렸다.

[주기철:] ?어차피 운동은 실시되겠지요. 그렇다면 동지들을 많이 모으는 일에 힘을 써 보십시다.?
모두들 그렇게 하기로 힘을 모았다.


이주원(이인재) 전도사는 경남에서 시작된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전국적으로 연결시킨 연락책이었다. 그는 한상동의 조언을 받아 새 노회 조직을 위한 회합을 주선했다. 그의 노력 덕분에 주기철이 출옥한 것을 계기로 하여 남쪽과 북쪽의 신사참배거부운동 지도자들이 모였다.

이주원의 전기는 이처럼 주기철이 시기상조를 말한 까닭이 옥중에서 많은 고통을 받고 시달렸기 때문에 노회를 조직하면 희생이 클 것으로 생각하여, ?희생을 최소한 막아보자는 것이었고, 더 이상의 전국적 조직망으로 전개할 때 일제가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을 염려?했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주기철은 신사참배거부운동과 궤를 같이 했다. 그는 그 운동을 반대하지 않았다. 다만 교인들의 희생이 클 것을 염려하여 노회 조직을 늦추자고 했다.

주기철이 시기상조라는 태도를 보이자, ?진리의 투사? 김린희는 더욱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미 우리는 순교를 각오하고 있습니다. 시작된 반대운동을 더 힘차게 전개하여야 하겠습니다?고 말했다. 그는 당장 2백원을 내놓았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더욱 구체적으로 펼칠 수 있는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동일한 목적으로 이미 거금 4백원을 한상동에게 제공한 바 있다. 일제는 나중에 그의 금품 제공과 한상동이 그것을 수수한 것을 문제 삼았다. 노회 조직에 대한 주기철의 시기상조라고 하는 견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모두들 그렇게 하기로 힘을 모았다.? 이것은 주기철의 소극적인 견해 표명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그 일을 계속 추진하고 진행시키기로 했다는 뜻한다.

주기철이 ?신 노회 즉시 재건은 시기상조의 감?이 있다고 한 표현은 김린희가 일제 법정에서 말한 것을 기록한 취조문, 곧 예심종결서에서 따온 것이다. 일제 검사가 ?한국판 사도들?의 증언을 받아 쓴 기록 중 김린희의 ?사도행전?에 기록된 표현이다. 이것은 민경배의 주장과는 전혀 다른 의미를 담고 있다. 그 전후 문맥은 다음과 같다.


서원상동에게서 경남지방에서는 금년 중에 신사불참배 노회 결성을 볼 가능성이 있으나 이는 경남만으로 그칠 문제가 아니라는 의사를 개진한 것에 대하야 신천기철은 신 노회 즉시 재건은 시기 상조의 감이 있다는 의견으로 결국 각자 동지 획득에 힘쓰는 일면 현존 노회 해소(解消)에 진력할 기회를 따라 운동 방침을 연구 토의하는 것에 끝이는 정도로 말[했다].


주기철이 시기상조라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 모두가 동지 획득에 힘쓰고, 현존하는 노회를 해체하는 일에 진력을 다하기로 하고서 그 운동 방침을 연구하고 토의했다는 것이다.

한상동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을 일제에 대항하는 공개적인 ?정치운동?으로 전개하고자 했다. 그것을 전국적 규모로, 조직적인 운동으로 전개하려고 했다. 조직의 장점을 이용하려고 한 것이다. 주기철은 한상동이나 이기선만큼 적극적인 반응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기철이 ?시기상조의 감?이 있다고 한 말을 근거로 그가 신사참배거부운동과 무관한 것으로 보거나 그것을 반대한 것으로 보는 것은 그릇된 추측이다.

