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 이성구교수님의 반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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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 이성구교수님의 반론 등


글쓴이 : 이성구 날짜 : 2003/09/10 조회 : 188

신학교와 교회의 관계



고려학원이 부도가 난 다음,
교단은 학원 정상화를 위한 조치로
신대원 지원금을 이용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었다.

당시로서는, 그리고 현재로서도 유일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마음이 편하지 못하다.
신학교가 여전히 병원보다 더 중요하지 못한 인상 때문이다.

95년이후
박영훈씨의 정년 퇴임여부와 맞물려
복음병원 문제가 본격화될 때부터
신대원은 교단의 관심에 있어서
늘 병원 다음 순위였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다른 방법이 없어 그렇기도 하지만
여전히 병원이 신학교육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것 같아
답답하다.

건강한 교회를 위하여
건강한 지도자가 나는 길만이
나와 우리, 모두가 사는 길이다.

이 귀중한 원리를 다시 새기는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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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성구 날짜 : 2003/09/30 조회 : 254

구약 공부



구약을 공부하려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구약이 신약보다 어렵다는 생각을 갖는다.
히브리어가 그렇고
역사적 배경이 그렇고
실제로 예언서 같은 책은 읽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과연 그럴까?
구약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혹시라도
신약처럼 누구나 쉽게 설교할 수 있는
제목과 자료를 주지 않기 때문은 아닐까?

나의 삶을 풍성하게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좀 더 깊이 알아가고
성경기자들의 언어적 기법을 찾아 보며
하나님의 사람들의 자질을 배워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도
재미없는 일도 아니다.

정치 사회 윤리적으로 더욱 복잡해지고
단순하게 말하기 어렵게만 여겨지는 세상을 바라볼 때
지금이야말로
복잡하게 얽혀갔던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 나타나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삶의 지혜를 얻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풍성하신 하나님의 모습을 알아가는
구약 성경을 손에 쥔 하나님의 사람들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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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성구 날짜 : 2003/09/30 조회 : 202

나는 누구인가?



1. 지난 세월에 비친 나는 누구인가?
신학생, SFC 학생선교운동가, 유학생, 신학박사, 설교자, 집회인도자, 개척교회 담임목사, 교단 개혁운동, 한국교회 연합운동가, 신학대학원교수, 통일운동참여자(통일교육문화원 이사장, 탈북자 대안학교 운여위원장)...제법 여러가지 일들에 몸을 던지며 자신을 오늘의 모습으로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전혀 후회함이 없다.

2. 오늘 나는 누구인가?
제53회 총회. 신학위원회와 신학교육부, 본회로 이어지는 교단의 기류는 나를 성경의 계시와 역사를 부인하는 자로 낙인찍었다. 사회 정의를 외치는 아모스 예언의 배경을 찾아내는 논문을 두고, 엉뚱하게 창세기->오경의 문제로 확대하면서 그와 같은 역사에 예가 없는 대담한 결론을 내렸다. 신학적 문제를 투표로 결정하는 새로운 역사도 만들었다. 오늘 나는 성경을 송두리채 부인하는 자가 되었다. 신학교수, 목사는 물론 신자의 자격도 갖추지 못한 자로 전락하였다. 과연 누가 그와 같은 심판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을 갖춘 것일까? 누가 감히 하나님의 자리에 설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선고를 받은 지난 주말, 서울 동대문 전농동의 염광교회에서 여섯번의 설교를 하게 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확인하며 분노의 감정을 완전히 털쳐버릴 수 있었다.
내게 문제가 있거나, 아니면 내가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크신 뜻이 있을 것을 확신하고 나니 평안을 누리게 된다.
그런데, 도대체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나와 우리 교단이 어쩌다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을 만들어내게 되었을까?
복음병원, 총장, 사채, 물신주의, 불법, 탈법, 편의주의, 신문, 학위, 기득권, 근본주의, 몰이해, 변명, 정치 놀음, 새몰이, 패거리주의, 명예욕, 자리다툼, 연고주의.....여러가지 단어가 떠오른다. 교회가, 목사가 이런 매우 세속적 개념과 연결된다는 것이 억울하다.
목사는 교회의 내일을 위하여 할말을 해야 한다. 인간의 눈치를 보고, 사람의 기분을 맞추다가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는 없다. 하루를 살아도 사는 것처럼 사는 길외에 다른 방법이 없지 않은가?


3.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끝내 말씀대로 살다가 말씀대로 갈 뿐이다. 자리에 연연하거나 자기 명예를 위하여 살지 않아야 한다. 무엇보다 사람을 미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자칫, 분위기에 빠져들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오늘에 살지만 오늘만 사는 것이 아니라 종말적 소망으로 살아야 한다. 언제일지 모르는 끝이 올 때까지 주신 일에 최선을 다하며, 끝을 보고 현재를 보는 지혜를 보여야 한다. 인생의 끝을 아는 사람은 순간순간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능력을 힙입어 살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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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성구 날짜 : 2003/10/04 조회 : 166

독자반응 비평의 시대



성경비평학(해석학)을 배우면서 성경본문 해석에 있어서 누가 중심이 되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만난다. 저자의 뜻이 중요한가? 아니면 본문인가? 그렇지 않으면 본문을 읽은 독자들인가?

