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고신의 교단 설립 50년 역사의 의미와 평가(1) - 이만열 [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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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 고신의 교단 설립 50년 역사의 의미와 평가(1) - 이만열 [고신]


분류: 교단- 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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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고신은 1952년 9월 11일 총노회로 정식 발족합니다. 형식을 좋아하고 체제를 본질적인 것이라고 여기는 일반 장로교 체제에서는 문서 기록에 남아 있어야 출발시점이 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고신에 뿌리를 가지거나 우호적이면서도 고신 외부에 있는 이들에게 외부에서 본 "고신 50년"을 부탁하여 발표된 글입니다. 고신의 역사, 그 성격 등 여러 면을 볼 수 있습니다. 고신의 역사는 곧 백영희신앙노선의 초기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남달리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참고로 이곳은 고신의 역사를 "진리운동의 탈선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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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 : 59 등록일 : 2002-06-12
교단설립 50주년 기획특집 / 고신 50년을 말한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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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고신 50년 역사의 의미와 평가

고신교단은 올해로 50주년을 맞는다고 공식화하고 있다. 50주년의 기원을 1952년 9월 1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모인 제57회 경남(법통)노회가 총노회 조직을 결의하고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노회를 조직한 것에서 찾기 때문일 것이다.

고신교단이 조직된 배경에는 거슬러 올라가면, 한국교회가 일제하에서 신사참배에 굴복하는 등 타락하고 변질되어 전통적인 교회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자각이 전제되어 있었다.
신사참배와 한국교회의 변질은 일제가 1931년 만주사변과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면서 그 전후한 시기에 국민정신을 획일화하고 통제하기 위해 강요한 것이기도 하지만, 한국교회가 일제의 강요에 타협하고 굴복한 결과로 나타난 당연한 결과라고 할 것이다.

1936년 천주교회와 감리교단이 신사참배를 교단 차원에서 ‘국가의식’으로 수용, 타협하게 되자, 일제는 신사참배 저항의 최후의 보루라고 할 장로교단에 비수를 들이댔다. 1938 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교회에서 모인 제27회 총회는 개회 첫날 임원개선으로 홍택기(회장) ·김길창(부회장) 등을 선출하고, 이튿날 27개 노회대표 193명이 출석한 자리에 경관 97명이 동원된 가운데 사전 각본에 따라 평양노회장 박응률의 제안과 평서노회장 박일현의 동의, 안주노회원 길인섭의 재청을 계기로 회장 홍택기는 가(可)만 묻고 부(否)는 묻지 않은 채 만장일치의 가결을 선포해 버리고 말았다.

내용은 “우리들은 신사는 종교가 아니요 기독교의 교리에 위반하지 않는 본의를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임을 자각하며 이에 신사참배를 솔선수범한다”는 것이 요지다. 그 날 부회장 김길창의 인솔로 전국 노회장 23명이 총회를 대표하여 평양신사에 참배했고, 그 뒤 신사참배의 회오리는 전국적으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주목되는 것은 경남노회 소속으로 신사참배에 앞장섰던 김길창이 해방 후 경남노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회개운동에 반대하면서 그 노회를 분열시켰을 뿐만 아니라 신사참배 회개를 외쳤던 경남(법통)노회를 총회로부터 축출하는 데 앞장섰던 장본인이라는 사실이다. 역사는 이렇게 잘못을 회개하지
않는 자가 자기아집에서 벗어나지 않을 때 점차 왜곡되어짐을 볼 수 있다.

신사참배를 용납했던 한국교회의 이질화현상은 가속화되었다.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교역자들이 목회일선에서 축출되었고, 교회당 안에 작은 신사를 설치하고 예배에 앞서 거기에 참배하도록 했는가 하면, 교회당을 국민정신을 훈련하는 도장으로 변질시켰다. 교역자들끼리의 이간질과 고자질이 일삼아졌으며, 교회의 종을 떼어다가 군수공장으로 가져가 무기를 만들었다. 그리고 교회는 국방헌금을 내어야만 했고, 일본적 기독교를 강요하면서 심지어 사복음서 외에는 기독교 경전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고, 찬송가 중에서도 자유와 투쟁을 고취하는 것을 부르지 못하도록 강제했다. 신사참배에 타협한 것이 한국교회를 이렇게 만신창이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해방 후 출옥성도들이 왜 저렇게 처절할 정도로 한국교회의 회개운동과 정화를 외쳤는가 하는 것은 일제 말의 이 같은 한국교회의 변질을 깊이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신사참배를 비롯한 한국교회의 타락과 변질이 강요되고 있을 때 여기에 분연히 맞서 싸운 믿음의 선진들이 있다. 일제의 태양신과 싸운 이들이다. 그들 중에는 20여명 이상이 순교했고, 더 많은 수가 옥에 갇혀 죽음을 기다려야 했다. 일제가 1945년 8월 18일에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죽이려고 계획했다는 전언은 8.15해방이 이들 태양신에 굴복하지 않은 충성된 종들의 생명을 지켜 이들에게 한국교회의 정화와 재건을 맡기려고 계획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읽게 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태양신과 맞서 싸운 신사참배 투쟁자들이 해방 후 출옥하여 한국교회의 통회와 정화를 외쳤던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회개를 외치지 않고 침묵했더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자들이 되었을 뿐아니라 한국교회에 맡긴 책임조차 회피하는 존재들로 낙인찍혔을 것이다. 그들은 시대적인 사명을 의식했고 그것을 성실히 감당하려고 했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한국교회가 그들의 주장을 겸손히 수용하여 재를 무릅쓰고 회개하지 못했음을 고백하는 것이 정직할 것이다. 앞서 말한 1952년의 총노회의 조직은 바로 이런 한국교회의 회개와 정화를 외쳤던 이들이 한국교회의 회개운동을 더 적극화하기 위해 취한 부득이한 조치였
다.