주기철이 ?시기상조의 감?이 있다고 한 것이 신사참배거부운동의 노회 조직 시도를 거부했거나, 교회관이 달랐기 때문이거나, 신사참배거부운동을 반대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없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주기철은 신사참배거부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에 투옥되었다. 그는 일찍부터 신사참배를 거부했고, 직접 간접 그것을 거부하도록 독려했으며, 설교를 통해 그것을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평양신학교에서, 금강산수양관에서 열린 교역자 수양회에서, 또 산정현교회에서 그것을 설교했다. 그가 남긴 문헌에는 신사참배 거부를 독려하는 흔적들이 역력하다.

둘째, 손양원 목사는 1950년에 주기철 목사의 순교에 관한 짤막한 글에서 주기철이 자신을 향하여, 자신은 북에서 싸울 테니 남에서 싸우라고 ?백만군중에 돌격하는 장군처럼 지령?했다고 한다. 손양원에게 이것을 부탁한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신사참배거부에 관한 것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셋째, 주기철의 아내 오정모 여사가 신사참배거부운동에 대한 어떤 태도를 보였는가 하는 것은 사실을 파악할 수 있는 열쇠이다. 민경배의 주장대로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면 오정모는 한상동이 주도하는 신사참배거부운동에 참가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앙, 인격, 정신, 활동을 고려해 볼 때 오정모는 곧 주기철이었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면 오정모가 해방 후 한상동을 산정현교회의 담임목사로 초청하도록 권고하지 않았을 것이고, 초빙을 반대했을 것이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은 기존 노회를 해체시키려고 한 운동이었다. 교회론이 달랐다면, 진리에 대한 민감성을 가졌던 오정모가 그 운동을 반대했을 것이고, 그 운동의 중심 인물인 이른바 분리주의자 한상동이 주도하는 교회운동에 동조하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오정모는 신사참배하는 교회에는 출입하지 말라는 등 기존 교회를 파괴하여 분열시키는 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남편을 면회 다니는 동안에 채정민 목사 댁에서, 이병희 댁 사랑방에서 모이는 평양지역 신사참배거부운동교회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우상숭배를 하는 교회를 불신하고 그것을 파괴하는 일은 그녀의 생애에서 가장 긴급하고 소중한 일이었다. 바로 그 일 때문에 남편이 수난을 당하고, 자신과 온 가족이 교회와 사택에서 추방당하고 곤궁에 처했던 것이다.

오정모는 신사참배거부운동의 전국 연락 책임자 이주원과 만나 교회를 떠나는 문제와 신사참배반대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협의했다.


[이주원]은 동월 7일 단양광록과 함께 평양부 대찰리 112번지 신천정모를 방문하고 같은 장소에서 동인[오정모]에게 산정현교회가 노회에 대한 부담금을 거부하고 노회에서 이탈할 뜻을 종용하고, 동인 간에 그런 문제는 산정현교회가 그 소지(素志)인 신사불참배 태도를 견지하고 최후의 승리를 획득하면 자연 해소할 것이라고, 금후 불참배 운동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협의[했다].


오정모는, 민경배가 지적하듯이, ?체계적인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었다. 옥중의 주기철이 신사참배거부운동을 반대했다면 그가 그의 아내를 그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오정모는 주기철의 아내라는 관계 외에도 자기 나름의 철저한 신앙투사였고, 진리운동, 우상숭배거부운동에 대한 깊은 신념을 가졌다. 주기철은 감옥에서 ?한 때 과격한 재건파의 주장에 다소 동요?된 바 있다. 오정모 역시 한 때 재건파를 동조하여 광복 후의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지 않았다. 신사참배거부운동원 가운데서도 가장 극렬한 사람들과 행동을 같이 했다. 이 같은 점들을 고려할 때 신사참배거부운동에 대한 오정모의 확신이 곧 주기철의 확신이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넷째, 주기철의 맏아들 주영진 전도사는 ?살아 있던 순교자?로 불린다. 광복 후 평양 길재교회 담임 교역자로 시무했다. 길재교회는 이기선, 채정민 등이 주도한 혁신복구파에 속해 있었다. 오정모는 맏아들 주영진이 혁신복구파 교회의 전도사로 시무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만약 주기철이 신사참배거부운동을 반대했거나 교회론이 한상동, 이기선, 채정민 등의 것과 달랐다면 그러한 교회에 교역자로 시무하는 것을 삼가하도록 권했을 것이다.

