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리] 안식일과 주일 문제 - 고신대 양낙홍교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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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안식일과 주일 문제 - 고신대 양낙홍교수님

안식일과 주일 문제의 연구 (2003-11-10)




주일 문제의 긴박성

그리스도인들은 지금 전 세계에 걸쳐 세속주의의 물결이 범람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산업화되고 기술 문명이 발달된 거의 모든 사회는 현재 주 5일제 근무를 채택하고 있으며 자가용 승용차의 보편화로 인해 주말은 여행, 휴가, 그리고 여가 선용의 기회로 인식되는 경향이 점증하고 있다. 현대 생활의 복잡성, 경제 각 부문의 상호 의존, 서비스와 전기, 수도 등의 중단없는 흐름에 대한 의존은 더욱 심화되고 있다. 공장에서는 이제 주말에 최소한 모니터라도 되어야 하는 기계들이 도입되었으며 일반 가정에서도 전기, 난방, 냉방, 전화, 텔레비전, 라디오 방송, 신문 등을 한 주간 내내 요청하고 있다. 그 중 어떤 것들은 실제로 복음 전파라는 기독교적 목적을 위해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이동 중인 사람들은 주일에도 비행기, 택시, 철도, 정거장, 호텔, 식당 등의 서비스를 필요로 한다. 게다가 많은 상업 시설들이 일 주일 내내 문을 열고 있으며 때로 그리스도인들도 수익을 올리기 위해 주일 영업의 유혹을 받는다. 이것은 목회상의 많은 문제를 의미하는 동시에 주일과 안식에 대한 교회의 새롭고 분명한 지침이 제공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고신)는 안식일과 주일 문제에 대해 대단히 엄격한 입장을 고수해 왔다. 한국 땅에 처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설립한 미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대부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신앙의 표준으로 소유한 자들로서 주일 문제에 대해서도 한국 교회에 가장 엄격한 청교도적 주일관을 이식해 주었다. 그러한 역사적 배경은 고신의 보수적 신학과 영적 분위기와 합세하여 고신으로 하여금 한국 장로교회들 중에서도 가장 엄격한 안식일 전통을 유지하게 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와 수도권을 기점으로 타 교단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우리 교단 내의 교회들에서도 전통적인 주일 성수의 방식으로부터 떠나는 경향이 노출되고 있다. 수도권뿐 아니라 지방 교단 교회들에서도 교회적으로는 아닐지 모르나 개인별로는 이미 주일성수의 모습이 과거와 같지 않은 경우가 많다는 것은 암암리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기정사실화 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과거와 같은 엄격한 안식일관과 주일 성수의 방식이 이 시대에 맞지 않는다는 감각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그러한 전통적 이해와 관행에 결함이 있을지 모른다는 의심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 교단의 전통적 안식일관을 객관적으로 재점검하면서 그것을 개혁주의적인 안식일관, 나아가서는 성경적 안식일관과 비교 평가해야 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주일에 대한 입장들의 스펙트럼

주일 성수와 관련해서 생각할 가장 중요한 사항은 제 사 계명과 주일의 관계 문제이다. 주일은 제 4 계명의 연장인가 아니면 완전히 별개의 것인가? 제 4 계명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여전히 문자적 구속력을 가지는가 아니면 모형이요 “그림자”인가? 교회사적으로 제 4 계명에 대한 입장은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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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의 설명은 Richard B. Gaffin, Jr. Calvin and the Sabbath: The Controversy of applying the Four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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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제 4 계명 전부가 모형이요 그림자로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성취되었기 때문에 신약 시대에는 폐기되었다는 견해이다. 이것은 또 종교개혁 시대의 재세례파 집단을 풍미하던 견해로서 율법과 복음에 대한 날카로운 대립의 전제 하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십계명을 지킬 필요가 없으므로 제 4 계명은 폐기되었다고 믿는다. 안식일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을 지킬 필요는 없다. 모든 날이 주의 날이기 때문에 주일을 지키는 것은 날과 절기의 구분을 금지하는 신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반대된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이것과 꼭 같지는 않으나 유사한 입장을 취하는 교회로 영국 국교회가 있다. 그들은 제 4 계명과 안식일은 그 기원이 모세에게 있다고 믿는다. 그것은 출애굽시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명하신 특별한 조치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구약 시대가 끝나면서 제 4 계명에 대한 의무는 중지되었으며 안식일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일, 혹은 일요일은 기독교회의 완전히 별개의 제도이다. 그것은 안식일이 아니며 안식일의 계승도 아니다. 주일은 어떤 식으로도 제 4 계명에 의존하지 않는다. 즉 안식일과 주일 사이에는 절대적 단절이 있다. 재세례파와 이들의 차이는 전자가 주일을 지키는 것조차 부정하는 데 반해 후자는 그것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영국 국교회 멤버들 사이에 있는 견해 차이는 주일의 권위의 최종적 원천에 관한 것이다. 어떤 이들은 그것이 제 2세기 초반이나 기껏해야 제 일 세기 말엽에 고대 교회가 만든 제도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또 어떤 이들은 주일 제도가 최소한 사도적 기원을 가진 것이거나 아니면 그리스도의 기록되지 않은 지시에 근거한 것이라 믿는다. 영국 국교회는 그 시초부터 지금까지 이 견해를 고수하고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예배를 드리는 것이 주일의 중요한 순서이기는 하나 일차적으로 주일은 육체적 정신적 휴식과 레크레이션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두 번째 견해는 흔히들 안식일주의(Sabbatarianism)라 부르는 입장이다. 이것은 제 4 계명이 문자적으로 복음 시대에도 전부 그대로 적용된다는 견해이다. 이 견해의 핵심적 주장은 제 4 계명이 단지 모세 율법의 한 부분일 뿐 아니라 십계명의 다른 요소들과 함께 창조의 규례(ordinance)라는 것이다. 안식교도들과 청교도들이 이 견해의 주창자들인데 그들에 의하면 안식일 제도는 단지 유대인들을 위한 제도가 아니며 신약 시대에 폐기된 것도 아니다. 주일을 성수하는 것은 보편적이고도 영속적인 의무이다. 사실상 안식일은 타락 이전에도 존재했다.