■ 출옥 성도들의 진리운동

여기서 해방 이후 출옥성도들의 한국교회를 향한 회개·정화운동이 외로운 ‘진리운동’의 과정을 거쳐 ‘고신파’의 탄생으로 이어지는 점에 대해서는 상론할 여지가 없다. 다만 몇 가지는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대목이 있다. 우선 해방 후의 교회의 회개·정화운동이 교회만의 것이 아니었다는 인식의 확대가 필요하다. 식민지에서 해방된 민족이 새로운 사회를 조성하기 위해서는 나름대로의 통과의례가 꼭 필요하다. 그것은 식민지의 잔재청산이다.

우리나라도 해방 후 일제 35년 동안에 찌들고 엉겨붙은 식민지 잔재가 우리의 새롭고 건강한 사회건설을 저해하는 독소적인 요인이었기 때문에 시급히 청산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미 군정과 이를 이은 정권은 이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 못하는 정도가 아니라 친일세력을 온존시켜 해방과 함께 맞아야 할 민족적인 희망마저 송두리채 앗아갔다. 일제하에 반민족행위를 한 이리떼들이 해방 후 주권을 찾은 나라에서 양의 탈을 쓰고 나타나는가 하면, 오히려 하등의 양심적인 가책은커녕 떵떵거리며 살게 되었으니, 상식있는 국민에게는 역사허무주의를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친일파의 온존은 일반 사회에서 일제 잔재가 청산되지 않은 것을 의미했다.

그런 현상은 바로 교회 안에서도 신사참배에 앞장 선 이들이 교계의 주도권을 쥐고 회개·정화운동에 걸림돌이 되는 같은 역사로 되풀이되었다. 일제하에서 신사참배에 앞장섰고 일제와 타협하여 한국 교회를 만신창이로 만들어놓은 장본인들이 회개하고 한국교회의 정화운동에 협조하기는커녕 자기변명에 급급하면서 오히려 자신의 변절을 한국교회를 위한 의로운 희생으로 간주하고 과시하려는 경향마저 드러내 보였다. 이 때 한국교회가 출옥성도들의 건의를 수용하여 교회안의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는 회개운동에 앞장섰다면, 그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친일파 청산이 적극화시키는 계기를 만드는 등 한국사회 전체를 새로운 단계로 높여놓는 결과를 가져 왔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일제 신사참배와 교회의 변질에 앞장섰던 이들이 해방 후에도 교권을 장악하는 바람에 교회 안에서는 정화운동의 활성화를 통한 교회의 재건은 어렵게 되었고 ‘진리운동’에 앞장 선 무리들은 소수로 전락하여 외로운 투쟁을 벌이지 않으면 안되게 되었고 일반 사회에서는 일제 잔재 청산을 무산시켜 버리고 말았다.

또 하나 생각할 것은 총노회조직으로 고신파 성립에 이르는 과정을 본다면, 절차상의 하자를 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출옥 후에 목회자들의 최소한 2개월 자숙 등 한국교회의 재건 방향을 제시한 것이나, 법통노회에 반대하는 또 하나의 경남노회를 만들어 그것으로 기존의 경남법통노회를 대체하려는 시도에 대해 적절하게 반대한 것은 과정상의 하자를 발견하기 힘들다. 또 1950년 4월 21일 대구 제일교회에서 열린 제36회 총회로부터 시작하여 그 이듬해 1951년 5월 25일 부산 중앙교회당에서 속개된 제 36회 총회에 이르기까지 총회 별위원들의 보고에 의해 경남법통노회가 총회로부터 축출당하는 과정에서도 과정상의 하자를 발견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과정상의 하자없음이 반드시 자기존재의 정당성을 보증해 주는 것은 아니다. 이런 문제는 뒷날 고신이 더 성숙한 위치에서 자기존재를 점검할 때에 반드시 제기될 수 있는 문제라고 보여진다.


