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선, 대한신학교, 대신 교단 -
1959년에 공회는 고신에서 제명 되었다. 김치선은 고신과 같은 신앙이나 계통이 달랐다. 백영희 김현봉은 김치선의 부탁으로 대한신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 공회는 1959년까지는 고려신학교에 학생을 보냈으나 제명 된 이후에는 박윤선의 서울 '개혁신학교'에 학생을 보냈고 박윤선이 개혁신학교를 중단하고 합동 교단에 가입한 이후 공회는 김치선의 대한신학교에 학생을 보내면서 1976년 자체 양성원을 시작할 때까지 신학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대한신학교를 통해 안수를 받았다.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EA%B9%80%EC%B9%98%EC%84%A0
김치선
최근 수정 시각: 2024-02-12
분류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장로회 목사
대한민국의 교수 인문과학 교수
사립대학 총장، 안양대학교
함흥시 출신 인물
1899년 출생 1968년 사망
연세대학교 출신
건국훈장 애족장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치선 金致善 | Kim Chi Sun 이명 김억만석(金億萬石)
호 고봉(高峯)
출생 1899년[1] 음력 8월 10일
함경남도 함흥군 동명면 서호리 서호진 (現 함경남도 함흥시 흥남구역 서호일동·서호이동)
국적 대한민국
사망 1968년 2월 24일 (향년 68세)
직업 목사
학력 함흥 영생중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 졸업)
평양신학교 (중퇴)
고베중앙신학교 (졸업)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학 / 석사)
달라스 신학교 (구약학 연구과 / 박사[5])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주요 신력
3. 생애
3.1. 유년기와 학창시절
3.2. 유학 및 전도 활동
3.3. 국내 전도 및 대한신학교 설립
3.4.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설립
4. 이모저모
4.1. 김구와의 인연
4.2. 손양원 목사와의 인연
4.3. 박형룡 목사와의 인연
4.4. 박태선과의 인연
5. 여담
6. 같이 보기
"이만팔천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6]
-그가 전개했던 우물파기운동의 슬로건-
"내가 한국에서 얻은 유일한 소득은 김치선을 얻은 것이다."
- 영재형(Luther Lisger Young) 선교사 -[7]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목사. 3.1 운동에 참여해 투옥된 공적을 인정받아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영실 박사와 함께 안양대학교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고 안양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신학교의 설립자이자 2대 교장[8]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를 세운 목사이자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한국의 예레미야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삼백만 전도 운동을 펼친 것으로 개신교계에서 유명하다.
2. 주요 신력[9][편집]
고베중앙교회 담임목사
도쿄 신주쿠중앙교회 담임목사
도쿄 메구로교회 개척 및 담임목사
남대문교회 담임목사
장로교 야간신학교 설립
창동교회 개척 및 담임목사
3. 생애[편집]
3.1. 유년기와 학창시절[편집]
1899년 음력 8월 10일 함경남도 함흥군 동명면 서호리 서호진(現 함흥시 흥남구역 서호일동·서호이동)에서 아버지 김영준과 어머니 최현숙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영준은 본래 선박 40척을 가진 부호였지만 태풍으로 재산을 할아버지를 잃어 가족 모두가 화전민으로 전락했다. 이에 가족들은 모두 장진군 신남면[10] 연직리(現 장진군 늪직리)로 이주해 이곳에 본적을 옮겼으나#، 김치선은 서당 선생 김응보가 만류하여 고향 서호리에 남아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캐나다 장로회 소속 루터 영(Luther Lisgar Young، 한국명 영재형榮在馨، ? ~ 1950. 2) 선교사[11]가 서호진을 방문하였다. 이때 김응보의 추천으로 김치선은 1916년부터 함흥에서 영재형 선교사에게 길러지며 공부할 수 있었고، 이후 김치선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영재형 선교사는 함흥군 함흥면 신창리(現 함흥시 서문동)에 집을 마련해 김치선 가족이 함흥에서 모여 살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었다. 그렇게 김치선은 영재형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던 영생중학교에 입학했다.
영생중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함흥군 함흥면에서 이근재(李根裁)의 권유로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하기로 했고، 이튿날인 3월 2일에 조영신(趙永信)이 원산부에서 가지고 온 기미독립선언서 3천여 매를 동지들과 함께 인쇄하고، 동시에 태극기 18매를 제작했다. 다음날인 3월 3일에는 함흥면 풍양리·풍서리(現 함흥시 삼일동)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와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배포한 뒤 군중 수백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김치선(1899)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그 뒤 체포된 김치선은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는 이에 상고했으나 9월 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선고 당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결국 옥고를 치렀다.
그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며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으며، 1920년 4월 28일 특별사면으로 출옥했다. 그 뒤 영재형 선교사의 지원 아래 영생중학교에 복학해 23세 되던 1922년 3월 13일 졸업했고، 연희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23년، 캐나다계 한국인이었던 영재형 선교사가 영생중학교 교장에 재직한다는 것에 지역민들이 불만을 품고 영생중학교에 불을 질러[12] 김치선은 사망 위기에 놓인 영재형 선교사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겨우 구했다. 은혜를 보답받은 영재형 선교사는 매우 감격하며 김치선을 양자로 삼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13]
1927년 3월 7일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가 되려고 했으나، 재일교포들을 전도하려고 했던 영재형 선교사의 호출을 받아 평양신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중앙신학교로 편입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을 시작하고، 31세 되던 1930년 2월 23일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하며 목사 안수를 받았다.