함께 두 번째 입장의 기본 노선에 동의하지만 안식교와 청교도들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가 있다. 그것은 전자가 제 7일이라는 요소까지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반면 청교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오신 후 안식일이 제 7일에서 한 주의 첫 날로 바뀌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제외하면 제 4 계명의 나머지 다른 부분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고 그들은 믿는다. 이 안식일주의 입장은 종교개혁 직후에 대두되어 17세기부터 19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영국 청교도들의 강력한 지지를 얻었다. 미국에서 안식일주의는 19세기까지 대부분의 주요 교단들이 흔들림없이 견지하는 신념이었으나 그 후부터 급속히 사라지고 있다. 이 견해의 지지자들은 안식일을 합당히 지키는 방법이 온 종일을 공적 예배나 사적 경건을 위해 바치는 것이라 믿는다.

세째 견해는 제 4 계명의 모형적인 부분은 모두 폐지되었지만 그 실체는 아직도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적용된다고 보는 입장인데 칼빈이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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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andment (Mentor, 1998), 11-14을 참고로 본인이 재정리한 것이다. 본인은 청교도적 입장과 칼빈의 견해에 커다란 차이가 있음을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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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 성수와 관련하여 더 고찰해야 할 사항들은 제 4 계명의 “안식”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니면 영적으로 해석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청교도들은 그것을 영적이고 정신적으로만 아니라 육체적 차원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칼빈은 안식의 문자적 의미는 폐기되었고 영적 의미만 남았다고 주장했다. 이 점에 관한 한 현대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복음주의 신학자들 사이에서도 여전히 견해 차이가 존재한다.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제 4 계명에 나오는 “이레에 하루”라는 원리와 이레 중 첫날이라는 요소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그림자적 요소인가 아니면 실체적 요소인가?

마지막으로, 주일을 어떻게 성수해야 하는가? 주일에 운동이나 레크레이션을 즐기는 식으로 휴식을 취하는 것은 가한가? 특히 그것이 그리스도인들끼리 교제를 증진시키는 목적이라면 허용될 수 있는가? 아니면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오직 종교적 활동이나 공적 사적 예배에만 집중해야 하는가? 먼저 교회사에서 이 문제들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시대 별로 살펴 보기로 하자.



A. 초대와 중세


주일에 대한 신비화의 시작

초대 교인들이 한 주의 첫 날에 예배드리게 된 것은 그 날 위대한 구원의 사건들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즉 예수께서 그 날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셔서 제자들과 교제하셨다는 사실, 그리고 성령이 오순절에 강림하셨다는 사실이 그것들이다. 저스틴 마터는 부활, 성령 강림 뿐 아니라 천지 창조도 한 주의 첫 날에 시작되었다고 지적함으로써 주일의 “삼관왕”적 영광을 주장했다. 오리겐도 만나가 엿새동안 내리다가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았다는 것은 그것이 처음 나타난 것이 주일이었음을 의미한다고 지적했다. 이미 구약에서 안식일은 주일보다 열등했음을 보여 준다는 것이었다. 2)

로돌프(W. Rordorf)에 의하면, 안식일-일요일 신학의 기원은 콘스탄틴 대제(284?-337)가 일요일에 공적 휴식의 날의 지위를 부여한 데서 발견될 수 있다고 한다. 그가 일요일에 사람들이 직업상의 일을 계속 수행하는 것을 금지시켰다는 것이다. 3)



중세의 견해

중세는 안식일을 율법주의적이고 미신적으로 지킨 시대였다. 빌헬름 토마스는 중세의 신학자들이 제 4 계명에 호소하여 복음을 율법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4) "구원의 선물과 보증을 교회가 통제하는 율법적 제도로 바꾼 결과는 “안식일주의의 율법주의”였다는 것이다. 폴 주잇에 의하면, 유대적 안식일과 주일 사이의 유비를 위한 초석을 놓은 사람은 어거스틴이었는데 그러한 관점이 현재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신학을 지배해 왔다. 교리문답을 통한 교육의 목적으로 어거스틴이 십계명을 사랑의 이중 명령의 강해로 사용한 430년 경부터 제 4 계명은 그리스도인들의 윤리 의식의 일부로 영원히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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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Paul Jewett, Lord's Day: A Theological Guide to the Christian Day of Worship (Grand Rapids: Eerdmans), 128.

2) Willy Rordorf, Der Sonntag (Zurich: Zwingli Verlag, 1962).
Wilhelm Thomas, Der Sonntag in Fruhen Mittelater (Goettingen:

3)Vandenhoeck und Ruprecht, 1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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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가 진행됨에 따라 미신과 율법주의의 누룩은 주일의 신학을 더욱 더 깊이 잠식해 들어갔다. 제 8세기부터 10세기 사이 교회는 주일에 17가지의 축복이 임했다고 가르쳤다. 빛과 천사들의 창조, 홍해의 통과, 만나를 주심, 예수의 잉태, 출생과 세례, 가나의 혼인 잔치, 오천 명을 먹이심, 예루살렘 입성, 사도들의 임직, 밧모섬에서 요한이 계시를 받음, 심판주로서 그리스도의 재림, 역사의 마지막에 세상의 최종적 갱신 등이 그것들이다. 6) 중세에 있어 이 전설적 일요일의 절정은 소위 “하늘로부터 온 편지”였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된 편지의 내용은, 그가 “이전에 주신 명령대로” 주일에는 사람들이 모든 일을 금함으로써 그 날을 거룩하게 하라는 권면이었다. 사람들은 그 편지가 지상, 즉 예루살렘에 떨어졌다고 주장했다. 역사가들이 주후 788년에 일어났다고 기록하는 이 사건은 당시 골(Gaul)과 스페인 지방에 유포되어 있던 주일 이해를 반영한다. 7)

