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목회는 상대를 헤아리는 자세가 우선되어야 한다 [교단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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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목회는 상대를 헤아리는 자세가 우선되어야 한다 [교단통일]


분류: 통일- 교단 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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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이성구 날짜 : 2003/12/05 조회 : 298





목회자는
무엇보다 성도들을 돌아보고 온전한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세우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심중을 제대로 헤아리도록 노력해야 한다.
작은 성도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그를 잘못 헤아려 다치게 하는 일을 하지 않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여야 한다.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의해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신경을 써야 한다.
그런 자세가 체질화 되어야 한다.


나는 아직 뉴스 앤 조이 사이트를 찾지 못해
기사를 보지 못하고 있다.

자주 찾아오는 기자와 대화를 주고 받았고
그는 그것을 근거로 글을 쓴 모양이다. 물론 숨기거나 감출 일이 아니니 굳이 말리는 데도 자기 판단대로 글을 쓰는 그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다만 그는 내가 가진 생각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된다.

1. 총회의 결정
물론 나는 지금 이 문제를 내 입에서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접촉을 피해왔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다. 다만 더 이상 필요없는 일에 누구라도 힘을 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문제를 제기했으니 이쯤에서 한 번 생각하여 보자.
우리 교단은 장로교 27회 총회의 결정에 정면으로 저항하며 생겨난 교단이다. 총회의 결정을 따랐다면 신사참배반대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어야 했다. 우리의 선조들은 총회의 결의를 바꾸었다. 총회의 결정이 항상 옳은 것으로 말해서는 안된다. 총회의 결정은 가능한 한 존중되어야 하지만 잘못될 수도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권위와는 다름을 인식해야 한다. 왜, 무슨 이유로, 어떤 방법으로 결정되었는지를 세밀히 살펴 과오를 없앨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장애인을 목사로 세울 수 없던 총회의 전통을 바꾸기도 하였고, 고려신학대학이라는 명칭은 바꾸지 않고 의과대학 설립을 추진하라는 총회 결정이 무시되기도 하였으며, 승동측과의 교단 합동 결정을 되돌리기도 하였다. 그것이 우리의 역사이다. 박윤선박사가 고신을 떠날 당시의 총회 분위기를 오늘도 정당화하는 사람이 있는가?

조금 더 자세히 보자. 오늘의 복음병원 사태를 예견하고 99년 총회는 김해복음병원을 조속히 처리하기로 가결한 적이 있고, 2000년 총회는 재확인하였다. 그러나 그 결정은 지켜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오늘과 같은 사태에 이르렀다. 여러 이유를 말할 수 있지만 현재의 복음병원 사태가 김해복음병원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별로 없지 않은가? 현재의 총장이나 병원장에게 한 번 확인해 보라.
총회의 결정이 혹 잘못될 수도 있으므로 헌법은 재론을 위한 여러가지 법적 절차를 보장하고 있는 것이다.

2. 오늘의 고신과 60년대 이전의 고신
최목사의 글을 자세히 읽지 않았지만 오늘의 고신과 60년대 이전의 고신을 동일시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어려움이 있다는 나의 주장을 염려하는 느낌을 받는다. 곰곰히 생각하여 보자. 우리가 합동할 때 우리는 당시 승동측을 어떻게 받아들인 것인가? 합동당시 선언문을 보라.
"질이 같으면 서로 함하고, 성(性)이 같으면 서로 응하는 것이 물리학의 원리라면, 신앙이 같고 신학체계가 같은 교회를 주장하는 똑 같은 두 총회가 함께 뭉치지 못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우리는 똑 같다"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결국 다르다며 나누어졌다. 그렇게 된연유를 나도 들어 알고 있다 충분히 이해되는 부분도 있음이 사실이다. 나의 선친이 함동당시에 강도사고시를 치뤘고 그 때 겪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셨기 때문에 심정적으로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이유들이 분리의 결정적 이유가 되기에는 어딘지 석연치 않음이 사실이다. 1952년의 독립교단 설립과 63년의 합동후 환원의 역사는 성격이 다른 것을 부정하기 어렵지 않은가?
역사에 대한 평가는 솔직하고 정직해야 할 필요가 있다. 나의 일이라고 무조건 미화하려는 것은 미성숙한 사람들이 가진 태도 아니겠는가? 실수를 인정하면서 늘 성경대로 살기 위해 한 때의 결정을 바꾸기도 하고 자신을 부정하기도 하는 자세를 가지는 것이 개혁주의자들의 삶이 아니겠는가?

3. 교회연합에 대한 나의 입장
현재 논의되는, 그리고 내가 관심을 가지는 교회연합은 매우 단순하다. 한국 개신교회를 대표하는 기구를 하나로 만들자는 것이다. 자매 교회 관계를 만든다거나, 교회 일치 여부와는 사뭇 다른 내용이다. 생각하여 보라. 지금 영남지역을 벗어난 고신교회 내에 어떤 교인들이 모여 있는가를! 온갖 교파의 사람들이 다 모여 있다. 그들이 우리 교회에서 거부될 이유라도 있으며 거부되는가? 최성림 목사가 강원도 어느 골짜기에서 태어났으면 고신교인 될 수 있었을까? 충청도에 태어났으면 아마도 감리교인 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지 않을까?