3.2. 유학 및 전도 활동[편집]
이후 영재형 선교사가 주선하여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수학하며 1933년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5년에는 텍사스 댈러스 신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귀국해 고향 서호진에서 목회 활동에 종사했으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심해지자 1937년 8월 가족과 함께 영재형 선교사가 살고 있는 일본 고베시로 떠났다.[14] 정착 후 고베중앙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활동을 시작하였고، 민족주의적인 설교로 당시 재일교포들과 불신자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목사와 교인 모두 교회에서 한복을 입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도 순회목사 자격으로 설교를 자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이 시행되고 나서 사상범으로 구속되고، 일본어로만 설교하라고 강요받았다. 또، 도쿄 신주쿠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된 이후 그의 열광적인 인기를 질투해서 당회장직을 탈취하려는 다른 목사들이 많았고، 할 수 없이 개척해 두었던 메구로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되어 목회를 하였다. 또한، 영재형 선교사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후 일본에게 강제 출국조치되었다.
3.3. 국내 전도 및 대한신학교 설립[편집]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할 징조가 보이자 해방을 직감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전도 활동을 시작한다.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되어 제6대 담임목사로 위임되었고، 일제가 패망하여 1945년 광복이 되자 정부의 핍박이라는 장애물이 사라졌기에 전도에 모든 힘을 매진한다. 당시 한반도 인구 3천만 명이 십일조 300만 환을 낼 수 있도록 [15] 한반도 각 지역의 동리마다 교회를 세우자는 '삼백만 전도 운동'이라는 대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나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에서 '한국의 예레미야'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는 이러한 대부흥운동을 전개하면서 제자 양성의 필요성을 느껴 남대문 교회에서 장로회야간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신학교를 개교하여 제2대 교장으로 재직했다.
그 기쁨도 잠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미처 피난가지 못한 목사와 교인들이 조선인민군 치하에서 '기독교연맹'이라는 어용단체에서 이용당하지만 공산군에게 이용당하기 싫었던 김치선 목사는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부산중앙교회에서 생활하였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문교부에서 4년제 신학교 인가를 받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의 어원이 되는 '대한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개칭했다. 그리고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장로교총회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임하며 구약학، 신약학،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 사이 1955년에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소문동[16] 58번지에 거주했다.#
3.4.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설립[편집]
그러다 큰 위기가 찾아왔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가 남산의 대한신학교 땅을 빼앗아 그 자리에 KBS 방송국، 중앙정보부 청사를 지어버렸다. 학교를 빼앗긴 김치선 목사는 난감해하다가 반WCC단체인 ICCC(국제기독교연합)의 칼 맥킨타이어 총재를 만나 한국에서 성경장로회를 창립한다는 조건으로 용산구에서 신학교 건물을 매입했다. 그 후 김치선 목사는 더 이상 외국의 선교비를 받지 않고، 한국 내의 자본으로 대한신학교 중흥의 길을 나섰는데، '한국인에 의해، 한국인의 돈'으로 대한신학교 건물을 세우려고 했다. 나름 '한국인의 힘으로 세워진 자생교단'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웠다.
이후 ICCC와 한 계약 내용에 따라 1961년 마두원 선교사와 함께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를 설립하고 총회장직에 선출되었고،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는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이하 예장대신)으로 개칭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가 극심한 분립 과정을 겪는 동안، 예장 대신은 순전히 김치선 목사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단이라 예장 계열 교단 중 분립 과정과 상관없는 자생 교단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후 뇌암 판정을 받고 병세 악화로 1968년 2월 24일 사망하였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4. 이모저모[편집]
4.1. 김구와의 인연[편집]
남대문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던 시절، 김구는 남대문 교회의 교인이었다. 상술했듯이 김치선 또한 민족주의적인 설교를 자주했던 독립운동가였기에 굉장히 막역했던 사이였다. 김구의 아들 김신의 주례도 김치선 목사가 서주었을 정도였다.
그랬기에 이승만은 김치선 목사를 요주의 인물로 생각하고 감시했다.[17] 이승만 정부 시절 난데없이 형사들이 집에 들이닥쳐 인천구치소에 연행했다가 풀어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대신측 목사들이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을 띄는 경우가 많은 이유가 김구의 영향이 컸다고 봐도 된다. 이승만 정부나 박정희 정부나 김치선 목사와 대한신학교를 핍박한 전력이 있기에 김치선 목사와 김구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대신은 정치는 진보적이되 신학은 보수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4.2. 손양원 목사와의 인연[편집]
김 목사가 귀국하여 1945년 3백만 부흥 운동을 펼칠 때 손양원 목사가 강사로 참여할 정도로 매우 좋은 사이였다고 한다.# 게다가 손양원 목사뿐만 아니라 박재봉[18]، 배은희[19]، 김인서[20]، 이성봉[21] 등 여러 부흥사들이 강사로 참여하였다. 당시 김치선 목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그래서 김치선 목사는 손양원 목사가 아들을 잃자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김치선 목사와 손양원 목사의 관계가 현재까지 이어져، 예장 대신은 예장 통합과도 관계가 원만한 편이다. 다만 신학 성향이 약간 다르다보니 종교계 관련 이슈에서는 의견차가 꽤 있다.