다섯째, 생존해 있는 출옥성도 조수옥 권사는 한상동, 주기철과 함께 여러 해 감옥생활을 한 분이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는 주장이 있다는 말을 듣고서 대노하면서, ?주기철이 노회 조직의 시기가 아직 이른 것 같다고 말했으며, 그 말은 시기를 늦추자고 한 말이지 신사참배거부운동을 반대했기 때문이 아니며,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말이다?고 증언했다. 조수옥은 ?한상동은 분리주의자가인가?? 하는 문제와 관련하여 이상규와 이경기가 경남 창녕 소재 전국여전도회관에서 가진 역사논쟁(2001년 10월 17일)에 참석해서도 주기철이 노회 조직의 시기가 이른 감이 있다는 말이 시기를 늦추자고 한 말이라고 강조했다.

주기철이 ?시기상조의 감?이 있다고 한 말을 근거로 (1) 한상동과 주기철이 달랐으며, (2) 주기철은 신사참배를 시행하는 기존 교회를 ?상처받고 수모를 겪는 교회였지 ?악마?의 교회?로 보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과, (3) 주기철이 신사참배거부운동을 반대했다고 하는 것은 근거없는 주장이며, 역사왜곡이다.

한국교회는 천황제 이데올로기에 소극적, 피동적, 타협적으로 대처하다가 1930년 말에 총독부가 강력하게 나오자 이에 굴복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이 만약 3?1독립운동처럼 더욱 더 신속하게, 적극적으로 그리고 전국적으로 전개되고 신사참배거부운동 노회가 조직되어 항일 신앙 운동을 성공적으로 성사시켰더라면 그것은 신앙투쟁사에서만이 아니라 민족사적으로도 높이 평가되었을 것이다. 세계의 여론과 이목을 집중시켜 조선총독부를 넘어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주기철이 ?시기상조의 감?이 있다고 하여 그 시기를 늦추려고 했던 것은 유감스런 것이다. 그 때의 상황은 시기를 늦출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적극적인 행동이 필요한 시기였다. 교회는 배교하고, 한민족 전체가 노예의 굴레에서 신음하고 있었다. 하루라도 빨리 어떤 조처를 강구해야 했던 시기였다. 개혁신앙을 가진 사람이면 배교(背敎)하는 교회에 적극적으로 항거하는 것이 마땅하다. 개인적으로만이 아니라 조직체를 구성하고 그것을 통해 투쟁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런데도 주기철은 시기상조의 감이 있다는 이유로 결행을 지연시켰다. 주기철은 한상동, 주남선, 이기선, 채정민에 비해 개혁주의 정신과 교회론에 덜 충실했던 것으로 보인다.

개혁 교회관의 모체가 되는 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우상숭배를 행하는 교회에 항거하여 일찌감치 교회 조직을 갖추었다. 교회가 신앙고백적인 측면에서 허물어졌거나 배교한 상태라면 신속히 신앙고백적인 정통성을 가진 교회 조직을 갖추어야 한다. 그렇게 하는 것이 개혁교회론에 부합하는 일이다. 민경배는 주기철을 ?철저한 교회론자?라고 규정하면서, 그의 교회관이 전통적 교회론에 잇닿아 있다고 본다. 한상동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한상동의 교회관이 전통적 개혁 교회론에 잇닿아 있었고, 주기철은 그것에 미흡했다. 두 사람 사이에 교회론의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니라 거부항쟁의 적극성의 정도에 다소 차이가 엿보인다. 더욱이 주기철을 평남지방의 신사참배반대운동의 중심인물로 보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3. 한 무리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까닭

민경배가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관이 달랐다고 하는 두 번째 근거로 주기철이 신사참배거부운동으로 인해 판결을 받은 다른 피고인들과 같은 무리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을 든다.