1. 과거나 현재나 성경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자의 뜻을 물어보려한다. 성경의 인간저자들은 무슨 생각에서 이런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었는가? 그 시대, 그러한 인간 저자들을 사용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오늘 성경을 읽는 보통사람들은 여전히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다.

2. 그러나 문학비평학이 발달하면서 본문자체가 가진 뜻이 무엇인지에 대한 관심이 많아졌다. 한 작품이 완성되면 그 작품은 이미 저자의 손을 떠난 셈이고, 따라서 본문 자체가 가진 뜻이 중요해 진다는 것이다. 물론 여전히 편집자(들)의 신학을 논하지만 본문이 그 자체로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본문의 구조를 중심한 구조비평, 수사학적 비평, 정경비평 등은 본문 자체를 우선시하는 해석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쩌면 성경무오를 말하는 보수주의 입장도 본문 글자 하나하나에 관심을 두는 면에서는 본문 중심적인 관점이 있다고 해야 할찌 모른다.

3. 그러다 최근 들어 독자중심의 성경해석방법이 등장하였다. Reder-Response Criticism 이라 불리는 독자반응비평은 저자도 본문도 아닌 독자들이 본문의 의미를 결정할 권한을 가진 자로 평가한다. 사실 독자가 어떤 작품을 읽고 자신이 느낀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는가? 같은 작품을 읽지만 비평가들마다 전혀 다른 평가를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은 독자가 해석에 우위를 가지고 있음을 부정하지 못하게 한다.
그런데 이런 해석방법은 시작도 하기 전에 문제에 부딪힌다. 그렇다면 누가 바른 해석여부를 결정할 것인가? 읽는 사람, 읽는 시대, 환경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는데, 그렇다면 누가 진위를 결정할 수 있는가? 아니면 아예 작품이 말하고자하는 뜻에는 진위라는 것이 없다고 해야 하는가?

4. 해석에는 저자, 본문, 독자의 요소 중 어떤 것도 완전히 배제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자의 뜻도, 기록된 본문 자체가 담고 있는 의미도, 그것을 읽도록 고려된 독자도 해석에 가담할 수밖에 없음이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저자의 뜻이다. 저자의 뜻을 바로 알기 위하여 우리는 본문에서 사용된 언어, 당시의 상황, 본문을 전해 들었을 독자들을 고려하게 된다. 저자나 본문이 해석의 상수라면 독자는 변수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특히 모든 시대인들을 위하여 주어진 성경의 독자는 항상 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 그런데 제53회 총회는 독자중심의 해석방법을 채택(!)하고 말았다! 논문의 저자의 말을 들어보기를 거부하고, 독자들이 제마음대로 해석하고 설명하고 판단하였다. 저자가 죽은 것도 아니고 말문을 닫은 것도 아닌데도 말이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라고 하지 않는가? 언어는 생물이고 언어는 생성과 소멸, 변화를 거듭한다. 처음에 어떻게 사용되었든, 또 다른 사람들에 의하여 교정되고 변화되는 것이 언어이다. 언어의 개념을 자신이 원하는 대로 고형화시키면서 상대를 비방하는 자료로 삼으려는 것은 악한 일이다. 숲을 보지 못하고 나무만 바라보는 어리석은 일이 어떤 영역에서나 일어나는 일임을 유의해야 한다.

독자는 성경본문의 주인이 아니듯, 독자가 남의 논문의 주인일 수 없다. 의문이 생기면 물어야 하고, 모르면 배워야 한다. 일반인을 위한 책이 아니라 박사학위취득을 위한 까다롭고 전문적인 학술 논문을 두고, 표현되지도 않은 타인의 신앙까지 함부로 재단하려드는 어리석은 행위가 인정되는 교회. 그게 우리가 꿈꾸는 참된 교회일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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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성구 날짜 : 2003/10/04 조회 : 158

위로 받기



학생들이
조용히,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 속삭인다.
문자를 보낸다.
메일이 날아든다.

"교수님 힘 내세요. 제자들이 있잖아요!"
"교수님, 우리 기도하고 있습니다"
"교수님 힘내세요 하나님이 알아주십니다"
"교수님의 글에 오히려 힘을 얻었습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던 졸업생은
담담하게 갈 길을 갈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신이 힘을 얻는다고 했다.

학생들이 던지는 한마디가 위로가 된다.
보내주는 음성이 위로가 된다.
때로 하나님의 사람들이 위로받기를 거절하였다는
증언을 생각하면(시77,렘31)
아직 내겐 하나님의 은혜가 마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학생들을 위로해야 할 교수가
위로를 받는다는 것이
어색해 보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위로할 수 있고
또한 위로 받아야 한다는 단순한 진리를
새삼 깨달으며
갈 길을 확인한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