그러나 지금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단계도 아니다! 다만 교계의 원로들이 순전히 자리다툼 때문에 여러 개의 기구를 만들어 불신자들 앞에 부끄러운 꼴이 되는 것을 면하자는 것이 현재 교회연합 논의에 참여한 분들의 뜻이다. 그리고 그것은 반드시 재고해야 할 사안이다.

우리 교단에서는 이제는 은퇴하신 이사장을 지낸 오성환목사님이 한기총의 교회일치위원장을 지냈고 (한기총에 장감성 오순절파 등 각 교파가 다 들어 있다!), 지금은 전임 총회장이신 박종수목사님이 그 일을 맡아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18인 위원회" 참석하고 있다. 그들이 최목사만큼 한국교회를 모르실까? 생각이 없을까? 마구잡이 교회일치를 말할까?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일에는 조심하고 신중해야 한다.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자기 생각대로 재단하기보다 조금은 상대의 입장에서 타인을 헤아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자신의 신학만 옳고 바르고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사도신경 고백을 말한 것은 사도신경을 진정으로 고백하는 자면 그는 삼위하나님, 창조주 하나님, 동정녀 탄생, 십자가, 부활의 주, 성령하나님, 공교회, 성도의 교통, 죄용서, 육체 부활, 영생을 믿는 자이니 모두 천국 백성 되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되는 데 더 이상 어떤 고백이 필요한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이유가 어디 있는가? 위와 같은 구원의 길을 분명히 해 주기 때문이 아닌가?

신학이 사람을 까다롭고 복잡하게 하는 도구인가, 성경의 내용을 명료하게 하는 논리적 틀인가? 도대체 무엇을 위하여 성경을 가르치는가? 물론 작은 신학적 차이가 커다란 삶의 방법의 차이를 만들 수 있음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어느 교회든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공동체이면 얼마든지 함께 예배하며 교제할 수 있지 않은가? 그 정도면 기독교회라는 우산아래 들 수 있는 것 아닌가? 이단이 아님이 분명하고 이단성이 없다면 용납될 수 있는 것 아닌가? 염려하는 종교 다원주의자는 어떤 신학자 개인들의 문제인지, 그것을 교단의 합법적인 신학으로 받는 경우가 있다는 소리를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

최성림목사는 어떻게 하는가?
우리 시대에는 신학교에서도 제대로 배운 적도 본 적도 없는
벨직, 하이델베르그나 혹은 귀에 익은 웨스트민스터고백서 같은 역사적 문서들을 이해하고 있으며 믿느냐고 묻고 다른 교회 예배에 참석하는가?
그걸 아는 사람만이 구원에 이르는가?
아니 그게 사도신경의 고백내용과 구원의 원리를 말하는 점에서 얼마나 다른가?
천국에서 누구와 더불어 살려고 하는가?
천국은 최목사처럼 정확한 신학을 가진 사람의 전유물일까?
한마디라도 공공성을 띈 곳에서 하는 말은 정말 조심해야 할 이유는 널려있다.

복음은 생명이다. 죽은 자를 살린다. 죽지 않은 생명은 자라기 마련이다. 교회는 이 신비로운 생명을 나누어 주는 곳이다.
최목사 자신과 교회, 생명이 넘치는가? 그래서 자라고 풍성한가?
너무 남의 걱정 하지 말고
나도 최목사 만큼은 신학적 지식을 갖추고 있고 역사도 전통도 알고 있으니
조용히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충직하게 행하기를 기대한다.

참고로 언론이란
짧은 글 속에 많은 것을 담기를 원하고
가능한한 논란을 유도하기 원하는 속성이 있음에 유념하여
너무 신문의 기사 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너무 문자 하나에 목숨을 걸지 말고
여유있게 살아갔으면 한다.

인간적으로도 한참 선배요 같은 노회원이요 신학교의 교수를
너무 쉽게 매도하려는 버릇은 고치는 것이 좋을 것으로 보인다.
자신이 아는 것은 남도 알 수 있고
자신이 하는 말을 남도 할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한다.
자신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자신이 헤아림을 받을 수 있음을 유의하라시는
주님의 말씀을
성경을 알고 믿는다는 우리 목사들이 소홀히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뿐만 아니라
신학교수들이 한 사람 한 사람의 질문을 일일이 상대할 수 없는 일임을
고려해 주었으면 한다.

3. 상대를 먼저 헤아리는 마음, 그래서 이 땅의 우리를 친히 찾아오신, 바로 그 주님이 가지신 마음, 이런 마음의 사람들이 이 성탄의 계절에 많아지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