4.3. 박형룡 목사와의 인연[편집]
일제강점기 당시 신사참배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숭실대학교 교수이자 목사였던 박형룡 목사가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던 김치선 목사에게 일본으로의 피신을 위해 편지를 보냈고 김치선 목사는 주택을 매입해 그를 위한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인연 덕분에 박형룡 목사와 김치선 목사는 이후로도 형제지간처럼 지냈다고 한다.
박형룡 목사는 광복 이후로도 숭실대학교 교수로 일하였고،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학을 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지만، 숭실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할 때 300만 환 규모의 사기를 당해버려 숭실대학교에서 축출당했다. 결국 박형룡 목사는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WCC 반대를 내세우며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가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총신대학교를 세운다. 그리고 예장 대신을 따라 ICCC에 가입했다.
김치선 목사와 박형룡 목사의 관계가 각자의 교단으로 내려와 예장 대신과 예장 합동의 관계는 현재도 돈독한 편이다. 김치선 목사가 사하고나서 예장 대신이 ICCC에서 탈퇴할 때، 예장 합동도 ICCC의 정책이 교단의 방향성과 안 맞는다는 이유로 같이 탈퇴했다. 둘다 보수 개혁주의 장로회 신학을 내세우고 있어서 학술، 목사 청빙 등에서 교류가 잦다.
2018~2019년에는 공교롭게도 총신대학교의 사유화 논란이 터져버리자마자 안양대학교에 대진성주회 매각 논란이 터져버렸기에 총신대 신학생들과 안양대 신학생들의 교류가 있었다.
4.4. 박태선과의 인연[편집]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김 목사는 서울로 돌아와 서울특별시 중구 남창동 10번지에 '창동교회'를 설립하고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는데 과거 시무했던 남대문교회 성도들이 김 목사가 창동교회를 개척했다는 소식에 따라왔다. 그 성도들 중 한 사람이 훗날 사이비 종교 천부교의 교주가 되는 박태선 집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 집사는 봉사와 친교에 충실하고 성도들과 교역자 간의 관계도 아주 돈독하여 창동교회의 공동의회에서 장로로 선출되었다.
장로안수를 받은 박 장로에게 김 목사가 "많은 은혜를 받다보면 자칫 교만하여 탈선할 수 있으니 대한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해보라." 하고 권유했지만، 본업에 바빴던 박태선이 미루고 미루면서 당대 부흥사들의 부흥 집회를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성령의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여 일개 장로가 안수기도를 하니 실제로 많은 환자가 치료되어 그 인기(?)로 1955년 3월 28일 남산 조선신궁 터 광장 (현재 남산공원)에서 열린 부흥집회가 많은 교회의 목사들의 지원으로 열렸고، 참석자 가운데 기적을 경험한 성도들이 귀중품과 식료품을 바치고 박태선의 인기는 급상승하면서 교리가 변질되자 김 목사는 결국 박태선을 제명처분했다. 김치선 목사는 자신의 교회의 독실한 장로가 사이비 교주로 타락하자 안타까워했다.
박태선이 세운 천부교가 개신교계에 계속해서 막대한 피해를 끼치자[22] 일부 개신교계[23]는 김치선 목사가 박태선 장로를 통제하지 못해 천부교가 세워졌다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김치선 목사가 박태선을 방조한 게 아니라 대한신학교에 입학하라며 정통 신학을 배우라고 권유했지만 박태선이 마음대로 엇나간 거라서 김치선 목사의 실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개신교계 전체는 이러한 비판을 억까로 받아들이고 있다.
5. 여담[편집]
아들로는 김세창 목사가 있다. 하지만 김치선 목사와 다르게 김세창 목사는 예장대신에게 잊고 싶은 역사로 취급받는다.
둘째 딸인 김동화 씨는 대한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수년간 강의하였다. 최순직 목사와 결혼하였고 201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020년 8월 13일 사망하였다.
6. 같이 보기
강윤석, <한국교회 교단 분열 과정과 대신 교단의 정체성>
21.7.4 (1부)
21.7.14 (2부)
프로파일
Jung John ・ 2021. 8. 2.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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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 합동과 통합, 고신 교단의 형성 배경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들을 구할 수 있는데, 예장 대신 교단의 역사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되어 있는 자료가 희귀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 강의는 대신 교단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하다. 본 강의는 2021년 7월, 경기도 의왕시에 소재한 사랑가득교회(예장 대신)에서 2주에 걸쳐 오후예배 시간에 설교된 말씀이다.
