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한국교회 연합 운동과 고신 - 고신 50년을 말한다 (9) [고신]
분류: 교단- 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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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단설립 50주년 기획특집 / 고신 50년을 말한다 (9) / 이성구 (대학원)
■ 분열로 시작된 한국교회
한국교회의 연합을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한국교회 분열의 문제를 짚어보지 않으
면 안 된다. 이 문제를 생각할 때면 필자는 항상 억울하다는 생각부터 먼저 하게 된다. 한
국교회가 장로교 감리교 성결교 침례교 성공회 등으로 나누어진 것은 우리가 원했거나 주도
한 일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세워질 당시의 교회들이 신학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것도 아니
요, 그것을 판단할만한 지식이 우리에게 있었던 것도 아니다. 서방의 교회전통이 일방적으
로 우리에게 옮겨졌을 따름이다. 얼마든지 하나의 ‘한국기독교회’가 탄생할 수 있었으나
이미 여러 갈래로 나누어진 미국 영국 독일 호주 등지의 교회들이 파송한 선교사들은 자신
의 전통을 벗어날 수 없었고, 결국 한국교회는 이유도 알지 못한 채 루터나 칼뱅, 웨슬리
가 활동한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루터교, 장로교, 감리교 등의 달라져 있던 전통의 교
회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러나 피선교국으로서 어쩔 수 없이 분리된 교회로 시작된 한국교회였지만, 선교사들이
이 사실을 무조건 그대로 수용하려 하지는 않았다. 초기 선교사들은 한국교회가 가능한 한
교파를 초월한 하나의 교회로 나아가기를 기대했다.
■ 한국교회의 초기 연합운동
선교초기의 한국교회는 장로교 4개 교단(미국 남북 장로교, 캐나다, 호주 장로교)과 미 남
북 감리교회로 시작했지만 각기 다른 장로교단이 하나의 공의회를 형성하였고, 감리교회도
하나의 선교부를 이루었다. 연합기관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예수교 성교회(현재의 대한기
독교서회)”가 1890년 감리교와 장로교 선교사에 의해 조직되어 평신도 서적과 찬송가를 출
판했고, 1895년에는 성서공회가 장로교와 감리교 선교사들에 의해 조직되어 성경 출판을 위
해 연합으로 활동했다. 그러다가 1905년 9월 15일에는 장로교와 감리교 여섯 선교부 관계
자 150명의 선교사들이 모여 ‘재한 복음주의 선교부 통합 공의회’를 결성했다.
1910년 105인 사건으로 교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은 1911년 제7차 회의
에서 ‘통합공의회’를 ‘연합협의회’로 명칭을 바꾸어 재조직하면서 “연합협의회의 목적
은 분열보다 연합하여 더 좋은 사업을 하고자 하는데 있으며, 그 권한은 자문에만 있고, 동
일한 기존 치리기구, 동일한 예배에 대한 권한은 없다”고 못박아 목적과 권한을 후퇴시켰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16년 선교사 연합협의회 총회는 한국교파 지도자들로 하여금 연합협의
회에 대하여 발언권을 갖게 하기 위하여 연구위원회를 조직하였고, 평양에서 ‘장감연합협
의’를 조직하기로 합의, 1918년 3월 26일 서울 YMCA 회관에서 ‘조선예수교 장감연합협의
회’ 창립총회를 가졌다. 이 총회는 미국북감리회 10명, 남감리회 10명, 미국북장로교 12
명, 남장로교 4명, 캐나다장로교 3명, 호주장로교 1명 등 모두 40명의 대표로 구성되었다.
이는 선교사 위주가 아닌 본토인 신자 위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시작부터 공존을 모색했
던 것을 볼 수 있다. 장감 두 교회는 신경이나 예배모범 및 치리권은 서로 간섭하지 않도
록 규정하였고, 외국 선교지역의 경계 분할에 합의, 장로교는 만주, 감리교는 시베리아 지
방을 맡아 선교하기로 합의했다.
■ 일제의 침략, 교회 분열의 새로운 씨앗
그러나 일제의 계속된 교회 간섭으로 조선예수교연합공의회는 1936년 9월 해산되었고, 1938
년 5월 ‘조선기독교연합공의회’라는 새로운 이름의 조직이 등장하게 된다. 국내의 일본
인 교회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성실한 황국신민으로서 보국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목표
를 건 이 연합회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친일단체였다. 1938년 10월 YMCA, YWCA가 해산되고
이후에 지방색, 신학적 대립, 아빙돈 주석사건, 이승만과 안창호 계의 시비, 신사참배 여
부 등 교회를 분열시킬 명분을 안겨주는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한국교회의 분
열은 일제가 사용한 분열정책과 계략에 의한 것이라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해방 이후 한국교회는 본격적인 분열의 길로 빠져든다. 최초의 사건이 장로교 고신의 태동
이었고, 이것 역시 일제침략의 산물이었다. 한경직 목사가 해방 직후에 템플턴상 수상시에
보였던 참회의 고백을 했더라면, 고신교단은 생겨나지 않았을 개연성이 크다.