■ 일제 청산운동과 고신의 분립

총노회를 발족시킨 고신파는 일제잔재의 청산으로서의 회개 정화운동이 유효할 때에는 분립의 명분 또한 뚜렷했고 때로는 과시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고신파의 분립이 한국교회 분립의 단초를 열었고, 그 뒤 백수십개의 교단으로 나뉘는 장로교 분열사의 첫페이지에 자리잡고 있었다는 것은 그 명분을 약화시키는 요인이 되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이렇게 분열의 명분이 점차 사라지고 있을 무렵, 고신은 분립의 이미지와는 달리 오히려 교회합동을 통해 자기 이미지를 갱신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도 했다. 소위 승동측과의 합동 이 그것이다. 이 합동은 “진리는 영원히 살아있어 필요가 있을 때마다 생명의 새역사를 창조하신다”는 점을 강조하고, 또한 “금일 두 총회 합동도 이 역사의 한 토막인 것만은 사실”이라는 점을 상기하면서 시도되었다. 이렇게 이뤄진 1960년의 고신측·합동측의 합동총회는 자신들을 대한예수교 장로회의 전통을 계승한 유일한 법통총회로 선언하면서 1951년 5월 25일 제36회 총회에서 결의한 경남법통노회 불인정 결의를 취소하는 한편 고신 10년간의 역사를 대한예수교장로회의 이원적인 사실로 수록한다고까지 약속했다.

그러나 고려신학교 문제 등으로 3년만에 환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고신파’의 환원은 합동 당시 600여 교회와 6만 7천여 교인에서 교세 3분의 1을 잃은 445교회만이 환원하는 교세면의 약화를 가져왔을 뿐만 아니라 모처럼 씻을 수 있었던 ‘소수 분리주의자’로서의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아직도 고신이 합동과 환원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를, 신사참배 회개와 한국교회의 정화를 내걸고 출발했던 고신의 출발 때만큼 스스로 확실하게 평가하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고신은 그 뒤에도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소위 교회안의 형제와의 소송문제로 다시 분열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교회안의 소송문제가 계기가 되었지만 거기에는 고신교단이 갖고 있던 지역적인 문제와 나름대로의 전통의 문제가 있었다. 고신운동의 중요한 거점인 부산지역과 마산지역의 갈등이 표면화하는 형태로 나타난 이 분열은 거슬러 올라가면, 고신 형성의 두 큰 축과도 관련있는 것이다. 고신은 신사참배 투쟁자들인 출옥성도의 한국교회 정화세력과 1920년대 한국교회 절제운동의 맥락을 잇는 세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전자를 한상동 목사가 대표한다고 하면, 후자는 송상석 목사가 대표한다. 송 목사는 젊은 시절1920년대 이후 한국 장로교회의 절제운동을 이끌어왔는데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와 사회의 또 하나의 정화운동을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해방 후 신사참배 반대투쟁자들의 한국교회 정화운동은 빛을 발했으나, 절제운동의 전통은 제대로 계승하지 못했다. 고신은 이 두 전통을 이어 받았으면서도 해방 후에 활용하지 못한 점은 반성할 수 있어야 한다. 두 축이 같이 빛을 발하고 전통을 계승했을 때 고신 운동은 더욱 힘을 얻고 한국교회를 향한 호소력 또한 극대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형제간의 소송문제가 계기가 된 이 분열의 아픔에는 지역적·신앙전통간의 이러한 격차를 좁히지 못한 데서 재래된 것이었다.


■ 창조적 개혁운동의 계승을

이제 글을 끝맺을 시점이다. 고신 50년을 회고하면서 많은 것을 되돌아보게 한다. 해방 후 열화와 같이 일어난 회개·정화운동이 왜 활활 타지 못하게 되었는가. 단순히 교권주의자들의 욕심 때문 만이었을까. 이 점과 관련, 지금도 당시의 교권주의자들을 옹호한 글에서 해방 당시 정화운동자들의 독선을 비방하고 있는 것을 외면해야만 할 것인가. 해방 이후 일제 잔재를 청산해야 한다는 당위적인 주장이 아직도 설득력을 갖고 있다면 고신의 주장이 당시 뿐만 아니고 지금도 설득력이 있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고신의 존재의의를 거기에서 찾으려는 이들은 고신 안에서도 거의 없는 듯하다. 지난 번 모인 SFC동문 모임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이것은 당시의 한국교회 정화운동을 시대에 따라 창조적인 개혁운동으로 계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집안에 귀한 전통을 가졌다는 것으로 자부심만 가질 것이 아니고 그것을 시대변화에 조응하면서 때로는 창조적으로 상품화하는 등 활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은 날마다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신다는 것을 50주년을 맞는 이 시점에 고신교단은 명심할 필요가 있다.



이 만 열 교수

숙명여대 한국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