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신앙의 출발과 과정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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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신앙의 출발과 과정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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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심 (신앙출발의 모습)

신성학교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 가장 중요한 사건을 들라면 물론 그의 회심일 것이다. 신성학교는 미션스쿨로서 학생들과 교사들을 위한 채플이 매일 있었다. 박윤선은 그 장소가 8호실이라는 것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매 채플 시간마다 박윤선은 "예수를 잘 믿어 보려고" 힘썼다 한다. 그는 설교에 특히 주의를 기울였는데 그가 기억하는 한 설교가 있어 이를 소개한다.

지금도 잊어버릴 수 없는 그때의 설교가 한마디 생각난다. 박평흠 선생님이 설교하는데 사도행정 3장 1~10절까지 읽고 설교한 내용 가운데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고 한 말씀(행 3:6)을 풀이하기를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곧 베드로는 참으로 천국만 생각하고 이 세상은모르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본문 말씀의 순서로 봐서 은과 금이라고 하는 것은 거꾸로 된 것이다. 보통으로는 금과 은이라고 하는데 베드로는 여기서 은과 금이라고 했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는 돈에 대하여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다."라고 하였다. 나는 그 때 그런 해석이 본문에 합당치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 해석은 너무 억해라고 생각하였다. 이것을 보면 나는 그때까지도 성경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 많았던 사람이었으나 성경 해석에 대하여 주의 깊이 생각을 기울였던 것으로 느껴진다.

박윤선이 이 사건을 60년이 지나서도 기억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보통의 경우 그가 사람을 그 이름을 들어서 비판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특히 스승일 겨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이 사건이 그에게 꽤 깊은 인상을 남겼다고 추측된다.

이상스럽게도 박윤선은 자신의 회심에 대하여 자세한 이야기를 남기지 않았다. 단지 다음과 같은 간단한 기록을 통하여 그가 믿음을 가지게 된 과정을 추론할 수 있을 뿐이다.

신성학교 재학 시절에 잊지 못할 한 가지 일은 한 가지 일은 학교 가까이 흐르고 있는 시냇가로 걸어가면서 하나님께 대한 의심이 생기게 되었다.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즉시로 나의 마음 깊이에서 솟아오르는 생각은 "네 손에 들고 있는 성경이 하나님이 계신 증거"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때 놀랄 정도로 하나님을 확신하게 되었고 의심은 사라졌다. 그 후 나는 하나님을 의심한 적이 전혀 없고 성경을 견고히 붙잡고 사랑가는 신앙생활에 만족했다. 하나님은 성경이 말해 주는 하나님이라는 것이 칼빈주의 신앙이라는 사실, 이것은 후에 신학을 배운 후에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니 자연계의 하나님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보다는 특별계시 곧 성경이 말해 주는 하나님이라고 할 때 누구에게나 흔들림이 없는 신앙이 생겨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위의 인용문은 회심 이후의 체험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일 이전에 그는 이미 "신앙운동"에 열정적으로 참여하고 있었다. 특히 그와 그 학교의 학우들은 전도단을 조직하여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박윤선의 회고에 따르면 그의 회심은 신성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 극적인 체험없이 일어났다. 그는 "깨닫고 믿은 때는 그 후 중학교와 전문학교 시절이었다"고 말한다. 이 간단한 말 속에서 우리는 적어도 그의 신앙의 배아기의 모습을 들여다 볼수 있다. 그것은 처음부터 성경을 진실한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으로 믿고 의지하는 데에 근거한 신앙이었다. 우리는 그의 이러한 신앙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하여 지속되며, 그것이 후일의 칼빈주의에 입각한 신학 수업과 주석 작업에 의해 세련되어짐을 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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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 경험기 신앙 첫 훈련기

박윤선이 숭실전문에 들어간 것은 1927년 4월이었고, 이 때의 교장은 마쳇(Samuel A. Moffett)이었다. <경건과 학문> 지에서 박윤선 목사 사역 50주년을 기념하여 낸 논문집(1987)에서는 박윤선이 1931년 3월 "영어과"를 졸업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숭실전문의 공식 예사에서는 이 당시에 영어과는 없었다. 1931년에 농과가 3년제의 커리큘럼을 가지고 생겨났고 그 전에는 단 한 가지 학과, 즉 문과밖에는 없었다.