중세에 있었던 주일에 관한 전설적 미신적 이야기들은 끝이 없다. “바울의 묵시록”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400년 이전에 작성되어 중세에 널리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 문서에 의하면 지옥에 있는 자들에 대한 형 집행이 주일에는 정지되었다. 또 9세기 아일랜드에는 주일에 가룟 유다가 천국을 방문하도록 형 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다는 전설이 있었다. 또 어떤 전설에 의하면 주일에 이상한 새들이 나타났는데 그것들은 지옥에서 일시 풀려난 영혼들의 형상이라고 믿어졌다. 8)

이러한 경건한 미신들은 쉽게 이교의 신화적 흐름과 결합되어 538년 오를레앙 대회에서 주일 신학으로 편입되었다. [프랑크족의 역사]에서 그레고리는 자주 “주의 날”(Dies Dominicus)을 언급하면서 주일을 범한 자들에게 임한 열 두 가지의 무서운 형벌적 기적을 소개했다. 그런데 그 기적들은 게르만 민담에서 발견되는 형벌적 기적들과 아주 흡사했다. 9) 9-10세기 사이 아일랜드에서는 안식일이 토요일 저녁 기도로부터 시작해서 월요일 아침 기도 시간까지 이어졌다. 그 사이에는 글을 쓰거나, 여행을 시작하거나, 물건을 팔거나, 계약을 맺거나, 소송하거나, 재판하거나, 머리털이나 수염을 짜르거나, 씻거나 목욕하거나, 목적없이 뛰거나, 옥수수를 갈거나, 빵을 굽거나, 나무를 짜르거나, 집청소를 하거나, 소나 말이나 사람들에게 짐을 지우거나, 노예의 일을 하거나, 적절한 사유없이 자기가 사는 지역의 경계를 벗어나거나 할 수 없었다. 10)

세르빌의 이시도레(570-636)는 육체 노동의 중지라는 측면에서 안식일과 주일 사이의 병행을 강조했고 789년 샬마뉴 대제는 칙령을 통해 일요일에 모든 노동을 금지했다. 이러한 현상은 주일과 안식일의 관계를 규명하여 이레에 한번씩 주일을 지키는 이유에 대한 답변을 주려는 시도의 결과이기는 했지만 어거스틴이 강조했던 주일의 영적 의미를 상실하는 결과를 낳았다. 주후 700년에서 750년 사이 [클레멘트의 재판](The Judgment of Clement)은 다음과 같이 판결하고 있다. “만일 누군가가 부주의로 주일에 일을 했다면, 그것이 목욕이든 면도든 아니면 머리를 감는 것이든, 그는 7일간 참회를 해야 한다. 만일 그 짓을 다시 했다면 40일간 참회해야 하며, 만일 그가 그 날을 멸시해서 그 짓을 하고 개과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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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Jewett, 90.

6) Ibid,, 128-129.

7)Thomas, ff 25.

8) Ibid.

9) Ibid.

10) Ibid.,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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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하지 않는다면 그는 유다처럼 카톨릭 교회에서 추방되어야 한다.”11)
주일 성수에 관한 한 14세기에 살았던 아빌라의 주교 토스타투스의 지침은 중세의 규정들을 특징지웠던 그 자의적이고 자질구레한 태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거룩한 날들에 어떤 특별한 사당이나 성자에게로 여행하는 것은 죄가 아니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 날 집으로 돌아온다면 그것은 범죄이다.”12)


토마스 아퀴나스의 견해

796년 아킬레자의 바울 (Paulinus of Aquileja)에 의해 소집된 대회는 안식일 명령은 육체적 노동의 중지라는 문자적 의미와, 범죄의 중지라는 영적 의미 양자를 모두 포함한다고 선언했다. 그리하여 신학적으로 알프릭(Aelfric, 955-1020)의 다음과 같은 입장이 중세를 풍미하게 되었다. “노예적인 일을 멀리하라. 즉 참으로 죄를 삼가라. 그것은 그것을 행하고 범하는 자들을 자주 노예 상태로 인도한다...‘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안식일을 영적으로 지킴으로써 우리 자신이 죄로부터 자유를 얻고 그 날이 우리 안에서 거룩해진다....” 이 가르침은 먼저 피터 롬바르드의 표현 속에서, 최종적으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에서 정경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13)

중세의 안식일 신학은 다른 많은 것들처럼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에서 그 성숙하고 완성된 형태를 드러내게 된다. 14) 아퀴나스는 자연법인 십계명의 보편적 특성을 볼 때 제 4 계명도 우리에게 유효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제 4 계명이 부분적으로는 의식법이요 부분적으로는 도덕법이라 보았다. 그것의 도덕적 측면은 “우리 생의 어떤 부분을 종교적인 일들을 행하는 데 바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요일은 무엇보다도 공중 예배를 드리는 데 할애되어야 하는 날이었다. 그것의 의식법적 측면들은 첫째, 이 목적을 위해 제 7일이 지정된 것은 하나님이 창조를 그치고 쉬신 것의 암시라는 것, 둘째, 이 날뿐 아니라 한 주간 내내 우리는 모든 죄악된 행위를 멀리하여 영혼이 하나님 안에서 쉼을 얻어야 한다는 것, 셋째, 그것은 우리가 언젠가 하늘 나라에서 하나님을 뵙게 될 때 발견하게 될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라는 것이었다.

아퀴나스에 의하면, 일요일은 공예배의 날이므로 “노예적 노동”(opera servilia)은 금지되어야 했다. 그는 안식일이 토요일에서 주일로 전환된 것은 사도 시대 교회의 결정이라 보았다. 어떤 학자들은 주일-안식일 문제에 관한 한 아퀴나스 이후에 추가된 새로운 것이 거의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후대 수 세기에 걸친 신학자들의 이론은 토마스 견해의 변주곡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15) 아퀴나스는 매 칠일에 가지는 부활의 신적 축제 교리를 전파했다. 이레에 하루는 하나님께 속한다는 원리 위에서 그는 고정된 시간을 하나님의 예배에 바치는 것이 자연법의 명령이라고 주장하면서 그 예배의 시간과 빈도는 성문법인 제 4 계명에 의해 정해져야 한다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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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J. McNeill and H. Gamer, Medieval Handbook of Penance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38), 159.

