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란의 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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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란의 실체


글쓴이 : 이성구 날짜 : 2004/10/11 조회 : 210

학위 논문에 관한 논의의 시작



그동안 일방적으로 매도되어 온 학위 논문에 관한 문제.

이제
미국 칼빈대학으로 연구년을 떠나
세권의 책을 동시에 끝낸 다음
논의를 시작하려 했으나
아예 이제부터 글을 써라는 요구가 있어
우선 중부산 노회 "이성구목사 논문대책 위원회"에 제출한 글과
지난해 총회 신학부에만 배포한 적이 있는 글을
차례로 실어 보고자 한다.

한풀이가 아니라
차분한 학문적 논의의 장이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우리 교단은 특히 신학적 논의를 할 제목이 많다.
복음병원을 과연 교회가 직영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 역시
경영의 논리가 아니라 신학적 주제로 다루어야 한다.

총회 임원의 자격요건으로
예배당을 재단에 가입한 교회의 목사 장로로 제한하는 것이
신앙공동체인 교회가 채택할 정책일 수 있는지 물어야 한다.

평생 목회와 교회 섬김의 사역을 마친 분들을 두고
원로목사(장로) 공로목사 은퇴목사 등등으로 구분하는 것이
과연 성경적 근거가 있는지 논의를 해야 한다.
은퇴 후에 돈을 얼마나 주느냐로
목사를 차별하는 것이 그냥 참아 넘길 수 있는 일인지
따져야 한다.

교회는 개혁을 기다리고 있다.

기다리면서 우선 급한 일부터 논의를 시작해 보자.

답 변 서

수 신: 노회장 2004. 4. 12
참 조: 대책위원 및 노회원
제 목: 이성구 목사 논문 대책위원회 질의에 대한 답변서
발 신: 노회 기관목사/ 고려신학대학원 이성구

1. 중부산노회 논문 대책위원회가 제 53회 총회 신학부가 내린 평가에 대하여 본인의 견해를 밝히기를 요구하고 있는바, 아래와 같이 답변서를 보내드리오니 살펴보시고 기록으로나 신학으로나 근거가 없는 일방적 결론으로 본 노회 회원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한 사실에 대하여 적절한 대책을 마련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2. 노회가 제시한 질문에 답하기 전에 지난 총회의 결정이 얼마나 공회의 질서를 벗어나 있는가를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1) 교수회의 권위 무시
본인은 신학대학원 교수회가 만장일치로 채용을 결정하여 사직남교회 목회를 중단하고 신학대학원에 부임하였습니다. 신대원 교수회는 두 명의 교수로 하여금 논문을 읽고 평가서를 제출하게 하였으며, 인사위원들과의 토론을 거쳐 교수회의가 만장일치로 채용을 결의하였습니다. 신학에 관한 한 최고의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교수회가 결정한 사실을 두고 한 개인(박종칠)이 문제를 제기한다고 하여 교수회의 결정을 뒤집는 것은 이후에 심각한 문제를 파생시키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대원 교수회를 부정(否定)하고 나면 이후에 다른 신학적 문제가 발생할 때 누가 책임지고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까? 신대원 교수회의 신학적 권위를 무시하는 것은 곧 총회를 무시하는 행위나 마찬가지임을 염두에 두지 않은 것으로, 절차상 중대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는 결정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변증 절차 무시
주후 1세기 바울의 재판 과정에서도 피고인의 자기 변증은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사도행전에서 여러 차례 자신을 변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 법정에서도 볼 수 있는 인권이 교회의 총회에서 무시되는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학문적인 토론이란 매우 섬세한 것인데, 어떻게 토론 없이 마음대로 학자의 학문적 입장을 결론지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신학부 실행위원회, (신학부 전체회의-거쳐야 하나 없었던 것으로 사료됨), 신학교육부 등 여러 번의 결의과정을 거치면서, 그리고 찬반 토론조차 허용치 않는 총회 본회의에 상정할 헌의안을 만들면서, 단 한번도 당사자에게 발언의 기회를 주지 않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학계에서는 작은 논문을 발표할 때도 논평자가 3사람씩 세워지고 자유토론까지 벌이는 것이 상식입니다. 영국의 학계가 인정한 논문을 두고, 또한 한 사람의 신학적 입장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안을 다루면서, 논문 저자와 단 한번도 질의와 응답의 시간을 가지지 않고 마음대로 논문의 성격을 규정지을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있을 수 없는 비상식적인 과정을 통하여 결정한 사안은 반드시 정상적인 절차를 통하여 논의되어야 합니다.
우리 헌법 권징조례는 일반적 사건도 반드시 본인이 출석하는 것이 원칙이고, 치리회의 결정에도 얼마든지 이의를 제기할 수 있으며, 자신을 스스로 변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통하여 변호 받을 권리까지 보장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권징건도 아닌 신학적 논의를 행함에 있어서 본인의 신학적 입장을 들으려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학부원들이 본인의 논문에 대하여 정확하게 문제를 지적할 자신이 없거나, 본인의 논리를 반박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일입니다. 언젠가는 정상적인 논의 과정을 만들 수 있을 것을 기대합니다.