박윤선의 전문학교 시절 가장 큰 문제는 역시 가난이었다. 그의 자서전에서 이 당시를 이렇게 요약한다. "이 4년 동안은 나의 생활이란 것은 역시 고학생의 신분이었다." 대부분의 식사는 보리밥에 고추장을 곁들인 것이 전부였다. 그는 돈을 벌기 위하여 영심환이라는 중국의약을 팔러 다니기도 하였다. 그는 그의 아내도 부양하고 공부시켜야 했기에 그 경제적 곤궁은 더 하였다. 이 당시에 학생들이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학교에 온 지 몇 달 뒤에 좋은 기회가 왔다. 이 학교의 학장이었던 마우리(E. M. Mowry) 선교사가 박윤선에게 특별한 관심을 기울인 것이었다. 이 선교사는 3.1운동 때에 학생들을 숨겨주었다가 일경에게 체포되기도 하였다. 박윤선은 마우리에 관하여 이렇게 말한다. "그는 내가 고학생이라는 것을 알고는 나에 대하여 특별히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는 때마다 나의 영어 발음을 고쳐주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그 선교사로부터 영어를 배웠다고 해도 전혀 과장이 아닙니다."

그가 영어 실력을 향상시킨 것은 선교사 마우리가 주선해 준 영어교사의 일 때문이었다. 평양시의 서기산 아래 있는 호텔에서 근무하는 종업원들에게 영어 회화를 가르쳐 주는 일이었다. 첫날 그는 자신이 가르쳐야 하는 종업원들이 자기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아마도 그는 "이 때까지 책으로 배웠는데 그들은 매일 영국과 미국에서 오는 손님들과 직접 회화를 하던 처지"였기 대문이었으리라. 그는 이 때문에 많이 근심하였으나 이 두려움을 기도로 극복하였다.

.......밤마다 (깊은 밤중에) 서문밖교회로 가서 고요한 방에 들어가 이 문제로 기도를 렸다. 이 일에서도 나는 하나님의 이적을 체험하였다. 내가 철도호텔에서(일본말로 야니기야 호텔) 종업원들을 가르칠 때마다 이상하게도 말이 잘 되어지고 영어 단어와 낱말도 잘 생각이 나서 자연스럽게 그들을 지도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겼다. 이렇게 5년 동안 나 자신이 우선 연습하면서 영어를 가르치는 좋은 직장을 가졌던 것이다. .....월급을 받아서 선천 보성학교에서 공부하고 있었던 아내의 학비와 생활비도 감당했다. 내 아내도 그 학교에서 잘 배우면서 지식이 성장하게 되었으면 4년간 공부하고 무사히 졸업했다.

그가 호텔에서 받은 돈은 다시 중등학교 선생의 월급에 해당하는 많은 액수였다. 다른 고학생들은 겨우 10원을 벌 수 있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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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신앙의 개화

박윤선이 진정으로 기독교인다운 삶을 꽃피운 것은 숭실전문 때였다. 후일 "기도의 사람"으로 알려지게 된 윤선은 이 때부터 그이 친구 몇 사람(이유택.송여칠.김철훈.박기환.방지일.김진홍 등)과 함께 기도에 열심을 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대개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에서 한 시간쯤 떨어진 모란봉까지 걸어갔다. 거기에서 한번에 두 세 시간씩 기도하였다. 친구들은 그들에게 "조기 부대"라는 별칭을 주었다. 박윤선은 이 시절을 회고하곤 하였다. "나는 정말 기도에 빠져 있었다. 내가 입을 열기만 하면 기도가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는데, 그 기도는 모두 능력으로 충만하였다." 박윤선은 숭실에서 이런 좋은 기도의 동역자들을 만난 것을 항상 소중히 생각하였다. 그들 가운데 몇은 해방 후 공산군에게 순교를 당하였다.