평양신학교 폐교이후 세워진 조선신학교가 1947년 김재준 교수의 신학적 입장에 항의하는
문제로 파동을 겪자, 1948년 장로회신학교를 남산에 세우고 49년에 같은 총회의 직영신학교
로 인준함으로써 조선신학교파(기장)와 장로회신학교파(예장)로 갈라지게 된다.
고신과 기장이 떼밀려 나가고 남은 장로교가 다시 승동측과 연동측으로 분열된 것을 두고
흔히 교회 정치와 관련된 것으로 설명한다. WCC에의 가담여부가 분열의 원인이라는 것이 밖
으로 알려진 분열의 이유이다. 그러나 ‘총신 90년사’를 쓴 김요나는 승동측(합동)과 연동
측 (통합)의 분열의 이유를 네 가지로 들고 있고, 그 중에 WCC와의 관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적인 계략을 동원하여 교권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의 결과 일어난 분열이라
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70년대 이후에 진행된 끊임없는 교회의 분열은 아예 그 누구도 분열의 이유를 정당화하려하
지 않는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나타난 한국교회의 침체 원인으로 교회의 분열이 가장 중
요한 이유로 지적되고 있다.
■ 한국 교회 연합운동과 고신
고신은 사실 출발부터 연합운동에 적극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적극적일 수 없었
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한 자기진단이 될 것이다. 한국교회가 끝내 신사참배의 죄악을 인정
하지 않고 공적회개를 하지 않았다는 점 때문에 다른 교단과의 관계를 썩 달가워하지 않은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역사적 한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1960년에 승동측과 합동
하였다가 2년여만에 다시 환원하게 되면서부터 타 교단에 대한 불신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
었다. 실컷 우리가 준비한 ‘새찬송가’를 합동의 기념물로 승동측에 넘겨주어 새찬송가가
마치 합동측의 것인 것처럼 인식되어 알만한 사람들의 속을 아프게 하였다.
이런 경험을 한 우리 교단은 1966년 다른 교단보다 빠른 시점에 목사 정년을 70세로 하는
진보성을 보이기도 했지만, 1971년 제21회 총회는 ‘강단교류 문제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칼
빈주의 보수 교단으로 제한하기로’ 하면서 ‘본 교단 정신에 맞지 않는 교단을 거부키로’
라는 상당히 부정적인 언어를 덧붙여 연합보다는 교단정신 유지에 대한 의지를 분명히 했
다. 이런 결정은 타 교단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하였고, 따라서 교회연합 정신을 퇴
색시켜 90년대 초반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교회가 영남지역에 자리잡고 있어 서울 중심의 연합운동에 약할 수밖에 없
었다. 이 때문에 서울의 몇몇 목회자들에 의해 겨우 유지되던 다양한 교회연합운동에의 참
여가 1993년 총회회관이 서울에 세워지면서 눈에 띄게 달라지기 시작했다.
우선 타교단과의 접촉점이 생겨남으로써 교류가 활발해졌다. 1976년에 민영완 목사가 총회
총무를 맡으므로 총무제도가 생겨나기는 하였으나 사무실 하나 제대로 갖지 못했다. 그러
나 1990년대 들어서면서 심군식 목사가 전담총무로 들어섰고 회관이 건립되면서 비로소 정
상적인 활동이 가능하게 되었다.
거기에 언론으로서의 기독교보와 월간 고신이 회관을 중심하여 중앙무대에서 본격적인 활동
을 하게 되면서 교단의 인지도를 높여갈 수 있게 되었으며, 교육위원회가 발행하는 공과를
비롯한 교육자료는 다른 여러 교단에 좋은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 고신은 한기총, 한장연(한국장로교연합회) 등에서 상당히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특히 유사종교문제에 있어서 총회 내에 유사종교문제연구소를 설치하는 등 적극적으
로 대처한 공을 인정받아 오성환 목사와 이용호 목사가 상당한 역할을 감당해 왔다. 근년
들어 단군상 문제가 불거지면서 ‘한기총’ 그룹에서 고신은 더욱 중요한 위치를 점하게 되
었다. 최해일 목사가 사상 처음으로 한기총 대표회장에 출마하고, 여러 교회들이 회장에 당
선되면 활동을 후원하기로 합의하면서 연합운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감당하려 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다.