3) 공인된 신학기구의 평가를 토대로 하지 않은 부적절한 결의
총회는 신학을 전공한 목사와 일반적 직업을 가진 장로가 반반씩 회원으로 되어 있습니다. 신학을 전공하지 않은 회원이 절반이나 된다는 것은, 총회의 자리가 철저한 논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서는, 신학 문제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자리가 못된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따라서 소위원회가 적법한 절차를 따라 매우 심도 있게 논의해야 합니다. 그러나 지난 총회는 앞서 말한 대로 전혀 그와 같은 절차를 밟은 적이 없으며, 앞서 말씀드린 대로 신학대학원 내부에서 본인의 논문에 대하여 다른 의견이 나오지 않는 한 다룰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신대원 교수회가 99년 교수 채용 과정을 통해 본인의 학위 논문을 공적으로 검토한 이후, 논문과 관련된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었거나 문제 삼은 경우가 없으며, 신학대학원 교수회가 이전과 다른 결정을 한 것도 없으므로 원리상 총회가 재론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습니다.

4) 결의안 작성 자체의 오류 - 신학부의 결론은 논문 평자들의 견해가 반영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놀랍게도 총회가 내린 결론, 곧 본 노회 대책위가 질의한 내용은 사실상 논문의 평가를 맡긴 교수들의 평가가 아니라 신학부원을 자청한 박종칠 목사의 주장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잘못된 일입니다. 총회 신학부는 고소인으로서 실행위원 자리를 차지한, 한 사람의 집요한 주장에 밀려 공식 평가자의 견해조차 반영하지 못하고 엉뚱한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지난 총회의 결의가 잘못되었다고 주장하는 결정적인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3. 노회의 질문과 대답
위와 같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본인은 필요 없는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하여 노회 대책위원회가 제기한 질문에 대한 대답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신학부의 평가보고서는 “전체적으로 아모스 예언의 배경을 그 이전의 어떤 전승에서 찾는데, 이것은 선지자의 예언의 말씀이 ‘하나님의 계시’(신적 영감성)가 부인되었다.”라고 단정하고 있는 바, 성경(모세오경, 아모스 등)의 영감성과 계시성에 대한 귀하의 견해와 신앙은 무엇입니까?

답: 1) 한마디로 위의 결정 문구 자체가 어불설성입니다. 논문의 그 어느 곳에서도 그와 같은 내용을 담은 적이 없습니다. 총회 신학부는 평자들의 판단을 넘어서서 엉뚱한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모스 예언의 배경을 이전의 전승에서 찾는 것이 예언이 ‘하나님의 계시’가 부인된 것으로 단정하는 총회 신학부의 견해는, 앞서 지적한 대로 신학부 실행위원회 이름으로 작성한 것으로써 본인의 논문을 평가한 신득일, 변종길 두 교수의 견해에는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는 주장입니다. 공식 평가자가 아닌 사람이 억지로 끼워 넣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비정상적인 단정이라고 하더라도 필요하다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습니다. 아모스 예언의 배경을 아모스 선지자 이전의 전통에서 찾는다는 것을 계시를 부정하는 증거로 본다는 것이야말로 기이한 일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기록할 때 제2 저자인 인간 저자가 가진 지식, 경험, 신앙, 전통 등을 이용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정하고 있습니다. 개혁주의 성경관이 그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성경의 저자가 기계적으로 받아쓰기를 한 것이 아님은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장은 이 점을 명백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누가는 자기보다 앞서 하나님이 약속을 지키시기 위하여 이루신 일들에 관하여 기록한 자들의 자료를 살펴 이방인인 데오빌로 각하를 위하여 예수에 관하여 자세히 조사하여 차례대로 쓴 것이 누가복음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눅1:2-3).
아모스 역시 자신이 자라온 배경, 경험, 지식, 지혜를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기록한 것입니다. 그는 역사적 지식을 갖고 있었고 (2:11f), 이스라엘의 법적 전통을 잘 알고 있었으며 (2:6-8 등), 일곱 수를 이용한 선포, 언어유희 word-play를 구사하는 등 ( ??, ???의 사용)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과 경험을 구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당시에 존재하던 전통을 통하여 선지자들에게 주어진 것이지 의식의 진공상태에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아모스가 모세 율법을 알았느냐, 몰랐느냐, 아브라함의 선택의 전통을 알았느냐 몰랐느냐는 질문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그런 논의과정에 동참하여 올바른 견해를 찾아가는 구약학자가 하는 학문적 작업입니다. 그러한 작업을 두고 계시 부정 운운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행동입니다.