위 강의에서는 대신교단이 시작된 배경을 설립자 김치선 목사님(이하 "김치선")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다. 김치선은 1898년(고종 35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서당 교육을 받았으나, 캐나다 장로교회 출신의 선교사 도널드 영(한국명 : 영재형)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출소 후에는 연희전문학교(오늘날의 연세대)에 입학했고,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에도 관여했다.(이후 김구와의 친분이 시작되었는데,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후 이러한 김구와의 관계 때문에 이승만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외국인인 영재형 선교사가 고등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분개한 지역 주민들이 학교에 불을 질렀는데, 이때 김치선이 영재형 선교사를 방화 속에서 구출했다고 한다. 이에 영재형은 김치선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겨 양자로 삼았고, 일본의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보낸다.(참고로 고베신학교는 "개혁파" 신학교인데, 일본은 기독교인의 비율이 매우 낮지만, 그 얼마 안되는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개혁주의 신앙인들이라고 한다.) 김치선은 그곳에서 개혁파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이후 김치선은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달라스신학교에서 구약신학을 전공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박사가 된다. 이때 쓴 박사학위 논문이 "모세의 오경저작설"로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모세오경 후대 편집설을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김치선은 일본 고베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해방 후 한국의 신학교는 자유주의(신정통주의) 신학 중심의 "조선신학교"와 정통 보수신학 중심의 "고려신학교"가 있었는데, 조선신학교는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에 찬성했었고,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에 저항했던 차이가 있다.(그런데 오늘날 조선신학교의 후신인 한신대 출신들이 반일을 부르짖고 있는 모습 보면 디게 웃긴다.) 이무렵 고려신학교의 성경신학 교수가 박윤선, 조직신학 교수가 김치선이었는데, 모세의 오경저작설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치선이야말로 당시 그 누구보다 자유주의 신학을 잘 대적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박형룡에 의해 세워진 또 하나의 보수적인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장신대)에서 김치선을 스카우트하였다.(1948년) "구약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성경해석의 자유화를 추구하는 물결"이 장신대에까지 흘러들어왔기 때문에 김치선으로 하여금 이 물결을 막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에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대한신학교"라는 야간신학교가 설립되었는데(1948년), 오늘날의 안양대학교이다. 그런데 설립 당시에는 장신대와 같은 건물을 썼다고 한다. 같은 건물에 낮에는 장신대 수업이, 밤에는 대한신학교 수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1년 후 김치선은 김구가 출석하고 있던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가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무렵 김구는 암살을 당하고 만다.(1949년) 당시 김치선은 남대문교회에서 설교하는 도중 조국의 현실에 눈물을 짓는 모습을 많이 보여 "한국의 예레미야"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이단 중의 괴수인 박태선 장로와의 인연에 대한 설명을 비롯하여 300만 구령운동, 새벽기도 특공대 등에 관한 설명이 이어진다.
1959년에 접어들면서 WCC 가입 문제를 둘러싸고 장로교단이 합동 측의 총신대(가입 반대)와 통합 측의 장신대(가입 찬성)로 분리되자, 대한신학교 졸업생들이 갈 곳이 없어지게 된다. 합동과 통합 어디에서도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김치선은 대한신학교 졸업생들에게 어디에서도 우리들을 받아주지 않으니 각자 스스로 개척할 것을 호소했고, 이것이 오늘날 "대신 교단"의 시작이다.(1961년) 이때 대신 교단의 이름으로 3개 교회가 개척되었고, 오늘날(2021년 현재) 전국 54개 노회, 1200개 교회의 규모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어지는 강의에서는 대신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본 강의에 따르면, 대신교단 초기의 신학은 "개혁주의"가 아닌 "근본주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자유주의의 물결을 막기 위해, 대신교단의 설립자인 김치선이 근본주의 신학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근본주의 신학이란, "5개 핵심교리"(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믿으면 다른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신학을 말한다. 따라서 김치선은 엄밀한 개혁주의 신앙을 추구하기보다는 근본주의 5개 핵심교리에 입각하여 "초교파적" 신앙을 추구하였고, 진리의 엄밀한 수호보다는 교회간의 "연합"에 초점을 맞춰 사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박태선이나 김기동 같은 이단 괴수를 분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대신교단은 김치선의 사위인 최순직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교회선언문을 통해 "대신교단은 개혁파 신학을 추구하는 교단"이라고 천명을 한 것인데(1972년), 이는 대한민국 기독교 교단 중 최초의 사례였다고 한다.(합동은 1976년, 합신은 1980년, 고신은 1982년) 이후 조석만에 의해서 대신교단의 개혁주의 신학이 "문서화"되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1972년에 발표된 대신교단 교회선언문의 내용에 대한 주해가 설명된다.
[출처] 강윤석, <한국교회 교단 분열 과정과 대신 교단의 정체성>|작성자 Jung John
출처: 나무위키
https://namu.wiki/w/%EA%B9%80%EC%B9%98%EC%84%A0
김치선
최근 수정 시각: 2024-02-12
분류
한국의 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장로회 목사
대한민국의 교수 인문과학 교수
사립대학 총장، 안양대학교
함흥시 출신 인물
1899년 출생 1968년 사망
연세대학교 출신
건국훈장 애족장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김치선 金致善 | Kim Chi Sun 이명 김억만석(金億萬石)
호 고봉(高峯)
출생 1899년[1] 음력 8월 10일
함경남도 함흥군 동명면 서호리 서호진 (現 함경남도 함흥시 흥남구역 서호일동·서호이동)
국적 대한민국
사망 1968년 2월 24일 (향년 68세)
직업 목사
학력 함흥 영생중학교 (졸업)
연희전문학교 (영문과 / 졸업)
평양신학교 (중퇴)
고베중앙신학교 (졸업)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신학 / 석사)
달라스 신학교 (구약학 연구과 / 박사[5])
상훈 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1. 개요
2. 주요 신력
3. 생애
3.1. 유년기와 학창시절
3.2. 유학 및 전도 활동
3.3. 국내 전도 및 대한신학교 설립
3.4.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설립
4. 이모저모
4.1. 김구와의 인연
4.2. 손양원 목사와의 인연
4.3. 박형룡 목사와의 인연
4.4. 박태선과의 인연
5. 여담
6. 같이 보기
"이만팔천동네에 가서 우물을 파라."[6]
-그가 전개했던 우물파기운동의 슬로건-
"내가 한국에서 얻은 유일한 소득은 김치선을 얻은 것이다."