일제 말기에 조직적인 신사참배거부운동원들에 대한 재판에 주기철 목사가 각 피고인들의 심문 과정에서 여러 번 조회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 중 어느 한 무리에 포함되어 함께 심문 조사 받지 않은 까닭도 여기에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때 일경에서 본 주기철 목사의 죄상이 이들과는 달랐다는 사실이 주목을 끈다. 주기철 목사에게서 중요한 것은 신앙의 원점(原點), 곧 저항의 원점 문제였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관이 달랐다는 근거로 주기철에 대한 일제의 취조 기록인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에 그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이다.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에 대한 일제 취조문이 주기철을 포함시키지 않은 까닭이 무엇인지는 확실치 않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또 반드시 한 건에 포함되어야 할 까닭도 없다. 주기철에 대한 일제의 취조문이나 재판기록을 현재로서는 찾을 수 없다. 그러나 역사적 정황, 그가 받은 평양신학교에서의 신학교육, 부산 초량교회와 마산 문창교회 그리고 평양 산정현교회에서의 목회활동, 설교문, 기타 신앙고백 문헌들을 보아 그의 신앙이 다른 수진수난(守眞受難) 성도들이 가졌던 것과 일치한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하거나 체포되어 옥중생활을 했으나 ?이기선 외 20인 에심 종결서?에 포함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다. 한두 달 구속되었다가 풀려 나온 사람도 있고, 장기간 투옥되었던 사람들도 있다. 적극적인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한 박의흠, 최봉석(최권능), 박관준, 그리고 최상림 목사는 주기철과 같은 이유로 순교한 사람들이다.

출옥성도 손양원의 판결문은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의 내용과 거의 동일하다. 그도 한 건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전남 순천지역 원탁회 사건의 황두연 장로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경북 안동에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다가 수난을 당한 ?대위계원집사판결문?도 그 내용이 동일하지만, 한 건에 포함되지 않았다.

신사참배를 거부하다가 수난을 당하고 순교한 장로교인 이기풍, 감리교인 이영한, 최인규, 침례교인 전치규, 성결교인 손종갑, 안식교인 최태현도 ?이기선 외 20인?의 한 무리에 포함되지 않았다. 김영숙, 김영달, 이술연, 염애나, 박경애, 김두석, 박인순, 김두리, 김점용, 강판례, 김야모, 최달석, 김수용, 김인식, 서고분, 고재만, 조복희, 박열순, 김의순, 고권식도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 외에도 많은 신실한 그리스도의 증인들이 수난을 당하며 경찰서 유치장에서, 감옥에서 수년의 세월을 보냈지만 그들도 한 건에 포함되지 않았다. 1944년 9월 20일에 부산지방법원 재판소에는 29명의 기독교인들이 신사참배에 불참하여 치안유지법 위반이라는 이유로 검사의 심문 후에 3년 언도를 받았다.

민경배의 논리에 따르면 신사참배를 거부한 까닭으로 체포되어 수난을 당한 사람으로서 한 건에 포함되지 않은 것은 모두 교회관이 달랐기 때문이라는 것이 된다. 교회론이 같지 않았던 탓으로 한 건에 포함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나 그 증거를 찾기란 진돗개의 족보를 찾는 것만큼이나 어렵다.

