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미국 군사주의는 비기독교적, 무력 우상화를 조장하는 일 [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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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미국 군사주의는 비기독교적, 무력 우상화를 조장하는 일 [합동]


분류: 교단- 합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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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신학·윤리적 분석 ? 도덕적 정당성 없다.

전쟁은 ‘해결 수단’ 아니다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려는 수순을 밟고 있습니다. 국제 여론까지 등에 업으려다 여의치 않으니 이제는 유엔의 결의 없이도 할 수 있겠다는 말까지 슬쩍 흘리고 있습니다. 부시의 연설에서는, 텔레반젤리스트 저리가라 할 정도로 성경 구절이 쏟아집니다. 이를 두고 언론들은 부시의 신앙적(?) 발언들을 거론하며, 미국식 복음주의나 기독교 근본주의의 성향이라고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싸잡아 전쟁광으로 몰릴까 적이 염려도 됩니다.

이라크를 공격하려는 미국의 군사주의는, 과연 그들의 입버릇이 된 그 말씀에 비추어, 그리고 신학적, 윤리적으로 과연 정당할까요? 여기 기독교윤리학자의 글을 실어 이 물음을 진지하게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편집자 주>



미국의 이라크 공격이 현재 초읽기에 들어간 상황이다. 미국은 몇 개의 우방 국가들과 함께 이라크에게 지난 3월 17일을 마지막 시한으로 하여 대량살상무기를 비롯한 무기의 무장을 해제할 것을 요구해왔으나 이라크가 이에 응하지 않자 지난 17일 최후의 통첩을 하였다.



[미국의 도덕적 명분]

미국은 이 전쟁의 불가피함을 몇 가지 이유로 제시한다. 이라크가 1)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으므로 미국과 나아가 세계평화를 위협하고, 2)9-11미국 테러와 서방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테러에 깊이 관여한 불량국가이고, 3)나아가 중동의 민주화를 촉진하기 위해 이라크 후세인 정권의 축출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미국 부시 정부가 내세우는 위의 명분에 대해 국제사회는 의심스런 눈으로 보고 있고, 그것의 도덕적인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비등하고 있다. 이미 로마가톨릭 교황과 미국의 교계지도자들은 이 전쟁을 반대하는 견해를 발표한 바 있으며, 미국의 지식인 사회의 여론은 이 전쟁에 대해 비판적인 것이 대세이다. 심지어 한국의 일부 개신교단들도 이에 대한 반대의사를 미국정부에 보내고자 준비 중에 있다.

전통적으로 전쟁에 대해서 정당전쟁론과 평화주의의 입장이 양대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다. 정치적 현실주의가 주도하는 냉엄한 국제사회와 국제관계에 있어서는 어떤 경우에도 폭력사용은 도덕적으로 정당하지 못하다는 평화주의의 주장보다는 정당전쟁의 논리가 훨씬 선호되어 온 것이 대세이었다. 정치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은 오랜 세월동안 전쟁이 최소한의 요건을 갖추면 정당화될 수 있다는 정당전쟁론을 발전시켜왔다. 일반적으로 로마가톨릭교회와 주류 개신교단들과 아울러 개혁주의 교회는 정당전쟁론을 지지하는 신학적 전통을 유지해 오고 있다.

그러나, 현대에 이르러 정치학자들은 이론과는 달리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전쟁은 양 세력간에 있어서 한쪽의 세력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하면서 이론과는 달리 정당전쟁이란 있을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즉 전쟁은 다분히 힘의 역학관계에서의 불균형과 자국이익 추구라는 차원에서 발생하는 산물로 보기 때문이다. 부시 대통령은 대이라크 전쟁을 앞두고 이번 전쟁은 잠재하는 악의 세력에서 세계의 안전과 평화를 적극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차원에서 행해지는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전쟁이 진정 도덕적으로 정당성이 있는 전쟁인지를 따져볼 필요가 있고 그리고 이런 일련의 과정들과 현상들을 지켜보면서 기독교인들이 분별하고 새겨보아야 할 점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정당전쟁론으로 본 대이라크 전쟁]

우선 정당전쟁론의 관점에서 이 전쟁을 검토하고 평가해 볼 필요가 있다. 전쟁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첫째, 전쟁 할 수 있는 요건(jus ad bellum, justice toward war) 네 가지와 둘째, 전쟁 행위에 있어서 지켜야 할 요건 (jus in bello, justice in war) 네 가지를 만족해야 한다.