12) J. Hessey, Sunday, Its Origin, History and Present Obligation (London: Cassell, 1889), 91-92.

13) Jewett, 91.

14)Thomas Aquinas, Summa Theologiae, II, 2, #22, art. 4.

15) Acts of Reformed Ecumenical Synod, 1976, p. 2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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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터의 견해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지만, 종교개혁자들은 중세의 안식일주의에 대한 반발ㄹ로서 주일 신학을 수립했다. 루터는 1520년에 쓴 [선행에 관한 논문]에서 십계명을 강해하면서 제 4 계명의 첫 번째 관심은 예배이지만 그 계명은 예배보다 훨씬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주장했다. 이 계명의 기초는 하나님이 천지 창조를 마치시고 쉬신 것이다. “그래서...우리는 엿새동안 하던 일을 쉰다. 이 안식일은 이제 일요일로 바뀌었다. 일요일은 안식일 (rest-day) 혹은 휴일(holiday), 혹은 거룩한 날(holy day)로 불리운다.” 이 부분만 놓고 보면 루터는 안식일을 창조의 규례로 여겨 주일과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인상을 준다. 이어서 루터는 일을 쉬는 데는 두 종류가 있는데 하나는 육체적인 것이요 다른 하나는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제 4 계명도 두 가지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안식의 이중적 의미를 포괄한다. 육체적 안식이 필요한 것은 신자들이 교회에 모여 미사를 드리고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읽기 위함이다. 이 육체적 안식은 “옛날의 것으로서 표상(figure)”이다. "그러나”하고 루터는 어조를 바꾸면서 영적 안식의 측면이 보다 중요한 것이라 주장한다. “이제 진리가 성취되었기 때문에 모든 날이 거룩한 날들이며,..., 모든 날들이 일하는 날들”이라 선언함으로써 사실상 육체적 안식의 의미를 최소화한다.

영적인 안식은 하나님이 특별히 이 계명에서 의도하신 것으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즉 우리가 단지 우리의 노동과 사업을
쉴 뿐 아니라 한 걸음 나아가 하나님만이 우리 안에서 일하시게
함으로써 어떤 것도 우리가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 하지 않게
하는 것이다. 17)

이어서 루터는 많은 성구들의 인용을 통해, 영적인 안식은 자아에 대해 죽고 육신을 죽임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달성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루터의 안식일관은 이어서 살펴 보게 될 칼빈의 그것보다 더 과격하다. 그에 의하면, 일요일은 실제적 필요성을 가진 것으로서 교회가 정한 것이다. 이 점에서는 안식일이 주일로 전환되었다는 앞의 주장과 상충된다. 그것은 “불완전한 평신도들과 노동 계급”을 위한 배려, 즉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하기 위함이다. 즉 일요일 제도의 일차적 목적은 노동 계급에게 기독교의 진리를 배울 수 있는 기회 제공이라는 교육적인 것이다. 그렇다면 사제들과 성직자들은 매일같이 미사를 드리고 항상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고 있으므로 그들에게는 안식일이 따로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된다. “현재로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기도하는 목적 외에는 필요하지 않으며 명령된 바도 아니다. 18) ” 육체적 안식 그 자체가 주일의 목적에 포함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1529년에 쓴 [대요리문답]에서 루터는 제 4 계명의 문자적 의미는 단지 구약의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함으로 그 외적 명령은 의식법에 속한 것임을 주장한다. “외적 준수라는 점에서 그 [제 4] 계명은 오직 유대인들만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그러므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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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Treatise on Good Works, trans. W. Lambert; Works of Martin Luther, (Philadelphia: A. J. Holman, 1915): vol. 1: 222, 240.

17) Ibid., 241.

18) Ibi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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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은 그것의 문자적 의미에서 현재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약의 다른 규례들처럼 전적으로 외적 문제이다. 그것들은 특정한 문화, 사람들, 시대, 장소들에 국한된 것들이다.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그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하게 되었다.19) ” 나아가 루터는 거의 10년 전의 주장을 되풀이하고 있다. 즉 주일 제도는 “지성적이고 학식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불필요하나 약하고 무지한 자들, 즉 노동 계급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정기적인 육체적 휴식과 레크레이션의 시간이 필요하며 주일 외에는 예배를 위해 모일 시간과 기회가 없다. 주일이 노동 계급에게 휴식과 예배의 시간을 제공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이 사상은 칼빈에게 그대로 재현된다.

대요리문답과 같은 해에 씌인 소요리문답에서 루터는 제 4 계명의 의미를 오직 말씀 교육이라는 차원에서 발견한다. “제 4 계명의 의미가 무엇이뇨?” 하는 질문을 제기한 후 그는 이렇게 답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함으로 그의 말씀을 멸시하지 말고 그것을 거룩한 것으로 여기며 그것을 기꺼이 청종하고 배워야 한다.”20) 다소 엉뚱하게까지 보일 수 있지만 루터는 신약 시대 신자들에게 있어 제 4 계명이 특정한 날을 거룩하게 여기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고 단지 하나님 말씀을 거룩하게 여겨 그것을 듣고 배우는 데 그 의미가 있다고 해석했다. 날에 대한 존중이 아니라 말씀에 대한 존중이 제 4 계명의 현대적 의미라는 것이었다.

루터에게는 주일이 다른 날보다 특별히 더 거룩하다는 개념이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매일이 거룩한 날임을 강조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모든 날들을 거룩히 여겨 거룩한 일에만 몰두해야 한다. 그것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그것을 우리 마음과 우리 입술에 간직하는 것이다.” 한 날이 다른 날보다 나은 것도 아니며 예배는 매일 드려야 하는 것이므로 그 일을 행할 시간을 유대인들처럼 특정한 날에 국한시킬 필요는 없다는 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루터는 “최소한 이레에 하루”는 그 목적을 위해 할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여드레나 열흘 만에 하루를 예배에 할애하는 것은, 그가 보기에, 예배드리고 말씀 배우는 목적을 위해 불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러므로 “이레에 하루”라는 것은 7이라는 숫자 그 자체에 신비한 영적 신학적 의미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실제적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최소한의 시간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어떤 계산에서 꼭 7일이 그 최소한의 시간에 해당하는가에 대해서는 말이 없었다. 어쨌든 최소한 칠일에 하루는 예배를 위해 모여야 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예배드리기 위해 자주 모일 형편에 있지 못한 “대중들”을 위해서였다. 주일의 본질적 목적은 아직 어린 자들과 대중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그러므로 이 날들의 진정한 직분은 말씀의 사역의 직분이며 젊은이들과 가난한 무리들을 위한 것이다.”