주기철은 1938년 2월에 1차 구속되었다. 신사참배와 일제에 항거할 것을 촉구하는 주기철의 설교를 들은 어느 학생이 격분한 나머지 평양신학교 교정에 심은 평북노회장 김일선 목사의 기념식수를 찍어버린 도끼사건으로 구속되어 27일 만에 석방되었다. 2차 구속은 그해 8월에 일본기독교단 의장 도미타(富田滿)의 강연에 정면도전한 것이 그 계기였다. 아직 장로교 총회가 신사참배 시행을 결정하기 전이었다. 제3차 구속은 유재기 목사의 농우회와 관련하여 체포되었을 때였다. 그는 1939년 2윌에 경북 의성경찰서에서 풀려났다. 그리고 1940년 9월에 제4차 투옥되었다. 일경이 산정현교회에 몰려와 주기철에게 향후 설교를 하지 말라고 협박했고, 주기철은 그 명령에 불복종했다고 하여 구속되었다. 손양원 목사는 주기철이 제4차 투옥되기 전인 6월에 검속되었다. 신사참배거부 항쟁으로 순교한 이기풍 목사도 그 이전에 구금되었다. 그해 9월 초, 총회 직전에 한상동, 주남선 등 수십 명이 투옥되었고, 얼마 후 주기철이 투옥되었다. 왜경에게 체포되어 몇 차례 경찰서 유치장을 몇 달씩 드나든 탓으로 신사참배거부운동을 한상동처럼 적극적으로 펼칠 기회가 없었다.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는 ?1942년(소화17년) 예 제23호, 1943년 (소화18)의 예 제2호?란 타이틀이 붙어 있고, 마지막 부분에는 ?1945년(소화20년) 5월 18일자?로 마무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기철은 1944년 4월 21일에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는 주기철이 순교한 후에 완성된 것이다. 죽은 사람의 예심 기록을 살아있는 사람, 곧 재판을 받아 처단될 사람들의 취조 기록에 포함시켜야 할 까닭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말기에 순천노회 교역자 대부분이 체포되어 몇 년간 수난을 당한 바 있다. 이 수난 사건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한 것이 아니다. 순천노회는 일찌감치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시행했다. 단지 그리스도의 임박한 재림과 천년왕국론을 설교했다는 까닭 때문에 체포되었다. 지도자 박용희 목사는 이명동일신론을 내세워 천조대신과 여호와 하나님은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신이라고 주장했다. 신사참배가 죄 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일제는 그것조차 불경신관으로 간주했다. 감히 천조대신을 여호와와 동등하게 본다는 것이었다.

순천노회 수난 교역자 15명에 대한 ?판결문?에는 이기풍과 손양원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순천노회 15인 교직자들은 1940년에 체포되어 일시 풀려났고, 다시 구금되어 1944년에 풀려났다. 그들이 순천노회 교직자 15인 판결문에 포함되지 않은 까닭은 무엇일까? 교회관이 달랐기 때문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민경배는 주기철이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에 포함되어 있지 않은 것을 근거로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관이 달랐다고 주장하면서도 바로 그 ?한 무리에 포함되어 함께 심문 조사를 받지 않은 자들?의 예심종결서를 가지고 주기철의 수진신앙과 저항의 민족주의적 평가의 가능성을 정당화하고 있다.


주기철이 재판을 받은 흔적이 없다. 그에게는 체계적인 새 교회 조직을 통한 신사참배 저항운동군(群)에 대한 예심종결 형식의 판결문도 없다. 그러나 체계적인 신사참배 반대자들에 대한 예심종결 결정이 나 있었고, 실상 이들과 주기철과의 관련 대목이 종결서 누차 실제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로 미루어 보아서….


민경배는 주기철과 이기선과 다른 신사참배거부항쟁자들이 동일한 신앙, 신학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고 하면서 그 증거로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를 제시한다. 그것을 보면 주기철이 신사참배를 반대한 동기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이기선의 성경관, 신관, 계명에 대한 태도, 국체변혁과 일본제국의 존망, 천년왕국에 관한 신앙고백은 주기철의 신앙과 동일했다는 것이다. 일제가 파악한대로 ?이기선 외 20인 예심종결서?에 포함된 이기선, 한상동, 주남선, 최덕지, 조수옥, 채정민의 신앙과 신학이 주기철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주기철과 이기선을 비롯한 20인의 교리, 신념, 신학은 같았다. 그런데도 단지 교회론만 그들의 것과 달랐던가?