전쟁을 할 수 있는 정당한 요건의 첫 번째 조항은 전쟁을 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원인(just cause)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이 적군의 침공이나 공격에 대해 국민의 안전과 생존을 보장하고 지키기 위한 반격으로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첫 조항에 비추어 보면 미국의 이라크 공격은 실제 어떤 공격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단순히 예상되는 또는 우려되는 미래의 위협을 미리 막거나 제거하기 위한 차원에서 행하는 전쟁이기에 정당한 전쟁으로 인정받기 어렵다.

또 전쟁이 정당화되기 위한 다른 요건은 합법적인 권위(lawful autho-rity)를 지닌 기관에 의해 인준되고 이어 공적으로 선포(official decla-ration)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사회에 대한 공격과 위협에 대한 방어와 예방을 위해 이라크전쟁이 필요하다고 한다면 이 전쟁에 대해서는 당연히 국제사회에서의 합법적인 기관인 국제연합(United Nation)이 인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유엔의 인준이 없다면 이 전쟁은 도덕적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없다. 미국이 유엔의 결의를 받지 못한 채 전쟁을 수행하게 된다면 이 전쟁은 국제법을 어기는 것이고 도덕적으로도 정당성을 얻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조항은 전쟁은 마지막 수단(last resort)으로 행해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현재 유엔 무기 사찰단의 이라크 사찰이 강도 높게 진행되어오고 있다. 실제로 이라크의 무장해제 요구 수준도 높고 만족스럽지는 못하다 할지라도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비록 일부국가가 보기에는 미흡한 점이 있지만, 이일은 국제연합의 국가들이 더욱 지혜를 모아 논의하는 가운데 조정하거나 요구사항을 높여나갈 수 있는 차원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국제연합의 안전보장 이사회의 단합된 지원 하에 규모가 확대된 공격적 사찰이 단호하게 실시된다면 이라크의 대량 살상 무기개발 프로그램을 상당할 정도로 또는 항구적으로 막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전쟁만이 이라크를 무장 해제시킬 수 있는 마지막 수단이라고 인정해 주기에는 쉽지가 않다. 미국은 이 면에서 좀 더 인내하며 평화적으로 무장을 해제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다른 모든 방법을 강구해 보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몇 가지 정당전쟁의 요건의 빛에서 대이라크 전쟁을 조명해 본다면 이 전쟁을 도덕적으로 정당화하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



[현대적 십자군 전쟁의 논리]

대이라크전의 도덕적 정당성을 정당전쟁론으로서는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면 결국 대안은 전쟁을 다른 논리로 정당화하려고 하는 것밖에 없다. 그것은 현대적 십자군 전쟁(crusade)과 같은 성격으로 규정하고 정당화시키는 것이다. 부시는 실제로 이 전쟁을 일종의 십자군 전쟁이라는 메타포를 사용하면서 전쟁의 의미를 규정하려 해오고 있다. 종교적인 이유로 행해졌던 12, 13세기의 십자군 전쟁과 달리 이 전쟁은 자유민주국가가 독재와 테러의 세력으로부터 인류보편적인 인권과 자유, 그리고 평화를 수호하고 확보하기 위해 악의 세력과 싸우는 전쟁이라는 논리이다.

현대 전쟁은 재래식 무기를 사용하던 이전 시대의 전쟁과는 달리 생화학무기와 대량살상무기(WMD)가 사용되기에 일단 전쟁이 발생하고 무력을 사용하게 되면 지구촌과 인류는 엄청난 피해를 겪게 된다. 이런 현실에서 침공에 대한 반격적 공격 전쟁만이 정당한 원인(just cause)이 될 수 있다고 규정하고 그러한 태도를 견지하는 것은 인류와 국제사회에 대해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인 자세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예견되는 악한 세력으로부터 엄청난 파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한 목적의 예방적 전쟁(preventive war)이나 인류의 안전과 평화를 도모하고 악의 세력을 제거하기 위해 일으키는 십자군적 전쟁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권, 자유, 평화를 신장하기 위해 행해지는 십자군 전쟁은 ‘적은 악의 원리’(the lesser evil principle)에 근거하면서 도덕적 정당성을 확보하려한다. 비록 침공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먼저 선제공격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하지 아니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더 큰 참혹한 악과 피해를 미리 막고 차단할 수 있거나, 때로는 전쟁을 일으키지 않음으로 맞이하고 당할 큰 악보다는 전쟁을 일으킴으로 야기하는 악과 고통이 더 작은 것이라면, 더 큰 악을 미리 차단한다는 점에서 행해지는 이 십자군 전쟁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는 ‘적은 악을 행하는 전쟁’이 될 수 있다는 주장한다.