구약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것이라는 것은 이미 바울이 디모데후서를 통하여(딤후3:16) 명확하게 하고 있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며, 그것이야말로 본인을 비롯한 모든 개혁주의 신앙인의 근간을 이루는 것입니다. 그러한 성경의 영감성은 곧 성경의 계시성을 담보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건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본인의 논문은 바로 이 영감성과 계시성을 기본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아모스의 예언이 선지자가 처한 장소와 시대의 제한을 받는 것으로 간주하는 비평학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논쟁을 벌인 것입니다.


2) 신학부의 평가보고서는 “본 논문은 여러 부분에서 독립된 다양한 전승이 하나의 단위로 결합해서 형성되는 과정을 언급하고 그리고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원인론적으로 허용의 여지를 주는 것은 성경의 역사를 뿌리 채 부인하다”라고 결론짓고 있는 바, 성경의 역사성에 대한 귀하의 견해와 신앙은 무엇입니까?

답: 1) 혼동/ 전승사 비평에 동조하는 것과 전승사학파들이 사용하는 용어를 사용하여 그들의 주장에 대응하는 것과의 구분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필자는 아모스 예언의 배경을 살피면서 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말하는 이스라엘의 전통 형성과정에서 나타나는 여러 학설들을 종합하고 분석하여 결국 그들의 주장이 타당성이 없다는 점을 밝히려 한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의 언약, 제의 전승이 북국 이스라엘과 남쪽 유다에서 각각 다르게 형성된 것으로 간주하고, 따라서 아모스는 남쪽 유다 사람이었으므로 북쪽에서 보존된 모세언약 전통은 알지 못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대응한 것이 필자의 진술방식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비평학자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사용한 것을 두고 전승사 비평에 동조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2) 원인론(etiology) 허용 주장/ ‘원인론을 허용하는 듯한 여지를 주었다’는 것이 신득일 교수의 판단이었는데, 평자들이 얼마나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고 있는지 바로 이 지적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원인론적 etiological" 이라는 말이 등장하는 66페이지를 보면 필자가 이렇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However late the date of the final writing of the biblical books concerning early history may be, it is certainly impossible to prove that they are all merely imaginative, retrospective and etiological.”
- 이스라엘의 초기역사에 관한 성경의 최종 기록시기가 아무리 늦다고 할지라도 그 기록들이 전부 단순히 상상의 산물이거나, 회상적, 원인론적이라는 것을 입증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비평학자들이 이스라엘의 초기 역사가 기록된 오경의 시대를 늦게 잡으려 하기 때문에 그에 대한 입증의 기회를 가질 수 없는 상황에서 "아무리 당신들이 그렇게 늦은 연대를 주장해도 그 기록의 내용이 결코 상상의 산물이거나 원인론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단언하는 필자가 어떻게 원인론에 대한 허용의 여지를 주는 것이며, 그게 어떻게 성경의 역사를 뿌리 채 부인하는 위험에 노출된다는 말입니까? 터무니없는 주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158페이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마디로 양보절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기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 오해라고 여겨집니다. 거기서 필자는 왜 아모스가 굳이 에돔에 대하여 그렇게 적대적인가를 규명하려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에돔의 국가적 적대 관계를 야곱과 에서의 개인적 문제에서 발생한 것으로 표현하는 창세기 기사를 두고, 비평학자들은 일반적으로 원인론적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러한 논란에 빠져들 수 없는 상황에서 필자는

"그 이야기(야곱과 에서)의 원인론적 성격이 부인될 수 없다하더라도 질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왜 이스라엘이 하필이면 특별히 에돔과 이런 식으로 대비가 되어야 하는가?
“Even though the etiological nature of the story cannot be denied, the question remains: why did Israel have to be specifically contrasted to Edom in this way?...”