민경배는 ?주기철의 교회관은 놀랍게도 전통적 교회관에 잇닿아 있다?고 한다. 그러나 놀랍다고 한 그 ?전통적 교회관?이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민경배가 염두에 두고 있는 그 전통적 교회관이 과연 장로교회가 수용해 온 개혁 교회론인지도 의문이다. 민경배는 교회의 본질을 구성하는 사도성, 보편성, 단일성, 거룩성을 대체로 로마가톨릭교회론에 입각하여 이해하고 있다. 추후 상론할 것이다. 민경배가 말하는 주기철의 교회론이 로마교의 교회론을 뜻한다면 그가 ?전통적 교회관?을 가졌다고 말하는 것은 논리적으로는 정당할 수 있다. 그는 한상동의 교회관이 전통적 교회관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면서 아무런 논의도 하지 않는다. 두 사람의 교회관이 달랐으며, 주기철은 찬사를 받을 만하지만 한상동은 그렇지 않은 것으로 단정하면서도 그 근거를 제시하지 않는다.



4. 정통 교회인가, 이단인가?

민경배는 강의실에서도 한상동을 분리주의자로, 주기철을 정통 교회론자라고 가르치면서 또 다른 중요한 한 가지를 근거로 제시하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한상동은 무식한 반면에 주기철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를 1년 정도 다닐 정도로 유식한 사람이었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한상동은 무식하여 교회론적 통찰을 갖지 못한 나머지 교회를 완전주의적 측면에서 이해했으며, 교회를 분리하여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반면에 주기철은 유식한 사람이어서 한상동과는 다른 교회관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래서 전통적 교회론자로서 분리를 반대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자답지 않은 인신공격의 오류추리(ad hominem)이다.

민경배는 주기철이 ?시기상조의 감?이 있다고 한 말을 가지고 주기철이 한상동의 교회관에 반대한 것으로 본다. ?[주기철이] 교회는 그것이 역사적으로 가지고 있는 몇 가지 징표 때문에 정통성이 의심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 ?상처받은 교회가 순결을 잃어가고 있어도, 교회의 역사적 전통 수호의 흔적은 남아있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고 한다. ?한상동 목사와 달리 교회의 순결성을 명분으로 한 교회 분열이나 기존 교회 탄핵을 부당하다고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주기철이 그 같은 신념을 가졌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전무하다.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가 정통성을 지녔고, 그것의 파괴를 도모한 신사참배거부운동과 새 노회 조직 시도가 분리주의적이었다고 하는 판단이 옳은가? 아니면 그것이 교회론적 통찰이 결여된 특정 그룹의 당파적 발상인가? 이것은 한국교회사를 어떤 시각에서 볼 것인가 하는 것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질문이다. 한국교회의 다수를 점하고 있는 친일파 집단의 시각으로 보면 홍택기 류의 시각을 가진 민경배의 판단이 옳다. 그러나 문제는 역사평가의 기준이다.

한국교회사의 패러다임의 전환을 요청하는 이 주제는 상당한 역사적, 신학적 논의를 요한다. 졸저 『한국교회 친일파 전통』은 ?3세기 기독교인들? 장에서 이 문제를 개괄적으로 다루고 있고, 졸고 ?한국교회의 백귀난행과 한계상황론?도 일부 다루고 있다. 근간예정인 ?신사참배거부운동의 교회론적 성격?에서 상론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논의의 흐름에 필요한 개요만을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일제 말기의 이른바 한국교회의 변절과 신앙고백적 상태는 오늘날의 사람들이 상상조차 불허할 정도였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는 고대교회의 마르시온주의자들보다 더 이단적이었다. 마르시온주의를 능가했다. 신도주의의 창기였다. 일제도 깜짝 놀랄 정도로 백귀난행을 저지르고 우상숭배와 민족배신에 솔선수범했다.