[십자군 전쟁 논리의 문제 ]

정당한 원인의 범위를 침략에 의한 방어적 반격에서 예방적 목적의 선제공격으로 넓힐 수 있다는 주장은 위험천만한 주장이다. 이 주장은 어느 편에게나 전쟁을 먼저 일으키고자 하는 유혹의 구실이 될 가능성이 많다. 상대방으로부터 당하게 될 큰 악과 피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전쟁을 치르지 않을 수 없다는, 선제공격의 명분을 누구나 쉽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전쟁에 가담한 수많은 국가들 가운데 먼저 공격을 한 편에서는 앞 다투어 이러한 논리를 동원하여 전쟁을 일으키곤 했음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정당화할 수 있는 원인을 예방적인 전쟁으로까지 확대하려는 시도는 문제가 있다. 정당한 원인은 철저히 방어적 전쟁이 되어야 한다.

적은 악의 원리에 근거하여 현대적 십자군적 전쟁을 옹호하는 것 역시 문제가 없지 않다. 만약 이 행동을 하지 않으면 더 큰 악을 초래하기에 이 행동을 취해야 한다는 이 원리는 다분히 공리주의 내지 결과주의적 윤리에 기초하고 있다. 이 점에서 기독교 신앙과 때로는 충돌을 피할 수 없다. 현실적으로 적은 악의 원리에 의해 결정을 내릴 때 사람들은 종종 소수와 약한 자들의 인권에 소홀하게 되는 경우가 있게 된다. 그리고 이 원리에 의해 결단을 내리게 되면 때로는 선과 악에 대한 규명 작업과 선을 도모하고 악을 제거하려는 일에 대한 관심보다는 좋은 결과를 낳기 위해 때로는 문제가 있는 수단을 쉽게 정당화하여 사용하게 될 위험이 많게 된다.

물론 불가피한 딜레마적 상황에서 ‘적은 악의 원리’는 결단을 위한 유용한 근거가 될 수가 있음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원리는 필요한 원리이지만 충분하지 못한 원리이기 때문이다. 특히 기독교인들은 큰 악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선적으로 선을 행해야 하는 자들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철저히 선을 도모하고 옳은 것이 무엇인지를 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적은 악의 원리에 기초하여 결단을 내리려고 한다면 쉽게 악과 타협하고 그것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현대적 십자군 전쟁을 위한 논리는 기독교 신앙과 조화를 이루기가 쉽지 않다.



신원하 교수 기자 등록일 2003-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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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이라크 전쟁에 대한 신학·윤리적 분석 - (2) 미국 군사주의, 비기독교적이다


군사주의 ‘무력 우상화’ 조장

타락한 세상과 국가 이기주의



전쟁의 화염이 이라크를 뒤덮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미국과 동맹국은 미국의 “자국 방위” “세계의 평화” 그리고 독재정권에 희생되고 있는 “이라크 국민들의 자유”를 위한 해방전쟁이라고 주장하면서 전쟁을 감행했다. 하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것을 정치적 수사로 생각할 뿐이고 실상 미국이 전쟁을 일으키는 주된 목적은 철저히 국익 추구라고 생각한다. 미국은 엄청난 석유 매장량과 생산량을 가지고 있는 이라크로부터 친미 정권을 세워 안정된 석유공급을 확보하고, 나아가 중동에서의 정치적 주도권을 확보하려는 것이 전쟁의 주된 이유라는 것이다.

전쟁반대를 주도했던 프랑스와 러시아 역시 이 점에 있어서는 크게 차이가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이 전쟁을 반대한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전쟁이 도덕적 명분이 없다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라크에 엄청나게 투자해 얻어 놓았던 석유개발권을 유지하고 동시에 미국의 패권확장을 저지하려는 계산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우리나라와 일본도 미국을 지지한다고 성명을 발표하면서 그것이 국익을 위한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처럼 전쟁 지지나 반대를 결정하는 기준이 인류보편적인 이상이나 평화, 정의가 아니라 자국의 이익임이 드러나고 있다. 세계와 교회는 미국의 윤리학자였던 라인홀드 니버가 국제관계와 집단과의 관계에서 작용하는 가치와 규범은 정의라든지 도덕이 아니라 철저히 자기집단의 이익이라고 한 말을 이 전쟁을 통해 새롭게 확인하고 있는 셈이다.