- 영재형(Luther Lisger Young) 선교사 -[7]
1. 개요[편집]
대한민국의 독립유공자، 목사. 3.1 운동에 참여해 투옥된 공적을 인정받아 202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김영실 박사와 함께 안양대학교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고 안양대학교의 전신인 대한신학교의 설립자이자 2대 교장[8]이다.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를 세운 목사이자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한국의 예레미야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삼백만 전도 운동을 펼친 것으로 개신교계에서 유명하다.
2. 주요 신력[9][편집]
고베중앙교회 담임목사
도쿄 신주쿠중앙교회 담임목사
도쿄 메구로교회 개척 및 담임목사
남대문교회 담임목사
장로교 야간신학교 설립
창동교회 개척 및 담임목사
3. 생애[편집]
3.1. 유년기와 학창시절[편집]
1899년 음력 8월 10일 함경남도 함흥군 동명면 서호리 서호진(現 함흥시 흥남구역 서호일동·서호이동)에서 아버지 김영준과 어머니 최현숙 사이의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김영준은 본래 선박 40척을 가진 부호였지만 태풍으로 재산을 할아버지를 잃어 가족 모두가 화전민으로 전락했다. 이에 가족들은 모두 장진군 신남면[10] 연직리(現 장진군 늪직리)로 이주해 이곳에 본적을 옮겼으나#، 김치선은 서당 선생 김응보가 만류하여 고향 서호리에 남아서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캐나다 장로회 소속 루터 영(Luther Lisgar Young، 한국명 영재형榮在馨، ? ~ 1950. 2) 선교사[11]가 서호진을 방문하였다. 이때 김응보의 추천으로 김치선은 1916년부터 함흥에서 영재형 선교사에게 길러지며 공부할 수 있었고، 이후 김치선의 아버지가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영재형 선교사는 함흥군 함흥면 신창리(現 함흥시 서문동)에 집을 마련해 김치선 가족이 함흥에서 모여 살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었다. 그렇게 김치선은 영재형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던 영생중학교에 입학했다.
영생중학교 재학 중이던 1919년 3월 1일، 함흥군 함흥면에서 이근재(李根裁)의 권유로 독립만세운동 계획에 참여하기로 했고، 이튿날인 3월 2일에 조영신(趙永信)이 원산부에서 가지고 온 기미독립선언서 3천여 매를 동지들과 함께 인쇄하고، 동시에 태극기 18매를 제작했다. 다음날인 3월 3일에는 함흥면 풍양리·풍서리(現 함흥시 삼일동)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와 직접 제작한 태극기를 배포한 뒤 군중 수백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김치선(1899)
1919년، 서대문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그 뒤 체포된 김치선은 1919년 4월 21일 함흥지방법원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및 출판법 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선고받았고#، 이에 공소하여 7월 3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위 혐의에 대해 원심 판결이 취소되었으나# 형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그는 이에 상고했으나 9월 1일 고등법원 형사부에서 위 혐의에 대해 상고가 기각되어# 선고 당일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고، 결국 옥고를 치렀다.
그는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으며 목사가 되겠다고 결심했으며، 1920년 4월 28일 특별사면으로 출옥했다. 그 뒤 영재형 선교사의 지원 아래 영생중학교에 복학해 23세 되던 1922년 3월 13일 졸업했고، 연희전문학교 영문과에 진학했다.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이던 1923년، 캐나다계 한국인이었던 영재형 선교사가 영생중학교 교장에 재직한다는 것에 지역민들이 불만을 품고 영생중학교에 불을 질러[12] 김치선은 사망 위기에 놓인 영재형 선교사를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겨우 구했다. 은혜를 보답받은 영재형 선교사는 매우 감격하며 김치선을 양자로 삼았고 물심양면으로 지원해 주었다고 한다.[13]
1927년 3월 7일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평양신학교에 진학하여 목사가 되려고 했으나، 재일교포들을 전도하려고 했던 영재형 선교사의 호출을 받아 평양신학교를 자퇴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중앙신학교로 편입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전도활동을 시작하고، 31세 되던 1930년 2월 23일 고베중앙신학교를 졸업하며 목사 안수를 받았다.
3.2. 유학 및 전도 활동[편집]
이후 영재형 선교사가 주선하여 미국 필라델피아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수학하며 1933년 신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1935년에는 텍사스 댈러스 신학교에서 한국인 최초로 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같은 해 귀국해 고향 서호진에서 목회 활동에 종사했으나،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가 극심해지자 1937년 8월 가족과 함께 영재형 선교사가 살고 있는 일본 고베시로 떠났다.[14] 정착 후 고베중앙교회를 개척하여 목회활동을 시작하였고، 민족주의적인 설교로 당시 재일교포들과 불신자들에게 큰 지지를 얻었다. 목사와 교인 모두 교회에서 한복을 입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이러한 열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일본의 다른 지역에서도 순회목사 자격으로 설교를 자주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이 시행되고 나서 사상범으로 구속되고، 일본어로만 설교하라고 강요받았다. 또، 도쿄 신주쿠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된 이후 그의 열광적인 인기를 질투해서 당회장직을 탈취하려는 다른 목사들이 많았고، 할 수 없이 개척해 두었던 메구로 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되어 목회를 하였다. 또한، 영재형 선교사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난 이후 일본에게 강제 출국조치되었다.
