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원 폐쇄 공지문 - 2001년, 부공1
이 프래카드는 2001년, 백순희 사모님이 지도하던 부산공회1에서, 서영호 목사님을 지도자로 밀고 있던 부산공회2 목회자들의 양성원 진입을 막는 공지문이다.

2001년경, 부산공회1은 양성원 건물을 장악했고 대로변의 현관을 폐쇄하고 건물 위에 대형 프래카드를 붙이고 또 출입구에 이 프래카드를 별도로 걸었다. 4미터 X 1.5미터 크기여서 현관을 가득 채웠고, 불신자들이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서부교회 대문을 마주 보는 곳이다.
당시 서부교회 행정실에서 이 프래카드를 몰래 수거하여 본 연구소에 역사 자료와 흔적으로 제공했다.
역사적으로, 1989년 백영희 목사님이 돌아 가셨고, 사후 첫 목회자는 이재순, 그리고 1991년 1월에 사후 2대로 서영호 목사가 부임한다. 이 때까지 서부교회 4층의 백명희 부장님이 서부교회 전체를 장악했고 부산공회 전체를 언니가 되는 백순희 사모님을 통해 장악을 하고 있었다.
원래 서영호 목사님은 타 교파 성향이 강하여 서부교회 내에서는 후임이 될 수 없었으나 4층 측은 너무 쉽게 보고 초청을 했다. 그리고 2년이 되던 1992년 11월 시무 신임투표에서 해임을 시켰다. 학자풍의 점잖았던 서 목사님은 해임이 되면 갈 줄 알았다. 그러나 이 때부터 서 목사님은 투쟁에 나선다. 서부교회 2층 교인들이 호응했고 부산공회 목회자 중에서는 김 씨 성의 4명 목사님들이 파벌을 형성하고 무조건 서 목사님을 위해 결사 항쟁에 나섰다.
1995년, 부산공회 지도부는 김 씨 목사 4명과 서영호 목사님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양성원의 원장과 교수 및 집회 강사직을 차례로 제명해 나갔다. 서영호 측 5명의 반발은 늘 봉쇄되었다. 그러나 부산공회 지도부가 신규 목사 임명을 전면 금지 시키자 서영호 측을 탄압할 때 앞장 선 소장파들이 안수 관철이라는 이권을 위해 서영호 측 5명과 힘을 합했다. 순식간에 공회 전체는 부산공회 지도부가 소수로 전락했다. 그렇게 되자 서영호 측을 제거하는데 앞장 선 지도부 중에 백순희 측근인 이재순 목사님 외에는 전부 서영호 목사님 쪽이 되어 버린다. 이 현상을 두고 연구소는 원래 백순희 사모님이 지도자로 있던 부산공회 지도부를 부공1, 탄압 받던 서영호 목사님 측을 부공2로 약칭했다. 그들은 서로 자신들만 '총공회'라고 하나 구별을 해야 하기 때문에 형성 순서를 따라 1과 2로 붙이는 것이 연구소의 객관성이다.
2001년에 접어 들자, 부공2는 부공1이 장악했던 양성원 건물의 접수를 위해 교인을 동원했다. 부공1은 서부교회 4층을 지도하던 백명희 사모님과 공회적으로 활동하던 백순희 사모님이 가정사 때문에 분열 되어 부공1의 세력이 약화가 되었으므로 서부교회 정문 앞에 있던 양성원 건물을 그냥 밀고 들어 가면 될 줄 알았다. 부공1은 비록 소수였지만 삼별초처럼 저항했다. 전국에 있는 교인들까지 다 불러 들여 몇백 명이 건물 안에서 필사적으로 저항했다. 경찰 진압대가 출동을 했다. 숫자는 적지만 죽기를 각오한 부공1을 진압하지 못하게 되자 부공2는 물러 섰다.
그 대신 매월 교역자회를 할 때마다 양성원의 현관 앞에 대로변에서 기도회를 하고 부공2가 마련한 별도 장소로 옮겼다. 이들이 언제 다시 진입하게 될 줄 모르기 때문에 부공1은 그들에게 이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세월은 흘렀고 2019년 5월에 부공1과 부공2는 뒤로 몰래 만나 대구 기도원의 운영권을 의논했다. 부공2는 돈을 대고 부공1은 독점하던 관리권을 일부 양보하는 흥정이었다. 그런데 지난 수십 년간 남북회담이 그러 했듯이 막판에 또 깨졌다. 서로가 약속 위반이라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항상 협상은 재개 된다. 거짓이 사기로 드러 나고, 협상이 야합으로 늘 돌고 돌았다. 부공1 부공2, 그 이름에 교회나 목회자나 교인이 줄을 서고 소속을 두고 있다면 동참죄가 되고도 남을 세월이다.
연구소는 고소금지원칙에 따라 방어조차 하지 않을 때가 있다. 대신, 최소한 전체 공회원들에게 잊어서 아니 될 자료와 노선의 역사를 알리고 있다. 과거 때문이 아니라 현재와 이후에 이런 짓을 반복하지 말자는 것이다.