숭실전문 이후 박윤선과 가장 친한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인 방지열 목사는 그를 "간사함이 없는" 사람이며 인간적 지혜가 가득한 야곱과 대조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야곱형이 있다. 브니엘에서의 기도의 씨름을 하던 야곱형을 가진 것이다. 기도에 파고드는 그 성격은 야곱형이라 할 만하다. ....주님께서는 언제 박목사님을 아셔서 참 이스라엘로 날인하셨을까? 그가 항상 엎드려 있는 것을 보셨을 것이다. 숭실대학 시절에는 새벽마다 교실에 가서 엎드려 살았다. 특별한 기간에는 유단 한 조각을 준비했고 또 미숫가루도 병에 담아 가지고 산으로 간다. 유단이란 천에다가 기름을 먹인 것으로 오늘날에는 거의 이용되지 않고 있다. 당시엔 산이나 들에서 오랜시간 계속 기도하려면 습기가 차 올라 견디기가 불편하므로 이것을 펴놓고 그 위에 앉아 기도할 수 있는 일종의 방석이었다. 오늘날에는 다른 좋은 것이 구하기도 쉽고 많이 있으나 그 때에는 고작 이 유단 한 조각 준비하는 것이 가장 좋게 생각되었고 시장할 때엔 가지고 간 미숫가루를 물에 타서 마셨다. 평양 모란봉 위 가재란 곳이 있다. 주님은 그곳에 꿇어 엎드린 박윤선을 보셨을 것이다.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는 60대가 될 때까지도 이 습관을 계속 유지하여 아무리 바쁜 와중에서도 매일 새벽 4시부터 6시까지 두 시간을 기도하였다. 심지어 죽기 직전까지도 매일 두 시간을 기도하였다 한다. 박윤선의 기도생활은 그의 주변에 있던 친구들에게만 깊은 인상을 준 것은 아니었다.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교수들도 "이곳이 박윤선이 기도하던 곳"이라고 말하며 그의 기도하던 모습을 기억한다.

박윤선은 학생활동에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숭실전문에서 가장 잘 알려진 학생활동은 방학중에 두 세 달 동안을 여러 곳을 순회하면서 전도하는 전도단 활동이다. 이 사역은 1907년 대부흥운동의 결과로 1909년부터 시작되었다. 전도단의 숫자와 활동 방법은 해마다 달랐으나, 보통 적게는 세 명에서 많이는 스무 명 정도의 학생들로 한 팀이 구성되고, 해마다 여러 팀이 전국을 순회하였다. 비용은 학생들이 충당하였는데 이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모금을 하기도 하고 음악회를 열기도 하였다. 전도단의 일정은 ① 새벽기도회 ② 성경공부 ③ 노방전도 ④ 저녁의 대중 전도집회로 이루어졌다. 이 전도단 활동은 숭실전문이 신사참배에 순응하지 않음으로 문을 닫게 된 1937년까지 계속되었다. 3.1운동 후 1920년부터의 전도단 활동은 개인의 구원에만 국한되지 않고 민족주의를 고취시켜 독립을 이루려는 목표도 가지게 되었다. 이 모든 일은 한국 장로교회의 도움으로 이루어질 수 있었음은 물론이다. 숭실은 결국 장로교 미션스쿨이었다.

"방학 대마다" 전도단 활동에 주력하였다는 그의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는 예닐곱 차례 전도여행을 한 것이 된다. 그의 자서전에서는 이 가운데 세 도시 정도를 언급한다. 가장 인산에 남았던 것은 충청도의 괴산이란 지방을 방문하였을 때였다. 그는 그 집회를 위하여 하루 종일 금식하였는데, 이를 지켜본 괴산 교회 성도들은"예수는 저렇게 믿어야 하는가" 하는 의문과 자성이 일어났었다고 한다. 또 한 번은 그의 고향으로 전도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다. 그는 정확한 연대를 기록하지 않고 있으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이것은 1929년 7월 1일부터 19일까지의 여행인 것으로 되어 있다. 이 때 두 팀으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한 팀은 평북 철산으로 또 한 팀은 황해도 장연으로 갔다. 박윤선은 평북팀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는 그의 고향인 장평리에도 들렀는데 거기에서 환대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