라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필자가 학위 논문에서 야곱-에서 이야기를 원인론으로 주장하는 학자들의 주장에 대하여 반증하는 작업을 할 수 없으니(필자의 논지 증명에 직접적 관계가 없으므로) 그렇게 인정된다고 치더라도, 유독 에돔만을 시비의 상대하는 것은 설명이 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그 이야기가 결코 어떤 일을 후에 설명하기 위하여 채용한 하나의 방법으로서의 원인론적인 기사일 수 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어떻게 역사를 뿌리 채 흔드는 위험에 노출된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그 단어 하나에 어떻게 성경의 역사가 뿌리 채 흔들릴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과장법으로 독자를 호도하려는 태도야말로 지극히 부도덕하다는 사실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호락호락한 책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 사건은 과거에 실제적이었을 뿐 아니라 오늘에도 그 의미가 여전한 현재적 역사라는 것이 본인의 입장입니다.

3) 신학부의 평가보고서는 “더 나아가 후대 기록에 대한 언급이나 오경의 단일 저작성을 부인한다”라고 지적하고 있는데, 모세 오경의 저자에 대한 귀하의 견해와 신앙은 무엇인가?

답: 오경의 저작설에 대하여 본 논문은 한 번도 직접 언급한 적이 없으며, 오경의 저작문제가 본인의 논문에서 다루어질 성질의 것도 아닙니다. 본인은 오히려 오경 중 신명기를 다른 책과 분리하여, 신명기를 후대의 책이라고 주장하는 비평학자들의 견해를 반박하는 논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신명기가 오경의 다른 책보다 후대에 기록된 책이라는 주장은 비평학계에서 가장 일반화된 학설중의 하나입니다. 필자는 논문에서(62p) "신명기가 고대 전통을 중시하는 그룹에 의해 기록되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은 너무 자연스럽다"는 점을 지적하며, 비평학자들 가운데 일부가(Nicholson) 신명기의 북쪽 기원론을 주장하며 "왕정시대 이전 지파동맹 시대의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을 인용하면서, 주전 7세기론 만이 신명기 기록의 시기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신명기의 주전 7세기 저작론이 대세를 이루는 상황에서 신명기 기록을 왕조 이전 시대로 끌고 올라가려는 힘든 시도의 일부분입니다. 도대체 누가 오경의 단일 저작성을 부인한다는 말인가? 오히려 본인은 평가자가 오경의 단일 저작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쉬운" 정도라고 표현하였는데 그게 그렇게 표현해도 좋을만큼 비평학에 관대한 사람이라는 말인지 물어보고 싶습니다.

평자중의 한 사람인 신교수는 논문 170페이지의 기록을 두고 필자가 신명기가 후대 기록이라고 주장한다고 비판한다. 거기서 필자가 노예제도에 관한 법을 비교하면서 (출21:2-11, 레25:39-46, 신15:12-17) "오경의 법들은 자신의 몸을 이웃에게 파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는 사람을 보호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지 사는 사람 자신이 노예매매 활동에 대하여 경고를 받은 흔적은 전혀 없다"고 하였고, 이어 "there is no indication at all in the laws, even later in Deuteronomy"라고 한 사실에 근거, 신명기를 후대에 기록된 것으로 본다고 비판하고 있습니다.
언뜻 보면, 즉 신명기의 연구 상황을 전혀 모르는 일반 독자가 읽으면 오해할 여지가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박사학위 논문은 일반 독자를 위한 책이 아니라 전문적인 분야를 다루는 것입니다. 앞서 밝힌 대로 신명기 7세기 설이 보편성을 띈 상황이라 오경의 다른 법과 신명기 법에 차이가 있음을 밝히는 연구 역시 많이 이루어져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따라서 늦다고 말하는 신명기 (필자는 출애굽기나 레위기보다 신명기는 40년 가까이 늦은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으나 듣기에 따라서는 다르게 해석할 여지는 있다는 말이다)에서도 필자가 주장하는 논리에는 전혀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논문이 어떤 논지를 위한 주장인지를 제대로 검토하고 이해하려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평가자가 우선적으로 가져야 할 자세라고 봅니다. 어떤 책이든 책읽기는 그저 비판거리를 찾아내려는 자세보다 이해하려는 자세로 읽는 것이 훨씬 유익할 것입니다.

