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한상동목사님과 함께 박사 학위 [한국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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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한상동목사님과 함께 박사 학위 [한국교회사]


분류: 교회사- 한국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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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신학박사(Doctor of Divinity)


1954년 화란에서 돌아온 후 4개월쯤 지난 7월 29일에 박윤선은 미국에 갈 기회가 생겼다. 그는 한상동과 박윤선을 포함한 고려파 네 사람의 목사가 국제기독교연합회(ICCC) 제 2차 세계대회에 참가하도록 초청을 받은 것이다. 이 회의는 필라델피아에서 8월 3일부터 18일에 걸쳐서 열렸다. 한국교회는 ICCC와 그 지도자인 칼 매킨타이어가 극단적 분리주의적 성향을 띠고 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처음에는 이 기구가 한국의 보수주의자들 사이에서 매우 호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이유는 그들의 타협을 모르는 보수적인 신학때문이기도 하였거니와 그들이 내거는 극우 반공주의가 전후 한국 상황에 들어맞기도 하였던 것이다.

매킨타이어 그룹이 보낸 선교사들이 고려파의 창립 시기부터 이들을 도왔다. 1960년에는 매킨타이어 그룹이 대한예수교장로회 승동측에 신학교 건물을 지으라고 크리스마스 헌금으로 10만 불을 보냈다. 이 ICCC를 1950년 한국교회에 소개한 사람이 바로 박윤선이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대항할 수 있는 기구로서 넘치는 찬사와 더불어 소개하였다. 전통적 복음신학이라는 진리의 깃발을 드높이기 위하여 만들어졌으며 이미 26개국에서 61개 교단이 참여하였다 한다. 회의를 마친 고려파 대표들은 매킨타이어가 이끄는 성경장로교회(Vible Presbyterian Church)와 정통장로교회(Orthodox presbyterian Church)를 방문하여 연설을 하였다. 박윤선은 개혁교회(Christian Reformed church)에서도 연설을 하였다. 당시 정통장로교회(OPC) 선교위원회 총무로 있던 갈브레이드는 고려파 대표들이 "거기(성경장로교회)에서 두드러지게 많은 근본주의자들에게 삼키울까" 두렵다고 걱정하였다.

고려파 목사들의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그 해 9월 성경장로교회의 인신학교인 훼이스(Faith)신학교가 박윤선 목사와 한상동 목사에게 명예신학박사를 수여한 것이었다. 한상동 목사에게 이 학위가 주어진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그 자신은 이런 영예를 받을 만하지 않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내가 이 학위를 받아 한국에 돌아가면 교회가 비웃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를 받을 수밖에 없었는데 칼 매킨타이어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라고 강요하였기 때문이라고 썼다. 후일 ICCC와 매킨타이어가 한국에서 어떠한 일을 하였는가를 생각할 때 이학위 수여가 한국교회에 대한 원조를 강화하려 하는 목적으로 취하여진 정치적 제스처가 아닌가 의심해 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제스처가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다. 1961년 합동측 총회가 ICCC와 관계를 단절할 때 한상동 목사가 총회장이었으나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어떠한 영향력도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고려파 목사들은 10월 중순 귀국하였다. 그들은 미국교회가 한국교회의 선교를 위하여 들이는 시간과 노력에 대단히 감명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헌트는 이 여행이 고려파와 정통장로교회의 이해를 증진시켜 준 가치 있는 여행이었다고 평한다. 박윤선은 이 학위를 받고나서 자신의 이름 앞에 "신학박사"라는 직함을 붙인다. 엄밀한 의미에서는 신학박사는 Doctor of Theology이지만, 이전에도 남궁혁 박사가 자신의 Doctor of Dovinity 학위를 신학박사라고 번역하였다. 반면 박형룡은 Ph. D. 학위를 받아서 자신을 철학박사라고 소개하였다.

1954년 박윤선이 미국에 가기 전에 펴낸 로마서 주석은 "신학사 박윤선"를 붙이고 있고 영어로는 "Rev. Yune Sun Park. Th. M."이라고 하였다. 그가 귀국하여 펴낸 첫 주석인 요한계시록 재판에서는 "신학박사" 고 부르고 영어로 "Rev. Yune Sun Park. Th. M. ;D.D." 고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