■ 여전히 주류에서 멀리 있는 고신
그러나 한편 우리는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주류 세력으로부터는 여전히 먼 거리에 있다는 사
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지금은 그 영향력이 많이 소멸되었지만 오랫동안 한국교회를
대표해 온 자부심을 갖고 있는 KNCC에 의해 주도되었다. 기독교방송, 기독교서회, 대한성서
공회 등 한국교회의 대표적 기구들은 사실상 KNCC 가맹교단들이 운영의 주체가 되어있다.
물론 우리가 기독교방송에 이사를 파송하기도 하고, 대한성서공회가 ‘개역개정판 성경’
과 ‘표준새번역’을 발간할 당시 우리 교회에서 파송한 오병세 박사를 위원장으로 세우기
도 했지만, 여전히 KNCC 비가맹 교단인 고신은 소위 한국교회의 주류적 흐름과 상관이 없다
고 말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최근에 교계가 이런 교회들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석원태 목사와 지역
중심의 일부 교단이 ‘대한성경공회’를 조직하고 성경번역사업을 하고 있는데, 여기에 우
리 성경학자들이 다수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다분히 상업적인 이윤을 추구하는 인사들과
이해관계가 맞아 지속되는 느낌을 받는 이러한 성경편찬 작업이 향후 한국교회의 연합과 일
치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는 심각하게 고려하여야 할 것이다.
■ 연합운동에의 개별적 기여
우리는 여기서 교단의 역할이 미미하기 짝이 없을 때, 교단소속 개인들이 연합운동에 발군
의 영향을 끼친 경우들은 여럿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5년 한국교회가 100주
년을 맞았을 때 각종 행사들이 줄을 이었다. 그 때 100주년 기념사업회의 사무총장을 김경
래 장로가 맡았다. 물론 그것은 그가 가진 개인적인 명성에 근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가
순수성을 강조한 고신 사람이었다는 점이 통합 합동 감리교 등의 대형교단이 받아들일 수
있는 요소로 작용했을 것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목회자들이 중심이 된 교단간의 연합 못지않게 한국교회를 위하여 중요한 것이 평신도들의
연합이라고 한다면, 이 점에서도 우리 교단은 몇 몇 개인들을 통하여 실제적인 역할을 감당
했다고 할 수 있다. 한국 시민운동의 대부격인 손봉호 교수는 철저하게 고신임을 자부하고
있는 인물이다. 한국기독교회사를 정리하고 민족통일에 대한 건전한 기독교적인 이론을 집
성해 가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만열 교수 역시 자타가 공인하는 고신인이다.
SFC의 활발한 활동 역시 교회의 젊은이들에게 연합운동에 대한 의식을 고취시켰고, 고신의
연합운동에 대한 이미지 제고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80년 이후 학원 SFC운동이 활발해지면
서 SFC는 다양한 교회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참여하는 선교단체의 경향을 띄게 되었고, 자연
스럽게 생각의 폭을 넓힐 수 있게 되었다.
■ 연합운동 저변확대의 시대
이런 상황에서 1996년 이후 동시 다발적으로 한국교회 각 교단 내부로부터 교회갱신 운동
이 일어났다. 98년 11월 26일 14개 교단 목회자들이 모인 ‘한국기독교목회자 협의회’가
서울 ‘사랑의 교회’에서 창립대회를 가지고 새로운 형태의 연합운동을 펼치기 시작하였
다. 이것은 평신도 운동이 아니기 때문에 무분별한 연합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는
운동이요, 그렇다고 교단의 정치적 지위를 가진 소위 기득권 층의 모임도 아니어서 명분이
나 자리를 노릴 일도 없었다. 성경적인 건강한 교회상 정립을 위해 노력하는 건전한 목회자
들이 뜻을 함께 한 운동으로 나아갈 조건을 갖춘 셈이다. 2001년 11월 1일 한목협을 통하
여 22개 교단장 연합기구가 창설된 것은 한국교회 연합운동의 새로운 장을 열어 가는 징조
로 보기에 충분할 것이다. 현재 교단장 연합회는 교단장들 간의 잦은 만남을 통하여 지난 6
월부터 시작된 각 교단 총회에 ‘한국교회 대표기구 단일화’에 대한 헌의안을 제출하는
등 새로운 연합운동에 대한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고 있다.
이 운동에 고신의 젊은 목회자들이 많이 참여하고 있는 것 역시 한국교회 연합을 위한 고신
의 새로운 역할을 기대하게 하는 점이다. 연합운동이 항상 고위 지도자들의 것으로 여겨졌
으나, 이제 본격적으로 밑으로부터의 연합운동이 가능한 시점으로 나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현상은 각 지역에서 고신의 목회자들이 지역교회 연합운동, 연합사업에 활발하게 동
참하고 있는 데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만약 고신의 신학자들이 좀 더 적극
적으로 ‘신학을 통한 교회연합과 일치 운동의 길’을 모색해낸다면, 그야말로 21세기는 고
신이 열어 가는 시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고려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