오경의 모세 저작과 단일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비평학계조차 다양한 주장들로 인하여 통일성과 일관성을 가지지 못하는 상황입니다. 이런 변화하는 학문적 상황 속에서 개혁주의 신학에 근거를 둔 학자가 가변적인 신학적 주장에 동조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는 것이 본인의 확신이며, 오경에 대한 본인의 입장입니다. 상식에 벗어나는 주장으로 학자를 임의대로 재단(裁斷)하는 일이 다시는 발생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결 론

본인의 학위 논문은 1985-1990년 사이에 작성된 것입니다. 이미 14년의 세월이 지나 책을 개정해야 할 시점이 넘었습니다. 논문이란 완벽한 것이 없으며 항상 비판과 새로운 주장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일개 논문의 한계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논문이 취하고 있는 기본적인 자세는 분명하게 변하지 않습니다. 본인은 정확한 논리적 체계 외에 다른 어떤 요소도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영국에서 논문을 작성하였습니다. 항간에는 필자가 학위를 받기 위하여 어쩔 수 없이 곡필을 한 것처럼 이해하려는 시도도 있는 것 같습니다만 영국의 학계는 편가르기 식의 학문적 작업을 일절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복음주의 권에 속한 학자는 자기 제자의 글을 주로 비평학을 수용하는 진보적인 학자들에게 논문의 평가를 맡기는 경향임을 볼 수 있습니다. 학문성을 인정받기 위한 노력인 셈입니다.

본인의 논문을 심사한 주심은 이미 1971년에 Cambridge Bible Commentary Series의 아모스 편 주석을 쓴 경험을 가졌고 당시 감리교 신학대학 학장이었던 Henry McKeating 박사였습니다. 2시간의 구두시험 끝에 그는 ‘당신의 논문이 의도하는 방향에 관하여서는 동의할 수 없다. 그러나 논문을 치밀하게 작성하였으므로 학위를 주는 데는 동의한다’는 말을 제게 남겼습니다. 자기 마음에 맞아야 학위를 주고 그렇지 않으면 무조건 반대하는 그런 식의 폐쇄적인 태도가 영국에서는 결코 통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근거 없는 판단은, 제게 긍정적인 것 같으나 영국의 학문 풍토를 모르는 데서 나온 완전한 오해입니다.

본인은 논문을 집필하면서 후 논문의 창의적 성격과 완성도에 신경을 썼을 뿐 한 번도 논문의 방향이 개혁주의 신학의 입장과 다르다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습니다. 필자의 지도교수인 Gordon McConville은 영국의 보수적인 학자들로 구성된 Tyndale Fellowship의 구약학회 회원이요 그 학회의 구심점이 되어 있는 성경신학 연구의 요람인 Tyndale House의 도서관장을 지냈으며 스코트란드 장로교 소속 학자입니다. 그에게서 배운 학생들이 6명 이상 박사학위를 받고 합동신학대학원(성주진 교수)을 비롯한 한국의 각 신학교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모교인 고려신학대학원에서 개혁주의 신학을 근간으로 5년 동안 공부하였고 (M.Div, Th.M), John Stott에게서 영국에서 가장 보수적인 구약학자로 소개받은 교수와 유럽에서 유일하게 주전 15세기 출애굽 설을 주장하는 John Bimson박사에게서 지도를 받았으며, 개혁주의 신앙의 세계교회 건설을 목표로 하는 학생신앙운동의 대표간사로 4년간 사역하였고, 두 교회를 개척하고, 수많은 교회에서 설교와 구약특강을 하면서 단 한번도 신학적 의혹을 받은 적이 없으며, 총회 부설 교사성경대학, 통신대학의 출석강의를 여러 차례 맡았고, 초교파 신학대학에서 3년간(1991-1994) 가르치는 동안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신학교수로 인정받으며 살아온 본인을 두고, 14년이 지난 논문을 이제 다시 끄집어내어 성경의 계시와 역사를 부인하는 사람으로 몰아가는 것은, 필자 개인에게 끼치는 영향과는 상관없이 교단에 큰 불명예를 안겨다 주는 일이 되고 있습니다.