그 목적을 위해 고대에 일요일이 지정되었는데 비록 그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 아니고 교회나 사람들이 정한 것이기는 하나 루터는 우리가 그 날을 변경해서는 안 된다고 충고했다. 그 이유는 종교적이기보다는 실제적인 것이었다. 안식일이 “통일적으로” 지켜져야 “불필요한 변화로 인한 무질서”가 야기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21) 그러므로 루터에게 있어서는 일요일 제도라는 것이 계시적 제도라기보다는 철저히 정치적이고 실용적인 것이었다. ""Sabbath and Sunday in the Post-Apostolic Church," in From Sabbath to Lord's Day: A Biblical, Historical, and Theological Investigation, ed. D. A. Carson (Eugene Or: Wipfand Stock Publishers, 1999), 제 9장을 보라. 특히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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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일을 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간주되었던 것이,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리고 콘스탄틴의 칙령 영향도 있고 해서, 7세기 경이 되면 종일토록 노예적인 일을 삼가야 한다는 의무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보캄은 안식일 전이의 신학, 즉 주일이 안식일에 비견될 수 있으며 제 4 계명의 요구 사항들이 주일 성수로 전환되었다는 주장은 주일 예배를 위한 안식의 사상에 신학적 이유를 제공하고 성경적 근거에서 그것을 의무화하기 위한 시도의 결과였다고 주장한다. 그는 또 어거스틴이 기독교 윤리의 근거로 십계명의 지속적인 유효성과 중심적인 위치를 인정함으로써 토마스 아퀴나스가 안식일 전이 신학을 전면적으로 정당화할 수 있는 길을 닦았고, 아퀴나스의 견해는 후대 청교도 안식일주의와 19세기 영국 안식일주의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지적한다. 92)

이와 유사한 식의 사고가 기독교 집단에 널리 퍼져 있다고 지적하면서 링컨은 그 근본적 접근과 전제들에 있어 잘못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첫째는 자연법 사상이다. 안식일이 자연법의 일부이므로 주일 성수는 특별 계시의 도움 없이도 인간 이성만으로 발견할 수 있는 도덕적 계명이라는 것이다. 아퀴나스는 예배를 위해 정기적으로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자연법의 요구라고 주장했다. 장키우스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레에 하루를 공적 예배에 바치는 것은 자연이 가르치는 바라고 주장했다. 이 주장의 문제점은, 자연법이 그 존재를 위해 하나님에게 의존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그 법에 대한 지식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둘째, 자연법에 근거한 논증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은 자연법이 십계명으로 요약될 수 있다는 신념이다. 안식일주의 신학은 항상 십계명에 호소해 왔으나 링컨은 자연법과 계시된 도덕법 양자의 요약으로서 십계명의 중심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도들의 가르침 안에 그의 도덕적 성격을 보다 온전히 드러내셨다고 주장한다. 또 십계명 속에 표현된 하나님의 뜻은 부분적이고 역사적 제약을 받기 때문에 오직 그것이 신약에 의해 재확인되는 경우에만 구속력을 가진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십계명의 다른 주된 부분들은 그런 식으로 재확인되고 있으나 제 4 계명은 그렇지 못하다. 그러므로 십계명은 그 전체로서 구속력을 가지는 도덕법은 아니다. 십계명 속에 “의식법적인 것이나 모형적인 것은 전혀 없으며 따라서 폐기된 것도 전혀 없다”고 주장하는 바운드같은 안식일주의자들은 제 7일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이유를 제시하지 못 했다. 십계명 전체가 도덕법이므로 제 4 계명도 영구적 구속력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자기 주장에 일관성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제 7일 안식교 신자가 되는 것이라고 링컨은 못박는다. 93)

셋째, 제 4 계명과 관련한 의식법과 도덕법의 구분이다. 제 7일 안식교 신자가 되는 것을 피하면서도 안식일 전이 신학을 고수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제 4 계명의 의식법적 측면은 “제 7일”이라는 요소이며, 그 도덕법적 측면은 “이레에 하루”의 원리로서 그 날에는 모든 “노예적 일”을 삼가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속사도 시대에 발전된 의식법과 도덕법의 구분은 율법에 대한 신약의 태도를 정당하게 평가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체로서의 율법에 대한 연속성과 비연속성의 상호 작용라는 관점에서 요약될 수 있다. 거기서 결정적인 요소는 모세 법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의 새로운 표현에 대해 가지는 관계이며 그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 일어난 새로운 상황이다. 만일 예루살렘 공의회의 사도들이 제 4 계명과 관련해 어떤 식으로든 도덕법과 의식법의 구분을 주장했더라면 그것의 구속력있는 도덕법적 성격에 대해서 언급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도덕법과 의식법 구분만으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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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Ibid., 8장, 10장.

93) A. T. Lincoln, “From Sabbath to Lord's Day: A Biblical and Theological Perspective," 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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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일 전이의 신학을 확립하기에 불충분하다는 것이다.