미국과 연합국의 국가 이기주의는 분명히 큰 대가를 치를 것이다. 전쟁으로 미국이 이라크 후세인 정권을 무너뜨리고 의도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세계 평화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고양하고 선도하는 국가라는 명예로운 도덕적 지위는 더 이상 주장하거나 확보할 수 없을 것이다.



군사주의는 비기독교적 신앙



오늘날 국제관계에서의 외교는 철저히 힘의 논리에 의해 움직이고 특히 분쟁을 해결하는 데에는 이 논리가 여지없이 적용된다. 전쟁을 일으키는 국가들은 압도적으로 우세한 힘과 군사력이 있으면 분쟁을 종식시킬 수 있고 의도하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왔었다. 첨단 무기 보유와 군사력에 있어서 압도적으로 우위를 보유하고 있는 한 자국의 안전뿐만 아니라 상대방을 섬멸하고 목적을 관철할 수 있다는 생각은 현대의 많은 국가들에게 일종의 신앙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 신앙은 무기를 의지하고 예배하는 군사주의(militarism)라고 일컬을 수 있다.

지난 2차 세계대전 이후로 소련이 무너지기 전까지 소련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냉전체제에서 많은 국가들이 엄청난 국가의 예산을 들어 무기를 사들이고 군비확충을 통해 무장하여 왔다. 특히 소련과 미국은 대칭적 구조를 이루기 위해 경쟁적으로 신무기를 개발하여 무장하여 왔다. 미국은 소련이 무너지고 난 뒤에 군사력의 우위 기조를 유지하면서도 한편으로 러시아와 핵무기를 상호감축하기 위해 노력을 해왔고 실제로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9-11 테러 사건을 당하고 난 뒤 미국은 테러로부터 자국을 방위한다는 이유로 다시금 압도적인 군사력을 보유하기 위해 MD(Missle Defense) 체제 개발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추진하였다. 이는 테러직후 1972년 소련과 맺은 ABM(Anti-Ballistic Missle 탄도탄 요격 미사일) 협정 탈퇴로 이어졌고 실제로 2002년 6월에 그 효력이 발효하여, MD체제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즉 미국은 소련으로부터의 위협은 사라졌지만, 이제는 이라크, 북한, 이란과 같은 “불량국가”로부터 언제 공격을 받을지 예상할 수 없기에 이들국가로부터 자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최신의 탄도탄 요격미사일을 구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미국은 다시금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자국을 보호하고 또 자국을 위협하는 세력을 견제내지 제거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드러낸것이다.

군사주의는 첨단 무기와 물리적 파괴성에 못지않게 지구촌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것은 세계인의 사고를 호전적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군사주의적 사고에 지배받는 한 나라들은 끝없이 군비를 확충하려 하고 신무기 개발을 위한 경쟁을 포기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특별히 기독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군사주의는 철저히 비기독교적이고 적그리스도적인 사고로서 교회의 사명에 정면으로 대적하는 것임을 깨달아야한다. 미국의 신학자인 클락 채프만(Clarke Chapman)은 군사주의를 하나의의 우상이요 이단 종교로 규정하면서 이에 그리스도인들은 이를 대적해야 할 것을 요구한 바 있다.

왜냐하면 군사주의는 무기가 자신의 안전을 보장해 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게 해 줄 것이라는 생각을 낳게 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군사력과 무기를 앉히는 무기우상화를 조장하기 때문이다.

미국과 부시 대통령은 하나님의 축복과 보호하심을 외치면서도 실제로는 기독교 신앙과 정반대되는 군사력에 자신의 안보를 담보하려는 전형적인 군사주의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엄청난 경제력을 가지고서 신무기를 개발하고 이 군사력의 우위를 통하여 자신의 방위뿐만 아니라 또 세계 주도권을 확대하려고 하는 미국의 이러한 모습은 기독교신앙과는 배치되는 무신(武神)숭배 마음을 조장한다. 이런 군사주의의 사고가 팽배해 지게 되면 세상은 평화가 사라지고 분쟁과 전쟁만이 늘어날 뿐이다.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는 이 시대에 도도히 흐르는 힘의 논리와 결탁된 군사주의를 대적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 세상의 평화와 자유는 결코 힘으로 달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과 평화의 복음을 듣고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귀한 사람이라는 믿음이 지배하게 될 때 달성될 수 있는 것이다.