미래를 위해 교회의 모든 지도자들이 총력을 기울여도 부족한 때에 하나님의 나라 건설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힘을 낭비하게 하고, 영육 간에 파괴적인 영향밖에 남길 것이 없는 소모적인 논쟁을 조속히 그칠 수 있도록 노회가 최고의 지혜를 발휘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인의 문제로 심려를 끼쳐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여주신 후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끝.


고려신학대학원 교수 이 성 구




글쓴이 : 이성구 날짜 : 2004/10/16 조회 : 94

논란의 실체2



나에 대한 논란은
사실상 2000년 총회에서 결론이 났었다.
"아모스 주석을 써서 이해케 한다"
그로 끝이었다.
주석만 쓰면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2001년 총회를 파한 후
다시 대전에서 소위 소총회로 모여
재론 동의도 없이
재론을 시작했다.
진주노회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복음병원과 관련된 선거관리위원회의 월권적 행위에 대한
나의 비판이 불을 다시 지핀 셈이었다.
언젠가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2003년부터 나에게 시비하는 세력의
세대가 교체되었다.

소위 D파의 제2세대가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조만간 있게 될 D1 세대의 교단 정치 일선에서의 후퇴를 대비하며
서울의 L, 부산의 Y, 울산의 S로 이어지는
D계보의 지속적 지배의 꿈이 수면 위에 실체를 드러내었다.

물론 그 양상은 이전과는 조금 다르다.
서로를 세워주는 이전의 D와는 다른 양상을 보여준다.
서로 자신의 자리와 위대함을 드러내기 위한 각축전 양상을 띄고 있고
신대원 안팎의 장악을 기도하는 묘한 현상까지 보여주고 있다.

교단 조기 정복을 꿈꾸는 27
- 그리고 힘 안들이고 자리를 이어받겠다는 28
- 그 이면에서, 34에 밀리지 않고 실권을 쥐겠다는 33, 막무가내들
전쟁은 이래서 계속되고 있다.

그들과 나는 무슨 상관인가?
배후세력, 실세, 브레인, 첨병??

목사와 자리.
목사와 세력.
목사와 지배....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이게 고려파의 현실이다.
논란의 실체이다.
고려파의 정치 지평을 바꾸는 새로운 설계가 필요한 시점이다.

날더러 흔히
신학교수가 정치에 너무 관여한다고 비판한다.
교수는 그냥 가르치고 연구만 하고 있으라고 한다.

복음병원은 교단의 복마전이고
복음병원 정리하지 않으면 교단이 재앙을 맞게 될 것이라는 소리는
목회하던 1996년부터 큰소리로 외쳤던 주제였다.
교단의 영적 쇠퇴를 가져올 원흉이 될 것이라는 생각을
70년대 초반이래 한 번도 지운 적이 없었다.

김해복음병원의 부실의 원인은 너무나 분명했고
그건 정리하지 않으면 안될 일이었다.
98년, 전문경영진단의 결과는 단호했다.
"조속히 청산하라!"
총회의 결정도 분명했다.
"경영진단팀의 결과를 수용하여 조속히 청산하라!"

99년 학교에 들어온 이후에도 복음병원 문제는 끝이 나지 않았고
더욱 악화되었다.
그리고 나는 중부산 노회장을 맡았고
교단의 결정에 신경을 쓰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말을 하고 글을 쓰고 했을 뿐이다.

교회정치?
정치는 결정에 이르는 과정을 말한다.
목사와 교수는
고신교회에 속한 사람이라면
무슨 결정을 어떻게 할 것인지에 관심을 가지고 신경을 쓰는 것이 정상이다.
교회 속에 내가, 우리가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치는 정치목사나, 일부 스스로 잘난 목사들의 몫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교회 정치는 교회의 미래를 위하여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올바르고 미래지향적이며
가치있는 결정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노력해야 한다.

생각해 보라.
교수 목사는 연구만 해야 한다면
그렇다면 담임 목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담임 목사는 설교만 하고, 자기교회만 돌아보아야 하지 않는가.

요즘 대학은 산학협동을 할 수 있는 연구계획을 하지 못하면
존재할 수도 없다.
교수의 평가는 연구와 가르침만으로 하지 않는다.
반드시 사회적 기여도를 묻게 된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
상아탑 안에 갇혀 있는 교수는 더 이상 존재가치가 없는 시대이다.
기업을 바꾸고, 기술혁신을 이루고, 세상을 바꾸는 일에
뛰어들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서 수많은 NGO들에는 대학교수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다.
학문과 실제적 삶이 분리될 수 없는 법이다.