한편, 이 연구는 주일 예배의 규범성 여부를 판단하는 데 있어 “주의 날”이라는 표현이 결정적 단서라 본다. 루터나 칼빈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요한계시록 1:10에 나오는 “주의 날”이라는 표현의 의미를 과소평가했다는 것이다. 안식 후 첫날에 대해 “주의 날”이라는 타이틀이 주어졌다는 것은 그것이 단지 편리와 실용성보다 훨씬 더 큰 중요성을 가진 문제임을 시사한다는 것이 이 연구에 참여한 학자들의 판단이다. 이 어구는 최소한 요한의 교회들의 관습에 있어 전례가 이미 확립되었으며 요한이 그것에 동의했음을 보여 준다. 그리하여 주일 예배의 경우, 신약 성경에 반복되는 패턴이 나타나며, 계1:10에서 보는 대로, 그 패턴은 확고해졌다. 그리하여 이 연구는 다음과 같이 결론을 짓는다. “주일 예배의 관습은 단지 고대성의 권위를 지닌 것이기 때문에 추천할만한 것일 뿐 아니라 정경적 권위의 표를 지니는 것이라 주장할 수 있다.”94)


폴 주잇의 [주의 날]

풀러 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있던 폴 주잇은 70년대에 쓴 [주의 날]이라는 연구서에서 바른 주일 성수법을 믿음으로 자기 일을 쉬는 것이라 주장하여 제 4 계명의 문자적 안식의 개념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에 대한 신뢰를 버리고 구원과 생존을 위해 그리스도만을 의지한다는 의미에서의 안식이지 이런저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적 금지의 의미에서의 안식은 아니라고 그는 주장했다. 오히려 그는 주일이 기쁨의 날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런 저런 금기 사항과 금지에 얽매여 단지 지루하고 할일 없는 날로서의 율법주의적 안식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뻐하고 축하하는 주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또 주일은 예배의 날이어야 한다는 점을 주일의 본질적 핵심으로 제시했다. 주의 날에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서로 서로 그리고 부활의 주와 교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95) 모든 날을 같게 보는 종교개혁가들과는 달리 쥬잇은 주일의 특수성을 인정했다.

그는 자기 저서의 주제를 “소망 속의 성취”(fulfillment in hope)라는 말로 정리하면서 제 4 계명의 안식 가운데는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성취된 부분이 있지만 아직 종말적 완성을 기다리는 부분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그는 종말의 완전한 안식의 예표로서 주일의 문자적 안식이 아직도 지켜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주일의 육체적 안식이 아직도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어야 할 제 4 계명의 실체적 요소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앞에서 소개한 카슨이나 링컨을 비롯한 복음주의 신학자들과 차이가 있다.

한편, 웨스터민스터 신학교의 조직 신학 교수 개핀은 자기가 섬기는 학교의 설립 목적에 충실히 부응하여 60년대부터 줄기차게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의 안식일관을 옹호하는 글들을 발표해 왔다. 그의 저서 [칼빈과 안식일]에서 그는 칼빈의 안식일 신학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또 80년대에 쓴 논문에서도 그는 히브리서 3-4장을 근거로 아직 성취되지 않은 안식의 측면을 강조하면서 종말적 미래에 완성될 안식의 예표로 매주 첫 날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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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 Ibid., 388.

95) Jewett, 165-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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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신약시대의 안식일과 주일 이해


아래에서는 주로 안식일과 주일을 언급하는 신약성경의 본문들과 함께 2세기의 기독교 문헌들을 참고하여 초기 그리스도 교회의 주일 이해를 탐구하고자 한다. 2세기의 기독교 문헌들을 참고하는 것은 그것들 안에 주일 준수에 대한 사도시대의 생각과 자세가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안식일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도 바울의 가르침을 정리하여 안식일에 대한 신약성경의 관점을 제시할 것이다. 이어서 ‘주간의 첫 날’ 또는 ‘주의 날’이라는 표현이 분명하게 등장하는 사도행전 20:7, 고린도전서 16:2, 요한 계시록 1:10의 의미를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2세기의 기독교 문헌들을 참고하여 ‘주의 날’의 성격을 밝히고 주의 날과 안식일의 관계를 설명할 것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안식일

안식일 제도와 규정들을 여러 부분에서 상세하게 제시하는 구약성경과는 달리 신약성경에는 안식일에 관한 언급이 자주 등장하지 않는다. 사복음서에서 안식일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논쟁을 벌이는 맥락에서 나타나며, 사도행전에서는 주로 바울 사도가 유대인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맥락에서 등장한다. 예수님은 갈릴리와 유대지역에서 유대인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셨으므로 당시 유대인의 중요한 종교적 관례인 안식일을 지키셨다. 바울을 포함한 사도들도 이방 지역의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안식일 규례를 존중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과 사도들의 그런 행동이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규범은 아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심으로 구원의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이 사실이나, 부활과 승천, 특별히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옛시대와 새시대가 공존하는 구원사의 과도기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예수님은 율법에 근거한 유대교의 기존 질서와 체제를 존중하셨던 것이다. 또 오순절 성령 강림과 함께 교회의 시대가 시작되었으나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새시대의 의미를 충분하게 이해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그들은 상당 기간동안 예루살렘 성전과 율법 중심의 유대교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러나 안식일은 예수님과 그의 사역을 통해 성취되었다. 사도들과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새시대의 도래와 그 의미를 깨닫게 됨으로써 문자적인 유대교의 안식일 준수에서 벗어나 주일을 준수하게 되었다. 이런 사실은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님의 말씀과 바울 서신에 나타난 말씀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예수님과 안식일

예수님은 안식일 문제로 제자들을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다(막 2:27). 96) 안식일은 사람들에게 부담과 고통을 주는 날이 아니라 그들이 즐거움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특별한 선물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은 안식일을 대하는 바리새인들의 의식의 전환을 촉구하신다. 안식일을 절대화하여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생각하는 관점을 버리고, 사람의 즐거움과 안식을 위해서 안식일을 제정하신 하나님의 관점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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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6) 참조. 로버트 귤리히, 『마가복음 1-8:26』, 김철 옮김(서울: 솔로몬, 2001), 23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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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안식일에 예수님은 베데스다 연못에서 38년 된 병자를 고쳐주신 후 자신을 비난하는 유대인들에게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당당하게 응대하신다(요 5:17). 창조 사역 후 일곱째 날에 쉬셨던 하나님은 인간들이 하나님의 안식에 함께 참여하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죄로 인해 그들은 그 안식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담의 타락 이후 자신의 본래 목적을 이루시려고 계속 일하신다. 하나님의 보냄을 받고 세상에 오신 예수님도 진정한 안식을 이루기 위하여 일하신다.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가 누워 있는 것은 더 이상 세상에 안식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님은 진정한 안식이 없는 세상에 오셔서 죽음과 고난을 이기시고 안식을 이루신다. 안식일에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것은 그가 종말에 진정한 안식을 가져오는 분임을 극적으로 드러낸 사건이다. 97)