3.3. 국내 전도 및 대한신학교 설립[편집]
일본 제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패망할 징조가 보이자 해방을 직감한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서 전도 활동을 시작한다.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되어 제6대 담임목사로 위임되었고، 일제가 패망하여 1945년 광복이 되자 정부의 핍박이라는 장애물이 사라졌기에 전도에 모든 힘을 매진한다. 당시 한반도 인구 3천만 명이 십일조 300만 환을 낼 수 있도록 [15] 한반도 각 지역의 동리마다 교회를 세우자는 '삼백만 전도 운동'이라는 대부흥 운동을 전개했다. 이때 나라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에서 '한국의 예레미야'라는 별명이 생겼다. 그는 이러한 대부흥운동을 전개하면서 제자 양성의 필요성을 느껴 남대문 교회에서 장로회야간신학교라는 이름으로 신학교를 개교하여 제2대 교장으로 재직했다.
그 기쁨도 잠시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여 미처 피난가지 못한 목사와 교인들이 조선인민군 치하에서 '기독교연맹'이라는 어용단체에서 이용당하지만 공산군에게 이용당하기 싫었던 김치선 목사는 부산으로 피난하였고،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부산중앙교회에서 생활하였다. 이후 전쟁이 끝나고 문교부에서 4년제 신학교 인가를 받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의 어원이 되는 '대한신학교'라는 이름으로 학교를 개칭했다. 그리고 1951년부터 1960년까지 장로교총회신학교에서 교수로 재임하며 구약학، 신약학، 조직신학을 가르쳤다. 그 사이 1955년에는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서소문동[16] 58번지에 거주했다.#
3.4.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 설립[편집]
그러다 큰 위기가 찾아왔다.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부가 남산의 대한신학교 땅을 빼앗아 그 자리에 KBS 방송국، 중앙정보부 청사를 지어버렸다. 학교를 빼앗긴 김치선 목사는 난감해하다가 반WCC단체인 ICCC(국제기독교연합)의 칼 맥킨타이어 총재를 만나 한국에서 성경장로회를 창립한다는 조건으로 용산구에서 신학교 건물을 매입했다. 그 후 김치선 목사는 더 이상 외국의 선교비를 받지 않고، 한국 내의 자본으로 대한신학교 중흥의 길을 나섰는데، '한국인에 의해، 한국인의 돈'으로 대한신학교 건물을 세우려고 했다. 나름 '한국인의 힘으로 세워진 자생교단'이라는 타이틀을 내세웠다.
이후 ICCC와 한 계약 내용에 따라 1961년 마두원 선교사와 함께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를 설립하고 총회장직에 선출되었고، 대한예수교성경장로회는 이후 대한예수교장로회(대신)(이하 예장대신)으로 개칭한다. 대한예수교장로회가 극심한 분립 과정을 겪는 동안، 예장 대신은 순전히 김치선 목사의 제자들로 이루어진 교단이라 예장 계열 교단 중 분립 과정과 상관없는 자생 교단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이후 뇌암 판정을 받고 병세 악화로 1968년 2월 24일 사망하였다.
2020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4. 이모저모[편집]
4.1. 김구와의 인연[편집]
남대문교회 담임목사로 재직하던 시절، 김구는 남대문 교회의 교인이었다. 상술했듯이 김치선 또한 민족주의적인 설교를 자주했던 독립운동가였기에 굉장히 막역했던 사이였다. 김구의 아들 김신의 주례도 김치선 목사가 서주었을 정도였다.
그랬기에 이승만은 김치선 목사를 요주의 인물로 생각하고 감시했다.[17] 이승만 정부 시절 난데없이 형사들이 집에 들이닥쳐 인천구치소에 연행했다가 풀어준 일도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대신측 목사들이 정치적으로 보수 성향을 띄는 경우가 많은 이유가 김구의 영향이 컸다고 봐도 된다. 이승만 정부나 박정희 정부나 김치선 목사와 대한신학교를 핍박한 전력이 있기에 김치선 목사와 김구의 인연이 없었더라면 대신은 정치는 진보적이되 신학은 보수적이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다.
4.2. 손양원 목사와의 인연[편집]
김 목사가 귀국하여 1945년 3백만 부흥 운동을 펼칠 때 손양원 목사가 강사로 참여할 정도로 매우 좋은 사이였다고 한다.# 게다가 손양원 목사뿐만 아니라 박재봉[18]، 배은희[19]، 김인서[20]، 이성봉[21] 등 여러 부흥사들이 강사로 참여하였다. 당시 김치선 목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강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그래서 김치선 목사는 손양원 목사가 아들을 잃자 매우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김치선 목사와 손양원 목사의 관계가 현재까지 이어져، 예장 대신은 예장 통합과도 관계가 원만한 편이다. 다만 신학 성향이 약간 다르다보니 종교계 관련 이슈에서는 의견차가 꽤 있다.