은근히
교회의 신학과 상관없이
그저 편리한대로
자기 입맛에 맛을 결정만을 마음대로 하기 위하여
교수들을 두들기지 말아야 한다.

복음병원 문제로 몸살을 앓게되니
결국 누가 욕을 듣는가?

왜 그동안 조용하기만 하다
부도가 나자 처음으로 복음병원 문제를 토론하고
여러 방안 중의 하나고 3자 인수방안까지 거론하였다는 것을 속에 감추고
애매한 교수들만 잡으려 하는가?

복음병원의 문제가
교회의 교사역을 해야 할 교수들이 가만히 침묵하고 있어야 하는 문제인가?

원리대로 말하자면
교회 전체가 이 지경이 되도록
총회개회도 못하도록 무너질만큼 교회의 권위가 실추되도록
입을 다문 교수들의 책임을 묻는 것이
어쩌면 더 정상적인지 모를 일이다.

우리 고신의 목사와 신학생들은
논란의 실체를 좀 더 세밀히 들여다 보아야 한다.

이어질 토론에 계속 관심을 가져 주기를 기대한다.



글쓴이 : 이성구 날짜 : 2004/10/17 조회 : 40

논란의 실체3



이번 자유주의 논쟁에 결정적인 펀치를 날린 것은
이승미, 최덕성 같은 사람이 아니다.
박용호 신학위원장, 박충열 신학위원회 서기, 신상현 신학교육부 서기를 비롯한 나머지 신학부 위원 6명도 조연에 불과했다.
물론 주연급 조연도 있긴 했지만.

오병세, 이근삼, 허순길.
세 은퇴교수들이 결정적인 역할을 맡도록 유도했다.
맹목적 신념에 불을 당겼다.
피를 그들 손에 바르도록 그들의 권위를 치켜 세웠다.
퇴역한 분들이 역사의 전면에 선다는 것이 쉽지 않은 데
고신은 이들에게 역사적 자국을 남길 만한 넉넉한 기회를 부여 하였다.
결정적인 실수를 유도해 내는 데 성공하였다.
주연급 조연들은 멋지게 그들의 역할에 성공했다.

왜 그랬을까?
한 사람 빼고는 제자이고, 그것도 그리 멀지 않은 제자인데
왜 그들은 제자를 죽이는 일에 그렇게 적극적으로 가담한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용감하게 만들었을까?
90년 귀국당시 교수회에서 박종칠과의 5시간 논쟁을 할 때도 거기 있었고
98년 나를 학교로 부를 때도 이 땅에 있으며 잠잠했던
오박사 허박사가 왜 그렇게 자신들의 결정을 뒤집고 흥분하는 것일까?

그들이 과연 나를 자유주의자로 본다는 말일까?
나이 40대 말이 되도록 전혀 그렇지 않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신문 인터뷰 한번 하고 나면 자유주의자가 된다고 믿는 것일까?

아무래도 거기서 이유를 찾을 수가 없다.
한 분은 나를 아들같다고 하였고
한 분은 졸업반인 내게 영국 유학을 권유하였고
다른 한 분은 90년 귀국당시 원장으로, 박종칠과의 논쟁을 지켜보았고
8년의 세월이 흐른다음
다시 원장이 되어
나를 송도비치호텔로 불러 학교로 오라고 권유한 분이니
나를, 나의 논문을, 모른다고 할 수가 없다.
"나는 이 목사가 교회를 사랑하는 줄 분명히 보았다"

그러던 그들이 왜 이제야 내게 총을 겨누는 것일까?
무슨 원한이 사무친 것일까?
신학이 사람을 죽이는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럴 수가 없다.

오박사 이박사는 고신대학 최초의 부정입학 사건이 터졌던 79년 당시
자퇴를 불사한다 하며
학장은 사표내고, 교무과장은 사직하라며 압박을 가하던
나를 비롯한 78년 신대원 입학자들과 一戰을 벌린 당사자였다.

허순길 은퇴교수는 정년으로 원장직을 놓았으면서도
후임 원장 결정은 미루어지고, 대행이 있었음에도 인수인계도 하지 않아
심지어 정관을 변경하여 원장직을 한 번 더 하려 한다는
소문을 무성하게 떠돌게 하였던 그 현장에 있었다.

99년 1학기 초,
천안시대에는
새로운, 창조적인 지도력이 필요하다는 내용의 칼럼을 게재한 어느 교수를 두고
은퇴한 신분임에도 징계청원서를 내는
불타는 정열을 보여 우리 모두의 혀를 내두르게 한
바로 그 역사의 주인공이다.