일제말기 한국교회가 상처받고 수모를 겪는 교회였는가 아니면 ?악마?의 교회였는가 하는 것은 특정 집단의 당파적 판단이나 그러한 시각을 대변하는 교회사가의 독단적인 평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은 아니다. 주기철이 그것을 어떻게 생각했으며, 저명한 신학자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회는 규범공동체이다. 성경과 신앙고백 그리고 교회의 헌장―헌법을 규범으로 가지고 있다. 장로교회는 개혁교회론을 고백하고 있다. 교회사는 평가의 기준은 성경이다. 교회의 사건은 성경에 준한 신앙고백과 신학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 성경, 신앙고백, 신학에 따라 평가해야 한다. 일제말기의 한국교회는 기독교 신앙의 보편성―공교회성, 단일성, 거룩성, 사도성을 완전히 상실했다. 성경과 개혁교회론과 신앙고백적인 관점에서 보면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수 없는 배교 집단이며, 이단이었다. 무너진 교회, 거짓교회였다.

한상동과 주기철 목사의 교회관과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장로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장로교회의 규범으로 보면 수진수난 성도들이 일제말기의 교회를 ?음녀?로 보고, 순일본기독교로 개종한 한국교회를 ?이단?으로 규정한 것은 정확한 판단이다. 한상동과 신사참배거부운동 교회가 가졌던 시각은 한국장로교회가 신앙해온 전통적인 교회론이었으며, 종교개혁자들의 교회관과 일치한다.

이러한 교회론적 시각은 신사참배거부 항쟁과 광복 후의 출옥성도들의 교회재건운동 그리고 고신교단 설립 과정에서 명확히 드러났다. 고신교단의 설립은 개혁주의 교회관에 입각하여 이루어졌다. 고신파는 재건파와 달리 우상숭배를 하던 자들과도 더불어 하나의 장로교회를 세우고자 했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하나의 장로교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친일파 인사들이 주도하는 장로교단으로부터 불법적으로 제거당한 후에도 약 2년간 단일 교회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맺는말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관이 달랐으며 한상동은 분리주의자였으나 주기철은 정통 교회관을 유지한 사람이라고 하는 민경배의 판단은 주장과 근거가 일치하지 않는 역사왜곡이다. 한상동과 주기철이 새 노회 조직의 시기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랐던 것을 가지고 두 사람의 교회관이 달랐다고 단정하거나 한상동은 분리주의자라고 판단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일제가 작성한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에 대한 예심종결서에 주기철이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는 것도 그들의 교회관이 달랐다고 하는 증거가 될 수 없다. 두 가지 잘못된 전제에 기초한 민경배의 위 주장은 터무니없다.

장로교는 규범적 신앙공동체이다. 신앙고백적 관점에서 보면 신사참배거부운동은 소극적인 거부운동이 아니라 적극적인 교회개혁운동이었으며, 개혁교회론적 기초를 가진 교회운동이었다. 우상숭배를 강요하는 정치권력에 대항해서만이 아니라 반민족적 종교집단에 항거했던 민족 정체성을 지닌 교회 운동이었다. ?교회?라고 일컫는 집단으로부터 혹독한 박해를 받으면서, 일제의 무자비한 위협 속에서, 그 정조를 굽히지 않은 그리스도의 몸이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은 근본적으로 배교하고 우상숭배를 하며 이단으로 탈바꿈하고 있는 기존의 한국교회에 항거한 교회 개혁운동이었다. 만주의 신사참배거부운동, 곧 언약자들(Covenanters)는 우상숭배하는 교회로부터 분리하여 협회(association)라고 하는 교회 조직을 갖추었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이 평양에서 신사불참배 노회를 조직하려고 시도한 것은 그 운동이 가졌던 교회관의 결과였다. 새 노회 조직 시도를 분리주의 혹은 분리주의적 경향이 있는 것으로 몰아부치는 것은 개혁교회론을 무시한 판단이다. 교회가 무엇인가를 고려하지 않은 결과이며, 일제 말기 한국교회의 배교성과 이단성에 대한 교회론적 성찰이 결여된 판단이다.