복음주의 신앙의 호전성 논란



미국의 침공으로 시작된 이 전쟁을 멀리 한국에서 지켜보는 한국교회 특히 보수적 장로교회는 무엇을 생각하고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할 것인가? 일부 저널리스트들과 진보적 신학자들은 부시가 가진 모든 현실을 선과 악 이분법적으로 보게 하는 근본주의적 기독교 신앙이 이런 전쟁을 부추기게 되었다고 분석하면서, 복음주의적 신앙과 아울러 교단을 간접적으로 비난한 바 있다. 복음주의 신학전통을 가진 우리 교회는 이들의 비판이 복음적 교단에 대한 공정하지 못한 비판이라는 것을 먼저 알 필요가 있다. 그것은 분명한 신학적 전통을 가진 복음주의 교회들은 이분법적인 구도로 순진하게 현상을 나누어 분석하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미국의 가장 보수적인 남침례교 조차 이 전쟁을 지지하는 공식적인 입장을 발표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비난을 우리는 가슴 아프게 새길 필요가 있는 것은 제리 포웰(Jerry Falwell)로 대표되는 신우파의 근본주의적 신앙을 가진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에 대한 미국의 종교적 도덕적인 사명을 강조하면서 공산세력으로부터 세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미국은 압도적인 군사력을 유지해야한다는 주장을 해왔고 실제로 공화당의 주장을 지지해 왔었기 때문이다. 이 면에서 일부의 보수적 기독교회는 어느 정도의 원인 제공을 한 셈이다.

한국의 보수 장로교회도 아주 오랫동안 사회문제에 대해 견해를 밝히지 않음으로 묵시적으로 정부의 견해를 지지해주는 관행을 보여 왔다. 이제 한국 장로교회는 경우에 따라 사회적인 이슈문제에 교단적인 차원에서 교단의 견해를 밝혀 내적으로는 성도들에게 지침을 주고 외적으로는 정치인들에게 여론을 전달할 필요가 있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분명한 개혁주의의 신앙노선에 서 있다. 정당화될 수 있는 전쟁이 있음을 인정하지만 어떤 경우에서도 전쟁은 일어나지 않아야 함을 주장하고 관용과 대화 그리고 평화적인 방법을 통해 분쟁을 종식해야 함을 개혁주의 신학전통은 강조해 왔다. 이런 전통을 한국 교회는 한국 사회에서 제대로 살려 나가야 할 책임이 있다.



평화를 위한 교회의 행동과 교육



기독교복음의 핵심은 평화이다(엡 6:15, 23). 그리스도를 평화의 왕(사 9:6;엡 2:14) 으로, 하나님을 평(강)화의 하나님(롬 15:33; 16:20; 고후 13:11; 빌4:9; 살전 5:23; 히 13:20)으로 성경은 묘사한다.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에게 화평케 하는 자가 되어야 함을 가르친다(마 5:19). 평화의 왕국의 도래를 꿈꾸며 이 세상에서 평화를 조성하며 살아가야 할 한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전쟁의 참혹함을 목도하면서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을 몇 가지 제안하고자 한다.

첫째, 교회는 평화의 공동체로서 평화는 전쟁이 아니라 사랑과 관용과 상호 존중에 의해 실현되는 것임을 이 세상에 증거하고 교육해야 한다. 화평을 조성할 때 (정)의의 열매를 맺는 것임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고양해야 한다(야 3:18). 이 일을 위해 교회는 평화조성(peacemaking)의 의미에 대한 신학적 입장과 윤리적 지침을 교단차원에서 만들어 나갈 필요가 있다.

둘째, 교회는 이런 중요한 문제에 있어 정부와 사회에 대해 의사 표현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신자 개인의 차원에서도 평화를 위한 다양한 의사 표시를 할 수 있다. 정치인들과 지도자들에게 개인의 의견을 밝히거나 또는 시위에 참가해서 자신의 의견을 나타내는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

셋째, 무엇보다 교회와 성도들은 이 전쟁이 속히 종식되고 평화가 찾아오도록 기도해야 한다. 사도바울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하기를 권고하면서 그 이유를 평화롭게 살기 위해서라말하고 있다(딤전 2:1-2). 그리스도인들은 부시와 후세인 그리고 양국 지도자들의 마음이 변하여 속히 평화가 임하도록 기도해야 하겠다. 성도들로 하여금 특정한 시간을 정해서 집중하여 기도하도록 하는 것도 중요한 방안이 될 것이다.

김은홍 기자 등록일 2003-03-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