나는 이러한 모습을 잘 참아내지 못하였다.
할소리 하지 않을 소리 다 해야 속이 시원했다.
멀리까지 내 목소리는 메아리가 되어 울려나갔고
나는 미덥지 못한 사람으로 전락했다.

그뿐 아니다.
허박사는 젼형적인 화란 31조파 멘텔리티를 갖고 있었다.
그에게 교회간의 교제란 부질없는 일로 보였다.
그저 우리만이었다.
다른 장로교는 말할 것도 없고
감리교는 아예 구원의 대상에서도 제외된 듯한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그러니 오랫동안 한국교회의 연합이니 일치니 하는 것은
이단자의 목소리로 여겨왔음이 틀림없다.
그럴 수 없는 일이다!
한국교회가 하나가 되다니!
나누어 진 것은 당연하고 절대로 그들과 연합은 불가한 일이다!
적어도 나는 그의 그런 주장을 수용할 수가 없다.
교회를 그렇게 쉽게 분리하는 것을 용납할 수가 없다.
도대체 우리가 누군데 남을 함부로 비판하며 돌려세우려 하는가?
........

지난 해 총장 선거가 있을 때
나는 9명의 총장 추천위원회가 5명의 후보를 이사회가 추천한다는
기막힌 소식을 듣고,
말도 안되는 인사들까지 총장 후보로 나서 물경 7명의 후보가
부도난 대학병원을 가진 대학의 총장이 되려한다는 소식을 듣고,
"총장의 조건"이라는 글을 기독교보에 게재한 적이 있었다.

사회로부터도 질책을 받은 적이 있는 부도덕한 사람,
법을 어기고 마음대로 목사가 된 사람, 불신자,
기독교대학의 비전이 없는 사람 들은 물러서라고 권고 하였다.

총회장과 부총회장에게는
둘러리 역할만 할 추천위원회에 참석하지 말았으면 소망을 피력하기도 하였다.
9명 중 교단 대표는 단 2명. 나머지는 대학과 이사회가 위원을 선출했다.
결국 교단의 뜻은 결코 반영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5명을 추천하면 이사회가 그 중에서 1명을 뽑기로 한 것은
추천을 전혀 의미없는 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결국은 형식적 절차를 거쳐 불신 이사들이 결정하는 사람이 총장이 될 뿐이었다.

나는 정견발표를 시작하기전 큰 소리로
의미없는 발표와 추천행위를 거둘 것을 요구했다.
교단을 무시하는 이런 행위를 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도록 요구했다.
돈은 교단더러 만들라고 하면서
관선이사 체제하에서는 교단과 유일한 끈 역할을 할 수 있는
총장을 이사회 마음대로 뽑겠다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임을 분명히 해야 할 것 같아 소란을 피웠다.

양복이 찢기면서 나는 교단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였으나
역부족이었다.
나의 뜻을 이해하는 교단 인사는 아무도 없었다.
윤모 장로같은 이는 내가 왜 그렇게 하는지 기막히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결국 정현기 총장이 뽑혔다.
알고보니 내 옷을 찢은 사람이 전병찬이라는 의사였는데
그가 바로 정현기 총장 시대에 병원장을 하기로 한 사람이었다.
그 때부터 충성을 보인 것이다.
나의 뜻이 의사 총장을 반대한다고 파악한 그는
나를 힘으로 밀쳐내며 전위부대 역할을 감당하며 차기원장으로서의
기백을 보여 준 것이었다.

그 정총장이 지금 영도, 송도 교수협의회의 불신임 대상이 되었고
이사회는 총장을 해임하라는 요청서를 쥐고 있다.
압력을 견디지 못한 이사장 임광식교수는 아예 이사장직을 내어던져 버렸다.

자리가 위태한 사위 총장.
오박사의 나를 향한 공격이
보수파에 추파를 보내는 것이라는 항간의 해석이 옳다면
이는 보통 추악한 일이 아니다.

나를 둘러싼 논란은
결코 원로학자가 그럴 듯하게 치장한,
그러나 완전히 시대에 뒤떨어진 그런 이유들만이 아니다.
거기에는 깊은 인간적인 이유들이 도사리고 있다.
나는 그래서 더욱 가까이에서 절망의 늪을
경험하게 된다.
물론 잠시 뿐이긴 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