교회라고 하는 종교기구가 제1계명과 제2계명을 무시하고 여호와 하나님 외의 다른 신들을 섬기며, 우상숭배를 행하며, 배교와 우상숭배를 강요한다면 그것을 교회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한 종교기구에 항거하여 새로운 교회조직을 갖는 것은 잘못인가? 도리어 그렇게 하는 것이 개혁주의 전통과 개혁교회관에 부합된다. 신사참배거부운동이 배교하는 교회에 항거하여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려고 시도한 것은 분리주의가 아니라 그 자체가 올바른 교회 건설이었다.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운동과 궤를 같이 하는 개혁교회운동이었다. 나치치하의 고백교회들이 독일기독교에 항거하여 고백교회 조직을 갖춘 것과 일치한다.

한상동과 주기철이 서로 다른 방향을 가고 있었거나, 또 서로 다른 교회론을 갖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오정모의 활동과 신념, 주기철 아들의 활동, 한상동과 주기철이 남긴 문헌들은 오히려 두 사람의 방향과 신학이 일치했음을 입증한다. 민경배가 한상동에 대하여 ?용기와 판단?이 결여된 분리주의자로 단정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다. 성경적 기독교 신앙과 개혁교회관에 충실했던 역사적 인물에 대한 폄하(貶下)이이다. 이러한 판단은 일제 말기의 과거사 문제와 관련하여 성경대로 하자고 하면 독선적이라고 하고, 교회의 헌장과 신앙고백대로 하자고 하면 율법주의라고 하고, 양심적으로 하자고 하면 바리새주의라고 비난해 온 친일파 전통의 대표적인 예이다.

한국교회 지성인들이 나치 정권에 항거했던 독일고백교회에 대한 찬사를 보내면서도 신사참배거부운동자들이 새로운 노회를 조직하려고 시도한 것에 대해서는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분리주의로 규정하는 것은 사대주의적 발상이며 자가당착이다. ?교회?가 배교하고 이단적 신앙을 고백할 뿐 아니라 그것을 강요하며 우상숭배를 행하고 있는데도 그것에 대항하며 새로운 교회 조직을 시도한 것을 잘못된 것으로 보거나 분리주의로 평가하는 것은 사실을 호도(糊塗)하는 일이며,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며, 교회관적 통찰이 결여된 주장이다. 한국교회와 한국교회사를 주도하고 있는 친일파 전통이 얼마나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를 말해 준다.

민경배는 과거사 문제와 관련하여 홍택기 목사 류의 친일파 교회이해를 가지고 교회의 존재를 외형적 조직기구의 단일성에서 찾으면서, 또 로마가톨릭 교회관을 가지고 한국장로교 사건에 대한 평가의 기준, 준거의 틀로 삼는다. 주기철을 내세워 다수 집단과 친일파 시각을 강변(强辯)하고, 논점일탈의 오류를 범하면서조차 신앙의 정통성과 민족정체성을 뚜렷이 지닌 출옥성도들을 폄하한다. 민경배의 이러한 역사 평가는 사가의 편견과 선(先)이해가 과거의 사건과 본문(text) 해석에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보여준다.

한상동과 주기철의 교회론이 달랐다고 하는 주장의 기만성은 그것이 출옥성도들을 분리주의자로 단정하고 한국장로교 제1차 분열의 책임을 고신계 출옥성도들의 탓으로 돌리는 시각의 출발점이라는 데 있다. 순교자 주기철을 앞세워 일제 말기의 한국교회가 정통성을 지닌 교회라는 것을 입증하고, 우상숭배를 하던 배교 공동체를 계승한 다수 집단의 정통성을 확보하려고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 한상동을 동력으로 시작된 고려신학교 중심의 진리운동, 교회재건운동, 참회운동을 분리주의 운동으로, 고려신학교와 고신파를 분파주의로 단정하려는 전주곡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