예수께서 안식일을 피하여 다른 날 병자들을 고쳐주셨다면 사람들의 비난이나 충돌을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고집하신 것은 안식일의 의미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안식일의 의미는 회복과 메시야 시대라는 주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고친 일은 메시야적 안식일, 즉 구약적 안식의 완성이 세상에 도래하였다는 것을 보여 주는 행동이다. 그러므로 어느 날 보다 안식일은 예수께서 병자들을 고치는데 합당한 날이었다. 98) 요컨대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자나 귀신들린 사람을 고치신 것은 안식일 계명을 어긴 것이 아니라 그 의미를 드러내고 성취하신 메시야적 구원 행동이었던 것이다.

안식일과 관련해서 복음서가 가르쳐 주는 가장 중요한 사실은 예수님이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것이다(마 12:8; 막 2:28; 눅 6:5).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대해 성부 하나님과 같은 절대적 권한을 가지고 계신다.99) 예수님은 안식일을 성취하심으로써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제7일로서의 안식일을 더 이상 문자적으로 지키지 않게 만드셨다. 그는 안식일 폐지나 주의 날 제정을 직접 말씀하신 적이 없다. 그러나 폴 주엣(Paul K. Jewett)이 옳게 지적하는 대로, ‘기독교 사회를 특징 지워주고 기독교를 유대교로부터 구별하게 만든 안식일 성수에 대한 자유는 예수님이 자기를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주장하신 바로 그 자유에 근거를 둔 것’이다. 100)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사역을 통해서 안식일의 주인인 예수님을 안식일의 적용과 초월을 결정하실 수 있는 ‘주님’으로 인식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예수님의 권위에 의지해서 일곱 번째 날인 ‘안식일’을 첫 번째 날인 ‘주의 날’로 대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바울과 안식일

사도 바울은 안식일에 관해 거의 거론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골로새서 2:16에서만 안식일을 언급할 뿐이다. 안식일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지만 갈라디아서 4:10과 로마서 14:5도 안식일에 관한 사도 바울의 관점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본문들이다.
갈라디아서 4:10에서 사도는 갈라디아의 이방인 성도들이 ‘날들과 달들과 절기들과 해들’을 지키는 것을 크게 우려한다. 이 본문에서 바울은 안식일을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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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김세윤, “참 안식, 그것은 예수님이 가져오신다,” 『목회와 신학』 통권 141호 (2001년 3월): 91.

98) 폴 주엣, 『주일의 참 뜻: 성서적․신학적․역사적 고찰』, 옥한흠 옮김 (서울: 개혁주의신행협회, 1976), 44.

99) Carson, “Jesus and the Sabbath in the Four Gospels,” 66.

100) 주엣, 『주일의 참 뜻: 성서적․신학적․역사적 고찰』,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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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다. 그러나 가장 먼저 열거한 ‘날들’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의 안식일과 속죄일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101) 갈라디아의 이방인 성도들은 유대주의자들의 주장에 굴복하여 안식일과 월삭,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 희년 등에 관한 규례를 지키기 시작하였다. 사도는 그런 행위를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종노릇하는 것으로 간주하였다(4:9). 안식일 준수를 이방인 신자들에게 부과하려는 시도는 전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바울 당시에 많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은 예수를 믿고 난 뒤에도 안식일을 포함한 유대인의 절기들을 계속해서 준수하였다. 사도는 구원과 관계없이 자신들의 관습의 일부로 안식일과 절기들을 지키는 것에 반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의롭다함을 얻는 조건으로 지키는 것은 단호하게 반대하였다.

로마서 14:5에서 바울 사도는 로마교회에서 일어난 소위 ‘약한 자들’과 ‘강한 자들’ 사이의 갈등을 언급하면서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라고 권고한다. 이것은 ‘날’을 지키는 것이 중대한 문제를 불러일으켰음을 보여준다. 강한 자들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긴 반면에 약한 자들은 어떤 날을 다른 날들보다 더 거룩하게 여겼다. 102) 로마 교회에서 문제가 된 날은 다양한 축일들과 안식일을 포함한 유대교의 거룩한 날들이었다. 그 가운데서도 안식일 준수가 가장 큰 문제로 부각되었음에 분명하다. 안식일 준수는 음식법과 함께 1세기 유대교의 중요한 특징이었으며 초기 교회들 안에서 자주 갈등의 요인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갈 4:10; 골 2:16). 103)

사도는 안식일을 다른 날보다 거룩하게 생각하여 계속 준수하는 약한 자들을 비판하거나 책망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강한 자들의 손을 들어주지도 않는다. 도리어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라고 권면한다(14:5). 또 약한 자들은 강한 자들을 판단하지 말고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을 업신여기지 말라고 촉구한다(3, 10절).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것처럼 서로 받아야 한다(15:7). 이러한 권면은 바울 사도가 안식일(과 다른 거룩한 날들)의 준수를 개인의 양심 문제로 간주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5:1)는 진술은 사도 바울이 자신을 강한 자들과 동일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어느 한 날을 다른 날보다 더 거룩하게 여기는 약한 자들의 자세보다 모든 날들을 같게 여기는 강한 자들의 자세가 그리스도 안에서 도래한 구원의 새로운 시대에 더 적절하다는 것이다.

안식일에 관한 바울 사도의 관점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본문은 골로새서 2:16이다. 여기서 그는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고 경고한다. 골로새 교회는 외부에서 들어온 거짓 교사들 때문에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본문은 그들이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월삭, 안식일과 관련해서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폄론하려 했다는 것을 알려준다. ‘폄론하다는 말은 ‘판결을 내리다’라는 의미이다. 거짓 교사들은 안식일을 포함하여 먹고 마시는 것, 절기, 월삭에 관한 율법의 규정들을 지키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필수적인 요소로 간주했음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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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 Bruce, Galatians, 205; Dunn, Galatians, 227-28; Longenecker, Galatians, 182.

