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복제 인간에 대한 두 관점 (신학자와 과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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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 복제 인간에 대한 두 관점 (신학자와 과학자)


신학자와 자연과학자가 보는 두 가지 관점 (up date...2000/10/05 조선일보)

생명의 영속인가, 영혼의 말살인가

자연과학자의 입장
"영혼은 결코 복제될 수 없다"
생명체는 누구나 한계성 생명을 지닌다. 최소한 지구에 사는 생명체는 다 그렇다. 그래서 종교에서는 대체로 우리의 생명은 한계성을 지니지만 믿음과 의식을 통해 영원불멸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가르친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우리가 우리를 창조하신 영원불멸의 존재를 믿고 그를 거역하여 지은 원죄(原罪)를 인정하면 내세에 이르러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불교에서는 생명이 한계성을 지니되 그것을 담아줄 그릇, 즉 육체를 바꿔가며 윤회(輪回)한다고 가르친다. 한계성을 전제로 한 생명의 개념이지만 영생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이 한계성을 지닌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개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의 얘기다. 생명체는 누구나 어김없이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의 형질들은 유전자를 통해 길이 자손 대대로 전달될 수 있다. 그래서 ‘이기적(리기적)인 유전자’의 저자인 옥스포드 대학 진화생물학자 도킨스는 유전자 즉 DNA를 ‘불멸의 나선(나선)’이라 부르고 생명체는 그 불멸의 나선을 복제하기 위해 태어난 ‘생존기계’에 불과하다고 했다.

하버드 대학 생물학자 윌슨도 이 관계를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체에 불과하다”라고 비유했다. 개체의 관점에서 본 생명은 한계성을 지니지만 유전자의 눈높이에서 바라본 생명은 영속성을 지닌다.

DNA의 기본구조는 현재까지 확인된 모든 생명체에서 동일하다. 다윈이 주장한대로 오늘날 이처럼 다양한 지구상의 모든 생물들은 모두 태초에 우연히 생성된 그 어느 성공적인 복제자 하나로부터 분화되어 나왔기 때문이다. 비록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에는 제가끔 보다 효율적인 복제를 위하여 다른 생존기계들 안에 들어앉아 있지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모두 하나의 조상을 모시는 한 집안 식구들이다.

이처럼 생명은 무수히 많은 가지를 뻗었으나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연속성을 지닌다. 지구라는 이 행성에서 펼쳐지고 있는 생명의 역사는 결국 DNA라는 한 독특한 화학물질의 일대기(일대기)에 지나지 않는다.

인간복제가 눈 앞의 현실로 다가왔다. 순전히 기술적인 면만을 생각한다면 앞으로 그리 머지 않은 장래에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그래서 그런지 종교계를 비롯한 사회 여러 구석에서 금방이라도 히틀러가 한꺼번에 여러 명 나와 설칠까 걱정하는 목소리가 높다. 당장 자연의 질서가 무너져 내릴 듯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이해해야 할 사실이 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유전자 복제이지 생명체 복제가 아니라는 점이다. 아무리 일란성 쌍둥이라도 형태나 행동 모든 면이 완벽하게 똑같은 것은 아니다. 분명히 완벽하게 똑같은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지만 그들이 자란 환경이 완벽하게 같을 수 없기 때문이다.

비록 같은 자궁 내에 있었기 때문에 초기 발생단계에서는 그리 괄목할만한 차이가 없었다 하더라도 특히 신경계 발달에 엄청나게 중요한 생후 몇 년은 물론, 성장기 내내 결코 늘 같은 환경에서 같은 자극을 받고 클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조금은 다르게 변한다.

따라서 만일 지금 우리가 히틀러를 복제한다고 해도 원조(원조) 히틀러가 자라던 시절과 지금은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이기 때문에 복제 히틀러가 그런 흉악한 인물로 성장할 가능성은 극히 적다. 마찬가지로 테레사 수녀를 복제한다 해도 그 복제 테레사들이 모두 남을 위해 평생을 바치지는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늘 그래 왔듯이 DNA는 어떤 방법으로든 계속 복제의 길을 걸을 것이다. 그러나 영혼은 절대 복제되지 않는다. 자연과학자인 나는 영혼도 결국 물질의 표현일 수밖에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같은 DNA를 지녔다고 영혼도 똑같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영혼이란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DNA위에 세상을 살며 터득한 온갖 지식들이 한데 어울려 엮어진 산물이기 때문이다.

인간복제가 현실로 우리 앞에 설 것은 기정사실이다. 무지에 바탕을 둔 두려움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으로 대처해야 한다. 복제된 인간과 그렇지 않은 인간들 간의 화합과 평등을 걱정하는 것이 오히려 현명할 것이다.
( 최재천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 )


종교학자의 입장

"생명복제는 영혼 말살하는 반(反)윤리"
인간복제가 지니는 신학적 논란은 크게 말해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는 인간복제가 신(신)의 창조 영역을 훼손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인간복제가 인간의 고유한 영혼을 위협한다는 것이다. 신학이라는 학문은 신과 인간의 관계를 정립하려는 학문인데, 바로 그 가장 중요한 두 주제인 신과 인간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인간복제의 문제야말로 오늘날 신학자들이 당면하는 큰 과제 중의 하나가 아닐 수 없다.

제한된 지면이라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부담이 있기는 하지만 인간복제 문제가 지니는 이 두 가지 신학적 논쟁점을 간단히 검토해보고자 한다.

첫째, 창조는 신의 고유한 영역인데 인간이 절대자의 영역을 침범할 수 없기 때문에 인간복제는 금지되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이른바 ‘신의 역할을 대신하기’(playing God)라는 개념은 조금 더 깊이 음미할 필요가 있다. 인간이 절대자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다는 생각은 물론 불경(불경)하고 위험천만한 것이다.