4.3. 박형룡 목사와의 인연[편집]
일제강점기 당시 신사참배의 박해를 피하기 위해 숭실대학교 교수이자 목사였던 박형룡 목사가 일본에서 사역하고 있던 김치선 목사에게 일본으로의 피신을 위해 편지를 보냈고 김치선 목사는 주택을 매입해 그를 위한 거처를 마련해 주었다. 이러한 인연 덕분에 박형룡 목사와 김치선 목사는 이후로도 형제지간처럼 지냈다고 한다.
박형룡 목사는 광복 이후로도 숭실대학교 교수로 일하였고،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신학을 정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였지만، 숭실대학교 총장으로 재직할 때 300만 환 규모의 사기를 당해버려 숭실대학교에서 축출당했다. 결국 박형룡 목사는 자신의 제자들과 함께 WCC 반대를 내세우며 대한예수교장로회에서 분가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과 총신대학교를 세운다. 그리고 예장 대신을 따라 ICCC에 가입했다.
김치선 목사와 박형룡 목사의 관계가 각자의 교단으로 내려와 예장 대신과 예장 합동의 관계는 현재도 돈독한 편이다. 김치선 목사가 사하고나서 예장 대신이 ICCC에서 탈퇴할 때، 예장 합동도 ICCC의 정책이 교단의 방향성과 안 맞는다는 이유로 같이 탈퇴했다. 둘다 보수 개혁주의 장로회 신학을 내세우고 있어서 학술، 목사 청빙 등에서 교류가 잦다.
2018~2019년에는 공교롭게도 총신대학교의 사유화 논란이 터져버리자마자 안양대학교에 대진성주회 매각 논란이 터져버렸기에 총신대 신학생들과 안양대 신학생들의 교류가 있었다.
4.4. 박태선과의 인연[편집]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되고 김 목사는 서울로 돌아와 서울특별시 중구 남창동 10번지에 '창동교회'를 설립하고 담임목사로 시무하고 있었는데 과거 시무했던 남대문교회 성도들이 김 목사가 창동교회를 개척했다는 소식에 따라왔다. 그 성도들 중 한 사람이 훗날 사이비 종교 천부교의 교주가 되는 박태선 집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 집사는 봉사와 친교에 충실하고 성도들과 교역자 간의 관계도 아주 돈독하여 창동교회의 공동의회에서 장로로 선출되었다.
장로안수를 받은 박 장로에게 김 목사가 "많은 은혜를 받다보면 자칫 교만하여 탈선할 수 있으니 대한신학교에 입학해 공부해보라." 하고 권유했지만، 본업에 바빴던 박태선이 미루고 미루면서 당대 부흥사들의 부흥 집회를 빠지지 않고 참석하였다. 성령의 신비한 능력을 체험하여 일개 장로가 안수기도를 하니 실제로 많은 환자가 치료되어 그 인기(?)로 1955년 3월 28일 남산 조선신궁 터 광장 (현재 남산공원)에서 열린 부흥집회가 많은 교회의 목사들의 지원으로 열렸고، 참석자 가운데 기적을 경험한 성도들이 귀중품과 식료품을 바치고 박태선의 인기는 급상승하면서 교리가 변질되자 김 목사는 결국 박태선을 제명처분했다. 김치선 목사는 자신의 교회의 독실한 장로가 사이비 교주로 타락하자 안타까워했다.
박태선이 세운 천부교가 개신교계에 계속해서 막대한 피해를 끼치자[22] 일부 개신교계[23]는 김치선 목사가 박태선 장로를 통제하지 못해 천부교가 세워졌다며 비판하기도 했지만، 김치선 목사가 박태선을 방조한 게 아니라 대한신학교에 입학하라며 정통 신학을 배우라고 권유했지만 박태선이 마음대로 엇나간 거라서 김치선 목사의 실책이라고 보기 힘들다. 개신교계 전체는 이러한 비판을 억까로 받아들이고 있다.
5. 여담[편집]
아들로는 김세창 목사가 있다. 하지만 김치선 목사와 다르게 김세창 목사는 예장대신에게 잊고 싶은 역사로 취급받는다.
둘째 딸인 김동화 씨는 대한신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수로서 수년간 강의하였다. 최순직 목사와 결혼하였고 2014년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2020년 8월 13일 사망하였다.
6. 같이 보기
강윤석, <한국교회 교단 분열 과정과 대신 교단의 정체성>
21.7.4 (1부)
21.7.14 (2부)
프로파일
Jung John ・ 2021. 8. 2. 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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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장 합동과 통합, 고신 교단의 형성 배경에 대해서는 많은 자료들을 구할 수 있는데, 예장 대신 교단의 역사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되어 있는 자료가 희귀하다. 그런 의미에서 본 강의는 대신 교단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유익하다. 본 강의는 2021년 7월, 경기도 의왕시에 소재한 사랑가득교회(예장 대신)에서 2주에 걸쳐 오후예배 시간에 설교된 말씀이다.
위 강의에서는 대신교단이 시작된 배경을 설립자 김치선 목사님(이하 "김치선")을 중심으로 설명되고 있다. 김치선은 1898년(고종 35년)에 태어나 어려서부터 서당 교육을 받았으나, 캐나다 장로교회 출신의 선교사 도널드 영(한국명 : 영재형)으로부터 복음을 듣고 예수님을 영접한 후 신식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1919년에는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고, 그곳에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출소 후에는 연희전문학교(오늘날의 연세대)에 입학했고, 김구의 대한민국임시정부 설립에도 관여했다.(이후 김구와의 친분이 시작되었는데, 나중에 대한민국 정부가 세워진 후 이러한 김구와의 관계 때문에 이승만의 감시를 받았다고 한다.)