102) Douglas Moo, The Epistle to the Romans (NICNT; Grand Rapids: Eerdmans, 1996), 841-42.

103) Moo, Romans, 842; James D. G. Dunn, Romans 9-16 (WBC; Dallas: Word Books, 1988), 805-6.

104) de Lacey, “Sabbath/Sunday Question,”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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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그들은 그런 규정들을 신앙이나 경건의 정도를 판단하는 척도로 사용하였다. 그런 규정들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경건한 신자가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던 것이다.

골로새서 2:17에서 사도는 안식일을 포함한 음식과 거룩한 날들에 관한 율법 규정들을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라고 말한다. 유대적 율법 규정들이 그림자라면 그것의 실체(=몸)는 그리스도이다. 그림자는 실체가 올 때까지만 존재하는 잠정적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알려주는 율법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를 지향한다. 이제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으며, ‘장차 올 것들’도 그와 함께 도래하였다. 따라서 그림자에 속한 것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판단하는 척도가 될 수 없다. 105) 유대적인 율법 조항들에 근거해서 기독교 신앙과 경건을 판단하거나 그것을 대체하려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

이 본문은 음식과 거룩한 날들에 관한 모세 율법의 규정들이 신약 교회의 성도들에게 더 이상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것들은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이며 잠정적인 옛 시대에 속한 것이므로 새시대의 영구한 실체가 온 뒤에는 구속력을 상실할 수밖에 없다. 106) 안식일도 옛시대에 속한 것이라서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에는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속력을 갖지 못한다. 예수를 믿고 난 뒤에도 자신의 신앙과 양심으로 판단하여 안식일을 계속 준수할 수는 있다. 그리스도 안에만 구원이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성도가 개인의 경건을 위해 안식일을 준수하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구원사적으로 볼 때 안식일 준수는 잠정적인 옛시대에 속한 것이므로 새시대에는 적절하지 않다. 안식일 준수는 장차 올 것들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안식일에 누리는 안식은 그리스도가 주시는 영원한 안식의 그림자이다. 실체이신 그리스도가 오신 이후에 그리스도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자들은 더 이상 그림자를 실체인양 붙들어서는 안 된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주의 날’(Lord's Day)

그러나 신약성경은 어디에서도 안식일을 버리고 ‘주의 날’을 기독교의 안식일이나 예배일로 지키라고 말하지 않는다. ‘주의 날’(kuriakh. h`me,ra)이라는 표현은 요한계시록 1:10에서만 나타날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교회는 매우 이른 시기부터 안식일이 아닌 ‘주의 날’을 회중의 공적 예배일로 간주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요한계시록 1:10뿐 아니라 사도행전 20:7(‘안식 후 첫날’)과 고린도전서 16:2(‘매 주일 첫날’)에 반영되어 있다.


사도행전 20:7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안식 후 첫 날’에 공적인 예배를 드리기 위해 함께 모인 것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최초의 본문은 사도행전 20:7이다. 누가는 바울과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안식 후 첫날에’ 떡을 떼기 위하여 모였다고 기록한다. 개역성경에서 ‘안식 후 첫 날에’라고 번역한 헬라어 표현(evn th/ mia/ tw/n sabba,twn)은 ‘주간의 첫 날에’(the first day of the week)를 의미한다. 이 표현에서 복수 명사 ‘사바톤’(sabba,twn)은 ‘안식일들’이 아니라 ‘칠일로 이루어진 기간’(a period of seven days), 즉 ‘주간’(week)을 가리킨다.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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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 A. J. Bandstra, The Law and the Elements of the World: An Exegetical Study in Aspects of Paul's Teaching (Kampen: J. H. Kok, 1964), 93.

106) Eduard Lohse, Colossians and Philemon, trans. W. R. Poehlmann and R. H. Karris (Hermeneia; Philadelphia: Fortress, 1971), 117; Peter T. O'Brien, Colossians, Philemon (WBC; Waco: Word Books, 1982), 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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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일행과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이 주간의 첫날에 함께 모인 것은 떡을 떼기 위해서였다. 함께 모여서 떡을 떼는 일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것이다. 그것은 잡히시던 날 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특별한 방식으로 떡을 떼시던 주님을 상기시킨다. 그뿐 아니라 안식 후 첫날 떡을 떼는 것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에게 나타나셔서 떡을 가지고 축사하신 후에 떼어 주시던 부활의 주님을 기리는 것이다(눅 24:30-31, 35). 주간의 첫 날에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바울과 그의 일행들과 함께 교제의 식사를 갖고 ‘주의 만찬’을 시행하기 위해서 모였던 것이다. 108)

본문에서 주간의 첫 날에 함께 모인 목적을 떡을 떼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힌 것은, 드로아 지역의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주간의 첫 날에 이런 모임을 갖는 것이 관습처럼 이루어졌음을 암시한다. 물론 이 본문에는 주간의 첫 날을 공식적인 예배일로 지키라는 명령도 없고 주간의 첫 날의 모임을 모든 교회가 따라야 할 규범으로 제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적어도 이 본문은 드로아 지역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주간의 첫 날’에 함께 모였으며, 그 날을 주의 만찬과 함께 공동식사를 갖기에 적절한 날로 간주하였음을 보여준다. 복음서에 기록된 부활 기사들은 ‘안식 후 첫 날’, 즉 ‘주간의 첫 날’에 예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반복해서 언급한다(마 28:1; 막 16:2, 9; 눅 24:1; 요 20:1). 드로아의 그리스도인들도 예수께서 부활하신 주간의 첫 날에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거행하면서 주의 부활을 기념하고 즐거워했던 것이다. 바울과 그의 일행이 드로아에서 이레 동안 머물면서 ‘주간의 첫날’까지 기다린 것을 보면, 그 날이 그리스도인들이 떡을 떼기 위해, 즉 주님을 기리면서 식사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날이었음을 알 수 있다.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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