성서에는 인간의 이러한 교만이 가져온 비참한 결과에 대한 수많은 예증들이 나타난다. 그러나 성서는 또한 신이 인간을 신뢰하기에 많은 역할을 맡겨 주었다고 말하고 있다. 신이 태초에 우주를 창조하고 나서 인간에게 처음으로 내린 명령이 다름 아닌 “생육(생육)하고 번성하며 이 땅을 다스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 구절은 후에 지구환경을 오염시키는 주범이었다고 공격받기도 하였지만 인간에 대한 신의 신뢰와 위임을 나타내고 있음을 부정할 길 없다. 인간은 태초부터 신의 역할을 대신하도록 축복받은 ‘청지기’였다는 것이다.

인간복제의 문제에 있어서도 신학자들은 ‘신의 역할을 대신’하는 것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이제 ‘청지기’의 사명을 심각하게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보여진다. 나날이 발전하는 생명공학의 테크놀로지를 부정할 것만이 아니라 긍정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신학적 가능성도 살펴봐야 할 것이다.

여기서 인간복제에 관한 신학적 논란의 역사를 잠시 살펴보는 것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지난 1960년대부터 생명윤리 논의는 대략 네 단계를 거쳐왔다고 보여진다. 첫째는 60년대 피임에 관한 논란이었고, 둘째는 1978년 시험관 베이비의 출생을 계기로 불거진 대리모(대리모) 논쟁이었으며, 셋째는 93년 배아(배아)세포를 다중(다중) 분열시키는데 성공하면서 빚어진 반응들이었고, 마지막으로 2년 전 복제양 돌리의 출생으로 야기된 논란이다.

흥미로운 점은 지난 60년대 중반의 피임에 대한 논란 때부터 언제나 “신의 역할을 흉내낼 수 없다”는 말이 단골처럼 등장해 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초기의 충격이 가라앉고서 피임 및 시험관 베이비 등에 대한 거부감은 어느 정도 진화되었고 오히려 사항에 따라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현실이다. 피임에 대한 경고와 반성을 통해 피임방법을 남용하지 않고 인간의 존엄과 행복을 위해 수용할 수 있어왔다고 본다면, 이제 인간복제 문제도 철저한 비판과 검증을 거쳐 인간의 가치를 드높일 수 있는 방향으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신학자에게 주어진 것이다.

둘째, 인간복제는 인간의 개성과 영혼을 말살하는 반(반)윤리적 행위이기 때문에 금지되지 않으면 안된다고들 말한다. 사실 이 논제는 첫 번째 사항보다 훨씬 복잡하고 중요할 수도 있다. 창조주 하나님의 영역에 대한 훼손이 유독 기독교 신학에서만 심각한 문제가 되는데 비해 인간의 동일성을 왜곡하는 위험에 관해서는 철학자, 심리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첨예한 위기의식을 느끼기 때문이다.

복제인간의 출현은 철학에서 말하는 자아와 심리학에서 말하는 의식, 불교에서 말하는 업보(업보) 등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하게 되리라고 보여진다. 그렇다면 전통적으로 인간의 고유한 가치로서 영혼을 강조해 왔던 신학자들은 과연 복제인간의 영혼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릴 수 있을 것인가? 이에 대한 여러 가지 다양한 의견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복제인간의 영혼을 인정하리라고 여겨진다. 태어난 모든 인간은 ‘신의 형상’(imago dei)으로서의 영혼을 선물받았다는 큰 원칙으로부터 유독 복제인간만 예외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잠깐 영혼에 관한 현대 신학자들의 견해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영혼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이며 너무나 독특하기 때문에 인간 육체와도 구분되고 육신(육신)의 사멸(사멸) 이후에도 영속하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져 왔다. 그러나 신학자들은 오래 전부터 이러한 영혼관이 성서에 대한 오해에서 기인한다고 지적해 왔다. 성서는 결코 육체와 분리되어 따로 존재하는 실체로서의 영혼을 말하지 않고, 육체와 정신이 하나가 된 생명 전체를 가리켜 영혼이라고 일컫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현대신학자들은 육체와의 분리를 암시하는 이분법적 용어인 영혼(soul)보다는 차라리 정신(spirit) 혹은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을 선호하기도 한다.

물론 중요한 것은 어떤 용어를 사용하느냐는 문제가 아니라 새로운 용어를 통해 강조하려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영혼에 대한 논란은 주로 그 기원에 초점을 맞춰, 인간이 배태될 때 만들어진다는 설과 신이 새롭게 창조한다는 이론이 대립되어 왔다. 그러나 현대 신학자들은 영혼의 기원에 관심을 두기보다 오히려 영혼의 보존과 완성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진다. 인간 영혼이 신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 졌기 때문에 더욱 신을 닮으려고 노력해야만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웃과의 관계, 신과의 관계를 통하여 영혼은 성장하고 완성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른바 ‘관계성’으로서의 영혼관을 부각시키게 된다.

인간복제에 관한 신학자들의 염려는 바로 이 점에 놓여있다고 생각된다. 즉 복제된 인간이 영혼을 부여받게 될 것은 분명하지만 과연 인간으로서 타인 및 신과의 참다운 관계를 유지하는 축복받은 영혼이 될 수 있겠냐는 우려이다. 만약 상업용으로나 장기(장기) 공급용으로 복제인간을 대량 생산한다면 이는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고유한 권리인 관계성으로서의 영혼을 말살하는 범죄가 될 것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복제의 테크놀로지를 통하여 잃어버린 인간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경우가 있다면 이는 신의 형상으로서의 영혼을 회복시키는 미덕이 될 수 있을 것이다.
( 배국원 침례신학대 종교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