한편, 외국인인 영재형 선교사가 고등학교 교장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분개한 지역 주민들이 학교에 불을 질렀는데, 이때 김치선이 영재형 선교사를 방화 속에서 구출했다고 한다. 이에 영재형은 김치선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겨 양자로 삼았고, 일본의 고베신학교로 유학을 보낸다.(참고로 고베신학교는 "개혁파" 신학교인데, 일본은 기독교인의 비율이 매우 낮지만, 그 얼마 안되는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개혁주의 신앙인들이라고 한다.) 김치선은 그곳에서 개혁파 신학을 공부한 후 목사 안수를 받게 된다. 이후 김치선은 미국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고, 달라스신학교에서 구약신학을 전공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박사가 된다. 이때 쓴 박사학위 논문이 "모세의 오경저작설"로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모세오경 후대 편집설을 반박하는 내용이었다. 이후 김치선은 일본 고베에서 목회를 시작한다.
해방 후 한국의 신학교는 자유주의(신정통주의) 신학 중심의 "조선신학교"와 정통 보수신학 중심의 "고려신학교"가 있었는데, 조선신학교는 일제시대 때 신사참배에 찬성했었고, 고려신학교는 신사참배에 저항했던 차이가 있다.(그런데 오늘날 조선신학교의 후신인 한신대 출신들이 반일을 부르짖고 있는 모습 보면 디게 웃긴다.) 이무렵 고려신학교의 성경신학 교수가 박윤선, 조직신학 교수가 김치선이었는데, 모세의 오경저작설로 박사학위를 받은 김치선이야말로 당시 그 누구보다 자유주의 신학을 잘 대적할 수 있었던 인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박형룡에 의해 세워진 또 하나의 보수적인 신학교인 장로회신학교(장신대)에서 김치선을 스카우트하였다.(1948년) "구약성경의 무오성을 부정하고 성경해석의 자유화를 추구하는 물결"이 장신대에까지 흘러들어왔기 때문에 김치선으로 하여금 이 물결을 막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한편, 당시 직장생활을 하면서 야간에 신학을 공부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대한신학교"라는 야간신학교가 설립되었는데(1948년), 오늘날의 안양대학교이다. 그런데 설립 당시에는 장신대와 같은 건물을 썼다고 한다. 같은 건물에 낮에는 장신대 수업이, 밤에는 대한신학교 수업이 진행되었던 것이다. 1년 후 김치선은 김구가 출석하고 있던 남대문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가게 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이무렵 김구는 암살을 당하고 만다.(1949년) 당시 김치선은 남대문교회에서 설교하는 도중 조국의 현실에 눈물을 짓는 모습을 많이 보여 "한국의 예레미야"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이어서 이단 중의 괴수인 박태선 장로와의 인연에 대한 설명을 비롯하여 300만 구령운동, 새벽기도 특공대 등에 관한 설명이 이어진다.
1959년에 접어들면서 WCC 가입 문제를 둘러싸고 장로교단이 합동 측의 총신대(가입 반대)와 통합 측의 장신대(가입 찬성)로 분리되자, 대한신학교 졸업생들이 갈 곳이 없어지게 된다. 합동과 통합 어디에서도 이들을 받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김치선은 대한신학교 졸업생들에게 어디에서도 우리들을 받아주지 않으니 각자 스스로 개척할 것을 호소했고, 이것이 오늘날 "대신 교단"의 시작이다.(1961년) 이때 대신 교단의 이름으로 3개 교회가 개척되었고, 오늘날(2021년 현재) 전국 54개 노회, 1200개 교회의 규모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이어지는 강의에서는 대신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에 대한 설명이 이어진다. 본 강의에 따르면, 대신교단 초기의 신학은 "개혁주의"가 아닌 "근본주의"였다고 한다. 이는 당시 조선신학교를 중심으로 유행하던 자유주의의 물결을 막기 위해, 대신교단의 설립자인 김치선이 근본주의 신학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근본주의 신학이란, "5개 핵심교리"(성경의 무오성,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대속,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그리스도의 재림)만을 믿으면 다른 것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신학을 말한다. 따라서 김치선은 엄밀한 개혁주의 신앙을 추구하기보다는 근본주의 5개 핵심교리에 입각하여 "초교파적" 신앙을 추구하였고, 진리의 엄밀한 수호보다는 교회간의 "연합"에 초점을 맞춰 사역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박태선이나 김기동 같은 이단 괴수를 분별하지 못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후 대신교단은 김치선의 사위인 최순직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교회선언문을 통해 "대신교단은 개혁파 신학을 추구하는 교단"이라고 천명을 한 것인데(1972년), 이는 대한민국 기독교 교단 중 최초의 사례였다고 한다.(합동은 1976년, 합신은 1980년, 고신은 1982년) 이후 조석만에 의해서 대신교단의 개혁주의 신학이 "문서화"되었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1972년에 발표된 대신교단 교회선언문의 내용에 대한 주해가 설명된다.
[출처] 강윤석, <한국교회 교단 분열 과정과 대신 교단의 정체성>|작성자 Jung Joh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